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35-42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지난주에는 목감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코로나 후유증이 굉장히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저는 성대가 많이 좀 망가진 것 같아요.
목소리가 잘 쉬고 이물질 같은 것이 끼어있는 느낌이 들어요, 주님이 주신 좋은 목청인데.
요즘 제가 은총의 밤에 불렀던 노래를 들으면서 ‘참 노래 잘한다. 지금 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 없어요.
물론 연습하면 비슷하기는 하겠지만 그때만큼 높이 올라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것이 몇 년 되지 않은 얘기거든요, 서운동이니까.
주님이 정말 좋으신 악기를 주셨는데 코로나 때문에 이렇게 목이 불편한 것을 보니 하느님께 좀 미안한 마음,
제대로 보관 못 했던 것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오늘은 상태가 좀 나은 편이에요.
눈에서 신는 신발을 설화라 하죠?
그러면 얼음에서 신는 신발을 뭐라 그럴까요? 빙신.
내 말 틀려요? 빙신이잖아.
요즘 빙신들 참 많아요. 빙신이랑 비슷한 게 등신이죠.
빙신이나 등신이나 상징적인 의미로 쓰이죠.
자기 주제 파악을 못 하는 사람.
성경에 보면 빙신처럼 살다 가는 사람도 참 많고, 절대 빙신 소리 안 듣고
기차 바퀴가 기차 레일을 벗어나지 않듯이 자기 길로만 가면서 박해를 받은 사람들도 많죠.
나중에 그분들을 우리는 큰 성인, 성조라고 부르고 우리들의 멘토가 되죠.
‘저런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기 길만 갔구나.’
세상과 타협하고 편한 것 찾으려 하고 권력과 붙으려고 하고, 그러다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가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출세는 많이 할지는 몰라도, 권력 때문에 사람들이 그 앞에서 머리를 숙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아유, 빙신’
오늘 자기 주제 파악을 확실히 아시는 분이 나오죠.
세례자 요한!
나는 이분을 볼 때마다 모세가 같이 연결되면서 상남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네 가지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세 번째는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따라갔던 두 제자 한 말입니다.
이들 중 하나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라고 성경에 나오죠.
나중에 그 안드레아가 시몬, 자기 형을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네 번째는 뭐냐? 예수님이 하셨던 말, ‘Come and See’ 번역하면 뭐예요?
‘와서 보아라.’ 어디 계시는지 알기 원한다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죠.
길게 답하세요? 나 어디 몇 번지, 그런 얘기 아니죠?
‘와서 봐, 뭘 그런 걸 물어’
이 하나하나가, 사실은 이 ‘하느님의 어린 양’만 가지고도 우리는 며칠을 묵상할 수 있어요.
어떻게 보면 여기 나온 이 네 가지가 내가 수녀 피정이라든지 할 때 주제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굉장히 중요한 복음이에요.
방향성을 알려주고 또 어떻게 살아야만 빙신 소리 안 듣고 사는지도 정확하게 집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간단하게라도 한번 묵상해 봅시다.
첫 번째가 뭐라고 그랬어요? 예수님이 지나가니까 요한이 한 얘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예수님과 요한은 혈육이에요.
그런데 그 두 양반이 공생활 하시기 전 30년 동안 몇 번 만났는지는 성경에 안 나오죠.
성경에도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딱 한 번 만난 것으로밖에 안 나와요.
말이 친척이지 지금처럼 카톡 하는 시대도 아니고, 차가 있어서 다니는 시대는 아니고.
사실 성서상으로 보면 성모님이 살던 곳과 엘리사벳이 살던 곳은 굉장히 먼 거리예요.
사흘 낮 밤을 걸어야만 가는 거리였어요.
그러니 양쪽에서 태어난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몇 번 만났을까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봐요. 그렇지요?
아무튼 세례자 요한이 저기 가는 남자가 육촌 동생인지를 알고서 얘기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나오지 않습니다.
내 동생임을 의식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이 두 양반은 이미 혈육을 뛰어넘는 분이었죠.
그렇기에 영적으로 보면서 ‘얘들아, 하느님의 어린 양이 가신다.’ 그랬어요.
이 말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큰 충격이었죠. 왜냐?
자기가 모시고 있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 양인 줄 알고 살았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요한은 슈퍼스타였어요.
그렇지만 요한은 아까 얘기한 것처럼 자기 주제 파악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말 메시아가 나타났을 때 깔아뭉개지 않고 질투심 없이 있는 그대로 얘기했죠.
여러분들, 요즘 제가 카인과 아벨 구약성서 강의하고 있는데 들으십니까?
그 카인의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죠.
돌로 때려죽이지 않았을 뿐이지 형제간에도 정말 죽이고 싶도록 미운 피붙이들도 있잖아요.
속으로는 수백 번 죽인 사람들이 있잖아요.
카인의 마음이 그대로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벨을 내가 뭐라 그랬어요? 세계 최초의 순교자라고 그랬잖아요.
맞는 얘기죠. 왜? 아벨은 믿음이 없었으면 죽지 않았어요.
제물을 바칠 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대로 ‘믿음을 갖고’ 바쳤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단 말이에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믿음이 없는 사람한테는 질투의 대상이 된다는 얘기죠.
인류 최초의 순교자가 아벨이었고 인류 최초의 박해자이면서 살인자가 카인이었어요.
우리들의 발이 빛 쪽으로 서 있을 때 아벨의 마음으로 바뀌면서 살아갈 때가 있어요.
그러다 갑자기 어떤 환경이라든지 복잡한 인간끼리의 관계성, 이런 것들이 어둠으로 들어오면 갑자기 카인 쪽으로 바뀝니다. 맞죠?
‘카인의 후예’
이런 책들이 나라마다 많이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황순원 씨가 그 책을 썼죠.
‘소나기’ 쓴 그 양반이요.
세례자 요한의 마음 안에는 오로지 아벨의 마음만 있었을까요?
‘사람들이 나를 다 메시아를 알고 있어, 나 메시아다.’
그래도 반대할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육촌 동생 예수님이 나타나니 다른 복음에서는 어떻게 나와요?
‘나는 저분의 신발 끈도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라고 하죠.
어떻게 이렇게 질투심이 없었을까?
정말 온전한 아벨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꼴에 값을 하고 살 때 질투심도 열등감도 없어지죠.
그리고 주연과 조연의 차이를 확실히 알았던 사람이에요.
조연 개성이 너무 강하면 그 영화는 망해요. 주인공은 개털이 되는 거예요.
주연은 당연히 예수님이었고 조연은 세례자 요한이었죠.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오는 것은 자기에게 모이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향하게 하는 한 과정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일단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은 세례자 요한의 카리스마 때문에 몰려왔죠.
그 자리에 끝까지 버텨 서 있었으면 사람들은 메시아로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무시해버리면 예수님이 ‘나 메시아야’ 아무리 떠들어도 먹히질 않겠죠.
주인공을 들어 올려주는 것은 조연의 역할이에요.
세례자 요한은 철저히 자기 역할을 알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해야 한다. 내가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를 가로막아 서는 안 된다.’
사제들에게 말씀을 들으러 옵니다.
김웅열 신부에게 4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강의를 들으러 왔겠습니까?
강의를 들으러 와서 ‘신부님 은혜 받고 갑니다.’
그럴 때마다 신자들이 가고 난 다음에 나는 늘 반성해요.
오늘 내가 혹시 예수님 앞을 가린 것은 아닌가?
김웅열 신부가 하느님께 받은 카리스마 때문에 사람들이 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렇지만 끝까지 예수님 앞을 김웅열 신부가 가로막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교주가 되는 거죠.
교주는 다른 게 아니에요. 자기가 예수님 행세하는 것이 교주예요.
지금 세상은 그런 인간들 너무 많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어두워지고 있습니까?
사제에게 피정 들으러 오고, 강의 들으러 오고, 그다음에는 사제는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도록 피해줘야 하는 거죠.
가장 가까운 데서 예수님을 만나게끔 사제도 가장 가까이 예수님 곁에 바짝 다가서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야 해요.
그래서 그 자리만 피해주면 바로 예수님이 앞에 나타나게.
무슨 뜻인지 이해되시죠?
뒤돌아볼 때 저는 그렇게 살려고 무던히 애쓰고 산 사제라고 생각해요.
많은 사제가 말씀의 은사를 받아 활동하다가 어느 사이에 슬그머니 없어지는 경우도 많아요.
또 사람이 모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사업가가 되려고도 해요.
난 그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수녀님이 저한테 그래요.
멀리서 긴 세월 동안 지켜봤을 때 제가 브레이크를 너무 잘 잡는대요.
ABS 브레이크를 갖고 있대요.
‘선을 넘지 않는다’ 그 뜻이에요.
‘신부님 정도면 사업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막 벌려놓을 수가 있는데, 신부님은 오로지 말씀만 전하고 사세요.
그래서 신부님을 존경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뒤돌아보면 내가 그렇게 살 수 있게 하신 하느님이 저는 너무 고맙고, 그
때마다 영적 분별력을 주시어 내가 지금 나서야 할 때인지 뒤로 물러나야 할 때인지,
이것 내가 넘어가면 내가 빙신 소리 듣고 내 몸 망가지는지 판별할 수 있었죠.
우리 한국교회에도 하느님에게 받은 재주는 많은데 그것을 오로지 한쪽에만 전력투구하지 않고
자꾸 뭔가 더 하다 몸이 망가져 세상을 떠난 신부님들도 좀 계세요. 환속한 신부님들도 있고.
사제 하나 죽이려고 얼마나 마귀들이 집단으로 달려들겠습니까?
마귀들이 노리는 것은 신자들이 아니에요.
신자들을 통해서 사제를 거꾸러뜨리려 하는 거예요.
사제 하나가 거꾸러지면 교회 전체가 다 흔들거리지 않습니까?
저는 혼자 있을 때도 늘 나 자신을 경계하고 살아요.
내가 만일 무너지면 내 말을 듣고 신앙 생활했던 수많은 사람이 같이 무너진다는 생각 때문에
저는 혼자 있을 때도 늘 모든 것을 정리 정돈하고 살아요.
미사 끝나고 교우들에게 내가 사는 모습, 방 하나하나 보여주는 이유도 정리 잘하는 것을 자랑질하려는 것 아니에요.
혼자 있을 때일수록 자기 자신을 늘 경계해야 한다.
신독(愼獨). 공자가 하신 말씀이죠.
사람은 혼자 있으면 무너지기 쉬워요. 막 어질러 놓기 쉽고.
난 혼자 있을 때일수록 더 정갈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살았어요.
하다못해 이부자리도 깔끔하게 해놓아야 하고, 옷 정리도 마찬가지고요.
난 옷을 갤 때 오늘 구겨진 내 영혼을 개요.
청소할 때도 마찬가지고 설거지할 때도 마찬가지고.
어찌 보면 이러한 좋은 성향이 어디 가든지, 성지를 가든 본당을 가든 항상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신자들이 들어와서 행복할 수 있는 성전으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저는 정리 정돈을 참 잘했던 것 같은데, 그것을 안 하면 불편했어요.
자기만족과 결벽증과는 별개의 문제죠.
이런 좋은 성향이 사제가 되어서도 이어져 어느 성당 피정을 가더라도 내 눈에 들어와요.
‘이 그림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왜 여기 놓고 살지? ’
성전 안도 더럽지만 정작 본당 신부와 사목 위원들은 아무도 관심 없어요.
정리 정돈. 어찌 보면 그것 때문에 저는 늘 바쁘고 피곤하죠.
전임 신부님이 안 하고 가셨더라도 저는 그것을 해야 하니 일이 많죠.
그런데 그것은 내 십자가예요. 그 십자가가 저는 늘 행복해요.
누구나 최고의 자리를 누렸던 사람이 차석으로 내려가는 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원했기 때문에’ 차석으로 내려가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의 어린 양이 가신다.’의 말뜻은 ‘저분이 너희들이 찾던 하느님의 어린양이야. 가라’
자기 새끼를 떼어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아요.
자기가 아꼈던 제자를 저 사람한테 가라고 하기는 결코 쉬운 얘기가 아니에요.
두 번째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가라고 해서 쫓아갔어요. 그렇죠?
그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뒤돌아보시면서 ‘왜 쫓아와? 나한테 말해.’ 하신 거예요.
결국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로 갑니다.
오늘 복음에 그 장면을 한번 그려보세요.
스승이 예수님한테 가라 해서 아무튼 얼떨결에 밀려 나왔어.
‘저분을 쫓아가야 하나 봐. 저분이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래. 그러면 우리가 이제껏 믿었던 저분은 뭐야?’
복잡한 마음으로 쫓아갔을 거예요.
‘쫓아가는 게 맞는 길이야? 어떻게 된 거지? ’
그래서 결국 제자들은 그 갈등 때문에 선뜻 예수님이랑 같은 선상에 서지를 못해요.
성경에 보면 가까이 다가서지를 못해요.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뒤쫓아가요.
예수님은 느낌으로 알았죠. ‘지금 두 사람이 쫓아오고 있다.’
형사가 쫓아오는 게 아니에요. 그죠?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
세례자 요한이 보냈을 때는 어떤 의미였을까?
‘동생 제자로 삼아, 괜찮은 놈들이야.’ 제자로 삼으라고 보낸 거죠.
예수님도 알아챘어요. 그분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잖아요.
그런데 보니까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뭉그적 뭉그적거리면서 뒤에서 계속해서 쫓아와.
예수님이 서 있으면 같이 서고.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 쪽에서 먼저 오세요.
가다 말고 다시 뒤돌아서서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먼저 와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특징 중 하나예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다음에 하느님이 먼저 찾아왔죠.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그리스도교는 먼저 찾아 나서는 종교예요, 올 때까지 기다리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 나설 때는 과정이 복잡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아까 얘기한 것처럼 아벨의 마음도 생겼다가 카인의 마음도 생겼다가 하기도 하고.
맨날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예수을님 쫓아도 예수님은 분명히 저기 계시는데, 아무리 가도 헛발질, 나가질 않아.
과연 인간이 인간 쪽에서 하느님을 먼저 찾아가기가 쉬울까?.
어려워요.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서야만 돼요.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기어갈 때 그분은 우리를 향해 걸어오셨죠.
우리가 걸어갈 때 그분은 우리를 보고 뛰어오셨어요.
우리가 뛰어갈 때 그분은 우리 쪽으로 단숨에 날아오시는 분이에요.
여러분 이제껏 삶의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로 간 적은 거의 없어요.
예수님이 여러분 쪽을 향해서 왔죠.
힘들고 어려운 그 순간순간마다, 일어날 힘조차도 없고 기어갈 힘조차도 없을 때마다,
오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먼저 오신 것처럼 그분은 우리에게 오셨어요.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가장 근본은 뭐냐?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는 종교예요.
성부가 성자 보내셨잖아요.
또 수많은 성인 성녀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입을 대신하게끔 찾아오셨잖아요.
오늘 이 순간에도 사제의 입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오고 계시잖아요.
겉으로 보면 여러분들이 대구에서 몇 시간 동안 차를 타고 온 것 같지만, 그건 아니죠.
이렇게 먼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두 사람에게 물은 말이 뭐라고요?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에요.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라고 너희들 여기, 월정리까지 왔느냐?’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에 뭐라고 답을 합니까?
‘라삐, 어디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과연 이 제자들이 물은 것은 장소의 개념일까요, 아니면 주님을 따라다닐 때 오는 어떤 영적인 혜택을 의미하는 걸까요?
‘어디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분명히 이 말은 장소를 물었던 거예요.
제자들은 우리 스승은 광야에 계셨던 분인데, 저분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 생각한 거죠.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느냐 하는 질문에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는 안정된 삶을 원합니다. 저는 건강을 원합니다. 저는 돈을 원합니다. 저는 출세를 원합니다.
원하는 것 얘기하세요. 잘못된 것 아니에요. 이런 것을 원한다고 해서 결코 죄인은 아니에요.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하느님 위에 올라가선 안 된다는 거죠.
순서가 바뀌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렇죠?
우상숭배를 내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아주 학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쉽게 뭐라고 그랬죠?
하느님 밀어내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것은 다 우상이에요.
하루 종일 자식 생각밖에 안 해. 그러면 그날은 자식 우상숭배하고 산 날이에요.
하루 종일 돈 걱정해, 하느님 생각은 단 1초도 한 적이 없어.
그날은 우상숭배에 빠졌던 날이에요.
하루 종일 누구 미워하는 마음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고 살았어.
미움으로 꽉 차 있는데 하느님이 들어올 자리가 어딨어요?
그 미움을 우상으로 모시고 산 거예요.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 말에 두 제자는 ‘어디 계시는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했죠.
이것은 넓은 영적인 의미로는 두 제자는 분명히 장소를 알고 싶었지만,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이 두 제자의 말을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장소를 묻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진정 알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을까요?
주님, 좀 보여주십시오.’
그러니까 세 번째로 예수님이 뭐라고 얘기하십니까? ‘와서 보아라.’
일단 딱 두 단어인데 ‘오라’는 것과 그다음에 ‘보라’는 거예요.
보려면 일단 와야 하죠. 와서 보라.
‘와서’는 초청이지요. 부르심이죠.
피정에 초청하고, 세미나에 초청하고, 순례에 초청하고, 말씀의 잔치에 우리를 늘 오라고 초청하세요.
‘부르심’이에요.
그리고 ‘보라’는 것은 뭐냐?
‘찾으라는 것’이에요.
피정에 앉아있다고 그날 다 똑같이 은혜받는 것 아니죠?
미사 후 어떤 사람은 울면서 성체 영하고 나갈 때는 새로운 삶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시계 보면서 늦었다고 급하게 나가죠,
‘보라’ ‘찾아라.’
‘몸과 마음을 다해서 찾아내라.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찾아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찾을 때는 뭐가 필요한가?
인내가 필요해요. 용기가 필요하고, 의지가 필요하고, 결심이 필요하기에 이 네 가지를 요구하시는 거죠.
찾을 때 어떤 각오를 하고 찾아라?
인내할 각오를 하고 찾고, 담대한 용기를 가질 각오를 하고 찾아야 하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의지를 갖고 찾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찾을 결심을 해야 한다.
‘와서 봐라.’
너희를 부르는 것은 내 쪽에서 부르지만, 거기서 찾는 것은 너희들의 인내와 용기와 의지와 결심이 필요하다.
그것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내가 100번을 불러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그날 예수님과 하룻밤을 같이 잤다’라고 나오죠.
그들과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그러고 난 다음 때는 오후 4시쯤이었다.
시간을 정확히 얘기해요.
예수님을 체험했던 감격의 시간을 알린 거예요.
유다스가 예수님 팔아넘길 때 밤이었다고 나와요.
어둠을 나타내는 거죠.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이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묵었을 때가 바로 4시쯤이었다.
예수님을 체험했던 감격의 시간. 예수님을 만났던 감격의 시간.
하느님 앞에 한발 다가섰던, 맨날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뒤돌아보면 세례받은 날이 제일 열심히 했던 것 같아.
제일 깨끗하고 그렇죠.
그날은 그냥 죽어도 바로 직천당 가는 날이잖아.
그날 밥 안 먹어도 행복하고 내 뒤에 날개가 달린 천사 같은 느낌이었고, 백지 같았던데
우리 뒤돌아보면 세례받은 그날이 제일 깨끗한 날이고 제일 열심히 한 날이야.
점점 때가 묻잖아.
그러다가 진흙탕 속에서 헤매다가 예수님을 만났어.
그 감격의 시간!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났던 그때가 있을 거예요.
성인들도 예수님을 만났던 때가 다르고 장소가 다 달랐죠.
오늘 사무엘이 예수님 만났던 때가 있듯이 독서에 나오는 것처럼.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내가 하느님 만났던 때는 언제야?
약속의 말 한마디 잘못해서 신세 쫄딱 망친 그날이 언제예요?
지금도 기억해요, 그날이 언제냐?
1973년 7월 14일 내 생일날이었어요.
지금도 그날 생각하면 눈앞에 그대로, 너무너무 생생해요.
피투성이가 되어 시체로 변한 아버지, 머리에서 피가 콸콸 흐르는 그 아버지를 끌어안고
하느님 당신이 있다면 살려달라고 아버지만 살려주면 신부 되겠다고.
이미 맥도 안 뛰고 심장도 멈추고 의학적으로는 사망이죠.
그 뻥 뚫어진 천장을 보면서 울부짖음.
15분 지나고 나서 아버지가 숨을 쉬셨어요.
‘아 정말 하느님이 있구나.’
이제껏 하느님은 마음 약한 인간들이 의지하고 싶어서 허상을 만들어 놓고 비는 것으로 생각했거든.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사람이 강해지면 하느님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그날 인격적인 하느님을 만난 거예요.
저 인천 촌구석 창고 안에서 아버지 시체를 끌어안고 울부짖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인격적인 하느님.
전 세계 신자들이 동시에 기도해도 하느님은 동시에 듣고 동시에 축복을 줄 수 있는 그런 인격적인 하느님.
우리를 인형처럼 만들어 놓고 우리를 가지고 노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인격의 하느님,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살려주셨던 그 하느님.
그때 아버지가 숨 쉰 시간이 정확히 오후 3시 반이었어요.
숨 끊어진 지는 50분 전이었고 의학적으로는 살 수가 없는 거죠.
이미 산소 공급이 뇌 속으로 50분 동안 안 들어갔는데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시간 ‘4시쯤이었다.’
여러분들도 주님 만난 시간이 있을 거예요.
어떤 분들은 신부님의 유튜브 강론을 듣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회개하고 다시 성사 보러 갈 용기를 내고,
‘내가 이제껏 잘못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구나’
고개를 들어보니 세상에! 주님이 나를 향해 쫓아오고 계시는 것이 이제 보이기 시작해.
주님이 나를 쫓아왔을 때 나는 맨날 도망만 다녔어.
예수님이 내 집 문 앞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며 묵시록 3장 20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문을 열어라. 그럼 내가 들어가서 너희와 만찬을 같이 하리라’
그런데 그 문은 안에서만 열어주는 문이에요.
예수님은 내 영혼의 문 앞에서 계속 두드리면서 ‘베드로야 문 좀 열어.’
그 수많은 시간 동안 예수님은 비바람 맞아가면서 나를 살리기 위해 들어가고 싶은데, 내가 안 열어줘.
아무리 쫓아가도 다른 방향으로만 가.
그러나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그날, 강론을 들으면서 영이 깨이고 어둠이 사라지면서
주님이 나를 향해서 오시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죠, 바로 그 시간.
오늘 여러분들은 이 미사 중에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신 것에 대답을 꼭 드려야 합니다.
‘네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정답은 나와 있죠.
‘주님만 원합니다.’예요.
그러고 난 다음에 혹시 시간 되면 ‘저 돈도 조금 주시면 더 좋고요.’
‘저 주님만 원하는데요. 제가 몸이 아파요. 주님이 해주실 수 있다면 해주시면 제가 너무너무 고맙죠.’
그런데 ‘네가 바라는 게 뭐냐?’ ‘돈 바라, 뭘 바라?’ 그건 아니라는 거죠.
그건 카인의 마음이에요.
오늘 이 네 가지의 나오는 문장 첫 번째가 ‘저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가신다’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그 모습을 우리 배워야 하죠.
자기 주제 파악하며 살아야 한다.
빙신 소리 듣지 않고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잘 살아야 한다.
대자 대녀가 나를 존경할 때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줘야 하는 거지, 내 대녀와 예수님 사이를 내가 가로막아서
대녀를 꼭두각시 가지고 놀듯이 가지고 놀면 안 된다는 겁니다.
대자에게 ‘나 보는 것이 곧 예수님이야.’ 이런 식의 건방진 생각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분은 갈수록 커지셔야 하고 나는 갈수록 작아져야 합니다.’
그 당시에 슈퍼스타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정말 남자 중의 남자다.
어찌 이렇게 브레이크가 잘 잘 걸 수 있을까?
브레이크 걸면 어지간하면 밀려 나가잖아요.
세례자 요한의 영적인 브레이크, 나설 때와 안 나설 때를 정확히 분별했죠.
그다음에 머뭇거리면서 쫓아오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먼저 가시면서 물었던 말, ‘나한테 바라는 게 무엇이냐?’
그리고 제자들의 대답, ‘어디 계신 지 알고 싶습니다.’
장소가 아니라고 그랬죠. 주님 계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습니다.
성체 안에 주님 계시잖아요.
구약의 백성들은 전혀 체험해 보지 못했던, 개신교 신자들은 전혀 꿈도 꿔보지 못하는, 그 예수님이 직접 내 안에 들어오시잖아요.
성체 안에 주님 계시고, 말씀 안에 주님 계시죠.
주님 머무시는 장소가 그렇잖아요?
사랑하는 내 아내 안에 예수님 계시고, 사랑하는 내 남편 안에 예수님 계시고,
내가 돌봐야 하는 시아버지 안에 예수님 계시고, 버림받은 사람들 안에 예수님 계시잖아요.
‘와서 보라.’
우리를 부르시고, 초청하시고, 그리고 ‘보라’
찾아야 한다.
너희를 불러내는 것까지는 내가 할 수 있지만 그다음에 너희들도 노력해야 한다.
인내를 갖고, 용기를 갖고, 의지를 갖고, 결심을 봉헌해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 너희들이 다 가져갈 수 있다.
오늘 이 자리에 불러주신 것, 또 사제의 입을 통하여 주님 알려주신 것에 감사드리면서 신앙 고백합시다.
♣2024년 연중 제2주일 (1/14)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첫댓글 아멘.
주님 계신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습니다 라는 질문의 답은 당연히 성체 안에 주님 계시다는 것이며 우리는 인내를 갖고, 용기를 갖고, 의지를 갖고, 결심을 봉헌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아멘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
아멘 🙏
감사합니다
와서 보아라!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구약시대도 아니고 개신교인아니고 천주교인임을 성체를 모실수있음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남자중에 남자 세레자요한같은 믿음을
그리고
주님께 끈질긴인내 예할때 예 하고 아니요할때 아니오 할 용기 주님만을 의지하고 결심
할수있길 희망합니다
아멘()
'와서 보라,
...그다음에 인내와 용기와 의지와 결심을 갖고 너희도 노력해라'
울 신부님의 깊은 묵상에서 나온
음은 같으나 훈은 다르듯
같은 성경 말씀임에도
항상 다르게 풀어주시는
성령의 말씀~!!
언제나 진국 중의 진국?이예요.
신부님~감사 만땅 드립니다.^.*
친타님 수고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