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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08일(금요일) 강화나들길 [17코스(고인돌 탐방길)&18코스(왕골 공예마을 가는 길)] 탐방기
탐방지 : 강화 나들길 [17코스(고인돌 탐방길)&18코스(왕골 공예마을 가는 길)]
[강화나들길 17코스(고인돌 탐방길) : 강화지석묘 - 삼거리고인돌 - 낙조대 – 오상리고인돌 (길이 12.0km 소요시간 4시간)
코스 개요 : 강화지석묘를 둘러본 후 출발하여 점골, 삼거리, 고천리, 오상리 등 고인돌을 탐방하는 코스로 해넘이가 절경인 낙조대를 거쳐 적석사로 내려 오는 길이다. 숲으로 이루어진 능선길은 오름과 내림이 좋아 등산로와 산악자전거 코스로도 이용한다. 오상리고인돌에서 끝나면 내가저수지 버스정류장까지 나와야 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 강화지석묘를 시작으로 삼거리고인돌, 낙조대를 지나 오상리고인돌로 향하는 코스
-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위엄과 멋진 자태를 뽐내는 다양한 고인돌을 관람할 수 있는 코스
- 고려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시원한 바람과 낙조대에서 보는 멋진 절경이 어우러진 코스
관광 포인트
- 우리나라에 있는 탁자식 고인돌 중 가장 크고 잘 보존된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 제137호)
- 고려산 자락에 흩어져 있는 '오상리 고인돌군'
- 강화8경의 하나로 일몰이 아름다운 '적석사 낙조대'
여행자 정보
- 강화터미널에서 27(강화)버스 탑승 후 강화역사박물관(고인돌) 정류장 하차
- 코스 내에 편의점이나 마트가 없어 물품을 미리 구비해야 함
- 비나 눈이 온 뒤에는 길이 미끄러워 스틱 등 장비를 잘 갖추어야 함
강화나들길 18코스(왕골 공예마을 가는 길) : 강화 역사박물관 - 석조여래입상 - 양오저수지 - 화문석문화관 - 강화역사 박물관 (거리 15km / 소요시간 4시간 30분)
코스 개요 : 강화역사박물관을 출발하여 5층석탑을 거쳐 석조여래입상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여유 있게(1시간소요) 봉천산에 오르면 강화도 북단과 개성 송악산을 조망할 수 있다. 석조여래입상부터 양오 저수지까지는 포장길이라 다소 피로감이 있다. 5월 초엔 매화마름을, 8월에는 왕골을 볼 수 있다. 화문석문화관에서의 체험은 휴식과 추억을 함께 준다. 다송천을 지나 돌아 오는 길은 피로감을 없애주는 힐링의 숲길이다.
- 강화역사박물관에서 화문석마을을 돌아 다시 강화역사박물관으로 돌아오는 순환코스
- 강화도를 대표하는 특산물 화문석과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을 만나는 길
- 산길과 포장길이 만나 복합적인 자연경관을 뽐내는 코스
관광 포인트
- 강화의 문화유산을 보존·연구하여 전시하는 '강화역사박물관'
- 고려시대부터 전수된 생활문화유산인 화문석을 볼 수 있는 '화문석문화관'
- 15만 평의 계곡지로써 수심이 25m나 될 정도로 담수량이 많은 '양오저수지'
여행자 정보
- 강화터미널 정류장에서 1, 18, 20, 21, 23, 25, 27, 30, 32번(35~95분 간격) 버스 승차 후 강화역사박물관 정류장 하차
- 화문석문화관에서 다양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에 참여 가능]
탐방코스: [오상리고인돌 버스 정류장~(0.7km)~강화 오상리 고인돌군제(17코스의 종점)~(2.1km)~적석사~(0.3km)~낙조대(보타전)~(1.5km)~강화 고천리 고인돌군~(5.4km)~강화 삼거리 고인돌군~(2.2km)~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2.0km)~강화 자연사박물관(17코스의 종점)~(0.1km)~강화 역사박물관~(0.1km)~강화 고인돌공원(18코스의 시점)~(1.7km)~하점성당~(0.7km)~강화 장정리 오층석탑~(0.9km)~봉천산~(1.2km)~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4.7km)~양오 저수지~(1.2km)~화문석 문화관~(4.9km)~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0.5km)~강화 평화전망대 버스 정류장] (탐방거리 : 30.2km)
탐방일 : 2023년 12월 08일(금요일)
날씨 : 미세먼지가 낀 날씨 [강화군 내가면 : 최저기온 7도C, 최고기온 14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8시간50분 소요)
05:36~05:55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6번 출구로 이동 [19분 소요]
05:55~05:57 강화터미널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05:57~07:33 3000번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 36분, 37개 정류장 이동]
07:33~07:45 오상리고인돌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62번 버스 승차 대기
07:45~08:05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버스 정류장에서 오상리고인돌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0분, 24개 정류장 이동]
* 08:05~08:13 오상리고인돌 버스 정류장에서 탐방 출발하여 인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산 124 번지에 있는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으로 이동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인 고인돌은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 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오상리 고인돌은 1972년에 1기가 알려져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 이후에 자세한 보고는 없다가 1990년대 초에 『강화도 고인돌 무덤(지석묘) 조사연구』를 통해 고인돌이 있는 오상리 산 125번지 일대를 자세하게 조사하여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사이에서 10기에 가까운 고인돌을 더 찾아냈다. 이 지역의 고인돌은 덮개돌을 부분적으로 손질한 흔적이 있고, 평면 형태는 모두 판돌형(板石形)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기념물로 지정된 내가 고인돌이 길이 335㎝로 가장 크고 나머지는 길이가 130∼260㎝로 다양한 편이다. 돌방(石室)은 돌널형태의 모습이고, 고임돌이나 막음돌을 세울 때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주변에 쐐기돌을 사용하였다. 돌방의 바닥은 대부분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1·4·9호 고인돌은 판돌이나 깬돌(할석)이 깔려 있었다.]
* 08:13~08:15 강화 나들길 제17코스(고인돌 탐방길)의 종점에 있는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을 사진촬영
* 08:15~08:38 인천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 181 번지에 있는 적석사(積石寺)로 이동
[적석사(積石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직할의 말사이다. 고구려 장수왕 때인 416년 천축조사가 강화도 고려산의 서쪽 기슭에 창건하였다. 적석사 사적비(事蹟碑)에 따르면, 천축조사가 강화도에서 절을 지을 곳을 물색하던 중 고려산 정상의 오련지(五蓮池)에 핀 5송이의 연꽃을 꺾어 바람에 날린 뒤 꽃잎이 떨어진 5곳에 적련사(赤蓮寺)를 비롯하여 청련사(靑蓮寺)·백련사(白蓮寺)·흑련사(黑蓮寺)·황련사(黃蓮寺)를 세웠다고 한다. 적련사가 지금의 적석사인데, 절 이름에 '붉을 적(赤)' 자가 들어 있어 산불이 자주 난다고 하여 '쌓을 적(積)' 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사적비와 범종루(梵鐘樓)·관음굴(觀音窟)·산신각(山神閣)·수선당(修禪堂)·종무소(宗務所) 등이 들어서 있다. 오컬트 덕후들이 흥미를 가질만한 초자연현상의 백미는 우물 감로정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적석사 경내에는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차고 달다'면서, '적석사 우물 색깔이 변하면 나라에 변란이 생긴다.'고 했다. 그런 감로정의 물색깔이 변했는데, 2002년 6월29일 서해에서 연평해전이 벌어진 날이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새벽에 기도하러 왔는데 갑자기 물이 황토색으로 바뀌었단다. 스님과 신자들이 더러워진 물을 아침 댓바람부터 퍼냈는데, 10시쯤. 서해에서 교전이 시작 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실화다.
절 뒤편 능선에 해수관음상이 있는 보타전이 바로 낙조대이다. 낙조대(보타전)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특히 아름다워, 강화 8경 중 으뜸으로 꼽는 적석사.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찾아가면 좋아할 만한 절집이다.
* 08:38~08:45 적석사(積石寺)를 사진촬영
* 08:45~08:48 낙조대(落照臺)로 이동
[적석사 낙조대(積石寺 落照臺)
인천시 강화군 중심부에 있는 고려산(436.3m)의 형제 봉우리 낙조봉(340m)에 적석사에서 만들어 놓은 야외법당이 보타전이고, 보타전이 위치한 곳이 낙조대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안의 일몰은 강화도의 작은 섬들과 바다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적석사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낙조 풍경은 강화 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며, 적석사 낙조대는 국내 3대 낙조 명소로 알려져 있다.]
[강화 8경 : 갑곶돈대, 광성보, 마니산, 석모도 보문사, 연미정(강화읍 월곳리 242), 적석사(고려산 서쪽의 형제 봉우리 낙조봉(340m)에 있는 사찰), 전등사, 초지진(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 08:48~08:51 낙조대(落照臺)에서 사진촬영
* 08:51~09:38 인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산 96 외 8필지에 있는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江華 古川里 고인돌群) 3개 중 3군으로 이동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江華 古川里 고인돌群)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에 있는 청동시대의 고인돌군이다. 1999년 4월 26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
고려산(해발 436m)의 서쪽 능선을 따라 해발 350∼250m 지점에 18기의 고인돌무덤이 흩어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이 분포하는 평균 고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인돌무덤들은 무너져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그 중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북방식 고인돌무덤은 덮개돌의 크기가 가로 3.35m, 세로 2.47m, 두께 0.65m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암석에는 고인돌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돌을 떼낸 흔적이 남아 있다.]
* 09:38~09:52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江華 古川里 고인돌群) 3개 중 1군과 2군이 있는 곳으로 이동
* 09:52~09:54 강화 고천리 고인돌군(江華 古川里 고인돌群) 3개 중 1군과 2군을 탐방
* 09:54~10:07 인천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 산 120 번지에 있는 강화 삼거리 고인돌군(江華 三巨里 고인돌群)으로 이동
[강화 삼거리 고인돌군(江華 三巨里 고인돌群)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삼거리 진촌마을 앞산인 고려산 서쪽 능선 상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북방식 고인돌이다. 1999년 4월 26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삼거리 진촌마을 앞산인 고려산 서쪽 능선 상에 북방식 고인돌무덤 9기가 일렬로 분포되어 있다.
어떤 고인돌무덤은 덮개돌 위에 작은 구멍이 여러 개 패여 있는데 이러한 모양을 남한에서는 성혈이라고 하고 북한에서는 별자리와 연관 짓고 있다.
작은 구멍이 있는 고인돌무덤의 크기는 굄돌의 높이 2.80m, 너비 0.90m, 두께 0.38m이다. 고인돌무덤 가까이에는 돌을 떼낸 흔적이 남아 있는 채석장이 있다.]
* 10:07~10:16 능선에 고인돌이 산재해 있는 강화 삼거리 고인돌군(江華 三巨里 고인돌群)을 사진촬영
* 10:16~10:54 하점 저수지를 거쳐서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743-4 번지에 있는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江華 富近里 점골 고인돌)로 이동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江華 富近里 점골 고인돌)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점골에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이다.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의 기념물 제32호 강화부근리점골지석묘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8월 1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군 하점면 고려산 북쪽에서 흘러내린 능선 끝자락 해발 약 15m 지점에 있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으로, 덮개돌 무게에 의해 약간 기울어진 상태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4.28m, 너비 3.7m이다.]
* 10:54~10:56 강화 부근리 점골 고인돌(江華 富近里 점골 고인돌)을 사진촬영
* 10:56~11:29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33에 위치한 강화 자연사박물관(17코스와 18코스의 접점)으로 이동
[강화 자연사박물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33에 위치해 있는 자연사박물관.
세계문화유산인 강화 고인돌유적지 부근에 위치한 이곳은 강화 역사박물관과 가까이에 있어 함께 관람하기에 좋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올바른 인식, 지구를 구성하는 광물과 생물에 대한 탐구를 돕기 위해 2015년에 문을 열었다. 강화 자연사박물관 로비에는 2009년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에서 발견되었던 길이 14.5m, 무게 20톤의 향유고래가 전시되어 있다.
관람 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매표마감 5시 30분).
휴관일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및 추석날 당일.
시설 안내
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곤충 기증 전시, 기획전시실.
상설 전시실 1층 : A지구의 탄생과 환경→B생명대폭발→C서식지의 확대→D인류의 등장.
박물관 2층
상설 전시실 2층: - E먹이사슬→F번식→G모방과 위장→H생물의 이동, 사진 전시실, 먹이사슬 구도.
요금
강화자연사박물관(강화역사박물관 포함)
어린이·청소년·군인 2,000원 /단체(20인이상) 1,500원 -
어른 3,000원 /단체(20인이상) 2,500원 - 유아·노인 무료 -유아(6세 이하),노인(65세 이상)
무료관람: 강화군민/국가유공자 및 그 가족/장애인수첩을 소지한 자 및 동반 보호자 1명/기증·기탁자 등. (주민등록증이나 기타 증명서를 제시하는 자에 한함)
주차 및 편의시설: 무료.]
* 11:29~11:43 강화 자연사박물관을 관람 [강화 자연사박물관과 강화 역사박물관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관람권 : 성인 3천원]
* 11:43~11:45 인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번지에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으로 이동
[강화도의 역사를 한자리에서 만나다, 강화도 강화역사박물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강화도. 섬이긴 하나 수도권에서 지척일 뿐 아니라 강화대교나 초지대교를 건너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고장이다. 강화도의 숨 가쁜 역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강화역사박물관은 강화도 여행에 앞서 먼저 둘러봐야 할 곳이며, 강화도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공간이다.
선사시대부터 구한말까지, 강화의 역사가 있는 곳
강화도는 문화유산 답사여행지로 제격이다. 섬 자체가 역사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강화도의 고인돌 유적은 전남 화순, 전북 고창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고려시대 몽골군과 맞섰던 삼별초항쟁, 조선시대 병자호란과 구한말 서구 열강의 빈번한 외침에 맞서 고군분투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강화 고인돌공원 내에 자리한 강화역사박물관은 강화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둘러볼 수 있는 곳이므로 강화도 여행에 앞서 가장 먼저 찾아봐야 할 곳이다.
옛 강화역사박물관은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갑곶돈대에 있었다. 역사관을 둘러보고 난 뒤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등 조선 말엽 서구 열강의 침탈 현장을 차례로 둘러보는 답사여행의 교과서 같은 코스였다. 하지만 역사관의 규모가 작아 강화도의 모든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없을뿐더러 근대 역사에 치우치는 답사여행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강화역사박물관은 지난 2010년 고인돌공원으로 확장 이전했다. 2개 층으로 구성된 강화역사박물관은 1층 매표소에서 바로 2층으로 올라가 선사시대를 먼저 둘러보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고려, 조선시대를 차례로 만난다.
박물관 2층은 구석기부터 청동기에 이르는 선사시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신나는 청동기시대 탐험과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 등 강화의 역사를 체험해보고 익힐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 유익한 공간이다. 신나는 청동기시대 탐험은 스크린을 통해 퀴즈와 퍼즐을 풀어볼 수 있으며, 참성단의 선녀와 기념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포토존도 마련되어 있다.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는 그림자 연극을 보여준다. 바닷길을 통해 고려청자를 필리핀으로 보내야 하는 강화 청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밖에 고려산 오련지, 전등사 나녀상, 손돌, 보문사 석실 나한상 등 강화에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구성해놓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화도 수난의 역사를 만나다
강화역사박물관 1층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과 역사적 사건들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조선시대 말엽 서구 열강의 빈번한 침략으로 강화도가 철저하게 유린되는데 병인양요, 신미양요, 강화도조약 등 역사적 사건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다. 병인양요는 천주교 박해를 구실 삼아 프랑스가 침범한 사건이고, 신미양요는 대동강에서 불탄 제너럴셔먼호를 빌미로 미국이 침범한 사건이다. 침략한 나라와 이유는 다르지만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여러모로 닮아 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라는 공통점 외에도 약탈과 환수의 과정이 꼭 닮았다. 프랑스는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있던 조선왕조의 의궤와 고서를 약탈했고, 미국은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인 수자기(帥字旗)를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외규장각의 조선왕조 의궤는 2011년 145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고, 수자기는 136년 만인 지난 2007년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돌려받은 기쁨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숨겨진 이면에는 서글프고 처참한 조선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침략하는 장면, 신미양요 때 광성보에서 펼쳐진 미군과 조선 관군의 전투 장면을 재현한 디오라마를 통해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신미양요를 재현한 디오라마에는 실물 크기의 수자기가 걸려 있어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교차한다.
강화도 해안선을 따라 진, 보, 돈대라 불리는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가슴에 새겼던 조선 효종이 북벌계획의 하나로 설치하기 시작해 숙종 때 이르러 완성한 5진 7보 53돈대다. 그중 1871년(고종 8년) 신미양요 때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다. 함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의 위력은 조선의 화포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초지진을 내준 이튿날 덕진진과 광성보도 함락되었다. 어재연 장군 휘하 천여 명의 조선 관군은 부상으로 오도 가도 못한 몇몇을 빼고 모두 전사했다. 조선군 진영에 내걸렸던 수자기는 성조기로 대체되었다. 신미양요 당시의 처참했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절로 숙연해진다. 지금도 초지진의 성벽과 소나무에는 전투 당시 포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초지진은 덕진진, 광성보와 함께 강화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으로 답사여행의 필수 코스다. 갑곶돈대에서 초지진에 이르는 강화나들길의 2코스 호국돈대길(17km)을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을 만나다, 부근리 고인돌
강화역사박물관 외부는 고인돌공원이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세계의 거석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돌을 고였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고인돌은 흔히 지석묘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만 3만 기가 넘는 고인돌이 있고, 북한에 있는 고인돌까지 합치면 4만여 기가 넘을 만큼 많이 분포하여 가히 고인돌 왕국이라 할 만하다. 전북 고창, 전남 화순과 함께 강화도의 고인돌 유적이 지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강화도에는 주로 고려산 기슭에 100여 기가 넘는 고인돌이 흩어져 있다. 고창이나 화순의 고인돌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고인돌 이미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인돌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고인돌이 이곳 고인돌공원에 남아 있다. 일명 부근리 고인돌로 불리는 것이다. 이 고인돌은 2개의 고임돌 위에 덮개돌이 덮여 있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이다. 그 모습이 마치 탁자를 닮아 탁자식 고인돌로 불리는데 높이만 2.6m, 덮개돌 무개만 50여 톤에 이르는 대형 고인돌로 당당하기 그지없다.
고인돌은 크게 탁자식과 바둑판식, 개석식으로 나뉜다. 그중 탁자식 고인돌은 무덤방이 땅 위로 노출되는 고인돌이다. 그러다 보니 탁자식 고인돌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도굴되고 훼손되기 쉽다. 지금의 부근리 고인돌은 2개의 고임돌과 1개의 덮개돌로 구성되어 있지만, 원래는 4개의 고임돌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도굴되고 훼손되어 빈 껍데기만 남은 고인돌을 만나는 셈이다. 이유야 어떻든 부근리 고인돌은 한 바퀴 돌아가며 둘러봐도 흠 잡을 데 없을 만큼 위엄이 가득한 장군의 모습처럼 위풍당당하다. 부근리 고인돌은 강화 부근리 지석묘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어 있다.]
* 11:45~12:00 강화나들길 제18코스(왕골 공예마을 가는 길)의 시점이자 종점인 강화역사박물관을 관람
* 12:00~12:01 강화 인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2 번지에 있는 강화 고인돌공원으로 이동
[우리나라 탁자식 고인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부근리고인돌은 거대하고 웅장한 탁자식 고인돌의 형태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길이 6.5m, 높이 2.6m로 그 무게만 50t에 달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부근리 일대의 터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청동기 시대의 주거형태인 움집과 고인들을 함께 볼 수 있도록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공원 안에는 고인돌의 제작 기법과 선사시대의 다양한 무덤 형태 등에 대해 알 수 있는 공간과 부근리 지석묘, 선사시대의 주거지 모형 등을 전시해 놓았으며 바로 옆에는 어린이들이 선사시대를 상상할 수 있도록 공룡 모형도 함께 만들어 놓았다.]
[강화도의 고인돌무덤
출처 : 강화도의 고인돌무덤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2012. 12. 27., 이형구)
[이형구 : 선문대학교(鮮文大學校) 고고연구소 소장 ]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은 그 수량과 특유의 무덤 구조, 형태의 다양성으로 인해 선사시대 인류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무덤은 무려 2만 기가 넘게 전국적으로 발견되고 있어 그 숫자 면에서 세계 제일일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상 초기국가 형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역사 유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북아시아 일대 청동기시대의 수장(首長)급들의 무덤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은 대체로 북방식 고인돌무덤과 남방식 고인돌무덤으로 나뉜다. 북방식 고인돌무덤은 땅 위에 4개의 판석으로 된 고임돌(支石)을 세우고 평면이 긴 네모꼴인 무덤방(墓室)이 되도록 널을 짠 다음 그 위에 평평하고 납작한 큰 덮개돌(蓋石)로 덮는 형식이다. 남방식 고인돌무덤은 대체로 땅 아래에 무덤방을 만들고 땅 표면에 다른 돌덩이나 자갈돌을 깐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얹는 형식이다. 또 남방식 고인돌무덤 중에는 땅 아래 토광(土壙)이나 돌널(石棺) 위에 덮개돌만 올려놓은 이른바 개석식(蓋石式) 고인돌무덤도 있다.
저자는 1992년,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를 내놓은 바 있다.
강화도(江華島)의 청동기시대 문화유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적이 고인돌무덤이다. 1980년대 이후 저자는 강화 본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고려산(高麗山, 해발 436m) 이북의 1개읍·4개면에서 무려 1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무덤을 발견 또는 조사하였다. 이때 조사에서 강화도에 있는 전체 고인돌무덤 중 절반에 남방식 고인돌무덤과 북방식 고인돌무덤이 함께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강화도 고인돌무덤은 그 형태나 수량 면에서 세인의 주목을 끌게 되어 마침내 2000년 11월 29일 유네스코(UNESCO)가 주관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강화도 고인돌무덤의 고임돌이나 덮개돌에 사용된 석재는 같은 재질로 강화에서 흔하게 보이는 화강편마암이다. 무덤 주위에 이만한 석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먼 돌산이나 해안에서 바위를 채석하여 운반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의 산상에서 자연 판상석을 떼어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대형 판석을 떼어내 5리나 10리 길을 운반한다는 것은 지금의 육로 사정이나 운반 수단을 고려해보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200명에서 300명 이상의 인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지휘 감독할 수 있는 지도력이나 통치력을 상정해볼 수 있다. 당시 강화도 고대 사회의 사회적 구성과 농경 생활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활동, 권력의 집중 따위를 짐작할 수도 있다. 하나의 고인돌무덤을 만든다는 것은 이와 같은 엄청난 인력 동원과 운반수단, 역학적 구조 등을 고려해볼 때 불가사의한 일이다. 고려산 중북[해발 200m 정도]까지 올라가 고인돌무덤을 축조한 강화도의 고인돌무덤 사회 주민들이 고려산 북쪽에 집중적으로 무려 100여 기에 가까운 고인돌무덤을 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당시에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사회 조직보다 훨씬 더 큰 사회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마한(馬韓)에는 50여 개의 작은 나라가 있다”고 했는데, 이 작은 나라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이러한 선대(先代)의 고인돌무덤 사회로부터 소국(小國)으로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적 제137호인 부근리 고인돌무덤과 같은 대형 고인돌무덤 하나가 독립적으로 세워졌다면 이 일대의 사회적 구성이 소수일 수도 있고, 지도계급이 서로 단절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형 고인돌무덤이 2기 이상이나 한데 모여 있고, 소형 고인돌무덤 10여 기가 함께 세워지던가 아니면 축조 세대(世代)를 달리하여 세워졌다면 당시의 사회조직과 경제적인 구조가 복잡했고, 나아가서는 정치적인 권력의 집중이 엄청나게 증대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강화도 북부에 고인돌무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사회조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강화도의 고인돌무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적 자원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이미 오래전부터 강력한 사회조직이 발전했을 것으로 보인다.
1966년에 하점면 부근리 743의 4번지 점골 고인돌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70m 지점에서 청동기시대 집자리가 발굴되었다. 당시 동쪽 한 벽면의 길이가 2.5m, 남쪽 벽면이 1.6m 정도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반수혈식(半竪穴式) 벽면은 대부분 무너지고 동면만 15cm 높이로 남아 있어 형태만 짐작할 뿐 전체적인 윤곽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의 벽면 아래에서 일렬로 작은 기둥을 세웠던 기둥 구멍[주공(柱孔)]이 발견되었고, 이 집자리의 주거면 가운데에서 짧은 빗금무늬[단사선문(短斜線紋)]가 있는 이중구연(二重口緣)과 각형토기(角形土器)의 바닥 모양을 갖춘 토기 조각도 출토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각형토기가 임진강 이남에서 발견된 것은 강화도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 서북부와 요동반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유형인 각형토기가 유행한 시기는 고인돌무덤 시기와 비슷하다.
2000년 4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 발굴단[단장 이형구]에 의하여 발굴된 오상리 고인돌무덤은 고려산 서록 낙조봉의 능선 끝자락에 위치한 해발 76m의 조그만한 야산의 낙타 등 같은 능선상에 12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고려산 아래 약 200평 남짓한 구릉 위에 12기의 북방식 고인돌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2000년 4월~2001년 9월,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소장:이형구 교수)가 발굴한 후 복원 정비되었다.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오상리 고인돌무덤의 축조방식과 고인돌무덤의 하부 구조는 고임돌에 쐐기를 박아 바로 세우고 마감돌로 막은 후, 시신을 넣고 덮개돌[개석(蓋石)]을 덮은 다음 주변에 돌을 쌓은 적석(積石) 또는 포석(鋪石) 방식을 사용하여 매우 특이하다.
고인돌무덤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묘제(墓制)이다. 이번 발굴 결과 청동기시대의 짧은 빗금무늬[단사선문(短斜線紋)]를 시문한 이중구연 조각들이 무문토기 편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들 토기 편들은 고인돌무덤 유적의 표토(表土)와 고인돌무덤의 하부구조 부근의 부식토층(腐植土層)에서 출토되고 있어 고인돌무덤 축조 당시에 함께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토기는 이중구연이 출현하고, 구연부와 구연부의 돌대에 빗금무늬를 시문하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하점면 부근리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서 출토된 바 있는 각형토기류의 파편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각형토기류는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에서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로 이어지는 과도시기의 빗금무늬토기로서 대략 기원전 15~10세기경에 유행하던 토기이다. 이는 오상리 고인돌무덤의 주인공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유물의 연속성은 바로 인류의 연속 성과도 통하기 때문이다. 발해연안의 고인돌무덤의 연대가 신석기시대 말기 혹은 청동기시대 초기인 점을 고려할 때 강화도의 고인돌무덤은 대체로 기원전 1500~1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인돌무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만주 지방에도 많이 분포하고 있다. 북방식 고인돌무덤은 한반도의 경기도·강원도 서북부·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 지방과 요동반도 일대에 연결되어 있어, 이 지역의 고인돌무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한편, 고인돌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능선 위 부식 암반층[석비례층] 위에서 석영(石英)으로 만든 구형석기(球形石器)가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다면체(多面體)로 이루어진 이 구형석기는 구석기시대까지 연대를 올려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 더욱 주목을 끌고 있는 유물이다. 이 밖에도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에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돌칼·돌화살촉·돌검·돌도끼·대롱옥[관옥(管玉)]·미완성 석기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한 장소에서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에 걸친 유물이 함께 나온 예는 지금까지 처음 있는 일로, 우리나라의 인류(人類)가 어디서 유입되어 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까지 이어지면서 계속 살아왔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사례이다.]
* 12:01~12:06 강화 나들길 제17코스(고인돌 탐방길)의 시점인 고인돌 공원에 있는 강화 부근리 지석묘를 사진촬영
[강화 부근리 지석묘 (江華 富近里 支石墓)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에 있는 청동기시대 화강암으로 된 북방식 고인돌. 지석묘. 사적.
1964년 7월 1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하는 것으로, 지상에서의 높이 2.6m,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이며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긴 축은 남북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밑에는 2매의 굄돌이 비스듬히 있다. 북방식 고인돌의 구조는 4매의 굄돌로 직사각형 돌방을 구축하는데, 이 고인돌은 짧은 변을 이루는 2매의 굄돌이 과거에 파괴되어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표면조사가 이루어졌을 뿐 아직 학술적인 발굴조사는 행해지지 않은 유적이다. 인근 삼거리에 있는 고인돌에서 무문토기조각과 간돌검(마제석검), 돌가락바퀴(방추차)를 비롯한 유물들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고인돌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파괴된 고인돌이 있는데, 굄돌은 없어지고 판석의 뚜껑만 수직으로 엎어진 채 남아 있다. 이 밖에도 강화도에는 삼거리 · 하도리 등지에 북방식과 남방식이 10여 기 남아 있어서 부근리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사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고 있다. 강화의 고인돌은 2000년 11월 29일 호주 케인즈 제24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특징
강화도에 분포한 고인돌의 특징은 대략 5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고려산 · 별립산 · 봉천산 등 산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특히 고려산 일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고려산을 중심으로 90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고, 가장 북쪽의 별립산과 봉천산 일대에 32기가 분포하는 등 강화의 북쪽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둘째, 여러 기의 고인돌이 한 곳에 떼를 이루고 있다. 10여 곳이 넘는 지역에 150여 기가 분포하는데 한 유적에 평균 14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분포한다.
셋째, 산의 경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평지인 곳이 당시에는 바닷가나 갯벌로 되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탁자식 고인돌 비중이 가장 높다. 탁자식 고인돌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북한 지역보다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점이 특징적이다.
다섯째, 굼[星穴]이 만들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가 적다는 점이다. 총 150여 기의 고인돌 중 굼이 만들어진 고인돌이 3기(삼거리 고인돌 등)에 지나지 않는다. 굼은 대개 뚜껑식에서 발견되는데 강화는 대다수가 탁자식이기 때문에 그 수가 적은 것으로 추정된다.]
* 12:06~12:25 인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1100번길 13 번지에 있는 하점성당(河岾聖堂)으로 이동
[천주교 인천교구에 속해 있는 성당으로, 주보성인은 성 미카엘이다. 1967년 8월 27일 강화성당이 관할하는 장정리공소로 설정되었다. 공소로 설정되기 며칠 전인 8월 20일 현역군인 통신관으로 근무하던 이가 기증한 공소 부지 1,243㎡에 20여 명의 신자들이 돼지를 키워 마련한 기금으로 건축면적 66㎡의 경당을 완공하였다.
세월이 흘러 신자가 증가하고 경당 건물이 낡아지자 1999년 봄 신축 공사를 시작하였고, 1년 만에 새 경당을 완공하여 2000년 3월 10일 축복식을 올렸다. 재건축된 경당은 건축총면적 545.45㎡의 지상 2층 규모로 교육관과 사제관을 갖추었으며, 목욕탕이 없는 동네 사정을 고려해 경내에 샤워장도 설치하였다.
장정리공소는 2002년 12월 27일 강화성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하였고, 강화군 하점면 일부 지역과 양사면 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한다. 성당 뒤쪽의 봉천산(奉天山) 골짜기로 조금만 올라가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보물 제10호)’과 ‘강화 하점면 석조여래입상(보물 제615호)’이 있다.]
* 12:25~12:34 인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 193 번지에 있는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으로 이동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江華 長井里 五層石塔)
인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석제 석탑.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193번지
이 탑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60년 보수 ·재건하였으나 파손이 심하여 3층 이상의 옥신, 5층의 옥개석, 상륜부(相輪部:탑의 윗부분)가 없다.
기단은 단층으로 지대석(地臺石) 위에 4개의 돌로 구성된 중석(中石)이 있는데, 두 면은 우주(隅柱:모서리기둥)가 있는 판석(板石)이며, 두 면은 면석(面石)만으로 되었고 탱주(撐柱:탑신을 지탱하는 기둥)가 없다. 그 위로 덮은 갑석(甲石)은 한 장의 두꺼운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부연(附椽)이 없고 중앙에 희미한 1단의 몰딩이 있다.
탑신부는 초층이 두 장의 돌로 되었고 큼직한 우주의 형태가 새겨져 있다. 초층 옥개석 이상의 옥신과 옥개석은 모두 하나의 돌로 되었으며 우주형은 형식적으로 표시되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평평하고 얇은 편이며, 받침은 초층이 4단이고 2층부터 4층까지는 3단으로 되어 있어 1단이 줄었다. 추녀 밑은 직선이나, 모서리에 이르러 약간 치켜져 있고, 낙수면은 밋밋하게 경사져 있다. 전각(轉角)의 반전(反轉)은 매우 경미하다. 2층 이상의 옥개석도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으나 크기가 점점 줄었으며 각층의 파손이 심하여 전각부(轉角部)는 대부분 깨져 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져서 그 형태를 알 수가 없다. 전체로 보아 석재(石材)가 약한 탓도 있겠으나 조각수법이 매우 엉성하고 형태는 둔중하며 생략과 형식화가 역력하다.
부재(部材)가 많이 상실되어 2층 옥개석 위에 3 ·4층의 옥개석이 옥신 없이 쌓여 있어 이것 또한 외관을 손상시키고 있다. 이 탑은 그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 12:34~12:38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된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을 사진촬영
* 12:38~12:57 인천 강화군 양사면 덕하리에 있는 봉천산(奉天山, 291m)으로 이동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하점면과 양사면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고도:291m). 봉두산(鳳頭山), 하음산(河陰山)이라고도 부른다. 『강도지』에 "봉두산은 곧 하음성산(河陰城山)인데 봉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에 하음산이라 표기되어 있고 정상부에 봉수, 산 남쪽에 하음현 치소(治所)가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산 사면이 하점면 신봉리 · 장정리 · 양사면 교산리 · 덕하리에 걸쳐 있다. 고려 시대에 하음백(河陰伯)으로 봉해졌던 하음 봉씨(河陰奉氏) 봉천우(奉天佑)라는 사람이 봉천대를 쌓았다고 전하는 산이다. 봉천우는 봉천대에서 자신의 조상을 도와준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강화부지』에 "봉두산은 강화부 북쪽 이십 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하음산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방대(方臺)와 석축이 있으며 옛날 하음현이 그 아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 산의 정상부에는 봉수가 설치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하음산 봉수는 동쪽으로 송악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교동현 화개산에 응한다."고 되어 있다.]
[봉천산 자락에는 나라에서 지정한 보물이 2점이 있다. 하나는 하점면오층석탑(보물 제10호)이고, 또 하나는 석조여래입상(보물 제615호)이 그것이다.]
* 12:57~13:03 봉천산 정상에 있는 봉천대를 사진촬영
[봉천산 정상에는 팔각정의 쉼터로 건립한 봉천정과 북녘산하를 볼 수 있도록 개풍군 전경사진을 확대하여 간판을 세워놓았다. 봉천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사방은 끝이 없다. 평화로운 농촌마을과 서해바다가 한눈에 펼쳐진다. 별립산과 고려산이 이웃처럼 솟아있고, 교동도가 바다 건너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성강 입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봉천산 정상에 있는 봉천대는 높이 5.5m, 밑지름 7.2m의 정방형 사다리꼴 모양의 돌로 쌓은 제단이다. 마치 윗부분이 잘려 나간 피라미드를 연상시킨다. 고려 때는 나라에서 제천의식을 행했던 축리소(祝離所)로 사용되었고, 조선중엽 이후로는 봉수대(烽燧臺)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13:03~13:34 인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 122 번지에 있는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으로 이동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江華 長井里 石造如來立像)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에 있는 고려 후기에 조성된 불상. 총높이 3.26m, 불상 높이 2.82m. 보물 제615호. 두꺼운 화강암의 판석에 조각된 여래입상으로 머리에 표현된 계주라든가, 비만한 얼굴, 움츠린 듯한 자세, 형식적이며 간략하게 처리된 옷주름선 등은 고려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양오길43번길 54 (장정리)
197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석불입상은 두꺼운 화강암 판석에 조각된 것으로 현재 보호각 안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는 3.26m, 불상 높이는 2.82m이다. 불상이 있는 봉천산(奉天山) 정상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천대(奉天臺)가 있고, 가까운 곳에 고려 후기의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이 전해오고 있다.
내용 및 특징
이 석불입상은 판석(板石)에 새겨진 것으로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과 불신(佛身)으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이며 머리 정상에는 높고 큼직한 육계(肉髻)가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다소 팽만감이 있지만 딱딱한 느낌이 들며, 각 신체도 평판적이며 어깨나 팔 등은 역동성이 없다. 긴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크며, 짧고 굵은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었다. 수인은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해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변형된 시무외인(施無畏印) 즉 설법인을 취하고 있다.
착의법은 두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 형식이며 깊게 새겨진 옷주름은 상체에서부터 하체에까지 넓은 U자형으로 유연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두꺼운 옷주름으로 인해 신체의 양감은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왼쪽 가슴 부근에 몇 가닥의 주름이 삼각형을 이루며 어깨 뒤로 넘기고 있는 것은 고려전반기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대의 아래에는 군의(裙衣)의 자락이 발목까지 드리워져 있다. 두 발은 뒷꿈치를 맞붙이고 좌우로 벌린 모습으로 발가락까지 표현하였다.
광배는 주형거신광으로 2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신광(身光)과 두광(頭光)을 구분하고 있는데, 그 안쪽에는 둥근 무늬를 새기고 있다. 광배 윗부분의 가장자리에는 화염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불상은 조형적인 면에서 경직되고 투박하며, 선각으로 성글게 표현된 옷주름, 부자연스런 손, 평판적인 신체 표현 등에서 볼 때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의 조형적 요소를 계승한 것으로 생각되며,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에 천도했던 고려후기 13세기 무렵에 제작된 불상이라고 생각된다.]
* 13:34~13:44 1978년 보물로 지정된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을 사진촬영 후 간식
* 13:44~14:24 인천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119 번지에 있는 양오 저수지로 이동
[양오 저수지는 계곡형 저수지로 수면 면적은 13만평이고, 깊은 곳은 수심이 25m나 될 정도로 담수량이 많은 저수지다. 주변 갈대와 숲이 어우러져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
이 저수지에서 낚시로 잡을 수 있는 主어종은 "토종붕어"다. 기본적으로 잡으면 월척 이상이며, 붕어가 깨끗하여 방문한 낚시인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 양오 낚시터는 공기가 맑고 풍광도 좋으며 가족끼리 오셔서 휴가를 즐길 수 있는 낚시터다. 주변에 펜션과 볼거리가 많으며 수상 방갈로도 넓고 깨끗하다. 또한 식당과 매점이 있으며 백반 제육볶음 오징어볶음 닭도리탕 등의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 14:24~14:56 인천 강화군 송해면 장정양오길 413 번지에 있는 화문석 문화관으로 이동
[강화 화문석문화관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에 있는 화문석 전시관.
강화도의 특산품인 화문석의 역사와 전통적인 제작법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설립된 전시관이다. 왕골 공예품을 전시하여 강화도 왕골 제품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학습기능을 갖춘 곳으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상설 전시관으로 다양한 테마의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짚 풀과 인간, 왕골 재배와 가공, 화문석 제작, 화문석의 역사, 화문석 문화, 화문석 계승 등을 테마로 전시하고 있다.]
* 14:56~15:46 화문석 문화관을 관람 후 집에서 준비해 간 음식으로 식사
[입장권은 성인 기준 1천원]
* 15:46~16:50 인천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 번지에 있는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로 이동
[도착 시각이 동절기 매표시간 마감시한인 16시를 넘어서 입장할 수 없었음]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북녘 땅
망원경 초점을 맞추니 북한 땅이 눈앞으로 달려온다. 눈이 시리게 새파란 하늘 아래 그들도 우리처럼 길을 걷고, 밭을 매고, 창문을 여닫는다.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새빨간 자동차가 지나간다. 강 건너 미루나무 밑의 도로가 비포장임에 확실하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북녘 마을에 우리는 언제쯤 갈 수 있을까?
강화평화전망대는 평화통일을 기원하고,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들을 위한 곳으로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의 건물이다. 지하1층과 지상 4층은 군사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한다.
[1층] 관리실, 통일염원소, 휴게실 및 식당, 기념품매장
[2층] 2층은 강화도와 국방, 끝나지 않은 전쟁, 통일로 가는 길 등의 구성으로 남북한의 상황과 통일에 대한 열망, 통일 후의 비전을 제시한 전시관이다. 전쟁 당시 깨진 철모에 노란 나비가 와서 앉은 전시물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3층] 전망대가 있고, 고성능 망원경으로 북한의 온 산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북한까지는 직선거리 약 2.3km. 정말 가깝다. 소리 치면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손을 흔들어 줄 것 같다. 해안가를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우측으로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경계로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 신시가지까지 확인할 수 있다. 좌측으론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와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이곳에 서서 북한을 바라보면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한다.
[지하1층, 4층] 군부대 전용시설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함
[야외] 망배단
※ 전망대 입장시 검문소를 거쳐야 한다.
매표시간 : 동절기 9시~16시, 하절기 9시~17시]
[2023년12월08일(금요일) 강화도 일몰시각 : 17시15분]
* 16:50~16:55 평화전망대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6:55~18:11 평화전망대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27번 버스 승차 대기
[인천 27(강화)번 버스 노선 및 시간표 운행 정보.
노선특징 : 순환버스
첫차 : 06:05 (첫차 운행 시간)
막차 : 20:30 (막차 운행 시간)
기점 : 강화터미널
종점 : 생설미
배차간격 (평일) : 60 분
인천 27(강화)번 버스 노선 및 시간표, 정류소번호 안내
순번 정류장(노선) 정류소번호
1 강화터미널 43096
2 축협 43061
3 강화군청 43065
4 중앙시장 90125
5 강화슈퍼 43068
6 여고입구 90232
7 강화서문 43064
8 진고개(5연대입구) 43794
9 고인돌체육관앞 90045
10 송해교회 43769
11 송해삼거리 43819
12 전원미술관앞 43810
13 오류내 43389
14 파라다이스공원 43828
15 부근삼거리 43652
16 하점공단 43448
17 강화역사박물관(고인돌) 43670
18 하점우체국 43838
19 각곡 43602
20 하점초등학교 43739
21 하점면사무소 43834
22 곡촌 43816
23 신봉이발관 43786
24 신촌 43753
25 신봉삼거리 43463
26 상덕현삼거리 43767
27 덕고개삼거리 43750
28 양사면사무소 43501
29 양사파출소 43722
30 덕응 43983
31 응곡 43696
32 교산리입구 43694
33 마미 43765
34 목장앞 43503
35 생설미입구 43608
36 생설미 43746
37 생설미입구 43607
38 구북성초교 43506
39 외뜰 43687
40 북성교회 43764
41 요곡 43762
42 제적봉앞마을 90061
43 제적봉입구 43686
44 평화전망대 43760
45 철곶 43759
46 철산리입구 43685
47 덕하교앞 43727
48 당산종점 43725
49 당산리 43700
50 당산리검문소 43699
51 박물관앞 43698
52 숭뢰2리 43704
53 호박골사거리 43804
54 송해초등학교 43820
55 송해면사무소 43809
56 송해삼거리 43386
57 송해교회 43384
58 고인돌체육관앞 90046
59 진고개(5연대입구) 43380
60 강화서문 43063
61 여고입구 90233
62 강화슈퍼 43066
63 중앙시장.고려궁지입구 43067
64 강화군청 43108
65 수협 43062
66 풍물시장 43941
67 강화터미널 43096
※ 위 정보는 운행 상황에 의해 실제와 다를 수 있음. 정확한 정보는 강화버스터미널 전화인 032-216-9105로 문의 필요]
18:11~18:37 27번 버스를 타고 평화전망대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26분, 23개 정류장 이동]
18:37~18:42 합정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18:42~20:20 3000번 버스를 타고 강화터미널 버스 정류장을 출발하여 합정역 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 38분, 37개 정류장 이동]
20:20~20:30 합정역에서 역촌역으로 가는 6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20:30~20:45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에서 역촌역으로 이동 [15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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