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공부하는 분들과 1학기 책거리 행사인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6.6. 목요일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에 있는 만해기념관과 남한산성이다
만해기념관은 만해 한용운을 기념하는 사설전시관으로
1981년 심우장에 개관하였으나, 1990년 이곳 남한산성으로 옮겼다한다.
님의 침묵 원본
한글맞춤법이 시행되기 이전의 작품으로 고어와 한자가 섞여있다.
님의 침묵
한 용 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현대어로 바꾼 시의 전문)
작은 정원이 있으나 개방되지 않았다
만해라는 이름은 크지만 내용물과 전시실 규모가 너무 적어 다소 아쉬움이 든다.
점심식사를 하고 인근에 있는 남한산성 행궁으로 간다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먼저 행궁을 돌아보고 북문으로 가서 서문, 수어장대, 남문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계획했는데
저녁 이후에 온다던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부부나무인 듯 서로 감싸주는 한 쌍의 느티나무가 푸르다
진행을 북문으로 해서 서문으로 수어장대로 갈려고 했으나
자기능력에 맞는 코스로 흩어져 수어장대로 향했다
나는 교수님을 따라 국청사 방면으로 올라갔다
국청사
서문 아래 있는 사찰. 팔도의 승군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창건한 7개 사찰 중 하나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담당하였고, 군기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하였다 한다
구한말에 의병의 군기창고로 사용되다가 비밀이 누설되자
일본군이 불태워서 절터만 남아있던 것을 1968년에 보운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한산성
사적 제57호. 우리 민족에게 굴욕과 좌절을 안겨 준 상징으로 여러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둘레는 약 12.4km. 2014.6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연간 3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남한산성의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 터를 활용한 것으로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다.
남한산성은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성을 기초로
후대에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현재 1개의 장대와 4개의 성문이 있다.
서문에 올랐으나 서울 시내가 안개 속에 빠져 있었다
실망으로 카메라도 꺼내지 않아 서문 사진도 없다
드디어 수어장대,
어느 친구가 찾아보라한 명품 소나무가 여행객을 맞이한다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 남한산성에 구축된 5장대 중 하나로 화려하고 웅장하다
5장대는 모두 붕괴되었다가 18세기 중후반에 서장대와 남장대를 2층 누각형태로 다시 건립하였으나
현재 서장대인 수어장대만 남아있다
영조 때 ‘수어장대(守禦將臺)’라는 편액을 달았다고 한다
남문
성의 정문으로 4대문 중에서 가장 큰 문이다
병자호란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올 때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지금의 문루는 1976년 화강석 장주초석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새로 보충하여 복원하고 현판을 단 것이다
이렇게 행사사진 중 얼굴 없는 사진만 골라 올린다.
첫댓글 남한상성 까지왔다가 그냥 갔구나
얼굴한번 못보고,
그러게, 동창회도 안 오고 얼굴 보기 어렵네
잘 지내시지?
이번 여행은 단체 여행이었네
공교롭게도 금요일 매제의 죽음이 있었네
인생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