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과 6.25, 김영환 장군
팔만대장경과 6.25, 김영환 장군
대장경(大藏經)이란 일체경(一切經)이라고도 하며 소승(小乘)이나 대승(大乘)을 불문하고 부처님의 모든 설법(說法)을 기록한 교단(敎團)의 계율 및 그것을 해설한 경전(經典) 율장(律藏), 논장(論藏)의 주석문헌(注釋文獻)을 집대성한 불교의 대경전(大經典)이다.
대장경은 산스크리트, 팔리어(巴利語), 한역(漢譯), 티베트(西藏) 트리피타카, 등 20여종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의 구역본(舊譯本)과 현장역(玄奘譯)의 신역(新譯)을 중요시 하고 있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의 가장 정본(正本)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해인사의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의 판본(板本)인 것이다. 그리고 사계(斯界)의 가장 정밀한 판본(板本)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의 대정대장경(大正大藏經)도 바로 우리의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을 저본(底本)으로 한 것이다. (도올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고려 대장경은 1011년(현종 2)의 초판 고본(初版古本)과 1091년(선종 8) 이후 간행된 속대장경(續大藏經)이 있었는데 이들 제1차 간행 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고, 1236년(고종 23)에 시작하여 1251년(고종 38)에 완성한 대장경이 지금의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되어 있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인 것이다.
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6.25 동란때 목숨을 건 한 공군(空軍) 장군(將軍)이 있었기에 그 조국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은 미담을 아래에 소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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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 17일 오후 2시 해인사 경내,
고요한 산사에 공군군악대가 연주하는 삼귀의(三歸依) 소리와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한국 전쟁 때 인민군이 진주했던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미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팔만대장경과 해인사를 구해낸 고 김영환 장군(1921~1954)을 기리는 “팔만대장경 수호공적비” 제막식에서다.
김영환 장군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18일, 작전 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 공군으로부터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왔다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하던 인민군의 낙오병 9백여 명이 가야산 일대와 해인사에 숨어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편대장이던 김영환 장군(당시 대령)은 명령이행을 거부한 채 미 군사고문단을 설득했다. 유동적인 공비 수백 명을 소탕하기 위해 세계적인 보물인 팔만대장경을 잿더미로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5백파운드짜리 폭탄과 로켓트탄,네이팜탄을 실은 전폭기로 폭격할 경우 해인사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 장군의 편대는 해인사 대신 해인사 남쪽 1km 지점의 인민군 집결지를 폭격한 뒤 귀대했다. 이 때문에 김영환 장군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에 회부되어 됐으나 친형이며 공군참모총장이던 김정열 장군의 설득으로 겨우 화를 면했다.
김 장군은 이때 2차 대전 때 미군이 바티칸이나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일본문화의총본산인 교토 등을 폭격하지 않은 전례를 들며 “세계적인 보물인 팔만대장경을 파괴할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고 한다.
공군창설의 주역이었으며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처음 착용한 것으로도 유명한 김 장군은 장성으로 진급했던 1954년 3월 강릉 상공에서 비행 훈련중 순직했다.
이날 공적비 제막식에는 김 장군의 편대원으로써 함께 출격했던 옥만호 전 공군참모총장 등 7명의 전직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해 예비역 공군모임인 보라매회원 60여명과 공군의장대. 군악대, 스님, 신도 등 5백여 명이 참석했다.
지관 스님(전 동국대 총장)은 공적비문에서 “참으로 목숨을 건 판단과 애국심으로 이룬 불멸의 위업이 아닐 수 없다”고 찬탄했다.
서화동 기자
-농월-
1953년 사천비행장, 공군 제1전투비행단 부단장 김영환 대령
빨간마후라, 고 김영환 장군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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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 19, 2016
빨간마후라, 고 김영환 장군 / YTN (Yes! Top News) (youtube.com)
Jun 20, 2016 #2424
1948년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공군 창설 7인 중 한 명인 고 김영환 장군. 정예 장교였던 그는 6.25 전쟁 당시 상부의 폭격명령을 어긴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지엄한 군령을 어긴 그에게 문화재청은 오히려 훈장을 수여했고 해인사에서는 장군을 위한 추모행사를 열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1951년, 가야산 해인사 일대에는 북쪽으로 퇴각하려하는 인민군 900여 명이 은둔하고 있었습니다. 인민군 소탕을 위해 미국 군사 고문단은 해인사 폭격을 명령했는데요. 당시 대령이었던 김영환은 미군의 명령을 어기고 폭격 대신 기관총으로 해인사 뒤편, 무장공비의 보급 창고를 공격해 적을 소탕하고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황을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김대령에게 명령 불복종에 대한 죄를 물었고 이에 김대령은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그 곳이 일본문화의 중심이였기 때문입니다. 팔만대장경 역시 지켜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 생각했습니다" 라며 명령불복종 이유를 말했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 당시 쓰인 화약의 양은 1차 세계대전과 맞먹는 수준이었고, 전쟁의 화염 속에 우리 민족의 유구한 문화를 담고 있는 사찰 200개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공군이 착용하는 빨간마후라를 창시하기도 했던 고 김영환 장군. 대한민국 공군의 참 모습과 영토는 물론 문화와 정신을 지키는 것도 국가 수호의 한 부분임을 보여준 인물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우리 민족의 역사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그를 통해 국가를 지킨다는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 봅니다.
▶ 기사 원문 : http://www.ytn.co.kr/_pn/0484_2016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