옙분님 댁에서 아침을 먹고 곧바로 밭으로 향했다.
그새 이~삼일 해가 들어서 밭이 약간 꾸덕해 졌기에
어제 여주에서 전화로 급하게 사람을 얻었다.
보통 밭일을 할 때는 동네에서 가까운 사람 서너분을 얻어서 하는데
또 비 예보가 있고 우리 감자를 드시겠다고 의리를 지켜주고 기다려 주는
카페 회원들에게 얼른 감자를 보내야지 싶어서 남편과 의논하여 결단을 했다.
결단을 했다는 것이 의연하게 들릴 것인데 그 이유는 그러하다.
보통 사람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의 품값은 올해 5만원이다.
여자의 경우이고 남자는 7만원이나 8만원을 한다.
그리고 일 하는 것에 따라서 조금 더 얹어 드리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감자를 캐면 삽질을 한다던가 하는 힘든일은 더 드리는 것이다.
우리는 땅이 보통땅이 아니고 좀 질어서 감자 캐는 기계로 못 캐고
경운기로 캐고 있다.
남자분이 경운기로 감자골을 켜 놓으면 그 다음에 여자들이 호미를 가지고
줏어 담는 형식인데 일이 급하니 동네 분들로 안되서
전문 인력을 대 주는 분에게 연락을 해서 지난번과 이번에 걸쳐 열명을 얻었다.
이 분들은 주인이 신경을 안 써도 된다.
이 인력을 관리하는 조장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분이
어느 밭 몇명 이렇게 말만하면 알아서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다섯시까지
알아서 밭까지 인력을 대령 시키고 도시락도 싸 오고 새참도 역시 본인들이 다 준비한다.
그 대신 품값이 보통 여자들이 6만5천원에서 7만원정도 한다.
남자는 10만원
거기 일하는 분 중에 친정마을에 사는 아주머니가 계셔서
얼마를 가져 가시냐고 여쭤 보았더니 본인은 5만원을 가져 가신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별 신경 안 쓰고 조장이 하라는데로만 하면 되고
데려가고 데려다 주고 하니 그냥 이웃품일을 하는 것 보다 낫다고 하신다.
주인은 그냥 가끔 가서 부족한 것 예를 들어 박스라든가
연장이 망가지거나 하면 바꿔 주는 것 등만 하면 되니
우리가 출발할 적에 이미 밭에 나와서 일을 하시는 중이었다.
그런데 전번에도 그렇더니 하루 더 말라도 진흙밭이 마찬가지라 감자꼴이 흙이 반이다.
경운기도 질어서 잘 나가지를 못하니 일이 많이 늦어졌다.
감자를 한골 줏는데 세사람이 붙어서 일을 하니 마사토 밭이나 뽀송히 마른 밭에서 일하는 것의
세배의 인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질지 않을 때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두 사람의 인력이 하고 있는 셈이다.
일하는 사람이야 일당 받고 아무 일이나 하면 되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무척 손해다.
오전내 감자를 캤는데 예상의 1/3도 못했다.
거기에 있으려니 이런 밭에 일을 시킨다고 하도 아주머니들께서 말들이 많아서
남편과 나는 다른 밭으로 따로 떨어져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점심 때가 다 되었는데 아는 할머니께서 전화를 하셨다.
감자를 캐서 다 말려 놓았으니 팔아 달라는 것이다.
어차피 한 낮에는 뜨거워서 우리는 일을 못하니 그럼 가서 그것을 싣고
감자 공판장을 다녀 오기로 했다.
이 할머니는 우리가 영월로 귀농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이다.
80이 훨씬 넘으셧는데 혼자 살고 계신다.
거의 7-8년을 뵙는데 딸이 하나 있다고 들었지만 한번도 자녀를 본 적이 없었다.
처음 뵐 때는 안 그러시더니 이제는 허리가 90도로 굽고 지팡이를 안 짚으면
걸으시지도 못하신다.
예전에는 80이 넘으셔도 남의 품일을 다니셨는데 작년부터는 품일도 못하시고
오로지 하나 감자농사만 짓고 계신다.
올해도 가 보았더니 감자농사를 얼마나 잘 지어 놓으셧는지.......
<올해는 감자값이 싼가 장사꾼들이 한명도 안와~
그래 할 수 없이 전화를 했다네 좀 팔아 주어야 겠어>
할머니께서 미안하다고 연실 말씀을 하셧다.
소규모로 농사하고 거기다가 차가 있다거나 하지 않은 대부분의 농사하는 어르신들은
장삿꾼이 와서 농산물을 가져 간다.
그리고 거기서 주면 주는데로 받는 편이고 그 가격은 최하 라고 할 수 있다.
조금 나은 사람들은 가지고 나가서 상회를 다니며 맘에 맡게
약간은 골라서 판매를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은 우리처럼 직거래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차도 없고 지고 나갈 엄두도 못 내는 보통의 사람들
특히 시골에 많은, 혼자서 농사하는 할머니들은 장사꾼이 올 때만 바라는데
올해 감자값이 싸니 장사꾼이 안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할머니는 이제 귀도 완전 어두워 지셔서 감자값이 싸다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가 보다
남편이 차에다 박스를 지어서 할머니께서 농사하신 열 일곱박스의 감자를 실었다.
차 바닥에 거의 가득찼다.
할머니는 대문앞에 서서 잘 팔아 달라고 손을 흔드신다.
이 감자를 팔아서 여름을 나고 겨울까지도 나셔야 할지도 모르겠다.
연탄도 사고 쌀도 사셔야 할 것이다.
우리 내외는 귀농초기부터 이렇게 주위에 차가 없는 어르신들의
농산물을 팔아 드렸다.
귀농초에 어느 해에는 할머니 수술을 시켜 드리려는 어르신에게
돈이 급하다고 하셔서 고추를 사 놓고 파느라고 얼마나 애를 먹은 적도 있었고
사실 지금 매년 하고 있는 김치를 담아 파는 일도 배추값이 폭락했는데
생계 때문에 걱정하는 어떤 어르신 가정을 돕느라고 시작 된 것이기도 하다.
제천으로 가다가 오늘은 공판장이 쉬는 날이라
그 대용으로 하는 대형농산물 거래하는 곳에 갔더니
팔려고 나온 감자가 트럭마다
가득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웅성대고 어떤이들은 싸움을 하면서
1톤차 가득 싣고 온 감자를 도로 실으며 갖다가 버리면 버렸지 그 가격에는
못 판다고 얼굴이 벌개서 판매장을 떠났다.
접수하고 우리 차례가 되었는데 감자를 둘러 보더니
<감자는 좋구만>
하고서는 파란 쪽지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준 쪽지를 가지고 가라고 하는 상회에 갔더니
5만원을 내 주었다.
깜짝 놀래서 혹시 돈을 잘못 주신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맞다는 것이다.
열일곱 박스에 5만원
거기다가 감자박스값 천원을 빼면 감자 한박스에 2천원인 셈이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재작년에 희망님이 감자를 캐 가지고 공판장에 갔더니
2,000원을 쳐 주더라고 해서 우리 모두 그걸 왜 팔았냐고 몰아 세운적이 있었다.
그 때 희망님이 힘없이 말했었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와서 어디다 어떻게 팔아요.
귀농한지 얼마 안되서 아는데도 없고 .....
나야말로 아무말도 못하고 그곳을 나왔다.
우리가 안 판다고 도로 가져 가도 하나도 아쉬워 할 이가 없었다.
이 돈 5만원을 어쩌란 말인가
남편은 어이가 없어 도로 싣고 가자고 난리였다.
도로 싣고가서 우리는 어쩔 것인가 말이다.
사실 우리도 큰일이었다.
몇년동안 우리 감자를 사 가던 큰 식당이 있었다.
먼 친척이 되는데 유기농 식재료를 취급한다는 자부심 가득한 곳이었다.
서울에서 꽤 잘 나가서 농사를 하면 한차 실어다 그 댁에 팔고
몫돈을 받으면 남편에게 건내 주며
<당신 용돈 하시오>
하고 당당히 내밀어 주면 남편은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소 마누라 내 아끼며 잘 쓰리다>
하고 기뻐하던 남편이었고 우리 부부에게는 농사하는 나름의 힘이고
행복이었다.
그런데 며칠전에 그 이가 어렵게 전화를 했다.
올해는 가까운 친척이 감자농사를 해서 그 댁 것을 팔아 주어야 하게 생겨서
우리 것은 못 팔아 주게 되었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인삿말을 하며 덧붙이는 말이 의미가 섞인 말이었다.
<사실 손님들이 유기농을 알아 주지도 않아 ...... 값만 가지고 그러지......>
그 말은 곧 우리것이 비싸서 더이상 못 사 먹겠다는 것이다.
유기농을 알아 주지도 않으니 그냥 보통의 것을 싸게 사서 쓰겠다는 다른 말임을
충분히 알아 차릴 수 있었다.
그 때도 실망하지 않았다 좀 아쉽긴 하지만 지금 못 팔면 우리야 저장햇다가
봄에 팔아도 되니 .......
이렇게 잘 넘겼다.
내 코가 석자니 이 노릇을 어쩌자는 말인가
농산물 직거래장을 나서며 어지럽고 속이 매스꺼워지며 갑자기 온 몸이
욱신거리고 쑤셔 왔다.
어젯밤에도 좀 안 좋기는 했지만 속이 매스껍지는 않았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할 수 없이 근처에 있는 친구네 가게 평상에 앉아 좀 쉬고 있는데
아는 얼굴이 물건을 사러 가게에 왔다가 나를 보더니 반가워 했다.
바로 사촌올케였다.
<아니 고모 왜 그러고 있어? 어디 아파 얼굴이 노래 가지고>
자초지종을 들은 올케언니는 펄쩍 뛰었다.
바로 어제 가게에서 감자 한박스에 30,000원을 주었는데 무슨 말이냐고.....
그래서 남편과 나 계산을 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처음 농사해서 판매를 하고 값이 없어 망연자실 해 있을적에
어떤 선배 농삿꾼 어르신이 우리에게 그런말을 했었다.
<농사는 계산하지 말고 해야지 계산해 버릇하면 농사 못하네
그냥 하늘에 맡기고 농사하는게 바른 농삿꾼이고 잘 하는 농삿꾼이 되는 길이야
그래도 누군가 농사를 지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네>
우리는 그 어르신의 말데로 9년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들어 간것이 얼마
판매 한것이 얼마 따져 보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적자였는지 흑자를 냈는지도 몰랐었다.
그냥 우리들 밥 안굶고 먹고 살고 있고 마음 편하고 사 먹는 이들에게도
안전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 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별 판매 걱정 안하고 모두 직거래로 팔았으니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것은 제껴 놓더라도 우리 올해 농사한 것을 따져 보니
벌써 밑지고 있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감자만 해도 떠내려 간것은 그냥 두고 지금 당장 판매가 나가는 것을 따져 보았다.
올해 나는 20키로 감자 한박스에 4만원에 판매를 하고 있다.
도시에서 사 먹는 입장에서도 좀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유기농 농산물에 대면 싼 가격이고
그런데 거기에서 박스값과 택배비를 내가 부담하니 5천원을 빼면
정확한 가격은 3만5천원이다.
만약 1000평에서 100박스를 판매 한다고 하면 3백 오십만원이다.
그런데 현재 50박스 정도 캤는데 캐는 품값만 두번에 걸쳐 130만원이 들어 갔다.
이제 반을 캤으니 비가 그치고 마저 캐려면 또 인건비가 그정도 들어 가야 한다.
거기에 우리가 고구마밭을 합쳐서 1년 도지를 150만원을 이미 지불했다.
봄에 밭 가는 비용으로 70만원도 이미 나갔다.
감자 종자값이 60만원 정도 나갔다.
또한 심는 농자재 비닐 거름 유박 등으로 역시 20만원 정도
심을 때 품값 50만원 정도
대충 계산을 해 보니 감자값은 다 팔면 350만원이고
현재 나간 돈만 480만원 정도이다.
여기에 새참비용이며 우리내외 품값은 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150만원의 손해를 보고 가는 중이다.
우리가 이럴진데 보통의 다른 집들은.....
괜히 계산을 해 가지고 정말 어이가 없었다.
저 남은 감자를 캐서 팔아도 그것은 인건비로 다 들어 갈 것이다,
그런데 후작으로 거기에 김장을 심어야 하니 안 캘 수가 없다.
감자는 올해 얼마나 잘 되었는지 흙을 털고 보면 어쩌면 그렇게 잘 생겼는지 ......
생병이 나서 집으로 오자마자 드러 누웠다.
머리가 아파오고 어찌 할 줄을 모르겠다.
남편은 자기가 잘못 한 것도 없으면서 내 눈치를 보며 점심도 못 먹었다.
둘이 바라 보고 있어봐야 좋을게 없다고 판단 되었는지
다시 밭으로 나가 버렸다.
눈물이 계속 흘러 내렸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 왔던 자부심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물 콧물까지 쏟아내며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밖에 누가 지나가다가 들었으면 부모님이 돌아 가셧나 했을 것이다.
나는 나만 열심히 농사하면 되는 줄 알았다.
자연에게 해가 되게 않는다고 몇년동안 주위에서 꾸준히도 유혹해 온
화학비료 제초제 안쓰고 잘 버텨내며 우리 같이 농사하는 사람이 늘어 가다가 보면
언젠가는 환경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농사짓기가 터를 튼튼히 하여
바른 먹거리가 자리를 잡는 때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자부심으로 즐겁게
농사하였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 대기업의 횡포에 농사를 잘 지어도
판로가 없어 아니면 그 가격이 없어 자식 같이 농사 지어 놓은 것들을
갈아 엎어야 하다니.....
내가 우는 것은 나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다.
주위에 농사 밖에 몰라서 농사만 짓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농부들 때문에
우는 것이었다.
장삿꾼들이 가격을 정해주면 싸면 싼데로 올해는 금이 그렇데
할 수 없지 뭐 하고 채념하며 순응하는 농사하는 어르신들 때문에 우는 것이었다.
하긴 그 가격에 대기업과 장삿꾼들이 조작과 기여가 있음을 알아도
뭐 어쩔 힘이 없으니 늘 그렇데...... 하고 순한 소처럼 눈만 꿈벅이는
농부들의 모습 때문에......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났더니 이번에는 머리가 아팠다.
눈알도 아프고 다리에 쥐도 나는 것 같았다.
어제 종일 쭈구리고 앉아 풀밭을 맨 때문이다.
여주 고구마 밭도 마찬가지다.
저 고구마가 잘 되어서 예년가격으로 판다고 해도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고구마 예상 가격은 100만원이다.
그런데 그 고구마 값이 또 가을이 되어 봐야 아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마 싹 값으로 벌써 50만원 가량이 들어 가고
오고 가는 차 기름값과 따져 보면 벌써 100만원이 들어 갔다.
어쩌란 말인가
옥수수도 마찬가지다
올해 왜 우리가 옥수수를 조금 심었느냐고 물어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옥수수 농사는 남편이 하기 싫어한다.
역시 도지를 얻어서 하고 있는데 옥수수의 경우도 한평에 열그루를 기준한다.
하나에 한개 밖에 못 따는데 보통 심은 것의 80%를 딴다.
옥수수는 다른 작물 보다 거름을 많이 먹어서 유기농거름을 쓰는 우리 같은 경우는
거름 값이 만만치 않다
한평 도지의 값은 1000원으로 친다.
심고 가꾸는데 들어 간 인건비를 700원을 치면
후작을 할 경우에는 괜찮지만 후작을 안하니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 말고 다른 이들의 경우
옥수수 한평을 장삿꾼에게 넘길 경우 한통에 잘 받아야 300원 꼴인데
3*8= 24 한평에 2400원 꼴이다.
소매를 하면 이 보다 낫지만 계산을 해 보면 한평에서 잘해야 500-600원
자기 땅에 농사 지어도 1500원 꼴이니 정말 안 남는 농사가 옥수수이다.
그나마 여물어 따서 팔 수 있는 시기가 고작 3-4일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여물어서 못 쓰게 되니 장삿꾼들은 다니며 잘 보아 두었다가
못 팔아서 동동거리는 농가에 가서 인심 쓰며 억지로 사 주는 척하며
싸게 가져가 버린다.
초기 비용을 농협에서 빚내서 시작을 했으니 너무 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안 팔고 버틸수가 없다,.
시골에서 돈 나올 구멍이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옥수수 농사를 짓기 싫어하는 것은 또 농산물 중에 말이 제일 많기 때문이다.
간신히 맷돼지 습격을 피해 잘 길러서 판매가 되면
직접 파는 직거래의 경우 취향이 다 다르다.
똑같은 것이 각 가정으로 갔어도 어떤이는 너무 여물었다
덜 여물었다. 하고 제일 말이 많은 것이 옥수수 인 것이다.
제일 안 남고 말은 제일 많으니 옥수수 농사를 접자고 봄에도 남편과
한참 실랑이를 했다.
그래도 그런 사람은 몇몇이고 대부분은 맛있는 강원도 옥수수를 찾고
기대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설득해서 올해 반으로 규모를 줄여서 농사하는 중인 것이다.
계산을 하면 할 수록 복잡하다.
이렇게 이상한 농사를 계속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 ??????
나의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때까지 몇통의 전화도 다 씹고 있었다.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끊어졌다가 또 울리고 또 울리고 .......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았더니 친구였다.
우리집 옆 계곡으로 형제들과 휴가를 왔다고 왜 안 오냐고 난리였다.
엊그제부터 그럴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처음 듣는 사람처럼 그러냐고
시큰둥하게 대답을 했다.
친구가 뭔 일이냐고 내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이야기를 해 보라고 다그친다.
대충 그렇고 그랬다고 농사를 지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이 아프다고 했더니 밥은 먹었냐고 위로의 말을 건낸다.
휴가 오는데 가기로 하고 약속도 안 지키고 전화도 안한 섭섭함은
벌써 저만큼 날아 갔나 보다.
무조건 빨리 오라고 재촉을 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느그적 거리고 갔더니 친구는 새로 냄비밥을 하고 고기를 구어서
밥을 차려 주었다.
마음으로 정말로 애타하는 얼굴이 보인다.
괜시리 자기가 죄인인양 미안하다고 해 싸면서......
친구는 서울로 시집가서 이제는 서울사람이 다 되었다.
내 농산물을 누구 보다도 믿고 신뢰하며 나오는 모든것을 팔아 준다.
어떨 때 보면 자기는 잘 먹지도 않는 것도 판매방에 올리면
사 놓고는 전화하다 보면 그냥 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자기는 물론이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팔아 주는데
내 농산물이 보통의 소비자들에게는 비싼편이라
애를 먹기도 하는 모양이다.
자꾸만 미안하다고 하는 친구를 보노라니
재작년인가 터키에 다녀 오면서 넓고 토질 좋은
땅을 보면서 나에게 만평정도 사 주고 싶었다는 말이 떠 올랐다.
토질 좋은 땅을 보며 나에게 사 주고 싶었다는 친구의 그 한마디가
농부인 나에게 정말 힘이 되었었다.
남편은 괜시리 심란해 하는 나 때문에 자기까지 점심도 굶고 일했는지
밥을 두 그릇이나 먹어 치웠다.
오랫동안 지체 할 수가 없어서 일어나 다시 밭으로 나서는데
인사를 하던 친구가 창문 안으로 돈 오만원을 들여 보냈다.
<금자야 힘든데 저녁은 해 먹지 말고 이 돈으로 냉면 사먹어>
그리고는 문도 못 열게 버티고 섰다.
나는 그 돈을 사양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를 아끼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져서였다.
누구 보다도 공짜를 안 바라고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 하는
내 성격을 열세살 어린나이부터 보아 온 친구이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감자값 오만원
친구가 저녁 먹으라고 준 오만원
손에 쥐고 한참을 바라 보았다.
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 종잇장 5만원이 무엇이기에
내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감동하게도 하는지.......
남편과 나 말 한마디 없이 저녁이 깜깜해 지도록
감자를 줏어 담고 흙을 털었다.
갑자기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늘 내가 농사하는 모습을 누구 보다도 애타하며 바라 보시는 부모님
나는 즐겁게 농사 한다고 해도 안 믿으신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지금의 내 나이까지 농사를 지으셧다.
해마다 농사가 잘 되면 값이 폭락하고
안되면 안되서 농협 빚을 갚지 못하고 빚을 감당 못해서
결국 고향땅을 다 팔아 도시로 떠나 셨었다.
그 때 나는 고향을 잃어 버린 것만 아쉬워서
그리고 땅 한평에 2500원에 팔았다는 것이 아버지께서
바보같은 결정을 하신 것 같아 직접 말씀은 못 드리고 남편에게
속상하다고 아버지를 흉 보았었다.
아버지는 지금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와
땅은 도지고 집만 사서 수리하여 살고 계신다.
그나마도 길이 난다고 하여 어디로 가셔야 할지 늘 마음의 짐이시다.
그리고 무엇을 하고 싶어도 너무 늦은 8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셧다
오죽하여 아버지는 그 당시에 그 결정을 내리셧을까
아버지도 한 때 오늘의 나와 같은 혼란에 휩싸이셨을까 ......
일이 끝나고 고기를 두어근 사서 부모님께 들렸다.
오늘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얼굴만 뵙고 돌아섰다.
부모님은 흙묻은 내 옷을 털어주며
<이렇게 고생하고 벌어서 엄마 아버지 고기 사 주느라고.....>
하시며 말을 못 이으신다.
또 괜시리 눈물 보가 터졌다.
그리고 깜깜한 밤에 할머니에게 감자값을 드리러 갔다.
도저히 오만원을 드릴 수가 없어서
내 돈 7만원을 보태고 친구가 준 5만원도 보탰다.
돈을 받아 드신 할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기어이 한마디 하신다.
<올해는 감자값이 없구만 내년부터는 이나마도 못 하겠네......>
그리고 다른 해에는 열번을 하는 말씀
<팔아 주어서 고마우이~>
이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인사를 하고 떠나 오는데도 돈 17만원만 허탈한 표정으로
들여다 보고 계셧다.
첫댓글 당신을 위한 힐링 ♥마담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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