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왕상(王祥, 185-269)의 이야기가《소학(小學) 》에 나온다.
왕상은 몹쓸 계모 주씨와 같이 살면서도 효성이 극진하였다.
한겨울에 계모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강으로 갔고 물은 얼어 있었다.
마른 수초가 있는 물가의 얼음을 깬 다음 옷을 벗고는,
깬 얼음 가까이 누워 체온으로 수온을 올려 잉어를 유인한다.
얼마가 지났을까.
하늘도 감동했던지 잉어 몇 마리가 얼음 위로 펄쩍 뛰어 올랐다는 이야기다.
이 장면에서 사자성어 ‘와빙구리(臥氷求鯉)’가 탄생한 셈이다.
임기시(臨沂市) 난산구(蘭山區) 효우촌(孝友村)에 갔다.
산동반도 남해안의 풍광을 즐기다가 공맹의 땅 곡부와 추성,
그리고 동악 태산을 가려면 꼭 건너야 할 물줄기가 있다.
북에서 남으로 길게 흐르는 강 기수(沂水, 沂河).
전장 386㎞ 이 강의 중심에 임하고 있는 도시가 임기(臨沂),
인구 1080만의 지급시(地級市, 우리의 광역시에 해당)다.
고인 물 같이 보이지만 효하(孝河)란 이름의 강줄기이고
연잎 사이 물이 모인 곳이 바로 잉어가 뛰어오른 지점이란다.
사진 왼쪽에 한 비각이 보이는데 그 안에는 ‘晉元公王祥臥氷處’란 비석이 빛을 받고 있다.
효우촌과 효하, 가히 효문화의 성지가 아니겠는가.
왕상의 사당에 2011년 임기시 인민정부가 세운 표석의 글자가 선명하다.
공자의 부활이 그만큼 선명하게 다가온다고 할까.
사당의 현판은 효우사(孝友祠), 왕상 한 사람만의 사당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아니나다를까 세 사람을 모시는 사당이다. 왕상과 왕람(王覽) 형제 그리고 왕희지(王羲之).
왕람은 계모 주씨의 아들로 왕상의 배다른 동생, 둘은 우애가 각별하여 함께 유명하였다.
이 동생의 조연 덕분에 왕상의 효가 더욱 빛을 보는지도 모른다.
왕람은 벼슬이 높았고, 그의 증손이 바로 왕희지다.
사당 벽면에 세 사람을 소개하는데 아예 ‘삼성(三聖)’으로 높이고 있다.
효우촌 시골길에 분꽃이 만발했다. 지나치지 못하고 기어이 서고 말았다.
볼거리가 여간 많은 게 아닌데, 많아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아니다, 이런 한가함 이런 멈춤이 여행의 진짜 재미가 아닐까.
왈칵 풍겨오는 고향냄새, 그리고 엄마생각…. 제길, 나이 탓인가.
모델이 괜찮으면 사진 한 장이 빠질 수 없다.
왕상의 후손이자 종손이란 노인과 한 컷. 실례를 무릅쓰고 나는 웃어야 했다.
이곳을 떠나면서 괜한 걱정을 해본다.
오늘날의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애 하나에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까지
여섯 어른이 딸려있는 형국이니, 효도하기도 참으로 어렵겠구나―.
한때 버릇없는 ‘소황제(小皇帝)’로 손가락질 받아온 그들,
그러나 지금의 수퍼차이나는 그들이 만들어가고 있다.
세연지(洗硯池), 벼루를 씻는 못 치곤 좀 거창하다.
왕희지가 누군가, 천하제일의 세연지를 만들어도 할 말이 없다.
하여튼 우리네 정서와 통한다는 것은 퍽 좋은 일이다.
임기시 난산구에 있는 왕희지의 조년고거(早年故居),
어릴 적 옛집으로 고전원림식(古典園林式) 건축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서성(書聖)을 기리기 위해 1990년 이후에 시에서 복원한 것이라 한다.
못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비랑(碑廊), 그냥 행진하듯 걷는 데만도 한참이나 걸린다.
왕희지가 다섯 살 때 남쪽 절강성 소흥으로 옮겼다는데,
소흥에는 얼마나 거창한 것들이 있을까, 엉뚱한 관심을 가져본다.
왕희지의 옛 집은 불사로 희사되었는데
지금은 보조사(普照寺)란 이름 아래 중생제도에 기여하고 있다.
왼쪽에 그 대웅보전이 보인다.
그밖에도 왕희지의 사당인 우군사(右軍祠-벼슬이 ‘우군’에 이르렀다)를 비롯한
번듯한 전각들과 비림(碑林)이 널찍한 공간에서 동방의 객을 기죽인다.
성악설(性惡說)로 유명한 순자(荀子, BC313-238).
공맹이후 최고의 유학대사(儒學大師)로 사람들이 순경(荀卿)으로 존칭하였다.
그 순자의 무덤이 임기시 난릉현에 있는 것이다. 마지막 벼슬이 이곳 난릉령(蘭陵令)이었고,
난초향기 맡으며 은거 종생한 모양이다.
문짝 없는 문인 패방(牌坊)이 여럿 서 있는데,
‘상청(常靑)’ ‘지명(知明)’ ‘박아(博雅)’ 등 아리송한 글자들이 많다.
중국의 문화재는 사람들이 웬만큼 건드려도 끄떡없는 강도를 지녀 푸근하다고 할까.
순자가 남긴 천고의 명언, 청출어람(靑出於藍).
《荀子》〈勸學〉편에 나오는 원문을 보자.
學不可以已。靑取之於藍 而靑於藍、氷水爲之 而寒於水。
배움은 그칠 수가 없어라.
청색은 남색에서 나왔으되 남색보다 푸르고, 얼음은 물에서 나왔으되 물보다 차다.
이처럼 깔끔한 풍유와 일깨움이 어디 있겠는가.
어찌보면 옛 성인들의 그림자만 밟으라는 정통유학에 도전하는 말로도 들린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순자를 공맹과 차별되는 유물사상가로 대접하는 이유가 알듯 말듯하다.
순자의 사당 후성전(後聖殿). 성인급이라서 그런지 예상보다 전각이 크다.
증자가 종성(宗聖) 맹자가 아성(亞聖) 순자는 후성(後聖),
세 성인의 체급이랄까 위상이 비슷한 모양이다.
후인들을 헛갈리게 하는 성선설의 맹자와 성악설의 순자.
인간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천부적 도덕관념을 두고 두 성인은 대척점에 서있는 것 같다.
그러나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으로 귀결된 결론은 크게 다를 바 없다.
성악설은 50년 선배인 맹자의 실패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아니었을까.
순자의 상 옆에 시립하고 있는 이사(李斯)와 한비(韓非).
순자가 유명한 것은 동문수학한 두 제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결정적인 법술(法術)과 지모(智謀)를 제공한 두 사람,
특히 한비자는 법가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스승과 같은 ‘子’ 자 반열에 올랐다.
사상이나 철학을 뜬구름 잡는 공론으로 치부해 버린다면,
냉엄한 역사적 사실에만 시각을 맞춘다면 이야말로 ‘청출어람’이 아닐까.
그리하여 순자는 후성으로서의 시대적 소명을 완성한 것이 아닐까.
어두컴컴한 전각 안에서 얼핏 떠올려본 망상들이다.
순자의 묘에 왔다.
중국 무덤은 이처럼 봉분 위에 작은 길이 나있거나 측백나무 몇 그루 서있는 것은 보통이다.
기원전 238년에 몰했다면 이 자리 이 무덤이 2050년쯤 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진시황의 낭야대 바로 옆 동네에 진시황을 있게 한 두 인물(한비와 이사)의 스승이
누워있다는 사실이 절묘한 인연법으로 다가온다.
오늘 왕씨 삼성(三聖)과 후성(後聖), 합하여 네 분 성인을 만났다.
그러나 ‘聖’ 자가 너무 남발되는 듯하여 그냥 운치만 살리는 ‘기수(沂水)의 별들’로 이름 짓는다.
논어에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하며 돌아온다는 구절이 있던가.
첫댓글 건강하신 모습이 보기에 좋고 멋진 장면들 감사합니다.
사진과 글을 짬뽕한 기행문이랍시고 시도해봤습니다만, 어떨지 모르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설명을 읽으니 더 실감이 있고 이해가 더 깊어지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공부하면서 쓰고 있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왕상 후손도 직접 만나보시고, 해행초의 서성이신 왕희지 고택과 순자의 묘, 사당까지 두루 두루 섭렵하고 오셨네요...좋은 경치에 재미있는 글까지 곁들여 주시니 진진합니다....박영순드림
Zongganshi, 늘 수고가 많습니다.지도편달로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