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의 보스턴 여행기(2)
☞ 출발지에는 큼지막한 휴지통이 곳곳에 비치가 되어 있어서, 주변에 깨끗하다. 막, 출발을 알리는 시간에 오늘도 많은 긴장이 된다. 더구나, 여기는 머나먼 땅 미국이 아닌가. 난, 항상 기원전 50년에 로마 원로원의 최종 권고를 무시하고,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선언한 독일식 이름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Iulius Caesar), 영어식 표기로는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가 말 한대로 주사위는 던져졌건만 여전히 출발을 앞둔 시점에서는 항상 긴장의 연속이 된다. 이때는, 오줌도 자주 마렵다. 그런데, 잠간 나가서 숲 속에 뿌려대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의 위신을 이번에는 생각해서 참았다. 어째든 출발은 이뤄진다.
먼저, 휠체어(wheelchair)부문은 11시 25분에 출발하였고, 여자 엘리트 선수는 30분전에 출발이 이뤄졌다. 이제는, 마스터스 참가자들에게도 출발을 알림과 동시에 서서히 거대한 무리가 좁은 왕복 2차선 도로를 꽉 메웠다. 그래서, 초반에는 앞으로 나가기가 쉽지 않아서, 앞 사람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처음 몇 km는 내리막이다. 나의 앞에서 달리는 자그마한 키에, 금색 머리에 덩치에 비해서 엉덩이가 큰 아가씨가 짝 달라 붙은 유니폼을 입고서 잘도 내달린다.
10km 지점을 지나니 43분대가 나온다. 그러나, 10km를 지나자마자 다리에 힘이 없고,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앞쪽에는 의족을 한 분이 열심히 달리고 있다. 대단한 속도이다. 저런 모습 속에서 인간의 참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뭔가, 장애를 극복해낸다는 것은 실로 인간의 위대함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아마도 마라톤은 인간 장애를 이겨낸 노력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되어 마라톤의 진정한 뜻이 여기에 있지 않나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거리표시는, 마일은 1마일마다 km는 1km마다 구간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어디서 나왔는지, 평소에 조용한 마을에서 엄청난 인원이 주로 양편에 쭉욱 서서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준다. 응원소리가 너무나 커서 귀가 떨어질 정도이면, 심지어는 좀 조용히 했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우리나라와는 아주 딴판이다. 또한, 일부는 ‘go’나, 이름을 쓴 표지판을 들고 있고, ‘good lucky"라고 외치기도 한다. 20km 지점에 있는, 에슬리 여자대학(Wellesley college)의 쭉쭉빵빵한 여학생들이 나와서 달리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심지어는 달리면서, 포옹도 하고, 악수도 하곤 한다. 하얀 얼굴들에 귀엽고 예쁜 얼굴들이다.
미국에 와서 들으니, 미국 여자들은 30대까지는 쭉쭉한 몸매에 하얀 피부에 여기에 금색머리에 정말로 예쁘지만, 나이가 40살이 되면, 세상 땅 넓은줄 모르고 앞뒤로 튀어 나오고, 주름진 얼굴에 피부는 쭉 늘어져서 보기가 싫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쉽게 늙는다는 것이다.
한국 여자들이 나이가 들어 갈수록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과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성질 부리는 것은 미국과는 정반대이다.
※ 에슬리 여자대학 이른 아침부터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와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그에 맞춰 열광하는 사람들의 환호성. 4월 셋째 주 월요일의 보스톤은 이제 돋아나기 시작하는 보드라운 연두빛 이파리들 사이로 언제나 이렇게 들끓는다. 그리고 그 정점은 보스톤 중앙이 아니라 오히려 근교에 위치한 작은 동네 Wellesley에 있다. 1897년도에 처음으로 개최되어 올해로 108회를 맞이하는 보스톤 국제 마라톤 코스의 중간지점에 해당하는 이 동네에는 힐러리 클린턴, 올브라이트 전 국무부 장관, 그리고 송미령을 배출해 낸 것으로 유명한 여대 Wellesley College가 있는데, 이 곳에는 보스톤을 향해 질주하는 마라토너들을 위한 이색 전통이 있다. 바로 Scream Tunnel이라 불리우는 응원전이 그것이다 캠퍼스 최외곽인 95번 도로 가에 위치한 Munger 기숙사생들로부터 시작된 이 전통은 해를 지나며 점점 그 규모를 더해 근래에 와서는 2400명에 달하는 Wellesley College 학생들 뿐만 아니라 이 지역 주민들을 모두 동원한 축제가 되었다. 오전 열시가 되면 이 전통의 열성적인 추종자들이 마라토너들을 보다 가까이에서 응원하기 위해 마라톤 코스인 95번 국도 바깥으로 쳐 놓은 바리케이트에 다닥 다닥 붙어 자리를 잡는데, 열 한시 즈음해서는 이미 바리케이트의 빈 틈을 찾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기온이 섭씨 31도까지 올라 간 올해는 날씨마저 더 할 수 없이 좋아서 그 경쟁이 더욱 치열했다. 선두 주자들과 이들의 가장 큰 차이 점은 이들이 응원단이 줄지어 늘어서있는 바리케이트로부터 가능한 한 가까이에서 달린다는 것이다. 응원단 역시 이전과는 달리 거리낌 없이 바리케이트 안으로 손을 내밀어 마라토너들의 땀에 젖은 손과 자연스럽게 맞대기도 한다. 낯선 사람, 아마도 앞으로 두번 다시 만나게 되지 않을 사람들 사이의 이 짧은 접촉은 그 교감의 파장이 상당히 커서, 진심이 담긴 응원과 그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마라토너들과 응원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순간적으로 끈끈한 정이 흐른다. 이 깊은 유대감은 마라토너들에게는 42.195Km를 완주할 에너지를, 응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열정과 응원에 대한 사명감을 선사할 뿐만 아니라 응원단과 마라토너들의 일체감을 고양시켜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엑스터시를 동시에 안겨주기도 한다. 비록 응원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낯선 사람들이었을지라도 이 즈음에는 이미 달리는 이나 응원하는 이의 머리 속에 너와 나를 구분하는 선이 녹아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때문에 이 시점에는 평소에 할 수 없었던 다소 짖궂은 장난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티 셔츠에 메시지를 적어 넣어 광고하는 정도는 예사이고, 때로는 여대 앞을 지나간다는 사실을 의식, 전화번호를 윗 옷에 적어 넣은 후 응원하고 있는 여대생들로부터의 연락을 바라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슈퍼맨, 원더우먼 등 갖가지 변장으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하는 마라토너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며, Wellesley College를 졸업한 부인과 재학중인 딸은 둔 남자는 Wellesley College를 찬양하는 문구가 들어 간 셔츠를 입고 달려 응원하는 여대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한다. 맨 몸으로 완주하기도 힘든 마라톤 내내 트럼펫을 쥐고 달리다 내킬때면 “You are my sunshine”의 한 구절을 멋들어지게 불어주고는 다시 달리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저 멀리 사관학교에서 보스톤으로 날아 온 사관생도가 달리다 말고 길 바닥에 엎드려 푸쉬-업을 함으로서 여대생들 앞에서 체력을 과시하는가 하면, 심지어 어떤 이는 응원하는 낯선 여학생을 붙잡고 키스 세례를 퍼붓기도 한다. 결승선 근처에서 응원하고 있던 애인을 불러내어 반지를 끼워주며 만인의 앞에서 프로포즈에 성공한 한 마라토너의 이야기는 유명하다.(동아 닷컴에서 발췌)
☞ 고온의 날씨와 컨디션을 생각해서, 목표한 기록은 염두에 두지 않고서 속도를 줄여 나갔다. 10km에서 20km 까지는 46분대가 나온다. 그러나, 30km 이후에는 약간은 컨디션이 회복되어서 속도를 조금 올렸다. 특히, 보스턴을 60회나 완주한 살아있는 전설적인 인물인 존 켈리 동상(Johnny kelley statue)을 약간 지난 지점에 있는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도 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듣던 대로 오르막이 2km 정도 계속 이어진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걷는다.
☞ 우리 한국인 참가자 중에서 많은 분들이 후미로 처지기 시작한다. 많은 분들이 걷기까지 한다. 나의 앞에 위치한 많은 한국인들을 추월하면서 “힘”을 외치면서 지나갔다. 역시, 다들 힘든 레이스이라는 실감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국 마스터스 마라톤계의 쟁쟁한 인물의 한 사람인 경북의 모 마라톤클럽 소속의 참가자도 30km 조금 지난 지점에서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30km 지점에서 할머니 봉사자들께서 파워젤을 한 봉지 들고서 건너 주었다. 나는, 두 개를 잡아서 하나는 빨아 먹고, 하나는 허리춤에 넣고 달렸다. 달리면서 보니, 많은 미국인들이 몸에 문신을 하고, 어깨에는 매직으로 자기 이름을 쓴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만 봐도 개인을 중시하는 미국인과 조직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한국인의 의식 차이를 느끼게 한다, 우리 한국인은 나를 비롯하여 모두가 마라톤복에 소속 단체를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태극기표지를 부착하는 등 소속 알리는 것은 대단한 열성들이다. 주로 중간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화이팅’을 외치고,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이곳에 거주하시는 어떤 분께서, 나의 달리는 모습을 촬영하여, 조선 닷컴에 올린 것을 보게 되었다. 너무나 기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오늘은, 더운 날씨로 모두가 힘든 표정이 역력하다. 나는, 마라톤대회 어디서나 했던 바와 같이, ‘죽어도 걷지 않는다’ 는 각오를 생각해서, 걷지 않고 천천히 오르막은 오르고, 내리막은 조금 빠른 속도로 달려 내려갔다. 각 도로변에서 어린들이 고사리손에 열심히 들고 있는 오렌지를 받아먹고서 허기를 달래었다. 물은, 급수대에 있는 물은 더운 날씨에 미지근해서 먹지 못하고, 대신에 어린애들이 주는 얼음물을 마셨다. 물은 몇 바가지를 마셨을 것이다. 많은 어린애들이 응원하면서 너무나 좋아한다. 자기 물을 마시라고 하면서, 자기 오렌지를 먹으라고 하면서 야단이다. 학교 밴드부 학생들은 신나는 음악을 연주를 하고 거리의 악사들은 북을 치면서 흥을 돋구는 그야말로, 축제의 분위기다. 간이침대를 가지고 나와서 누워 있는 사람,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나온 사람, 호스에 물을 뿌려주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다. 주로 중간에 서 있는 자원봉사자들도 응원을 보내 준다.
주로에 샤워시설은 몇 군데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것보다는 많은 주민들이 호스나 소방호스를 동원해서 시원하게 참가자들에게 물을 뿌려주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모두가 자발적으로 호응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운동화와 옷은 물로 뒤집어쓰고 달리게 된다. 완전히 비 맞은 생쥐 꼴이다. 그래도, 시원하니 기분은 좋아진다.
미국인들은 달리면서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달리는 도중에 살짝만 신체 접촉이 있어도, 먼저 “미안하다(I"m sorry)”고 하고, 물을 마신 컵은 뒤 사람이 달려오는 것을 보면서 바닥에 던지는 것을 볼 때에 힘들게 달리면서도 이런 마음씨는 우리도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많은 마라톤대회를 다니면서 앞사람이 침을 뱉는 바람에 몇 번인가 얼굴이나 몸에 뒤집어 쓴 경험이 있었다.
마침내, 도심으로 들어갔다. 커브를 돌아서 결승라인으로 들어가는데, 1km도 채 되지 않는 거리가 왜 그렇게 멀게 느껴지는지 실감했다. 이왕 기록이 물 건너간 상황이라서, 여유 있게 달려서 완주했다. 완주 후에는 자원봉사자들이 권유하는 간이의자에 앉아서 잠시 호흡을 조절했다. 그렇게 튼튼하게 보이는 많은 미국인도, 결승점에 들어와서는 쓰러지거나, 토하거나 힘든 표정들이 역력하다. 아마도, 요 근래 대회에서 이렇게 힘든 경우는 보지를 못했고, 경험도 없었다. 만약의 추위를 막아 주기 위해서, 자원봉사자들이 은박지로 된 바람막이봉지를 하나씩 몸에 들러주고, 그 다음에는 테이프로 가슴 부분을 붙여 준다. 그러니, 은박지가 열을 받아서 몸이 뜨근하니, 추운 줄 모르겠다. 다음에는, 칩은 의자에 앉으니 자원봉사자들이 운동화 끈을 풀어서 수거해 가고, 이어서 완주메달을 목에 걸어준다. 간식 및 음료수는 길다랗게 설치 된 테이블에서 본인이 스스로 필요한 것만 비닐 주머니에 차례로 담겨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체 없이 결승점을 벗어나서 도로를 따라서 바깥으로 나가게 되어 있어서 결승점 주위는 복잡하지 않다. 그리고, 주변도 지저분하지가 않다.
이어서, 스쿨버스에 맡겨 논 짐을 찾고서, 다리에 힘이 없는 가운데 여행사 직원이 안내하는 커먼(common)공원 입구로 가보았으나, 아무것도 발견 할 수가 없어서 한참이나 헤맨 끝에 다시 원위치해서 간신히 버스를 타고서 호텔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 호텔에서 샤워를 마치고서 휴식을 가졌다. 호텔에서 보스턴 지역방송을 켜니, 마라톤 출발을 한지 6시간 30분이 지난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중간 중간 방송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역시 오늘 대단한 날씨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이 시각까지 기다려주는 보스턴 시민들의 의식도 놀랍다. 또한, 오늘의 마라톤 주로(走路) 날씨도 같이 보내준다.
이어서, 호텔을 나와서 보스턴 한인교회에서 있은 저녁식사 모임에 참석했다. 이제 힘겹게 완주를 하고서 마라톤복장으로 들어오는 몇 사람도 보이고, 힘이 든 나머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보스턴의 명물인 바다가재 시식 및 제108회 보스턴마라톤참가자 모임의 회장도 선출하고, 기념품 및 꽃다발 증정도 있었다. 이어서, 추첨이 있었는데, 몇 년 만에 당첨되어 이번 여행사의 사장께서 쓴 책을 한 권 선물 받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들으니, 평소 국내대회에서는 2시간 40분대를 기록하는 분도 오늘은 2시간 54분으로 완주를 하였고, 그 외 국내대회에서 sub-3를 달성한 많은 분들이 이번 대회에서는 한 명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완주 후에는 한결같이 힘들었다는 것이다. 국내대회 같으면 중도포기를 했는데, 먼 보스턴까지 와서 달리는 관계로 억지로 뛰어서 완주했다는 사람이 많다. 이번 대회는, 무더운 날씨와 빡빡한 일정 및 식사 문제로 기록을 내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저녁 식사 후에는 호텔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바로 빠져 들었다. 너무나 피곤한 하루다. 모자를 쓰지 않고서, 달렸더니, 햇빛에 온 얼굴이 거멓게 타고, 등은 햇빛을 오랫동안 받아서 따가움을 느끼게 된다. 하여튼, 이번 대회의 날씨가 대회 개최 90년 만에 최고기온의 날씨라고 한다. 우리가 보스턴에 도착하였을 때는, 비가 왔으며 추운날씨였고, 마라톤대회에는 최고기온으로 상승했다가 차츰 기온이 떨어진다고 기상예보가 TV에서 나온다. 우리의 속담인 ‘가는 날이 장날’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많은 시민들이 귀가 떨어질 정도의 열광적인 응원과 계속되어지는 시민들의 오렌지 및 젤리의 공급과 시원한 물을 건너는 맑은 눈동자를 가진 5~6살로 보이는 어린이들은 나의 평생 동안에 잊지 못할 것이다.
☞ 2004.04.20(현지시각) 아침 5시에 눈을 떠서, 어제 저녁에 피곤해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마라톤복장 등을 정리하고서, 이제 호텔을 떠날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침 7시에 베이컨 등으로 아침을 때우고, 신물을 보니 남자 1위는 2시간 10분37초, 여자1위는 2시간 22분 43초로 모두가 케냐 출신이라고 한다. 이번 대회의, 여자기록은 역대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몇 일간 보낸 보스턴을 떠나서 뉴욕(New YorK)으로 가게 된다. 뉴욕으로 가는, 95번 고속도로변의 나무들이 거의가 소나무와 활엽수림으로 우리나라의 야산(野山)과 비슷하다. 중간에 푸른 초원들이 펼쳐져 있다. 아직 산들의 나무들은 푸르름이 없고, 움만 트고 있다. 우리는 왕복 8차선 고속도로를 달려서 매사츠세츠주를 지나고, 코넷티켓주를 통과하여 뉴욕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가이드의 조기유학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장점 보다는 단점이라는 많다는 이야기이다. 조기유학 실패를 예로 들면서, 조기유학 와서 인격적인 면이나 공부면 등에서 많은 무리가 뒤따르고, 잘못하면 인생 패배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군대 다녀온 이후에 유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이다. 그래도, 머리 좋은 한국사람 이라서 금방 따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으로 갈수록 녹음이 짙어지고,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풍경이다. 숲 속에는 유럽식 주택들이 서 있고, 간간히 호수가 있고, 널따란 정원에 잔디가 있는 집들이다. 뉴욕 입구에 들어서자 야구로 유명한 양키스 스타디움이 보이고, 우범지대의 대명사인 할렘가를 지났다. 잠시 스쳐지나가는 할렘가는 생각했던 것 보다는 깨끗하고, 5~6 층의 건물들이 연속으로 이어져 있고, 외부에는 비상계단이 한결같이 설치되어 있다. 거리는 2차선 도로에 십자로가 대부분이다. 간혹 푸른 잔디의 공원도 있다. 맨해탄에 들어가서, 컬럼비아대학을 지나고, 백 년간 짓고 있다는 성공회 성당, 뉴욕의 호흡을 제공하는 심장으로 4km나 이어진 센트럴 파크, 뉴욕에서 제일 비싸고.제클린 오나시스가 살았다는 아파트인 파크뷰 아파트를 지나고, 케네디의 장례를 지냈다는 성당, 록펠러 센터인 거대한 16개 건물, 미국 두 번째 장서를 자랑하는 뉴욕 시립도서관, 워싱턴 광장, 뉴욕 대학, 그린치 빌리지, ‘마지막 잎새’ 작가 《오 헨리》가 하숙을 했다는 피가로 카페, 뮤지컬의 대명사인 브로드웨이 거리, 18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화가들의 거리인 소호지역의 건물, 차이나타운, 거대한 건물인 이민국, 아름다운 잔디밭에 생각보다는 자그마한 뉴욕시청을 지났다. 뉴욕은 미국 최초의 수도였다고 한다. 대도시내에 있는, 센트럴 파크는 실로 놀랍기 그지없다. 공원 내는 각종 수목이 울창하고, 물도 흐른다. 점심은 한인식당에서 곰탕으로 해결했다. 오랜만에 한식다운 한식을 먹었다.
※ 뉴욕 미 대륙 동부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뉴욕은 맨해탄, 브룩클린, 퀸즈, 브로으스,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5개 독립구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중 뉴욕관광의 중심지인 맨해탄은 동쪽으로는 이스트강, 서쪽으로는 허드슨강, 남쪽으로는 엎어 뉴욕만에 둘러싸인 길다란 섬으로, 유명한 쇼핑가와 세계경제의 중심지로 불리는 월 스트리트, 예술 문화의 중심지인 브로드웨이 등 뉴욕을 대표하는 모든 것이 모여 있다. 자유의 여신상에서 타임스퀘어까지 센트럴파크에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르는 관광명소이다. 맨해탄섬은 이탈리아 항해사 지오반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ano)가 1524년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그후 1626년 네덜란드가 허드슨 강에 진출해 맨해탄에 뉴암스테르담을 세우고 1825년 에리 운하가 개통되고, 활발한 무역거래가 시작되고,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는 수백만의 이민자들이 이곳으로 왔으며, 20세기 초 맨해탄의 푸른하늘을 장식하는 고층빌딩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624년부터 본격적인 식민이 시작되었고, 인구는 약 300명이었다. 1626년에는 네덜란드인이 맨해탄을 인디언으로부터 고작 60길더에 상당하는 물품과 바꾼 악랄한 거래였으며, 프랑스, 독일, 영국으로부터의 이민이 활해졌고, 1643년에 약 500명으로 늘어났고, 성 니콜라스를 비롯한 교회, 거리 등의 건축도 이루어졌다. 영국의 식민지로 해상의 패권을 다투던 네덜란드와 1651년에 전쟁이 일어나서 1664년 영구에 빼앗겨 당시의 영국 왕 찰스 2세의 동생 요크 공의 영지의 일부가 되어, 여기에서 연유하여 지명은 뉴욕으로 바뀌었다. 18세기 전반이 되자 뉴욕은 영국, 아프리카 선인도 제도를 잇는 삼각무역의 중계지, 노예시장으로 번영하여, 시 인구의 10%가 흑인인 상태까지 이르뤘다. 1775년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다음해에 뉴욕은 일찍감치 영국군의 손에 떨어지고, 1783년 영국과 미국의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영국의 점령하에 있었으며, 전쟁으로 1783년에는 폐허화되었으나, 1784년에 뉴욕주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1861년에 남북전쟁이라는 혼돈을 거쳤으나, 1870년부터 고층건물이 건축되고, 1898년에 6동의 마천루가 세워지고, 뉴욕 5번가는 ‘백만장자의 거리’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900년에는 이탈리아계 14만 5천명, 아일랜드계 27만 5천명, 러시아계 15만 5천명으로 리틀 이탈리아, 할렘 등의 넓은 지역이 형성되었고, 100만년전만 해도 매해탄 섬 뿐이던 뉴욕시는 이후 주위로 팽창하여 현재 5개 구역 맨해탄, 퀸즈, 브루클린, 스테이튼 아일랜드로 이루어진 그레이트 뉴욕이 되었다. 뉴욕은 세계의 경제, 금융 및 상업의 중심지, 예술 패션 등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세계 외교의 전당이다.
※ 센트럴 파크(Central Park) 뉴욕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공원이면서 마천루가 솟아 있는 맨해탄 한 가운데의 오아시스로, 평일에도 조깅을 하는 사람, 잔디에 누워있는 연인,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사이클링이나 롤러 브레이드를 타는 사람 등 다양하며, 총 면적이 843에이커에 남북으로의 길이가 4km, 동서로의 길이가 약 800m이에 이른다. 1850년에 저널리스트이자 시인이었던 울리엄 브라이언트가 제안하여 1876년에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공원 부지 내에는 호수와 삼림 잔디와 바위산이 어우러져 있으며, 토일일에는 부근의 시민, 관광객, 행인 그리고 각종 행사로 활기차 있으며, 공원의 주변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에 의한 근사한 연주회도 벌어지며, 스케이트 장, 동물원 야외 음악당, 등의 공원시설도 잦추어져 있다.
※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 1929년에 착공되어 1931년에 완공된 뉴욕을 대표하는 건물로, 건물의 높이가 381m로 시카고의 시어스 타워, 뉴욕의 우러드 센터에 이어 세계 3위의 고층 빌딩으로 1일 3천5백명, 연간 1백 30만 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전망대는 86층과 12층 두 군데에 있다. 남쪽으로는 다운타운 금융가의 고층 빌딩 숲과 자유의 여신상, 북쪽으로는 록펠러 센터, 센트랄 파크, 서쪽으로는 허드슨 강과 뉴저지, 동쪽으로는 유엔 빌딩과 롱 아이스랜드가 보인다. 청명한 날에는 뉴저지 해변, 펜실바니아 포코노스, 코네티컷 호수와 매사추세츠까지 볼 수 있다.
※ 자유의 여신상(The Statue of Liberty)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년을 축하하여 변함 없는 우호의 표시로 선물 한 것으로 오른손에는 횃불을 노피 치겨들고 자애가 가득한 표정을 하고, 왼손에는 1776년 7월 4일이라는 날짜가 들어 있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는 세계 최대의 여성상이다. 자유의 여신상은 뉴욕의 항구인 리버티 섬에 있는데, 이민 오는 사람들이 항구에 입항할 때 이 동상을 보며 신대륙에 대한 희망과 꿈을 키우고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1984년에서 1986년에는 총공사비 7천만 달러를 들여서 대수리를 했으며, 뉴욕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심벌로써 10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건재하고 있다. 배터리 공원에서 탄 페리는 자유의 여신상 정면 바로 근처를 지나서 부두에 도착하며, 부두는 동상 뒤쪽에 있고, 그곳까지는 공원으로 되어 있으며, 좌대부분에는 미국 이민 박문관, 동상의 역사실이 있으며 동상까지는 167개의 계단을 올라가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동상의 내부는 비어 있으며 머리 부분에 있는 전망대까지는 168개의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여 갈 수 있으며 전망대에서는 로어 맨해탄이나 뉴저지 4거리가 바라보이지만 정원이 30명 정도로 좁다.
☞ 점심 후에는, 월 스트리트를 지나서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검문검색이 상당히 심하다. 유람선에 올라서,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갑판에서 맨해탄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고, 배가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면서 많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9.11테러 이후에, 여신상의 내부는 들어가지 못하다고 한다. 가이드의 이야기는, ‘자유의 여신상(The Statue of Liberty)’이라는 말은 일본인 지은 명칭으로, ‘자유의 여인상’ 이라고 불러야 된다고 한다. ‘자유의 여인상’은 별도의 섬에 서 있다. 그 옆의 엘리스섬에는 미국 최초의 이민국건물이 있는데, 눈물의 이별장소였다고 한다. 배 위에서 미국인이 “마라톤을 하느냐”고 물어서,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했다’고 하니, 기록에 대해서 물어 본다. 이번에도, “3 Hours"라고 했다. 배는, ‘자유의 여신상’부근에 있는 선착장에서, 장시간 정박한 후에 출발했다. 뚱뚱한 미국 아주머니들과 함께 있는 우리나라 초등학교 또래의 남녀 애들이 우리와 같은 핏줄인 것 같아서 물어보니, 한국인 ‘입양아’라고 한다. 남자애는 나의 수첩에 서투른 글 솜씨로, Hong young-kyoo라고 써 준다. 다시 유람선 선착장으로 돌아와서 공원으로 들어섰다.
맨해탄의 선착장 입구에 있는, 공원 의자에 앉아서 흑인 노인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다. 가만히 들으니, ‘애국가, 고향의 봄, 산토끼, 사랑해, 아리랑’등의 많은 한국곡 들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발길을 멈춰서 구경을 하는데, 돈을 받고 있다. 우리노래의 연주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으로 봐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음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아런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돈벌이가 괜찮은 모양이라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공원 중간쯤에 오자, 이전에 TV에서 본적이 있던, ‘자유의 여인상’과 똑같은 복장으로 사진촬영에 임하면서 돈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볼 수가 있었다. 그 옆에도, 영화 ‘로보캅’에 나오는 ‘로보캅’의 복장으로 만찬가지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정말로, 움직이지 않고 있으면, 인공적으로 설치 해둔 조형물로 착각할 정도였다.
☞ 공원을 나와서, 버스를 타고서, 9.11테러에 파괴된 쌍둥이 빌딩의 빈터를 보고 지나치고, 한국인이 운영하다는 백화점에서 집사람에게 선물 할 가장 싼 화장품을 하나 구입하였다. 이곳을 나와서, 마천루(摩天樓)의 본고장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견학했다. 입구에서 각종 검문검색을 받은 후에 80층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80층에서 내려서, 86까지는 다시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이번에는 상당히 느린 속도로 올라간다. 102층인 이 빌딩은 최고층인 102층까지는 9.11테러 이후에 올라가지 못하고, 86층 까지만 개방한다고 한다. 86층 전망대에서 뉴욕의 맨해탄 및 뉴욕시를 감상하고, 많은 사진도 찍어댔다. 위에서 본 맨해탄은 십자형 도로가 뚜렷이 구별되고, 많은 건물들이 규칙적으로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을 나와서, 점심을 먹은 식당에서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었다, 맛이 괜챃다.
맨해탄에 있는 한인타운이 대단하다. 코스모스백화점, 신세계백화점, 한아름 슈퍼마켓을 비롯하여 노래방, 미용실 등 다양하다. 저녁을 마친 후에는, 허디슨강 아래를 지나가는 하저터널인 링컨터널을 지나는데, 길이가 1.4마일 1930년대에 완성한 곳으로 지금도 여전히 처음 건설당시와 다르지 않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다시 한번 미국인의 먼 미래를 내다보고 건설하는 안목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뉴욕을 지나면서 보는 맨해탄의 야경은 휘황찬란한 보다는 검소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다. 광고판 등이 없다보니, 반짝거리는 조명은 없고, 오피스빌딩이나 건물 및 가로등이 비추는 조명이 유일한 것으로 내가 사는 부산의 밤거리보다도 조명이 나지 않다. 역시, 불필요한 것을 절약하는 미국인의 검소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바람에 뉴욕의 야경(夜景)촬영을 실패했다. 뉴욕에서 1시간 쯤 달려서, 뉴저지주에 있는 "쉐라톤 호텔(Sheraton Hotel)"에 여장(旅裝)을 풀었다. 거의 저녁 9시가 다 돼서 도착하였다. 방 배정을 받고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도 무척 피곤하다.
☞ 2004.04.21(현지시각) 오늘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에 긴장감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좀더, 시간을 갖고서 미국인의 생활태도와 주요 장소를 방문하는 체험을 해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귀국해야 한다. 귀국하면 나의 앞에는 많은 일들이 기다려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제밤은 많은 피로 속에서도 뒤척거렸다. 아무튼, 미국의 체험이 채 1주일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몇 십년간의 세월일 흘러간 기분이다. 여기에서, 많은 마라톤동호인들도 만나고, 많은 대화도 나눴으며, 이름모를 미국인들과도 많은 접촉이 있었다. 특히, 우리는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문화선진국이며 질서선진국인 미국에 비해서 부족한 점은 개선해 나가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 마라톤대회에서 무질서, 대회 주최 및 주관 측에 무리한 끝없는 요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나누면서 한국인의 의식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는데, 모두가 공감을 표시하였다. 우리는, 대회 주최 측에서 마라톤대회를 개최해 준대로 열심히 달리기만 해도 된다는 생각도 갖게 된다.
아침은 호텔 구내 레스토랑에서 베이컨 등을 위주로 한 식사로 미국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해결했다. 그리고, 객실로 올라가서 그 동안에 사서 모은 물건들로 인해서 한국에서 출발 할 때보다도 훨씬 무거워 진 가방을 들고서, 프론트로 내려 왔다. 프론트에서 어제 밤에 깜빡 마신 물 한 병 값으로 3.5달러를 지불하여야 했다. 8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해서, 마이애미 해변까지 내려간다는 왕복 12차선이 넘는 95번 고속도로를 타고서, 홀랜드터널을 통과하여 맨해탄으로 다시 들어왔다. 차이나타운을 지나는데, 한인타운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면적이다. 도중에 들으니, 한국내의 각종 마라톤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 이번 대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기록이 실렸다고 한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저조한 기록들 때문에 실망이 클 것이라고 걱정들을 한다. 나도, 클럽 회원 및 회사 직원들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저조한 기록으로 완주한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과 함께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이스트강에 걸려 있는, 블린크린 브릿지를 건너서, 우리나라라면 생각도 못하는 도심지내의 엄청난 면적과 수 많은 비석들로 이뤄진 뉴욕시립 공동묘지를 지나고, 2시간이 소요되어서 존 에프 케너디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 출국심사를 받고서, 마침내 한국행 대한항공 KE802 트랩에 올랐다. 현지시각 1:40에 이륙하기 시작했다. 뉴욕근교는 평평한 평지에 주택들이 오밀조밀하게 보이고, 대서양 넓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어제 오후에 뉴욕의 유람선상에서 만났던 대한항공 승무원들을 여기서 다시 만나서 서비스를 받게 되었다. 20분 이상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도 높다란 산을 없고, 호수와 나무와 집들만 끝없이 이어져 있다. 나의 좌석은 뒤쪽의 창문 쪽에 앉았는데, 앞쪽과 같은 두 개의 좌석이 아닌 옆 좌석의 분은 필리핀인이라는 여자분이다. 아마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인성 같았다. 뉴욕에서 바로 마닐라로 가는 직행로가 없어서 아마도 인천국제공항에서 환승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기내식은 약간의 소고기와 스파게티식으로 먹었다. 우리에게는 량이 차지 않는 식사다. 햇빛이 내리 쬐는 맑은 날씨에 아래로는 하얀 뭉게구름이 쫙 깔려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상쾌하다. 오랜만에, 마라톤의 기록을 생각지 않고, 피로를 잊게 된다. 그러나, 가끔씩 비행기는 미 대륙의 기류변화로 인하여 기체가 심하게 뒤뚱거린다. 벌써, 뉴욕공항을 이륙한지 3시간이 흘러갔다. 비행기는, 캐나다 오타와를 거쳐서 무소니, 위니스크로 향한다. 속도 981km/h, 고도 9,400m
내가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뉴욕에서 이륙한지 8시간 만에 캐나다의 맥켄지산맥․부룩스산맥을 넘고, 에어뱅크스를 지나서 북극해의 날짜변경선을 향하여 날고 있다. 속도 110km/h, 고도 10,400m
창 밖은 백야현상으로 눈이 부셔서 창밖을 볼 수가 없다.
☞ 2004.04.22(한국시각) 미국을 출발한지 열 한 시간 만에 날짜변경선을 지나고, 빙하의 북극해와 얼음으로 뒤덮인 산들이 멀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캄차가반도 위를 날고 있다. 창밖의 기류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엄청난 속도로 비행기가 날고 있음을 알 수가 있고, 북극해를 날고 있는 관계로 비행기가 뒤뚱거리는 경우가 많다. 863km/h, 11,600m
인천국제공항까지는 채 4시간도 남지 않았다. 점심은 생선요리다. 미끼해서 제대로 먹을 수가 없고, 맛 없는 빵만 버터에 발라서 몇 조각 먹고 말았다. 이륙한지 13시간만에 기수를 남쪽으로 틀어서 동해상을 통과하여 한반도 상공으로 접어들게 된다. 곧 바로 약 40분 후에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동해안으로 접어든 비행기는 울릉도 부근에서 기수를 서쪽으로 틀어서 양양 상공을 통과하여 한반도에 접어들자마자, 기류의 영향으로 기체가 요동친다. 이런 상태가 10분 이상 계속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한반도의 상공은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그래서, 지상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비가 오는 모양이다. 원주를 거쳐서 얼마 후에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인천공항이 다가오면서 나지막한 산과 밭과 집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뉴욕을 출발한지 14시간만인 한국시각 오후 4시 30분에 대한민국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의 국제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JFK)국제공항 보다도 나은 시설에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영종도 대교를 통한 김포공항까지의 통해도 시원스럽게 달려가게 되어서 한층 피로감을 덜하게 된다. 김포에서 수원 청주를 거쳐서 예천 및 대구 상공을 통과하여 이륙한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서,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고은별의 마리의 편지
저는 보스톤 근교의 뉴튼에 살고 있는 세 아이 엄마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뉴튼의 TOWN HOUSE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한국에서 온 우리 가족, 러시아 사람 가족, 아르헨티나 , 이스라엘 , 일본...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일상의 잔잔한 행복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제 주위의 새로운 소식과 이웃 간에 오고 가는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오후에 저희가 사는 동네 근처 Commomwealth Ave. 길을 따라 보스턴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젊은 남녀, 할아버지 할머니 할 것 없이 참가한 사람 모두 열심히 달렸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 선 마을 사람들은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며 달리는 사람들을 응원했습니다. 저도 그 사람들 가운데 끼어서 열심히 응원을 했지요.마치 마을 축제날인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길에 매트를 깔아 놓고 아이와 함께 앉아서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유모차에 아기를 데리고 와서 응원하는 엄마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학교 밴드의 학생들은 신나는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돋구었고 길가에 늘어선 주민들은 마치 자기 가족 중의 한 사람이 달리고 있기나 한듯이 열심히 응원을 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태극기가 새겨진 머리띠를 하고 달리는 우리나라 사람을 발견했을 때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 대한민국 만세!!! " 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한강 마라톤 클럽, 강남 마라톤 클럽, 한국전력, 대구 달리기회, LG정유 ...... 정겹고 낯익은 한글이 새겨진 셔츠가 눈에 띌 때 마다 큰소리를 내서 응원을 했지요. 우리나라에서 온 참가자 중에는 양 팔이 없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삶에 대한 강한 애착라고 할까요? 그 어떤 목마름 A thirst for life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지만 그만 스쳐지나가 버리고 말아서 사진에 남기지 못했지만 가슴이 찡하게 아려왔습니다. 얼굴에 내리쬐는 해살이 초여름같이 느껴지는 날이어서 그런지 마라토너들의 몸을 타고 땀이 비 오듯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 엄마 왜 달리기를 하는거야? "
집에 돌아왔을 때 큰 딸아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달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달리면서 내 숨소리를 듣고 땀을 흘리면서 내 존재가 살아 숨쉬고 내 심장이 뛰고 있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명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조선 닷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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