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변통고란 :
《상변통고(常變通攷)》 30권 16책은 조선 후기 영남의 재야 학자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이 편찬한 예서로, 조선조에서
편찬 간행된 가례학(家禮學)의 전문 저술로서 규모와 체계가 가장 정밀하고 방대한 책이다.
조선왕조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의 예제를
정비하는 한편 사대부 사족에게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시행을 권장하였다. 이런 이유로 조선 전기 지식인들은 《가례》와 시속의 형편을 짐작하여
각기 가정에서 실행하는 상제례(喪祭禮)의 절차를 강구하였는데, 점필재 김종직의 〈선공제의(先公祭儀)〉나 회재 이언적의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은 그런 필요에서 편찬된 저술들이다. 그러나 이런 서적들은 《가례》에 명시된 의식 절차를 시속의 형편에 따라 절충하였을 뿐, 그 의식의 유래와
본질과 의미에 대한 자세한 논의나 시행에 따른 세부 절차와 상황에 따라 변통되는 사례 및 이에 대한 여러 학설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담고 있지
않았다.
《가례》에 대한 심도 있는 학문 논변은 퇴계 이황을 통하여 비로소 전개되었다. 퇴계는 그 문도들과 문답을 통하여 《주자가례》의
내용을 정밀하게 검토하고, 한편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이래 국가에서 이미 정한 제도와 시속의 관습을 절충하여 가정과 학교 및 향당에서
시행하는 의식 절차의 본질과 변통의 조처를 세밀하게 강구하여, 가례학(家禮學)의 한 기준을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학자들 사이에 예학 논변이
성행하고 예학 저술도 따라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동족 부락의 발달에 따른 가족 관계의 확대와 정치 당파와 학맥 분파에 따른
대립으로 인하여 예학 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에는 한강 정구(鄭逑, 1543~1620)와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을 비롯하여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신독재 김집(金集, 1574~1656), 후천 황종해(黃宗海,
1589~1656), 미수 허목(許穆, 1595~1682),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갈암 이현일(李玄逸, 1627~1704), 명재 윤증(尹拯, 1629~1714), 남계 박세채(朴世采, 1631~1695)
등 탁월한 예학자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었고, 가히 예학의 시대라 할 만큼 학파마다 가문마다 각기 일가를 이룬 예학 저술이 편찬
간행되었다.
《상변통고》는 가례학의 논의가 심화되었던 18세기 조선조 사대부 지식인의 예학 연구의 성과를 대표하는 저술의 하나이다. 이
책은 책의 제목에서부터 ‘가례(家禮)’ 또는 ‘사례(四禮)’라는 재래의 틀에서 벗어나 상례(常禮)와 변례(變禮)의 다양한 절차와 학설을 모두
깊이 있게 강구한다는 점을 표방하여 가례학의 조목을 세분화하고, 거기에 관련된 문헌 근거와 제가들의 학설을 널리 채록하여 넣고, 또한 곳곳에
자신의 견해를 넣어 논의한 가례학 전문 연구 서적이다. 이 점은 행례(行禮)나 학습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일반 가례서(家禮書)나 가례주석서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조선 후기 사회 문화 사상 전반에 깊이 침전된 예학의 진전된 성과를 반영하는 것이다. (해제 퍼옴)
[주D-001]가례(家禮) : 남송의 성리학자인 주희(朱熹)가 의례(儀禮)에 관한 예절과 절차를 정리한 책이다. 4권으로 된 정본 외에 7권으로 된 《문공가례(文公家禮)》가 있고, 또 8권 혹은 4권으로 된 《주문공가례의절(朱文公家禮儀節)》과 주석 없이 《가례(家禮)》로만 이름을 붙인 본 등 여러 판본(版本)들이 전해지나 순서에는 차이가 없다. 그 순서는 가례도설(家禮圖說), 가례서(家禮序), 통례(通禮)ㆍ관례(冠禮)ㆍ혼례(婚禮)ㆍ상례(喪禮)ㆍ제례(祭禮)로 구성되어 있다. 사마광(司馬光)의 《서의(書儀)》를 이어받아 내용에서도 그의 설을 대부분 계승하고 있다. 《서의》가 전통적인 의례를 중점으로 금례(今禮)를 약간 낮은 비중으로 서술한 데 비해, 이 책은 의례와 속례(俗禮)를 반반으로 서술하고, 거기에 주희 나름의 독자적인 형식을 취한 점이 특색이다.[주D-002]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 주자(朱子)가 《의례(儀禮)》를 근간으로 《예기(禮記)》 및 여러 경전의 구절들을 취하여 그 아래에 붙이고, 주소(註疏)의 제설(諸說)을 나열한 다음 논단을 붙여 엮은 책인데, 면재(勉齋) 황간(黃榦)이 속집을 편찬하여 완성하였다.[주D-003]의례경전통해속(儀禮經傳通解續) : 주자의 문인인 황간(黃榦)이 편집한 책으로 모두 29권이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관한 것은 주자가 초고를 만들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황간이 보충하고, 다시 양복(楊復)이 그것을 정리하여 완성한 것이다.[주D-004]의례상복도식(儀禮喪服圖式) : 본래 이 자료는 《의례도》에 수록된 것 가운데 상복에 관한 것이다. 《의례도》는 모두 17권으로 송나라 양복(楊復)이 만들었다. 《의례》 17편에 대해 각기 진설(陳設)의 방위(方位)를 상세하게 205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주D-005]사관례(士冠禮) : 《의례(儀禮)》의 편명. 사(士)의 관례(冠禮)의 의미와 절차 등을 기록한 편이다.[주D-006]사혼례(士婚禮) : 《의례》의 편명. 사(士)가 아내를 맞이하는 의미와 절차 등을 기록하였다.[주D-007]상복(喪服) : 《의례》의 편명. 상(喪)을 당하여 입는 상복(喪服)의 형식과 친소(親疎)의 등급에 따라 입는 상복(喪服)의 종류를 기술하였다.[주D-008]사상례(士喪禮) : 《의례》의 편명. 사(士)가 행하는 상례(喪禮)의 의미와 절차 등을 기록하였다.[주D-009]기석례(旣夕禮) : 《의례》의 편명. 〈사상례(士喪禮)〉의 하편(下篇)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사(葬事) 지내기 전에 치러야 할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0]사우례(士虞禮) : 《의례》의 편명. 사(士)가 부모의 장사를 치르고 신령을 맞이하여 우제(虞祭)를 모시는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1]특생궤식례(特牲饋食禮) : 《의례》의 편명. 사(士)가 희생(犧牲)을 사용하여 사당에 제사 지내는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2]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 : 《의례》의 편명. 경(卿)과 대부(大夫)가 희생(犧牲)을 사용하여 사당에 제사 지내는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3]유사철(有司徹) : 《의례》의 편명. 대부가 제사를 지내고 나서 유사(有司)가 철상(撤床)하고 시(尸)를 인도하는 등의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4]사상견례(士相見禮) : 《의례》의 편명. 사(士)가 직위(職位)로써 서로 교유하는 처음에 폐백을 받들고 서로 상면(相面)하는 예를 기록하였다.[주D-015]향음주례(鄕飮酒禮) : 《의례》의 편명. 제후(諸侯)의 향대부(鄕大夫)가 인재를 뽑아 군주에게 천거할 때 출향에 앞서 베풀었던 전송의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6]향사례(鄕射禮) : 《의례》의 편명. 향대부가 봄과 가을에 예로써 고을의 백성을 모아 활쏘기를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어진 이를 선발하는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7]근례(覲禮) : 《의례》의 편명. 제후가 가을에 천자를 알현(謁見)하는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8]빙례(聘禮) : 《의례》의 편명. 제후와 제후가 경(卿) 또는 대부를 사신으로 보내어 서로 안부를 묻는 예의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19]대사례(大射禮) : 《의례》의 편명. 제후들이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 대회를 열어 그들의 예를 살피는데, 그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였다.[주D-020]주례(周禮) : 중국 고대의 직관(職官) 제도를 설명한 책으로, 〈천관(天官)〉ㆍ〈지관(地官)〉ㆍ〈춘관(春官)〉ㆍ〈하관(夏官)〉ㆍ〈추관(秋官)〉ㆍ〈동관(冬官)〉 등 6편으로 이루어졌다. 한나라 초에는 《주관(周官)》이라고 하다가, 유흠에 의하여 《주례》로 개칭되었다. 정현이 《의례》ㆍ《예기》와 함께 주석을 함으로써 ‘삼례(三禮)’로 불리게 되었다. 저자에 대해서는 주공(周公) 또는 유흠(劉歆)이 지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명확하지는 않다. 모두 6관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소속 관직명과 관직의 등급, 인원수를 서술한 다음 다시 각자의 직무와 관장을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그중 마지막 편인 동관(冬官)은 없어져 〈고공기(考工記)〉로 보충하였다. 이 책의 기록은 서주(西周) 시대의 각종 관직 제도를 서술한 것으로서, 후대 관제 개혁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주D-021]하간헌왕(河間獻王) : 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유덕(劉德)으로 하간(河間 지금의 하북성 하간현)왕에 봉해졌다. 학문을 즐겨, 고서(古書)를 수집하고 정리 연구하기를 좋아하였다.[주D-022]역(易) : 사물의 변화하는 현상을 예측하는 점서(占筮)의 해석 방법으로 고대로부터 《연산역(連山易)》ㆍ《귀장역(歸藏易)》ㆍ《주역(周易)》 등 세 가지의 역(易)이 있었는데, 앞의 두 가지 역은 산일되고 《주역》만이 후대에 전해졌다. 《주역》은 음양의 두 효(爻)를 세 개씩 중첩하여 만든 8개의 괘와, 8개의 괘를 겹쳐 만든 64개를 근간으로 하여, 매 괘마다 괘사(卦辭)가 있고, 괘마다 6개의 효가 있어 효마다 효사(爻辭)가 있다. 이것이 《주역》의 경문(經文)이다. 경문 외에 전문(傳文)에 해당하는 7종 10편의 해설이 있는데, 그것을 ‘십익(十翼)’이라고 한다. 〈단전(彖傳)〉 상하, 〈상전(象傳)〉 상하, 〈문언전(文言傳)〉, 〈계사전(繫辭傳)〉 상하, 〈설괘전(說卦傳)〉, 〈서괘전(序卦傳)〉, 〈잡괘전(雜卦傳)〉이 그것이다. 괘를 처음 만든 사람이 복희(伏羲)라고 하는 데는 이설이 별로 없으나 괘를 중첩하기로는 복희, 신농(神農), 우(禹), 문왕(文王) 등을 두고 이설이 있고, 십익은 공자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도 이설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서주(西周) 시대부터 전해 온 고대 문헌임에는 틀림없다.[주D-023]서(書) : 이 책은 중국 하(夏)ㆍ은(殷)ㆍ주(周) 시대의 문헌집으로 고대 성현의 정치 사적과 언행이 실려 있어서 공자의 시대에 이미 유가의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진(秦)나라의 분서갱유 이후로 산실되었다가, 한나라 초기에 진(秦)의 박사였던 복생(卜生)이 금문(今文) 상서(尙書) 28편을 전하였다. 그 뒤로 여러 경로를 통하여 금문 상서와는 편차를 달리하는 고문(古文) 상서가 나타났으나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다가, 서진(西晋) 말기에 매색(梅賾)이 58편의 고문본 《상서》를 바쳤는데, 거기에는 금문본 28편의 내용 외에 25편의 새로운 글이 포함되어 있어서 위고문(僞古文)의 논쟁이 있었으나, 그대로 당나라 이후 관학에 채택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주D-024]상서대전(尙書大傳) : 전한(前漢) 시대의 제남(濟南) 사람 복생(伏生)이 지은 《상서》주석서이다. 모두 3권.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41권으로 전하지만,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와 《신당서(新唐書)》 〈예문지〉 등에는 3권으로 전한다. 복생은 자신의 학문을 장생(張生)에게 전하고, 장생은 다시 구양생(歐陽生)에게 전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장생과 구양생이 견문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 전하는 것은 〈홍범오행전(洪範五行傳)〉만 전체가 대략 갖추어져 있을 뿐, 나머지는 일문(佚文)들이다. 정현(鄭玄)이 주(註)를 달았다.[주D-025]시(詩) : 《시경(詩經)》을 말한다. 이 책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가집이다. 서주 초기에서 춘추 중엽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에 걸친 시기의 시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311편 중 명칭만 전하는 6편 외에 305편의 시가가 전하는데, 각 지방의 민가와 조정 및 종묘에서 사용되는 악가가 수록되어 있다. 본래 《시》 또는 《시삼백》이라 불렸으며,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시가를 공자가 300여 편으로 편찬하였다는 산시설(刪詩說)에 대하여는 논란이 끊이질 않았으나, 공자와 그 문도들의 언행에 자주 인용되는 내용으로 보아 공자가 이 책을 정리하여 엮은 것은 분명할 것이다. 체제는 국풍(國風)ㆍ소아(小雅)ㆍ대아(大雅)ㆍ주송(周頌)ㆍ노송(魯頌)ㆍ상송(商頌)으로 분류되어 전해 온다. 한나라 시대의 학관에 노시(魯詩)ㆍ제시(齊詩)ㆍ한시(韓詩) 등의 삼가시(三家詩)가 전해졌다고 하나, 후한 이후로는 《모시(毛詩)》가 널리 전수되었고, 주자가 《시집전(詩集傳)》을 지으면서 조선조에는 《시전》이 널리 유포되었다.[주D-026]시서(詩序) : 《모시(毛詩)》에 전해 오는 《시경》 시의 서문. 《시경》 전편의 종지를 서술한 대서(大序)와 시 각 편의 취지와 의의를 서술한 소서(小序)가 있다. 자하(子夏)가 소서를 지었고, 자하와 모공(毛公)이 대서를 지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또한 《후한서(後漢書)》에는 위굉(衛宏)이 대서를 지었다는 설이 있다.[주D-027]춘추(春秋) : 중국 춘추 시대 노나라 은공(隱公)에서부터 애공(哀公)까지의 12대 군주 244년간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편찬자에 대해서는 공자라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지만, 대체로 노나라의 사관이 기록해 둔 사료를 공자가 베껴 보관해 두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본다. 굵은 선에 거친 필치로 사건에 대해 상세한 설명 없이 시말만 간단히 기술되어 있어 ‘전(傳)’의 풀이와 해설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서적이다.[주D-028]좌전(左傳) : 《춘추》는 단지 몇 글자만으로 사건의 시말을 서술하고 있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후세 사람들이 그것을 해설하는 ‘전’을 지었다. 한대(漢代)까지는 모두 5종의 전이 있었으나〔《좌씨전》ㆍ《공양전》ㆍ《곡량전》ㆍ《추씨전(鄒氏傳)》ㆍ《협씨전(夾氏傳)》〕, 현재는 3종〔《좌씨전》, 《공양전》, 《곡량전》〕밖에 전하지 않는다. 《좌씨전》은 전국 시대에 이루어져 대전자체(大篆字體)로 통용되어, 예서체의 ‘금문(今文)’으로 통용되었던 《공양전》ㆍ《곡량전》과는 달리 ‘고문(古文)’으로 지칭되었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으나 좌구명(左丘明)으로 알려져 있다. 《좌씨전》은 신빙성 있는 사료들에 근거하여 《춘추》의 의미와 필법을 설명하고 나아가 탈루와 착오까지 정정하고 있어, 이 책이 없었다면 《춘추》의 가치는 그리 높지 못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주D-029]국어(國語) : 《춘추외전(春秋外傳)》이라 불리고,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 주나라 목왕(穆王) 12년(기원전 990)에서 정정왕(貞定王) 16년(기원전 453)까지 주(周)ㆍ노(魯)ㆍ제(齊)ㆍ진(晉)ㆍ정(鄭)ㆍ초(楚)ㆍ오(吳)ㆍ월(越) 8국의 역사를 기록하였다.[주D-030]공양전(公羊傳) : 노나라 공양고(公羊高)가 지었다. 한나라 영제(靈帝) 때 의랑(議郞)이었던 하휴(何休 字 邵公)가 주석하였는데, 어떤 이는 서언(徐彦)이 소(疏)했다고도 한다. 《공양전》은 사건과 사실을 서술하는 《좌전》의 《춘추》 해석 방식과는 달리 경문(經文)에 담긴 은미한 말과 의미에 대한 해설을 위주로 하고 있다. 서언(徐彦)의 〈춘추공양전서소(春秋公羊傳序疏)〉에 의하면, 자하(子夏)가 공양고에게 전수하고, 공양고는 그의 아들 공양평(公羊平)에게 전수하고, 공양평은 아들 공양지(公羊地)에게, 공양지는 아들 공양감(公羊敢)에게, 공양감은 아들 공양수(公羊壽)에게 전수하였고, 한 경제(漢景帝) 때 공양수가 그의 제가 호무자도(胡毋子都)와 함께 죽백에 기록하여 전했다고 한다.[주D-031]곡량전(穀梁傳) : 《곡량전》 역시 《공양전》과 같이 《춘추》 경문의 은미한 말과 의미를 해설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좌전》과는 물론이요, 《공양전》과도 풀이나 해석이 다른 면이 발견되는데, 해석의 진위에 관해서는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저자 곡량숙(穀梁淑)은 자가 원시(元始)요, 노나라 사람으로 일명 적(赤)이라고도 한다. 양사훈(楊士勛)의 〈춘추곡량전서소(春秋穀梁傳序疏)〉에 의하면, 그가 자하에게서 《춘추》 경문을 배우면서 경의 전을 지었다고 한다. 그것을 순경(荀卿)에게 전하고, 순경은 노나라 사람 신공(申公)에게, 신공은 박사 강옹(江翁)에게 전했고, 그 뒤 노나라 사람 영광(榮廣)이 채천추(蔡千秋)에게 전했는데, 한 선제(漢宣帝)가 채천추를 낭관(朗官)에 발탁함으로써 《곡량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주D-032]곡례(曲禮) : 《예기(禮記)》의 편명. 상하 2편이다. 이 편에는 대체로 일상의 세세한 예의범절의 원칙을 담고 있다. 또한 예의 정신과 의의에 관해서 언급한 부분도 있다.[주D-033]단궁(檀弓) : 《예기》의 편명. 상하 2편으로 되어 있다. 주로 상례(喪禮)의 상복(喪服), 조문(弔問), 장사(葬事) 등의 내용과 의미를 기록하였다.[주D-034]왕제(王制) : 《예기》의 편명. 선왕들의 정치제도를 기록하였다.[주D-035]월령(月令) : 《예기》의 편명. 춘하추동 각 계절에 합당한 정령(政令)의 시행을 기록하였다.[주D-036]증자문(曾子問) : 《예기》의 편명.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변례(變禮)에 대해 질문하고 공자가 대답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주D-037]문왕세자(文王世子) : 《예기》의 편명.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주공(周公) 등의 언행 등을 기록하였다.[주D-038]예운(禮運) : 《예기》의 편명. 삼왕(三王)과 오제(五帝)의 예악(禮樂)의 연혁 등을 기록하였다.[주D-039]예기(禮器) : 《예기》의 편명. 예의 규범과 기물(器物) 등을 기록하였다.[주D-040]교특생(郊特牲) : 《예기》의 편명. 특생(特牲)으로 교제(郊祭)를 지내는 등 제사의 의의를 음양의 이치로 설명하고 있다.[주D-041]내칙(內則) : 《예기》의 편명. 규문(閨門) 안의 예를 기록한 것으로 남녀와 부자의 범절을 상세히 기록하였다.[주D-042]옥조(玉藻) : 《예기》의 편명. 제왕과 제후의 예복(禮服)과 예장(禮裝)의 규정 및 범절을 기록하였다.[주D-043]명당위(明堂位) : 《예기》의 편명. 명당은 천자가 제후를 조회하는 당이다. 명당에서 조회하는 서열 및 제사에 사용되는 기물, 음악 등을 기록하였다.[주D-044]상복소기(喪服小記) : 《예기》의 편명. 상복(喪服)의 예제(禮制)와 의미를 기록하였다.[주D-045]대전(大傳) : 《예기》의 편명. 조종(祖宗)과 인친(人親)의 큰 뜻을 기록하였다.[주D-046]소의(少儀) : 《예기》의 편명. 존장에게 인사하거나 물건을 드리는 법 등 일상의 소소한 범절을 기록하였다.[주D-047]학기(學記) : 《예기》의 편명. 학문의 목표, 교육의 방법 등을 기록하였다.[주D-048]악기(樂記) : 《예기》의 편명. 음악의 기원 및 의미 등을 기록하였다.[주D-049]잡기(雜記) : 《예기》의 편명. 상하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복소기〉에 빠진 상례의 잡다한 예들을 기록하였다.[주D-050]상대기(喪大記) : 《예기》의 편명. 소렴(小斂)ㆍ대렴(大斂)ㆍ치관(治棺) 등 상례의 대사(大事)를 기록하였다.[주D-051]제법(祭法) : 《예기》의 편명. 천신(天神)ㆍ지기(地祇)ㆍ인귀(人鬼)에 대한 제사의 방법과 의미를 기록하였다.[주D-052]제의(祭義) : 《예기》의 편명. 제사의 의의를 설명하였다.[주D-053]제통(祭統) : 《예기》의 편명. 제사의 근본과 의의를 설명하였다.[주D-054]경해(經解) : 《예기》의 편명. 예의 의미를 간결하게 기록하였다.[주D-055]방기(坊記) : 《예기》의 편명. 예를 통하여 백성을 교화하여 실례(失禮)를 방지하는 내용을 기록하였다.[주D-056]중용(中庸) : 《예기》의 한 편이었으나 주자가 별도로 분리하여 사서(四書)의 하나가 되었다.[주D-057]표기(表記) : 《예기》의 편명. 군자의 덕(德)과 인(仁)에 대하여 기록하였다.[주D-058]분상(奔喪) : 《예기》의 편명. 분상의 절차와 의미를 설명하였다.[주D-059]문상(問喪) : 《예기》의 편명. 상을 치르는 태도와 모습을 설명하였다.[주D-060]복문(服問) : 《예기》의 편명. 상복을 입는 절차와 의미를 간략히 설명하였다.[주D-061]간전(間傳) : 《예기》의 편명. 상중에 먹는 음식의 의미와 상복을 바꾸어 입는 절차를 간략히 설명하였다.[주D-062]삼년문(三年問) : 《예기》의 편명. 3년상의 의미를 기록하였다.[주D-063]심의(深衣) : 《예기》의 편명. 심의를 짓는 제도를 간략히 기록하였다.[주D-064]관의(冠義) : 《예기》의 편명. 관례의 유래와 의미를 간략히 기록하였다.[주D-065]혼의(昏義) : 《예기》의 편명. 혼례의 의미와 절차를 간략히 기록하였다.[주D-066]향음주의(鄕飮酒義) : 《예기》의 편명. 향음주례의 절차와 의미를 간략히 기록하였다.[주D-067]상복사제(喪服四制) : 《예기》의 편명. 상복의 법제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측면에서 간략히 설명하였다.[주D-068]일분상례(逸奔喪禮) : 옛 경전이나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주D-069]하소정(夏小正) : 《대대례기(大戴禮記)》의 한 편이다. 매월의 기후를 기록하고 있다. 《수서》 〈경적지〉에서 《대대례기》 외에 별도로 《하소정》을 기록하였으니, 이때부터 별본(別本)으로 알려졌다. 본래 고본(古本)은 대덕(戴德)의 전(傳)과 섞여 있었는데, 송나라 부숭경(傅崧卿)이 두예(杜預)의 《춘추좌씨전》의 편례에 따라 정문(正文)을 앞에 놓고, 전문(傳文)을 뒤에 붙여 매월을 한 편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주석을 붙여 모두 4권으로 만들었다.[주D-070]논어(論語) : 공자가 제자들과 그 시대 사람들의 물음에 응답한 것과 제자들끼리 주고받거나 또는 스승 공자에게서 전해 들은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당시 제자들은 제각기 모아 둔 것이 있었는데, 공자가 서거하자 함께 모아 편집하고 논찬하였기 때문에 《논어》라고 했다. 본래 《논어》는 유가 사상(儒家思想)을 설명하고 있는 일종의 전(傳)으로서, 한대(漢代)의 문제(文帝)가 특별히 존숭하였고, 육조(六朝)와 수ㆍ당대(隋唐代)에도 《논어》 연구는 성행하였는데, 송대의 유가들이 사서를 편성하면서 이후 오히려 육경보다 더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주D-071]가어(家語) : 통칭 《공자가어(孔子家語)》라고 한다. 《한서》 〈예문지〉에는 27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안사고(顔師古)는 지금 전하는 《가어》와 다른 것이라고 한다. 지금 전하는 것은 10권으로, 위나라 왕숙(王肅)이 주석하였다. 공문(孔門)의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나, 왕숙이 지은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도 있다.[주D-072]효경(孝經) : 효도의 도리에 관한 것을 설명한 책이다. 전국 시대에서 한나라 때 이미 전해졌는데, 금문 효경은 18장, 고문 효경은 22장으로 구성되었다. 주자는 금문 효경 앞편 6~7장만 본경(本經)이고, 그 뒷장들은 모두 전문(傳文)이라고 하여 다시 경(經) 1장과 전(傳) 14장으로 나누기도 하였다. 이 책은 공자가 증자(曾子)를 위하여 효의 미덕을 서술한 것이라고 전해 오지만, 그 작자와 전수된 경위에 대하여는 이설이 있다.[주D-073]이아(爾雅) : 명물(名物)에 대한 훈고서(訓詁書)로서 가장 오래된 책이다. 그 해석이 제자(諸子)들의 잡서(雜書)에서 나온 것이긴 해도 경전을 풀이한 내용이 많아 훗날 13경(經)의 하나가 되었다. 이 책의 풀이서로는 진나라 곽박(郭璞)이 주석하고, 송나라 형병(邢昺)이 소(疏)한 《이아주소(爾雅注疏)》 11권이 있다.[주D-074]맹자(孟子) : 전국 시대의 유가 사상가인 맹가(孟軻)의 언행과 그가 당시 사람들이나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대체로 맹자의 문인인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 등이 중심이 되어 기술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두 7편이지만, 《한서》 〈예문지〉에는 11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조기(趙岐)는 〈제사(題辭)〉에서 외서(外書) 4편〔성선(性善)ㆍ변문(辯文)ㆍ설효경(說孝經)ㆍ위정(爲政)〕이 있지만 글의 뜻이 깊지 못한 것이 내편(內篇)과는 딴판이어서 진본이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조기가 《맹자장구(孟子章句)》를 엮으며 7편만을 주석하였고, 그것이 세상에 전해지면서 7편으로 정착된 것이다.[주D-075]장자(莊子) : 전국 시대 사상가인 장주(莊周)의 사상을 기록한 책. 《한서》 〈예문지〉에는 52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전 곽상(郭象)의 주석본은 33편본이다. 곽상은 내편 7편ㆍ외편 15편ㆍ잡편 11편으로 분류하였는데, 내편은 장주의 저술로 보았지만, 외편은 장자의 후학들이, 그리고 잡편은 그 외의 인물들이 저술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구성한 것으로 여겨진다.[주D-076]순자(荀子) : 전국 시대 유가 사상가인 순황(荀況)이 자신의 사상과 학문 세계를 피력한 저술이다. 그러나 일부는 그의 제자들이 순황의 언행을 기록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본래 32편 12권인 것을 양경(楊倞)이 20권으로 개편하였다. 〈유향서록(劉向敍錄)〉에 의하면, “순경(荀卿)이 세상에 등용되지 못하고 늙어서 난릉(蘭陵)에 살았는데, 탁세(濁世)의 정사가 나라를 망치고, 난군(亂君)이 연이어 나와 대도를 좇지 않고 무축(巫祝)과 기도를 일삼으며, 천박한 소유(小儒)들은 소절(小節)에 구애되고 장주(莊周)의 무리는 궤변으로 인심을 어지럽히니, 그가 이것을 심히 미워하여 수만 언을 저술하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주D-077]공총자(孔叢子) : 한나라 초기에 공자의 8세손 박사 공부(孔鮒)가 지었다고 하는 책이다. 21편 7권. 제ㆍ량(齊梁) 시대의 호사가가 지었다는 위서시비(僞書是非)가 있었다.[주D-078]전국책(戰國策) : 한나라 유향(劉向)이 편집하였다. 모두 33권. 12국으로 나누어 나라별로 지략(智略)으로 해결된 사건 사실들을 수록하고 있다.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에 모두 괴통(蒯通)이 《준영(雋永)》 81편을 저술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이 한나라 고유(高誘)가 주를 달고 유향이 저록(著錄)한 《전국책》과 동일한 책인지는 분명하지 않다.[주D-079]신서(新書) : 한나라 가의(賈誼)의 저술을 모은 책이다. 모두 56편 10권이다. 〈과진론(過秦論)〉에서부터 〈조상부(弔湘賦)〉에 이르기까지 세사(世事)에 절실한 그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주D-080]용경(容經) : 《신서(新書)》의 편명이다.[주D-081]사기(史記) : 한나라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최초의 중국 통사. 본기 12편, 표 10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총 130권으로 기전체 서술 방식의 효시가 되었다. 황제(黃帝)로부터 한 무제(漢武帝)까지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주D-082]시법해(諡法解) : 《사기(史記)》에 〈시법해〉 한 편이 실려 있고, 모두 194칙의 시주(諡注)가 실려 있는데, 《상변통고》 권16에 실린 시주는 대개 이를 원용하였다. 이와 달리 서진(西晉) 때 옛날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의 무덤에서 나왔다고 전하는 《일주서(逸周書)》 10권 가운데 한 편으로 〈시법해〉가 있는데, 그 내용이 《사기》와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주D-083]열녀전(列女傳) : 전한의 유향(劉向, 기원전 77~기원전 6)이 중국 상고(上古) 시기부터 한대(漢代)에 이르기까지 부녀들의 언행과 재능이나 절개 있는 여자들에 관한 내용을 모아 기록한 책이다. 본 책은 7편이었는데, 후한의 반소(班昭)가 40편으로 개편하였고, 거기에 16전을 붙였다. 지금 전하는 책은 송나라 왕회(王回)가 수정한 7권본이다. 모의(母儀)ㆍ현명(賢名)ㆍ인지(仁智)ㆍ정순(貞順)ㆍ절의(節義)ㆍ변통(辨通)ㆍ얼폐(孼嬖) 7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권의 끝에 송의(頌義)가 부기되어 있다.[주D-084]백호통(白虎通) : 기원전 100년경 금문 경서(今文經書) 외에 고문 경서(古文經書)가 발견되면서 오경(五經)에 대한 해석에서 금문학파와 고문학파 간의 차이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후한(後漢) 장제(章帝)가 이들 금문학자와 고문학자들을 백호관(白虎觀)에 모이게 하여 오경 해석의 차이점을 토론하게 했는데, 그 내용을 반고(班固)가 정리하여 엮은 것이 이 책이다. 본 제목은 《백호통의》라고 한다. 모두 4권 44편이다.[주D-085]한서(漢書) : 후한의 반고(班固)가 저술하고 반소(班昭)가 이어서 편찬한 전한(前漢)의 역사서. 제기(帝紀) 13권, 표(表) 9권, 지(志) 18권, 열전(列傳) 79권 등 모두 120권이다.[주D-086]오경이의(五經異義) : 후한의 허신(許愼)이 편찬한 책. 오경에 관한 고금(古今)의 유설(遺說)이나 이의(異義)를 수록하고 그에 대한 설(說)의 시비를 판별한 책으로 모두 10권이다. 후한의 정현(鄭玄)이 〈박오경이의(駁五經異義)〉를 지어 그 설의 오류를 지적한 바 있다.[주D-087]설문(說文) :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를 가리킨다. 당시 금문학자들의 경서 해석상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오경이의(五經異義)》와 함께 문자의 형태와 의미를 풀이한 이 책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경전의 올바른 해석은 문자의 정확한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인식에서 당대 소전자체(小篆字體)를 기반으로 한자의 어원과 의미를 풀이하여 14편 9천여 자를 수록하고 있다. 남당(南唐)의 학자였던 서개(徐鍇)가 《설문해자》의 부흥을 위하여 《설문해자계전(說文解字繫傳)》 40권을 편찬하는 등 여러 판본이 전해 온다.[주D-088]석명(釋名) : 후한(後漢) 유희(劉熙)의 저술로서, 만물의 명호(名號)를 풀이하였다. 저자 유희는 자가 성주(成周)이고, 북해(北海) 사람으로 한말(漢末)의 훈고학자였다.[주D-089]정목록(鄭目錄) : 후한의 학자 정현(鄭玄)이 《의례》와 《예기》의 각 편에 대해 간략하게 그 내용을 해설한 글이다.[주D-090]정지(鄭志) : 정현(鄭玄)이 그 문도들과 문답한 경학에 대한 논설을, 그 손자로서 위(魏)나라의 시중(侍中)을 역임한 정소동(鄭小同)이 모아서 저술한 책.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모두 11권이라 했으나, 송나라 때 이르러 3권본이 전해졌다.[주D-091]논형(論衡) : 후한 때 왕충(王充, 27~97년경)이 지은 사상서이다. 30권 85편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회계(會稽)에서 저술을 시작하여 30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합리적 실증주의와 유물적 자연관에 입각하여 고대 공(孔)ㆍ맹(孟)ㆍ순(荀)ㆍ묵(墨)ㆍ법(法)ㆍ도(道)ㆍ음양가(陰陽家)에서 한대의 도교(道敎)와 참위(讖緯) 미신 사상 등을 비판하였다.[주D-092]여복지(輿服志) : 중국 한나라 때의 거여(車輿)와 관복(冠服)에 대한 연혁 및 등급의 상하에 관하여 서술한 책이다. 이 글은 현재 《후한서》에 수록되어 있다. 《진서(晉書)》와 《구당서(舊唐書)》에도 〈거복지(車服志)〉가 있다.[주D-093]위의(魏儀) :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상경(常褧)이 찬한 《후위의주(後魏儀注)》 50권이 있다”고 했으니, 아마 이 책을 가리키는 듯하다.[주D-094]조위(曹魏) : 조씨(曹氏)의 위(魏)나라. 중국의 삼국 시대 위(魏)나라를 가리킨다.[주D-095]박물지(博物志) : 모두 10권으로 서진(西晉)의 장화(張華, 232~300)가 지었다. 본래 장화가 400권의 《박물지》를 지어 무제(武帝)에게 바쳤는데, 무제가 허황된 말이 많다 하여 10권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이 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산천ㆍ인민ㆍ산물ㆍ풍습에서 동물ㆍ곤충ㆍ식물과 의복ㆍ그릇과 신기한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기록하고 있다. 《한위총서(漢魏叢書)》와 《고금일사(古今逸史)》에 수록되어 전한다.[주D-096]강도집례(江都集禮) : 진(晋)의 양주 박사(楊州博士) 반휘(潘徽)와 우홍(牛弘) 등이 당시 번잡한 예를 정리한 책이다.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에는 126권으로 전해지지만, 《구당서(舊唐書)》 〈예의지(禮儀志)〉에는 120권으로 전한다.[주D-097]최씨변제(崔氏變除) : 진(晉)나라 최개(崔凱)가 저술하였다. 상례의 진행 과정에 따른 상복의 변경과 상복을 벗는 과정을 논한 것이다.[주D-098]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 양(梁)나라 종름(宗懍)이 남북조 시대 형초(荊楚) 지방 농가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것이다. 모두 1권. 정월 1일부터 12월 말까지 민간의 연중 행사를 월별로 기록하고 설명하였다.[주D-099]속제해기(續齊諧記) : 남조 양(梁)나라 오균(吳均, 469~520)의 지괴소설집(志怪小說集).[주D-100]후한서(後漢書) : 중국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에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 398~445)이 편찬한 기전체(紀傳體) 사서(史書)로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80권, 지(志) 30권으로 되어 있다. 광무제(光武帝)부터 헌제(獻帝)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인 ‘25사(史)’ 중에서도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史)’로 꼽힌다.[주D-101]안씨가훈(顔氏家訓) : 북제 때 안지추(顔之推, 531~591)가 입신(立身)과 치가(治家)의 법도를 기술하기 위해 시속(時俗)의 잘잘못을 변정하고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한 잡론들을 모은 책이다. 모두 7권. 전체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남북조의 풍속과 당시 불교와 노장 사상의 담론이며, 음운과 자훈ㆍ전고(典故)ㆍ고증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주D-102]삼례도(三禮圖) : 예로부터 정현본(鄭玄本)과 완심본(阮諶本)과 하후복랑본(夏侯伏朗本)과 장일본(張鎰本)과 양정본(梁正本)과 개황관찬본(開皇官撰本) 6종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고, 다른 두 가지 본이 전하고 있다. 하나는 송나라 섭숭의(聶崇義)가 편찬한 것으로 모두 20권본이다. 섭숭의가 왕명을 받아 교묘제례(郊廟祭禮)를 정비했는데, 이때 옛 《삼례도》를 가져다 고증하여 별도의 《삼례도》를 만들었으나 소략하고 잘못된 부분이 많다고 비판받았다. 또 하나는 명나라 유적(劉績)이 편찬한 것으로 모두 4권본이다. 육전(陸佃)의 《예상(禮象)》과 진상도(陳祥道)의 《예서(禮書)》와 임희일(林希逸)의 《고공기해(考工記解)》 등을 저본으로 편찬하였는데 섭숭의가 편찬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주D-103]옥촉보전(玉燭寶典) : 수(隋)나라 저작랑(著作郞) 두대경(杜臺卿)의 저술. 〈월령(月令)〉의 내용을 확대한 것으로 총 12권이다.[주D-104]문중자(文中子) : 《중설(中說)》이라고도 하는 이 책은 수나라 왕통(王通, 584~618)이 지은 사상서이다. 구성은 왕도(王道)ㆍ천지(天地)ㆍ사명(事名)ㆍ주공(周公)ㆍ문역(問易)ㆍ예악(禮樂)ㆍ술사(述史)ㆍ위상(魏相)ㆍ입명(立命)ㆍ관랑(關朗) 등 모두 10편으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곳곳에 의문스러운 곳이 많아 위찬(僞撰)이라는 시비가 일기도 했다.[주D-105]광운(廣韻) : 수(隋)나라 때 육법언(陸法言)이 《절운(切韻)》 5권을 편찬하였는데, 뒤의 사람들이 이 책을 증보하여 《당운(唐韻)》 또는 《광운(廣韻)》이라 일컬었다. 북송의 진팽년(陳彭年, 961~1017)이 중수한 《광운》은 운부(韻部)가 《절운》보다 13개 많은 206개이며, 자수(字數)는 두 배 정도인 2만 6196자를 수록하고 있다. 글자의 독음에 따라 편제를 구성하여, 성조(聲調)별로 나누었다. 같은 부(部)에서 동음자(同音字)끼리 모아 가장 앞의 자에 반절(反切)을 기록하고, 각 글자마다 간단한 뜻풀이를 해 두었다.[주D-106]진서(晉書) :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및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에 대한 정사체(正史體)의 역사서로서 모두 130권이다. 당 태종의 명에 의해 장영서(臧榮緖)의 《진서》 110권을 중심으로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집필하였고, 방현령(房玄齡)을 중심으로 저수량(褚遂良)ㆍ허경종(許敬宗) 등의 감수를 거쳐 정관 22년(646)에 완성되었다. 본기(本紀) 10권ㆍ지(志) 20권ㆍ열전(列傳) 70권ㆍ재기(載記) 30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재기는 오호십육국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주D-107]북사(北史) : 북위(北魏)로부터 북제(北齊)ㆍ북주(北周)와 수(隋)에 이르는 233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모두 100권으로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지었다. 이연수의 부친인 이대사(李大師)가 남북조의 사서들이 중복되어 있다 하여 이들을 모아 하나의 사서로 편찬코자 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것을 이어받아 북조(北朝)의 위(魏)ㆍ제(齊)ㆍ주(周)ㆍ수(隋)의 역사와 야사들을 참고하여 이 책을 편찬하였다. 본기 12권ㆍ열전 87권ㆍ서전(序傳)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북위(北魏)와 서위(西魏)를 정통으로 하고, 당(唐)과 주(周)ㆍ수(隋)의 계승관계를 강조하고 있으며, 열전의 경우 왕조별로 구분하지 않고 통시대적으로 기술하여 가문의 성쇠를 일별할 수 있도록 한 특징이 있다.[주D-108]남사(南史) : 송(宋) 영초(永初) 원년(420)에서 진(陳) 정명(禎明) 3년(589)까지 남조(南朝) 170년간의 역사를 정사체로 기록한 책이다. 모두 80권으로 본기 10권ㆍ열전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나라 이연수(李延壽)가 부친 이대사(李大師)의 뜻을 이어 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의 사서를 참고하되, 그 체례를 바꾸어 659년에 완성한 것이다.[주D-109]개원례(開元禮) : 당(唐)나라 시대 예제(禮制)에 관한 책으로 150권이다. 당나라 때 《대당의령(大唐儀令)》(《정관례(貞觀禮)》) 100권과 《현경례(顯慶禮)》 130권이 통용되었는데, 개원(開元) 14년(726) 왕암(王嵒)이 상소하고 장열(張說)의 건의로 개정 작업을 거쳐 이 책이 완성되었다. 구성은 서례(序例) 3권ㆍ길례(吉禮) 75권ㆍ빈례(賓禮) 2권ㆍ군례(軍禮) 10권ㆍ가례(嘉禮) 40권ㆍ흉례(凶禮) 20권으로 되어 있고, 예목(禮目)은 모두 152편 226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후대 율령의 모범이 되었으며, 다른 나라에도 널리 영향을 미쳤다.[주D-110]제록(祭錄) : 당나라 주원양(周元陽)이 가례제의(家禮祭儀)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것으로 모두 1권이다.[주D-111]당제(唐制) : 당나라 고조(高祖) 무덕(武德) 연간(618~626)에 수나라 《개황률(開皇律)》을 본받아 처음으로 당률(唐律)을 편찬하였고, 그 뒤로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쳤다. 무덕률 12권ㆍ정관율(貞觀律) 12권ㆍ개원율(開元律) 12권ㆍ영휘율(永徽律) 30권이 있다.[주D-112]통전(通典) : 황제(黃帝)와 당우(唐虞)로부터 당나라 천보(天寶) 연간(742~756)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대의 전장 제도(典章制度)를 정리한 책으로 모두 200권이다. 당나라 개원(開元, 713~741) 말엽에 유질(劉秩)이 《주례(周禮)》 육관(六官)의 형식을 본떠 《정전(政典)》 35권을 저술하였는데, 두우(杜佑)가 그 책을 기초로 범위를 더 확대하고 《개원례(開元禮)》와 〈악지(樂志)〉를 보태어서 801년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사류(事類)에 따라 모두 9문(門)으로 분류하고, 다시 자목(子目)으로 세분하고 있는데, 구성은 식화(食貨) 12권ㆍ선거(選擧) 6권ㆍ직관(職官) 22권ㆍ예(禮) 100권ㆍ악(樂) 7권ㆍ병(兵) 15권ㆍ형(刑) 8권ㆍ주군(州郡) 14권ㆍ변방(邊防) 16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중국 각 시대의 제도에 관한 연혁을 총술하고 있지만, 당대(唐代)에 관한 기술이 가장 상세하여 당대 정치제도사와 사회경제사에 관한 기본 문헌이 된다.[주D-113]당서(唐書) : 당나라 때는 오긍(吳兢)이 개원(開元)까지의 역사를 편찬하고, 위술(韋述)ㆍ유방(柳芳)ㆍ우휴열(于休烈) 등이 증수해 《당서》 30권을 편찬하였다. 후진(後晋) 고조(高祖) 때는 유후(劉煦) 등이 앞의 책을 토대로 《당서》 200권을 찬진하였는데, 본기 20권, 지 30권, 열전 150권이 그것이다. 송나라에 와서 구양수(歐陽脩)와 송기(宋祁)가 새로 《당서》를 간행하자, 유후의 것은 《구당서》라고 칭하고, 구양수의 것을 《신당서》라고 칭하게 되었다. 《신당서》는 본기 10권, 지 50권, 표 15권, 열전 150권의 총 225권으로 구성되었는데, 대개 《구당서》를 기초로 개작하거나 보충한 것이다.[주D-114]덕종실록(德宗實錄) : 당나라 제9대 군주인 덕종(德宗) 대의 실록으로 모두 50권이다. 장예(蔣乂)ㆍ번신(樊紳)ㆍ재보(材寶)ㆍ위처후(韋處厚)ㆍ독고욱(獨孤郁) 등이 편찬하고, 배식(裴埴)이 감수(監修)하였다.[주D-115]인화록(因話錄) : 당(唐)나라 조린(趙璘)이 찬술하였다. 오음(五音)으로 오부(五部)를 나누었다. 1권은 궁부(宫部), 2권과 3권은 상부(商部), 4권은 각부(角部), 5권은 치부(徵部), 6권은 우부(羽部)로 제왕ㆍ공경ㆍ백료ㆍ백성 등의 일사(逸事)를 기록하였다.[주D-116]고금주(古今註) : 진(晋)나라 최표(崔豹)가 지은 고대 중국의 제도와 명물에 관한 해설서로 모두 3권이다. 여복(輿服)ㆍ도읍(都邑)ㆍ음악ㆍ조수(鳥獸)ㆍ어충(魚虫)ㆍ초목ㆍ잡주(雜註)ㆍ문답석의(問答釋義) 등 모두 8편으로 구성되어 있다.[주D-117]천보유사(天寶遺事) :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로 모두 4권이다. 오대(五代) 왕인유(王仁裕)가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ㆍ천보(天寶) 연간에 발생한 궁중의 잡다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궁중 내외의 풍속과 습관, 현종과 양귀비의 사연, 귀족들의 사치 생활 등을 기록하고 있어, 희곡 소설가들뿐만 아니라 장고가(掌故家)들도 즐겨 보았다고 한다.[주D-118]속사시(續事始) : 촉(蜀)의 풍감(馮鑑)이, 사물의 시원(始原)을 유추하여 기록한 당나라 유효손(劉孝孫)의 《사시(事始)》를 확대하여 저술한 것으로 모두 5권이다.[주D-119]위촉(僞蜀) : 당나라 말기에 건국되었던 전촉(前蜀, 907~925)과 후촉(後蜀, 934~965)을 지칭하는 것 같다.[주D-120]청성산기(靑城山記) : 전촉(前蜀)의 두광정(杜光庭)이 지은 도교의 명산과 복지에 관한 기록인 《명산동천복지기(名山洞天福地記)》 가운데 청성동(靑城洞)에 관련된 기록으로 추정된다.[주D-121]송제(宋制) : 《개보례(開寶禮)》와 《지화례(至和禮)》와 《정화례(政和禮)》를 합쳐 통칭 송제(宋制)라고 부른다. 《개보례》는 송나라 개보 연간에 유온수(劉溫叟)ㆍ이방(李昉)ㆍ노다손(盧多遜) 등이 왕명을 받고 당나라 《개원례(開元禮)》를 토대로 더 보충하여 엮어 송조(宋朝)의 신제(新制)로 제정한 것으로 모두 200권이다. 《지화례》는 인종조(仁宗朝) 지화 원년(1054)에 편찬되었다.[주D-122]태평광기(太平廣記) : 북송(北宋) 대 이방(李昉) 등이 태종(太宗)의 칙령으로 편찬하여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에 완성하였다. 한(漢)에서 송초(宋初)까지 야사(野史)ㆍ전기(傳記)ㆍ소설(小說) 등에서 기사를 수집하여, 신선(神仙)에서 잡록(雜錄)까지 모두 92류(類)로 내용을 분류한 책이다. 모두 500권이다. 내용은 대개 도교와 불교 관련 설화나 괴담ㆍ이문(異聞)ㆍ기사(奇事) 등을 모았는데, 다소 기이한 이야기가 많지만 당시 중국 사회의 풍속과 관습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경제사 자료로 매우 유용한 면이 많다.[주D-123]제식(祭式) : 송(宋) 위공(魏公) 한기(韓琦)가 지었다. 한기의 자는 치규(稚圭), 호는 공수(贛叟), 시호는 충헌(忠獻)이다.[주D-124]오대사(五代史) : 《신오대사(新五代史)》 또는 《오대사기(五代史記)》로 불리기도 한다. 후량(後梁) 개평(開平) 원년(907)부터 후주(後周) 현덕(顯德) 7년(960)까지 13제(帝) 54년간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74권. 북송 때의 구양수(歐陽脩, 1007~1072)가 엮었다. 본기 12권ㆍ열전 45권ㆍ고(考) 3권ㆍ세가 및 연보 11권ㆍ사이부록(四夷附錄)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는 설거정(薛居正)의 《구오대사(舊五代史)》에서 취하였고, 《사기》의 체례에 춘추필법을 따라 오대(五代)의 본기와 열전을 각기 한 편으로 구성하였다. 본래 《구오대사》의 곡필을 바로잡기 위해 편찬되었으나, 오대의 역사를 암흑기로 규정하고 송에 관련된 부분은 피하고 있으며, 봉건적 통치 개념을 더욱 강화시킨다는 평을 받고 있다.[주D-125]서의(書儀) : 송(宋)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지은 것으로 모두 10권이다. 《사마서의(司馬書儀)》라고도 한다. 〈표주공문사서가서식(表奏公文私書家書式)〉 1권, 〈관의(冠儀)〉 1권, 〈혼의(婚儀)〉 2권, 〈상의(喪儀)〉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 옛 의례에 준하여 당시 시행할 만한 예법을 정리한 것이다.[주D-126]온공가범(溫公家範) : 송(宋)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편찬한 가정교육서로 모두 10권이다. 책의 앞머리에는 《주역》의 ‘가인(家人)’의 괘사(卦辭)를 실어 두고, 여러 경전에서 치가(治家)에 관련된 글귀들을 모은 것이다. 모두 1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주D-127]이정전서(二程全書) : 송대의 성리학자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두 형제 철학자의 저술을 모아 엮은 것이다.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이 문집을 편집하고, 주자(朱子)가 《유서(遺書)》와 《외서(外書)》를 편집하고, 장기(張玘)가 경설(經說)을 합한, 모두 65권인데, 《이정유서(二程遺書)》 25권ㆍ부록 1권ㆍ《이정외서(二程外書)》 12권ㆍ《명도선생문집(明道先生文集)》 5권ㆍ《이천선생문집(伊川先生文集)》 8권ㆍ《이천역전(伊川易傳)》 4권ㆍ《정씨경설(程氏經說)》 8권ㆍ《이정수언(二程粹言)》 2권이 포함되어 있다. 주돈이(周敦頤)의 뒤를 이어 북송 이학(理學)을 발전시킨 그들의 사상이 형성 발전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책이다.[주D-128]역전(易傳) : 송대의 성리학자 정이(程頤)가 지은 4권으로 된 《역(易)》에 관한 해설서이다.[주D-129]당감(唐鑑) : 당조(唐朝) 300년간의 흥망성쇠를 《자치통감》의 기사를 토대로 서술하고, 거기에 편자 자신의 논평과 논단을 붙인 책이다. 12권의 편년체 사서(史書)이다. 편자는 북송 때 범조우(范祖禹, 1041~1098)이다. 일찍이 사마광의 《자치통감》 편찬에 참여하였던 편자는 당나라 부분의 기사를 적출하여 자신의 식견으로 대담하고 객관적인 논평을 붙여 철종에게 헌상하였다.[주D-130]여씨향약(呂氏鄕約) : 중국 북송(北宋) 때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 여씨 문중의 대충(大忠)ㆍ대방(大防)ㆍ대균(大鈞)ㆍ대림(大臨) 4형제가 문중과 향리를 교화하고 선도하기 위하여 만들었던 자치 규약이다. 주자(朱子)에 의해 수정이 가해져 《주자증손여씨향약(朱子增損呂氏鄕約)》이 만들어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517년 중앙정부의 명령으로 각 지방장관에 의해 《여씨향약》이 인출ㆍ광포(廣布)되었고 이를 토대로 이황(李滉)은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이이(李珥)는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주D-131]춘추호전(春秋胡傳) : 송나라 호안국(胡安國)의 춘추전(春秋傳)이다. 호안국은 당시 정이(程頤)의 학문에 크게 영향을 받아 송대 이학(理學)이 추구했던 ‘통경치용(通經致用)’의 학풍에 따라 《춘추》 해석을 시도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춘추》를 경세서(經世書)로 파악하였는데, 이는 《맹자》의 ‘대의론(大義論)’에 근본하고, 사실 여부의 해명보다 의리 내용을 중시하는 공양학풍(公羊學風)을 계승하고 있다.[주D-132]추호어록(鄒浩語錄) : 송나라 철종조(哲宗朝)에 우정언(右正言)을 지낸 추호(鄒浩)의 어록으로 1권이다. 흔히 《도향어록(道鄕語錄)》이라고도 한다. 이 외에도 《도향집(道鄕集)》 40권과 《논어해의(論語解義)》 10권, 《역계사의(易繫辭義)》 3권 등의 저술이 있다.[주D-133]다록(茶錄) : 송나라 채양(蔡襄)이 지은 것으로 모두 2권이다. 채양은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이 민(閩) 땅 산품(産品)은 싣지 않았고, 정위(丁謂)의 《다도(茶圖)》도 단지 채조(採造)만 논하고 끓이는 것은 논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상편은 차에 관해 논했고, 하권은 다기(茶器)에 관해 논했는데, 모두 끓여 시음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주D-134]담록(談錄) : 《가씨담록(賈氏談錄)》. 송(宋)나라 장계(張洎)의 저술. 장계는 원래의 자(字)가 사암(思黯)인데, 고쳐서 해인(偕仁)이라 했다. 가황중(賈黄中)에게서 들은 내용을 책으로 편찬했기 때문에 서명(書名)을 《가씨담록》이라 했다.[주D-135]사물기원(事物記原) : 원래 북송대 고승(高承)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아 당초 모두 217종의 사물에 대한 기원과 관련 자료들을 수록한 유서(類書)로서 모두 10권이 전하였는데, 기윤(紀昀)의 《사고전서총목제요》에는 명나라 정통(正統) 연간에 간경(簡敬)이 판각한 전본(傳本)에는 1765종의 사실을 기록하였고, 또한 그 서문에 “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다〔作者佚其姓氏〕”고 하였다고 했으니, ‘명씨가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한 것은 아마 이 판본을 가리킨 듯하다.[주D-136]원류지론(源流至論) : 전집 10권과 후집 10권, 속집 10권은 송나라 사람 임경(林駉)이 저술하였고, 별집 10권은 송나라 사람 황이옹(黃履翁)이 저술하였다.[주D-137]용감수감(龍龕手鑑) : 요(遼)나라 승려 행균(行均)의 저술로 4권이다. 원래 명칭은 《용감수경(龍龕手鏡)》인데, 송(宋)나라 사람이 다시 새기면서, ‘경(鏡)’ 자가 송 태조(宋太祖)의 조부(祖父)인 조경(趙敬)의 ‘경(敬)’ 자와 성음(聲音)이 비슷하기 때문에 ‘경(鏡)’ 자를 ‘감(鑑)’ 자로 고쳤다. 이 책은 《설문해자(說文解字)》의 부수(部首) 차례를 완전히 바꾸어, 대체로 평ㆍ상ㆍ거ㆍ입(平上去入)의 사성(四聲)으로 그 순서를 배열하였다. 전체 평성 97부(部), 상성 60부, 거성 26부, 입성 59부의 총 242부(部)로, ‘금(金)’부에서 시작하여 ‘잡(雜)’부에서 끝난다. 총 2만 6430여 글자를 수록하고, 1만 6317여 글자로 주석하였는데, 불서(佛書)를 많이 인용하여 음의(音義)를 증명하고 해석하였다.[주D-138]율려신서(律呂新書) : 송(宋) 서산(西山)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의 저술이다. 채원정은 남송(南宋)의 성리학자로, 자는 계통(季通)이며, 복건성(福建省) 건양(建陽) 사람이다. 주자의 절친한 친구요 제자이다. 《황극경세지요(皇極經世指要)》 등의 저술이 있고, 《서경집주》를 편찬한 채침(蔡沈)은 그의 셋째 아들이다.[주D-139]주자대전(朱子大全) : 남송 성리학의 완성자인 주희(朱熹, 1130~1200)의 문집이다. 모두 121권. 본래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으로 불리는데, 조선에서는 《주자대전》이라 이름 붙여 간행하였다. 주희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집한 본집 100권을 중심으로 순우(淳祐) 5년(1245)경 왕수(王遂)ㆍ유숙충(劉叔忠) 등이 속집 11권을 편집하였고, 함순(咸淳) 6년(1270) 여사로(余師魯)가 별집 10권을 편집하여 121권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주희는 성리학의 완성자로서 이 책 역시 성리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문헌의 하나이다.[주D-140]어류(語類) : 남송 성리학자인 주희가 그 문도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앞서 송나라 이도전(李道傳)이 주자의 언행에 대한 32인의 기록을 42권으로 편집하였고, 그의 아우 이성전(李性傳)이 이어서 42인의 기록을 속록 46권으로 간행하였고, 또 채항(蔡抗)이 32인의 기록을 26권으로 편집하여 추가하였으며, 또 오견(吳堅)이 앞의 책에서 누락된 33가의 기록 20권을 추가 간행하였으며, 이들 기록을 황사의(黃士儀)가 140권으로 편집하고, 왕필(王佖)이 속편 40권을 편집한 바 있었는데, 남송 여정덕(黎靖德)이 중복된 기록과 오류를 수정하고 이기(理氣)ㆍ귀신(鬼神)ㆍ성리(性理) 등 모두 26문(門) 140권으로 함순(咸淳) 6년(1270)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주D-141]태우록(台寓錄) : 주환(朱紈)이 저술한 《주문공태우록(朱文公台寓錄)》으로 모두 3권이다. 주자 나이 53세 때 공무로 태주(台州)에 머무를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주D-142]사문유취(事文類聚) : 남송 축목(祝穆)이 편찬한 유서(類書)이다. 전집 60권, 후집 50권, 속집 28권, 별집 32권으로 모두 170권이다. 《예문유취(藝文類聚)》와 《초학기(初學記)》의 체제를 본떠 항목을 분류하고, 그 아래에 다시 군서요어(群書要語)ㆍ고금사실(古今事實)ㆍ고금문집(古今文集)의 항목을 설정하여 역사 사실과 시문을 고루 배열하였다. 그 뒤 원나라 때 부대용(富大用)이 신집 36권과 외집 15권을, 축연(祝淵)이 유집 15권을 추가로 편집하여 현재 이것을 모두 모아 《고금사문유취》로 통행되고 있다.[주D-143]대학연의(大學衍義) :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대학》의 뜻에 따라 부연 설명한 책이다. 모두 43권. 그는 ‘위치(爲治)’의 요점을 학문의 근본으로 하고, 네 가지의 강령으로 나누었는데,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의정심(誠意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이다. 다시 그 아래에 44개의 조목으로 나누고 있다. 경전을 인용하고 역사서를 참고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그 대지(大指)는 ‘정군심(正君心)’, ‘숙궁위(肅宮闈)’, ‘억권행(抑權倖)’에 있었으니, 당대에 절실했던 사안을 염두에 둔 저술이었다.[주D-144]문헌통고(文獻通攷) : 송말원초의 역사가 마단림(馬端臨)이 편찬한 중국 전장 제도(典章制度)에 관한 문헌이다. 모두 348권. 중국 상고 시대로부터 남송 가정(嘉定, 1208~1224) 연간까지 전장 제도의 연혁을 전부(田賦)ㆍ전폐(錢幣)ㆍ호구(戶口)ㆍ직역(職役)ㆍ정각(征榷)ㆍ시적(市糴)ㆍ토공(土貢)ㆍ국용(國用)ㆍ선거(選擧)ㆍ학교(學校)ㆍ직관(職官)ㆍ교사(郊社)ㆍ종묘(宗廟)ㆍ왕례(王禮)ㆍ병(兵)ㆍ형(刑)ㆍ경적(經籍)ㆍ제계(帝系)ㆍ봉건(封建)ㆍ상위(象緯)ㆍ물이(物異)ㆍ여지(輿地)ㆍ사예(四裔) 등 모두 24고(考)로 분류하여 기록하고 있다. 시대 순서로 기사를 수록하고 그 아래에 제가(諸家)들의 견해를 첨부해 두었는데, 내용이 아주 풍부하여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저술이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의 기사를 많이 참조하였고, 그 이후의 기사는 각종 사료에서 취하여 기록하였다. 20년에 걸쳐 원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11년(1307)에 완성되었고, 지치(至治) 2년(1322)에 처음 간행되었다.[주D-145]운회(韻會) : 원제목은 《고금운회(古今韻會)》이다. 원(元)나라 황소(黃紹)가 편찬한 운서로 모두 30권이다. 206운 체계를 따르지 않고, 평수운(平水韻)의 차례를 따라 107운으로 분류하고 있다.[주D-146]청상잡기(靑箱雜記) : 북송대 소무(邵武) 사람 오처후(吳處厚)가 지은 것으로 모두 10권이다. 오대(五代)와 송대 조야(朝野)의 잡사(雜事)와 시화(詩話) 및 장고(掌故) 등을 기록하고 있다.[주D-147]가례부주(家禮附註) : 주희의 문인인 신재(信齋) 양복(楊復)이 편찬한 《가례잡설부주(家禮雜說附註)》이다. 모두 2권.[주D-148]이의실록(二儀實錄) : 사물의 시원에 대한 기록을 수집한 책. 《신당서(新唐書)》에 유효손(劉孝孫)의 《이의실록》 1권과 원교(袁郊)의 《이의실록의복명의도(二儀實錄衣服名義圖)》 1권이 저록되어 있고, 또한 당나라 왕예(王叡)의 저술인 《적곡자잡록주해(炙轂子雜錄注解)》는 《이의실록》과 《고금주》 등 책의 내용을 전재(全載)하였다.[주D-149]한묵전서(翰墨全書) : 송말원초(宋末元初)에 웅화(熊禾)가 유응계(劉應季)의 《사문유취한묵전서(事文類聚翰墨全書)》 10함(函) 80책을 새로 편집하여 엮은 것으로 일종의 백과전서이다. 모두 98권.[주D-150]가례보주(家禮補註) : 명나라 태자소보(太子少保)였던 유장(劉璋)이 편찬한 《가례》 주석본이다.[주D-151]원사(元史) : 테무친을 칭기즈칸으로 일컬은 시점(1206년)에서 원 순제(1368년)까지 160년간 몽골제국과 원조(元朝)의 역사를 기록한 기전체 역사서이다. 본기 47권, 지 58권, 표 8권, 열전 97권으로 모두 210권이다. 이선장(李善長)이 감수하고, 송렴(宋濂)과 왕위(王緯)가 총재관(總裁官)이 되어 편찬하였다. 각 지(志)들은 사료가 풍부하여 참고할 만하다. 또 열전의 체례(體例)는 민족으로 나누어 몽골인과 색목인을 먼저 기술하고, 이어 한인(漢人)과 남인(南人)들을 입전하였다.[주D-152]대명집례(大明集禮) : 명나라 예제(禮制)의 연혁과 당시의 정제(定制)를 정리한 것으로, 서일기(徐一夔) 등에 의하여 홍무 3년(1370)에 완성되었다. 구성은 길례(吉禮)ㆍ가례(嘉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흉례(凶禮)에다 해당되는 관복(冠服)ㆍ관복도(冠服圖)ㆍ승여(乘輿)ㆍ거로(車輅)ㆍ의복(儀伏)ㆍ노부(鹵簿)ㆍ자학(字學)ㆍ악(樂) 등 모두 5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주D-153]대명률(大明律) :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가 명하여 홍무 30년(1397)에 최종 완성된 명률(明律)이다. 모두 30권으로, 7률 30편 460조로 이루어졌는데, 당률(唐律)을 토대로 개정한 것이다. 내용은 명례율(名例律)ㆍ이율(吏律)ㆍ호율(戶律)ㆍ예율(禮律)ㆍ병률(兵律)ㆍ형률(刑律)ㆍ공률(工律)로 구성되어 있다. 시대의 추이에 부합되지 않는 율문은 조례(條例)를 공포하여 보완해 나갔다.[주D-154]대명회전(大明會典) : 명나라 전제(典制)에 관한 문헌으로, 정덕본(正德本)과 만력본(萬曆本) 두 종이 있다. 서부(徐溥) 등에 의해 홍치(弘治) 15년(1502)에 완성되어 다시 정덕 4년(1509) 이동양(李東陽) 등에 의해 정정 보완되어 간행된 것이 정덕본 180권이다. 이후 만력 4년(1576)에 신시행(申時行) 등에 의해 정덕본과 가정본(嘉靖本)에 수정 보완을 더한 것이 만력본 228권이다. 구성은 각 관청별로 해당 법전이 정리되어 있는데, 명나라 제도사뿐만 아니라 정치사나 사회경제사적으로 중요한 문헌이다.[주D-155]속강목(續綱目) : 본제목은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이다. 명나라 상로(商輅) 등이 왕명을 받아 엮은 것으로 모두 27권이다. 송 태조(宋太祖) 건륭(建隆) 원년(960)에서부터 원나라 순제(順帝) 지원(至元) 27년(1367)까지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주D-156]일통지(一統志)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 명나라 천순(天順) 5년(1461) 이현(李賢) 등이 편찬한 것으로 90권이다. 홍무제(洪武帝) 이하 천하 군현의 도경(圖經)을 모아 한 책으로 엮어 보려는 황제들의 여망이 천순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형식이나 내용이 《대원일통지》를 답습하였다. 경사(京師)ㆍ남경(南京)ㆍ중도(中都)ㆍ13포정사(布政司)순으로, 각 부마다 건치(建置)ㆍ연혁(沿革)ㆍ군명(郡名)ㆍ형승(形勝)ㆍ풍속ㆍ산천ㆍ토산ㆍ공서(公署)ㆍ학교ㆍ서원ㆍ궁실ㆍ관량(關梁)ㆍ사관(寺觀)ㆍ사묘(祠廟)ㆍ능묘ㆍ고적ㆍ명환(名宦)ㆍ유우(流寓)ㆍ인물ㆍ열녀ㆍ선석(仙釋)순으로 기술하고 있다.[주D-157]황명계운록(皇明啓運錄) : 《황명계운록》 8권은 진건(陳建)의 저술이라 하기도 하나, 《명사(明史)》에는 치재 소상(邵相)의 저술로 수록되어 있다.[주D-158]황명통기(皇明通紀) : 명나라 진건(陳建)이 지은 원말 지정(至正) 11년(1351)부터 정덕(正德) 말년(1521)까지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모두 10권.[주D-159]향교례집(鄕校禮輯) : 명나라 도희영(屠羲英)과 황의(黃議) 등이 편찬한 것으로 1권이다.[주D-160]가례의절(家禮儀節) : 명나라 구준(丘濬, 1420~1495)의 저술이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손익(損益)하여 당시의 제도를 매 장의 끝에 붙이고, 주석과 고증(考證)을 부기하였다. 모두 8권이다.[주D-161]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 명나라 구준(丘濬)이 송나라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를 보충하여 간행한 유가 사상서이다. 모두 164권.[주D-162]가례집설(家禮集說) : 명나라 풍선(馮善)의 저술이다. 풍선의 자는 택현(擇賢)이며, 무석(無錫) 사람이다. 모두 5권이다.[주D-163]자휘(字彙) : 명대의 학자 매응조(梅膺祚)가 편찬한 중국 자서. 214부의 부수와 거기에 부속되는 한자 3만 3179자를 수록하였다.[주D-164]역옹패설(櫟翁稗說) : 고려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편찬한 책. 4권 1책. 전집(前集)ㆍ후집(後集)ㆍ습유(拾遺) 등으로 되었으며, 역사책에 보이지 않는 이문(異聞), 기사(奇事)와 경전(經典), 인물, 시문(詩文), 서화(書畵) 등을 비평한 글을 실었다. 또한 자신의 시문 약간과 책 끝에 이색(李穡)의 묘지명(墓地銘)도 실었다.[주D-165]오례의(五禮儀) : 조선 세종 때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5년(1474)에 완성된 조선 왕조의 기본 예전인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가리킨다. 세종 때 허조(許稠)에게 명하여 국가의 예전을 편찬하게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세조 때 다시 강희맹(姜希孟) 등이 계속하다가 이루지 못한 것을 성종 때 이르러 신숙주(申叔舟)와 정척(鄭陟) 등이 이를 8권 6책으로 완성하였고,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5권 2책이 붙어 있다. 영조 20년(1744)에 《국조오례의》를 수정 보완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5권 4책이 편찬되었고, 영조 27년(1751)에 다시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2권 1책이 편찬되었다.[주D-166]여사(麗史) : 《고려사》. 세조조(世祖朝)에 정인지(鄭麟趾, 1396~1478) 등에게 명하여 만든 고려 시대의 역사책.[주D-167]경국대전(經國大典) : 조선 시대의 기본 법전(法典)으로 모두 6권 3책이다. 세조는 육전상정소(六典詳定所)를 설치하고 최항(崔恒)을 총책임자로 하여 한계희(韓繼禧)ㆍ김국광(金國光)ㆍ강희맹(姜希孟) 등으로 하여금 이 법전을 편찬하도록 하였다. 세조 6년(1460)에 호전(戶典)이 가장 먼저 완성되어 반포된 이후 지속적으로 편찬과 심의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예종 원년(1469)에 최종 완성이 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고, 성종의 명으로 개수 작업에 착수하여 정창손(鄭昌孫)ㆍ신숙주(申叔舟) 등의 손을 거쳐 성종 2년(1471)에 전면 시행되었다.[주D-168]국조보감(國朝寶鑑) : 조선 시대 역대 사적(事蹟)을 기록한 편년체의 역사서로, 모두 90권 28책이다. 세종이 권제(權踶)와 정인지(鄭麟趾) 등에게 명하여 태조와 태종의 보감을 만들게 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고, 세조 3년(1457) 수찬청(修撰廳)을 설치하여 신숙주(申叔舟)ㆍ권람(權擥) 등에게 태조ㆍ태종ㆍ세종ㆍ문종의 4대 보감 7권 3책을 만들게 했다. 이것을 기점으로 이후 숙종ㆍ영조ㆍ정조ㆍ헌종ㆍ고종 대에 각각 열성조(列聖朝)의 보감들이 만들어져 융희 2년(1908)에 최종 완성되었다.[주D-169]상례보편(喪禮補篇) : 활자본. 6권 6책. 영조의 명에 의해 편찬된 예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상례(喪禮) 부분을 개정한 것이다.[주D-170]문묘향사록(文廟享祀錄) : 영조 41년(1765) 김귀주(金龜柱)와 구상(具庠)에게 명하여 편집하게 하고 영조가 서문을 붙인 책이다.[주D-171]필원잡기(筆苑雜記) :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은 한문 수필집이다.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간본은 저자의 요청으로 유호인(兪好仁)이 관찰사 이세좌(李世佐)의 지원을 얻어 1487년(성종18)에 간행하였다. 중간본은 저자의 6대 후손인 정리(貞履)가 안동 부사 임담(林墰)과 전주 부윤 김남중(金南重)의 도움을 받아 1642년(인조20)에 간행하였다. 내용은 조선의 예로부터 전하는 일사(逸事)와 한담(閑談) 중에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을 추려 모아 엮은 것이다.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있으나, 여러 가지 참고가 될 자료가 많은 패관문학서(稗官文學書)로서 귀중한 문헌이다. 《대동야승(大東野乘)》에도 수록되어 전한다.[주D-172]점필재집(佔畢齋集) :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시문집. 25권 7책. 김종직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 호가 점필재이다. 그의 학문은 정몽주(鄭夢周)ㆍ길재(吉再)ㆍ김숙자(金叔滋)의 학통을 이어받았고,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로 전수되어 조선 유학의 대맥을 이루었다.[주D-173]봉선잡의(奉先雜儀) :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 조상을 제사 지낼 때의 의례를 적은 책이다. 목판본이며 2권 l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가례(朱子家禮)》 및 사마광(司馬光), 정이(程頤) 등의 제례서(祭禮書)에서 내용을 취사선택해 일가(一家)의 예법을 작성하고, 예경(禮經)과 선현들의 글에서 보본추원(報本追遠)의 뜻이 담긴 대목을 추려서 따로 하편 l권을 만들었다. 1550년(명종5)에 쓴 저자의 서(序)가 있고, 1643년(인조21)에 쓴 송국택(宋國澤)의 간기(刊記)가 있다.[주D-174]이언적(李彦迪) :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ㆍ자계옹(紫溪翁), 본관은 여주(驪州),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저술하였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주D-175]퇴계집(退溪集) :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집이다. 원집(原集) 49권, 별집(別集) 1권, 외집(外集) 1권, 속집(續集) 8권, 연보(年譜) 3권, 언행록(言行錄) 6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598년(선조31) 간행되었다. 내용은 시(詩)ㆍ교(敎)ㆍ소(疏)ㆍ차(箚) 및 제문(祭文)과 행장(行狀) 등의 27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다.[주D-176]이황(李滉) :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본관은 진보(眞寶),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홍문관 수찬ㆍ성균관 대사성ㆍ우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을 연구하여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저서에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ㆍ《천명도설(天命圖說)》ㆍ《퇴계집(退溪集)》 등이 있다.[주D-177]어록해(語錄解) : 퇴계 이황(李滉)과 그 제자들이 송나라 이래의 문헌에 나타나는 구어체(口語體)의 어휘인 어록(語錄)을 풀이한 책이다. 1652년(효종3)에 정양(鄭瀁)이 이황과 유희춘 등의 해석을 종합하여 편찬하여 다시 간행한 바 있고, 그 후 현종 때 남이성(南二星)이 왕명으로 다시 교정ㆍ증보, 1669년(현종10)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1자류(一字類)로부터 6자류로 분류하여 주를 달아 중간한 것이 있는데, 주 밑에 계훈(溪訓)ㆍ미훈(眉訓)을 표시하여 각각 이황과 유희춘의 해석임을 나타냈고, 다른 사람들의 주에는 아무 표시도 하지 않아 구별하기 쉽도록 편집하였다. 활자본이며 1책으로 구성되어 있다.[주D-178]한훤연보(寒暄年譜) :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연보.[주D-179]김굉필(金宏弼) :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본관은 서흥(瑞興),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소학》에 심취하여 ‘소학동자’라 일컬어졌다. 무오사화가 일어나 평안도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저서에 《한훤당집(寒暄堂集)》ㆍ《경현록(景賢錄)》 등이 있다.[주D-180]백담집(柏潭集) :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의 시문집. 1670년(현종11)에 후학(後學)인 김계광(金啓光)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속집은 1691년(숙종17) 이유수(李裕垂)와 김성구(金成九)가 간행하였다. 내용은 시(詩)ㆍ율(律)ㆍ절구(絶句)ㆍ유(類)ㆍ소(疏)ㆍ계문(啓文)ㆍ서(書) 등이 실려 있다. 홍여하(洪汝河)의 서문과 유동준(柳東濬)의 발문, 속집에는 김굉의 서문이 있다. 목판본이며 총 10권 4책으로 되어 있다.[주D-181]구봉령(具鳳齡) : 자는 경서(景瑞), 호는 백담(栢潭), 본관은 능성(綾城), 시호는 문서(文瑞)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1560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성과 이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백담집(柏潭集)》이 있다.[주D-182]하곡수언(荷谷粹言) : 하곡(荷谷) 허봉(許篈, 1551~1588)의 저서이다. 허봉의 자는 미숙(美叔), 호는 하곡,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유희춘(柳希春)의 문인이며, 1572년 친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1574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편저에 《해동야언(海東野言)》 등이 있다.[주D-183]율곡집(栗谷集) :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시문집. 문집은 율곡의 문하생인 박여룡(朴汝龍) 등이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상의하여 편집하였고, 시집은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가 엮어 1611년(광해군3) 해주(海州)에서 간행하였다. 그 후 1682년(숙종8)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속집ㆍ외집ㆍ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고, 1742년(영조18)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율곡의 5대손 진오(鎭五)와 협의하여 시집ㆍ문집ㆍ속집ㆍ외집ㆍ별집 등을 합본하고 여기에 《성학집요(聖學輯要)》ㆍ《격몽요결(擊蒙要訣)》과 부록을 보편(補編), 《율곡전서》로 개제(改題)하여 1749년(영조25)에 간행하였다. 1814년(순조14) 습유(拾遺) 6권과 부록 속편을 보충, 해주에서 중간(重刊)하였다. 목판본이며, 총 44권 38책이다.[주D-184]이이(李珥) :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본관은 덕수(德水),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호조ㆍ이조ㆍ병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을 역임하였다. 동서(東西) 당쟁의 조정에 힘썼다. 저서에 《성학집요(聖學輯要)》ㆍ《격몽요결(擊蒙要訣)》ㆍ《율곡전서(栗谷全書)》 등이 있다.[주D-185]격몽요결(擊蒙要訣) : 1577년(선조10) 율곡 이이(李珥)가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저술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여러 형태로 간행되었다. 예를 들어 1629년(인조7)에는 황해 감사가 수백 권을 인쇄하여 조정에 바쳐 반포하게 했으며, 다음 해에는 예조에서 《소학》ㆍ《오륜가(五倫歌)》와 함께 간행하였다. 《율곡전서(栗谷全書)》에도 실려 있다.[주D-186]가례고증(家禮考證) :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이 주희의 《가례(家禮)》를 고증한 책으로, 7권 3책이다. 조호익이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자, 제자인 김육(金堉)이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편찬하였고, 인조 24년(1646)에 간행되었다.[주D-187]학봉집(鶴峯集) :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시문집으로 16권 10책이다. 처음 가장본(家藏本)을 저본으로 8권 4책본이 간행되었고, 그 후 후손 김주국(金柱國)과 이상정(李象靖)에 의해 속집 5권 3책이 간행되었다. 다시 1847년 류치명(柳致明)에 의해 교정되어, 철종 2년(1851) 원집ㆍ속집ㆍ부록을 모두 합하여 16권 10책을 임천서원(臨川書院)에서 중간하였다.[주D-188]김성일(金誠一) :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본관은 의성(義城),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저서에 《해사록(海槎錄)》ㆍ《상례고증(喪禮考證)》ㆍ《학봉집》 등이 있다.[주D-189]김우옹(金宇顒) : 1540~1603.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본관은 의성(義城),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며, 저서에 《동강집》ㆍ《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이 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주D-190]서애집(西厓集) :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시문집. 1633년(인조11)에 아들 진(袗)이 합천 군수로 있을 때 간행하였다. 모두 20권 11책으로 되어 있으나 본집 1책을 줄여 10책으로 한 것도 있으며, 또 별집 4권을 포함하여 모두 24권 13책으로 된 것도 있다[주D-191]류성룡(柳成龍) :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본관은 풍산(豊山),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저서에 《서애집》ㆍ《징비록(懲毖錄)》 등이 있다.[주D-192]한강집(寒岡集) :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시문집. 1680년경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허목(許穆)이 편집한 것을 초간하고, 1841년(헌종7) 경상북도 성주군의 회연서원(檜淵書院)에서 중간했다. 책머리에 허목의 서문이 있다. 원집 15권, 속집 9권, 별집 3권, 총 11책으로 되어 있다.[주D-193]정구(鄭逑) :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오건(吳健)에게 수학하고 조식(曺植)ㆍ이황(李滉)에게 성리학(性理學)을 배웠다. 저서에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ㆍ《오복연혁도(五服年革圖)》 등이 있다.[주D-194]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송(宋)나라 학자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 사마광(司馬光), 장재(張載), 주희(朱熹)의 예설(禮說)을 분류ㆍ정리한 책으로, 1611년(광해군3)에 완성되어 1629년(인조7) 담양 부사 이윤우(李潤雨)와 관찰사 권태일(權泰一)이 20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책머리에 편저자의 서문이 있고, 책 끝에 장현광(張顯光)ㆍ이윤우의 발문이 있다. 전집(前集) 권1은 예총론(禮總論)ㆍ천자제후관혼례(天子諸侯冠婚禮), 권2~3은 천자제후상례, 권4∼7은 천자제후제례, 권8은 천자제후잡례로 되어 있고, 후집(後集) 권1은 관혼총론, 권2∼6은 상례, 권7∼9는 제례, 권10은 제례부록, 권11은 잡저, 권12는 편례(編禮)로 구성되어 있다.[주D-195]비지집(賁趾集) :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1543~1580)의 시문집으로 2권 2책이다. 남두원(南斗元)에 의하여 허목(許穆)의 서문을 받아 간행되었다.[주D-196]남치리(南致利) : 자는 의중(義仲), 호는 비지(賁趾),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김언기(金彦璣)ㆍ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이황이 죽었을 때 동문의 추대로 상례(相禮)를 맡아보았으며, 1578년(선조11) 정구(鄭逑)와 함께 유일(遺逸)에 천거되었다. 저서에 《비지집(賁趾集)》이 있다.[주D-197]상례비요(喪禮備要) : 조선 중기 신의경(申義慶)이 편찬하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윤색한 상례에 관한 책이다. 《가례(家禮)》 본문을 위주로 하고 고금의 여러 학설을 절충하여 초상(初喪)으로부터 장례(葬禮)에 이르는 의식 절차를 기술하였고, 사당(祠堂)ㆍ신주(神主)ㆍ진찬(陳饌) 등의 도설(圖說)을 함께 실었다.[주D-198]가례집람(家禮輯覽)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가례》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모아 엮은 책으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교정을 거쳐서 1685년(숙종 11)에 간행되었으며, 10권 6책으로 목판본이다. 상세한 도설(圖說)을 실어 상고하기에 편리하도록 했다.[주D-199]의례문해(疑禮問解)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예설(禮說)에 대한 문답을 모은 책이다.[주D-200]문해속(問解續) :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이 부친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의례문해(疑禮問解)》에 빠진 것을 모아 엮은 것으로, 1책이다. 정식 명칭은 《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다. 가례(家禮)ㆍ종법(宗法)ㆍ상례(喪禮)ㆍ제례(祭禮) 등에 대해 질문하고 답변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주D-201]여헌집(旅軒集) :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시문집으로 23권 12책이다. 아들 장응일(張應一)이 조임도(趙任道) 등과 함께 교정하여 1642년 원집 11권 6책을 처음 간행하였다. 이후 19세기 말에 와서 원집에 누락된 글을 모아 속집 10권으로 만들고 원집과 합하여 중간하였다.[주D-202]장현광(張顯光) :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인동(仁同),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학행으로 선조조와 광해조, 인조조에 걸쳐 누차 천거되었으나 거의 나가지 않았고, 나가더라도 곧장 사퇴하여 재야에서 학문 강학에 전념하였다.[주D-203]우복집(愚伏集)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시문집이다. 효종 8년(1657)에 처음 간행되었고, 헌종 6년(1840)에 중간되었다.[주D-204]정경세(鄭經世) :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본관은 진주(晉州),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류성룡의 문인으로, 저서에 《우복집(愚伏集)》과 《상례참고(喪禮參考)》 등이 있다.[주D-205]미수기언(眉叟記言)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저술로 93권 20책이다. 원집 67권과 별집 26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집은 상ㆍ중ㆍ하ㆍ잡ㆍ내ㆍ외편으로 나누어 1674년 이전의 저술을 모았고, 속집은 속집ㆍ산고ㆍ서술로 나누어 그 이후의 저술을 모았다. 숙종 15년(1689) 왕명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원집과 속집을 합쳐 원집으로 하고, 누락된 글들을 모아 별집으로 간행하였다.[주D-206]허목(許穆) : 자는 문보(文甫)ㆍ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본관은 양천(陽川),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제자백가와 경서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다. 저서에 《경설(經說)》ㆍ《동사(東事)》ㆍ《미수기언(眉叟記言)》 등이 있다.[주D-207]표은집(瓢隱集) :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1598~1669)의 시문집으로, 손자인 태중(台重)이 그의 유문(遺文)을 모아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서문을 받아 간행하였다. 목판본으로 4권 2책이다.[주D-208]택당집(澤堂集) :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시문집으로, 원집(原集) 10권, 속집(續集) 6권, 별집(別集) 18권으로 총 34권 16책이다. 저자의 아들인 이단하(李端夏)와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 등의 손을 거쳐, 1672년에 영남 감영(監營)에 보내 정본(淨本)을 만들고, 다음 해에 호남(湖南)으로 보내어 1674년 4월 송시열의 서문을 붙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주D-209]존재집(存齋集) :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의 시문집으로 8권 3책이다. 1696년경 인산서원(仁山書院)에서 유작을 모아 간행하였다.[주D-210]이휘일(李徽逸) : 자는 익문(翼文), 호는 존재(存齋),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외조부 장흥효(張興孝)의 문인. 주자ㆍ퇴계의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실천하였다. 김성일ㆍ류성룡을 거쳐 전수된 이황의 심학(心學)을 얻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존재집(存齋集)》ㆍ《구인략(求仁略)》ㆍ《홍범연의(洪範衍義)》 등이 있다.[주D-211]갈암집(葛庵集)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시문집으로 40권 21책이다. 그의 유문(遺文)을 권두경(權斗經)과 이광정(李光庭)이 교정하여 정리해 두었으나 곧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1810년경 후손에 의하여 20권으로 간행되었는데, 이 초간본은 압수되어 훼판분서(毁板焚書)되고 말았다. 순종 3년(1909) 다시 증보를 거쳐 중간되었는데, 원집 29권에 별집 6권과 부록 5권이 간행되었다.[주D-212]이현일(李玄逸) :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본관은 재령(載寧),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중형(仲兄) 휘일(徽逸)을 좇아 강학했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누차 사양하다가 나중에 관직에 나가 대사헌ㆍ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과 편서로 《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주D-213]남계집(南溪集) :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의 시문집. 125권 56책(정집 87권 39책, 속집 22권 9책, 외집 16권 8책)의 목판본이다.[주D-214]박세채(朴世采) : 자는 화숙(和叔), 호는 남계(南溪) 또는 현석(玄石), 본관은 반남(潘南),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좌의정을 역임하였고,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밝았다. 저서에 《남계집(南溪集)》ㆍ《범학전편(範學全編)》ㆍ《남계선생예설(南溪先生禮說)》ㆍ《육례의집(六禮疑輯)》ㆍ《삼례의(三禮儀)》 등이 있다.[주D-215]농암집(農巖集) :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시문집. 이 책은 당초 아우 김창흡(金昌翕)과 문인 김시좌(金時佐) 등이 1710년 34권 17책의 목판으로 간행하였고, 1754년 손자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이 연보 2권을 편찬하고, 이를 원집에 합해 36년 18책으로 중간(重刊)하였으며, 1854년 5대손 김수근(金洙根)이 속집(續集) 2권을 편찬, 총 38권으로 간행하였다. 1928년 9대손 영한(寗漢)이 다시 별집 4권을 더하여 총 42권 15책으로 간행하였다.[주D-216]김창협(金昌協) :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본관은 안동(安東),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에 《농암집(農巖集)》ㆍ《농암잡지(農巖雜識)》 등이 있다.[주D-217]명재집(明齋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의 시문집. 본집인 목록(目錄)ㆍ보유(補遺)ㆍ원집(原集) 46권과 별집(別集) 4권이다. 모두 26책으로 되어 있다.[주D-218]윤증(尹拯) :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 본관은 파평(坡平),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학행으로 누차 천거되어 대사헌, 우의정에 이르렀으나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학문과 강학에 전념하였다. 저서에 《명재집(明齋集)》ㆍ《의례문답(疑禮問答)》 등이 있고, 부친인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와 시남(市南) 유계(兪棨)가 함께 편찬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교정을 담당하여, 이로 인한 당파 간의 시비가 있었다.[주D-219]의례문답(疑禮問答) :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지은 것이다. 제자나 동료들과 예에 대해 문답을 주고받은 것을 뒤에 문인들이 모아 엮었다.[주D-220]밀암집(密庵集) : 밀암(密庵) 이재(李栽, 1657∼1730)의 시문집으로 25권 13책이다. 그의 유작을 아들 이인환(李寅煥, 1686∼1732)이 수습하여 정리하였고, 1733년 김성탁(金聖鐸)이 교정하고 다시 이광정(李光庭)이 교정하였다. 서간에 많은 문목(問目)이 남아 있으며, 기타 예설(禮說)의 산문들도 적지 않게 전한다.[주D-221]이재(李栽) :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庵),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어려서 이휘일(李徽逸)에게 배우고, 성년이 되면서 이숭일(李嵩逸)에게 사생(師生)의 예를 갖추었다.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 전념하여 벼슬은 72세의 만년에야 유일(遺逸)로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었다.[주D-222]금수기문(錦水記聞) :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저술이다. 밀암의 시문집인 《밀암선생문집(密庵先生文集)》 권11, 12, 13에 있다.[주D-223]병곡집(屛谷集) : 병곡(屛谷) 권구(權榘, 1672~1749)의 시문집으로 원집과 속집을 합하여 14권 7책이다.[주D-224]권구(權榘) : 자는 방숙(方叔), 호는 병곡(屛谷),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저서에 《병곡집》ㆍ《역대연혁도(歷代沿革圖)》 등이 있다.[주D-225]고재집(顧齋集) : 고재(顧齋) 이만(李槾, 1605∼1664)의 시문집으로 10권 5책이다.[주D-226]이만(李槾) : 자는 군직(君直), 호는 고재(顧齋), 본관은 재령(載寧)이다. 이현일(李玄逸)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저서에 《고재집(顧齋集)》이 있다.[주D-227]제산집(霽山集) :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 1684~1747)의 시문집으로, 본집은 원집(原集) 16권, 연보(年譜), 부록(附錄) 합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주D-228]김성탁(金聖鐸) :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태중(金台重)ㆍ이현일(李玄逸)ㆍ이재(李栽)의 문인으로, 저서에 《제산집》ㆍ《수견잡록(隨見雜錄)》 등이 있다.[주D-229]청대집(淸臺集) :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시문집으로 모두 18권이다. 권상일의 자는 태중(台仲), 본관은 안동(安東),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저서로는 《청대집》 외에 《초학지남(初學指南)》ㆍ《관서근사록집해(觀書近思錄集解)》ㆍ《소대비고(昭代備考)》ㆍ《가범(家範)》ㆍ《역대사초상목(歷代史抄常目)》 등이 있다.[주D-230]구사당집(九思堂集) : 구사당(九思堂) 김낙행(金樂行, 1708~1766)의 시문집으로 원집(原集) 9권 5책, 속집(續集) 4권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주D-231]김낙행(金樂行) : 자는 간부(艮夫), 호는 구사당(九思堂),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이재(李栽)의 문인으로, 이상정(李象靖)과 교유하였다. 《계몽질의(啓蒙質疑)》ㆍ《상복경전주소통고(喪服經傳註疏通考)》 등의 저술이 있다.[주D-232]대산집(大山集)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0~1781)의 시문집으로 52권 27책이다. 아우 이광정(李光靖)과 아들 이완(李埦)을 중심으로 문인들이 합심하여 유문을 수집하고 교정하여, 순조 2년(1802)에 조카 이우(李堣)에 의해 간행되었다. 서간과 잡저에 예학과 관련된 대산의 학술적 성과들이 담겨져 있다.[주D-233]이상정(李象靖) :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재(李栽)의 문인으로, 저서에 《대산집》ㆍ《약중편제(約中編制)》ㆍ《사칠설(四七說)》 등이 있다.[주D-234]이완(李埦) : 1740~1789. 자는 치도(致道), 호는 간암(艮巖),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이상정(李象靖)의 아들이다. 1771년 사마시에 합격, 정조조에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였다. 저서에 《간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