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1-5
『헉, 헉!』
어깨에 자루까지 박힌 비수 하나를 꽂은 채 육초량은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용화산의 숲 속이었다. 한 번도 빗나감이 없이 무섭게 날아드는
그의 강전을 겁낸 기마 무사들은 섣불리 숲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십
여 장 밖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추격조가 편성되어 뒤를
쫓을 게 분명했다. 주린 들개들처럼 코를 벌름거리고 피 냄새를 핥으며
다가올 것이다.
육초량은 어깨 죽지에 박힌 비수를 거칠게 잡아 뽑았다. 엉겨붙은 피
와 살점이 떨어져 나가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정수리를 꿰뚫었다.
『빌어먹을. 정말 재수 없는 날이군.』
비명 대신 어금니를 악물며 투덜거렸다. 어제 밤부터 이 새벽에 이르
기까지 두 개의 비수를 살 속에 박아 넣은 것이다. 속옷을 찢어 상처를
대강 싸매고 무성한 참나무 가지 사이로 내려앉아 있는 하늘을 보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명(黎明)에 젖은 구름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곧 비가 쏟아질 모양이었다.
(가자. 나서 자란 고향에서도 쫓긴 놈이 어디에 간들 마음 편하게 살
겠는가.)
육초량은 뱃속에서부터 게워 올린 끈적한 침을 숲 밖으로 뱉어 주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산과 함께 사는 거다. 산은 결코 나를 내쫓지 않겠지. 누구도 더 이
상 나를 쫓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때는 내가 세상 모두를 쫓는 거다.)
육초량은 울창한 숲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의 은행술을
따라 잡을 자는 아무도 없다. 머지않아 그의 존재는 세상에서 까맣게 잊
혀져 버리고 말 것이었다.
만년의 침묵을 지키며 용이 웅크린 듯 구비구비 누워 있는 용화산의
십삼봉이 새로 받아들인 한 생명을 어머니처럼 품고 멀리서 다가오는 비
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
이 년이 지나갔다. 세상에서의 이 년이라면 나고 죽는 일들이 수없이
반복될 세월이었지만, 숲과 개울과 바위 봉우리들 속에서는 뜨고 지는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이 변함이 없듯 그렇게 아무 시비 거리도 없이 흘
러가는 물 같은 날들이다.
염천(炎天)의 더위를 어깨위에 얹고 쫓겨 들어온 용화산이었다. 그 여
름이 두 번이나 다시 찾아왔고, 지겹다고 느꼈을 때에는 언제나 가을이
슬금슬금 다가섰다.
계절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것은 산이다. 용화산의 구석구석에는 어느
새 가을의 스산함이 찾아들고 있었다.
쿠쿠쿠쿠--!
계곡 가득 뽀얀 물안개를 피워 올리며 수직의 폭포가 장엄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그 거센 폭포의 물줄기 속에 석상처럼 우뚝 서 있는 그
림자 하나가 있었다. 거친 힘으로 정수리를 짓누르는 수압을 온몸으로
견디며 마치 폭포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고 있기라도 하듯 부동하는 다부
진 그림자였다. 폭포의 물줄기에 갇혀 꼼짝도 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그
의 몸은 그러나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 * * *
용화산의 십삼봉 중 아홉 번 째의 봉우리인 용추봉 아래의 계곡이었다.
깊은 삼림과 수 겹으로 막아선 기암절벽에 가려져 그런 곳이 있는지조
차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절곡(絶谷). 육초량은 그곳을 이년 전의 봄
에 백원(白猿) 한 마리를 뒤쫓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그 기묘한 풍광에 홀려 넋을 잃고 사흘을 보낸 육초량은 그곳을 백원
곡(白猿谷)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후 그는 틈틈이 백원곡에 찾아와 며칠
씩 묵었다. 올 때마다 달라져 있는 듯한 그 신묘로운 기운과 선경(仙景)
은 어느새 어린 육초량의 가슴속에 이상향으로 자리잡았다.
드디어 이년 전 가을 무렵, 세상을 등진 육초량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몸으로 다시 찾아와서는 아예 계곡에 움막을 짓고 눌러 앉아 살기 시작
했다.
<검의 도리를 깨우치기 전에는 결코 내려가지 않으리라.> 육초량은
그렇게 다부진 결심을 하고 있었다. 더이상 쫓기지 않고, 이제는 스스로
가 세상을 쫓는 자가 되기 위함이었다. 죽는 날까지 무인의 길을 갔던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함이었고, 가문의 명예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뼈에 새겨진 원한마저도 사사로운 일로 여길만큼 그의 뜻은 원대했고,
품은 의지가 굳었다. 아버지의 훈도(訓導)가 심어준 영향이었다.
철협 강사옥. 명실공히 천하제일의 고수로 꼽히는 그가 무예를 전수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실로 일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한 천재일우
의 기회였다. 무인이 되기를 바라는 자치고 누가 강사옥의 무학을 일초
반식이라도 배우고자 원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육초량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거절했다.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열 여섯의 그의 가슴에 새겨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럴 자신도 있었다.
당시 그의 어린 가슴속에는 강사옥에 대한 뿌리깊은 존경심과 함께 묘
한 호승심이 솟구쳐 올랐었다. 그가 옥풍규의 외숙이라는 데에 더욱 그
랬다. 육초량은 강사옥을 바라보며 반발과 함께 적의마저 느꼈던 것이다.
(그도 사람이다. 무신(武神)인 줄 알았던 내가 바보였다. 그도 해냈는
데 나라고 하지 못할 게 무언가.)
육초량은 폭포수가 가져다 주는 고통과 싸우며 입술을 악물었다.
(그가 천하제일의 고수라면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 반
드시 내 힘으로 해내고 말겠다.)
그의 이 오기와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육초량은 그 고집 하나로 폭포의 엄청난 수압과 싸우기 시작했다.
흔히 검도를 터득하려는 자는 먼저 검부터 잡고 휘두르려고 한다. 그
러나 육초량은 그 생각을 버리고 있었다. 검은 단지 팔로만 휘두르는 것
이 아니라 온몸으로 휘둘러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머리 속에 담아 두고 있던 이 도리를 깨닫는 데 석 달이 걸렸다. 백원
곡을 달려가는 바람을 본 것이다.
작은 풀잎 하나를 흔드는 산들바람을 보았고, 아름드리 거목을 통째로
흔들어 대는 폭풍도 보았다. 아무리 작은 풀잎이라 하더라도 바람을 결
코 그의 일부분만으로 흔들지 않았다. 폭풍우와도 같이 온몸으로 부딪쳐
흔드는 것이다.
석 달 동안 폭포를 마주하여 가부좌를 튼 채 주저앉아 오직 그것을 바
라보던 육초량은 처음으로 희열이라는 것을 맛보았다. 아무 공도 대가도
없이 백원곡의 바람이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때로는 한 폭의 좁은 공간을 맴돌거나, 또 때로는 온 산 전체를 휘감
아 갈 때도 바람은 저의 모든 것을 기울여 불었다. 바람에는 처음부터
일부분이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 바람 속에서 육초량은 그가 보고자
하던 첫 번째의 검을 보았다.
<온몸으로 휘두르기 위해서는 굳센 호흡과 자유로운 두 발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힘의 강약을 마음대
로 조절할 수 있는 기(氣)의 단련, 그것은 곧 호흡의 단련이기도 했다.
바람의 변화는 무궁하고 그 완급은 신묘하다. 좁게는 한 점에 집중하
고, 넓게는 천지를 뒤덮는 폭풍세. 빠르고 강함과, 느리고 부드러움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운신(運身)의 묘용(妙用)이었다.
그 운신의 묘법을 터득하기 위한 보행(步行)의 도리를 알아내기 위하여
육초량은 그 후 이년이 지날 동안 오직 폭포의 수압과 싸웠다.
처음 폭포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을 때 그는 전신을 찢어버릴 듯 무겁
게 떨어져 내리는 수압의 공포에 파랗게 질렸다. 그것은 살을 에이는 듯
한 한겨울의 차가운 바람보다 더 날카로웠고, 무정했다. 그는 채 일각도
견디지 못하고 퉁겨져 나오고 말았다. 얼음보다 차가운 용담 깊이 빠져
들면서도 추운 줄을 몰랐다. 폭포의 그 무서움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이
그를 안도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육초량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시 뛰어들고 다시 내팽개쳐지는
일을 그 해 겨울 내내 되풀이하면서 그의 살갗은 쩍쩍 갈라졌고, 얼음에
찢기고 긁힌 상처들이 아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육초량은 이빨을 딱
딱 떨면서도 두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추위가 뼈속에 파고들고, 살갗
의 상처가 깊을수록 그의 눈빛은 더욱 맑아져 갔고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잡념도 사라져갔다.
(흥, 강사옥이라고? 그에게 배워서 천하제일의 고수가 된다면 그게 뭐
떳떳하겠어? 기껏해야 그의 분신이 되는 거겠지. 누구에게 배운다고 해
도 마찬가지야. 두고 봐. 나는 나만의 검, 육초량의 검으로 천하제일이
되고 말 테다.)
고통이 클수록 오기도 커져갔다. 그리고 그처럼 무모하고 어리석기까
지 한 집념이 그에게 굽힐 줄 모르는 투지를 불어넣어 주었고, 그 첫 해
의 겨울을 이기게 해 준 힘이 되었다.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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