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로 변신한다.
지은/ 송태선
같은 형제끼리 이렇게도 닮지 않았을까? 아버지, 태어날 때 닮지 않아도 21년이란 세월을 오랫동안 같이 살면 닮는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는 겉모습이 모두가 달랐다.
삼 남매 중 하나뿐인 딸이 외모로서는 제일 못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눈만 동그랗고 앞뒤 이마가 나왔으며 머리카락은 가늘고 머리숱도 많지 않다. 게다 중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제일 앞줄을 면하지 못했으며 누가 봐도 못난이 중 한 사람이였다. 그 와중에 오빠와 동생은 키도 크고 출중한 외모에 피부도 희며 성격들도 바르게 잘 자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명랑한 성격으로 넓은 과수원에 돌아다니며 과일 채소, 등 한 망태기씩 수북이 담아 이 집, 저 집 갖다주면서 쏟아주고 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때는 어린 시절 외모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구김살 없이 자라면서 세월을 보내다 중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다.
청천 초등학교 여학생들은 효성 여중, 신명 여중, 제일 여중, 남산 여중으로 진학했으며 남학생들은 더 많았다. 모두 과수원 농사를 짓는 부모님 덕분에 편안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이 친구들은 모두가 대구선을 타고 기차 통학이 시작되었다. 대구선은 동촌 반야월 청천 하양 금호 영천에서 경주까지 기차 통학 하는 학생도 많았다.
그때만 해도 검은 연기를 내뿜고 달리는 기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첫차를 놓치면 바로 연결되는 2반 차가 있다. 그 시절 열차 안 좌석에는 빈대도 있어 여학생들은 앉기를 꺼렸다. 우리는 매달려 갈 때도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종점은 대구역이었다. 같은 시각 김천선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한다. 많은 선 후배 학생들이 깔끔한 교복 차림으로 물밀듯 밀려 나온다.
그렇게 기차 통학을 여, 중고를 합쳐 6년을 했으니 어린 시절 철없이 놀던 때는 까마득히 흘러가 버렸고 파도같이 밀려 나오는 학생들의 틈새에서 남, 여를 모를 수가 있겠는가? 나도 모르게 외모에 신경이 쓰게 되었다. 학생 신분으로는 파마란 것도 미장원을 드나드는 것도 상상도 못 할 때였다.
머리숱이 적은 것은 고대기를 달구어 숱이 많아 보이게 하였으며 교복 옷 깃(카라)도 월요일에서 ~ 토요일까지 여섯 개를 풀 먹여 다려두고 하루에 하나씩, 한껏 멋을 부려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키도 훌쩍 커 버렸다. 이렇게 많은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대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새벽길”이란 영화, 주연배우였던 “남정임”이가 머리에 꽃 달린 스카프 하고 출연하는 것을 보고서 색깔마다 스카프 만들어 쓰고 다녔다. 이마 벗겨진 것도 가려졌으며 자유의 몸으로 미장원 문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교풀로 쌍꺼풀을 하던 것도 스물세 살에 병원 문을 두드렸다. 그 시절만 해도 찢어서 꿰매고 할 때였다. 두 눈 수술 후 집 대문에 들어설 때였다. 엄마도 깜짝 놀랐지만, 아버지께서 본래 눈대로 해 오지 않으면 앞으로 잡비를 못 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결혼하면서 이마를 가리려고 쓰던 스카프와 머리는 바뀌었다. 스카프 대신 작은 썬 캡으로 머리는 숱이 많아 보이는 빨래판 파마를 즐겼다. 시중에서 구입 못하는 수작업의 모자이기에 잘 바꾸지도 못한다. 파마머리에 모자를 쓰면 이마가 좁아 보이니까 내 만족으로 지금도 모자를 잘 벗지 못하고 있다.
아들 하나 딸 둘이 태어났을 때도 머리와 이마를 제일 먼저 보았다. 괜찮았지만 그래도 아들딸 모두 두세 번은 머리를 박박 밀었다. 그리고 손주들이 태어날 때마다 역시 머리카락과 이마에 눈이 먼저 갔다. 다행히 나 닮은 손주와 자식은 없었다. 그래도 운이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싫어하는 것을 닮지 않아서이다.
우리 형제 세 남매가 닮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되었으며 혈육이라 다 닮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마가 예쁘고 머리숱이 많은 사람이 제일 부럽다. 반면 지금도 나를 변신 시켜주는 모자를 제일 먼저 챙기고 있다.
첫댓글 아하, 이제야 궁금중이 풀렸네요. 썬 갭을 늘 쓰고 다니는 사연을. 수필은 이렇게 본인을 스캔하 듯 하는군요.
송선생님의 모자의 변신.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