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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봉의 영화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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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꾼들의 영화평(외국) 스크랩 ★★★★☆ [영화]그루미 선데이 ★★★★☆
두괴즐 추천 0 조회 747 08.11.22 20:53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글루미 선데이>>

-한스 이해하기



 영화는 복수의 성공을 엔딩의 종결 점에 놓아 놨다. 80살 생일을 맞이한 한스가 부다페스트에서 일로나에게 완벽한 살해를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그 복수를 보고도 도통 시원하지가 않았다. 80살 생일이라니! 너무 오래 살아남은 것 아닌가. 게다가 그가 죽은 후 역사가 기록하는 그는 나의 심기를 더욱 열 받게 만들었다. 이런 억울함 때문에 이연수는 그의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삶은 두 개라고 했으리라. 실제로 살았던 개인적 삶과 기억되는 공식적 삶. 그 거리를 메우는 이데올로기. 그런데 한스 이놈은 도무지 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내게 이런 말을 던지고 꼬꾸라지는 것 아닌가. ‘너는 날 이해할 줄 알았는데……’ 아놔. 무슨 놈의 이해란 말인가. 이건 흡사 작가 박민규가 아버지를 기린으로 만들어 놓고 내게 ‘넌 날 이해하겠지…’라고 하는 거와 마찬가지 아닌가!


 어쨌거나 나만 유일하게 들은 한스의 유언을 외면할 수도 없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을 봐서라도 빌어먹을 한스를 이해하도록 해본다. 영화에서 처음 한스가 나왔을 때 그는 일로나에게 빠져 정신 못 차리는 그런 열혈 청년이었다. 일로나에게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카메라를 보여주기도 하고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하지만 단박에 거절당한다. 그는 좌절된 사랑으로 인해 망가진 영혼을 부여잡고 삶과의 결별을 맞이하려 한다. 다뉴브 강으로 뛰어 든 그를 자보가 구하지 않았다면 80살 까지 살아서 마음에 안 든다는 나의 불만은 애당초 없었겠지. 여하튼 착한 우리 자보는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하는 순진한 한스를 도닥이며 위로해 준다. 그렇다. 사실 한스는 꽤나 순수한 구석이 있던 놈이었다. 사랑에 실패했다고 목숨을 끊으려고 한 그 모습은 흡사 낭만적 아름다움의 비극『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아닌가 말이다.  


 허나 컴백 한스는 나치의 장교가 되어 있었다. 영화가 재미나게 자보와 안드라스가 일로나를 공유하기 까지 부딪히는 우여곡절을 보여주고 안드라스가 쓴 죽음의 곡 <그루미 선데이> 관련 이야기를 풀어갈 동안 한스는 관객이 보지 않는 그 너머에서 지루하게 나치의 정신 사상을 무장해가고 있었다. 컴백 한스의 제복과 그에 찍힌 나치 마크는 그가 더 이상 베르테르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후 그의 행방을 보면 자보 일행을 위해 다소간의 인간미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도구적 이용에 그쳤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컴백 한스가 여전히 베르테르였다면 자보를 죽음의 기차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고 강제적으로 일로나에게 욕정을 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두 가지 텍스트가 있다. 하나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화씨 911>>이고 또 하나는 필립 짐바르도의 『루시퍼 이펙트』이다. <<화씨 911>>을 보면 누가 이라크 전에 참전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대부분 불우한 집안 환경을 가진 젊은 약자들이다. 그리고 대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쉽게 말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효자들이라고 보면 된다. 『루시퍼 이펙트』(부제-무엇이 선량한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가)는 그런 효자들이 어쩌다가 그렇게나 잔혹한 존재가 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그 분석의 결론은 시스템이다. 즉,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저지르도록 전환시키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바탕에 둔 구조적인 상황 설정에서 비롯되며 그것을 작동시키는 시스템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어떠한 구조적 틀 속에 가둔 쥐가 인간의 의도대로 행동하게끔 할 수 있듯이 인간 역시 시스템 속에서 권력의 의도대로 행동하게끔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스는 빌어먹을 원수지만 용서를 구할 수도 있는, 그리고 이해해 볼 수 있는 구석이 생긴다.


 한스는 나쁜 놈이지만 실상 그것은 나치의 이념에 따른 장교의 해야 할 일이었다. 세상이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는 한스의 두려움에 자보와의 우정보다 자신의 처세를 선택한 그였지만 인간이란 전쟁과 같이 끝장을 보는 상황에 닥치면 그렇고 그런 존재로 전락하는 게 보통이다. 어릴 적 함께 지구를 지키자며 원대한 꿈을 품었던 친구들은 청년 실업이란 전쟁 앞에 그저 경쟁자들이 지구 밖으로 떠나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만 있을 뿐이다. 청년 실업 100만의 시대 때 정부의 일자리 창출 최대 목표치가 20만개라고 하는 전시의 상황인 지금 우리는 누구나 한스가 될 수 있다. 대학생 평균 토익 점수가 점점 높아지고 회사에서 원하는 스펙의 수준이 원대해질수록 우리는 우정(자보)보단 빽(유태인 관직의원)을 살려 두기 마련이다. 너나 나나 한스가 되는 이 시점에서 그렇고 그런 존재로 전락하지 않게 전시의 종결을 위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기린이 된 아버지를 쳐다보거나 일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우울함에서 구원 될 것임은 분명 할 것이다. 한스의 행태만큼이나 나치의 시스템을, 옆 학우의 커닝만큼이나 사회의 고용 시스템을 향해 바른 소리를 할 때 너와 내가 앓는 우울함이 걷혀지지 않을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루미 선데이>를 듣고 죽은 187명 보다 나치로 인해 학살된 사람이 몇 십배는 많다는 사실이며, 21세기 지금의 세계는 그 보다 많은 절대 다수의 인간이 고용 불안에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루미 선데이>로 인해 사람이 죽어간 것이 차라리 너무나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지금은 굳이 그런 음악이 없어도 우울한 세계의 현 모습이다.



추천강도 ★★★★☆


08.11.20 두괴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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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2.07 01:05

    첫댓글 한가지 지적하고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스가 자보를 죽음의 기차에 실리게 한 것이 한스가 나치 장교로써 한 일이라고 했는데 직책이란 허울을 쓰고 나치 장교 한스의 추잡한 행위를 미화하는 변명입니다. 한스가 자보를 기차에 실어보낸 것은 분명 개인적 이유에 의한 한스의 선택이고 결정이었습니다. 자보를 기차에 실어보내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을 한스가 택하지 않았죠. 택하지 않은 이유는 일레나에 대한 한스의 독점욕이었습니다. 만약 자보를 기차에 실어보냄으로써 한스가 보다 공익적인 이익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나치장교로써 한스의 임무가 보다 어울리는 변명이 될 수 있었겠지만, 물론 한스가 일레나를 좋아한 것을 탓하지는

  • 08.12.07 01:15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레나의 남편을 속임수로 제거한 행위가 "한스는 나치장교로의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다"라고 변명될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삶의 방식이 아무리 횡행한다고 해도 (공개적으로 알려진다면 누구나 부끄러워하고 숨기고싶은) 엄연히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부분이고 숨긴채로 뻔뻔한 얼굴로 자기합리화하며 80살까지 살았다고 해도 마음 어느 한구석에 켕기는 부분이 없다는 것도 거짓이겠죠. 자보를 해치고도 80살의천수를 한스가 누렸다해도 일레나를 사랑했던 한스에게 있어서 여전히 통탄스러운 것은 그 오랜 세월동안 일레나가 한스를 용서하지 않고 일레나의손에 한스의 생을 마감당한 것일

  • 08.12.07 01:14

    +)겁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자보가 없어도 한스는 여전히 일레나에게 거절당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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