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에 관한 시모음 1)
봄날은 간다 /허수경
사카린같이 스며들던 상처야
薄粉의 햇살아
연분홍 졸음 같은 낮술 마음졸이던 소풍아
안타까움보다 더 광포한 세월아
순교의 순정아
나 이제 시시껄링으로 가려고 하네
시시껄렁이 나를 먹여살릴 때까지
봄날은 간다 1 /유승희
꽃비가 내린다
난분분 난분분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
만화방창 천지간에 울리는
꽃들의 자지러지는 소리에
봄인 가 싶더니만
화르르화르르 날리는
꽃잎들의 춤사위가 시리다
...아!
기어이 내 생의 봄날이
또 한 번 가고 있나니
부초처럼 떠도는
이 허허로움이여!
봄날은 간다 /허호석
꽃으로 지붕을 만든 벚꽃터널
꽃눈이 날리는 벚꽃 길을 걸어가면
꽃보다 더 활짝 피는 그리움
우리 서로 짝이 될까 꽃이 될까
꿈처럼 걷던 옛 이야기 길
그리움은 폴폴 꽃잎으로 흩날리네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의 밑그림 속에
우리들의 흔적은 그렇게
영혼의 꽃으로 피고 지고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나호열
봄날은 간다
폭죽으로 처지는 상처
악보에 걸리는
어지럽고 헛것만 보이는 하늘로
종달새는 날아와 주지 않는다
탁자 위에 놓인
아우렐리우스의 참회록
계절을 잊은 채
水菊이 미쳐서 피고
기슭을 잃어버린 파도처럼
말문을 닫고 만개하는 꽃들
입을 봉한 붕대가
푸르름까지 동여매고
진압의 무거운 발걸음으로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최홍윤
꽃 진 자리에
다시 꽃이 피려고
이렇게도 아픈데
세월이 멈춘 듯
뜨거웠던 우리 사랑
여울 데가 없어라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서로 부르고 대답하는 일
그마저도
꿈이 되었다니
물속에 흐르는 물살같이
속수무책으로
잔인하게
봄날은 가고 있다.
봄날은 간다 /고명
FM 아침 방송을 들으며 달리는 길, 독일 슈바벵 지방의 민요라나?
오렌지향 경쾌한 리듬이 봄하늘을 흰구름을 가볍게 밀어올린다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는 멘트, 이별? 이렇게 상큼한?
뽕짝뽕짝 가슴 아프게 늘여 뽑아야만, 젓가락 두들기며
눈물의 씨앗 뿌려야만 제맛인 줄 알았더니
누굴까, 이별의 아픔을 저렇게 맑은 그릇에 유리알처럼 담아낼 줄 아는 사람은,
누굴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을 짐짓 아침 봄숲의 새처럼 노래하는 사람은,
남의 이별 때문에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는'
독한 사랑 때문에 아침부터 눈물 찍어내며 열없어하는 사람은 또, 누구일 것인가
불꽃놀이, 불꽃놀이
벚꽃잎 펑펑 쏟아져내리는 길을 악셀레이터 밟아대며
봄날이 간다, 브레이크 파열된
봄날은 간다 /곽종철
잔설이 녹아내리는 시냇물에
발 담그고 있는 버들강아지의
피리소리에 봄날은 간다.
대바구니에 모여든 봄 향기에
나물 캐는 아낙네들의
콧노래에 봄날은 간다.
앞산에 진달래꽃 만발하니
꽃구경 가는 상춘객들의
발자국 소리에 봄날은 간다.
햇볕이 대지에게 정을 주니
봄의 정취에 흠뻑 젖은
아지랑이 춤사위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정일근
벗꽃이 진다, 휘날리는 벚꽃 아래서
연분홍 치마가 휘날리더라, 그런 늙은 유행가가 흥얼거려진다는 것,
내 생도 잔치의 파장처럼 시들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늘어진 벚나무 가지 사이로 경축 제 40회 진해 군항제 현수막이 보인다
40년이라, 내 몸도 그 세월을 벚나무와 함께 보냈으니
쉽게 마음 달콤해지거나 쓸쓸해지지 않는다
이 나무지? 벚나무 아래서 그녀와 만나는 것을 지켜본 옛 친구는
시들한 내 첫사랑을 추억한다, 벚나무는 몸통이 너무 굵어져버렸다
동갑내기였던 그녀의 허리도 저렇게 굵어졌을 것이다
담배를 피워 물다 말고 친구는 지나가는 말로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했던 유씨와 류씨 성을 가진 친구들의 뒤늦은 부음을 전한다
친구들의 얼굴이 실루엣으로 떠올랐으나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류씨 성을 가진 친구는 나와 한 책상을 썼는데...... 잠시 쓸쓸해졌으나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이 별에 없다
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첫사랑 그 소녀도 없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열일곱 나도 없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 잔치가 끝나기도 전에 꽃이 날린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일 뿐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누구에게도 그런 알뜰한 맹세를 한 적은 없지만, 봄날은 간다
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현곡 곽종철
지나가는 바람결에
꽃잎마저 떨어지면
머물 수 없는 그대,
내 마음을 흔들어 놓고
소리 없이 훌쩍 떠나려 하네.
오시자 떠나시려니
아쉬움만 가득하여
땅이 꺼지라고 한숨만 쉬네.
가던 임도 슬픔에 젖어
발걸음을 머뭇거리네.
그래도
봄날은 간다.
세월도 가고
내 인생도 가고
꽃잎도 지네.
봄날은 간다 /탁영 김병근
찔레꽃 향기 코 끝이 아려
손사래 치 듯 나비 너울 춤춘다
하양 꽃잎 날 리우는 여울물 위로
풀빛 하늘 휘돌아 사라지는 꽃구름이여
노고지리 노랫소리 보릿고개 그리움 짖고
잠 속에 빠져드는 봄날의 허망한 꿈들이여
바람도 숨 고르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숲 속에 퍼져 우는 풍경소리 청랑한데
불두화 순백의 둥근 꽃잎
열매 맺지 못한 설움 어이할고
황혼길 노을 붉게 불타
산사의 주련柱聯 꿈틀꿈틀 용트림하듯이
촛불 만양 뜨거운 바람 일고
촛농의 눈물 흘러 내리 듯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임영준
아지랑이 아롱대는 언덕을 넘어
꽃단장 여념 없던 순이가 간다
열여덟 고이 품던 깃발 흔들고
침식보장 월 삼백 마냥 부풀어
사위어가는 홀 애비 떨치고 간다
군데군데 거름더미 몸서리치고
늙다리 떠꺼머리 코웃음 치며
똥꼬치마 씰룩씰룩 늑하게 간다
삼동네 떠들썩 들었다 놓고
홀가분 휘파람 새기고 간다
봄날은 간다 /전경자
고운 봄날은
햇살에 녹는다
흔들어도
붙잡아도
봄날은 간다
실개천 돌담길
돌고 돌아
모퉁이 돌 어루만지며
얄밉게 예쁜 봄옷
벗겨놓고
푸른색 옷을 입히고 있다
봄날은 간다 /배경숙
우리 삶은 늘 멈칫거린다
몇 날 몇 밤의 더운 피를 순순히 받아들인 이곳에서
별들이 찾던 꽃향기는 언제부터 희미해진 것일까
영원히 퇴락하지 않을 것 같던 꽃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버리고 무심히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
당신의 가슴으로 빨아들인 저 꽃잎들의 행진은
언뜻언뜻 이 시리게 부서져 내리는 허무한 포옹일 뿐인가
잘 가라, 미소보다 희고 보드라운 시간들
온몸으로 부닥치며 담아 빛나던 당신의 눈은
껴안은 팔에서 마침내 숨을 끊은 꽃들의 부신 웃음으로
내일은 또 봄비가 내릴 것이라 속살거린다
다시 또 몇천 년이 눈을 감아 이 길에 설 것인가
당신의 가슴에 박힌 지상의 별자리를 찾아
잎들이 마지막 빛을, 희미한 슬픔을 내리고 있다
파란 같은 세찬 바람 사이로 당신의 입술이 잠시 떨리는 듯 하지만
이제 곧 초록의 불길이
불타는 기쁨으로 세상을 뒤덮을 것이므로
봄날은 간다 /김행숙
오른손에 있는 것을 왼손에 옮길 수 있지
우리는 그렇게 흔들흔들 바구니를 손에 들고 산책을 해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들로만 채우고 싶어
오늘은 4월의 금빛 햇살이 넘실거리네
달걀 껍질 같은 것
막 구운 빵 냄새 같은 것
실오라기가 남아 있는 단추 같은 것, 눈동자 같은 것,
그것은 누구의 가슴을 여미다가 터졌을까
누구의 가슴이든 실금 같은 진동이 있지
오늘 저녁에는 네 가슴에 머리를 얹어봐야지
신기해, 왼손에 있는 것을 오른손에 옮길 수 있다는 것
내 손에 있는 것을 네 손에 옮길 수 있다는 것
바구니는 넘치는데 우리는 점점 더 가벼워지네
바구니가 우리를 들고 둥둥 떠가는 것 같네
봄날은 간다 /김용화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 햇병아리 여대생들
햇살 환한 벤치에
물뱀처럼 배배 다리를 꼬고 앉아
젊음을 쪼잘대는
봄 한나절,
중씰한 노인 한 분 대학 병원 영안실에서
술 냄새 화-악 풍기며 걸어나와
느그들 누구 나랑 한 번 잘네?
……??
여학생들 화끈 얼굴 달아올라
땅바닥에 눈알을 까는데
아, 가타부타 말 좀 혀 봐, 이 하래비 우습지?
머리를 긁적이며 노인은
봄 아지랑이 속으로 잠기어가고,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2 /권오범
바람의 속삭임 친절해
맘 놓고 눈 떴을
비비추 윤판나물 둥굴레 관중
꽃샘에 놀라 쫑긋해진 청순한 귀
황사보다 더 너저분하게
확성기 시켜 오염시키는
2012년 춘삼월
속 보이는 선거 소음 공약
복지 공수표 남발에
악취나는 사찰 감찰 표절 폭로 비방 흠집 내기 꼼수에
미치광이들까지 뒤섞여
찜찜한 악수로 꼴값하거나 말거나
줄사철은 못 들은 척
아름드리 양버즘
감고 에돌 시간 없다는 듯
벌써 5미터 쯤 기어오르는 중이고
봄날은 간다 /강인호
대숲 흔드는 바람소리 따라
멀어져 가던 개울물에 실려
하르르 날리는 벚꽃에 묻혀
속절없던 아픈 사랑이여
봄날은 간다
떠나고 기다리는 간이역에
바래져 가는 흑백사진 속에
그대 만나러 달려가던 길에
붙잡고 싶었던 사랑이여
봄날은 간다
얼레지의 봄날은 간다 /이정자
저기, 지나가는 여자를 놓고
허리 상학이 발달한 여자,
허리 하학이 발달한 여자, 운운하며
사내 몇 몇이 나른한 봄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렇게라도 시시덕거리지 않으면 봄날은 못 견딜 일인지
제 그림자를 지우며 멀어져가는 벚나무 아래서
형이상학도 형이하학도 제 안에 다 품고 있는 듯한
꽃, 얼레지가 생각나는 것이었습니다
꽃이 피면서 여자 치마 뒤집어지 듯 뒤집어진다고
꽃말까지 바람난 여인이라니!
이유 있는 반란이라면 서슴치 않는
요즘 꽃들이 제 아무리 화끈하다하여도
바람은 아무나 나나
얼레지는 피어나는데
무엇 그리 두려워 가시를 드러내며 살고 있는지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요염함을
한껏 꽃대로 밀어 올리며 살아도 좋을
봄날이 속절없이 가고 있었습니다
봄날은 간다 /신석종
샛노란 햇볕이
세상가득,
왁자하게 쏟아져
온 종일 소란스럽더니만
마당이고 뜰이고 가릴것 없이
온통, 세상 가득
울긋불긋한 꽃닢들로
난장판을 만들어 놓았네요
홀로 감당하기에 버거운
코 끝 알싸한 봄날의
하루가
지천으로 피었다가 쓰러지는 것들,
그들 곁에서
나도 함께
마냥 거꾸러지게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