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풍운의 전조.
성양산(成陽山).
산서성 태원현(太原縣)에 있는 산이다.
염제(炎帝:神農氏)가 자편(赭鞭)이라고 하는 일종의 신비한 채찍을 사용하여 각종의 약초를 채찍질하였다고 한다.
이들 약초는 채찍질을 가하게 되면 독성의 여부나 약효가 자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성양산에는 그가 약초를 채찍질했다고 하는 곳이 있다. 그래서 이 산을 신농원약초산(神農原藥草山)이라고도 부른다.
첫눈이 내린다.
하나의 죽음이 있던 바로 그 날이었다.
그로부터 삼일 후다.
두두두두......두두!
여덟 필의 순백색 설리총이 이끄는 호화스러운 팔두마차 한 대가 절강성의 남단에 위치한 성양산의 산허리를 가로질러 질주해 가고 있었다.산세는 험하고 길은 좁다.
허나, 마부석부터 호화의 극치를 이룬 달리는 하나의 궁전은 거침없이 산세를 꿰뚫듯 달려가고 있다.
보라. 양광과 비를 막는 차양은 천년금우조의 깃털로 정교하게 만즌 어풍취일선이며, 황진을 막아주는 옥정천잠사가 마차를 감싸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마부석의 의자는 놀랍게도 홍옥청련석의 좌대 위에 용봉을 금사로 수놓은 호화보료이다.
마차의 동체는 천하에서 가장 가볍고 단단하다는 백규종규석!
마차 문의 손잡이는 황금이요,
오리알 만한 야명주들이 주렵 대신 드리워져 있다.
가히 이쯤되면 당금 황후장상일지라도 부럽지 않을 차림새인데, 마부석에는 희다 못해 차라리 푸르스름한 백삼을 걸친 미장부가 마차를 몰고 있다.
-사일검왕(射日劒王) 한군비(韓君飛)!
그는 구대문파 중 점창파 출신의 최고검수이자, 점창파의 가장 어린 장로이다.
또한, 정도무림맹주 팔국천황 기천악과 그의 단 하나 뿐인 손녀 기해민의 경호를 담당하는 천검위대의 대주이기도 하다.
도대체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기에 천검위대의 대주라는 지고한 신분을 지닌 사일검왕한운아가 마부가 되어 몸소 마차를 몬단 말인가?
“......!”
마차의 좌우로는 각각 열명씩,
도합 이십 인의 천검위대 고수들이 마차를 에워싸듯 호위하며 말을 몰고 그 뒤에는,천제위대,지령위대,창천금궁대 등 도합 이백 삼십여 기의 인마가 위풍당당하게 따르고 있었다.
천제위대-이들은 한결같이 짧은 단삼에 날렵한 경장차림이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모두 암습,살인,잠입,은신에 가장 뛰어난 조예를 지닌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대주는 사인섬예 구자청.
세인들은 구자청을 가리켜 소리없이 죽음을 거두어가는 죽음의 은자라고 한다.
지령위대!
이들은 일신에 하나같이 가공할 암기,목술,화기 등을 지닌 파괴와 몰살의 전문고수들이다.
정도에서는 이단자라고까지 불리는 지령위대,
지금, 지령위대의 선두에는 무적영수 선우귀랑이 온 몸에 무려 만 이천가지의 절독과 화약과 암기를 지닌 채 무리를 이끌고 있다.
창천금궁대!
그들은 모두 푸르스름한 녹색피풍을 걸치고,어깨에는 거대한 금빛 활을 메고 있다.
천하에서 가장 빨리 살인을 하며, 파공성도 없이 석자 무게의 만년한천벽을 관통시키고., 단 한대의 화살로 한꺼번에 무려 삼십명을 꼬치꿰듯 죽여버리는 창천금궁대!
혈야궁 염호,
창천금궁대의 대주인 그는 전혀 활을 쏘지 않는다.
단지 활시위를 당겼다가 가볍게 퉁길 뿐이다.
허나, 그 순간 터져나온 음파(音波)에 웬만한 절정고수들도 피를 토하고 죽고 만다.
비록 이백여 기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호호탕탕한 행군은 대해를 가르고 태산은 밀어 버릴 듯하지 않은가?
의문의 마차 안.
이 엄청난 호위를 받으며 팔두마차에 타고 있는 인물은 의외에도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여인이었다.
마차의 내부는 외부보다 더 화려하기 이를데 없었는데, 그 화려함이 오직 이 한 소녀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빛을 잃고 있었다.
이제 갓 십칠 세 쯤 되었을까?
칠흑같은 머리는 폭포수처럼 등 뒤로 늘어져 있는데, 그 머리카락 하나에서조차 형용할 수 없는 매력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거기에다,추수와도 같이 잔잔한 눈망울,세필로 그린 듯 고운 아미에 조각한 듯 오똑한 코의 선과 부드럽고 육감적인 입술......
양 뺨은 도화 꽃잎의 은은하고 화사한 빛깔이면서도 감히 범접치 못할 성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너무나도 가련해 애처롭게까지 보이는 우아하면서도 가느다란 목덜미의 선.
특히, 늘씬한몸매는 모든 미녀들을 모아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가려서 만든 듯 완벽한 굴곡을 이루고 있엇다.
실로 인간으로 믿어지지 않는 완벽한 미의 화신인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왜 이토록 빨리 돌아오라고 하셨을까요? 빙궁(氷宮)에서의 수련기간은 아직 일년이 더 남았는데......”
문득, 여인의 입이 열리며 천상의 섬음(仙音)인 양 청아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여인의 앞에는 한 명의 백발노인이 한 자루 검을 무릎 위에 놓은 채 조용히 앉아있었다.
노인의 신태는 비범하기 이를데 없었다.
고요하기 이를데 없는 두 눈,
전신에서 풍기는 싸늘한 위엄,
이것은 최강고수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가공할 기도였다.
“녀석,이미 알고 있으면서 이 할아버지에게도 시치미를 뗄 셈이냐?”
노인의 입가에는 가공할 기도와 달리 인자한 미소가 감돌았다.
여인은 살풋 아미를 찡그렸다.
“그럼......역시 당금 강호에 일고있는 으문의 혈겁 때문이겠군요.검천(劒天) 할아버지?”
“그래,설산 빙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만......너를 가장 안전하게 해줄 사람은 제 할아버지 밖에 없다.”
검천....
바로 이 노인이었던가?
정도무림맹에는 살아있는 열 개의 하늘이 있다.
이름하여 십천장로(十天長老)!
각기 검(劒), 장(掌), 도(刀), 지(指), 금(琴)등......십전의 기예에서 하늘이라 물리는 십천장로.
검천은 바로 그들 중 서열 일위를 나타내는 신화인 것이다.
검천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허허......그리고 너는 실상 빙궁에 더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었지 않느냐?그곳의 절학이 하늘을 덮는다 해도 너는 이미 깨우쳤을 테니까.”
“피이......검천 할아버지를 속이려니 차라리 하늘을 속이는 편이 쉽겠어요.”
여인의 눈망을이 귀엽게 흔들렸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살아있는 열 개의 하늘 중 일인인 검천이 호위하는 이 소녀는 바로 팔황제군 기천악의 단 하나 뿐인 손녀인 기혜민(奇惠玟)이었다.
그녀의 고운 눈에 또다시 아쉬운 빛이 감돌았다.
“치잇-나머지 일년 동안 중원을 자유롭게 돌아보고 싶었는데......”
“허허......녀석,이번의 혈난이 가라앉으면 얼마든지 시간이 있지 않느냐.”
“흉수는 밝혀졌나요?”
“아니다.어쩌면 네 할아버지는 아시고 계실법한데......말씀을 안해 주신다.”
“기이한 일이로군요.게다가 그들은 중원에 대해 자신들의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 훤한데......중원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으니......”
검천의 눈썹은 놀람에 꿈틀했다.
“빙궁에만 틀어박혀 있던 네가 어떻게 그 사실을......?”
“어머!검천 할아버지는 내가 누군지 깜빡 잊으신 모양이군요.”
“응?”
“그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세살 박이라도 알 수 있는 거예요.혈겁은 어떤 특정 지역이 아닌 중원 전역에서 거의 동시랄만큼 발생했어요.”
“......!”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당금 무림에 이만한 세력을 가진 물파는 없다는 거예요. 정파와 마도, 전사의 성이 삼정지세를 이룬 현시점에서 누구라도 먼저 혈난을 일으킨다면 그는 즉시 두 곳의 협공을 받게 돼 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망할 것도 없고 철혈전후 초려군이나 백야성주 천마 주천군이 감히 먼저 그런 모홈을 할 수 있을까요?”
실로 명쾌한 논리가 아닌가?
검천의 노안은 기혜민의 말이 이어질수록 짙은 감탄의 빛을 띠어갔다.
“허허. 너는 볼때마다 노부를 놀라게 하는구나.하지만......”
“하지만 뭐예요?”
“너무 똑똑해도 신랑감이 나서지 안는 법이다. 자고로 여인네란 차분하고 얌전해야......”
“치잇! 또 그이야기,검천 할아버지는 나빠요. 난 시집 안가고 할아버지랑 영원히 같이 살거란 말예요.”
검천의 얼굴은 못믿겠다는 표정이 더 많이 섞여 있었다.
“과연 그럴까?”
그의 눈빛도 탐색하듯 기혜민의 표정을 살폈다. 바로 그때였다.
피이이이잉!
“크아아악!”
돌연 참담한 단말마가 기마대의 선두에서 들려오질 않는가?
“무슨 일이냐?”
검천이 자신도 모르게 애검의 자루를 잡으며 짧게 소리쳤다.
“암......암습이다.!막아랏-!”
“무엄한 놈들!감히 뉘의 행차라고......”
전제위대의 대주 사인섬예 구자청과 지령위대의 대주 무적영수 선우귀랑의 다급한 음성이 허공을 찢었다.
피이이이잉!
공간과 공간을 칼로 찢는 듯한 강전의 파공음,
히히히힝......
“아아악!”
말들이 놀라 멈추는 소리와 비명이 뒤섞이며 장내는 순식간에 피비린내로 뒤덮였다.
“한대주! 자네는 검천 장로님과 기소저를 모시고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게.”
창천금궁대주 혈야궁 염호의 다급한 음성이 이어진 것은 동시였다.
이미, 언급했 듯 성양산의 산세는 믿을 수 없이 험하다.
이렇듯 좁은 협로에서 암습을 당하다면 필패이리라.
사일검왕 한군비!
약관의 나이로 이니 점창파의 장로가 되었을만큼 후기지수 중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인 그는 잠시 목전의 상황을 정리하다가 질근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소.그럼 뒤를 부탁하오.”
그의 손이 오스러지게 움켜 쥐어진 연편이 여덟필 설리총의 등에 작렬했다.
“천제위대의 수하들은 한시도 마차의 곁을 떠나지 마라!그럼 출발한다.”
“존명!”
마차의 좌우로 각기 십명 씩,도합 이십인 전제위대 고수들이 긴박한 복명음이 끝날 때였다.
“타앗! 이럇!”
사일검왕 한군비는 미친 듯 팔두마차를 몰아 질주해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두- 퍽!
질풍처럼 질주하는 마차를 꿰뚫고 하나의 강전이 쏘아져 들지 않는가?
정확히 마차 안의 기셰민을 노리고 폭사되어온 강전,
실로 신기였다. 허나 그 찰나,
스윽......
검천의 앙상한 우수가 번뜩 허공을 스치며 강전은 그의 손아귀에 잡혀 부르르 떨었다.
실로 위기의 순간들......
조그만 늦었더라도 기혜민의 생명은 영원히 되찾지 못했을 것인데, 강전을 무심히 바라보던 검천의 노안이 돌연 폭풍을 만난 듯 떨리지 않는가?
“이......이런 미친 놈들!이것은 백야성의 척살자라 불리는 마마추혼대의 추혼마전이 아닌가?”
그렇다.
전체의 길이라야 불과 다섯 치에 불과한 묵빛 강전.
악마의 송곳니처럼 으스스한 살기를 흧뿌리는 그것은 분명 이땅에 존재하는 모든 호신강기를 종잇장처럼 뚫어버린다는 추혼마전이었다.
일명 백야성의 척살자로 불리는 마마추혼대-정도무림에 창천금궁대가 있다면 마도에는 마마추혼대가 있다.
하나의 활시위에 무려 열 다섯 개의 추혼마전을 실어 한꺼번에 쏘아낼 수 있다는 불가해한 능력의 소유자들만으로 구성된 마마추혼대.
그들의 소아귀를 벗어난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헌데, 그들이 왜 돌연 정도무림맹의 초정예를 향해 이리도 엄청난 짓을 자행하고 있단 말인가?
검천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미친 짓이다.그렇잖아도 어수선한 현 중원에 이건 기름을 붓는 격이다.
“......!”
“이놈!주천군!노부 검천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네놈을 그냥 두지 않겠다.”
분기탱천한 검천 그의 이글거리는 시선은 전면에 고정된 채 횃불같은 광망을 피워 올렸다.
두두두두-
그 순간에도 팔두마차는 광폭할 정도로 질주해 간다.
피피피핑!
추혼마전은 쉴새 없이 날아와 마차의 질주를 방해했다.
사일검왕 한군비의 등골에도 식은 땀이 연이어 맺힐 긴박한 상황.
그는 좌우를 따르는 자신의 수하들에게 다시 명을 내렸다.
“어서 진로를 뚫어라!그대들의 죽음은 나 한군비의 명예를 걸고 보잡해 주겠다.”
“대주님의 복명을 받듭니다.”
“저희들은 염려마시고 빨리 마차를......”
영기발랄한 천제위대의 젊은 무인들은 비장하게 외치며 각기 신겸합일로 날아 올랐다.
날아오르는 순간 그들의 목표는 이미 결정지어졌고, 그것은 곧 그들의 생명과 직결되고 있었다.
“후훗!백야성의 주구들이 감히 정도무림맹에 칼을 들이대다니......”
“크하하핫!네놈들이 무서워 이제껏 정도무림맹이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고 생각하느냐...천만에!”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옥수성화 기혜민,
정도무림 젊은 무인들의 꿈이요 우상인 그녀에게 화살을 날렸다는 사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다.
기왕에 맺어지지는 못할 꽃......
허나 언제고 그녀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가슴이 뛰놀지 않았던가?
“크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천제위대의 고수들은 알석균의 사이에서 교묘히 은신하고 추혼마전을 날리는 마마추혼대의 무리들을 연이어 베어 넘겼다.
허나. 그들의 희생 역시 적지 않았다.
“크윽......!”
한 명의 천제위대 인물이 온몸에 추혼마전을 맞고 고슴도치처럼 죽어갔다.
장렬한 희생이었다.
그는 동료들을 향해 비오듯 쏟아지는 추혼마전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낸 것이었다. 아무튼, 그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기혜민을 실은 팔두마차는 꼬리를 감추며 달려가고 있었다.
일단은 위기를 넘겼다고나 할까?
두두두두......
성양산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하나의 계곡,
양 쪽은 쳐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일 아득한 천장단애인데, 평소라면 한 번 쯤 좌우를 살피며 말을 몰았을 한군비이건만 지금은 무리였다.
(지독한 놈들!마치 지옥 끝까지라도 쫒아올 듯하군!)
한군비는 이마의 힘줄이 쿡쿡 불거낸 상태였다.지옥의 끈이아도 뽑아올 집요한 추적,
그렇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는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만약 기소저만 모시고 있지 않았다면......)
그 순간, 돌연히 찾아든 정적에 한군비는 자신도 모르게 말고삐를 당기고 말았다.
조용하다.
그토록 처절하던 비명도, 집요하게 추적하던 마마추혼대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심지어는 야조(野鳥)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계곡.
(음......왜 이리도 조용하단 말인가?)
더욱 불길한 예감이 한군비의 뇌리를 쥐어 짰다.
(설마 이놈들이 더이상 뽑아올 필요성을 못느꼈단 말인가......아니면 본맹의 졍예들이 모두 몰살......아니!그럴리가 없다!)
한군비는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고삐를 힘차게 잡았다.
“한대주!더이상 마차를 몰 필요가 없어요.”
청아한 음성과 함께 돌염 기혜민이 마차의 휘장을 올리며 밖으로 나서지 않는가?
그 뒤에는 친중하게 굳은 안색의 검천이 따르는데,한군비는 더없이 놀라 외쳤다.
“아니!아직 밖으로 나오시면 안됩니다......”
기혜민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아니예요.이제는 쫒고 쫒기는 연극을 마칠 때가 되었어요.”“무......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끔 한군비는 그런 기억이 있었다. 기혜민의 느닷없을 질문을 받고 쩔쩔 매던 때가......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판이하게 다르지 않은가?
그때는 정도무림이라는 철벽이 있어 기혜민을 보호했지만, 이곳은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과 검천,그리고 기혜민 이 셋뿐인 것이다.
헌데도 기헤민은 신비한 미소를 여전히 머금을 뿐이었다.
“조금 후면 절로 알게 돼요.그보다도 정말 멋지게 당했군요, 검천 할아버지.”
화살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검천 역시 의혹에 휩싸였다.
“무엇을 말이냐?”
“호호......조호산지제에 완전히 속았단 말이예요.기억을 돌이켜 보세요 할아버지.”
“......?”
“분명 본맹 소속의 고수들이 낸 비명은 세 번 뿐이었어요.우리를 암습한 자들은 우리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던거죠.”
“그래 맞다!처음에 두 번하고 나중에 천제위대 소속의 젊은이 하나......뒤에 쳐진 사람들은......?”
검천은 불신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분명 비명은 세 번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어떻게 뒤에 쳐진 인물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일순, 기혜민은 더욱 밝은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혜지로 빛냈다.
“호호!암중의 적이 노리는 사람은 바로 소녀 하나 뿐이기 때문이지요.그는 소녀만 원할 뿐 다른 것은 원하지 않아요.”
“너를 원한다고......?”
“그래요.뿐만 아니라 백야성내에서 검천 할아버지와 소녀까지도 이리 멋지게 속여 넘길 전략의 귀재는 그 한 사람 뿐이예요.”
“그라니......누구를 말하는 게냐?”
“삼공자인 우문생(宇門笙)!”
“천마잠룡 우문생!”
이번에 놀란 사람은 한군비였다.
-천마잠룡(天魔潛龍) 우문생!
대공자 일섬마도 사헌과 이공자 남궁은의 장점만을 취하여 탄생시켰다는 마도의 절대기재다.
그 순간, 문득, 기혜민의 뇌리에는 자신의 앞에만 서면 소녀처럼 양볼이 빨갛게 붉히던 한 소년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직 참는 법만 배우던 시절......
이제 고작 열 두어상릐 소년 소녀에게 그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천예원!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들만을 졸업시키던 천장의 가문,
(훗......그것은 차라리 치고 받는 무도의 단련보다 참기 어려웠지.그 드넓은작업실을 청소하려던 어른이라도 허리를 못쓰게 될 정도였지!)
첫눈이 내려 음지(陰地)엔 아직 잔설이 쌓였는데,
기혜민은 그 잔설에 반사되어 더욱 눈부신 빛을 발하는 햇살을 영롱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순번제로 몰아가며 혼자해야하는 작업실 청소......하지만 내가 청소할 때마다 너는 몰래 나를 도와주었지!)
(들켜서 벌을 설때면 더욱 뺨을 붉히던 말없는 소년......하지만 오늘의 일은 너무 했어.이것은 너답지 않은 짓이란 말야, 그렇지 않아 문생 ? )
그때, 묵묵히 상념에 빠진 기혜민을 바라보던 한군비의 운가에 일순 고통스런 기색이 어렸다.
(그렇다면 우문생이란 자는 소저를 사랑하고 있던......)
차마 더 이상 이을 수가 없었다.
한군비에겐 자신의 생명이자 그 이상의 무엇이 되어버린 기혜민이 아니던가?
사일검왕 한군비의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소저의 말이 사실이더라도 오늘의 사건은 결코 좌시할 수가 없소이다 .놈은 아예 본맹을 허수아비로 여겼소!”
만약 시선만으로도 살인을 할수 있다면 천마잠룡 우문생은 이미 천만 조각으로 난도질 되었으리라.
기혜민은 여전히 배시시 웃었다.
“한대주님은 몹시 화가 나신 듯 하군요?”
“그럼 소저는 저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오?”
한군비의 어조는 터무니 없이 높고 강렬했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질투라고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앟았다.
(한군비야......너는 정말 얼이 빠졌구나!)
“죄송합니다. 소저. 나도 모르게 그만 언성이 좊아졌소이다.”
“아니예요.내가 한대주였더라도 그랬을 거예요. 이제 그만해요. 그가 왔으니까요.”
“그가?”
순간이다.
스스스스슷......
돌연, 계곡의 양 옆 단애 위로 무수한 흑영들이 나타나 가득 메우질 않는가?
가슴에는 하나같이 섬뜩한 핏빛 수실로 마(魔)작 수놓아져 있고,어깨에는 묵빛 강궁을 맨 흑영들중에서 유독 한 명은 눈보다 흰 백의를 단아하게 걸치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검은 흑발에 백미(百眉)가 인상적인 창백한 아름아움을 가진 절세미장부......
천마잠룡 우문생이었다.
아니, 천마잠룡 우문생으로 변신한 화천후라야 옳은 표현이리라!
순간, 장내는 다시 살벌한 긴장으로 팽팽해 졌다.
“......!”
“......!”
검천의 손이 부지불간 자신의 애검 손집이를 더듬을 때,기혜민의 청아하고 그윽한 욱음이 먼저 장내의 쏘아진 살같은 긴장을 풀어냈다.
“거기 오신 분은 혹,백야성의 삼공자 우문생이란 분이 아닌가요?”
“맞소, 혜민......정말 오랜만이오.”
“그렇군요. 꼭 칠년 만인가요?”
말을 잇던 기혜민은 가볍게 귀및 머리를 쓰다듬어 올렸다.
그 고혹적인 자태!
장내의 모든 인물들은 순간 모든 생각을 잊어버릴 정도였다.
우문생의 눈가에 엷은 아니 화천후는 짐짓 백미를 일그러 뜨렸다.
“더욱 아름다워졌구료,혜민......그대의 모습은 가히 폭발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소.”
“호호......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헌데 무슨 일이죠?이렇듯 소녀를 궁벽한 성양산까지 초청한 것은......”
순간, 검천의 입에서 엄청난 노갈이 폭발하듯 튀어 나왔다.
“이......이런 되지 못한 놈!백야성의 삼공자라면 염라대왕도 피해 가는지 시험해 보겠다.”
번쩍!
그의 검집을 벗어난 검을 순식간에 모든 대기를 차단하며 단에 위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허나 다음 순간,
“검천 할아버지 멈추세요......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예요.”
돌연 들려온 기혜민의 전음에 일련의 동작이 거짓말처럼 멈추어졌고,짙은 의혹이 잠긴 그의 고 막에 연이어 기혜민의 전음이 들려왔다.
“저들의 손을 잘 보세요.그들의 손에 들린 보잘 것 없는 쇠뭉치는 바로 사사최강의 화기라고 일컬어지는 비격멸천뢰(飛擊滅天雷)예요.”
“비격멸천뢰!”
“할아버지는 저를 믿으시죠?그렇다면 모든 것을 소녀에게 맡기세요.”
신비한 미소 속에 한 번 눈을 찡긋해 보인 기혜민은 화천후를 항해 차갑게 굳어진 시선을 던졌다.
“그렇다해도 너무 무례하군요!백야성의 삼공자라면 좀 더 당당한 방법으로 소녀를 초청할 수 있었을텐데......”
“그 점은 사과하겠소.허나 거부할 생각은 마시오......본인의 수하들 손에 들린 물건은 당신들 셋 뿐만 아니라,이 께곡 전체를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으니까.”
“호호......협박인가요?”“눈 앞에 보이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오.선택의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소.”
화천후의 시선은 무섭게 가라 앉아 있었다.
기혜민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화천후가 말하는 의도는 너무도 명백하지 않은가?
-사랑의 인질이 되기 싫으면......죽을 뿐이다.!
얼마 후, 기혜민은 나직한 탄식을 터뜨렸다.
“칠 년 전의 당신 마음이 남아 있다는 것이 정말 놀랍군요......하지만 우리의 앞에 놓인 장벽은 너무 두터워요.”
“그랬기에 이런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소.”
“알겠어요......헌데 나만 가는 것인가요?”
우문생은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본인이 당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천하의 누구라도 몰라야 핲뒤가 맞지 않겠소?”검천의 분노는 그 순간 다시 폭발하고 말았다.
“이 애송이 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허나 어쩌랴!
자신 혼자의 몸이라면 설사 한 줌 가루로 화해 흩어진다해도 단애 위로 솟구쳐 오르겠지만, 기혜민 - 비록 친손녀는 아니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보육을 비격진천의 제물로 삼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때, 기혜민의 암울한 탄식성이 장내에 흘렀다.
“당신은 내가 정도무림맹에 도착하지 않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나요?”
“물론이오,엄청난 파문이 중원전역을 강타하리란 것은 삼척동자라도 추리해 낼수 있소......허나 본인에게는 그에 대한 대비도 완벽하게 되어 있음을 잊지 마시오.”
“좋아요......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당신을 따라갈 수밖에......”
“아니,아직 한 가지가 더 남았소.”
“무슨......”
“당신은 상관 없으나,검천 노선배와 저분......사일검왕 한애협은 만일을 대비해서 혈도를 점해 놓겠소.”
결국, 그들의 무공을 페지시킨다는 말이 아닌가?
다시 발작하려는 검천과 한군비의 귀에 기혜민의 나직한 옥음이 들렸다.
“분노해도 소용없어요.그의 밀에 따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예요.”“당신은 여전히 총명하구료......하긴,그랬기에 당신을 향한 나의 열정이 신간이 흐를수록 오늘의 사태를 야기시텼지만......”
“흥!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듣기 좋은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진실이오......굳이 믿어 달라고는 않겠소.”
팟!팟!
두 마리의 기음이 돌리며 검천과 한군비의 두 눈은 정기를 잃고 희미해 졌다.
차라리 피를 토하고 죽는 것보다 더 극심한 상황을 용케 참아내는 노소(老小)였다.
다음 순간, 화천후의 짧은 명이 떨어졌다.
“저분들을 정중히 모셔라.”
“존명......을 받듭니다.”
단애 위의 흑영들은 순식간에 날아 내려와 검천과 한군비를 받쳐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내 잔설 덮힌 성양산에서 신형을 감추었다.
이제 남은 흔적이라곤 화천후의 말마따나 전무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백야성의 척살자로 불리는 마마추혼대의 독문강전 추혼마전은 그대로 세구의 시신에 꽂혀 있지 않은가?
차후의 대파란을 예고함이런가?
성양산의 하늘은 폭설이 내리려는 듯 갑자기 먹장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우중충하게 죽은 하늘,
기혜민의 의미모를 한 마디가 외롭게 허공을 맴돌았다.
-하지만 너무했어,이것은 너답지 않은 짓이야. 문생......
* * *
휘-이이잉-!
바람(風)이 분다.
한 해도 거의 마무리하는 길목에 계절을 스치는 바람은 날이 선 비수처럼 섬뜩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협곡이다.
부강협(釜岡峽).
전설에 의하면 태양신 염제는 약초에 관심이 많아 그 자신이 각종 약초의 맛을 보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하루에도 70번씩 중독이 되었다고 한다.
부강협에는 당시 그가 약을 맛보았다고 하는 솥이 있다.
바로, 기혜민이 납치된 성양산과는 불과 오십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부강협곡은 황량했다.
앙상한 나무는 바람 속에서 웅웅 울음을 토하고 서걱대며 바람에 몸을 부대끼는 갈대와,갈대 끝에서 하얗게 무서지는 햇살의 잔영이 더욱 그런 느낌을 주는 곳이다.
휘이이이-잉!
그 바람과 창백한 햇살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청년은 갓 벗어난,이제 막 연륜이 베이는 그런 나이였다.
허나,그가 일신에 갈의를 걸치고 우뚝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산(山)처럼 웅휘로운 기상을 풍겨 내고 있었다.
특히,전형적인 무인의 슬픈 고집이 맺혀있는 각진 턱과,정명한 오관에 옥(玉)처럼 맑은 피부며...... 흐르는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날리는 모습은 태산 웅장함과 대해의 침몰과 같은 고요함을 느끼게 하는 청년이었다.
평생을 그 무엇에도 놀라지 않을 듯한 청년의 눈(眼).
“......!”
헌데, 무엇인가?
청년의 전면만을 지그시 응시하는 시선은 지금 무섭게 파문이 일고 있지 않은가?
“우문생......그놈이 아가씨를 납치했다고?”
청년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경악보다는 오히려 짙은 의혹으로 잠겨있다 표현애야 할 청년의 시선이 머무는 끝에는 한 명의 중년인이 부복해 있었다.
“하오나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장소는 성양산의 회운곡!납치한 흔적은 모두 제거했으나. 다행이도 현장에서는 추혼마전이 발견되었읍니다.”
일순, 청년의 턱이 치켜들려졌다.
“무엇이 다행인가요?”
“추혼마전을 놈들이 미처 제거하지 않아......아가씨께서 납치된......”
“그대는 언제부터 그렇게 말이 많아졌나?”
“옛? 알겠읍니다!”
“불필요한 추리는 하지 말게. 그러는 편이 복잡한 삶을 사는 데 있어 하나라도 짐을 더는 것이니까.”
“명심하겠읍니다. 다섯째 어르신! 그리고 이 사실은 백야성의 세력권에 잠입해 있는 본맹의 첩자들로부터도 확인이 되었읍니다.”
다섯 째 어르신 - 중년인의 어조에는 깊은 신뢰와 존경심이 담겨 있다.
“으음......”
청년은 근처에 있는 바위를 의자삼아 털썩 주저않았다.
“그 외 보고할 사람은 없는가?”
“없읍니다. 다섯 째 어르신.”
“알겠네. 그만 가보게.”
“그럼......”
여전히 얼굴을 들지 않은 채 중년인이 물러갈 때, 청년은 두툼한 손으로 완강하게 각진 턱을 한 번 쓸어올려다.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천마잠룡 우문생. 그놈은 드토록 미련한 놈이 아닌데.”
정도무림맹의 서열 오위(五位)이자,정 도무림맹이 가지고 있는 힘의 전부라 해도 좋을 여섯 명의 영주(領主) 중 다섯 번째 인물,
-무림옥기린(武林玉麒麟) 상관영호!
그렇다.
마도의 백야성에 네 명의 공자가 있다면 정도무림맹에는 여섯 명의 영주가 있다.
팔황제군 기천악을 반석처럼 옹위하여 사상 최강의 전력을 갖추어 놓았다는 신화의 창조자들인 육영주......
제일영주 -천노(天老) 염붕비!
제이영주 - 지노(地老) 백군학!
특히, 이 둘은 전설의 신비역 천지쌍부의 부주로 알려져 있거니와,실제 그들이 이제껏 손속을 펴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팔황제군 기천악을 한 단계 능가할지도 모든다는 말이 공공연히 정도무림에 나돌고 있는 실정이었다.
제삼영주 - 설산성녀!
바로,기혜민이 지난 이년래 무학을 연성했던 설산 빙궁의 궁주(宮主)를 말하는 이름이다.
허나,그녀는 세속의 명리를 버린지 오래여서 실상 정도무림맹의 제삼영주의 직위는 현재 공석이었다.다만 기혜민이 이번에 돌아오면 그녀의 사부인 설산성녀의 직위를 이어받게 되리라는 것뿐......
제사영주(第四領主) - 광풍선옹(狂風仙翁) 목리공!
현 세수는 물경 백 오십여세로 나이로 서열을 매긴다면 목리공이야말로 당연히 일위다.
또한, 그의 외호가 말해주듯 열화와 같은 성격으로 악(惡)을 원수처럼 여겨 그의 손에 걸린 마도인들은 뼈조차 추리지 못했다.
제오영주(第五領主) -무림옥기린 상관영호!
백야성과 정도무림맹의 경계지점이자 정도의 방어 전략상 가장 요충지인 이곳 하북 땅을 관장하고 있는 인물로......
지닌 바 지혜는 백야성의 이공자 남궁은과 비교되고,뛰어난 담력과 침착함은 오히려 기천악을 능가한다.
그가 약관의 나이로 이곳 하북땅을 맡은 뒤,백야성과 몇번에 걸친 크고 작은 분쟁은 모두 그의 수완에 의해 깨끗이 처리되었다.
제육영주(第六領主) - 십전서생(十全書生) 궁소유!
기이하게도 그는 정도인물이 그토록 외면하던 하오밀문 출신이다.
잡기(雜技)!
궁소유가 못하는 일과 못다루는 물건이 이 땅위에 존재할까?
팔황제군 기천악은 모든 정도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궁소유를 제육영주라는 어마어마한 직위로 발탁하며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만약, 중원정도가 외세에 눌려 캄캄한 암흑의 나락으로 빠졌을 때 유일한 불빛이 바로 궁소유의 몸에서 흐를 것이다.
노부의 이 말이 틀린다면 노부는 스스로 두 눈을 파내도 할 말이 없다.
이들 육영주는 가히 정도의 여섯 개의 하늘이라 일컬을 이들이 있으므로써 태양은 오늘도 떠오른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일그러진 무림옥기린 상관영호의 검미는 여전히 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내 스스로 수하에게는 불필요한 상상을 하지말라고 말했지만 우문생! 네놈이 지금 나의 앞에 있다면 불문곡직하고 턱뼈를 추려놓았을 것이다.”
퍽! 와스스스......
그가 깔고 앉아있던 암반이 떡가루처럼 부서져 한풍에 흩날렸다.
“이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도 잘알고 있을 네놈이......게다가 현장에 흔적까지 그대로 남겨 두다니.”
폭죽처럼 터져 오르는 살기는 찬백한 햇살을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다.
한 걸음 내딛는 발밑에선 움푹 지면이 패여져 나갔다.
분노인가? 다시 한 걸음 내딛는 상관영후의 무릎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하긴 이건 처음부터 잘못 짜여진 각본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네녀석이 아가씨와 천예원의 동기라는 사실이......”
그는 알고 있었던가?
문득 시선을 드는 상관영호의 눈에 아스라히 성양산의 산자락이 묻어났다.
“그렇더라도 네녀석은 정(情)의 장벽을 무난히 뛰어넘을 인물로 나 상관영호는 믿었건만.”
정말 우문생이 눈 앞에 있었다면아마 턱뼈는 산산조각이 났으리라.
그것은 분노이기 이전에 믿음에 대한 배신이었기 때문이다.
“후후. 그러는 네녀석은 내 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정도무림맹 전체를 적으로 삼기보다는 나 상관영호를 분노케 하지 말라는......”
-정도무림맹 전체를 적으로 삼더라도 나 상관영호를 분노케 하지 마라!
어느덧 무림옥기린 상광영호의 신형은 대왕산의 협곡을 거의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도 무심하여 그가 무슨 생각은 하고 있는지를 짐작하기란 불가능했다.
“일단 맹주께 먼저 보고하고 내가 직접 낙양분단으로 갈 수밖에.”
흘러 나오는 어조 역시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무(無)의 음성.
휘이이잉!
초겨울의 한충 치고는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바람도 상관영호의 음성에 비하자니 차라리 뜨거웠다.
그리고, 비스듬히 기우는 창백한 햇살이 그의 완고한 얼굴 위로 사정없이 내려 앉았다.
그는 상관영호로 정도무림맹의 다섯째 어르신이었다.
* * *
극히 고풍스럽고 중압감마저 느끼게 하는 하나의 정자(亭子)는 백야성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춘삼월이면 온갖 기화이초의 망향과 정자 아래 자리한 조그만 호수에서 뛰노는 잉어를 볼 수 있으련만 지금은 겨울(冬)이다.
벌거벗은 나목의 가지엔 눈꽃만이 피어있을 뿐이었다.
헌데, 계절의 감각도 잊었음인가?
딱......딱......
정자에서는 유난히 한가로운 바둑들 소리가 울려나오고 있었다.
주천군과 천향서시 주현월이었다.
납덩이를 거꾸로 매달아놓은 듯한 침묵 속에서 연신 떨어지는 바둑판은 거의 흑백돌로 메워져 있어 이제 종국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딱!딱......
두 사람의 기풍(碁風)은 서로가 특이하기 그지 없었다.
주현월은 여인의 몸 답지 않게 있는 성격 그대로 상대를 숨쉴 틈조차 주지 않고 무섭게 몰아붙였고, 반면에 주천군의 기풍은 주현월의 예봉을 피해 느긋하게 응수하다간 조금의 헛점만 보이면 마치 천군만마가 질타하듯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조손녀 사이라고 봐줄리 없는......
대국의 승패는 무차별 가격하는 주현월의 굳어진 승세였다.
“......!”
주천군의 노안은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모습이 역력했다.
미칠 노릇이 아닌가?
한수만 물려달라고 말해봐야 들어줄 리 만무한 주현월이었지만, 그런 말을 하나다는 자체가 도시 난감하다.
주천군은 한동안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다간 돌을 들어 밪상에 놓으려다가는 거둬들였다.
그러기를 몇차례......
문득,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현월이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성공 했을까요?”
“글쎄다......”
“저는 그가 꼭 성공했으리라 믿어요......!”
느닷없이 무슨 소린가?
더욱 주현월의 옥음에는 어떤 안타까움의 빛마저 어려있지 않은가?
주천군은 다시 반상으로 가져가려던 돌을 거두며 힐끗 그녀를 응시했다.
(녀석......하긴 그놈이 마정에 들어간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으니......)
보름(十五日)......
바로 능운비를 말함이 아닌가!
“그 분에게서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져요......무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 힘은 여지껏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임에 분명해요......”
주현월의 몽롱한(?) 독백이 끝날 때,주천군의 시선은 그녀를 뛰어넘어 어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자와 십여 장 쯤 떨어진 넓직한 암반 위에 한 명의 사내가 다정히 정좌하고 앉아있지 않은가?
미시(未時)를 갓 넘긴 겨울햇살에 반사되는 피부가 묵철(墨鐵)로 빚어놓은 성(城)처럼 강인했다.한 점 구산도 느낄 수 없는 탄탄한 어깨와 등......
거기엔 온통 거대한 묵룡(墨龍)이 문신인 양 새겨져 있어 완벽하게 균형잡힌 체격과 함께 보는이를 감탄케 만들었다.
짙은 두 눈썹에 멋지게 늘어진 구레나룻과 외고집으로 꽉 다들린 입술,
실로 전형적인 무인(武人)의 상(相)을 엿보게 하는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
눈(眼) - 무섭게 이글거리는 청년의 시선은 자신의 무릎을 향해 떨구어져 있었다.
도(刀).
한 자루 거무튀튀한 묵철의 도를 사내는 무릎 위에 놓고 있었던 것이다.
“......!”
헌데, 사내를 바라보는 주천군의 노안이 안타까움으로 물드는 것은 어쩐 일인가?
(바보같은 녀석......조금이라도 융통성을 가지고 살면 지금보다는 나았을텐데......쯧!)
순간, 그의 고막을 파고드는 앙칼진 음성이 들렸다.
“할아버지! 칼에만 미친 멍청이를 왜 쳐다 보세요?”
주천군은 여전히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래도 너의 대사형이다. 이놈아.”
그렇다면 일섬마도 사현을 말함이 아닌가?
이제껏 그 누구도 대공자 일섬마도 사헌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능력을 알지 못했다.
허나, 주현월은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튀어나온 입술을 거두어 들일줄 몰랐다.
“흥!대사형이면 뭘해......칼에만 미쳐가지고......”
동시 그녀의 눈 앞에 환상처럼 떠오르는 하나의 얼굴이 있었다.
수려하다 못해 아름답기까지한 한 사내의 얼굴......
능운비였다.
“휴......”
탄식처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왜일까? 단 한번 본 그 얼굴이 이토록 얼음덩어리같은 마음을 메워오는 것은......
주천군은 알 수 없다는 듯 가볍게 혀를 찼다.
“쯧쯧......”
그의 혀차는 소리에 그렇잖아도 곱지 않았던 주현월의 눈꼬리가 샐쭉 찢어졌다.
“어서 두세요! 신경쓰지 마시고......”
“허허......어쨎든 신기한 일이다.네녀석이 어떻게 그놈의 앞에서는 얼굴을 붉혔는지......이래서 세상은 오래살고 볼 일인가?”
“할아버지!정말 이러실거예요?”
그녀에게는 마도대종사라는 지고한 위엄도 소용이 없었다.
“알았다......알았어......허허.”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 때문이련가?
그는 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녀가 하늘의 태양을 따다 달라고 하면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공자 사헌은 여전히 망부석인 양 움직임이 없었다.
흡사 잘 다듬어 놓은 것 같은 화강암을 보는 듯한 얼굴......
과연 저런 얼굴을 가진 사내들이 최고라 생각하는 가치들은 무엇일까?
주현월은 갑자기 배시시 미소를 피워 올렸다.
“그가 정말 성공해서 나오면 어쩔 생각이시죠?”
“허허. 그 놈의 손에 마마혈번이 들려 있으면 당연히 절을 해야지.”
“호호!그가 나타나면 할아버지나 저나 졸지에 윗어른 한분을 모셔야겠네요?”
그때였다.
마치, 환청(幻聽)처럼 형언할 수 없는 마력이 실린 한 줄기 낭랑한 음성이 장내를 흘러들지 않는가?
“하하하. 소생에게 굳이 절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
주천군과 주현월의 입술을 꿰뚫고 동시에 탄성이 발해질 때,
대공자 일섬마도 사헌의 무릎 위 애도(愛刀)로 향했던 시선도 벼락처럼 들려지며 맞은편석벽을 바라봤다.
석벽은 그것은 까마득산 천장단애인데,분명 음성은 그곳에서 흘러 나왔다.
주천군은 자신도 모르게 노구를 벌떡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이다.
콰콰쾅......!
고막을 찢을 듯한 엄청난 벽력음과 함께 거대한 석벽이 종잇장처럼 터져 나가질 않는가!
쿠르르르르-
태풍 열 개를 한꺼번에 묶어놓은 듯한 바람이 인 것은 동시였다.
주천군이 서 있던 정자의 지붕이 통째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눈깜짝할 사이에 날아가 버렸다.
“아니?”
주천군의 전신은 이미 극렬하게 떨리고 있으며 자색의 기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천마삼천지예 중 최극강인 천마자전기!
꽈꽈꽈꽝!
석벽이 폭발하면서 처져나온 돌조각들은 자색기류에 닿기 무섭게 모조리 가루로 변해 날려가지 않는가?
대공자 사헌 역시 자신의 몸을 지탱하기 위해 이미 전신의 공렬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상태였다.
얼마 후, 미쳐버린 바람과 눈 앞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자욱했던 흙먼지와 돌가루가 가라앉고 장내의 광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먹물보다 검은 흑의를 걸친, 그리하여 너무도 해맑은 오관과 창백하리만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한 사내의 모습이 모주의 망막에 빠르게 와 박혔다.
“아니?”
“저것은......?”
주천군을 비롯한 모두의 눈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부릅떠졌다.
깃발이다.
폭 다섯 치에 높이 반자 가량의 혈번 하나.
깃봉은 상아이고, 깃폭의 전면에는 황금빛 수실로 마자가 수놓아져 있으며, 뒷면에는 하늘을 가리는 악마의 손이 섬칫하게 그려진 깃발이 사내의 손에 들려있기 때문이었다.
-마마혈번!
그 찬란한 위용은 장내를 질식할 듯한 중압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마도의 자존심을 영원히 지속시켜 줄 마마혈번이 마침내 나타난 것이었다.
주천군은 일순 격정으로 전신을 떨었다.
“오......마마혈번......”
가지고 싶어도 마정을 뚫을 자신이 없었던 주천군이였기에 마마혈번을 대하는 감동은 더욱 컸다.
주현월이 느끼는 감정의 파문은 조금 색달랐다.
(아......저 모습......)
유난히 파아란 하늘을 머리에 이고 표표히 흑의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는 저 사내,
(무슨 사내의 모습이 저리도 아름답지?)
능운비는 소리없이 주천군의 앞으로 다가왔다.
묘한 침묵이 앙금처럼 깔리는 가운데,주천군의 두툼한 입술이 먼저 열렸다.
“그것이 마도의 상징인 마마혈번인가?”
“한 치도 어김없이......”
“그렇다면 본좌는 네녀석에게 구배지례를 해야겠군.”
능운비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깃발은 이제 마도의 것입니다.”
주천군의 눈이 그 순간 불신으로 휩떠졌다.
“그럼 저 석벽 안에서 네녀석은 단지 음파만으로 이런 엄청난 위력을 보였단 말이냐?”
그는 조건없이 마마혈번을 되돌려 받는 사실보다 더 놀라고 있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단지 환청으로만 여겼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다섯 자는 됨직한 석벽이 종잇장처럼 터져나간 일이며 정자의 지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능운비의 다른 무공 탓이려니 생각했었다.
헌데, 우려했던(?)그 일이 이제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는가!
단지 형언할 수 없는 마력이 담긴 음파 한만으로 엄청난 사태를 야기시킨 능운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담담히 웃었다.
“하하......알고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외다,성주.”
“응......?”
“소생은 전일 공작대가람의 천년비원이 담긴 공작불타소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요....허나 당시에는 내공이 조금 모자라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읍니다.”
“허면 ......마정에서 또 다른 기연을......얻었단 말인가?”
“여기.”
능운비는 품속에서 하나의 금합을 꺼내 주천군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속에는 이 땅위에 최초의 마도대종사였던 마성천자께서 남기신 내찬과 마극참수기가 들어있읍니다.헌데......그 중 마극참수기 안에 공작불타소의 위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절공이 들어있읍니다.”
“......?”
“이름하여 천종마후(天宗魔吼)! 팔성의 경지만 이루어도 능히 천하가 성주님의 발 아래 있을 것이오.”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아니, 세상 누구라도 믿을 사람은 없었다.
허나, 조금 전 눈앞에 펼쳐진 광격으로는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주천군은 내심 침음성을 흘리며 금갑을 받아들었다.
금갑의 무게는 실상 삼척동자라도 들 그런 무게였다.
허나, 금갑을 받다든 주비가의 손은 감당하기 어려운 물체를 들었을 때처럼 떨리고 있었다.
짜릿한 전율이 그의 전신 팔만사천 모공을 일시에 파르르 경련하게 만들었다.
능운비는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 마마혈번마저 주천군의 앞에 내밀고 있었다.
“성주......이것도 받아 두십시오.”
순간, 주천군은 느릿느릿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본시 모든 물건에는 그 임자가 있는 법......이제 마도의 참주인은 바로 자네여야 하네.”
“하하!저는 철혈전후 려군 누님의 후계자임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성주님의 말씀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읍니다.”
“그 고집마저 철혈전후를 쏙 빼다 닮았군.”
주천군은 입사를 묘하게 일그러 뜨리며 웃었다.
“흐흐. 자네는 분명 철혈전후 초려군의 후계자로 만족한다고 말했겠다?”
“예.”
“좋아. 헌데 어쩔 셈인가?”
능운비는 의아했다.
“무엇을....말입니까?”
“흐흐.....자네가 노부에게 준 이 물건들 말임세. 마선천자의 내단이라면 능히 삼백 여년의 공력이 담겨있을 것이고, 거기에 마극참수기를 완벽히 연성한다고 하면 철혈전후 초려군 쯤은.....”
묘하게 말끝을 흐리는 주천군의 말인즉 그것은 능운비에 선심으로 인하여 오히려 철혈전후 초려군의 참담한 패배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뜻인데,
주현월은 순간 등골이 오싹하는 전율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할아버지는 한번 내뱉은 말은 꼭 실천하는 성미다.....안돼요! 당신은 할아버지의 말씀을 승낙하셔야 해요!)
장내는 순식간에 싸늘한 냉기로 얼어 붙었다.
휘류류류!
차갑게 굳은 바람이 문득 능운비의 흑의자락을 다시 감아올렸다.
그는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담담한 음성을 흘려내고 있었다.
“그것은 누님의 운명입니다! 무인(武人)인 이상 피할 수 없는.....”
대답은 간단했고 명쾌했다.
“으음......”
오히려 말을 건넨 주천군이 어금니시린 신음성을 토해낼 정도였다.
주천군은 이내 흔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핫! 실로 노부는 평생 처음 들어보는 통쾌한 말일세.... 좋아! 좋아.....”
무엇이 그리 좋다는 것인지, 주천군은 주현월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ꠏ어떠냐? 점점 쓸만한 놈이지 않느냐?
주천군의 눈짓은 분명 그런 의미였다.
그때였다. 돌연 이제껏 망부석처럼 침묵만을 지키고 있던 대공자 사헌이 저미한 어조로 말문을 여는 것아 아닌가?
“그대가 능운비인가?”
여전히 묵철로 빚은 듯 감정이라곤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다.
능운비는 그제야 서헌을 의식하고 내심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무(武)에 미친 사람들을 또 한명 보는군. 저 기도는 자신이 염원하는것을 이루지 못할바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한 눈에 사헌을 알아보았다.
사헌은 집도 없는 묵빛 도를 말없이 가슴 앞으로 끌어 올렸다.
그것은 명백한 도전의 자세였다.
주천군의 시선은 기이하게 변했고, 반면 능운비는 가볍게 점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도전(挑戰)으로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위인. 피할 수 없는...... 아니 피하지 않는 것 또한 나 능운비에 숙명.)
능운비는 자세를 바로했다.
대공자 사헌,
“......”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눈빛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일상의 일과를 행하는 사람자신의 도를 눈 앞에 수직으로 세웠다간 능운비를 향해 곧장 내뻗었다.....
살기(殺氣)는 없다.
일체의 소리도 형체도 없다.
그는 그저 단순히 도를 앞으로 뻗었을 뿐이었다.
능운비에 얼굴이 일순 난감해졌다.
(저 자세는 처음부터 양패구상을 의식한 도막(刀幕)을 형성하는 것.)
양패구상을 의식한 도막의 형성!
장내는 순식간에 그 누구도 풀어낼수 없는 일촉즉발의 난국으로 빠져들었다.
* * *
중원(中原) 밖을 중화인(中華人)들은 일컬어 변황(邊荒)이라는 한 말로 표현한다.
변황......
확실히 이곳은 중원과는 다르다.
종족(種族)도 다르고 기후(氣候)와 풍토(風土)도 다르다.
가장 큰 차이(差異)라면 문화(文化)와 생활방식(生活方式)이 다른 것일 것이다.
또한, 중원(中原)이 수천 년 동안 한족(漢族) 단일(單一)로 국가를 이뤄온데 반해, 변황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수많은 국가들이 들어서고 망해 갔다.
수많은 민족(民族)과 국가가 명멸(明滅)해 가는 곳이 바로 변황이다. 그 중 천축(天竺)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곳도 예외없이 분란의 와중에 휩싸여 하루도 피바람이 불지않고, 난도질 당한 시체가 뒹굴지 않는 날이 없었다.
<뇌정마찰(雷霆魔刹)>
천축무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혼란의 근원지(根源地)다.
그 분란의 중심엔 한명의 아수라(阿修羅)가 존재한다.
-암흑제석천(暗黑帝釋天) 발타!
그는 천축무림을 하나의 색(一色)으로 통일할 야망을 꿈꾸고 있었다. 오직 검은 색(黑色)의 암흑으로 칠하려는 아수라의 화신.
그의 의도는 거의 충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저 드넓은 천축의 땅에서 극히 일부분만 제외하고는 온통 시커멓게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다섯곳만이 남아 암흑의 날에 광명의 빛을 뿌리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희미한 빛이었지만....
<천축오성천(天竺五聖天)>
-천기성탑(天機聖塔).
-패왕전사단(覇王戰士團).
-포달랍궁(抱達拉宮).
-홍황합밀원(洪黃合密院).
-무적도궁(無敵刀宮).
다섯줄기의 희미한 빛이었다.
천기성탑은 천축오성천 중 가장 빛나는 머리였다.
삼백년 전, 천축오성천이 천축무림의 패권을 잡으려 일대 격돌이 있었다.
장장(長長) 천일(千日)에 걸친 전투 끝에 결국 승리(勝利)는 천기성탑으로 돌아갔다.
그 격돌로 인한 피해는 막대했다.
당시 천기성탑의 주인인 천기성자(天機聖者)의 주창으로 천축오성천은 형제(兄弟)의 의(義)를 맺었다.
이후(以後), 이들 천축오성천은 천축무림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고 평화를 지속해 왔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지금 천축무림에서는 짙은 전운(戰雲)이 감돌고 있었다.
불문(佛門)의 발상지인 천축에 뜻밖의 마수(魔手)가 뻗쳤다.
십년전 벌어졌던 대뢰음사와 소뢰음사의 패권 다툼 속에서 아수라의 마역인 뇌정마찰이 탄생했고, 그 서막으로서 공작대가람의 천명의 비구니가 욕망의 제물로 바쳐졌다.
그후 십년.....
어둠의 장막 속에서 은밀하게 세력을 확장해오던 뇌정마찰이 본격적으로 악마의 발톱을 드러낸 것이다.
천축 최대의 불문성지(佛門聖地)인 대불연화사의 멸망은 새로운 파멸의 시작이었다.
-북천신문(北天神門).
-대천불사(大天佛寺).
-극천환밀교(極天幻密敎).
-설신궁(雪神宮).
피(血)의 대행진(大行進)!
언제 멈춰질지 모르는 혈의 행진은 끊임없이 천축을 강타하고 있었다.
나뒹구는 것은 사람의 시신(屍身)이요, 숨을 들이 쉬면 나는 내음이 곧 혈향(血香)이었다.
그때, 천축오성천의 천주(天主)가 한 자리에 모였다.
당대의 천기성탑주인 천기성황(天機聖皇)이 천룡후(天龍吼)를 펼치면서 분연히 일어섰다.
-무림(武林)이 있음은 곧 강호인(江湖人)의 안위를 돌보는 것! 어찌 악마(惡魔)의 발톱이 무림을 유린하는데 보고만 있겠는가? 형제(兄弟)들이여. 일어서라! 악마의 무리들을 천축에서 몰아내리라!
그러나, 의기(義氣)만 높았을 뿐이었으니……
* * *
“한 잔 마세겠소?혜민.”
“혜민?훗......”
그녀는 살며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곳은 백야성의 하남지부다.
가히 나는 새라 할지라도 숨어들지 못할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는 하나의 정실에 그들은 마주앉아 있었다.
남(男)과 여(女),
바로 이곳의 주인인 우문생, 아니 화천후와 옥수성화 기혜민이었다.
정실의 분위기는 고아한 가운데 기품있게 꾸며져 있어 더욱 포근했고......
술(酒),
산해진미는 아닐지언정 맛깔나는 주안상이 차려져 있어 화천후와 기혜민의 사이에는 아무런 벽도 없는 듯했다.
기혜민이 이곳에 온지도 벌써 십여 일 째,
허나, 오늘같은 분위기의 만남은 처음이었다.
우아하게 웃는 기혜민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화천후는 의아했다.
“왜 웃소?”
기혜민은 귀엽게 눈을 흘겼다.
“......!”
“호호!그리고 역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좋지않은 모양이야. 소꼽친구끼리도 이렇듯 무게있게 말해야 하니까.”
그제야 화천후는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다.
“너는 여전히 나를 이기는구나.”
기혜민이 발그레한 볼을 들며 술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소린 그만하고 이제 한잔 따라줘.”
“그래.”
찰랑......찰랑......
넘칠 듯 술잔이 채워지고,술잔을 넘기는 입은 꽃잎보다 예쁘다.
분을 바른 듯 희고 붉은 얼굴에 떠오르는 달콤한 웃음......
술이 썼던 탓일게다.
기혜민의 신월(新月)같은 아비가 살짝 찡그려내는 미태는 보는 사내의 눈을 멀게한다.
화천후는 나직한 탄식을 불어냈다.
(정말 예쁘군......문생의 괴로움은 너무나 당연했다!)
문득, 우문생을 생각해낸 그의 얼굴이 순간이나마 어두워졌다.
음식의 맛이 어떤지도 그 순간은 알 수가 없었다.
기혜민은 막 잔을 내려놓으며 배시시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지?”
“어떤 살인......”
기혜민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어떤 살인?누구를 죽였는데......”
화천후는 진실로 탄식했다.
“친구를 죽였지,그것도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왜?”
기혜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화천후는 내심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활짝 웃었다.
“하하하......마음에 둘 것 없어.공연히 혼자 해보는 소리였으니까.”
벌컥 벌컥-
말을 마치는 순간 그는 술병을 입속에 거꾸로 쳐박았다.
그런 화천후의 모습을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기혜민은 그가 술병을 떼자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문생,너는 정말 많이 변했어.”
“......!”
“그 무엇에도 당당했던 너였지만,내 앞에서는 몹시도 수줍음을 탓었는데......지금은 아니야.”
“후후......그렇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른다니?”
“나는 이제 더이상 누구의 예속물이 아니라는 말이지!적어도 사랑의 성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배짱은 바보처럼 늘었다고나 할까?”
순간, 기혜민은 학처럼 긴 목을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야......문생!너의 성격은 적어도 사랑 보다는 대의(大義)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었어......결코 나를 차지하기 위해 무모한 짓을 벌일 네가 아니야.”
“......”
그러나, 화천후의 시선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뚫어질 듯한 눈빛을 기혜민에게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화천후를 마주하는 기혜민의 시선이 짧게 흔들렸다.
“네가 백야성에 굳이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그것은 너는 마도의 핵심인물이 되고 나는 정도의 딸이기에 서로 혈난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믿어서 내가 말리지 않았던 거야.”
“......!”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이지?너는 설마 마성에 물들었다고 구차한 변명이라도 할 셈이야?”
“......!”
그 순간, 화천후의 시선은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아예 기혜민의 말따위는 귀에 들어도지도 않는다는 듯 불타는 시선을 들어 그녀를 직시했다.
기혜민은 흠칫했다.
(저 눈빛엔......뜻이 담겨 있어!)
그렇다.
그녀의 지혜로 화천후의 그 불타는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란 쉬웠다.
기혜민은 자신도 모르게 앞가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자세는 참으로 유혹적이었다.
화천후의 시선에 안타까움이 먹물처럼 번져갔다.
화천후는 양 팔을 벌렸다.
“혜민!이제 너를 안겠......”
헌데 그때였다.
“삼공자님! 속하 조운입니다.”
걸걸한 중년인의 음성이 급촉하게 들려 화천후를 제지했다.
화천후는 깊숙이 눈쌀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가?조운!”
상산철마 조운은 백야성 하남지부의 총관이다.
그는 아무리 자신의 상관이라도 직원 외의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지극히 못마땅해 하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들어가서 말씀드려도 되겠읍니까?”
별로 유쾌하지 않은 화천후의 말에도 불구하고 물러가지 않을 자세였다.
화천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라.”
조운이 들어섰다.
조운은 서른 후반의 장대한 체격에 고슴도치 수염이 빳빳한 사내였다.
그는 부리부리한 호목으로 기혜민과 화천후를 번갈아 응시하다 짙은 눈썹을 꿈틀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마치, 일백 개의 범종이 웅웅 울리는 듯한 음성이다.
순간, 화천후는 다짜고짜 조운을 향해 무자비하게 쌍장을 쭉 내밀었다.
파파파팟!
바늘 끝같은 세기(細氣)가 십방(十方)을 차단하며 폭우처럼 쏟아져 나가고,공격의 각도가 전혀 없을 것같은 단 한 번의 살격은 느닷없는 손속도 손속이려니와,조운은 애초에 피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퍽!
“크아아아악!”
조운은 가슴 부분이 몽땅 떨어져 나가는 듯한 극렬한 고통을 느끼며 뒤로 나뒹굴었다.드는 불신과 의혹에 일그러진 시선을 들어 화천후를 응시했다.
“삼......삼공자......당신은......왜?”
“후후!내가 한 일에 대해서 네가 감히 따지다니......”
미처 말끝을 맺을 새도 없었다.
슈슉! 빠-악!
화천후는 한 친의 어김없이 조운의 턱을 날려 버렸다.
실내는 순식간에 검붉은 피분수로 자욱해졌다.
헌데, 기이한 것은 이 광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시하고 있는 기혜민의 태도였다.
“......!”
그녀는 마치 이 돌발적인 사태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화천후는 짐짓 곤혹스런 시선으로 기헤민을 응시했다.
“매우 무서워 졌지?”
드러나는 유난히 흰 치아......
그것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심어주기에 만족할만한 것인데, 화천후는 마치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다시 술병을 통째로 입안에 쑤셔박고 있었다.
기혜민의 낮게 가라앉은 어조가 들렸다.
“그 술을......다 마신 뒤에는 어떻게 할거지?”
화천후는 허공을 향해 있던 시선을 기혜민에게 느릿느릿 돌렸다.
“너를 가질거야.”
“나를......?”
화천후의 시선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뜨거웠다.
그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찐득한 열기가 삽시간에 실내를 꼭 매웠다.
“혜민......!”
이글거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열정의 용광로 하나가 녹아내린다고 할까?
술병을 내려놓는 순간 화천후는 천천히 기혜민을 향해 다가갔다.
“너를 가질거야!꼭......”
신음처럼 입술 새로 흐르는 항거불능의 폭발......
기헤민의 눈빛이 곤혹하게 일그러졌다.
(저 음성은 진실이 들어있다. 허나 너는......)
무슨 소린가?
뒷말은 불행히도 하나의 급촉한 발걸음 소리에 의해 들리지 않았다.
“삼공자님!정도무림매의 제오영주인 무결옥기린 상관영호가 삼공자님을 찾아 이곳으로 오고 있읍니다.”
(빌어먹을......하필 이런 때에......)
동시에, 섬전같이 입가를 흝는 한 줄기 미소.....기다렸다는 듯이 화천후의 입가에 번지는 저 보일듯 말듯한 웃음이 뜻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살소(殺笑)!
화천후의 미소는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죽음의 미소였다.
기혜민은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문생......너는 오히려 그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녀가 벌떡 교구를 일으켰다.
“문생.너는 그를 어떻게 할 셈이지?”
그토록 담담하던 시선도 무섭게 일그러졌다.
“죽일 것이다.”
화천후의 대답은 짤막했다.
기혜민은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잠겨 들었다.
“안돼!”
자신도 모르게 터져자온 절박한 음성.
(안돼! 이제까지의 일은 네가 검천할아버지와 한대주를 무사히 풀어주면 없었던 일로 돌려버리고 무마시킬 수 있지만 오영주마저 죽이면......)
무서웠다.
정마대회전(正魔大會戰))!
이제까지 자신의 영역만 굳게 지켜온 정도무림맹과 백야성은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피의 전면전으로 돌입할 것이 아닌가?
(막아야 해!)
다음 순간, 기혜민은 다짜고짜 옥수(玉手)를 뻗어 화천후의 전신 사혈을 찔러갔다.
고오오오.....!
찰나지간 실내는 북빙(北氷)의 극한과도 같은 냉기가 풀풀 날렸다.
이른바 설산 빙궁의 최극상 빙공(氷功)인 빙기옥수섬-
허나, 화천후의 반격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재빠르기 그지 없었다.
“하하......혜민,훌륭한 빙궁의 절학이구나.허나 나는 바빠서 너의 상대를 일일이 해줄 수가 없다.”
손과 손이 마주치는 순간이다.
펑......
둔탁한 가죽북을 터뜨리는 기음과 함께 돌연 붉은 기류가 자욱이 피어오르지 않는가?
“아니?”
기혜민은 다급한 옥음을 토해내며 호흡을 멈췄다.
“하하! 혜민......이제 호흡을 멈춰봐야 늦었다. 그것은 묘강에서만 난다는 음양최음화(陰陽催淫花)의 꽃가루로 만든 무형춘음향(無形春淫香))이니까.”
(문생......네가......?)
기혜민은 아득히 한 가닥 의식의 끈마저 놓치며 힘없이 쓰러져 갔다.
무형춘음산!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음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해약은 오직 사내의 몸뿐이라나?
피부를 통하여 흡입되며, 단 한점의 가루라도 묻으면 제아무리 절세의 내공을 가진 고수라도 당하기 마련이었다.
화천후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쓰러져 있는 기혜민을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 * *
(미,미친 짓이다!)
능운비의 눈에 비친 대공자 사헌의 모습은 확실히 미친 짓이고,무모한 짓이었다.
보라! 온총 허공을 덮고 천라지방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수천 수만의 도영(刀影)!
바늘끝만큼의 빈틈도 없다.
저 수만 개의 도영을 아무런 상처도 입지않고 막아내기란 누가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다.
순간, 대공자 사헌의 대리석같은 얼굴에 언뜻 웃음같은 것이 번져 오르고, 관전하던 주현월이 내심 절망적인 탄식을 터뜨리며 두 눈을 감아버린 것과,수만 개의 도영이 폭우처럼 능운비의 전신에 작렬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파파파파파팟!
고막이 파열될 듯 끔찍한 격타음이 일었다.
그것으로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일까?
대공자 사헌의 육중한 신형이 능운비의 전면에 우뚝 내려섰다.
허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당연히 피를 토하고 나가 떠러질 줄 알았던 능운비였다.
피를 토하기는 켜녕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두 눈을 가늘게 좃히며 웃고있지 않은가!
또한 그의 전신에는 이때 저주의 암흑과도 같은 검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주천군의 눈에 격력한 놀람의 빛이 파동했다.
“암흑강막(暗黑罡幕)!”
능운비의 눈에 어린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성주님의 안목은 과연 놀랍군요. 이미 마도에서 일천년 전에 사라진 암흑강막을 단번에 알아 보시단......”
“그렇다면. 암흑강막도 마극참수기에 남아 있었단 말인가?”
“사실입니다. 믿지 않으세겠다면 다른 것을 보여 드리지요.”
휘리리리리링-!
능운비의 전신에 어려있던 암흑의 강막들이 느닷없이 터지는가 싶더니,그것은 곧 가느다란 묵빛 철사로 돌변하여 회오리치듯 폭출되어 나와 순식간에 대광자 사헌의 몸을 휘감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핫!이것은 묵형철막이라는 불가사의한 초식이오.”
불가사의한 초식 묵형철막!
그렇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대공자 사헌은 이렇듯 엉뚱하고도 끔찍한 일초(一招)가 능운비의 일신에서 솟구치자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피하려 했다.
“......!”
허나, 그의 전신을 휘감은 묵빛 철사로 인해 행동은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고,그의 몸은 끝내 걷잡을 수 없는 경렬에 휘말려 허공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 혈봉의 쌍조가 빠르게 태양을 꿰뚫는다.
“쌍조쾌(雙爪快)!”
항거할 수 없는 한 소리 기합성과 함께 능운비의 희디 흰 쌍수가 떠오르는 대공자 사헌의 가슴에 사정없이 작렬했다.
파파파파팟!
사헌의 가슴 옷이 갈가리 찢겨져 날아갔다.
허나, 이번에 놀란 것은 어처구니 없게도 능운비였다.
“금강불괴!”
그는 가볍게 놀란 시선을 들어 맞은 편에 내려서는 대공자 사헌을 쳐다 보았다.
금강불괴!
그러했다.
옷자락이 너덜너덜 넝마처럼 찢겨져 나가긴 했으나,대공자 사헌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끄덕도 안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번-쩍!
대공자 사헌의 묵도에서 섬뜩하리만큼 모골 송연한 묵광이 폭사 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들이고도 남을 듯 엄청난 것이었으며,또한 지독히도 빨리 폭사되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능운비의 목젖을 꿰뚫을 듯 다가와 있었다.
능운비는 그제야 대공자 사헌의 진면목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로 엄청난 무도에의 집념이다.......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한없이 우둔해 보이는 대공자 사헌은 실상 누구도 따르지 못할 본능적인 무도감각을 지니고 있다!)
무슨 소린가?
츠츠츠츠으으......
독사의 혀와도 같은 묵광은 이순간 거의 능운비의 목젖을뚫을 듯 가까운데,
(훗!사헌은 이미 묵형철막의 치면적인 약점을 알아 차렸다.바로 목및의 천돌혈......)(나는 어쩌면 오늘 가장 친해야 할 친구 한 사람을 사귀게 될지도 모른다!)
능운비는 기묘한 웃음을 연신 떠올리며 슬쩍 신형을 들었다.
스스스스슷......
그의 몸은 순식간에 서른 여섯의 환영(幻影)으로 분리되며 허공으로 번쩍 솟구쳐 올랐다.
이어, 허공으로 솟구친 그의 몸이 돌연 물구나무 서듯 거꾸로 뒤집히는가 싶더니,그 기세 그대로 화륜(火輪)처럼 급손회하며 질풍인 양 대공자 사헌을 휩쓸어 갔다.
자연 대공자 사헌의 퇘도는 허공을 스쳤고,그 헛점은 구대로 능운비의 공격권에 들어 무수한 빈틈을 만들어냈다.
콰콰콰쾅-
사정없이 사헌의 등 뒤에 작렬하는 능운비의 쌍수!
“으윽......!”
사헌은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나아간 뒤에야 간신히 신형을 멈춰 세웠다.
그러나 이번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헌의 옷자락은 갈가리 찢어져 문신처럼 새겨진 묵룡이 훤히 드러났으나 상처는 없는 것이다.그리고 그 순간,
“묵천여래수!”
능운비는 숨쉴 틈도 주지않고 간신히 신형을 멈춰선 사헌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강타해 갔다.
무릇, 고수들의 싸움은 눈(眼) 싸움이라고 까지할 정도로 눈을 통해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을 예측해야 하는 터,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단 한 순간이라도 상대의 눈에서 시선을 때지 않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허나 지금, 무려 두 번이나 대공자 사헌은 상대의 시선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사헌은 다급히 능운비의 눈부터 찾았다.
헌데, 시선 속에 쏘아져 들어오는 것은 눈이 아닌 손(手).......
대공자 사헌이 급히 능운비의 눈을 찾고자 했을 때 그의 신형은 이미그의 코앞에까지 찌르고 있었으며, 사헌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지는 그 순간, 능운비는 우수(右手)를 창끝처럼 세워 그의 미간을 사정없이 찌르고 말았다.
팍!
“어멋!”
“안돼!손속에 인정을 베풀게......”
오히려 관전자인 주천군와 주현월의 입에서 외마지 다급성이 들릴 정도로 능운비의 손속은 빠르고 무정했다.
“크윽-!”
쿠쿵.......!
대공자 사헌은 마침내 온통 피를 뒤집어 쓴 듯한 모습으로 나가 떨어졌다.
안색마저 핏기 한점 없이 창백했다.
반면 능운비는 천신인 양 오히려 사헌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누가봐도 대공자 사헌의 패배였다.
그것도 무인의 생명보다 더 중시여겨야 할 자존심마저 처참하게 무너진 완벽한 패배......
헌데 이 무슨 넋나갈 소리인가?
느닷없이 벌떡 신형을 일으킨 대공자 사헌,
“진정 고마웠소!그대의 가르침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그가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능운비를 향해 도리어 정중히 허리를 굽혀 보이는 것이 아닌가?
“......?”
“......!”
주천군과 주현월은 차라리 멍청해졌다.
더욱 이해못할 것은 능운비의 행동이었다.
“아니오,대공자 ......친구는 결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아야 그들 사이가 진정한 것이랄 수 있지 않겠소?”
사헌의 시선이 격정으로 일렁였다.
(친구라고......최강의 무공이 무엇이라는 것을 내게 가르쳐준 그대가 나 사헌의 친구라고?)
친구란 그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가슴이 이토록 뛰는 것은 어인 일인가?
처음에는 그랬었다.
단지 저 오만한 자의 콧대를 보기좋게 꺾어 주리라.
자신이 신(神)처럼 생각하는 천마 주천군의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최초의 격돌 이후, 그 오만한 자가 마극참수기 안의 정화를 일부러 느리게 펼쳐 나의 꽉 막혔던 무도의 답보상태를 풀어 주었을 때부터,사헌은 변했다.
두 번째의 격돌,
(그대는 너무도 중요한 사실 하나를 다시 일깨워 주었다.눈(眼)......상대의 눈을 놓치지 말라는 가장 평범하고 어려운 진리를 마극참수기의 정화와 함께......)
대공자 사헌은 오랫동안 잊었던 말 한마디를 떠올렸다.
“친구가 생겼으니 술을 마셔야겠군.”
“푸하하핫! 친구와 술......정말 좋은 사이지,”
주천군은 둘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능운비는 저만큼 떨어져 있는 사헌의 묵도를 집어 이리저리 살폈다.
“좋은 도요. 술맛도 이 묵철 덩어리같았으면 좋겠소.”
그는 사헌에게 도를 건네며 다시 싱긋 웃었다.
“그리고......사실 친구의 마지막 일도(一刀)는 내게도 아주 훌륭한 선물이었다오.”
다시금 불기 시작한 한풍에 능운비의 가슴 앞자락이 예리하게 잘린 자욱 그대로 펄럭였다.
이때, 능운비와 대공자 사헌을 번갈아 바라보는 주현월의 시선이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무슨 뜻일까? 그 눈빛의 흔들림은......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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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 갑니다..
즐독하고갑니다^^
즐독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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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잘 읽었습니다
재밌게잘 읽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약간은 색달라 져서 좋습니다.
잘읽었습니다!/ㅎ
잘보고 갑니다.
즐독하구가요~
잘 보았읍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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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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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이요
잘 보고 갑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두번째 읽고가는데도 여전히 재미나네요. 감사합니다. 좋은하루되세요 ~~
험한 강호에서 친구라~~~~~```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즐독 & 감사~~~~
감사히 잘 읽었읍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흔들리는 눈빛이라니 무슨 암수가 숨어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