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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시대의 유대 종파들
1. 예수 시대의 종교적 배경
예수와 유대종교 :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유대교의 전통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최근의 신약성서학자들은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새롭게 조망하려고 시도한다. 준다. 예수의 종교적인 가르침을 명확히 규명하려면 예수 당시의 유대교의 가르침과 비교 분석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예수 시대의 유대교는 내적으로 매우 다양한 양태를 띠고 있었지만 몇 가지 근본적 확신과 표현 양식에서는 하나였다. 유일신 사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 성전과 회당, 희생제사와 말씀의 예배, 거룩한 경전과 전승(구전/문서), 그리고 메시야 대망이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는 유대교(common Judaism)의 근본적 확신과 표현 양식을 공유했다. G. Theissen & A. Merz(2001), 198.
크게 보면 예수는 유대교의 전통에 서 있고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에 정통(正統)하였으며 이를 자주 인용하였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방법은 예수 당시의 다른 유대교의 종파와는 전향적으로 달랐다.
초기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가 지녔던 전향적인 종교의식이 예수 시대를 전후한 후기 유대교에서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 앞선 면모를 상실하고 평균적인 의식으로 전락하였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서 유대교에는 4대 종파가 정치나 종교나 경제 문제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잘 기록하여 전한 것처럼 유대교 안에서도 그들의 신앙 모습은 각양각색으로 분파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예수는 구약성서의 전향적인 의식인 앞선 생각을 평균적인 의식보다 못하게 전도시킨 후기 유대교의 분파적인 전도된 의식을 비판하고 이를 선포시켜 전향적인 새로운 의식으로 제시하였다. 구약성서의 앞선 생각을 되살려 내기 위해서 구약성서를 창조적으로 계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추종한 초기 기독교 교회가 자신들을 유대교의 일파로 보지 않았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그들이 구약성서를 받아들였지만 유대교의 핵심적인 체제는 변혁하였다. 따라서 예수시대의 종교적 배경으로서 후기 유대교의 4대 종파의 기원과 각 종파의 특성 및 예수의 가르침과의 차이점들을 살펴 예수의 종교적 가르침의 전향적인 면모를 밝히려고 한다.
유대교 4대 종파 : 초기 이스라엘 계약공동의 종교적 이상이 붕괴된 것은 1, 2차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서 기원한다. 578년 예루살렘이 바베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의해 멸망된 다음 유대의 유력자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다. 포로에서 귀환하여 515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였지만 새로 세워진 성전에서의 종교생활은 그들의 선조들인 초기 이스라엘 계약공동체의 종교적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6세기 이후로 약소 민족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국인 바벨론, 페르샤, 희랍 그리고 로마의 식민지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문화적 차별 이외에도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긴 히브리 종교에 대한 엄청난 핍박을 겪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처음으로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에서 분파적인 모습으로 부각된 집단은 하시딤이다. 이들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Antiochus Epiphanes IV)의 유대교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광야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경건을 고수하려고 했기 때문에, 경건파라는 뜻에서 하시딤(Hasidim)이라 한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제사 폐지등 유대교 말살을 위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칙령(기원전 167년)은 광야에 은둔한 하시딤의 격분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 가운데 제사장 가문출신인 마카비 일가(一家)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대항하여 성전(聖戰)을 선포하자 많은 하시딤들이 합류하였다. 이들은 “율법을 위해 스스로 기꺼히 자신을 바친 이스라엘의 용감한 투사”(마카베오 1서 2:42)였다.
마카비 항쟁 결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멸망이후 4세기 만에 독립국가를 재건할 수 있었다. 마카비의 동생 시몬의 뒤를 이어 요한 힐카누스와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가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들은 유대의 독립정신을 저버리고 그들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친헬라 정책을 추진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자신의 권력강화를 위해 유대의 왕권과 함께 대제사장직을 겸직하였다. 이로서 왕권과 대제사장직을 겸하지 않았던 유대교의 전통이 무너지자 경건한 유대인 내부에서 큰 분란이 일어났다.
포로후기에는 유대왕국은 재건하지 못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하게 되었다.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을 주도했던 사독 가문의 여호수아가 대제사장직을 계승함으로서 사독 가문의 대제사장직 계승의 전통을 세웠다.(벤 시라 50:18-21). 따라서 왕은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던 유대교의 오랜 전통과 사독가문의 대제사장직 계승 전통을 무시하고 마카비 가문의 왕들이 대제사장직을 찬탈한 것은 당시로서는 중요한 정치적 종교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에 대한 하시딤 내부의 반응에 따라 유대교의 여러 분파 즉, 사두개파, 바리세파, 에센파, 그리고 열심당이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M. Simon(1990), 「예수시대의 유대교종파들」 박주익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 29
첫째로 사독가문의 후예인 사두개파는 온건론자들로서 타협적인 지지의 자세를 취하였다. 대제사장직의 계승은 사독가문의 특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스모니아 왕가에게 대제사장의 권한을 양도하는 대신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수호하였다.
둘째로 바리새파는 정교분리 원칙에 입각하여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실제로 뜻있는 유대인들은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제사장직과 군주제의 분리가 다윗시대부터 정해진 건드릴 수 없은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M. Simon(1990), 31.
그러나 바리새파는 하스모니아 왕가의 대제사장직 찬탈을 반대하였지만 그들이 관할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 자체는 거부하지는 않았다.
셋째로 사독가문의 후예인 일부 강경론자들은 정통성이 없는 하스모니아 왕가가 대제사장직을 찬탈하여 성전제사를 지내는 것 자체를 강력하게 도전하였다. 결국 하스모니아 왕가의 박해를 초래하였고,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쿰란지역에 이주하여 에센파라는 새로운 이상적은 종교적 은둔 공동체를 결성한 것이다.
넷째로 열심당이 언제 기원하였는가? 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포괄적으로 보면 마카비 독립항쟁의 추축인 된 하시딤의 정신을 계승한 일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시딤이 신앙적 종교적인 이유로 무력항쟁에 참여했지만 후대의 열심당은 종교적 관심보다는 민족적 정치적 관심이 더 강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각 종파의 태도는 저마다 중대한 취약점을 지니고 있어 4대 종파가 서로 갈등관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립적인 태도를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4대 종파는 그 당시 유대교에서 택할 수 있는 평균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등장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달랐다. 그 당시 4대 종파가 미처 보지 못한 문제점들을 꿰뚫어 보고 그들의 제한된 관점을 극복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당시의 유대교 4대 종파와 예수의 가르침 사이의 차이점과 공통점들을 조명함으로서 유대교 4대종파의 평균적 의식을 예수가 어떻게 전향적으로 극복하였는지를 조명해 보려고 한다.
2. 사두개파
사두개파의 기원 : 사두개파는 지도계층의 제사장들과 세력있는 가문으로 이루어진 소수의 친외세 권력층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사두개인(Sadducees)이라는 명칭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Zadok)의 후손을 지칭한다(대상 1:28-45, 5:30-41, 왕상 2:35). 특히 에스겔이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들이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겔 40:46)로 지칭하였기 때문에 사두개파는 자신들이 합법적인 제사장 계층이라는 것을 주장하였다.
포로후기에 페르샤의 후원을 받아 스룹 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에 앞장 선 대제사장은 사독가문의 여호수아였다. 사독가문의 제사장들은 사마리아 귀족층과 토착 유대인들의 성전재건 동참 요구를 거절하고 성전재건을 주도함으로써 사독가문의 후손들이 대제사장직을 계승하였다(벤 시라 50:18-21).
사두개파는 그 후 계속되는 헬라와 로마의 지배하에서 왕정을 수립하지 못한 권력의 공백기 동안에 그들의 종교 정치 경제의 기득권을 유지하게 위하여 시대의 조류에 영합하여 왔다. 헬라가 유대를 지배할 때에는 성전제사가 방해받지 않는 한 유대의 헬레니즘화를 거부하지 않아 변절자 배반자로 비난받기도 하였다(마카베오 상 1:15).
마카비 독립 운동의 결과로 헤스모니아 왕가가 세워지자 헤스모니아 왕가가 왕권과 대제사장직권을 공유하는 것을 찬성함으로써 하스모니아 왕가의 후원 아래 지배층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요한 히르카누스(주전 130-140)는 스스로 영도자, 대제사장, 예언자로 자처하였다. 다시 로마제국의 후원으로 헤롯왕가가 유대를 다스리자 이제는 로마 제국과 헤롯왕가를 옹호하였다.
권력 지향적인 귀족주의자 : 사두개파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두개파는 거만하고 배타적인 권력지향적인 소수의 귀족층으로서 매우 정치적인 성향을 지녔다. 그들은 성전의 중심의 기득권을 수호하며 현상유지하려는 권력추구의 현실주의자이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사두개파를 희랍의 에피큐리안과 상응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일반 백성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영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권위는 제의적인데서 비롯되었으며 성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2) 사두개파는 성전중심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반민족 친외세적인 태도도 서슴치 않았다. 마카비 독립항쟁이후 마카비파가 왕권과 함께 대제사장의 권한을 독차지하자 이에 대항하여 친헬라 정책을 표방하였고, 로마인들이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치를 허용하자 사두개파 사람들은 정복자들과 완전히 야합하였다 M. Simon(1990), 35.
예수 시대에는 로마 총독과 완전히 결탁하여 로마의 질서에 순응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하여 냉정하였다.
3)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도 엄격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들은 성문화(成文化)된 율법인 모세 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제사장의 전통을 앞세워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개혁적 전통을 무시했고 따라서 예언서를 하찮게 여겼다. 율법만을 인정하고 선조들의 구전전승을 부인하는 경전원칙을 고수하였다. 모세의 전통을 고수하여 예배의식의 개선이나 교리적 개혁도 반대하였다.
4) 사두개파는 제사장 가문이었으나 그들에게는 권력의 쟁탈과 유지가 민족적 자존이나 종교적 신앙보다 우선되었다. 그들은 외국문물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들은 권력의 중심부를 맴도는 극소수의 정치적인 인물로서 백성들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따라서 주후 66년 로마를 대항하는 유대전쟁이 일어나자 일차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고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자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사두개파와 예수 : 예수는 사두개파와 달랐다. 예수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소외된 갈릴리 변방 나사렛 출신의 가난한 목공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요 1:40)는 당시의 금언은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의 신분이 조롱받는 변방의 민중들이었음을 드러낸다. 예수의 제자나 추종자들도 주변부 인물들로서 사두개파는 하나도 없었다.
1) 사두개파는 식민지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을 지향하고 행사하는 귀족층으로서 백성을 섬겨야 한다는 계약공동체의 정치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막 10:42)고 하였다. 그리고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2) 기득권을 수호하려했던 사두개파는 기존질서를 변혁하려는 마카비파의 독립항쟁이나 예수 운동에 대하여 가혹하였다. 예수의 처형을 주장한 대제사장 가야바(요한 11:18)를 비롯한 산헤드린 공의회원 다수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대 제사장 아나니아는 모두 사두개파들로서 자신들의 정적이나 반대 세력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보여준다. W. Foerster(1979), 「신구약 中間史」, 문희석역(서울: 컨콜디아사), 235.
3) 사두개파는 천사들이나 영들도 믿지 않았다(사도 23:8). 요세푸스는 그 까닭이 운명의 지배나 세상사나 인간사에 대한 신의 중재까지 부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유대고대사」 13, 171-173, 「유대전쟁사」 2, 162-166)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의 무한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자요 인본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에 예수는 철저히 영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성령이 충만하여 그의 공적생애를 시작하였고, 인간의 자유의지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가르쳤다. 그래서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 사두개파를 독사의 자식이라고 꾸짖었으며(마 3:7), 예수는 사두개파의 누룩 즉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조심하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마 16:12).
4) 사두개파는 모세 오경만 경전으로 받아들인 엄격한 보수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비종교적이었다. 그들은 부활을 부인했으며(마태 22:23 병행, 사도 23:8, 유대고대사 13:137,297), 영혼의 불멸과 ‘지옥에서의 형벌과 응보’도 부인하였다. 「유대전쟁사」 2, 165, 「유대고대사」 18, 16.
사후의 세계를 믿지 않은 것에 대해 시몬은 현세의 귀족 신분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내세의 신비에 대해 무관심하였다고 설명한다. M. Simon(1990), 37.
5) 예수와 가장 적대 관계에 있던 종파가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이다. 따라서 사두개파가 예수에게 제기한 유일한 논쟁은 부활에 관한 것이었다. 제세한 내용은 이 책 쪽을 참고할 것.
형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그 가문의 재산을 보호하고 대를 잇게 한 시형제결혼법(신 25:5-10)에 빗되어 부활 신앙의 공격하였다. 예수는 부활 후에는 결혼 제도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도 없다고 말씀 하신다. 또한 사후 부활체의 삶의 양식이 어떠한지도 본문에서 압시해 주는데, 그것은 천사와 같게 되리라는 것(마 22:30; 막 12:25; 눅 20:36)이다. 물론 이것은 부활체와 천사들의 존재 양식이 같게 되리라는 말씀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단순히 영적인 존재들인 반면, 부활체는 영육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15:35-58)
사두개파가 그토록 부활을 부인하였지만 예수는 생전에 자신의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였고,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3. 바리세파
바리새파의 기원 : 바리세파는 지체 높은 제사장 가문과 대조적으로 일종의 중간 계층을 대변하였다. 주로 율법을 연구하는 서기관들, 예루살렘 성전 제사에 소외된 하급 제사장들 그리고 율법에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중산층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들은 사두개파와 달리 성전보다도 바벨론 포로기에 페르샤에서 시작된 회당을 그들의 종교활동의 중심지로 여겼다. 따라서 성전에서의 제사행위 이상으로 회당에서의 공부와 기도와 율법을 읽고 토론하며 해석하는 것을 중요한 종교의식으로 발전시켰다.
예수 당시에는 바리새파의 거점이었던 회당제도가 늘리 보급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도자들은 자연히 율법에 능한 랍비이거나 율법학자이었다. 제사장 계층과 랍비 계층의 기능의 차이는 결국 두 가지 종교제도 즉 성전과 회당 사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M. Simon(1990), 44.
바리세파는 분리주의자라는 뜻이다. M. Simon(1990), 38. 맨슨(T. W. Manson)은 본래는 단순히 페르시아파(Persian)를 의미했다고 한다.
그들은 마카비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경건한 유대교인들(Hasidim)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 유대교 탄압에 대항한 마카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순전히 조상들의 신앙 유전을 지키기 위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마카비의 후계자들이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웠으나 그들은 권력유지와 쟁탈의 정치적인 관심만큼 율법준수와 제의 집행에 대한 종교적인 열정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요한 힐카누스 1세(John Hyrcanus I 135-104 BC)가 마카비의 동생 시몬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희랍식으로 창씨개명하는 등 친헬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런 개방적이고 반율법적인 조치를 경건한 하시딤파로서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힐카누스는 또한 자신을 영도자, 제사장, 예언자로 자처하였다. 바리세파는 히르카누스가 제사장직을 겸하는 것을 율법적인 이유로 반대하였다. 히르카누스의 모친이 전쟁포로였으므로 혈통의 순수성이 의심되는 그의 후손이 제사장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G. Theissen & A. Merz(2001), 210
히르카누스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된 알렉산더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 BC. 103-76)는 선왕의 정책을 강행하였다. 마카비 가문의 유대 왕이 대제사장직을 겸직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리세인들의 항의를 분쇄하기 위해 얀네우스는 바리세인의 반란이 계속되자 그 주모자 800명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잔인함을 보여 주었다.(「유대고대사」, 13, 380)
이처럼 마카비 가문이 왕권과 더불어 대제사장의 권한을 모두 장악한 것을 사두개파는 지지하였지만 바리새파의 반감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마카비파와 하시딤파 사이의 협력관계가 적대관계로 돌변하였고 그들은 결별하였다. 이후로 하시딤파가 바리새파라는 분리주의자로 불리우게 된 것이다.
정교분리의 율법주의자 : 바리새파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리새파는 정치적인 문제와 종교적인 문제를 철저히 분리시켰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오늘날 정교분리주의의 입장과 상통한다. 헤롯왕의 사후에 그들은 헤롯 사후에 강원도 만한 유대가 셋으로 나눠지고 그나마 이름뿐인 분봉왕들의 실정에 직면하여 허구적인 정치적 독립을 실제적인 종교적 자율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산헤드린의 바리새파 지도자들은 50명의 대표를 로마에 보내어 로마황제에게 유대지역을 차라리 시리아에 합병하여 시리아 주재 로마총독의 통치를 받게 해 달라고 줄 것을 청원하였다. 로마에 거주하던 8,000여명의 유대인들도 이에 동조하였다. M. Simon(1990), 25.
그들은 정교분리에 입각하여 정치적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에 종교적인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대타협을 시도한 것이다. 30년대부터는 유대민족주의 운동에 편승하여 60년대부터는 열심당과 함께 유대독립전쟁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열심당의 민족주의는 정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바리새파의 민족주의는 철저하게 종교적 관점에 국한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유대의 지배적 에토스는 “사제들의 왕국과 거룩한 민족”이라는 표상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중심적인 상징은 성전과 토라였다. 정결과 거룩함의 개념은 가부장적 외적 구조와 상호 관련이 있다.
바리새파는 그들이 불결하다고 생각되는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데 열중한 엄격주의자들이었다. 율법 중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준수하였다. 거룩이라는 말은 ‘정결하여 구분된다’는 뜻이다. 바리새파들이 성결의식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의식 같은 것에 집착하였다. 따라서 이런 의식을 무시하는 부정하고 불결한 자들과 자신을 엄격히 구분하고 분리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리새파가 아닌 사람들과는 접촉하는 것조차 삼가하였다. 비바리새파와 상종하지 않는 것을 그들의 종교적 의무로 여겼다. 이스라엘의 삶을 변혁시킬 대안적 파라다임으로 자비(compassion)를 강변했다. 예수는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레 19:2)”는 명제를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는 명제로 대체하였다.
3) 바리새파는 모세의 율법뿐만 아니라 율법에 기록되지 않고 이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진 규정들을 가르쳤다. 「유대고대사」 13,10. 6
이 구전은 모세, 여호수아, 장로, 예언자를 거쳐 회당의 지도자들에게 전수된 것이라 하였다. 안식일에 대한 이들의 태도에서 구전을 중시한 그들의 종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바리새파는 안식일을 노동금지일로 해석하고 엄격하게 지켰다. 그들은 노동에 해당하는 것을 모세의 율법이 명시하지 않았으며 이를 구전에 의거하여 노동에 해당하는 것을 규정하였다. 따라서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거나,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 등으로 인하여 예수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4) 그리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페르시아와 조로아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천사론, 악마론, 종말론, 예정론, 영혼불멸과 육체의 구원, 선악간의 상급 등을 신봉하였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열정이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대전쟁사」 2, 163; 「유대고대사」 17,2,4; 18,14
바리세파와 예수와 논쟁 : 예수와 가장 적대 관계에 있던 종파가 바로 바리새파이다. 타이센은 바리세파가 예수와 가장 가까웠다고 한다. 예수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자기네 바리세파 입장에서 예수를 특별하게 생각했음을 보여 준다고 하였다. G. Theissen & A. Merz(2001), 217.
어쨌든 율법은 문자적으로 강화한 바리새파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을 사사건건 시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리세파는 조상들의 전통을 강조한다(갈 1:14, 막 7:1 이하), 안식일(막 2:23-3:6)과 축제일 규범, 정결법(막 7:1 이하)과 십일조법(마 23:23-24, 눅 18:12)과 같은 율법의 규범을 엄격히 지켰다. 이들은 율법주의적 경건성은 물론 비정치적일 수 없었다. 정결규레는 사회적 차별의 전략 가운데 하나였다. 이방의 정치적 문화적 침투에 맞서 유대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전략으로 택한 것이기도 하였다. G. Theissen & A. Merz(2001), 336.
예수와 바리새파 사이의 쟁점이 되었던 논쟁과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금식 논쟁 : 요한의 제자나 자신들처럼 자주 금식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을 바리세인들이 비난하였으나 예수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눅 5:33)고 반문하였다.
․ 안식일 논쟁 : 바리새파와 가장 큰 논쟁은 안식일 준수에 관한 것이었다. 안식일 논쟁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느냐는 것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 있느냐는 것으로 집약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마 12:1, 눅 6:1)과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갈 때 제자들이 길을 열며 밀 이삭을 자른 것(막 2:23) 두고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비난하였다. 예수는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 2:27)하시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막 2:28, 눅 6:4)이라고 하였다.
안식일에 예수가 회당에서 손 마른 자(마 12:8-9, 막 3:6, 눅 6:6)를 고쳤을 때 바리새인들이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기도 하였다. 예수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 4, 눅 6:9, 마 12:12)고 반문하니 바리새인들이 오히려 잠잠하였다. 다른 안식일에 바리새파의 한 지도자 집에서 식사하는 동안 고창병(蠱脹病 또는 수종병자)에 걸린 자를 치유한 다음 바리세인들에게 “너희 중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눅 14:5)고 반문하였다. 요한은 예수가 안식일에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침으로 바리새인들 사이에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며 논쟁이 일어난 것을 기록하고 있다(9:16).
․ 정결의식 논쟁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고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아니하는 것도 시비하였다(마 15:1-12, 막 7:1-23). 이에 대해 예수는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 15:11)이라고 함으로서 그들의 말문을 막았다.
․ 귀신축출 논쟁 :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자 바리세인들은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마 9:34, 12:24)고 비난하였다. 예수는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마 12:26)고 면박하였다.
․ 납세 논쟁 : 바리세인들이 사람을 보내 예수의 말씀을 책 잡으려고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막 12:14)라는 논쟁을 제기하였을 때에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막 12:17)는 말씀으로 그들의 간계를 물리쳤다.
․ 표적 논쟁 : 예수의 여러 표적을 불신하면서도 오히려 예수에게 표적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바리새인들에게(마 12:38, 16:1, 막8:11) 예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 줄 표적이 없다고 하였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人子:예수를 지칭함)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하심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이 마지막 구원의 표적임을 예고하였다(마 12:40).
․ 이혼 논쟁 :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여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막 10:2 마 19:3)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하나님이 짝 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막 10:9)고 단언하였다.
․ 간음한 여인 처벌 요청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모세의 율법은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선생은 의견을 어떤가하고 물었다. 예수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대답하니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 물러갔다. 여자 혼자만 남게 되자 예수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하였다.
․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교제 논쟁 : 바리새인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도 비방하였지만 예수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반박하였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을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는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더 하리라”(눅 15:7)고 하였다. 이어서 열 드라크마 중 하나를 잃었다가 다시 찿은 비유와 저 유명한 탕자 즉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다시 찿은 비유를 통해 예수가 잃어버린바 되어 소외된 자들을 구원히고 회복시키러 오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성전논쟁 : 예루살렘 성전은 우주와 세계의 중심축으로 여겨졌다. M. Eliade(1959), 「성과 속」, 43.
팔레스타인과 성전은 그 신성함의 정도에 따라 10단계 즉 ① 이스라엘 땅 ② 예루살렘 도성 ③ 성전이 있는 산 ④ 헬(hel) : 이방인이 지나 갈 수 있는 난간이 달린 테라스 ⑤ 여성의 뜰 ⑥ 이스라엘 민족의 뜰 ⑦ 사제들의 뜰 ⑧ 현관과 제단 사이의 공간 ⑨ 성소 ⑩ 지성소로 세분화 되었다. Sanders, 75.
지배적 에토스 문화적 파라다임은 정결로 이해되는 거룩성이었다. 거룩성은 장소나 사물, 시간들 사이 뿐만 아니라 개인들이나 집단들 사이에서 예리한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정결체계로 규정된 사회적 세계를 탄생시켰다. 거룩성의 에토스는 거룩성의 정치로 체화되었다.
바리새파에 대한 예수의 비판 : 예수의 시각에서 불 때 바리새인들은 무엇보다도 언행이 불일치한 자들이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 자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지만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行)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行爲)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行)치 아니하며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아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 23:2-3).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아는 것을 하나의 특권으로 여기고 율법을 모르는 족속들로부터 대접을 받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닌다.
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란다(마 23:5-7 공동번역)
예수의 바리새파에 대한 비판과 대한 반감은 마태 23장에 나타나 있는 바리새파에 대한 7가지 저주문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예수는 단 한 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바리새파를 칭찬한 예외적인 사건 외에는 바리새파에 대해서는 냉혹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궁극적인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 선포에 가장 장애가 되는 자들로서 천국 문을 막는 자는 예수의 가장 큰 적대자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23 :13).
2)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열정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천국의 자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옥의 자녀’로 만드는 본말이 전도된 자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3) 바리새인들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서 성전과 성전의 금을 혼돈하는 자로 맹목적인 자들이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눅 16: 14)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자 인 것이다(마 21:13).
화(禍)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引導者)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聖殿)으로 맹세(盟誓)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聖殿)의 금(金)으로 맹세(盟誓)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마 23:16)
4)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수할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보다 중요한 정신을 망각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것은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것처럼 우선순위를 반전시킨 어리섞은 자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 23, 눅 11:42 )
5) 바리새인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그들의 겉과 속이 다른 거짓과 위선이다. 그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철저히 겉으로만 꾸미는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다. . .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눅 11:3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6) 바리새인들은 예전의 선지자와 의인을 칭송한다하면서 현재의 선지자와 의인을 박해하는 불의한 자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마 23:13-31).
이러한 바리새인들이 결국은 예수가 많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예수를 제거하기로 모의하고(요 11:47) 체포명령을 내리고(요 11:57), 체포하여(요 18:3) 빌라도의 법정으로 이송하고 십자가 처형을 받도록 한 장본인들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을 유대 회당에서 축출시킨 자들도 바리새인들이었다(요 12:42).
3. 에센파
에센파의 기원 : 에센파는 1세기 전후의 필로, 요세푸스, 히폴리투스, 폴리니의 기록에 나타나지만 신약성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어 그 동안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47년 키르벹 쿰란 지역에서 항아리에 보관된 사해사본(Dead Sea Scroll)이라 불리는 고대문서 발견되었다. 그곳을 발굴한 결과 강당, 식당, 찬장, 도기공장, 작업장, 수도시설, 욕실, 공동묘지 등을 갖춘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68년까지의 대규모 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사해 문서와 쿰란 주거지를 남긴 쿰란공동체가 바로 바로 요세푸스 등의 기록에 등장하는 에센파라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쿰란문서에는 에센이라는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에센파에 대한 고대의 기록과 쿰란공동체에 대한 사해 사본의 기록을 정밀하게 검토하면 양자가 많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두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되고 있다. 버미스(G. Vermes)는 양자의 연관성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부루스(F. F. Bruce)는 쿰란공동체는 엣센파의 일부한 것이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F. F. Bruce, 「사해사본」, 206
요세푸스는 예수 당대의 에센파의 숫자가 4000명 정도라고 했는데 그중에 400명도의 핵심적인 무리들이 쿰란지역에는 거주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쿰란공동체를 포함하는 에센파는 사독가문의 경건한 후예로 보이는 데, 사두개파와는 달리 그들 가문의 대제사장직 계승권을 찬탈한 헤스모니아 왕가에 강력히 반발함으로서 광야로 내몰린 것으로 추정된다. 바리새파도 헤스모니아 왕가의 친외세 정책과 대제사장직의 찬탈을 반대했으나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센파는 비합법적인 대제사장이 관할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 자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부패한 성전공동체의 대안으로 광야의 새로운 은둔 공동체를 결성한 것이다.
묵시적 운둔주의자 : 에센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에센파라는 공동체를 주도한 사람은 의의 교사(The Teacher of Righteousness)라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쿰란문헌에 따르면 에센파들은 사악한 대제사장들에 의해 집행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는 불결한 것으로 여겨 여기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1QpHap. 10.9). 그 대신 그들 공동체에서 시행하는 기도, 예배, 성결의식, 율법공부, 거룩한 식사(공동체규칙서 1GS 6.3,8)만을 거룩한 제의로 주장했다.
2)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를 역사의 마지막 대심판의 징조로 보고, 메시야의 출현과 새 예루살렘의 성전 회복을 기대하였다(증언 4QTest, 1QS 9.9-11, 전쟁규범서 1QM). 자신들은 만이 구원을 받아 새 시대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는 종말론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총에 의한 “계약의 백성”으로 “빛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외의 사람들은 “어두움의 아들들”이라고 하였다.
3) 에센파는 그들의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엄격한 심사와 동시에 까다로운 생활규범을 부고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하였다(1QS 6.13-23). 예를 들면 가입자들은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공동체에 헌납하여야 하고, 철저한 금욕생활을 해야하며,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가입자들의 신앙과 생활 태도를 해마다 엄격하게 심사하여 등급이 주어졌으며, 적어도 3년 이상이 되어야 정식으로 공동체 회원이 되었고 여자들은 제외되었다.(1QS 5.23-25)1)
에센파와 예수 : 공관복음서는 에센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216.
그러나 에센파가 알려지자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공적인 활동을 하기 전에 에센파에 소속하거나 어떤 교류를 가진 것이 아닌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쿰람문서이 복음서와 초대 기독교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쿨란 문서에 나타나 있는 메시야 사상, 묵시사상, 선택된 공동체 사상, 의의 교사를 중심으로 한 철저한 구별된 생활, 선악 및 빛과 어두움의 이원론 등은 신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세례요한의 사역지가 쿰란공동체의 주거지와 매우 가깝다는 것과 새 시대를 대비한 요한의 회개의 세례가 쿰란공동체의 청결의식과 유사한 점, 세례요한이 메시야의 길을 개척하고 그의 메시지가 임박한 새 시대를 대비한 종말론적 메시지라는 점에서 세례 요한과 쿰란공동체의 연결점을 생각하게 된다. J. A. T. Robinson(1957), “The Baptism of John and the Qumran Community." HTR 50: 175-192.
그러나 서로간의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쿰란공동체는 안식일 준수와 정결법을 바리새파보더 더 엄격하게 준수하였다. 바리새 파는 안식일의 여행거리를 1,000m로 제한 한 반면에 쿰람은 500m 이내로 제한하였다. 바리새파는 정결례를 위하여 손과 발을 씻었지만 쿰란공동체는 매일 두 번 목욕을 하였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로서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서 삶의 방향의 전환을 촉구한 것이다.
1) 에센파는 속세를 떠나 광야의 은둔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예루살렘 사제직과 다른 유대인 지도자들을 부정하다고 간주하고 공식적인 유대인 제의와 생활에서 탈퇴하였으며,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자신들만을 위한 은자의 생활을 영위하였다. 바리세파와는 달리 전체 민중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비밀스럽게 간직하였으며(유대전쟁사 2, 141) 다른 이들과 논쟁을 삼갔다. “이런 이유로 예수 전승에는 바리세파와의 논쟁은 있어도 에센파와의 논쟁은 찾아 볼 수 없다.” 217.
그러나 예수는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웠으며, 광야의 사람 은둔자는 아니었다. 광야에서의 40일간의 시험기간 외에는 도시나 시골의 저자 거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사도들 역시 유대인의 일상생활 혹은 일반 대중들에게서 떠나는 일은 없었다.
광야에 왜 나갔느냐, 바람에 나는
2) 에센파는 배타적인 분파적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자신들은 ‘빛의 자녀’라 칭하고 사랑의 대상은 오직 공동체 내의 사람들에게 국한된다. 반면 어두움의 자식들로 간주되는 이방인이나 쿰란의 사상을 나눠 갖지 못한 다른 유대인들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아무나 회원이 될 수도 없었다. 고대 문헌에는 엣센파가 독신으로서 여자 없이 살아간다고 언급했다. Philo, Apologia pro Judaeis 14-17; Pliny, Natural History 5.15.73; Josephus, War 2.120-121, 160-161.
쿰란 문서에는 비록 공동체에는 참여하지 못하지만 여자와 어린이에 대한 규율이 나타난다. 성인 남자 외에 여자는 어린이는 정회원이 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1QSa 1.6-8;11QT 62.9-10;63.11-15
예수는 반대로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친다(마 5:44). 예수의 경우는 남성 성인 중심의 배타성은 배제되었다. 예수의 추종자와 후원자 중에는 많은 여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요 4:4 이하)에서 보여 주듯이 여성을 환대했으며, 부활의 첫 목격자들도 여성이었다. 어린이에 대한 태도는 역시 마찮가지이다. 어린이를 환대했으며 어린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였다(마 18:3).
3) 에센파는 금욕적인 거룩한 제사장 공동체라고 주장하였다.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했으며, 높은 수준의 의(義)를 추구하여 하였다. 정회원에게는 금욕적인 독신이 요구되었으며, 날마다 여러 차례 정결의식을 행했다. Charles F. Pfeiffer, The Dead Sea Scrolls and the Bible, p. 94.
가입 희망자는 그들이 정한 훈련규칙에 따라 일정 기간의 훈련을 거처 정회원이 될 수 있으며, 정회원이 아닌 사람은 공동식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사생활은 「의의 교사」라 불리우는 감독자의 책임하에서 이루어 졌다.
4) 성전에서 물러난 그들에게 있어서 속죄는 기도와 고통의 영적인 제사를 통해 거룩해 진다고 믿었다. 쿰란 공동체는 각 구성원이 시행해야 할 법칙들을 상비하고 있었음은 물론 율법의 준수가 올바른 신앙의 척도였다. 그들의 구원은 율법의 올바른 해석과 준수에 달려있었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금욕적인 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다고 비난을 받았으며, 예수는 심지어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로 비쳐졌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만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세속의 더러움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롭고 깨끗한 사람보다 불의하고 죄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셨다. 에센파는 “세리와 죄인”들을 피해 광야로 은둔했으나 예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가 되기 위해 속세 한 복판에서 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었다.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5) 에센파는 시한부 종말론을 신봉하는 묵시적 비의적(秘儀的) 공동체였다. 쿰란 공동체는 마지막 전쟁의 7년째 되는 해에 희생 제의가 다시금 회복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1QM 2:3-6). G. Vermes. 119.
‘의의 교사’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지식(Esoteric)은 오직 공동체에 입회한 사람들 만이 알 수 있다. James H. Charlesworth, Jesus within Judaism, New light from exiting Archaeological Discoveries, 60-61.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에센파는 예루살렘 성소의 회복을 기대하였다. 한편 바울이 선포한 하나님의 비밀은 우주적 복음으로서,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 선포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있어서는 바울에 의해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강조되었다.
4.. 열심당(zealots)
열심당의 기원 : 요세푸스가 제4의 학파라고 부른 열심당은 잘 알려진 것처럼 주후 67-70년 사이에 로마에 항거하여 유대독립전쟁을 주도한 구국투사들이다.
열심당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참된 주권자이시면, 그분만이 성지 예루살렘의 참된 주인이시며, 그들이 사는 땅이 하나님께서 영구적으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그 땅을 차지하여 권력을 행사하고 성전을 간섭하는 것에 대하여 방관하거나 협조하거나 타협하는 것 자체가 불신앙이며 유대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열심당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그들의 땅에서 이교도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주권과 유대인의 왕권과 그들에게 약속된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열심당은 그들의 행동의 전형을 모세시대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제사장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가 미디안의 여자와 음행한 시므리를 창으로 찔러 죽인 사건(민 25:1-15)과 주전 167년경 제사장 맛디아가 유대교에 대한 열심에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유대교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독립전쟁을 일으킨 사건에 둔다(마카베오 상 2:19-28).
이런한 정치적 독립운동가로서 헤롯의 부하였다가 자신을 “본토 출신의 왕‘으로 주장한 시몬(유대고대사, 17, 273), 자신을 제2의 다윗이라고 주장한 양치기 출신의 아토롱게스(유대고대사, 17, 278-280),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유대고대사 17, 272, 유대전쟁사 2, 56) 등이 급진적 신정정치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그 중에서 갈릴리 출신 유다(행 5:37)를 예수 당대에 열심당 운동을 일으킨 핵심적인 인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주후 6년 아켈라우스왕 때 구레뇨(Qurinius)의 인구조사령을 유대인을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사악한 정책으로 간주하고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촉구하였기 때문이다(유대고대사 18.4). 갈릴리 유다는 인간은 하나님 외에 다른 통치자를 인정해서는 않되며(하나님의 유일주권론), 인간은 하나님 한분의 통치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함께 일할 책임이 있다(혁명적 협력설)는 사상에 철저하였으며, 그가 체계적인 저항 조직을 결성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의 일어난 많은 저항 집단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220.
그의 부친 에즈키아스는 헤롯의 통치에 반대하였고, 그의 형제 시몬과 야곱은 티베리우스 황제 때에 반로마 제국 활동을 하다가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 갈릴리 유다의 사상은 44년 아그립바 1세 사후에도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이 때 그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금징수 반대 운동에 앞장 섰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하였다.(유대고대사 20, 102) 그리고 주후 66년부터 전 팔레스틴 땅에 일어났던 유대 독립전쟁을 주도한 므나헴(Menahem) 및 엘리에젤 벤 자일(유대전쟁사 2:433-4, 445:9)도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들과 더불어 시몬 벤 기오라(유대전쟁사 4, 510, 575, 7, 26-31)도 유다의 왕권 계승을 주장하는 정치적 혁명가이었다.
열심당은 마카비의 독립 무력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은 구국열사(눅 6:15, 행 1:13)이다. 이들은 이방 통치자들에게 황제의 상이 새겨진 동전으로 세금을 바치는 것은 제1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의 죄로 규정하였다. 1세기 중엽에는 자객들(sicarii,행 21:38) 4,000명이 테러를 일삼았고, 로마인들이 강도라 칭하였다. 66-70년 유대전쟁의 주역 마사다 최후 항쟁 패배(70-73)하게 되었다.
열심당들의 정치적인 정의 실현 지향하는 실천적 변혁주의자이며, 이방인들이 식민지 정책에 대항한 무장 독립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바리새파의 정교분리나, 사두개파의 정치적 타협이나 에센파의 정치적 무관심 모두 비판하였다. 브렌돈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예수는 당시 유대4대 종파 가운데 열심당과의 유사성이 가장 많다고 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은 예수와 열심당 사이에 여러 공통점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차이점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예수와 열심당과의 공통점 : 예수와 열심당의 공통점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가 열심당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제자들도 열심당의 궁극적인 목표인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였다(마 19:28, 눅 22:28, 24:21, 행 1:6)
2) 예수의 제자 중에 열심당이 있었다.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열심당 시몬(막 3:18, 눅 6:15)이었다. 열심당 시몬 외에 바요나 베드로도 열심당일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열심당처럼 칼을 소유하고 있었다.
3) 예수는 열심당이 전형적으로 사용한 용어를 사용하여 헤롯을 여우라 칭했다(눅13:32). 성전정화와 같은 기습적인 시위는 열심당의 상투적인 행위이다. 예수 자신의 성전 청결(막 11:15 이하)도 하나님에 대한 열심에서 비롯된 열심당의 기습적인 시위형태와 유사하다.
4) 예수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INRI)’이라는 정치적인 죄명에 부과되었고, 종교범과는 달리 투석형이 아닌 다른 ‘민란에 가담함 강도’ 즉 열심당과 함께(막 15:7)당)과 모반자로서 정치범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형’을 당함.
예수와 열심당의 차이점 : 예수와 열심당 사이에 차이점도 분명히 드러난다.
1) 예수는 열심당과 달리 율법위반자의 처형 및 율법 없는 자의 추방을 통해 이스라엘의 정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예수는 열심당의 편협한 국수주의 거부하였으며, 이방인들의 도시인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에 가서도 전도하였고 이방인의 치유와 구원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의 백부장의 하인과 수로보니게 여인을 치유하였다.
2) 예수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가 열심당과 달랐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적인 의를 이루려고 하였지만 열심당의 정치적 의의 실천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바리세파 입장에서는 창녀가 반율법적인 가장 대표적인 죄인이었고, 열심당의 입장에서는 세리가 식민지 경제 수탈의 앞잡이였음으로 가장 반민족인 죄인으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는 더 근본적으로 양자가 지닌 율법성을 비판하였다. G. Theissen & A. Merz(2001), 150.
예수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는 정치적 죄인 율법적인 죄인을 모두 의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리와 창녀가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는 의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죄인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의라는 것이다.
3) 예수의 제자 중에는 열심당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세리 마태도 있었다. 예수는 반민족주의자요 자기 백성을 세금으로 옭아메어 수탈한 세리장 삭게오도 선대하고 그에 집에 구원이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4) 열심당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세금 납부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의 입장은 달랐다. 예수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막 12:13-17), 예수는 즉답을 회피하였다.
5) 무엇보다도 폭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 열심당과 전적으로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예수는 로마에 대한 항쟁을 ‘거룩한 전쟁’으로 미화하고 폭력적인 투쟁을 선동하지 않았다. 예수는 폭력의 악순환을 거부하였다. 그들을 억압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칼을 쓰는 다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른캄은 “‘세례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공격하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점령하려고 한다’(마 11:12)라는 모호는 말씀은 아마도 열심당의 메시야 정치운동에 대한 분명하고도 예리한 거부일 것이다”고 하였다. G. Bornkamm(1973), 「나사렛 예수」, 강한표 역(서울: 대한기독교서회), 65.
그러나 최근 타이센은 저스틴의 「변증론」(51, 3)와 Q자료의 본래적 형태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G. Theissen & A. Merz(2001), 「역사적 예수」, 손성현 역(서울: 다산글방), 193.
“모든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에 까지(이르렀다): 그 때 이래로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을 당하고 있으며 폭력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 나라를 차지한다(마 11:12).” C. R. Beasley-Murrey(1986), 91-96.
5. 민중들의 메시야 신앙
메시야 대망과 메시야 운동 : 이러한 4대 종파에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는 민중적인 신앙을 메시야(messiah) 대망이었다. 예수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유대의 헤롯대왕 사후 10년이 지난 다음에는 유대 주재 로마 총독이 파송되어 식민지 지배를 받았으로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착취를 당하였다. 종교적으로도 대제사장직을 돈으로 사고 팔았으며, 예언자들의 예언활동도 종식되었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이끌어 줄 이상적인 지도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가 전무한 위기의 시대였다. 반면에 스스로 메시야로 자처하는 무리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메시야의 도래를 대망하는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고, 세례요한의 등장으로 큰 기대에 부푼 백성들이 세례요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큰 절망에 빠져 있던 시기였으므로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아주 고조되어 있었다.
이 때에 마침 예수가 혜성처럼 나타났고, 예수는 구약성서 약속된 마지막 때의 구세주로서 이상적인 메시야로 고백되었다. 히브리어 ‘메시야’(messiah)는 문자적으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 One)"라는 뜻으로서 왕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을 지칭하는 또 다른 칭호였다. 마하트마 간디라고 할 때 마하트마가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칭호인 것과 마찮가지이다.
구약 성서 시대에는 백성의 지도자들인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들을 기름을 부어 그 백성의 종교적 지도자로 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메시야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 아론과 같은 제사장, 다윗과 같은 왕은 자기 백성을 위기와 도탄에서 건저 낸 구원자로 통칭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국가적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이런 이상적인 메시야의 등장을 대망하여 왔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시대는 메시야 운동의 전승기였다. 히브리어 ‘메시야’(messiah)가 희랍어 그리스도(Christos)로 번역되어 늘리 통용되었다. 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중국어로 기독(基督)이라고 음역하였고 여기서 기독교라는 용어가 생긴 것이다.
민중들은 저마다 이상적인 메시야의 도래를 고대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걸기도하였다. 예수시대에도 구약의 전통에 따라 여러 형태의 왕으로서 정치적 메시야, 이상적인 제사장이나 예언자로서 종교적 메시야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여러 형태의 메시야 운동은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였다.
왕적 메시야 :이스라엘의 메시야 대망에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것을 왕적 메시야이다. 다윗을 기름부어 왕으로 세운 것과 다윗왕조가 영원하리라는 다윗계약(삼하 7:1-16)을 회상하며 다윗과 같은 새로운 왕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왕정을 회복시킬 것을 대망하였다. 이상적인 왕에 대한 대망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스갸랴, 미가에 기록되어 있다. 사 9:6-9, 11:1-9, 렘 23:5, 33:15-17, 겔 34:23-30, 37:24-28, 슥 9:9-10, 미 5:1-4.
여기에서 추려볼 수 있는 메시야 상의 공통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새로운 왕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택하여 세울 것이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표상은 주 105의 거의 모든 문맥에서 등장한다.
둘째로 그는 백성들과 ‘평화의 계약’(겔 34:25, 37:26)을 맺어 백성들을 정의로 다스릴‘평화의 왕’(사 9:7 공동번역)이 될 것이다. 평화의 왕은 가난한 자들을 의롭게 다스리기 위해 먼저 온갖 군사적인 폭정을 제거할 것이다. 병거와 군마를 없애고 군인의 활을 꺽으며(사 2:4-5, 슥 9:10, 미 3:4-5), 마구 짓밟던 군화와 피 투성된 군복을 불태울 것이며, 백성의 멍에와 장대를 부러뜨릴 것이다(사 9:4 공동번역) 셋째로 그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겔 27:23)로서 백성 위에 군림하여 강제하는 왕(meleck)이 아니라, 백성을 살피며 섬기는 영도자(nasi)가 될 것이다. R.A.Horsley & J.S.Hanson, Bandits,Prophets,and Messiahs:Popular
Movements at the Time of Jesus(SanFrancisco:Harper & Row Pub.1988),
p.100f.
따라서 그는 통치자가 군림해 온 예루살렘이 아니라 보잘것 없는 곳 베들레헴에서 나올 것이며, 그는 겸비하여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이다(슥 9:9) 이와 유사한 내용의 메시야 왕에 대한 대망은 보다 후대의 문서인 문서인 「솔로몬의 시편」, 「에스드라하」, 「바룩하」, 「쿰란 제4동굴 언약 본문」,그리고 「유대인의 18 기도문」 등에도 기록되어 있다. Ps.Sol. 17:21-32, 18:6-9, Esd II 12:31-34, Bar 40:1-2, 4Q Flor.
1:10-13. 외경에 나타나는 왕 메시야에 관하여서는 아래를 참고할 것.
G.Vermes,Jesus the Jew:Historian's Reading of the Gospel
(Macmillan,1973),p.131-135.
.
이상적인 메시야 왕을 대망하는 대신에 마카비의 전례에 따라 로마와 그들과 결탁한 상류층 유대인들에 대한 무장봉기를 일으켜 스스로 왕위를 얻을 기회를 노리거나 추종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 자들도 없지 않았다. R.A.Horsley & J.S.Hanson,Ibid.,p.110-131; R.A.Horsley,“Popular
Messisnic Movement around the Time of Jesus,” CBQ 466(1984),pp.
471-495,특히 478-480.
요세푸스는 헤롯 사후(BC 4)에 에스기아의 아들 유다가 갈릴리에서, Ant.17.5(「요세푸스 Ⅱ」 김지철역,서울:생명의 말씀사,1987,p.478);
JW 2.4.1(「요세푸스 Ⅲ」 p.185).
헤롯의 종이었던 시몬이 베레아에서, Ant.17.6(「요세푸스 Ⅱ」 p.478); JW.2.4.2(「요세푸스 Ⅲ」 p.185).
그리고 목자 출신 아스롱(Athronges)이 유대에서 Ant.17.7(「요세푸스 Ⅱ」 p.479); JW.2.4.3(「요세푸스 Ⅲ」 p.186)
추종자를 모아 무장 봉기를 일으키고 스스로 왕권(Kingship)을 주장하고 메시야로 자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R.A.Horsley & J.S.Hanson,op.cit.,pp.114.
제사장적 메시야 : 왕 메시야와 더불어 이상적인 제사장 메시야의 도래를 대망하였다. G.Vermes,op.cit.,pp.135-137;A.J.B.Higgins,“The Pristly Messiah,”
NTS, 13(1966-67),pp.211-239; O.Cullmman,The Christology of the
New Testment,tr.S.C.Guthrie and C.H.Hall(Philadelphia:Fortress,
1959),pp.136-141.
현실적으로 제의가 중단되거나 대제사장 가문의 부정과 부패에 실망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살렘의 제사장-왕이었던 멜기세덕(창 14:17)을 회상하며 경험적인 제사장보다 존귀하며 폐하지도 않고 영원히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이상적인 대제사장을 고대(시 110:4)하였다. O.Cullmann,op.cit.,p.139.
쿰란종파는 스스로 ‘새 계약의 공동체’라 하여 이상적인 제의공동체로 여겼으며, 그 창시자인 ‘의의 교사’를 종말에 나타날 새로운 제사장이라 하였다. Ibid.,p.143.
「공동체 규약」, 「쿰란 제4동굴 언약본문」, 「다메섹 문서」, 「12족장의 언약서」 등에도 레위의 메시야, 아론의 메시야가 등장하는 데, 이는 이상적인 제사장을 지칭한 것이다. 4Q test.1:10-13; Manual of Disciples 9:11; Serek Ha'eda 2:12,
Damascus Document 12:23,14:19,19:10,20:1; Test.Reub 6:7-12,
Test.Lev.18:1-3,6-9; Test.Sim.5:4-6,7:1f.
「12 족장의 언약서」는 메시야가 왕이며 동시에 제사장인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레위지파로부터 제사장이 나오고 유다지파로부터 왕이 출현하는데, 왕권은 제사장직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제사장이신 메시야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관한 논쟁은 A.J.B.Higgins,op.cit.,pp.
215 ff; J.Liver,“The Doctrine of two Messiahs,” HTR.52(1959),pp.
149-185; K.G.Kunh,“The Two Messiahs of Aaron and Israel,” The
Scrolls and the New Testment,ed.K.Stendahl(New York,1957),p.54-
64; F.F.Bruce,「예수와 기독교 기원」,진연섭역(서울:컨콜디아사,
1980),pp.69-84.
제사장이 율법의 새로운 해석자라는 언급이 여러 곳에 나타나지만 제사장 메시야의 직무와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프리드리히는 특히 귀신 축출이 대제사장의 직무로 간주되었음을 강조한다. 더러운 영이 병마를 주관하므로 거룩한 메시야인 대제사장은 더러운 영들을 축출할 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G.Friedrich,“Beobachtungen zur messianischen Hoherpristerwachtung
in den Synoptikern,”ZTK 53(1956),pp.265-311; F.Hahn,The Titles
of Jesus in Christology:Their History in Early Christianity
(London:Lutterworth Pr.1969),p.232.
그리고 때가 차서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종말론적 잔치를 주재하여 성전제의에서 축출된 병자, 가난한 자, 여자, 이방인들을 초대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IQS 2:11-22.
이상적인 제사장은 병자를 치유하고 소외된 자들을 친교의 잔치에 모두 환대한다는 것은 제사장의 직무의 본질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카베오하 12:45에는 제사장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을 드린 것이 묘사되어 있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의 전례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O.Cullmann,op.cit.,p.148.
예언자적 메시야 : 기원전 1세기의 랍비와 서기관들은 학개, 스가랴, 말라기와 더불어 참된 예언이 종식되었다는 공식적인 교리를 주장했다. F.W.Young,“Jesus the Prophet:a re-examination,”JBL 68(1949),p.
286.
이런 배경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영이 임재한 새로운 예언자가 도래할 것을 대망하였다(욜 2:28-29). R.A.Horsley,“‘Like One of the Prophets of Old’:Two Type of
Popular Prophets at the Time of Jesus,”CBQ 47(1985),pp.438 ff;
G.Vermes,op.cit.,pp.137-139.
모세 같은 예언자(신 18:18)를 회상하며 광야에서 야훼의 길을 예비할 자를 고대하였다(시 40:3-5). IQS 9:11,4Q test.10-13.
엘리야가 귀환하리라는 대망도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말 4:5). Sir 48:10.
이들 이상적인 예언자의 직무에 관해서 「사독문서」는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의 종 예언자들의 모든 말들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불어넣으시고 이 예언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그의 백성과 그의 땅에 일어날 모든 것을 말씀”하실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F.F.Bruce,op.cit.,pp.72-74.
요세푸스는 로마통치 동안 여러 예언자와 예언운동이 있었음을 증언하였는데 호스레이(R.A.Horsley)는 이를 두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R.A.Horsley & J.S.Hanson,op.cit.,pp.153ff; R.A.Horsley,“Popular
Prophetic Movements at the Time of Jesus:Their Principal Features
and Social Origin,”JSNT 26(1986),pp.3-27.
첫째는 전통적인 신탁 예언자(oracle prophet)이다. 이들은 국제문제 뿐만 아니라 국내의 사회정치적 제관계를 폭 넓게 숙지하고 사회 정치적 위기시 마다 야훼의 대언자로서 심판과 구원의 신탁을 선포하였다. R.A.Horsley, op.cit., p.12.
포로후기의 제2이사야와 스가랴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과 도시의 심판을 선언한 아나누스(Ananus)의 아들 예수 JW 6.5.3(「요세푸스 Ⅲ」 p.585-586)
와 임박한 심판과 사회경제적 회개를 선포하고 제사장 귀족과 통치자를 비판한 세례 요한도 여기에 포함된다.
둘째 유형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참여한 ‘행동형 예언자’(action type prophet)이다. R.A.Horsley,op.cit.,p.4 f.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종말론적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해 많은 추종자 또는 제자들을 이끌고 대중적 예언운동을 주도하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나오는 듀다스(Theudas)와 3,000명의 추종자를 이끈 무명의 애급인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Ant.20.5(「요세푸스 Ⅱ」 p.637); JW 2.13.5(「요세푸스 Ⅲ」 p.222);
행 21:38 참조.
유형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예언활동은 이 후자에 해당한다.
통전적 메시야 : 메시야는 각각 이상적인 왕이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로 지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 인물을 모두 포함하기도 하였다.
「공동체 규약」에는 회원들이 “한 예언자와 아론 및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올 때까지” 1QS 9.11; F.F.Bruce,op.cit.,pp.4ff.
그들의 규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는데, 여기서 언급된 종말에 기대되는 세 인물 중, 한 예언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의미하며, 아론의 메시야는 이상적인 제사장을 의미하며, 이스라엘의 메시야는 다윗 후손으로 나타날 왕을 의미한다.
「쿰란 제4동굴 언약본문」은 이 세 인물에 관한 히브리 성서의 증빙구들(proof texts)을 모아 놓았다. 첫째는 모세같은 예언자에 관한 신명기 18:18 절과 이와 관련된 구절들이다. 둘째는 민수기 24장 15-17절에 있는 ‘야곱에게서 나오는 한 별’과 ‘이스라엘에게서 나오는 한 홀’에 관한 발람의 예언의 내용으로서 원래는 다윗 왕을 지칭한 것이었는데, ‘위대한 다윗의 장자’에게 재적용되어 이상적인 왕으로 이해되었다. 셋째로 신명기 33장 8-11절에 있는 레위지파가 제사장 가문이 되리라는 모세의 축복의 말
씀이다. 이 세 증인들은 종말의 예언자, 왕, 제사장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F.F.Bruce,op.cit., pp.76-77.; G.Vermes,op.cit.,pp.245ff.
이처럼 예수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상적인 메시야적 지도자가 역사 한 가운데에 나타날 것을 고대하여, 이러한 메시야상을 전승하였으며, 그러한 인물을 자처하는 자들이 실제로 등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묵시문학의 영향으로 메시야 사상의 일대 변혁이 이루어졌다. 포로 후기의 성전 재건운동과 마카비의 독립운동에 소외되거나 실망한 일부의 묵시가들은 왕정과 제의와 예언을 회복할 이상적인 메시야의 기대를 단념하였다. 현재의 역사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며 하나님의 주권은 역사 안에서는 더 이상 실현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메시야 대신에 초월적인 천상의 인물인 메시야가 하늘로부터 도래하여 사악한 현세를 심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우주적인 대변혁을 이루실 것을 고대하였다. J.Bosc,The Kingly Office of the Jesus Christ,tr.A.S.K.Reid
(Edinbrugh:Olver Boyd,1959),p.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의 메시야 대망에 함축된 메시야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1) 메시야는 공식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제한된 문자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올 자’ 김경희,“그리스도의 칭호의 유래와 그 원래의 의미”,「신학사상」 41
(1983),p.322.
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통용되었다. 당시의 문서들에는 다양한 구원자 대망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민중들은 그들의 구원을 실제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구체적 메시야 운동을 일으켰다. 백성들은 구원의 길로 인도할 메시야 운동의 지도자들은 구약의 전례에 따라 이상적인 제사장, 왕, 예언자로 정형화되었다.
2) 메시야는 하나님이 세우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의미했다. R.A.Horsley & J.S.Hanson,op.cit.,p.90.
당시에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정당하게 기름부음을 받은 왕, 예언자, 제사장이 없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유대 왕이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에게 실망한 다수의 민중들은 믿고 의지할 신실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한 인물 중에서 그러한 직무를 올바르게 수행할 이상적인 인물로서 영적인 카리스마와 권위를 지닌 새로운 지도자를 고대하였던 것이다. M.De Jong,op.cit.,p.147.
그리고 실제로는 이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들이 합법적으로 취임한 현직자들보더 더 큰 영향력과 권위를 행사하였다.
3) 메시야는 역사 안에 나타날 구체적인 인물로 기대되었다. Ibid.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실제했던 다윗과 같은 왕, 아론과 같은 제사장,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 한번 역사 한 복판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을 기대한 것이다. 역사 안에 나타날 메시야 대망에 절망한 일부 유대인들이 천상의 인자가 도래하리라는 초월적인 메시야 대망으로 넘어간 것이 사실이지만, 다수의 유대인들이 현세에 등장할 메시야를 고대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은 바로 이러한 메시야 대망의 배경을 조명하여야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
신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다. 예수를 누구로 고백하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요체이다. 예수 생전에도 예수에 대한 여러 오해가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과 처지에서 예수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례미아나 선지자 중에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3-16)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익숙하고 흔한 이름으로 그 뜻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할 자”(마 1:21)이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메시야를 희랍어로 번역한 말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과 예수의 공생애는 이러한 메시야 대망에 비추어 볼대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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