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의 숲 / 배한봉
피고 지는 것이 꽃의 말이라면
날고 우짖는 것은 새의 말
사람이 따라 흘얼거리면 노래이고
기록하면 시였다
자연의 모든 말은 은유였으니
사람의 말도 은유였다
모든 말이 시와 노래였던 때는
사람도 자연이던 때
토끼와 뻐꾸기와 구름과 별
달과 해와 바람 모두 한 식구였다
사람이 도시를 만든 뒤부터
집 잃은 제비는 돌아오지 않았고
이슬은 별빛을 품지 않았다
회색 풍경 속의 텅 빈 곳이여
나무의 말 다람쥐의 말 들으며
나는 오늘 산을 오른다
물통을 앞에 놓고 옹달샘 가에 줄 선
새벽 산골짜기의 우리여
은유였던 사람의 말 기억하는
숲의 이야기에 귀 귀울여 보라
흥얼거리면 노래 받아쓰는 시
은유의 숲에 들면 누구나
자연이 된다 눈짓도 인사도
싱싱한 자연의 말로 살아난다
대비(大悲)
배한봉
물은, 차마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났다
나무는, 차마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날 수 없어서 그 자리에
붙박였다
출전 『악기점』(세계사, 2004)
`차마`에 관해
생각한다.
차마는 일종의 처마.
떠나는 이를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내다 건 손차양 같은 것.
차마는 이곳과
그곳 사이에 난 물길.
여기서
`아득히 먼 곳`으로 흘러간
눈물 한
줄기다.
차마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의
이름.
떠날 수도, 남을 수도 없는자들이
차마 근처에서 서성인다.
그래서 차마는
여인숙.
날이 밝으면 그들은 끝내 그곳을 떠나야
하리라.
물관을 지나
나무를 떠나야 하는 물과
이파리 위에서
물을 떠나 보내야 하는 나무가 있다.
대자대비한
연인들이 있다.
- 권혁웅
시인
수련을 기다리며 / 배한봉
꿈을 향해 오래 걸어온 자들의 골수가 모인 곳
잠든 수련 이마에 물은
나지막한 숨결의 문장을 보낸다
그 문장엔
꿈꾸는 자의 닳은 무릎 뼛가루가 묻어 있다
그것을 우리는 물안개라 부르고 그리움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저 고요한 저수지는
꿈꾸는 자들의 푸른 내심이 만든 것
물컹한 관념을 관통한 뿌리와 이파리의 화살촉이
실은 수련이라는 것
너를 기다리다 죽은 말들이
떼지어 시커멓게 날아다니는 혼돈의 시간을 건너
팽팽하게 밀려오는 어떤 힘들을
나는 만다라 문장 같다고 말하려다 그만 둔다
위독할수록 사랑은 더 간절해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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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시인은 대표적인 생태주의 작가입니다. 그의 생태시는 자연 현상을 통해 삶의 진정성을 깨닫게 하는 한편, 자연과 인간을 동일화하면서 자연과 생명이야말로 인간의 내적 본질이라는 것을 일깨웁니다. 즉, 인간이 자연의 일원이며, 우주의 생명 현상에 동참하는 당사자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지요. 이 시는 늪 위에 피어난 수련이, 혹은 수련으로 상징되는 고귀한 사랑이 어떻게 세상에 오는가를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생태적인 시각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시인은 저수지를 꿈꾸는 자의 푸른 내심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 방울 한 방울의 물방울들이 수련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온힘을 다해 오래도록 꿈을 꾸었나 봅니다. 꿈꾸는 자들의 뼛가루가 뿌연 물안개를 이루는 그곳, 아직 깨어나지 않은 수련의 이마에 물방울의 고요가 숨결을 보태고 있습니다. 생태적 상상력이 서정적인 언어로 태어나고 있는 풍경입니다.
- 시인 최형심
배한봉 시인
경남 함안 출생.
1984년 박재삼 시인의 추천을 받아 작품활동
시작.
1998년『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등단.
1998년 경남문협
우수작품집상(『흑조(黑鳥)』) 수상
1998년『흑조(黑鳥)』( 현대시).
2002년『우포늪 왁새』( 시와시학사, 시와시학 시인선
17).
2004년『악기점』(세계사 시인선
128)
2006년『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문학의전당
편역서『우리말
부모은중경』(1988, 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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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맞는 무화과나무 / 배한봉
물 젖어 풀린
화장지처럼 무화과
과육이 흘러내렸다, 나무
아래 서성이는
내 어깨에 머리에 무화과
맨살이
취객의 오물처럼 엉겨
붙었다
열매란 둥글고
단단하게 자라서
익는 것이라 여긴
내게
비 맞는 무화과, 이런 삶도
있다고
꽃 시절도 없이
살았던
뚝뚝, 제 안에 고인
슬픔을
빗물로 퍼내는 것
같다
웅덩이 같은 몸을 가진
무화과
누구나 웅덩이
하나씩은
가지고 살지, 상처를
우려내
가뭄 든 마음을 적시기도
하지
그러나 너무 오래 고여
있으면
안 되는
웅덩이
퍼 내지 못하면
결국
출렁이지도 못하고
뭉크러지는
영혼의 폐허가 되고
말지
취객 같은
무화과나무 아래
내 가슴속의 무화과 어디
갔나, 나는
폐허처럼 서서 한참이나 비를
맞는다
육탁(肉鐸) / 배한봉
새벽
어판장 어선에서 막 쏟아낸 고기들이 파닥파닥 바닥을 치고 있다
육탁(肉鐸) 같다
더 이상 칠 것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
나도 한 때 바닥을 친 뒤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
육탁을 치는 힘으로 살지 못했다는 것을 바닥 치면서
알았다
도다리 광어 우럭들도 바다가 다 제
세상이었던 때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무덤 속
같은 검은 비닐봉지의 입을 열자
고기 눈
속으로 어판장 알전구 빛이 심해처럼 캄캄하게 스며들었다
아직도 바다 냄새 싱싱한,
공포 앞에서도 아니 죽어서도 닫을 수 없는 작고 둥근
창문
늘 열려있어서 눈물 고일 시간도
없었으리라
고이지 못한 그 시간들이 염분을
풀어 바닷물을 저토록 짜게 만들었으리라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의 집 창문도 저렇게 늘 열려서 불빛을 흘릴
것이다
지하도에서 역 대합실에서 칠 바닥도
없이 하얗게 소금에 절이는 악몽을 꾸다 잠깬
그의 작고 둥근 창문도 소금보다 눈부신 그 불빛 그리워할
것이다
집에 도착하면 캄캄한 방문을
열고
나보다 손에 들린 검은 비닐 봉지부터
마중할 새끼들 같은, 새끼들 눈빛 같은
남해 마늘밭 / 배한봉
하오의 바닷바람에
온몸을 출렁이는 마늘밭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종을 뽑는
할머니 일생을 솨르륵
솨르륵 읽고 있다
밀물과 썰물 소리를 내던
검푸른 시간
그 추억의 손목을
잡아당기면
해수병 앓는 영감이나 도회지로
나간 자식들
성큼성큼 졸랑졸랑 걸어오던
시절도 보이리라
종을 뽑아야 마늘 뿌리 더
굵어지듯
꽃시절의 골수 뽑아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켰던 우리들의 어머니,
어머니
여름날 긴 해도 짧던 그
마늘밭이
오늘은 바다가 된다, 주름지고 못
박힌 손
허옇게 센 머리칼을 적시며
출렁이는 바다
그 바다에 뜬 섬
하나
영영 펴지지 않을 것 같은 굽은 등
위로
솨솨솨 바람 불어 남루해진 세월을
지운다
끼욱끼욱 몇 마리 갈매기도
불러와
수만 권 생애의 책을 펼쳐
읽는
검초록 광휘의 남해
마늘밭
각인/ 배한봉
이름부터 아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다
장수풍뎅이,
각시붕어, 닭의장풀꽃
사는 법 알면
사랑하게 되는 줄 알았다
아이는 한 송이
풀꽃을 보고
갈길 잊고 앉아 예쁘네 너무
예뻐, 연발한다
이름 몰라도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
어루만지지도 못하고
눈빛만 빛내고 있다
사랑은 아는 것보다
느끼는 것임을
내게 가르쳐 주고
있다
헛것만 가득한 내게 봄을 열어주고
있다
깨닫느니, 느낌도 없이 이름부터
외우는 것은
아니다, 사랑
아니다
생각보다 먼저 마음이 가 닿는
사랑
놀람과 신비와 경이가 나를 막막하게
하는 사랑
아름다움에 빠져 온몸
아프고
너를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때
사랑은 웅숭깊어 지는
것이다
이름도 사랑 속에 또렷이 새겨지는
것이다
산벚꽃나무 아래서의 통증 / 배한봉
대지가 검은 서랍을 열자 풀들은 파랗게 생각을 내밀어 흔들었으나 겨우내 닫혀 있던 내 생각의 상자에서 쏟아진 어둠은 파랗게 곰팡이를 피워내고 있었다
얌전한 고요가 산벚꽃나무를 흔들자 어두운 구석에서 빈혈 앓던 생각들이 꽃과 함께 바람의 허리를 잡고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대지는 아득히 가슴 벌려 반가운 친구를 맞이하듯 감싸안았다
꽃나무를 지나 흘러가던 길이 지워지고, 별들은 모두 지상에 내려와 꽃잎이 되었다
꽃가지가 공중에 꽃을 풀어놓고 몸에 스민 바람의 무게를 덜어내듯이 가만히 목울대를 밀고 올라오는 통증
얌전한 고요가 다시 산벚꽃나무 가지 흔드는 것을 나는 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