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한 사람(4) - 소망이 있는 사람
고린도후서 4:16~18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인사(연결)와 서론(들어가며)
지난시간에는 "베데스다"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불만과 불평과 원망은 사단에게서 오고 감사 찬송 믿음은-
사단의 호리는 힘(고후 2:11; 요 15:3)
공의가 요구하는 바는 죄란 용서해 줄 것이 아니라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주심으로써 이 두 가지`―`용서와 형벌`―`요구 조건을 다 충족시키셨다.
그리스도가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써 죄값을 다 치르시고 용서의 길을 준비해 놓으셨다.
죄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분리되어 왔다.
그의 영혼은 죄의 창시자인 사단의 음모로 인하여 마비되었다.
혼자 힘으로는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거룩한 성정을 올바로 평가할 수도 없으며,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도 없다.
설사 그것이 인간의 힘이 미치는 영역 내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그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사단의 호리는 능력이 그 위에 있어서 사단이 암시할 수 있는 모든 영리한 핑계들을 마음에 떠오르게 해서
모든 선한 충동을 방해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모든 기능과 힘은 거룩하신 보호자를 거스리고 대항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고 싶은 선물들과 축복들을 그에게 안심하고 나누어 주실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에게 패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가 인간의 모습, 인간의 성정을 취하심으로 그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었고,
인간을 향상시키사 인간의 윤리적 가치를 하나님과 같은 등급에다 올려 놓으신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다른 길은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신다.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의 샘이 인간의 성정에다 생명을 줄 수가 있고,
그의 취미를 바꾸어 놓을 수가 있고, 그의 애정을 하늘로 흘러가게 할 수가 있다.
신성과 인성의 결합으로 그리스도는 이해력을 밝게 하실 수가 있었고,
생명을 주시는 그의 성질을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 속으로 주입하실 수가 있었다
(원고 50, 1900).
오늘이시간에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소망이 있는사람 이다"라는 주제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구호: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바울이 자신의 사역에 수반되는 시련과 환난을 침착하면서도 끈기 있게 대면한 것은
바로 장차 있을 기쁨과 영광을 내다봤기 때문이다(참조 히 12:2)
비록 겉 사람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늙고 쇠할지라도, 속 사람은 생명이 지속되는 한 은혜 안에서 계속 성장한다
"마음을 어떤 것에 고정시켜 주목하는지에 따라 시련을 소망과 인내로 감내할지
혹은 불만과 괴로움으로 맞이할지가 결정된다.
영원한 세계의 보이지 않는 사물(빌 4:8), 즉 그리스도의 영적 실재를 숙고할 때 전자처럼 반응하게 되는 반면에,
부와 쾌락과 명성(참조 마 6:24~34 주석)같이 볼 수 있는 일시적인 것을 바라볼 때 후자처럼 반응하게 된다.
마음을 그리스도의 품성과 생애에 고정하면 우리도 그분과 같이 된다(참조 히 11:10, 26, 27, 39, 40; 벧전 1:11).
17,18 시련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꾼들(롬 8:18; 벧전 1:6, 7)(12:4 주해 참조)
(4:17,18 인용)사방에서 어려운 일을 당하고 당혹스러운 일과 박해를 받은 바울이
그가 받은 시련을 환란의 경한 것이라고 부를 수가 있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불평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바울이 당한 많은 환란에 비하면 우리의 시련은 참으로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은 이기는 자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비교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그 시련들은 품성의 완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임명하신 그의 종들이다. (시련의때 겸손과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상실과 고통이 아무리 크다할지라도, 크신 섭리의 길이 아무리 어둡고 불가해하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알고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리뷰 1902. 5. 6).
장차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련이 우리의 구원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환란의 경한 것들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들을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게 하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편지 5, 1880).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바울은 그가 견디어 온 자기 부정과 시련과 가난, 그리고 환란과 핍박의 세월들을 “잠깐”이라고 불렀다.
현재의 일들은, 싸움이 끝이 났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환란들이 바로 그리스도인 품성의 완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임명하신 그의 사역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크신 섭리의 길이 아무리 어둡고 신비에 싸여 있다 할지라도,
그의 손실과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는 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서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진 축복된 보증은 이 모든 것들이 다 그의 유익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다.
…
성령께서 바울의 영혼에 하늘의 빛을 비추었다.
그리고 충실한 자들을 위해서 사서 쌓아둔 재산에, 그의 분깃도 있다는 보증을 받았다.
바울의 말에는 힘이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신자들이 받을 탁월한 영광과 명예와 불멸성을 표현할 만큼
충분한 힘을 가진 말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의 눈이 머무르고 있는 장면과 비교해 볼 때 현재의 모든 환란들은 잠시 잠깐이며 경한 것이요,
생각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에 이 세상의 생활에 속한 것들은 헛된 것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들이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며, 중한 것, 영속적인 것으로써 필설로는 묘사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할 수 있는 한 가깝게 묘사하려고 하였다.
이는 가능한 한, 상상력이 유한한 마음에다 그 실체를 잡혀주려 함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며, 영광의 중한 것이며, 측량할 수 없는 지식이었다.
그것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었지만
바울은 그의 언어가 너무나 평범해서 실체를 묘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는 휠씬 더 인상적인 말을 찾아 보았지만 가장 대담한 비유라 할지라도 실상에는 휠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언어에서 가장 포괄적인 단어를 찾아 보았다.
이는 인간의 상상력이 최후의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뛰어난 영광을 어느 정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거룩함, 존귀, 명예, 하나님 앞에 있는 지극한 행복 등등은 믿음의 눈이 아니면 지금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들 곧 세상의 명예, 세상의 쾌락, 세상의 부와 영광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의 탁월한 영광과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가리워진다.
이 세상 것들은 일시적이요, 잠시 잠깐 있을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은 영원하고 무궁토록 있을 것이다.
이 무한한 보화를 얻는 것이 모든 것을 얻는 것이요,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원고 58, 1900).
18 보이지 않는 분을 봄(골 3:2; 히 11:27)(고후 6:17,18 주해 참조)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우리가 땅의 것들을 생각하면 하늘에 있는 것들로는 별 감명을 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고 선하심, 사랑 등을 명상함으로써 큰 유익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 속한 것들, 일시적인 것들을 오래오래 생각하면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슬픔과 염려와 난처한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땅으로 향하도록 내버려 두고 사소한 일을 큰 일이라고 생각한다. …
현세적인 일들이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사로잡지 못하게 해야 하며,
우리의 사상들이 아주 땅에 속한 것들과 땅의 것이 될 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늘의 통로 안에서 생각하고, 영적인 시력으로만 보이는 보이지 않는 것들,
영원한 것들을 묵상하도록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훈련하고, 연단하고, 교육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그분을 봄으로써 우리는 마음에 힘을 얻고 영의 활력을 얻게 된다
(사인즈 1893. 1. 9).
현대인들은 대부분 원인 모를 질병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암이나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 같은 것도 옛날보다 급증하였지만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인 불안도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문화적인 조건들은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좋아졌지만
이와는 반대로 사람들은 심리적인 공허함과 정신적인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현재의 삶에서 보람을 찾지 못한다고 할 때 그 마음속에 평안이나 행복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과 현재의 삶을 즐겁고 윤택하게 하는 비결을 일러줍니다.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해결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되고 그리스도만이 천하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이 된다는
사실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19에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살지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1.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1963년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목사는 워싱턴 DC에서 수많은 군중을 향하여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하고 유명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1968년 4월, 40세의 젊은 나이로 괴한의 흉탄에 쓰러졌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차별당하는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비폭력적 투쟁을 하면서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곤 하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매우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꿈이 자기 한사람에게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더욱 많은 사람과 행복을 같이할 수 있습니다.
옛날 야곱의 아들 요셉은 어릴 때부터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의 꿈을 가족들 앞에서 자랑하곤 하였습니다(창 37:6-11).
그것 때문에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오랜기간 동안 엄청난 시련을 겪었지만
결국 그 꿈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과 더불어 세상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 주인공이 되었습니다(창 50:20).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을 가꾸면서 행복을 누립니다.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새 가정을 꾸민 젊은 부부가 그들이 설계하는 장래의 희망을 안고 차곡차곡 살림을 늘려 나가면서
행복을 느낍니다.
아이를 낳고 학교에 보내고 그들을 키우면서 장차 자식들을 통해서 이루어나갈 미래의 그림을 그리면서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우선은 좀 가난하고 어렵더라도 생활비를 쪼개가며 저축을 하는 부부가 나이 많았을 때 따먹게 될 열매를 바라보며 행복한 마음을 가집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행복은 확실한 미래의 꿈이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삶 자체가 꿈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모세와 함께 애굽에서 올라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고달픈 광야 여행기간에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하나님께서 저들과 함께하신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장차 반드시 이루어질 가나안 시대를 꿈꾸면서 자기들은 행복자라고 믿었습니다(신 33:29).
사도 바울도 평생동안 세계선교라는 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인 불안과 열악한 교통과 문화와 어려운 환경이지만
그래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꿈을 안고 지중해를 중심한 세계의 모든 대륙을 휩쓸었습니다.
어떤 역경에서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확신에 찬 미래를 증거 하였습니다(롬 8:35-39).
2. 현세적 소망의 한계를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교훈가운데 ‘부자와 나사로 비유’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6:19-31에 보면 어느 곳에 홍포 입은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같이 연락을 하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 문간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개들과 함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부자도 죽었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동안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낙원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섞여 살고,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가 공존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상태로 계속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잠시 잠간 후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에다 희망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이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이 불오나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0:6-8에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도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뿐이기 때문입니다(요1서 2:15-16).
그것들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요한1서 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적인 희망은 일시적이고 잠시잠깐 지나가는 것에 불가합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의 조건이 된다고 보는 권력이나 재물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인기나 건강이나 아름다운 미모 같은 것도
다 한순간에 무너지거나 없어지고 맙니다.
시편 73:18-19에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 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세상에 있는 것에다 희망을 걸고 거기에 모든 것을 맡기려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녹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녹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마 6:19-20).
행복은 행복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나 육신적으로 즐길 수 있는 것에서 행복의 가치를 찾겠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3. 영원한 소망을 가지는 사람입니다.
본문 말씀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 천국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였습니다
(요 14:1-2).
흔히들 사람이 세상에 사는 생애(生涯)를 일생(一生)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고 보면 이생(二生)으로 볼 수도 있고 삼생(三生)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어머니 태중에 있는 동안을 일생으로 보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을 이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죽은 다음의 세계인 천국을 믿는 사람은 분명히 삼생으로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일생과 이생은 극히 짧거나 제한된 시간이지만 세 번째의 삶이되는 천국의 경우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기간이어서
가장 완전하고 희망적인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영생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7:3).
여기 “안다”고 하는 말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뜻합니다.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갔지만 그는 하늘나라 영생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16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늘나라 영원한 집을 사모하며 살았던 아브라함은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나그네 생활의 애환을 많이 겪었지만 한 번도 자기가 불행하다고 생각한일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후세를 살고 가는 모든 신앙의 인물들도 다 아브라함처럼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잠시 잠간 세상을 사는 동안 불편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영원하고 완전한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모든 것을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계시록 21:2에는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정한 것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결혼식 날을 앞둔 신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랑과 함께 예식장에 들어가는 생각을 하며
황홀해 하는 것처럼 하늘나라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비길 수 없이
더 큰 행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목회자 칼럼 - 겨 자 씨
『 습관과 문화 』
지난번 일본 오사카의 그레이스 미션에서 온 교역자들의 세미나가 끝날 무렵 수양관 으로 올라가서 바비큐 파티를 하며 우리교 회 교역자들과 간담회 시간을 가졌다. 마침 날씨도 서늘한 초가을인데다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보며 매우 자연스럽고 낭만적인 캠파이어가 진행 되어졌다.
대화의 주제는 그들이 여기 와서 보고 느낀 소감을 말하게 하였는데 그중 이와하시(岩橋)라는 목사가 말하기를 자기가 12년 전에도 왔었는데 이번에 와서 새성전을 보며 놀랐다고 했다. 그는 도착하면서부터 실시간대로 캠코더에 사진을 찍으며 기록을 남기곤 하였다. 우리교회 본당뿐만 아니라 교육관과 여러 부속실을 일일이 다니며 현장의 모습을 설명을 곁들여가며 사진에 담고 나름대로 느끼는 바를 체크했던 것이다.
그가 보고 느낀 소감 중 교회당 건물이 아름답고 깔끔하며 작은 공간하나라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것, 그리고 주일학교 부속기관들을 위한 공간과 시설 등 좋은 점을 말하고 나서, 그런데 아쉬운 것은 대부분의 예배실이나 교실들에 비품과 환경이 제대로 정돈 되어 있지 않았고, 한마디로 말해서 좀 지저분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분의 지적은 정확했다. 사실 우리교회 주일학교 부서들이나 교인들 대부분이 교회의 비품과 시설관리에 철저하지 못 할뿐 아니라 청소나 환경정리에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순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면서 “당신의 지적이 정확했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런 것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우리나라에는‘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교회의 환경이 깨끗하고 완벽하면 보기도 좋고 엄숙한 분위기도 되지만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가 어렵게 될 것이다. 특히 교회 안에는 여러 계층, 여러 형편의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다소 자연스러운 환경이 다가오기 편하게 해주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했더니 그들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받아넘겼다.
사실인즉 일본사람들의 문화는 우리처럼 풀어놓고 적당히 넘기거나 ‘너도 좋고 나도 좋다’는 식의 얼렁뚱땅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고 매사에 분명하고 철저하여야만 되는 것이다. 내가 계속 지적하기를 ‘당신들은 집에 들어갈 때도 현관에서 신을 벗어 반대편으로 정돈을 해놓아야 되는데, 우리는 들어갈 때 벗어놓은 그 상태로 두었다가 나올 때 그것을 돌려 신고 나온다. 식사 때도 같은 상에 밥을 먹으면서 제각기 앞 접시에다 자기 먹을 반찬을 따로 떠서 먹어야 되고, 공동으로 쓰는 젓가락이 없을 때 자기젓가락으로 음식을 뜨게 되면 그것을 거꾸로 잡고 집어 와야 되는 문화가 아니냐? 거기비하면 우리는 된장찌개 뚝배기나 생선매운탕 냄비를 가운데 두고 모두 자기 입에 넣었던 숟가락으로 그대로 떠서 먹는 습관에 젖어있다. 당신들은 매우 정갈하고 위생적인데 반하여 우리네는 어찌보면 야만적이고 비위생적인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그렇다고 수긍을 하는 눈치였다.
일행 중 선임자인 후지사키(藤崎)목사가 ‘우리나라에도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솔직히 일본인의 몸에 배인 습관이나 문화 속에서는 인간적이고 정이 넘치는 한국인 같은 정서를 찾아볼 수 없어서 이점이 아쉽다’고 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같은 식구끼리, 친한 사람끼리 어울리고 사람 냄새를 풍기면서 흉허물 없이 지낼 수 있어야 여유롭고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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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로원 갑천뉴스타트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