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 스테파노신부
“아니, 무슨 일로 도서관엘 다 오셨어요?”
“질문 자체가 공부하는 사람한테는 거의 모욕 수준 아닌가요? 하하하”
오랜만에 도서관에, 그것도 내가 다니는 라떼란 대학도 아니고 그레고리오 대학 도서관에 내가 나타난 것을 본 동료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어떤 신부님은 나를 식당이 아닌 도서관에서 만나게 되니까 감격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황스럽기까지 한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시늉까지 해가며 포옹을 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을 간다고 하는데 나에게 도서관은 철저하게 공부하는데 필요한 자료를 찾는 곳이다. 자류를 찾고 나면 나는 그것들을 챙겨서 서둘러 내 방으로 간다. 나는 사람이 없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만 한 가지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장소로는 내 방만 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양쪽이 다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렇게 혼자 공부하는 습관이 주는 이로운 점이 더 많은 것 같다. 일부러 시간을 들여 도서관까지 가지 않아도 되고, 아무도 없으니 더 편안한 자세로 공부할 수 있고, 또 다른 움직임이나 소리가 없으니 모든 감각을 집중시켜서 몰입하기도 훨씬 수월하다.
기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혼자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들 토로한다. 많은 분들이 혼자서 바치는 기도로는 운전하다가 신호에 걸렸을 때 얼른 바치는 ‘화살기도’ 정도라고 말한다. 기도를 바치기 위해서 깊은 산 속에 있는 피정의 집을 찾아 가거나, 기도 모임에 나가 여럿이 함께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거나, 혹은 뜨거운 성령기도회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꼭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야 한다거나 여러 사람들이 모여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좀 문제가 있다.
예수께서도 ‘단 두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여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당신께서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18,18-19)라는 말씀도 하셨지만,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실 때는 ‘골방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라’(마태6,6)고 말씀하셨고 또 당신 스스로도 자주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군중을 보내신 뒤에 산에 올라가 날이 저물 때 까지 혼자 계셨다’(마태14,24).
제 아무리 훌륭한 강론을 듣고 깊이 감동했다 하여도, 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며칠 밤을 세워가며 철야기도를 한다해도, 제 아무리 신묘한 기적을 보고 신앙이 뜨거워졌다고 하더라도 내 자신 안에서 깊이 있게 내면화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외적인 차원의 경험들이 과연 며칠을 갈 수 있을까? 그러한 외적인 차원의 경험들이 과연 나를 얼마만큼이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들의 모든 신앙의 체험들을 내 마음 깊숙이 내면화시키고 내 몸 가득히 체화시켜서 진정으로 나를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혼자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혼자 있으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만나서 그 분의 음성을 듣고 따라야 한다. 학생의 실력이 학교에서 배운 바를 이해하고 심화시키는 자율학습을 통해서 나날이 성장하듯이 신자로서의 깊이, 신자답게 변화하는 정도는 주님의 가르침을 깨닫기 위해 혼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있는 시간에 달려있다.
공부는 안하면서 성적이 오르기만을 기대하는 자녀와 그를 바라보는 부모님.
기도는 안하면서 변화가 찾아오기만을 바라는 그리스도교 신자와 그를 바라보는 하느님 아버지.
그 마음이 어떨까?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 믿는 사람에게 성당에 한 번 나와 보라고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예, 저는 마음속으로는 다 믿어요. 어려울 땐 기도도 하고 그래요. 혹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꼭 천주교에 나갈 거예요.”
이 분의 말은 긍정적으로는 들리지만, 사실 현재로서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부정의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 혼자서는 가질 수 없고 증가시킬 수도 없습니다.
제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어머니께서 억지로라도 성당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헌금하라고 준 돈으로 오락실에 갔다가 시간을 때우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어머니께 발각되자 다음에는 일찍 가서 주보만 가지고 오락실 가서 시간을 때웠습니다. 그것마저 들켜버리자 하는 수 없이 미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아는 친구들도 없었고, 그래서 형과 같이 갔는데 둘이 미사시간에 떠들다가 모든 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신부님께 자랑스럽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우리 둘은 집으로 돌아오며 결심했습니다.
‘다음부턴 절대 성당 나오지 말자.’
그러나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성당에 다녀가야 했고, 그렇게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하고, 중고등학교 때도 주일미사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대단한 강론을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 자신도 모르게 신앙이 자라났습니다.
대학 시험을 마치고 철야기도회에 어머니 손에 끌려갔을 때 보았던 것들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이 손짓 하나에 주저앉고 하느님 나라의 음악소리를 듣고 저절로 감탄의 소리를 질렀으며 성모님이 선물하시는 꽃향기를 맡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핏덩이를 토하며 병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성령님에 이끌려 일어나서 성경을 히브리어로 말하고 다른 사람은 그 구절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했습니다. 성령님이 직접 하시는 말씀을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기도회는 그 이후로 어디에서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대학 들어가서는 주일학교 교사를 하였습니다. 성당에 있는 것이 좋아서 다른 많은 단체에 가입했고, 거의 매일 성당에 와서 살았습니다. 성당에 더 자주 오니 신앙에 관한 더 많은 것들을 접하게 되었고 그러니 신앙도 나 자신도 모르게 커져갔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한 아이가 떠들기에 미사 중에 불러내서 그냥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냥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사실 많은 기도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진실 되게 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머리를 들어보았는데 그 아이가 제 옆에 서서 용서해 달라고 사과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빨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 기도의 힘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무실에서 우연찮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열권짜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5년 만에 다 읽고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제가 되고나니 하느님의 섭리였던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억지로라도 성당에 나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와야 볼 수 있습니다. 봐야 믿을 수 있습니다.
나타나엘도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고 그래서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야 하고, 예루살렘, 혹은 적어도 유다지방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런데 필립보가 증언하는 메시아는 갈릴레아 지방의 나자렛 사람입니다.
필립보는 그를 자신의 믿음으로 설득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요한과 안드레아에게 하신 말씀처럼, 그저 “와서 보시오.”라고 초대할 뿐입니다. 필립보는 데리고 오기만 하면 믿음은 예수님께서 책임지실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나타나엘은 그 분을 직접 눈으로 보기위해 필립보를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타나엘을 보시며 이렇게 외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자신을 어떻게 아시느냐고 묻습니다. 안다는 말은 이미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역시 예수님께서도 그를 알기 위해 그를 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과 ‘머무른다’는 것, 또 ‘안다’는 것과 ‘와서 본다’는 것이 요한복음에서는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타나엘은 이미 자신을 보아서 아시고, 그래서 그 마음 안에 기억하고 사랑하시는 분이 메시아가 아닐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약 나타나엘이 필립보의 말을 듣고도 예수님을 직접 보기 위해 길을 나서지 않았다면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을 주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어, 나타나엘에게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보아가며 커지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와서 보지 않으면 신앙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오기 위한 노력만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보게 될 것이고 믿고 될 것이며 또 믿는 이들에겐 그 신앙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며 초대하고 있습니다. 남은 것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분 앞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오기만 하면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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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요비 신부님
작년 가을, 아주 어린 시절에 우리 가족에게 교리교육을 해주신 인보성체수도회 오 수산나 수녀님이 사진 한 장을 보내주셨다. 이 사진은 단기 4291년(1958년) 4월 6일에 찍은 흑백사진으로, 어머님이 청평본당에서 윤을수 신부님(인보성체수도회 설립자)께 세례를 받고 찍은 가족사진이다.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었는데, 중간에 잦은 이사로 분실하여 늘 마음으로 아쉬워했었다. 가족들이 아버지·어머니 주위에 서 있는데 묘하게도 내가 제일 가운데 있고, 아버님의 친구이셨던 고 김홍섭(바오로) 판사님이 우리와 함께하셨다.
그렇다! 「무상(無常)을 넘어서」의 저자, 지금까지도 법조인의 귀감으로 존경받는 사도 법관 김 판사님이 주말이면 우리집 사랑방에 머물며 전도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 선하고 마냥 온유하고 인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사진을 크게 확대하여 서재에 모시니 방안이 따스하게 안정을 찾은 듯하다.
전통적 유교문화에서 살아온 한 가정이 가톨릭 신앙으로 귀의한 것은 그 가정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로 전환된 것을 뜻하며 각 사람한테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이를 두고 사도 요한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 5,4)라고 선언하신다.
세례는 예수님의 영이 우리 인간 안에서 이루시는 새로움이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모님의 태중에서 잉태되시고 태어나셨듯이 같은 성령께서 우리 인간 각자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룩하심이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양자(養子)가 됨을 말함이니,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5ㄴ).
서울대교구 구요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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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우영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오늘 주님의 세례 장면을 복음으로 듣게 됩니다. 복음을 묵상하면 다음 두 가지가 의문으로 다가옵니다. 첫 번째는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죄 사함의 방법인 세례를 받으셨을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공현 축일과 예수님의 세례는 과연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주님의 공현 축일과 세례와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동방박사의 방문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 제자들의 믿음과 추종 등을 통해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특히 세례자 요한에게서 받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마르1,10)
이어서 예수님을 직접 증언하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1,11)
이렇듯이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며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아드님이시며, 성령이 함께 하시는 메시아이심이 확인됩니다. 사실 세례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요한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1,33-34)
요한은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게 되고 더욱 힘차게 증언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심을 드러낸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의 30년간의 사생활을 떠나 공생활을 시작하지요. 이렇게 세례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세례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첫 번째 질문인 왜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 사함의 방법인 세례를 받으셨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요한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요르단 강을 찾으셨을 때 황송하고 두려운 나머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3,14)하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3,15)하시면서 당신께서 세례를 받아야 함을 설득하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죄도 없으신 상태에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누구나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줌과 동시에 세례 성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누구나 성령을 받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1,8)고 증언하며, 세례를 통한 성령의 은사를 확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의 세례를 이후에도 여러 번 증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
또 승천하시는 그 중요한 순간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28,19-20)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세례가 이처럼 중요한 성사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몸소 세례에 참여하셨고,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그대로 세례를 통하여 죄에서 죽고 영원한 생명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가 있으셔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세례의 중요성과 그 은총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준비하면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또 한 번 증언합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1,7)고 증언합니다. 자신보다 더 큰 스승이 나타나자 제자들을 향해 그분을 따라가라고 지시하는 요한의 강직한 모습에서 우리는 진리를 읽습니다. 드러나셔야 하실 분은 오직 한 분, 주님뿐이십니다.
다가오는 주님 공현 대축일을 잘 준비하는 하루되시기를 바랍니다.
부산교구 권우영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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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
어제는 봉성체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우리 성당 내의 거동이 힘든 환자들에게 봉성체를 했지요. 사실 2000년에 봉성체를 해 본 뒤, 정말 오랜만에 하게 된 봉성체였습니다. 솔직히 힘들더군요. 그런데 봉성체를 하면서 예전에 만났던 어떤 형제님이 생각나더군요.
환자방문을 하러 병원에 갔다가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교리를 해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상황이 안 좋으니까 방문교리를 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렸지요. 이 형제님께서는 방문교리를 그때부터 하시게 되었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저에게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형제님께서는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얼마 살 수 없다는 진단을 이미 받았답니다. 말기 암 환자였거든요. 그런데 세례를 받은 뒤, 이 형제님이 이상해진 것입니다. 병원에서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하신 분께서, 갑자기 상태가 좋아지신 것입니다.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누워계셨던 분이 이제는 돌아다니시기까지 합니다. 형제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까지 하시더군요.
“신부님, 저는 정말로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만약 완전히 낫게 된다면 이제는 교리 선생님이 되어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혹시 기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병원에서 다시 진단해 본 결과, 암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위중한 상황이었고,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인데 저렇게 열정적으로 움직이시니 정말로 이상하다는 말만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족을 너무나 미워했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죽어도 용서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가족들. 그러나 이제는 용서해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자기가 이렇게 살아 있도록 한 것은 화해의 시간을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 같다는 말씀도 하시더군요. 그리고 가족들과 모두 화해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기쁘게 주님의 곁으로 가셨지요.
용서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요? 하지만 용서하지 않고 미움을 간직하면 간직할수록 결국 나의 상처는 더욱 더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오히려 손해인데도 불구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을 낮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보다는 위에 서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다시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이었지요. 그러나 그는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할 정도의 겸손함을 보여주시지요. 이렇게 자신을 낮추기에 하느님을 가장 잘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의 겸손함을 생각하여 봅니다. 얼마나 겸손하였는지……. 여전히 이기심과 욕심으로 한 없이 높아지려는 내 자신의 한심함을 떠올리면서, 세례자 요한의 겸손을 내 마음 안에 품어보겠다는 욕심을 감히 해 봅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세요. 주님께서도 도와주신답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