[2005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6~14일)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국내외 영화인과 관객 등 5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일 오후 부산 해운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개막식이 열렸다.
10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73개국 307편의 영화가 초청됐다. 이 가운데 61편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전세계에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월드프리미어이며, 인터내셔널프리미어(자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 첫 상영)와 아시아프리미어도 각각 28편과 87편에 이른다.
개막작은 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쓰리타임즈>다. 1911년, 1966년, 2005년 세 시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지난 5월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120분 버전으로 상영됐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는 전면적인 재편집을 통해 완성도를 높인 135분짜리 최종본이 처음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폐막작으로는 한국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 원정기>가 선정됐다.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진 채 묵묵히 자신의 인생에 출실한 변방 사람들에 관한 휴먼멜로드라마로, <태양은 없다>와 <무사>의 조감독을 지낸 황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감독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한겨레
[1992년] 안기부,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적발 발표
대남공작총책 이선실 등 '남한조선로동당' 가담자 95명을 적발, 이 중 조선로동당총책 황인오 등 62명을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
구속된 62명 가운데 전 민중당 공동대표 김낙중과 정책위원장 장기표 포함
[1981년]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Anwar el-Sadat, 1918~1981) 피살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G.A.나세르와 함께 자유장교단을 결성하고, 1952년 이집트혁명 때에는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51~1957년에 국무장관, 1957~1961년 국민연합(아랍사회주의자연합)의 서기장, 1961년에 국민의회 의장을 거쳐 1962~1964년 대통령평의회의원을 지낸 후 1964년 부통령 겸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70년 9월 대통령 나세르가 병으로 사망하자 그뒤를 이어 10월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3년 제4차 아랍이스라엘분쟁 때에는 직접 이집트군을 지휘하여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는 현실주의적인 온건노선을 취하여,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중동평화의 길을 열었다. 이로 인하여 1978년 이스라엘의 수상 베긴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이어 1979년 3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렇듯 중동평화의 주역을 담당하고 있던 그는 1981년 10월 6일 카이로 근교 나스루에서 대(對) 이스라엘 10월전쟁 8주년 기념식장에 참석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저서에 《나일의 반란 R volte sur le Nil》(1957)이 있다.
[1982년] 아시아-태평양우편연합(APPU) 집행이사회 개막
아시아-태평양 우편연합 [Asian Pacific Postal Union, APPU]
아시아 및 태평양 국가의 우편업무 관계의 확장·촉진·개선을 위해 우편업무의 협력 증진을 도모하고자 설립한 국제기구.
지역연합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한 만국우편조약에 의거하여 1961년 1월 23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을 비롯한 8개 국이 모여 창립총회를 갖고, 1962년 4월 1일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회장국은 필리핀이며 본부는 마닐라에 있다. 회원국은 한국·필리핀·타이·일본·오스트레일리아·라오스·뉴질랜드·인도·중국·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파키스탄·말레이시아·파푸아뉴기니·스리랑카·싱가포르·몰디브·네팔 등이다.
회원국 상호간의 기술협력이나 우편요금 인하, 우편업무의 발전과 연구를 위하여 직원의 상호교환 또는 파견근무도 실시하고 있다. 기구의 운영을 위하여 총회·집행이사회·중앙사무국을 두고 있으며, 각 회원국 산하의 전직원에 대한 자질향상교육·훈련을 위하여 아시아 태평양 우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naver
[1976년] 중국 4인방 체포
← 1976년 10월 25일, 광둥(廣東)에서 4인방을 비판하는 시위가 열렸다.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 등이 총검에 찔리는 그림의 플래카드.
1976년 10월 12일 영국의 유력지 ‘데일리 텔리그라프’지가 ‘모택동 미망인 체포되다’라는 기사를 북경 주재 특파원의 긴급 타전으로 전 세계에 알렸다.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모택동 미망인 강청 여사, 왕홍문 부주석, 장춘교 부총리, 요문원 공산당 정치국원 4인의 중국 급진파 지도자가 쿠데타를 계획하다가 10월 6일 체포되었다”고 1면 머릿기사로 보도했다.
이들은 1976년 4월의 제1차 천안문 사건 이후 급진파 4인방과 당 제1부주석 겸 수상 화국봉, 당 부주석 섭검영 등과의 대립이 심각했는데 모택동 사후 4인방은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강청 등이 '강청 당주석, 장춘교 수상'계획을 준비하고 있던 중 화국봉과 섭검영 등이 이를 사전에 알고 이들을 체포했다. 이날 8시30분 경 섭검영이 보낸 장사요에 의해 체포된 강청은 체포순간 자택에서 수입 비디오를 보고 있다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다른 3명은 화국봉의 초청에 의해 중남해 회인당에 들어섰다가 모두 체포됐다. 강청이 체포되기 1시간 전이었다.
체포된 4인방은 각각 중남해 지하실에 수용되었으며 중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 체포극은 불과 1시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9월 9일 모택동 사후 28일 만의 일이었다. 4인방이란 명칭은 체포 후에 당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면서 널리 알려졌으나 그때까지는 신문 등에서도 '상해방'으로 일컫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의 근거 세력이 주로 상해에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조선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1967년의 ‘6일전쟁’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군사적 승리와 거대한 영토 획득으로 종결되었을 때 그것이 정말 종전으로 이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패배한 아랍인들은 굴욕감과 복수심에 1973년의 10월 전쟁을 준비했다. 6일전쟁으로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빼앗겨 그들의 심장부를 이스라엘의 날카로운 칼날 앞에 드러내놓았고, 요르단은 이슬람 성지를 유태인 지배하에 넘겨주었으며, 이집트는 수에즈운하에서 큰 위협을 받았다.
그러던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경,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 양전선에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제히 이스라엘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날은 유대교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국경일인 ‘정결 의식의 날’이었다. 다시말해, 이스라엘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 7일, 이스라엘은 예비역을 대동원해 반격태세를 갖췄다. 이어 9일에는 다마스카스와 레바논을 폭격, 시리아전선에서의 제공권(制空權)을 장악했고, 골란고원의 전차전(戰車戰)에서도 시리아군에 압도적인 공격을 전개했다. 이에 이집트ㆍ시리아를 지지하는 아랍 8개국까지 참전했지만, 전세는 이미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전투가 계속되자 16일, 아랍측이 정전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자 아랍측이 17일 서방제국에 대한 석유전략을 발표함으로써 오일쇼크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20일에는 이스라엘 지원국에 대한 석유수출금지ㆍ산유랑 20% 감소ㆍ유가 인상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황금의 물’ 석유가 ‘공포의 물’로 변했다. 이에 22일, 유엔안보리에서 정전결의안이 채택되었고, 정전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되었다. 결국, 사실상의 정전은 정전협정이 합의에 도달한 그해 11월에나 이루어졌다.
중동전쟁으로 인해 이집트와 시리아 양국은 총2천3백대의 전차를 상실했고 이스라엘은 2백대의 전차만 상실했다. 항공기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475대를 상실한 반면 이스라엘은 115대를 상실했다. 병력손실도 아랍측이 1만6천명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은 2천5백명에 그쳤다. /조선
[1972년] 서울 인구 600만 돌파, 세계 6위
서울특별시의 인구는 1960년 244만 5402명(인구밀도 9,112명/㎢)의 인구가 1963년 대대적인 시역확장과 함께 325만 4630명으로 늘어나 300만 명 이상의 도시가 되었고, 1970년 543만 3198명, 1976년 725만 명, 1983년 920만 명, 그리고 1988년 1028만 6503명으로 인구 1000만 명의 거대도시로 변모하였다.
1992년말에는 1096만 9862명(인구밀도 1만 8121명/㎢)으로 광복 당시 90만 1371명(인구밀도 6,627명/㎢)에 비해 1000만 명 이상 늘었고, 1960년 이후 전국인구 증가분의 44%를 서울이 차지하였다. 전국인구에 대한 비율은 1960년 약 10% 수준에서 1970년 17.6%, 1980년 22.3%, 1990년 24.4%, 그리고 1992년 25.1%로 최고를 이루었다. 면적은 전국의 0.61%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전국 인구의 25%를 차지하여 4명 중 1명이 서울사람인 셈이었다. /naver
[1956년] 한미우호통상조약 체결 합의
1956년 11월 28일 서울에서 서명하고, 1957년 10월 7일에 비준서가 교환된 한국과 미국 간의 조약.
전문(前文)과 25조로 구성되었고, 그 밖에 이 조약과 불가분의 일부로 인정되는 의정서가 있다. 이 조약은 양국간에 전통적으로 존재하는 평화 및 우호의 관계를 강화하고, 양국 국민 간의 긴밀한 경제적 ․문화적 관계를 촉진하며, 상호간 유익한 투자를 촉진하고 상호간 유리한 통상관계를 조장하는 데 목적이 있다.
양국간의 통상 ․거주 ․항해 등에 관하여 서로 최혜국민(最惠國民) 대우 및 내국민 대우를 부여하기로 규정하였다. 다만 최혜국민 대우규정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의거하여 부여되는 특별편익(特別便益)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1955년] 조선실록 간행 착수
각 사고의 모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이장하였고, 적상산 사고본은 장서각으로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장서각 소장의 적상산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縮刷版) 888책 한장본(漢裝本)으로 30절(折)을 영인(影印)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naver
[1952년] 6․25전쟁 중 백마고지 전투 발발
← 6․25전쟁 당시 포로가 된 중국군
1952년 10월 6일 6․25전쟁 중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일명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로, 이곳을 탈환하면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 간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해 총병력 4만 4,056명이었으며, 각종 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국군은 이에 대응해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병력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9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약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국군의 승리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 보병과 포병 간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를 통한 충분한 휴식에 있었다./브리태니커
[1950년] 나비연구가 석주명씨 별세
석주명(石宙明)은 오로지 나비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한 줄의 논문을 쓰기 위해 3만마리의 나비를 만지고, 6․25 때는 15만마리의 나비를 지키기 위해 피란도 하지 않고 남산 국립과학박물관을 지켰다.
생전에 그가 정리한 한국산 나비는 모두 246종. 53년이 지난 현재까지 밝혀진 나비가 모두 251종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연구성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평생을 산과 들에서 보내며 75만 개체의 나비를 직접 채집․조사․분류해 한국 나비학의 초석을 세웠다.
그의 공적은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 통용되는 유리창나비의 아종명(亞種名)에 그의 성을 딴 SEUK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 제주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한 사람이기도 하다. 2년간 머물렀다는 인연으로 10권의 저서와 30편의 논문을 펴내고 유채꽃을 일본에서 제주도로 들여온 것도 석주명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 1950년 10월 6일, 서울 충무로4가 개천가에서 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술을 마시던 청년들이 쏜 총에 맞고 42세로 요절한 것이다./조선
[1931년] 영화감독 이만희(李晩熙) 출생
← 이만희
1931년 10월 6일 태어남 / 1975년 4월 13일 죽음
"아저씨 난 고향이 없어요. 난 어디서 태어난 줄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 - 이만희, <삼포 가는 길>
이만희는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역사를 대표하는 한국의 영화감독이다. 1961년 <주마등>으로 감독에 데뷔해 한국 전쟁영화의 대표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전쟁영화의 주조를 이루던 반공논리와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강한 휴머니즘과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뛰어난 스타일이 살아 있는 명작이다. 이어서 <흑맥>(1965)․<물레방아>(1966) 등 문예성이 강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해 감독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는 전후 사회적 부흥기의 떠들썩함에 도취되지 않고 줄곧 밑바닥 인생들에 대한 관찰과 공감을 유지했다. 수감 8년만에 3일간의 자유를 맛보게 된 여죄수의 이야기를 그린 <만추>(1966)나 마음속의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세 떠돌이를 그린 <삼포 가는 길>(1974)은 이만희의 개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브리태니커
[1927년] 첫 유성영화 '재즈 싱어' 개봉
← 미국 워너브러더스 극장에 부착된 ‘재즈 싱어’ 영화 간판.
기다려! 기다려! 넌 아무것도 듣지 못했잖아!(Wait a minute! Wait a minute! You aint heard nothin yet!) 1927년 10월 6일, 주인공 알 졸슨의 목소리가 뉴욕 워너 브러더스 극장에 울려퍼졌을 때 관객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영화에서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영화사에 길이 기록될,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Jazz Singer)’의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관객들은 비록 두 장면에서만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경이(驚異)였다. 사실 영화에 소리가 등장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해 전에 워너사가 바이터폰(vitaphone)이라는 장치를 이용, 영상에 영화음악을 합성한 ‘돈 주앙’이라는 영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배우들의 육성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
결국 영예는 ‘재즈 싱어’로 넘어갔고, 워너사는 35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흥행수입을 거둬들여 파산 직전에서 기사회생, 메이저 영화사로 발돋움했다. 영상과 음악과 목소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유성영화 자리는 이듬해 제작된 ‘뉴욕의 등불’이 차지했다.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는 1935.10. 4에 단성사에서 개봉된 〈춘향전〉
[1910년] 실업가 박두병(朴斗秉) 출생
1910. 10. 6 서울~1973. 8. 4 서울.
호는 연강(蓮崗). 동대문심상소학교(東大門尋常小學校)와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1929년 경성고등상업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상학(商學)을 전공했다. 1932년 대학 졸업 후 조선은행(지금의 한국 은행)에 입사하여 5년간 근무했다.
1936년 그의 부친인 박승직(朴承稷)이 경영하던 박승직상점(주)의 상무이사로 취임하여 상점관리수단으로 출근부제도와 보너스 제도를 도입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8․15해방 이후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소화기린 맥주회사의 지배인을 거쳐 사장에 취임하고 동양맥주(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후 1953년 (주)박승직상점을 확장․발전시켜 상호를 변경한 두산산업, 1960년 7월 동산토건, 1966년 5월 두산(주), 1967년 5월 두산기계, 1970년 한국병유리(주) 등을 설립하여 두산 그룹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66년에는 언론사업의 일환으로 합동통신사를 인수·경영하여 언론의 발전에도 공헌했으며, 1967~70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냈다. 한국 맥주산업의 발달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금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브리태니커
[1889년] 물랭 루주 개장
1889년 10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뮤직 홀과 댄스 홀인 물랭 루주가 개장되었다. 물랭 루주는 '붉은 풍차'라는 뜻으로 1889년 10월 6일 파리 세계박람회가 열렸을 때 댄스 홀로 문을 열었으며, 매혹적인 프렌치 캉캉 춤으로 인기를 끌었다. 1914년 화재로 전부 타버린 것을 1918년 뮤직 홀로 개축했으며 댄스 홀은 별도로 그 옆에 세워졌다. 뮤직 홀은 한때 인기 가수가 중심이 된 황금시대를 맞았는데, 토키 영화의 발달에 따라 현재는 영화관으로 탈바꿈했다. 물랭 루주가 명성을 날리던 당시의 분위기는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 <물랭 루주에서 At Moulin Rouge>에 잘 나타나 있다. 파리의 대표적인 환락가에서 캉캉 춤을 추는 무희들의 화려한 의상과 번쩍 들어올린 다리 등 환락적인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현재 물랭 루주로 불리고 있는 것은 댄스 홀 ‘발 뒤 물랭 루주’이며, 인기 연예인의 쇼가 공연된다./브리태니커
[1889년]중국공산당 공동 설립자, 사상가 리다자오(李大釗 이대소) 출생
← 리다자오 탄생100주년 기념우표
1888. 10. 6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1927. 4. 28 베이징.
자 슈창[守常]. 필명 밍밍[明明]. 허베이성[河北省] 출생. 텐진[天津]의 북양학당(北洋學堂)과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신종보(晨鐘報)》의 편집자로 활동하는 등, 신문화운동에 참가하여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반동성(反動性)을 비판하였다. 1918년 베이징[北京]대학 문과대학 교수 겸 도서관 주임이 되어 사회운동사를 강의하는 한편, 《신청년》 《매주(每週)평론》 등을 통하여 러시아혁명을 높이 평가한 《볼셰비즘의 승리》에 이어, 중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나의 마르크스주의관》을 발표하는 등, 중국공산당 창당의 사상적 준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0년 베이징대학 내에 마르크스주의연구회를 창설, 이듬해의 5 ․4운동 후 신문화운동 지도자가 되었고,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또 1922년에는 국민당에 입당, 그 개편과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추진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에서의 제5회 코민테른 대회에 참석 후, 1925년 쑨원[孫文]이 죽자 국민당 및 공산당 지도자로 활약, 1925년 수도(首都)혁명, 1926년 3․18사건 등 국민운동을 지도하다가, 1927년 4월 장쭤린[張作霖]의 러시아 대사관 수색사건 때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저서에 《리다자오선집[李大釗選集]》과 많은 논문이 있다.
[1887년] 멕시코 혁명 시대의 뛰어난 소설가 구스만(Martin Luis Guzman) 출생
1887. 10. 6 멕시코 치와와~1976. 12. 22 멕시코.
멕시코시에 있는 국립자유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멕시코혁명에 합류하여 판초 비야의 혁명군에서 대령으로 복무했다. 1914~34년 마드리드와 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했는데, 뉴욕에서는 〈그라피코 El grafico〉지의 편집인으로 일했다. 혁명의 경험을 회고록 〈독수리와 뱀>(1928)으로 이름을 남겼는데, 이 회고록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혁명을 이룩한 인물들을 그려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소설 〈지도자의 그늘〉(1929)로도 유명한데, 이 소설에서는 192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부패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밖에 주요작품으로 〈판초 비야 회고록〉(1940)․〈청년 미나, 나바라의 영웅> 등이 있다.
[1887년] 스위스 태생 프랑스의 건축가, 도시계획가 르 코르뷔지에 출생
본명은 CharlesÉdouard Jeanneret.
1887. 10. 6 스위스 라쇼드퐁~1965. 8. 27 프랑스 카마르탱.
스위스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펠레와 베렌스의 건축사무소에서 얼마 동안 일하였으나 20대 전반은 주로 유럽과 중근동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도시건축을 연구하였다.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 이후로, 잡지 《에스프리 누보:LEsprit Nouveau》와 많은 저서, 도시계획과 실제 작품을 통해서 마침내 국제적인 합리주의 건축사상의 기수가 되었다.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 하는 그의 유명한 아포리즘으로 상징되는 신선한 기계미학이 이 시기의 모든 제작에 일관되어 있고, 이와 같은 건축사상은 《건축을 향하여》 《도시계획:Urbanisme》 등, 이 시기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같은 사상이 구체적인 도시의 스케일로 나타난 것이 《현대도시》(1922)와 《플랑 부아쟁》(1995) 등이다.
△ 롱샹 교회 / 이 자그마한 교회는 1953년에 완공됐으며, 르 코르뷔지에 후기 건축의 특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실제 작업은 주택 중심으로, 페사크 주택단지(1926), 슈투트가르트 주택박람회의 집(1927), 가르셰의 주택(왼쪽 사진 1927), 그리고 필로티 위에 떠 있는 명확한 원초적 형태라고 하는 푸아시의 사보이관(1930) 등을 완성하였다. 1927년 제네바 국제연맹 회관의 현상설계에서 그의 응모작이 최후 단계에서 심사원단에게 거부된 것을 계기로, 근대건축가의 국제적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듬해 근대건축국제회의(Congr s Internationaux dArchitecture Moderne:CIAM)를 주재하였다. 1930년대에는 파리 구세군회관, 파리의 스위스학생회관(1932), 파리교외 주말의 집(1935), 그리고 광대한 브리즈솔레유(차일)가 있는 브라질의 문교보건부(1935) 외에는 경제불황과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실제 작품은 적으며, 그래서 근대건축국제회의의 이념에 바탕을 둔 도시계획의 제안에 몰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제연합의 회의 사무시설을 위한 일(1946~1947)을 맡았으나 중도에서 물러나고, 이어 마르세유의 《유니테》라는 거대한 아파트(1952)를 설계하였다. 모뒤롤에 의한 이 건축은 그의 오랫동안의 도시주거 연구의 집대성이었다. 이어 자유분방한 롱샹의 교회당(1955), 리옹 근교의 라툴레트수도원(1957), 아마다바트의 미술관, 그리고 만년에 가장 정성을 기울인 인도 찬디가르의 신도시 건설이 있으며, 그곳에 최고재판소 등의 청사건축을 남겼다. 1920년대에 시작되는 근대합리주의 건축의 국제적 양식 속에 서양건축의 기조인 고전주의 미학을 조화시켜, 철근콘크리트 건축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점에서 그의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 제자로 김중업(金重業)이 있다.
[1875년] 독립운동가 김혁(金爀) 선생 출생
← 독립운동가 김혁 선생
1875(고종15) ∼ 1936)
1875년 10월 6일 독립운동가 오석 김혁 선생이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육군 참위로 임관, 정위(현 대위급)까지 진급했으나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용인에서 만세시위 운동을 주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1920년 8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북로군정서에 가담, 청산리 대첩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선생은 1925년 북만주지역 최대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1928년 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1929년 2월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중병으로 가출옥, 1939년 64세를 일기로 숨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조선
[1869년] 스웨덴의 서정시인 베리만(Bo Hjalmar Bergman, 1869~1967) 출생
1869. 10. 6, Stockholm – 1967. 11. 17, Stockholm
초기의 염세적이고 운명론적 인생관은 당대 정치적․사회적 위기의 압력을 받아 공격적인 인도주의로 바뀌었다.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는 20세기 스웨덴 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웨덴 우체국 직원으로 있을 당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1933년에 퇴직했다. 첫 시집 〈꼭두각시 Marionetterna〉(1903)에서는 우울한 수동성을 표현하고 있으나 이후의 시들, 특히 마지막 3권의 시집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Trots allt〉(1931)․〈옛 신들 Gamla gudar〉(1939)․〈왕국 Riket〉(1944)에서는 유럽의 정치 발전에 대한 공격이 점차 강해진다. 그밖에 산문 작품으로 5권의 단편소설, 5편의 장편소설, 5권의 모노그래프 등과, 자전적 단편(斷片) 등이 있다.
[1866년] 캐나다 태생 미국의 무선공학자 페선던(Reginald Aubrey Fessenden) 출생
1866. 10. 6 캐나다 퀘벡 밀턴~1932. 7. 22 버뮤다 해밀턴.
캐나다 밀턴 출생. 어릴 때 에디슨의 조수로 일하였다. 1893~1900년 피츠버그대학교 전기공학 교수를 지낸 뒤, 미국 측후소에서 일기예보의 무선송신법을 연구하였다. 지속전파(持續電波)를 발진하는 고주파 교류발전기, 전해검파기(電解檢波器) 등 500여 종의 발명이 있다. 미국 무선기술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1831년] 독일의 수학자 데데킨트(Richard Dedekind) 출생
1831. 10. 6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브라운슈바이크~1916. 2. 12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브라운슈바이크 출생. 법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카롤린대학에서 수학하고 괴팅겐대학에 진학하여 M.A.슈테른, K.F.가우스, W.베버 등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가우스의 후임이었던 디리클레의 영향도 받았다. 1854년 괴팅겐대학의 강사가 되었으며, 1858년 취리히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브라운슈바이크 고등기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수학 활동은 넓은 의미의 수(數) 전반에 걸친 거의 모든 영역에 미쳤으며, 추상성과 일반성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군(群)을 공리계(公理系)로 정의했던 초기의 연구에서도 이 경향은 명백했지만, 가장 유명한 역작인 《연속과 무리수》(1872)에서 풍족한 결실을 보였다. 여기에서 무한집합을 고찰하였고 절단개념(切斷槪念)의 도입으로 연속성을 규정하였으며, 무리수의 개념을 명확히 함으로써 해석학의 기초 수립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 밖에 이데알이라 불리는 집합의 소분해(素分解)의 연구로 대수적 수에 관한 이론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1552년]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 출생
← Matteo Ricci (left) and Xu Guangqi (徐光啟) (right) in the Chinese edition of Euclid's Elements (幾何原本) published in 1607.
중국명은 이마두(利瑪竇). 1571년 예수회에 가입, 클레시오 로마노에서 콜라비우스에게 수학 ․천문학 등을 배우고 인도를 경유하여 1582년 마카오에 도착, 중국 내지(內地)로의 입국을 결심하고 중국어를 공부한 후, 1583년 조경(肇慶:廣東省에 있었음)에서 정주 허락을 받고 전교(傳敎)를 개시하였다. 이어 소주부(韶州府) ․남창부(南昌府) ․난징[南京]을 거쳐 1601년 베이징[北京]으로 진출하였다. 그가 명(明)나라의 만력(萬曆) 신종(神宗)에게 바친 자명종(自鳴鐘:탁상시계) ․대서양금(大西洋琴:피아노의 전신)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하여 베이징에서의 정주를 허락받았다. 선무문(宣武門) 내에 주택을 구입하고, 이곳을 전교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중국에서 전교하기 위해서는 독서인층(讀書人層)의 신임을 얻어야 한다고 믿고, 서양의 학술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역서인 《기하학 원본》과, 세계지도 위에 각종 천문학 ․지리학적 설명을 덧붙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이다. 그 밖에 세계지도인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가 있다. 이러한 학문은 중국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어 서광계(徐光啓), 이지조(李之藻) 등의 유력한 관료도 개종(改宗)하여 그의 전교사업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저서에 《천주실의(天主實義)》 《교우론(交友論)》 등이 있는데, 《천주실의》는 한국의 천주교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459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뉘른베르크 지구의를 제작한 독일의 항해가, 지리학자 베하임(Martin Behaim) 출생
1459. 10. 6 독일 뉘른베르크~1507. 7. 29 포르투갈 리스본.
뉘른베르크에서 출생했다. 상업수습원(商業修習員)으로서 네덜란드로 갔다. 이어 1484년에 포르투갈로 건너가 국왕 주앙 2세의 항해고문관이 되고 항해용기구의 개량, 지도의 제작을 맡았다. 포르투갈의 항해자 디에고 캄과 함께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험하였다는 사실은 근거가 희박하나, 기니해안을 다른 항해자와 함께 항해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1492년 뉘른베르크에서 세계 최초로 지구의(地球儀)를 만들었다. 그의 지구의는 콜럼버스의 지리관(地理觀)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같은 시기에 포르투갈에 있었으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 671년] 신라, 당군을 축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영토로 만든 당나라는 다시 신라까지 넘보았으나, 670년 신라가 먼저 압록강을 건너 당나라를 공략, 나당전쟁으로 들어갔으며, 671년 · 675년, 그리고 676년에 군량보급 차단, 매소성전투, 기벌포(伎伐浦)대첩 등으로 당나라를 압박하여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랴오둥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naver
그밖에
2000년 장종훈, 국내 프로야구 사상 첫 300홈런 신기록 달성
2000년 전국 의료계, 의약분업 강행에 반대하며 4차 총 폐업
1999년 인천지하철 1호선 개통
1998년 한국은행 초석세운 미국의 아서 블룸필드 박사 사망
1997년 '프리온' 단백질 발견한 미국 프루시너 교수 노벨의학상 수상자로 선정
1994년 한국-멕시코, 이중과세방지협정 체결
1987년 MS 사무용 SW 엑셀 2.0 버전 출시
1986년 삼성전자, 세계 최초 초소형 4mmVTR 개발
1982년 한국-노르웨이 경제, 기술협력협정 서명
1977년 미국, MX미사일 개발을 발표
1977년 육림의 날 제정
1977년 미국-소련, 국경회담 개최
1976년 태국 군부쿠데타 발생
1976년 소련, 북한에 차관 중단
1973년 인도 원자폭탄 실험
1971년 남북적십자, 3차 예비회담. 본회담의 서울, 평양 교대 개최에 합의
1955년 반공대회헌장 조인
1953년 일본 해상보안청, 독도에 표주 건립
1953년 한일회담 3차회의
1951년 동경에서 한국-일본예비회담 개최
1946년 경향신문 창간
1931년 미국 단엽기(單葉機) 미스 비도르호 태평양 무착륙비행 성공
1926년 미국에서 토키(발성)영화 성공
1913년 원세개, 중국 초대대통령에 취임
1908년 국어운동의 선구자 주시경, <국어문전음학> 완성
1908년 오스트리아, 보스티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
1906년 소련 소비에트 결성
1905년 모스크바 카잔철도 수리공장 노동자 파업(모스크바에 처음으로)
1896년 영국 풍자만화가 뒤 모리에 사망
1860년 프랑스군, 북경교외의 원명원을 점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