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의 茶유적지를 찾아서>
-다정 김규현저 강원일보발행 월간지『태백』연재분(1989.1~1990.6)
1-사선들 노니던 경포호반과 한송정(1989.1)
2-내설악 그윽했던 차향속 梅月堂과 卍海의 초상(1989.2)
3-茶禪一味에 빠졌던 淸平居士, 李資玄 (1989.3)
4-茶供養의 유래깃든 불교성지 오대산(1989.4)
5-栗谷의 발길머문 선경, 청학동(1989.5)워드작업
6-稚岳山 기슭에 어린 耘谷 元天錫의 茶香氣(1989.6)
*7-李承休의 茶心 깃든 頭陀山 기슭의 龜山洞(1989.7)
8-金石文에 서려있는 千年의 茶香 1-法泉寺(1989.8)
9-金剛山 남쪽 乾鳳寺를 스쳐간 茶人들(1989.9)
*10-金石文에 서려있는 千年의 茶香 2-居頓寺 (1989.10)
11-경포 活來亭 茶室에 만개한 鰲隱居士의 풍류(1989.11)
12-梅月堂의 발길따라 가보는 茶香어린 金剛山 1(1990.1)
13-梅月堂의 발길따라 가보는 茶香어린 金剛山 2(1990.2)
14-梅月堂의 발길따라 가보는 茶香어린 金剛山 3(1990.3)
*15-茶煙 날리던 전설의 고향, 동해의 洛山寺(1990.4)
*16-慵齋 成俔의 詩心깃든, 江原監營과 憑虛樓(1990.5)
17-대바람에 나부끼던 三陟 竹西樓의 十里茶煙(19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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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金石文에 서려있는 千年의 茶香 1(1989.8)
-法泉寺 <智光國師玄妙塔碑>를 찾아서
* 고려초기불교의 요람, 남한강
영서지방에서 발원하여 섬강(蟾江)이 된 물줄기가 크게 굽이쳐 여주평야에 이르는 남한강유역은 고려 초부터 이 나라 문화의 중심지였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신라문화권에서 중부지방으로의 문화의 이동은 고려 건국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 시대 신흥왕국 고려를 이끌었던 정신적 지주는 태조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도 밝혔듯이 호국적 불교였다. 그러므로 지정학적 관계로 남한강 유역은 자연스레 고려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금도 곳곳에 스러져 있기도, 또한 서 있기도 한 수많은 절과 탑과 비석들이 그 좋은 편린들이다.
특히 섬강가의 태조 왕건의 왕사를 지냈던 흥법사(興法寺)의 <진공대사비(眞空大師碑)>를 필두로 하여 고달사(고달사) <혜진대사비(慧眞大師碑)>, 칠장사(칠장사) <혜소국사비(慧炤國師碑)>를 비롯하여 부론면의 <지광국사비>와 거돈사(居頓寺) <원공국사비(圓空國師碑)> 등은 국보로 지정된 중요 문화재로써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위의 지광비와 원공비는 문화재적 가치를 차치하고라도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어서 필자는 천년의 풍상 속에서도 의연히 버티어 온 비석, 즉 금석문에서 오랜 세월동안 바래지 않는 차향기를 맡아보고자 길을 떠나보기로 한다.
“길을 떠나면 곳곳에 술벗”이라든가, 간만의 오랜만의 동창들과의 회포풀이로 숙취가 깨기 전, 번번이 길 안내를 맡아주신 현각(玄覺)스님의 재촉으로 눈을 비벼보니 홀연히 눈앞에 거대한 검은 비석이 다가와 있었다.
*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원주시에서 서쪽으로 60리 정도되는 거리, 원주군 부론면 법천리는 경기도와의 접경이기도 하지만, 남한강의 3지류-장호원, 충주, 원주 쪽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넓은 평야지대이어서 봉명산(鳳鳴산)은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이 산을 뒤로 한 절터는 거대한 당간지주만 덩그레 논밭 속에 남아 있을 뿐 그 천년의 영화는 풀벌레 소리에 묻혀 있었다.
현재의 법천2리 3개 부락이 사찰경내이었고, ‘장뜰’은 절의 장독간터를 가리키며 ‘도시랑’은 절의 객채가 있었던 곳을 가리킨다는, 부락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이곳이 한 때는 한 나라의 국사가 주석하였고, 또 천여 명의 승려들이 수도를 하여서 아침 저녁이면 쌀 씻는 물에 냇물이 흐려졌다는 천년거찰- 법천사란 말인가? 하는 무상함이 스쳐 지나감을 금할 수 없었다.
다만, 절터의 뒷산 기슭에 덩그레 서있는 현묘탑비(국보 59호) 만 그 영화를 실감케 해주었는데, 그나마 탑(국보101호)은 없어지고 비만 외롭게 서 있어서 그 거대한- 비석의 전체 크기는 보통 사람 키의 3배정도- 검은 돌비석은 무상함을 자아내게 만든다. 원래 탑과 탑비가 나란히 있었는데, 왜정초에 총독부(현 경복궁)로 탑은 이전되어 지금도 경복궁 뒤뜰에 자리 잡고 있다.
<지광국사현묘탑비> 龜趺의 등엔 王자가 머리부분엔 고기비늘이 조각되었다. 전체 높이 4,55m, 비석높이 2,97m 국보 제59호
그 때 비도 함께 이전할 계획이었으나 신기에 가까운 조각솜씨의 정교함과 그 거대함으로 도저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 아름다움이 어떠하였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현묘탑비의 문화재적인 묘사는 어려운 전문용어 없이는 설명할 수 없고 또 다른 지면에 누차 수록되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신이 듣기에 고타마부처(懼曇)가 힘써 이야기한 묘음은…”으로 시작되는 2,050여자에 달하는 방대한 비문에 의하여 이 아름다운 비석의 주인공 지광국사의 생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비석은 국사의 입적 후 18년 만인 1085년 문하시랑 정유산(鄭惟産)이 짓고 안민후(安民厚)가 글씨를 써 세웠다.
* “비가 오는가?” 라는 말을 남기고.
필자가 절터에 도착하였을 때는 때 마침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는데, 문득 한 시대 나라의 정신적 지주였던, 국사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87세를 일기로 이곳 법천사에서 열반한 광경을 비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는데,
그해 10월 23일, 늦은 저녁 우측으로 누워 잠이 드셨는데, 그날 밤 자정에 가랑비가 내렸다. 국사가 문득 깨어 일어나 앉아서 제자에게 이르기를, “밖에 비가 오느냐? ”고 묻고는 그 대답을 듣고 이에 입적하셨다.
옛적 사리불(鶖子)가 입멸할 적에 무색계의 천신의 눈물이 마치 봄비와 같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밤중의 비는 곧 제천의 눈물이 아니겠는가? 오호 슬프도다. 보년 81세. 승납 72년이라. 전날 밤에 마치 등잔 같은 별이 둘이 나타나고 쌍무지개가 붉은 빛을 띠우고 나타나기도 하였다.
지정(之貞) 11월9일 법고사(法皐寺)의 산 동쪽에 좋은 곳을 골라 다비(茶毘)하니 때에 사람과 귀신이 슬퍼하고 하늘은 어두워지고 물짐승 날짐승도 슬피 울고 산봉우리도 슬픈 듯 벌려 섰으니 이는 유무정물이 다 국사의 은덕에 감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광국사의 성은 원(元)씨요 고향은 원주이니 그는 고향에 와서 잠든 셈이나 그의 무덤, 즉 현묘탑이 서울로 옮겨진 지금 그는 어디에 잠들어 있는 것인지… 계속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대사의 이름은 해린(海麟), 자는 신룡(臣龍), 아명은 수몽(水夢), 원(元)씨가 속성이고 원주출신이다. 어머니 이씨가 바닷물이 출렁거리며 샘물이 솟아오르는 태몽을 꾸고 낳아서 붙여진 이름들이다.
조부는 주역을 깊히 공부하여 점을 잘 치기로 이름 높았고 부친은 서리였다. 처음에는 이수겸에게 공부했는데, 관상을 잘 보는 노파가 있어 중이 되어야 세상에 빛을 내겠다는 말을 듣고 곧 법고사의 관웅(寬雄)문하에 들어갔다. 얼마 있다가 해안사()의 준광(俊光)스님에게 머리깍고 수도하다가 16살에 왕륜사(王輪寺) 대선(大選)에 참가하여 대덕으로 뽑혔다. 뒤에 법고사로 돌아가는 중간에 진조(眞肇)라는 천문학자를 만나 그에게 역산법을 익혔다.
현종 12년(1021년) 서경 중흥사에서 여름강회를 열었는데, 이 때에 많은 문장을 지어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뒤에 중대사가 되어 수다사(水多寺)의 주지로 있었고 삼중대사를 거처 정종 12년(1046년) 승통이 되고 무종(?) 때는 궁중에서 유심묘의(唯心妙義)를 강하였다. 이 때 문하시중 이자연(李子淵)의 다섯 째 아들을 대사의 문하에 보내 머리를 깍고 중이 되게 하였다. 그가 뒤에 지금의 금산사 주지가 된 혜덕왕사 소현(韶顯)이다. 문종 10년(1056)에 왕사, 문종12년(1058)에는 국사로 봉해졌고 다음 해에는 내전에 들어가 백좌회(百座會)를 열기도 했다.
국사가 법천사로 내려가 은퇴하고자 여러 번 왕에게 허락을 청하였으나 간곡한 만류로 이루지 못하다가 문종 21년 (1067) 법천사로 내려오는데, 이 때 왕이 명하여 태자와 백관들이 남쪽 교외(南郊)에 나와 전별(餞別)을 하면서 이별을 슬퍼하였다.
주지하듯이 지광국사가 생존했던- 6대 성종에서 문종 사이의 6대왕의 걸친-고려초기는 불교문화의 황금기였다. 특히 문종 때에는 거란의 침입을 불교의 신앙심으로 막고자하는 대장경간행에 박차를 가할 시기였고, 왕실의 원찰인 거대한 흥왕사(興王寺)의 건립이 완공을 볼 단계였다. 더구나 문종은 그의 네 번째 아들을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을 송(宋)에 유학시켜 신흥문물을 접하게 하는 등 귀족의 자제가 다투어 출가하여 불교는 양적, 질적인 중흥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불교사적 배경 아래서 남한강 유역은 나라의 불교문화의 중심지로서 자리잡게 되고 지광국사는 그 중심인물이 된다.
* <현묘탑비>에 서려있는 차향(茶香)
이에 문종은 애도하여 차사(嗟使)를 보내 장사(葬事)의 모든 일을 맡게 하고 지광(智光)이란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아울러 차(茶), 향유(香油), 초(燭) 등과 원주의 창곡(倉穀)을 충분하도록 내리셨다.
위의 국사가 입적했을 때의 한 구절에서 우리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구양순(歐陽詢)의 구성궁법(九成宮法)의 글씨체로 선명하게 새겨진 ‘다(茶)’ 자를 찾을 수 있다. 다시 요즘말로 의석하면 조의(弔意)의 뜻으로 왕이 차를 보냈다는 말인데, 이는 당시에는 일반적인 습관이었다. 고려사에 나타난 이런 일례는 잠시 뒤로 미뤄두고 다시 비문을 더듬어 ‘다(茶)자를 더 찾아보기로 하자.
국사가 법천사로 내려가려고 하자 왕은 “중서사인(中書舍人) 정유산(鄭惟産)을 보내 차(茶) 보화(寶華) 등 모두 열거하기 번거로울 정도의 품목을 하사하시었다”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茶)’자와 ‘정유산’이라는 이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그 뒤 현묘탑비를 지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국사가 입적한 후 18년 만에 세워진 비문에서 왕이 하사한 물품중에 ‘다(茶)’의 기사는 더욱 생생한 증거가 되는 셈이다.
그럼 여기서 고려사예부와 열전 등의 문헌을 통해서 고려시대 초기의 차문화의 실태를 살펴보고 다시 비문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고려시대 공식행사에서 차가 사용된 것은 태조의 훈요십조(訓要十條)부터 국가의 양대 중요의식으로 중요시된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煙燈會) 부터였다. 이 때 반드시 진다의식(進茶儀式)으로 다과(茶果)를 베풀고 또 신하들에게 차를 예물로 하사하였다. 그 뒤로도 국가의 대소연회에 차는 필수품으로 등장하여 신하가 죽었을 때, 사시늘 접대할 때, 왕자가 탄생하거나 책봉될 때, 공주가 시집 갈 때, 군신회의 때, 등 11가지 예식에 차는 반드시 예물로 쓰였으며 특히 신하의 장례시에는 너무나 빈번히 하사되었기에 열거하기가 곤란할 지경이다.
지광국사의 생존시인 문종 사이(때)만 하여도(해도) 10여차례 조의로 쓰여진 예가(기록이) 보인다.
한 이채로운 예를 하나 들어본다. 제6대 성종(成宗)은 임금의 몸으로 손수 불공(佛供)에 쓸 차를 만들었는데, 덩어리차(團茶)를 다연(차맷돌)茶碾)에다 손수 가는 모습을 본 원로신하 최승노(崔承老)는 상소를 올린다.
상감이 공덕을 쌓으려고 손수 차를 갈아 정성을 다하시는데, 이는 부질없는 일로 옥체를 상할까 두렵습니다. 이런 공덕 쌓는 일은 광종(光宗)때부터 있었던 일이기는 하나 이것은 불가의 인과응보를 그대로 믿는데서 오는 부질없는 일인 줄 압니다(略)
그러나 막상 최승노가 죽었을 때 성종은 뇌원차(腦原茶) 200각(角) 대차(大茶) 10근(斤)을 부의(賻儀)로 하사한다.
위의 기사는 고려 차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양적인 면에서도 어떤 경우-성종 때 최량(崔亮)의 경우는 뇌원차 1,000각을 문종 때의 황보전(黃甫專)의 경우는 대차 100근을 하사하였다-에는 무척 많은 량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모두 고려 차문화 발전에 요인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우리의 지장국사의 ‘차 하사’ 기록 같은, 고려사에는 나타나지 않는 사실들까지 합치면, ‘하사품’은 막대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 더 소개하면, 지광국사의 제자인 대각국사 의천은 그의 문집에,
신 승의천(僧義天)은 올리나이다. 이달 13일에 중사(中使)가 와서 칙지와 어다(禦茶) 20각(角)과 약을 내리시니 거룩한 사랑을 엎드려 받사옵니다. 부드러운 싹(嫩芽)과 신령스러운 약은…(略)
이란 상소문을 남기는데, 이런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차의 하사’는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천(荈)’자(字)의 등장
흔히 쓰여지지 않는 글자(荈)이기에 여기서 먼저 옥편을 찾아보기로 한다.
“늦게 딴 차, 즉 명(茗)과 같다(晩取爲茗惑荈)” 라고 옥편은 풀이한다. 다시 풀이하면 “차나무(茶木) 잎은 늦게 따서 만든 차” 라는 뜻이고 음만은 ‘천’으로 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모든 차에 대한 기록에서 ‘다(茶)’나 ‘명(茗)’은 흔히 보아왔다. 그러나 천자는 낯선 글자이다. 왜냐면 차의 다섯가지 이름 중에서 3자는 거의 쓰인 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중 한자가 처음(?)으로 우리의 지광국사 비문, 즉 <현묘탑비>에 등장한다.
다시 비문 속으로 들어가서, “임금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유충(異惟忠)을 보내 솜털법복()과 차향(香荈)에 쓰이는 금은그릇(銀茶器) 등을 하사()하시니…”라는 구절을 살펴보면 여기에 ‘천(荈)’ 자가 보인다.
필자의 과문 탓인지는 몰라도 금석문이나 문헌 속에서의 유일한 출현(?)이 아닌가 한다. 『다경』의 인용에서는 쓰인 예가 있지만, 독자적 쓰임은 처음이라는데 점에서 위 기사는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잠시 우리나라 현존하는 금석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차’의 기록은 언제, 누구의 비석에서 나타날까, 하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아직까지 가장 오래된 것은 진감국사(眞鑑國師,774~850)의 비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짓고 쓴 이 비석은 쌍계사(雙溪寺)에 현존하고 있어 ‘한명(漢茗)’이라는 두 글 글자를 뚜렷이 찾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두 세 개 정도가 현존치는 않지만, 기록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것으로는 제일 먼저 원성군 부론면 청산리에 있는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에 ‘명(茗)’자가 보이고 그 다음으로는 <지광비> 차례가 된다.
물론 위의 차례는 역사적인 순서이지만, 다른 면-크기, 정교한, 상태와 무엇보다 다(茶), 명(茗), 천(荈) 등이 골고루 쓰였다는 면-에서는 현묘탑은 단연 최고()로 꼽을 수 있다. 영서지방의 보배 중의 보배라 아니할 수 없다.
* 남한강은 유유히 흐르는데…
법천사의 성쇠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한강은 흐르고 있었다. 법천사가 폐허가 된 때가 언제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조선조 초기 때만해도 건재하였음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전하고 있다. 조선 초의 학자 태제(泰齋)유방선(柳方善)이 일찍이 이절에서 제자를 가르쳤는데, 권람(權攬),한명회(韓明澮), 강효문(康孝文), 서거정(徐居正) 등이 이곳에서 학문을 익혔다.
그들이 이곳에서 공부할 때 글씨를 써 놓은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유윤겸(柳允謙)은 이렇게 읊었다.
안탑(雁塔)에 이름을 쓰는 것은 옛날부터 전하는 것인데, 군에게 붙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지금에 두려워하는 것은 풍우로 인하여 이끼가 올라서 손으로 만져도 당년의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지나 않을는지…
또 서거정은 동문수학하였던 친구에게 그 때를 회고하면서,
치악산 밑에서 글 읽던 절, 젊을 때 노닐던 날의 일들 역력히 기억나네.
법천사 뜰아래서 탑에다 시를 써 놓았고, 흥법사(興法寺) 대 앞에서는 먹으로 탁본(拓本)을 하였지. 그 때의 행장은 나귀 한 마리 정도뿐이더니 지금은 돌아가는 길을 꿈이 먼저 아는구나. 머리가 희어지도록 다시 돌아가려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대를 보내는 이 때, 내 심정 흔들리는구려.
수몽(水夢)이라는 아명이 뜻하듯이 유난히도 물과 인연이 많았던 지광국사가 잠들었던 이곳, 남한강가의 봉명산 산등성이, 국사의 마지막 말처럼 빗방울은 떨어지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꿈틀거리며 기어갈듯 한 거북이 등 위에서 천년의 풍상을 견디어온 웅장한 비석은 논바닥으로 변한 옛 절터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인가는 돌아올 분신-‘현묘탑’ 을 기다리면서…
첫댓글 심통님글을 보다가 풋한 기역이 나서....특히 마지막 구절이 더 가슴으로 파고 듭니다. "언제인가는 돌아올 분신-‘현묘탑’ 을 기다리면서…'라는 구절이 말입니다
이글은 20여년 전에, 제가 처음으로 어렵게 발굴하여 매스컴에 소개한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우리나라, 특히 강원도의 '차문화의 수준'은 밑바닥이어서, 위의 목차같은 2년간의 연재물은 주목을 전혀 받지 못했는데, 최근들어 몇몇 분들에 의해 여러번 '재활용(?)' 되어 알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리신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서울로 징발을 당해 간 엉망진창이 된채 봉합이 된 현묘탑을 모셔올수만 있다면 기필코 모셔야할 책무가 후손들에게 있음일 짐데......._()_
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