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공순 언님 신앙 간증 출가
1999.01.02. 박공순 언니
저는 찬송을 한 장 먼저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어서 떨립니다. 총무님 몇 장이야? ‘나 맡은 본분은’ 372장입니다.
순서는 아니지만 제가 한 말씀 드릴 것은 제가 동광원에 와서 사니까 너무 좋으니까 사람만 보면 온 세상사람 동광원에 다 끌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막 불탔어요. 그런데 옛날에 김 원장님 농대학교에 계실 때 우리 정 원장님하고 저희들 20명을 뽑아 가지고 농대학교에 가서 냉이를 캤어요. 가서 자면서 20일 동안을 캤습니다. 그런데 저희들 나물 캐는데 김 원장님 오셔서 설명을 해 주세요. 그래서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나하면 아휴 저런 선생님이 우리 이 선생님 제자 되셨으면 참 좋겠네.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랬는데 그러자 수양회가 있었는데 수양회를 오셨어요. 김 원장님이 수양회를 오셨는데 사모님도 오셨어요. 그래가지고 그 수양회 끝나고 김 원장님이 김 장사 나가신다고 그래서 어떻게 제 마음에 기쁜지 아주 말로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감사차 올라가니까 사모님이 어린애를 안고 길에가 앉아서 달구 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치세요. 참 사모님을 볼 때는 참 안 됐기는 한데 김 원장님이 동광원에 오셔서 김 장사 나가신다는 게 그건 참 기쁜데, 이러고는 항상 우리 곁에 있어주시면 그런 생각을 원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 계시니까 든든합니다.
그래서 저는 잠깐 제 소개를 한다면 본적은 광주 양림동입니다. 그런데 제가 자라기는 화동서 자랐고 그래서 참 모든 가정환경이라든지 순탄치는 않았고 제가 이 선생님 만났던 그 소개만 조금 할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라면서 부모님이 위에로 오빠 둘이 있는데 어머니가 재취로 오셔가지고 저를 낳았는데 그 오빠 둘 관계에서 제가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빠를 안 가르치고 나를 가르칠 수 없다. 그래서 그게 한이 되어가지고 제가 어렸을 때 학교에 가서 입학원서를 갖고 왔는데 그것도 묵인해 버리고 그 이듬해에 또 갖고 왔어요. 선생님한테 가서 직접 받아가지고 왔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아무개를 데리고 오라고 그랬다고 그런 말을 했는데 그래서 가정환경 때문에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고 그래가지고 인제 이 선생님 만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지금 듣기 좋은 말로 남자 친구라고 그러지 않아요? 지금은 그랬는데 이 선생님이 무등산에 계실 때 제가 광주 나와서 잠깐 살 때에요. 남자 친구가 이 선생님한테 데리고 가요. 그래서 무등산에서 산골 옛날에 그 최 흥종 목사님도 계시고 거기 일요일 날이에요. 그 날이 그 남자하고 그런데 가보기는 생전 처음이에요. 걸음을 걸어보기는 그런데 가자해서 따라갔는데 최 목사님도 계시고 이 선생님도 계시고 큰 애기들이 죽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그런데 이 선생님 딱 마루 문 앞에가 여기 정면에 앉아 계시데요.
들어가는데 그런데 남자는 남반으로 가고, 저는 여반에 가서 앉았는데 그 이 선생님 저는 시골에 살아서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도 못 믿고 그리고 사는데 저희 집안이 불교 집안이야. 그래서 예수를 안 믿고 그렇게 사는데 처음으로 갔습니다. 갔는데 이 선생님 그 눈빛 빤짝거리는 눈빛, 그 눈빛이 아주 사랑이 흐르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딘지 모르게 그런 아주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예배가 끝나고 이 선생님이 예배를 드리셨어요. 예배를 끝나고 무등산 가운데 집에 와서 한나 어머님이 계신데 거기 가서 점심을 먹고 한참을 거기서 놀다가 내려와서 집에를 갈라고 내려와서 저도 부끄러움을 타니까 어디 함부로 나타나지를 못해요. 그래서 치맛자락을 이렇게 뒤에다 움켜쥐고 담벼락에다 대고 이렇게 내다 봤어요. 이 선생님 계신 데를, 그때 이 선생님이 또 그때 바로 정면으로 나를 쳐다보시는데 그 눈빛이 그 사랑이라는 거는 말도 못해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우연히 그래서 그러니까 인제 이 선생님이 그 사람보고 눈짓을 하면서 가보라고 앞에 가라해서 저 혼자 옛날에는 그 무등산이 참 산길인데 혼자 내려오니까 어디 중간만치 왔는데 멀리 오더라고요.
그 사람이 그때 느낌이 어떻게 생각이 들어가면 이 선생님이 그 나를 감싸주고 지켜주신다는 그런 느낌이 우연히 들어와요. 그랬는데 그러고는 인제 이 선생님 못 뵙고 끝나고 한참 살다가 육이오를, 육이오 직전이에요. 그때 육이오 직전인데 제가 그때 좀 마음이 슬퍼서요. 그런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갈까? 까마득히 생각이 들 때 그렇게 이 선생님이 오셨어요. 그때는 춘양에 있는데 금남언니 사진관 어머니 수레기 어머니 이발소 어머니든가 그렇게 이 선생님 모시고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그때 한번 뵙고 그때가 두 번째 뵈올 때인데 어떻게 내 부모님보다 더 좋고 이 선생님 무릎에서 한없이 울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런데 그때 자꾸 찬송을 부르라고 그러시데요. 금남 언니도 자꾸 찬송을 또 부르고 또 부르고 그때 부르시던 성가는 다 내가 기억을 하고 있어요. 그래도 인제 말씀은 인제 못 기억을 했는데 그때 나와서, 마당에 나와서 밖에 나가시기전에 마당에 서서 저를 찬찬히 바라보데요. 그래서 그때 무슨 말씀을 하시었냐 하면 시베리아 벌판에 큰 나무가 하나 있다. 그런데 그 사막에서 쉬어갈 데도 없는데 그 사막에서 나무 하나가 서있는데 그 밑에서 쉬어가면 얼마나 좋겠나? 그 말씀은 어떻게 기억을 했어요.
그 말씀을 저를 쳐다보면서 그 빤짝거리는 눈으로 그 말씀을 저한테다 하고는 가시는데 제가 저기 외 바람을 쏘이며 나가는데 산을 한 나 넘어가는데 그때까지 서있었어요. 제가 그때 따라가고 싶은 심정이에요. 그래서 산을 딱 넘어가지고는 금남 언니보고 쉬어가지고 그런 사람들 위로도 해주고 하룻밤 자고가자. 그러셨대요. 그러다가 육이오 직전이라 방문할 데가 너무 많으시니까 또 생각하시다가 도로 가셨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때 헤어지고는 통 못 만나고 육이오를 닥쳤지요. 그래가지고 늘 상상이 이 선생님 생각만 한 거예요. 이 선생님 생각만 자꾸 해요. 아마 나를 보호해주실 분은 그 분이겠다. 그런 생각만 상상하는데 찾을 이 없어요. 육이오 당하고 나서는 그런데 어머니가 교회를 가셨다 오시더니 광주는 제가 이제는 시골에서 살수가 없데요. 그냥 도시에 가서 묻혀서 공장생활이라도 하면서 숨어서 살아야겠다. 이 시골에서는 안 되겠다. 그러고는 인제 그런 마음을 자꾸 먹고 있는데 어머니가 교회 갔다 오시더니 광주는 이러이러해서 그 안에서 베 짜고 그 안에서 농사짓고 처녀들만 사는 데가 있다더라. 그런 말씀을 하셔서 거기를 마음에가 드는데 어떻게 찾을까? 그냥 겁 없이 나섰어요.
그냥 빈 몸만 나서서 차를 타고 광주 와서 내려가지고 인제 제가 공장생활을 하면서 숨어서 살 생각을 하고 시골에서는 숨을 수가 없으니까 숨어서 살 생각으로 나왔는데, 광주 와서 인제 거리에를 가다가 하루아침은 해가 뚝 떴는데 어디서 아는 사람한테서 자고 나왔는데 어딘지 모르고 걸어가는 거예요. 걸어가는데 수피아 학교 정문 앞에서 이 선생님을 만났어요. 아이고, 그 기쁨이야 말로 할 수도 없고 선생님도 이후로 처음 만난 거예요. 아주그냥 선생님도 저를 얼마나 반겨 주시는지 그 사랑은 참말로 당해본 사람이나 알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가지고 막 양림회관으로 가자고 집으로 그래서 저를 데리고 선생님 방으로 들어가서 그때는 육이오 후라서 사람을 잘 안 받지 않습니까? 무서우니까 그래서 아무개지요. 아무개지요. 자꾸 물어보시고는 여기는 쑥 죽만 먹는데 어떻게 살겠어? 그래. 그래도 살아요. 그러니까 막 선생님이 웃으면서 되었다고 나가서 일 하라고 그날부터 살아가지고 이때까지 살았는데 그런 좋은 선생님을 모시고 제가 깨어나지를 못해서 항상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는데 그때는 육이오를 지나고 나서 그때는 양림회관에 사람이 없었어요. YMCA회관에 청년들이 한 20명 넘는 것 같아요. 그분들 다 어디를 갔는지 어쩐지 들어가니까 거기에 정옥씨 어머니가 계세요. 정옥씨 어머니 모르시는 분 없을 거야. 오 집사님 어머니시지요. 그러면서 그때 유 화레 선교사 선생님 사감에 있는 사람이 저희 친척이었는데 그때 육이오 후로 책을 구하기도 어려운데 곡조 찬송가를 제가 거기서 들고 왔어요. 그랬더니 그 정옥씨 어머니가 얼마나 반색을 하면서 곡조 찬송을 보더니 그걸 풍금 앞에가 치면서 막 부르고, 그래 나도 인상 깊게 그 어머니하고 참 친절하게 지내다가 그때는 육이오 후라 세계 평화 예배를 꼭 금요일이면 드렸어요. 어떤 때는 식구가 없으면 이 선생님하고 어떤 분 한분하고 또 정옥씨 어머니하고 저하고 서이서 드렸을 때 이 선생님이랑, 그래도 참 어떻게 그 어머니가 찬송을 잘하시는지 서이 예배를 드려도 그렇게 쩌렁쩌렁하니 아주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한동안 또 살았어요. 사는데 여기 여자 반, 거기는 고아들이 들어와 가지고 몇 백 명 식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인제 지산동에 가서 살게 되었어요.
가서 사는데 그 사무실에 전기 불을 대낮같이 켜놓고 이 전부 전남대학 교수들도 와서 있고 이런 책상을 높이 놓고 어떻게 선생님들이 다 서계시데요. 또 그러고 그날 저녁에는 어쩐 날 저녁인지 그런 교수님들이 다 계시는데 이 선생님이 우리를 둘씩, 둘씩 불러들여요. 저는 온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저도 순금씨 어머니하고 둘이 불려 들어가는 거예요. 먼저 들어간 사람 내보내시지도 않고 둘씩, 둘씩 불러 들여가시는데 먼저 들어간 사람은 선생님한테 다 꼭 심판대 앞에 선 것 같아요. 다 한쪽 의자에 앉아있고 바닥은 땅바닥인데 제가 들어가자마자 선생님이 그 반찬그릇 눈으로 육신의 생각으로는 참 창피해야겠는데 그것도 아니에요 저를 이러고 제가 앞에 들어갔는데 쳐다보자마자 막 큰소리로 ‘거기앉아.’ 그러면 또 땅에가 무릎 꿇고 이렇게 앉았지요. ‘서.’ 그러면 또 서서 우두커니 서있지요. 또 앉으라고 그래 세 번을 그런 것 같아. 반복을, 그럼 그 대학 교수님들도 다 보고 서계셔. 그러고 또 한쪽에 앉으라고 그래서 그냥 그 소리에 놀라서 뒤에 두 분 온 사람은 거기 2층에 올라오다 거기서 주저앉아 버렸답니다. 어떻게 놀래가지고 또 방안에 앉아있는 먼저 온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 벌 벌 떨었대요.
그런데 저는 떨지도 않고 그렇게 선생님 하라는 대로 그렇게 순종을 하는 것이 그렇게 우습다고 나중에 아주 웃음거리가 되었지요. 아주 그랬는데 살다가 또 인제 그때는 양림으로 바꿨다. 지산동으로 바꿨다, 여반하고 남반하고 늘 바꾸는 시절인데 그래가지고 인제 그래도 예배는 인제 큰 강당에서 양쪽에가 앉아서 남반 여반 그때는 계속 이 선생님 설교를 하시는데 그런 예배를 드리는데 하루 새벽에는 제가 좀 마음이 언짢았어요. 그렇게 좋던 마음이 쫌 어떻게 언짢은 생각이 들어갔어요. 그래서 그래도 다른 생각은 안 먹었었는데 그걸 어떻게 선생님이 아시고서는 고린도전서 13장 그 말씀을 해 주셨는데 지금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인데 요즘에 와서 다 제가 살아온 것은 부끄러움뿐이고 하나도 해놓은 것도 없고 참 제자신이 특별나게 남 같이 뛰어나게 깨달은 것도 없이 이거 어떻게 하나? 70이 다 되었는데 자꾸 생각이, 갈 생각만 들어요. 그러면서 앞서 사시는 선생님 어머니들한테 인제 이만큼 보호해주시고 감싸주신 그 은혜를 보답하는 식으로 성경을 좀 보고, 그 은혜를 감사를 좀 드려야겠다. 하고 자꾸 성경을 보는데, 저는 항상 사는 것이, 요한복음 12장 14장이에요. 12장이에요. 24절로 25절 조금 읽어주세요. 한 알의 밀이 썩어서 12장 24절로 25절입니다. 읽어주세요.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이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밀알 하나가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한 알의 죽은 밀알에서 많은 밀알이 맺히듯이 새 생명들을 풍성하게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고 저는 항상 사는 생활이 성경도 잘 못 보지만 살고나면 성경 보면 이따금 말씀이 적당하니 떨어지면 그렇게 위로받고 제 나름대로 그렇게 살고 있는데 십자가가 항상 그늘처럼 따라다닌다고 ‘고통의 신비’에서 그런 말씀도 봤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0장 23절에 투옥과 결박과 환난이 너를 기다린다고 그런 말씀을 보면 참 재미있어요. 그랬는데 고린도전서 13장을 이 선생님한테 받은 말씀인데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하루아침은 예배를 드리시더니 제 마음이 언짢은걸 알고 이 장을 어떻게 참 신처럼 아세요. 여기를 그 많은 얼마나 저보다 다 그냥 잘 읽으시고 다 좋은 분들만 모였는데 제일 못난 저보고 이거를 그날 아침에 읽으라고 그러세요. 그래서 이 말씀이 인상에 항상 남아있어요. 고린도전서 13장 다 읽어주세요. 제가 읽으면 시간만 가고 그러니까 죄송하지만 읽어주세요.
고린도전서 13장. ‘나 비록 지금까지 배운 일 없는 다른 나라의 말로 말하고 또 하늘과 땅에 모든 언어를 다 말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소리 나는 시끄러운 꽹과리 울리는 징일 뿐, 나 비록 예언하는 은사를 받아서 장래에 일어나는 일을 모두 다 알고 모든 일에 통달하였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 있을까요 나 비록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나 비록 가진 것 모두 다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또 복음을 전하다가 화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결코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동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신만 생각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진실만을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한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그칩니다. 방언도 사라집니다. 지식도 없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지극히 적은 것 일뿐 예언도 부분적일 뿐, 모든 것이 온전해 질 때 온전치 못한 이 모든 것도 없어집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이나 모두 다 어렸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적 말이나 생각이나 판단을 모두 다 내어버렸습니다. 우리 비록 지금은 희미한 거울 속 들여다보듯 희미한 모습만 비춰보지만 그 날이 오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분명히 볼 것입니다. 나 비록 지금은 알고 있는 것 모두 다 몽롱하고 흐리나 그 날이 오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꿰뚫어보시듯 모든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참, 세상에서는 받을 수 없는 사랑을 선생님한테 받고 그 선생님은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고드름이 달릴 때까지 그 피나는 기도를 해주신 그 이슬을 받아가지고 또 저희들을 계속 먹여주시고 그런 걸 생각할 때, 살아갈수록 너무 감사한 것뿐이고 이제는 사랑을 받기만 했으니 나도 그 사랑을 참 마음으로 생각이라도 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생각했던 게 다 어디로 가고 그래서 인제 선생님께서 나무에 대해서 말씀 하신 게, 동광원에 와서 살아도 그걸 말씀 하신 것만 기억을 했는데 선생님 세상 뜨신 뒤에 어느 날 그런 느낌이 와요. 아 선생님 그때 그 말씀 한 것이 너는 내 그늘 밑에 와서 쉴 것이다. 그 말씀이었구나. 참 그렇게 느낌이 오니까 기쁜 생각이 들어요. 내가 정말 선생님이 그때 비유로 하셨는데 내가 이 시간에 요렇게 깨달아 집니다.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그때는 선생님은 미리미리 아시고 너는 내 그늘 밑에 와서 쉴 것이다. 그늘 밑에 와서 잘 쉬었으니 이제 갈 때가 되었으니 요즘에 와서는 자꾸 성경을 봅니다. 갈 때가 되었으니 감사를 하고 잘못된 것 있으면 자복하고 회개하고 이것밖에 안남은 것 같다. 그래싶어서 요즘 성경을 많이 봅니다.
계명산에서의 생활.
막 속에서, 계명산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게 평소에 살면서 저는 마음이 못나서 이렇게 누구한테 나타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참 생각이 항상 오른손이 한 것 왼손이 모르게 내 자신만 알고 하나님이나 알고 그런 사람이 되어봤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계명산에 들어가 살면서 너무 가난하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것은 직전이고 처음에 들어가서 막 속에서 사는데 그때 무척 옛날에는 추워서 이 쑥을 갖고 가 개울에 가서 씻으면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얼음이 뚝뚝 되어서 물이 금방 이렇게 얼어붙어요. 손에 그래서 주걱을 갖고 가서 흔들어서 쑥을 그렇게 쑥만 먹고 사는데 그 춥다는 것은 말도 못하겠어요. 얼마나 추운지. 처음에 들어가서는 이불도 없이 막을 풀막을 쳤는데 엉성 엉성한데 눈은 발빠지게 오는데 그 바람이라는 거, 매서운 바람이라는 거, 말도 못해요. 뼈가 저려요. 얼마나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 속에서 참 김 선생님이 지은 성가도 있지요? 인생의 거리에서 뼈저린 고통, 그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나고, 그때야 비로소 걸인들 사정을 알게 되데요. 제가 당하니까 그래서 한동안 그 어려움을 참고 있는데 이렇게 살아가는데 어느 날은 거기 사람들이 전부 또 서울에 가서 느낀 것은 속담의 말이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고 그런 말도 생각이 나요. 전부 그 마을 사람들이 전부 젊은 사람들이데요.
제 또래들이더라고요. 전부 마을에서 전부 나무들을 해서 팔아먹고 사는데 전부 밥만 먹으면 산속으로 다 들어와요. 남자들이, 그 산속에 혼자 있을 때가 많은데 그래서 여기 있으면 더 안 되겠네. 그러고 나가서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있으면 우리 집에 막 있는 데가 양달이라, 남자들이 전부 그쪽에 와서 쉬고 그랬는데 참 그때 기도야말로 정말 하나님 붙들고 살려주시라는 기도가 나와요. 그래서 기도만큼은 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참 말 한마디라도 해롭게 안 해요. 그런 걸 볼 때, 그런 생각이 느꼈어요. 과연 서울 사람은 서울사람 이구나. 전라도 같으면 이런 시골에 가서 이런 사람 있으면 그러지는 않을 건데, 그런 생각을 하고 너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하나님이 딱 품안에다 그거 한 거예요. 지금 오히려 거기 가서 그러고 있으라고 하면 못 있겠어요. 품안에 탁 싸고 계신 것 같아요. 하나님이 싸고 계신 것은 그 기도에 능력은 제가 기도를 해서 그런 거 아니고 그 많은 식구를 이 선생님 피와 살을 다 뱉어가면서 기도해주신 덕택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사람은 거기 가서 잘못되면 얼른 붙들 수가 없지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탁을 했으면 그 머나먼 살 골에 가있는데 그런 일 하나도 없이 붙들어 주신 은혜를 선생님의 기도라고 믿었어요. 내가 살다가 어느 때는 인제 아래다가 집을 지어가지고 초막집이라도 집을 지어가지고 내려와서 사는데 어느 불쌍한 형제가 찾아왔는데 얼마나 내가 나한테 뭐있으면 꼭 줘야할 형편이야.
아주 얼마나 참말로 가난하고 참 어려운 세상인데 그걸 못 줄 때, 제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들어왔냐 하면 하나님 저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 덜먹고 내가 옷 하나 덜 입으면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저 사람을 도와주겠다. 그걸 그때는 굳게 믿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내가 아무리 주고 싶어도 줄게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하나님은 꼭 그걸 해주실 것이 믿어지더라고요. 내가 못줄 때 내가 덜먹고 덜 쓰면 하나님이 그에게 돌려주시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살고, 참 그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막 고양동의 귀부인들이 그 산속에 사람이 그 동네 사람도 호랑이가 무서워서, 옛날에는 못 올라왔답니다. 그러고 산속에서 산다더라하고 구경 오는 사람도 있고 그래요. 그러면 저는 혼인한 사람들이 어째서 처녀가 저런데 와서 살까? 아니 나 처녀 아니에요. 숨기려고 그런다고 숨기려고 그런다고 그래. 그래서 살고 있는데 통 사람을 쳐다보지를 않았어요. 그래가지고 동네 사람이 누가 누군지도 몰랐어요. 쳐다보지를 않고 살아서 그런데 인제 이렇게 나이를 먹고 보니까, 거기 오래 살다보니까, 일도 볼일이 있고 그러니까, 서울 심부름이나 하면서 동네 그런 사람들 보면 인사 하냐고? 안한다고. 이제는 해야 된다고.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야 나가서 만나서 이렇게 그때는 그 말 듣고야 그래야 하나보다 하고, 그런 분들 만나면 인사를 했어요.
그랬더니 아니 무슨 별것이나 만난 듯이, 아니 세상에 이 아주머니가 말하는 것을 처음 들어본다고, 이거 옛날에 색시 때 온 건데 얼마나 그때는 곱게 생겼던지 제가 뭐 곱게 생겨? 미운 것은 저인데, 그래가지고는 그래도 인제 늙고 볼 일이데요. 세상에 오늘 나 처음 들어봤대 말인사 좀 했는데 그러면서 막 그랬는데 아이고 그것도 다 그런걸 또 이 선생님이 다 가르쳐주신 덕으로 그렇게 기도의 힘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선생님이 어디 내보내시면 저는 그렇게 들었어요. 남의 도움 받지 말라. 남자하고 마주서서 물건 받지 말라. 남자하고 한 지붕 밑에서는 절대 자지 말라. 그런 말씀 들었어요. 그래서 꼭 그러고만 살아야 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가지고 한번은 선생님한테 뭘 해가지고 갔는데요. 선생님이 얼른 안 받으세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이 받기를 바라고 있고요. 선생님은 자꾸 거기에 놓으라고 그럴 때 아 그때 그 생각이 착 떠올라요. 아 남자하고 물건을 마주 받지 말라. 그랬지 그 말씀이 얼른 떠올라서 빨리 놓았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련한 속에도 그런 감정을 주시데요. 그래서 얼른 놓고 나왔지요. 항상 선생님은 제가 미련하니까 ‘공순씨는 애기 같애.’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제 잘못도 많은데 이야기가 어디로 다 가버렸어.
그 이야기 하면 아무나 믿겠어요? 저는 못났으니까 생전 선생님을 그리워 하기는 하는데 선생님 광주서 세상 뜨게 생겼다고 하는데 마음이 불난 거 같아. 어디 산에 가서 울고 내가 선생님 한번 못보고 죽느냐고 마음이 불이타서 죽겠어요. 어머니들한테 말도 못하고 간다 온다 말도 못하고 사람 미치겠어. 그냥 그랬는데 나 같은 것도 하나님 복 주시려고 선생님 가셔야 할 거 아니에요. 내가 막 애기처럼 그러고 이야기 한다고 그럼 이 선생님 서울로 올라오게 돼서 올라오셨는데 처음에 베틀 방으로 모셨지요. 그때는 걸음을 잘 못 걸으시니까 업어 모시고 그럴 땐데 베틀 방에 와서 첫 번째 기도하신 기도제목은 선생님이 기도를 하시는데요. 저는 그곳도 못 갔어요. 그런데 서울 어머니가 듣고 오셔서 그때는 제가 베를 짤 때고 이 베를 짜는 사람도 축복해 주시고 이 베를 갖다 입은 사람도 축복해 주시라고 그런 기도를 하셨대요. 막 들어오시면서 베틀 방에 모셨는데, 들어오시면서 그렇게 하시고 누가 세상 뜨러 오셨는가? 꿈에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인제 거기서 한 이틀 밤인가 삼일 밤인가 주무시고, 윗집으로 모셨는데 그때 성희양이 업어서 모셨는데 그때는 병이 자꾸 짙어지시는 거예요.
취나물 무치고 옛날에는 국물하나 따뜻한 거 있어요? 그것도 안 잡술라고 막 그러는데 취나물 썰어서 된장국 끓이고 취나물 무치고 밥을 한 숫가락 담아서 갖다 드리면 그 선생님이 맛있어서 맛있다고 그러신 거 안 같아요. 아 나는 이렇게 사랑이 많아 선생님이 사랑이 많으시니까 당신 사랑을 표현하신 거 같아요. ‘이렇게 계명산이 사랑이 많은 거 몰랐어. 이렇게 맛있을까? 맛있다.’ 그러지요. 그러면 취나물에 밥 한 숫가락 잡수시는 것이 뭐 그리 맛있겠어? 그래가지고는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고는 마지막 세상 뜨시기 전에 마지막 주일날인데 우리 식구들이 전부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가시려고 그렇게 마음이 기쁘셨던가 봐요. 사람들이 다 돌려가면서 성경을 읽는데 고린도전서 7장을 읽으라고 그러시데요. 7장을 읽으라고 그러시면서 다 돌려가면서 빠지지 말고 돌려가면서 읽으라고 다 읽고 찬송을 하면 찬송을 하면 찬송소리가 그렇게 좋으시다 고, 박자를 착착 맞추세요. 무릎에다가 그리고 고린도전서 7장 말씀을 하시면서 여러분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동정 잘 지키라고 동정 잘 지키라고 여러분한테 태어날 자녀들이 서울에 훌륭한 집안에 태어나서 보이지 않지만 두 손 모아 감사하고 있다고 여러분들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동정 잘 지키라고 그래서 그런 말씀을 저는 들었어요.
그랬는데 누가 또 그렇게 가실 줄 몰랐어요. 그 뒤로 차차 누우시더니만, 미음을 끓여 미음도 한 서너 번 끓였어요. 처음에 끓여가지고 국자 언니가 가지고 가셨는가? 그다음에 제가 가지고가고 한번은 듣자니까 유언을 하신다고 그래요. 유언을 하신다고 그래서 이 소리가 참인가 또 모르겠네. 그러고는 저는 항상 식구가 많으니까 예배자리를 제대로 참석을 못하고 아랫집에 가있는데 다 식구들은 가고, 집은 딱 비어가지고 있는데 하여간 날이 얼마나 우중충하고 캄캄한지 옆에가 사람이 있어도 안보여요. 안 보이는데 막 뛰어 올라갔어요. 뛰어 올라가다가 거기 산비탈을 올라가는데 그 캄캄한데 길이 안보여 더듬거려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그 선생님 집 있는데서 환한 광채가 아주 그냥 확 나타나, 내 앞에까지 갑자기 나타나니까 제가 어쩔 줄 모르겠대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해 개울가에까지 내려와 버렸어. 내가 왜 이러나 하고 다시 용기를 내가지고 막 이렇게 올라갔는데 뛰어가서 선생님 유언하시는 날 저녁인가 봐요.
그런데 그 애기들이 행자또래 금자 또래 그 사람들 쪽 가서 예배드리고 그날 저녁에 다 올라오라 해서 다 예배드리는데 선생님한테 인사하라고 어머니들이 그러니까 서울 어머니 듣기에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애들이 그러더래요. 그리고는 킥킥 웃고 애들이 달리니까 선생님이 딱 앉아서 ‘못난 것들’ 그러시면서 ‘그래도 인제는 다 내 딸이다. 내가 축복해 준다.’면서 그 사람들 나오는데 십자가를 그으면서 축복을 딱 하셨대요. 그리고 나서는 인제 그 뒤에 제가 뛰어 올라가서 너무 선생님 뵙고 싶고 갈수는 없고 그러니까 그것도 방에도 못 들어가고 봉창 옆에서 들었어요. 들으니까 그 시간에 무슨 말씀을 하시냐하면 숨이 막 그냥 40도로 열이 오르고 그러니까 숨이 차서 내가 살아도 영원히 여기서 살고 죽어도 여기서 영원히 살겠다고 죽어도 영원히 살고 살아도 영원히 살겠다고 그 말씀이 딱 들려요 그래서 ‘엄마, 됐다’하고는 막 뛰어 내려왔지요. 그랬는데 선생님은 뭐 그런 소리 듣고 내려왔는데 그 뒤에 선생님이 세시 어쩌고 그런 말이 들려요.
그래서 그 이튼 날은 인제 나는 선생님 막에서 하루저녁이라도 선생님을 지켜봐야지 하고 그날 저녁은 제가 와서 불을 때고 선생님 방에가 저녁내 이러고 있어요. 그런데 인제 쭉 앉아서 선생님이 아무래도 숨이 너무 차니까 어머니들이 뺑 둘러 앉아계시고 순녀 언니도 거기 계셨는데 순녀 언니가 둘이만 다른 사람들은 우느라고 찬송도 못 부르는데 순녀 언니만 자꾸 찬송을 부르라고 둘이만 부르라고 한다고 뭐라고 하데요. 그때는 한나 어머니가 그냥 이 선생님 막 너무 열이 오르고 그러니까 한나어머니 무릎에다 손을 대시면서 ‘어머니, 어머니 성모 어머니’ 내 그때는 식구들 다 맡기신 거 같아요. 그래가지고 막 그러니까 한나 어머니가 발을 뺐어놓고 대성통곡을 하시데요. ‘이 식구들을 다 어떻게 하냐’고 그래서 그때는 자꾸 누우시데요. 자꾸 일어나치랬다 눕히랬다. 그래서 잠깐 어머니들도 다 나가서 저쪽 방에서 쉬시는데 이제 정은 언니가 자꾸 물도 두 모금 받아 잡수시다 나중에는 인제 한 모금을 떠 넣어드렸는데 이렇게 붙들고 있고 정은언니가 떠 넣어 드렸는데 고개를 툭 떨치시더라고 그런데 이렇게 여기 붙들고 있는데 여기가 왔다갔다 왔다 갔다 하시더라고, 그런데 이렇게 그 고개를 다시 들어서 내가 뒤에 앉아있는데 돌아보세요. 그럴 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하면 내가 너를 기억한다. 그런 감이 착 느껴져. 그래서 내가 그 뒤로 선생님 가신다고 하니까 어머니들이 다 뛰어 들어오셔 가지고 어서 뉘우라고, 뉘였는데 그길로 가시데요. 가시기전에 ‘저 종로 네거리에 가서 이 기쁨을 전할까? 오 기뻐라, 기뻐라.’ 그 기쁨이 넘침은 말로 형용할 수 없겠어요. 그랬는데 그길로 가시고 참 나는 그 쓰라림 이라는 것은 평생 처음인거 같아요. 내가 부모가 죽었어도 그렇게 쓰라림을 못 느껴 봤어요. 사랑도 진짜 사랑 하나님 앞에 정말 깨끗하고 진짜 사랑,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았으니 나도 형제한테 그런 사랑도 베풀 줄 알았으면 항상 그런 마음이 소원입니다. 그만할까요?
(다른 분 말씀)
공순 언니는 요, 초창기 때 들어가셔 가지고 만 한 40여년 거기서 사셨는데요. 계명산이 제일 절정일 때가 언제였냐 하면 68년 69년 70년 그때가 아주 처녀들이 많이 들어갔을 거예요. 그래가지고 한나 어머니 서울 어머니 그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말하자면 수련장이신 거 같아요. 그래가지고 그렇게 그분들의 그 두 분의 말씀에 한마디 거역 없이 무조건 순종, 순종 순종으로만 살아오시고 또 저희들이 그때는 굉장히 절정기여가지고 너무너무 찬송도 막 천사노래 같았어요. 저희가 그때는, 오로지 못 먹고 고구마에다가 밀죽 밀 심어서 밀을 아침이면 갈아서 그걸로 죽 끓여먹고 그것이 식량 이었거든요. 일평생을 저희들은 그때 그 고난이 힘들었고 다 싫다고 광주로 다 내려왔거든요. 그런데 한번 이렇게 요동 없이 지금까지 계명산을 지키고 계시면서 정말 저희들이 여기서 힘들어서 거기 한 번씩 찾아갈 때 너무 푸근함을 느끼고 마음에 위로를 받고 와요. 지금까지도 언니는 그만큼 위대하시다는 것을 마음깊이 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