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소설속의 사랑]하일지 ‘진술’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는 소설을 쓸 때 사전 구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첫 줄이 떠오르면 거기에 이어 둘째 줄을 쓰고, 둘째 줄에 이어 셋째 줄을 쓰고…. 이렇게 하염없이 써나가다 보면 이야기의 윤곽이 잡혀가기 시작하고,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 스스로 갈피를 잡아가게 되고, 그리고 급기야는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마지막 문장을 써야 할까 하는 데 대해서도 알게 된다.
진행되고,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쓰는 것과 함께 끝난다고 할 수 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미리 구상해보려고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불성실한 건 아닐까 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피카소의 어록에서 이런 말을 발견하게 되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나의 구상도 진행되고, 작업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내 구상도 끝이 난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쓴 작품 중에 미리 구상을 하고 쓴 작품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전 구상이 없이 쓴 작품으로는 나의 아홉 번째 소설 ‘진술’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하일지판 아라비안나이트’를 연재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정열을 소비해 좀 지쳐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말로 깊이 숨어서 본격적인 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나는 다소 비장한 기분으로 합천까지 차를 몰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줄도 떠오르지 않았다. 절에 도착한 뒤에는 정성껏 세수를 하고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면벽수도를 하는 승려처럼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절 뒤편 구석진 곳에 위치한 내 방 책상 위에는 담배꽁초만 쌓여갈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일주일째 되던 날부터는 급기야 도둑고양이처럼 절 뒷방에 숨어 혼자 곡차(穀茶)를 마시기 시작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다.
못했소.”
세 번째 줄을 떠올릴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나는, 살인혐의로 경찰에 끌려와 취조를 받고 있는 한 철학교수가 하는 하룻밤 동안의 진술을 기록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보자는 야심이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모티브를 가지고 한 편의 사랑 이야기를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진술도 이제 웬만큼 끝난 것 같군요. 그렇지요?’라는 문장들로 사실상 끝이 난다. 그런데 이 마지막 문장들을 쓰기까지는 어언 2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그러나 김유리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자 두 사람은 도망을 가 바닷가 어느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낸 뒤 외국으로 떠난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A는 철학 공부를 하고, 유리는 뒷바라지를 한다. 그러던 2년 뒤 어느날 유리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는다.
(Pathological Mourning, dilusion), 즉 병적 애도 반응에서 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말하자면 죽은 김유리의 환영을 보면서 그녀가 살아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무려 8년 동안 환영과 함께 산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대학 교수가 된다.
깨어나 새 출발을 하라고 권한다. 김수남의 이런 권유에 A는 큰 혼란과 함께 심각한 불행감에 휩싸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아내는 엄연히 살아 있는데 자꾸 죽었다고 하는 김수남이야말로 실상이 아니라 허상이라고 판단하고, 허상을 제거하기 위하여 김수남의 머리를 둔기로 쳐 죽인다. 김수남을 살해한 A는 10년 전 첫날밤을 보냈던 바닷가 그 호텔로 가 투숙했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그날 밤 경찰 앞에서 한 그의 모든 진술이 바로 이 소설인 것이다.
앞서 1993년에 나는 미국 어느 대학에서 강연을 한 바 있는데, 그 강연의 주제가 바로 ‘사랑’이었고, 그 강연의 원고를 준비하느라 나는 사랑에 대하여 사색한 바 있다. 그 강연에서 내가 했던 말의 한 구절을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가 없는 진부하고도 공허한 말처럼 되어버렸다. 굳이 그 실제적 의미를 밝혀낸다면, 사랑은 어떤 대상에 대한 과장된 감정의 지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을 참으로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사랑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사랑이 어떤 대상에 대한 과장된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게 단정할 수만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과장된 감정이야말로 생산과 창조의 모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있다고 할 수 있다.
과장된 심리의 지속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고, 그런데도 그의 사랑은 그의 학문적 창조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보면, 그때 그 강연이야말로 이 작품을 쓰게 된 잠재적 계기가 됐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이념이 항상 사랑을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사랑이야말로 혁명의 유일한 이유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독이란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그것은 사랑이 좌절되었거나 사랑에 대한 기대나 희망이 좌절된 데서 오는 슬픔을 두고 일컫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룬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종종 듣게 된다. 독자들의 이런 지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의 이런 지적을 들을 때마다 약간 섭섭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이성(理性)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일까, 인간의 절망의 밑바닥은 얼마나 깊은가 하는 데 대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을 쓸 때 내가 품었던 야심은 좀더 큰 것이었으니, 인간 존재의 근원적 비극성을 형상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경향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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