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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12월09일(토요일)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영주시 (부석사&소수서원&선비촌)] 탐방기
회비 45,000원 11월16일 송금 완료, 33번 좌석 예약
탐방지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위치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춘양로 1501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총면적 5,179ha의 동양 최대의 수목원이자, 남아공의 국립한탐식물원에 이은 전세계 두번째 규모의 수목원으로서 기후변화에 취약한 산림생물자원의 체계적인 보전 및 활용기반 구축을 위해 특화된 수목원이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간직한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위치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기후 온난화로 인해 점차 점유율이 줄어가고 있는 국내외 고산지역에 자생하고 있는 고산식물을 수집하여 현재 희귀식물 313종, 특산식물 164종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식물의 보존을 위해서 전 세계에서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시드볼트(Seed Vault)에 이어 단 2개뿐인 종자영구저장시설이자 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Seed Vault)를 보유, 운전하고 있다.
또 고산지역 희귀식물들만을 위한 알프스하우스 3동을 만들어 재배·전시하며 일반인들에게 고산식물만의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축구장 6개 규모인 3.8ha 크기의 호랑이숲을 만들어 백두산호랑이를 넓은 자연환경에서 사육하면서 백두산호랑이 종의 보존과 함께 이곳 수목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동물원의 호랑이가 아닌 자연에서 뛰노는 호랑이 6마리를 보는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더불어 지역을 대표하는 봉자페스티벌을 통해 지역 농가소득의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고, 산림자원의 유용물질을 산업화 기술로 민간에 이전해 건강식품류, 화장품 등의 신제품을 개발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1,400km 백두대간은 우리나라 자생식물 33%가 서식하고 있는 중요 생태축이다. 그 중 특산식물 27%, 희귀식물 17%가 백두대간에 자생한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증진시켜 대자연과 인간의 풍요로운 상생을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용안내
개장일 : 2018년 5월 3일
이용시간 : 하절기(3~10월) 관람시간 09:00~18:00 (17:00 입장마감), 동절기(11~2월) 관람시간 09:00~17:00 (16:00 입장마감)
호랑이숲은 17:00까지 운영(이동소요시간 도보30분)
쉬는날 : 월요일, 1월1일, 설/추석 당일
주차시설 : 일반주차 446대, 대형주차 15대, 장애인주차 10대
유모차 대여여부 : 가능
애완동물 동반가능여부 : 불가
문의및안내 : 054-679-1000
관련 홈페이지 : http://www.bdna.or.kr/
상세정보
입 장 료
[기본]
어른 5,000원(동절기에는 50% 할인된 2,500원) / 청소년 4,000원 / 어린이 3,000원
[단체 20인이상]
어른 4,000원 / 청소년 3,000원 / 어린이 2,000원
[무료]
만 6세 이하, 만 65세 이상, 장애인·국가유공자 등 ]
탐방코스: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방문자센터 ~정원 구역~백두산 호랑이 보존센터~알파인 하우스~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Seed Vault)~백두산 호랑이 보존센터~정원 구역~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방문자센터 ]
탐방일 : 2023년 12월 09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봉화군 춘양면 최저기온 6도C, 최고기온 15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2시간31분 소요)
07:04~10:24 “좋은사람들” 버스로 양재역 12번 출구 전방 국립외교원 앞에서 출발하여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485 번지에 있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이동 (213km) [3시간20분 소요]
10:24~11:05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방문자센터에서 탐방 출발하여 정원 구역을 거쳐서 백두산 호랑이 보존센터로 이동
[축구장 6개 규모인 3.8ha 크기의 호랑이숲을 만들어 백두산 호랑이를 넓은 자연환경에서 사육하면서 백두산 호랑이 종의 보존과 함께 이곳 수목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동물원의 호랑이가 아닌 자연에서 뛰노는 호랑이 6마리를 보는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11:05~11:19 백두산 호랑이를 사진촬영 후 휴식
11:19~11:26 알파인 하우스로 이동
[고산지역 희귀식물들만을 위한 알프스하우스 3동을 만들어 재배·전시하며 일반인들에게 고산식물만의 매력을 선보이고 있다. 이곳에서 희말라야, 알프스, 지중해, 북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자생하는 대표적인 세계고산식물들이 베테랑 산림직원들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
11:26~11:41 알파인 하우스를 관람
11:41~11:55 세계에서 단 2개뿐인 종자영구저장시설이자 세계 최초의 야생 식물종자 영구 저장시설인 시드볼트(Seed Vault)로 이동
[백두대간수목원에 조성된 시드볼트는 기후변화에 대비한 야생식물 종자 영구저장 공간이다. 전 세계에서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시드볼트에 이어 단 두 곳뿐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안정적이고 과학적인 종자 연구가 가능한 시드뱅크(Seed Bank)와 시드볼트(Seed Vault)를 모두 보유한 국내 유일의 기관이기도 하다. 시드뱅크는 연구나 증식 등의 활용을 목적으로 종자를 중·단기적으로 저장하는 시설이고, 시드볼트는 全 지구적 재난·재해 등에 대비해 식물 멸종을 막으려는 목적으로 종자를 영구적으로 저장하는 시설이다.]
11:55~12:00 시드볼트(Seed Vault)의 외관을 사진촬영
[시드볼트(Seed Vault)는 국가 보안시설이라서 일반인의 내부 출입은 불가하다.]
12:00~12:21 백두산 호랑이 보존센터로 회귀
12:21~12:55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방문자센터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2:55~12:56 “좋은사람들” 버스에 승차하여 출발 대기
12:56~13:34 “좋은사람들” 버스로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을 출발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번지에 있는 부석사로 이동 (21km) [38분 소요]
탐방지 : 부석사(浮石寺)
[부석사(浮石寺)
종파 : 화엄종
건립년대 : 신라시대
창건자 : 의상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대왕 16년(676년)에 의상이 왕명을 받아 세운 화엄종 사찰로서,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중턱에 있다.
부석사는 특히 의상이 화엄의 큰 가르침을 베풀던 곳으로, 의상을 "부석존자"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 "부석종"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1372년(공민왕 21)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많은 건물들이 다시 세워졌다. 몇 안 되는 고려 시대 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다. 무량수전 외에도 부석사에 많은 문화재들이 존재한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전설
《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의상이 신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게 했고, 절터까지 따라와서 절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본래 이 절터에는 사교의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의상이 이 곳에 절을 세우려고 하자 선묘가 무거운 바위를 사교의 무리들의 머리 위로 띄워 이곳에 절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무량수전 옆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선묘가 띄웠던 바위이며 아직도 떠 있다고 한다.
부석(浮石)
신라 문무대왕 1년(661년) 의상 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 대사를 연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 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 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의상 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 돌을 '부석(浮石)'이라 불렸으며 사찰 이름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은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주요 볼거리
무량수전(無量壽殿)은 1376년에 중수된 목조 건축물로 대한민국의 국보 제18호이다. 고려시대의 법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극락전(極樂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불로 모신 법당이다. 대한민국 사찰에서는 대웅전과 더불어 중요한 건축물이다. 극락전을 높여서 극락보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미타불을 직접 가르켜 아미타전 또는 미타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의 권능을 일컫는 이름이다. 극락을 뜻하는 수마제라는 단어를 써서 수마제전(須摩提殿)이라고도 한다.
이상향인 극락이 서쪽에 있으므로 보통 동향으로 배치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이 서쪽을 향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보살로서 봉인되어 있다. 관세음보살은 지혜로 중생의 음성을 관하여 그들을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며, 대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비추어 끝없는 힘을 얻게 하는 보살이다.
안양루(安養樓)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위치한 누각이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위쪽, 아래쪽 편액이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의 편액은 "안양문", 위층 마당 쪽은 "안양루"라고 씌여 있다. 문과 누각의 2가지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극락이란 뜻을 가진 '안양'의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고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경치를 시문으로 남겼고, 누각 내부에 시문 현판이 걸려 있다.
선묘각(善妙閣)은 무량수전 북서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고, 의상조사의 창건 설화와 관련된 선묘(善妙)라는 인물을 모신 건물이다.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 규모의 맞배집이지만, 가구의 방식이나 부재를 다듬은 걸 보아 최근의 건물인 듯하다. 안에는 1975년에 그려진 선묘의 영정이 걸려있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榮州 浮石寺 祖師堂)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건축물이다. 의상 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부석사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고려시대 건축의 특색을 잘 나타낸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무량수전과 같은 주심포 양식이지만 소루·주두의 측면이 직선으로 되고 굽받침이 없어지며 첨차의 하단이 다각(多角)으로 잘리는 등 다포집 계통의 요소를 보인다. 1916년 개수시에 발견한 묵명(墨銘)에 의하면 북원(北元) 선광(宣光) 7년, 즉 우왕(禑王) 3년(1377년)에 건립된 것으로 밝혀졌다. 무량수전이나 조사당 모두 송(宋)을 통해 들어온 천축계(天竺系) 양식이거나 그것을 절충한 건물이다.
조사당(祖師堂)'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위치한다. 의상과 역대 조사를 기리는 곳이다.
선비화(禪扉花)
조사당 추녀 아래에 선비화(禪扉花)라고 불리는 골담초 한 그루가 있다. <택리지>에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내용의 나무가 선비화라 한다. 현재 철장에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다.
취현암(醉玄庵)은 조사당 동쪽 바로 옆에 있다. 1997년도에 복원되어 2002년까지 선원으로 활용되다 현재 부석사 산내암자로서 쓰이고 있다.
응진전(應眞殿)은 무량수전 영역의 북편 위쪽에 떨어져 위치해 있다.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1976년에 번와 보수하였다. 이 건물의 공포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한 장식적인 익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는 내부에 석고로 만든 석가삼존불과 고졸한 십육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자인당(慈忍堂)은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로,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했다 자인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공포가 건물 규모에 비하여 너무 크고 측벽에 여러 가지 형태의 옛 부재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후반경에 해체 부재를 재사용하여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실내에는 석조 삼존여래 좌상(보물 제220호)을 모셨는데 가운데는 석가여래이고 좌우는 비로자나불이다.
단하각(丹霞閣)은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응진전 뒤쪽에 위치한다. 단하각(丹霞閣)의 "단하"(丹霞)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木佛)을 쪼개 땠다는 단하소불(丹霞燒佛)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丹霞天然) 선사를 모신 것이라면,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이다. 그러기에 도량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선방 근처에 지었는 지도 모른다.
범종루(梵鐘樓)는 구조는 누각식 문으로, 2층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이루어졌다. 위에는 현재 종이 없고, 북과 목어가 걸려있다. 지붕은 정면 부분이 팔작지붕의 측면인 합각, 뒷부분이 맞배지붕이 측면인 박공 부분이다. 2층 뒤쪽 가운데 한 칸을 뚫어 밑에 계단을 세워 안양문이랑 향하게 하였다.
선열당(禪悅堂)은 범종각과 안양루 사이에 위치하며,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이용되고 있다.
응향각(凝香閣)은 취현암 앞에 위치하며 원래는 강원 건물이었다. 무량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오른쪽에 위치했었는데, 통로와 너무 인접하여 1980년 철거하고 뒤로 물려서 신축하였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최근 전면에 마루를 달았다.
삼성각(三聖閣)은 칠성, 독성, 산신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축화전(祝花殿)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한다. 1979년의 부수때까지는 원각전(圓角殿)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었다.
종각(鐘閣)은 범종을 보관하는 건물로, 1980년의 보수공사 이후 신축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새우고,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다.
문화재
유네스코 세계유산 부석사는 국보 5건을 보유한 사찰이다.
석단(石壇) · 당간지주(幢竿支柱) · 석등 · 3층석탑은 신라 때의 것이고,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은 고려 때의 건축이다.
국보 5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제18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제19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제45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 (제46호)
보물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20-1호, 보물 220-2호) :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의 자인당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상.
2구. 왼쪽 불상(向右佛像) 99.5㎝, 대좌 높이 105cm, 오른쪽 불상(向左佛像) 103㎝, 대좌 높이 102cm.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제249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제255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제735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진본 (제735-1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주본 (제735-2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 (제735-3호)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 (제1562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제1636호)
영주 부석사 안양루(2022년 10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2022년 10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제127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제130호)
부석사 입장요금은 무료이다.]
탐방코스: [부석사 입구 주차장~일주문(一柱門)~부석사 중수기적비~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5호)~천왕문(天王門)~삼층석탑~종각(鐘閣)~범종각(梵鐘閣, 2022년10월31일 보물로 지정)~선열당(禪悅堂)~응향각(凝香閣)~장경각(藏經閣, 보물 제735호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이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음)~안양루(安養樓, 2022년10월31일 보물로 지정)~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국보 제17호)~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삼층석탑(三層石塔, 무량수전 옆 동쪽 언덕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249호)~선묘각(善妙閣)~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취현암(醉玄庵)~자인당(慈忍堂, 보물 제220호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2구와 보물 제1636호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1구가 자인당에 안치되어 있음)~응진전(應眞殿)~단하각(丹霞閣)~관음전(觀音殿)~화엄선원(華嚴禪院)~부석(浮石)~지장전(地藏殿)~부석사 입구 주차장]
탐방일 : 2023년 12월 09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영주시 부석면 최저기온 5도C, 최고기온 15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23분 소요)
13:34~13:56 부석사 매표소에서 탐방 출발하여 [일주문(一柱門)~부석사 중수기적비~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5호)~천왕문(天王門)~삼층석탑~종각~범종각(梵鐘閣, 2022년10월31일 보물로 지정)~선열당(禪悅堂)~응향각(凝香閣)~장경각(藏經閣, 보물 제735호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이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음)~안양루(安養樓, 2022년10월31일 보물로 지정)~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의 동선을 거쳐서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8호)으로 이동
[이 날 장경각이 개방되지 않아서, 장경각(藏經閣) 안에 보관된 보물 제735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을 볼 수 없었다.]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榮州 浮石寺 幢竿支柱)
경북 영주 부석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17 부석사
영주 부석사가 창건된 시기인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당간지주로, 처음 조성된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란 사찰에서 불교의식을 치를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장대)인 당간(幢竿)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설치하는 돌기둥을 말한다.
높이는 4.28m, 재료는 화강암이다. 두 개의 사각 돌기둥(지주)이 1m 간격을 두고 동서 방향으로 마주 서 있고, 두 기둥 사이에는 당간 받침돌인 간대석(杆臺石)이 놓여 있다.
두 기둥이 마주보는 안쪽 면과 바깥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하지 않았고, 바깥쪽 면의 양쪽 모서리는 약간 둥글게 다듬었다. 다른 쪽 두 면(양 측면)의 가장자리와 가운데 부분에는 선문(線紋; 줄무늬)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였는데 가장자리를 따라 윤곽선처럼 새긴 선은 폭 5.4cm, 가운데 부분에 세로로 새긴 선은 폭 5.1cm이다. 기둥 꼭대기 부분 안쪽으로는 당간을 끼울 수 있도록 마련한 장치인 직사각형 홈이 파여 있다. 기둥 꼭대기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넘어가는 부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도록 돌을 둥글게 다듬었고, 곡선 중간 부분에는 1단의 굴곡을 두었다.
기둥은 가늘고 긴 편으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폭이 좁아져 안정감을 준다. 기둥의 기단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원래는 직사각형 기단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을 받치기 위하여 두 기둥 사이에 설치한 낮은 높이의 간대석은 하나의 석재를 다듬어 만든 것으로, 사각형 받침돌 위에 원형 받침돌을 얹은 듯한 모습니다. 윗면에 조각한 원좌(圓座; 둥근 형태의 자리) 둘레에는 테두리와 연꽃무늬를 돌려 장식하였다. 원좌 중앙에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원공(圓孔; 둥근 구멍)이 뚫려 있는데, 원공의 지름은 약 30cm이다.
장식이 절제되어 소박한 느낌을 주는 당간지주로, 간결하고 단아한 조각수법은 통일신라시대 전기의 양식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오른쪽 기둥 아랫부분이 마모되고, 간대석 일부가 파손되고, 석재가 제 빛깔을 잃었지만 지금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부석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 천왕문 근처 길가에 서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梵鐘閣, '범종루(梵鐘樓)'로도 불림)은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2층 건축물이다. 건물의 아래층은 20개의 원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주 부석사 안양루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건물의 위층은 불전 사물을 봉안하는 곳으로, 사방이 벽체가 없이 트여 있고, 내부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의 가장 큰 특징은 지붕의 형태인데, 범종각 정면의 지붕은 팔작지붕, 후면의 지붕은 풍판(風板)이 없는 맞배지붕의 형태로 설계되었다. 범종루의 2층 정면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범종루(梵鐘樓)'로도 불리는 범종각은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 건축물이다. 1746년 작성된 '부석사 종각 중수기'에는 그해 화재로 소실됐고 이듬해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내부에 범종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19세기 이후 종의 소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범종각 2층에는 법고와 목어가 놓여 있다. 이름은 범종각이지만 범종은 없다.
영주 부석사 범종각은 18세기 중건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조선 후기 건축양식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며, 영주 부석사 범종각의 독특한 지붕 양식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보기 드문 사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희소적 가치가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10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榮州 浮石寺 高麗木板)은 고려 후기인 13~14세기에 제작된 삼본화엄경(三本華嚴經)의 불교 목판이다. 총 3종 634판. 현재 경상북도 영주시의 부석사 장경각에 소장되어 있고 보물 제735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후기 13세기 무렵에 만든 한국의 불경 목판들로, 보물 제735-1호 대방광불화엄경 진본(大方廣佛華嚴經晋本) 239판 472장, 보물 제735-2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大方廣佛華嚴經周本) 273판 538장, 보물 제735-3호 대방광불화엄경정 정원본(大方廣佛華嚴經貞元本) 122판 240장으로 구성된다.
지금은 사라진 거란본(契丹本) 대장경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거란장경'이 우리나라에 1063년, 1099년, 1107년 세 차례에 걸쳐 수입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현재 거란인들의 작품은 거의 완전히 멸실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거란본계 세자무주의 34자본으로 제작한 이 목판은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또한 현재까지 남은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거란본계 대장경이다.
같은 고려시대 목판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국보 제206호, 보물 제734호)과 함께 1982년 5월 2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榮州 浮石寺 安養樓)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에 있는 조선시대에 새로 지은 문루이다. 2022년 10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로 345 (부석면, 부석사)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 경내에 있는 문루(門樓)로, 문루는 아래에는 출입문을 내고 위에는 누정(樓亭)을 두어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설계한 건축물을 말한다.
영주 부석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 승려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아 건립한 사찰이다. 오래된 역사와 더불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영주 부석사 조사당(국보),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어, 2018년 6월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i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UNESCO)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1555년 이 자리에 있던 강운각(羌雲閣)이 화재로 소실되어, 1576년에 새로 지은 건축물이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이 부여되어 있어 건물 아래층 전면에는 ‘安養門(안양문)’, 건물 위층 후면에는 ‘安養樓(안양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양(安養)’이란 극락을 뜻하는 말로, 안양문은 극락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고, 안양문을 지나면 나오는 무량수전은 극락을 상징한다.
구조 및 형태
영주 부석사의 주불전(主佛殿)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맞은편에 있는 문루로, 2단으로 쌓은 높은 석축 위에 세워진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다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다. 누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어 일종의 누문(樓門)의 역할을 하며, 전면에서 보면 2층 누각이지만 무량수전 쪽에서 보면 단층 전각처럼 보인다.
또한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전체 가람 배치에서 사찰의 진입 축(軸)을 꺾어 무량수전 영역에 진입하게 하고 있어, 무량수전 영역의 종교적 경외감과 조망을 극대화하고 있다.
건물의 아래층은 8개의 원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의 위층은 사방이 벽체가 없이 트여 있고, 내부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2층 누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부석사 경내의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펼쳐져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예로부터 조선 후기의 방랑 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를 노래하는 시문(詩文)을 남겼는데 누각 내부에는 많은 시문 현판들이 걸려 있다. 안양루의 2층 정면에는 ‘浮石寺(부석사)’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가치 및 의의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다수의 문헌에서 중창, 중수 등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를 토대로 1580년에 건축된 이후 현재와 동일한 규모로 보존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문루 건축물에서 부석사 안양루와 같이 화려한 다포식으로 건축한 사례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희소성이 있으며, 안양루 건축에 사용된 건축 양식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조선의 건축양식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10월 3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부석사의 범종루를 지나면 나오는 마당에서 안양루를 바라보면 희귀한 광경을 접할 수 있다. 누각 속에 부처님 여섯 분이 보인다. 실제 부처가 아닌 건물의 빈 틈이 그 뒷 건물인 무량수전의 벽과 어우러져 햇빛이 만들어낸 부처 즉, ‘공포불(拱包佛)’이다. 그 틈이 6개가 되다 보니 6분의 부처가 나란히 앉아있는 착시현상이다. 근래 부석사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람 포인트다. 햇빛이 강한 여름일수록 더 선명하게 보인다.]
[공포(拱包)
전통 목(木)건축에서 기둥 위와 지붕 사이에 있는 여러 목재가 끼워 맞춰진 부분을 말하며,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전달하는 부분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두공이라 하며, 이 공포는 줄여서 포(包)라고 하기도 한다. 전통 한국 건축의 경우에는 포를 보고 건물의 권위와 세워진 시기 등을 추측할 수 있다.
주심포 건축은 보통 조선시대 이전인, 고려나 삼국시대 때 주로 썼던 양식이며 다포 건축은 조선시대 때 주로 사용했다.
기둥 위에만 포가 있다면 주심포 형식이라고 하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 가로로 놓인 창방 위에도 포가 놓인 양식을 다포 형식이라고 한다. 다포식은 주심포보다 지붕의 무게를 더 효율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어서 공포 자체의 화려함과 더불어 장엄한 팔작 지붕을 올리는 등 건물의 대형화에 적합하다. 주심포와 비슷하게 기둥에만 있지만 공포가 기둥 위에 얹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기둥을 감싸고 밖으로 날개처럼 삐져 나와 있다면 익공이라고 한다. 일반 공포보다 간소화된 형태로 공포에 비해 화려함은 떨어지지만 기술적으로는 더 효율적이다.
포에서 기둥의 중심 밖으로 뻗어나온 목재를 출목이라고 하는데, 이 출목의 개수에 따라 1출목, 2출목… 하는 식으로 이름이 붙는다. 외부에 있는 출목은 외출목, 건물 내부에 있는 출목은 내출목이라고 한다. 이 출목의 개수가 많을 수록 건물이 높고 화려해 보이기 때문에 역시 건물의 권위와 관계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조계사 대웅전인데,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이 건물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출목의 수가 더 많다. 조선시대에 이런 짓을 했다가는 큰 벌을 받았을 것이다.
건축학과 학생들은 '동양건축사'나 '한국건축사' 등으로 불리는 과목에서 필수적으로 외워야 하는 내용이다. 복잡한 구조와 부재의 이름을 모두 외워야 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다. 일부 악랄한 교수들은 그림으로 그려서 표현하라는 시험문제를 내기도 하고 일일이 나무나 스티로폼 등을 깎아서 모형을 만들어오라고 하기도 한다. 학생들에겐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석등이다. 대한민국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2.97m이다. 8각을 기본형으로 하며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워 신라시대의 석등 가운데 최고로 꼽는다.]
13:56~14:00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을 관람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법당으로서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무량수’의 의미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상징하는 무한한 광명(無量光; Amitãbha)과 영원한 생명 즉, 무량수(無量壽; Amitãyus)에서 온 것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과 더불어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목조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무량수전 안에 있는 고려시대의 불상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국보 제45호)은 높이는 2.78m로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또한 온몸이 금빛 찬란하며 매우 정교한 솜씨로 제작되었는데, 고려시대 유일의 소상(塑像, 흙으로 빚어진 것)으로 유명하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은 1962년 국보 제1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97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14:00~14:04 [삼층석탑(三層石塔, 무량수전 옆 동쪽 언덕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249호)~선묘각(善妙閣)]의 동선을 거쳐서 대한민국 국보 제19호인 조사당(祖師堂)으로 이동
14:04~14:06 대한민국 국보 제19호인 조사당(祖師堂)과 조사당 처마 밑의 골담초(骨擔草)와 조사당 옆의 취현암(醉玄庵)을 관람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은 대한민국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말기 또는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건축물로서 내부에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스님의 상(像)을 봉안하고 있다. 본래 벽면에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그린 6폭의 부석사 조사당 벽화(국보, 1962년 지정)가 있었다. 이 벽화들은 무량수전 안에서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박물관인 보장각(寶藏閣)에서 전시하고 있다. 조사당 앞 처마 밑에는 의상스님이 사용하던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 밑 땅에 꽂았더니 자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골담초가 있다.]
[영주 봉황산 부석사 선비화(禪扉花)는 의상대사(義湘大師ㆍ625~702)가 지팡이를 조사당 처마 밑 땅에 꽂아 자랐다는 나무다.
조선 광해군(光海君ㆍ1575~1641) 시절 영남 관찰사 정조(鄭造)가 의상대사의 지팡이에 탐을 냈다. 덕을 쌓은 수행자가 가졌던 ‘대사의 지팡이’를 얼마나 갖고 싶었던지 이 나무 줄기를 잘라갔다. 순간의 욕망을 채운 그는 훗날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이 잎을 닳여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득남을 간절히 원했던 아낙들이 줄지어 잎을 훑어가면서 이 작은 나무의 수난은 끝이 없었다. 관절염에도 좋다 하여 ‘노린’ 사람들 또한 많았다.
선비화가 ‘옥’에 갇힌 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보호받기 위한 특단의 조치였다. 딱딱하게 굳은 처마의 지붕 아래서 자라니 비와 이슬 한 모금도 구경 못했는데 이 나무는 잘 살고 있다. 누가 물을 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낮엔 해가 벗이 되어 줬고 밤엔 달빛이 동무가 되어 줬을 뿐이다.
1300여년을 사람들에게 시달려 왔지만 신기하게도 부처님이 오시는 날엔 개나리처럼 노란 꽃을 활짝 피운다. 놀랍다.
전해오는 말이 1300여년 지났다는 건데 그럼에도 나무는 고목이 아니다. 그저 손가락 굵기다. 키도 170cm 정도다. 누가 이 나무를 1300년 살아온 나무라고 믿을까.
7세기, 의상대사는 열반 직전 자신이 거처하던 부석사 조사당 처마에 중국서 가져온 지팡이를 꽂으며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려 살아나면 국운이 흥할 것이다. 나무가 살면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느니라”라고 했다. 그 나무가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정말 그 긴 세월을 여기서 살아왔을까.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증언한 사람이 있다.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이다.
“옥같이 빼어난 줄기 절 문에 기대니 /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 내린 것이라 하네 / 지팡이 끝머리에 저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 비와 이슬의 은혜를 조금도 입지 않았네”
“擢玉森森依寺門 (탁옥삼삼의사문) / 僧言卓錫化靈根 (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曺溪水 (장두자유조계수) / 不借乾坤雨露恩 (불차건곤우로은)”
부석사를 찾은 퇴계 선생도 이 작은 꽃나무를 두고 감탄한 나머지 찬양한 시 ‘선비화(禪扉花)’다. 그의 시가 이 나무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퇴계 선생이 이곳 풍기군수로 부임한 때가 1548~1549년이니 이때 부석사에 들러 시를 지었다면 460여년 전에 이미 지금의 우리와 똑 같은 심정으로 바라보았고 그 기록을 시로 남겼다.
그 때도 지금 처럼 비와 이슬 한 방울 없이 스스로 물이 생겨 살고 있다고 밝혀 놓았다.
그런데 정말 물 한 방울 없이 나무가 살 수 있을까. 또 천년 넘은 나무가 이렇게 작을 수가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한 대학교수의 분석에 귀 기울여보면 의문점이 좀 풀리려나.
이 선비화는 줄기가 계속 굵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자라면 죽고 새 줄기가 다시 나와 세대교체를 하며 생명을 이어간다고 한다. 여러 해 살이 풀과 같은 나무다. 그래서일까, 학명도 골담초(骨擔草)다. 나무인데 ‘풀 초(草)’자가 들어간다.
그럼 물 한 방울 없이 어떻게 살아왔을까. 이 나무는 비와 이슬을 맞지 않는 곳에 있다. 원래 건조한 땅에 강한 나무라고 하지만 물 한 방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뿌리를 길게 뻗게 했고 마침내 먼 곳에 있는 수분을 빨아들일 수 있게 했다. 악조건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긴 뿌리를 뻗은 것은 마치 기린의 목이 긴 것과 같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법이 있는 모양이다.
이 의문점을 풀어주긴 했지만 신비로움까지 다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그러니 선비화는 부석사에서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무량수전에서 삼층석탑이 있는 오솔길로 5분쯤 걸어 올라가면 의상대사가 거처했던 조사당 처마에 있다.]
14:06~14:10 자인당(慈忍堂, 자인당 안에는 보물 제220호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2구와 보물 제1636호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1구가 안치되어 있음)으로 이동
14:10~14:12 자인당(慈忍堂)과 그 옆에 있는 응진전(應眞殿)과 단하각(丹霞閣)을 사진촬영
[이 날 자인당(慈忍堂)의 문이 잠겨 있어서 그 안에 안치되어 있는 보물 제220호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2구와 보물 제1636호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1구는 볼 수 없었음]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榮州 北枝里 石造如來坐像)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의 자인당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석조 불상. 보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220-1호, 보물 220-2호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01월 21일
2구. 왼쪽 불상(向右佛像) 99.5㎝, 대좌 높이 105cm, 오른쪽 불상(向左佛像) 103㎝, 대좌 높이 102cm.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자인당은 무량수전 뒤편 높은 언덕에 위치하며 현재 3구의 불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중 이 두 불상은 원래 부석사의 동쪽에 있던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부분적으로 파손이 심한 편이지만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춘 불상들로서 조각 수법이라든지 형식·양식이 매우 유사하다.
왼쪽 불상은 8각의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상이다. 지금은 두 손이 부러졌지만 가슴 앞에서 아래위로 놓인 점으로 보아 전형적인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肉髻)가 불분명하며, 얼굴은 둥근 편으로 단정한 인상이다. 백호(白毫 :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 있는 희고 빛나는 가는 터럭)는 큼직하며 눈썹 사이로 바싹 내려왔다.
작은 눈·코·입에 인중이 두드러졌고 귀는 짧게 묘사되었다. 군살진 턱 밑에는 삼도(三道)가 보이고, 어깨는 비교적 넓게 표현되었으나 신체의 볼륨은 없는 편이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얇게 빗은 듯한 평행 계단식 옷주름이 양팔과 배, 두 다리에 걸쳐 표현되고 있다. 넓은 무릎은 신체와 잘 조화를 이루며 단정하고 안정된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광배는 주형 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로 비스듬히 깨어진 것을 붙여 세워 놓았다. 내부는 두 줄의 양각선으로 두광(頭光)·신광(身光)을 구분하였다. 그리고 신광의 가장자리에 좌우 각각 삼존화불(三尊化佛)을 배열하였으며, 두광의 윗부분에도 삼존화불을 배치하였다. 두광의 안에는 다시 두 줄의 선으로 새기고 안에는 연꽃무늬, 밖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을 둘렀다. 두광·신광의 밖에는 불꽃무늬를 조각하였으나, 조각이 얕고 느슨하다.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된 높은 8각연화대좌(八角蓮花臺座)이다. 상대는 깨어져서 명확하지는 않으나 오른쪽 불상의 상대와 같은 단판중엽연화문(單瓣重葉蓮花文)이라 생각된다. 중대는 8각으로 모서리마다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가 있고, 각 면의 안상(眼象) 속에는 불·보살상이 얕게 부조되었다. 하대는 8각의 복판복련화문(複瓣覆蓮花文) 밑에 8각의 각 면에 안상을 새기고 사자 등 동물상을 양각하였다.
오른쪽 불상은 기본 형태에 있어 왼쪽 불상과 거의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불상의 자세가 보다 안정감이 있으며 신체의 양감이 좀더 풍부하며 세부 묘사도 부드럽고 유려한 편이다. 이 불상 역시 두 손은 깨어졌지만 지권인이 확실하므로 비로자나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광배는 앞 불상과 다소 달라서 차이가 난다. 꼭지 부분과 왼쪽이 약간 절단되었지만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거신광배의 내부는 두 줄의 양각선으로 두 신광을 구획하고, 가장자리에 좌우 각각 3구씩 6구의 화불(化佛)을 배열하였으며, 윗부분에는 삼존화불을 배치하였다.
두광의 내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안에는 연꽃무늬, 밖에는 하엽문(荷葉文 : 연잎무늬)과 같은 것을 새겼다. 두광·신광 밖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앞 불상과 거의 유사하나 다만 하대석의 아랫부분에 사자상 외에 향로 등이 조각된 점이 주목된다.
이 두 불상에서 보이는 양식적인 특징, 즉 육계가 불분명하고 작은 눈·코·입에 미소가 사라진 단정한 얼굴이라든지 신체의 양감이 없어져 평판적인 느낌을 주는 점, 평행 계단식의 옷주름, 단정하고 안정된 자세, 화려한 광배와 상·중·하대로 이루어진 8각연화대좌 등은 경상북도의 9세기 석불들과 같은 양식에 속하는 것이다. 이 석불좌상들의 조성 연대는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榮州 浮石寺 石造釋迦如來坐像)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 자인당에 봉안된 통일신라시대 불상. 2010년 2월 24일 보물 제1636호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1]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榮州浮石寺石造釋迦如來坐像)은 부석사 자인당(慈忍堂)에 다른 두 불상과 함께 삼존불의 주불 형태로 봉안되어 있다. 삼존불 가운데 석조비로자나불상 2구는 보물 제220호[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동불상]]와 보물 제221호[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서불상]]로,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2010년 2월 24일 보물 제163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어 있다. 삼존불은 원래 부석사 동쪽 1.5㎞ 지점에 위치하는 동방사지(東方寺址)에서 1957년에 옮겨온 것으로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과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얼굴의 인상이나 대의(大衣) 처리 등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의 조각 수법으로 보면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형태
부석사 자인당 중앙에 있는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87㎝, 무릎 너비 75㎝로 양쪽의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에 비해서 얼굴의 인상, 대의 처리, 신체비례 등이 다르다.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광배가 없고 불신과 대좌는 완전한 상태이다. 불상의 신체비례는 불신보다 불두가 크고 허리길이가 짧지만, 어깨와 무릎 폭이 넓어 앉은 자세가 안정감이 있다.
나발로 된 머리에는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근 편으로, 아래로 뜬 두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을 하고 있다. 수인은 왼손을 복부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뜨리고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불신에는 통견으로 대의를 걸치고, 대의 안에 대각선으로 입은 내의가 있고 치마를 묶은 띠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내의의 옷단은 꽃무늬[화문(花文)] 장식이 있다. 옷 주름은 신체와 자세에 따라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앉은 무릎 사이에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부채꼴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상대, 중대, 하대, 기단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앙련으로 표현된 상대는 연꽃잎에 장식을 더해 화려함을 더하고, 팔각의 중대에는 여래, 보살, 천인 등을 조각하였다. 특히 뒷면에는 반가좌(半跏坐)의 석장(錫杖)을 든 지장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하대는 복련으로 표현하였는데, 상대와 중대와 달리 장식성을 배제하면서 꽃잎 끝을 살짝 솟구치게 처리하였다. 팔각형의 기단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으로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고, 그 안에 보살상과 천인 및 사자로 보이는 동물상 등을 고부조(高浮彫)로 조각하였다.
특징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의 상호(相好)와 법의 표현, 대좌의 장식 등을 고려해 볼 때 예천 청룡사 석불여래좌상(醴泉靑龍寺石造如來坐像)[보물 제424호], 홍천 물걸리 석조여래좌상(洪川物傑里石造如來坐像)[보물 제541호] 등과 유사하여 9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2010년 2월 24일 보물 제1636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 석굴암 본존의 항마촉지인 계열을 따르는 석불로 내의와 꽃무늬 장식 등 통일신라 후반의 지방 양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14:12~14:26 관음전(觀音殿)으로 이동
14:26~14:27 스님들의 수행공간인 화엄선원(華嚴禪院)으로 이동
14:27~14:35 부석(浮石)으로 이동
[선묘설화(善妙說話)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의 창건에 얽힌 설화.
《삼국유사》에 의상(義相)이 당나라에 가서 공부할 때 양주성에 있는 어느 신도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집주인의 딸 선묘(善妙)가 의상을 사모하였으나 의상은 의연하게 대하였다. 선묘는 의상의 굳은 의지에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공부와 교화, 불사에 도움을 드리겠다'는 원(願)을 세웠다.
공부를 마친 의상은 그 신도의 집에 들러 인사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는 미리 준비한 법복과 여러 가지 용품을 함에 담아 해안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의상이 탄 배는 벌써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다. 선묘는 가져온 함을 바다로 던지며 배에 닿기를 기원하고,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는 주문을 외웠다.
신라에 귀국한 의상은 중생을 교화하던 중 676년(문무왕 16) 태백산의 한 줄기에 절터를 발견하였다. 사람들은 산적이 들끓는 곳이라 하여 만류했으나 의상은 직접 산적들을 만나 선하게 살 것을 당부하고 절을 짓게 해 달라고 하였다. 산적들은 화가 나서 의상을 죽이려 하였다. 이때 갑자기 선묘룡이 나타나 번갯불을 일으키고 봉황이 나타나 큰 바위를 세차례나 공중에 들었다 놓았다. 이에 놀란 산적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浮石)이라 짓고 봉황이 나타났다 해서 산 이름을 봉황산이라 불렀다.
부석은 부석사 무량수전 서쪽 암벽 밑에 있으며, 선묘룡은 주불 아래 있는 석등 밑에 묻혀 절의 수호신이 되었다. 1967년 5월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이 설화를 뒷받침하는 5m 가량의 석룡 하반부를 발굴한 바 있다.]
14:35~14:40 지장전(地藏殿)으로 이동
14:40~14:42 사진촬영
14:42~14:57 부석사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이 날 부석사 성보 박물관이 휴관 중이라서, 부석사 성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46호인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壁畵)와 보물 제1562호인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榮州 浮石寺 五佛會 掛佛幀)을 보지 못했음.]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榮州 浮石寺 祖師堂 壁畵)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조사당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벽화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46호로 지정되었다.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화가 있는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부석사 성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榮州 浮石寺 五佛會 掛佛幀)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화이다. 2008년 4월 2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562호로 지정되었다.
이 괘불은 1745년에 조성된 오불회도(五佛會圖) 형식의 괘불로서, 부석사에 전래되어 오던 1684년작 괘불을 청풍 신륵사로 이안하고 새롭게 조성한 것이다. 1684년작 괘불의 도상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노사나불을 새롭게 첨가하였다. 즉 가로축으로는 비로자나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을, 세로축으로는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 노사나불을 배치하여 삼세·삼신의 오불회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 중심은 영산회상의 설주(說主)인 석가모니불이다. 이와 같은 삼신·삼세불화 형식은 일본 주린지(十輪寺) 소장 오불회도(15세기)와 안성 칠장사 오불회 괘불탱(1628년)에서도 볼 수 있어 조선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후기에 정착한 도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오불회 형식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단행된 종단의 통폐합에 따른 삼신불, 삼세불 사상의 결합으로 나타난 도상으로, 이 괘불은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특히 대형의 군도형식의 불화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구도를 보이고 인물묘사에서도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필치를 보이는 등 18세기 중반경의 격조 높은 불화양식을 대변한다.]
14:57~15:20 간식을 하면서 휴식
15:20~15:37 “좋은사람들” 버스로 부석사를 출발하여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번지에 있는 소수서원으로 이동 (13.7km) [17분 소요]
탐방지 : 영주(榮州) [소수서원(紹修書院) & 선비촌]
[영주 소수서원(榮州 紹修書院)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위치한 서원.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해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祠廟)를 설립하였고, 1542년 유생 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이 서원의 시초이다. 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추가 배향하였다.
1546년(명종 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안현(安玹)은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고 운영 방책을 보완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마련하여 서원의 향사(享祀)에서부터 학전(學田)과 서적의 운용 및 관리, 노비와 원속(院屬)의 관리 등 서원의 운영·유지에 필요한 제반 방책을 마련하였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은 서원을 공인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또한 명종(明宗)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하였다.
이러한 조처를 통해 소수서원은 공인된 교육기관으로서, 이후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士林)들의 정치·사회 활동에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도 포괄하고 있어,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 내용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사액을 받기 이전까지 백운동서원은 풍기 사림들의 호응을 받지 못 했다. 그 이유는 서원이 풍기에 세워지긴 했으나, 경상도 내 각 군현 유생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한 사학(私學)의 위치를 굳힘에 따라 풍기의 사림들도 적극적으로 서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처럼 소수서원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부분을 담당하면서 향촌 사림의 정치적·사회적 기구로 정착되자 이후 전국에 서원들이 설립, 운영되어 조선시대 사학의 중심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주세붕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서원의 지나친 건립과 부패로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경내 건물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명륜당(明倫堂)·일신재(日新齋)·직방재(直方齋)·영정각(影幀閣)·전사청(典祀廳)·지락재(至樂齋)·학구재(學求齋)·서장각(書藏閣)·경렴정(景濂亭)과 탁연지(濯硯池)·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1963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1963년 국보로 지정된 안향 초상,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 1981년 보물로 지정된 주세붕 초상이 소장되어 있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
서원의 배치는 강학(講學)의 중심인 명륜당이 동향, 배향의 중심 공간인 사당(祠堂)이 남향이며, 기타 전각들은 어떤 중심축을 설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배치된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강당인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어 곧바로 명륜당의 남쪽 측면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있다. 명륜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으로, 중앙의 대청과 온돌방 및 마루방으로 되어있고, 대청·온돌방·마루방 주위로 툇마루를 둘렀다.
기단은 장대석(長臺石)을 바른 층 쌓기 하여 높게 만들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윗몸에 앙서[仰舌] 하나를 내어 기둥머리인 주두(柱頭)와 결구시킨 초익공(初翼工)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는 5량(五樑)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平柱) 위에 걸고,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받쳤으며, 그 위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일신재와 직방재는 각각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서 다른 서원에서는 강당 좌우에 대칭으로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서원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채로 건립하여 편액(扁額)을 달아 구분하고 있다.
이 동서 양재는 정면 6칸, 측면 1칸 반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 및 협실 앞의 툇마루로 되어 있다. 기단은 정면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바른 층 쌓기 하였으나, 후면에는 거친 사괴석(四塊石)들을 바른 층 쌓기 하였다. 기단 위에 놓인 막돌 초석 위에는 방주(方柱)를 세웠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앞뒤 평주 위에 걸고 간결한 동자기둥을 세워 마룻보를 걸었으며, 이 위에 판대공(板臺工)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다.
문성공묘는 명륜당의 서북 측 따로 쌓은 담장 속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맞배집으로 장대석의 낮은 기단 위에 원형의 주좌(柱座)가 있는 다듬은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배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또한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밑면에 초각한 첨차와 소로[小累], 그리고 끝이 날카로운 쇠서[牛舌]를 내어 결구한 초익공식(初翼工式)을 이루고 있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를 전면 고주(高柱)와 후면 평주 위에 걸고, 첨차로 짜인 동자기둥을 놓아 마룻보를 받친 후, 이 위에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맞배지붕의 양측 박공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風板)을 달았다.
그 밖에 서고·전사청·고직사(庫直舍) 등은 모두 사당 담 밖에 세워져 있다.
소수서원은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의 서원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소수서원 입장요금은 어른 2천원, 중고등학생 1,330원, 초등학생 660원이다.
영주 선비촌, 소수서원, 소수 박물관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통합 관람권은 성인 3,000원이다.]
[영주 선비촌
소재지 :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96
영주 선비촌은 한국 유교문화 발상지 경북 영주 순흥 소수서원에 바로 인접한 곳에 조성된 곳으로 옛 선비정신을 계승하고 선현들의 학문 탐구의 장과 전통 생활공간을 재현해 우리 고유의 사상과 생활상의 체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설립되었다.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할 수 있는 오감체험형 전시와 전통문화 체험의 기회 등 각종 기획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선비촌에 방문해 옛 선비들의 당시 생활상을 통해 잊혀져 가는 수준 높은 선비 문화와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탐방코스: [소수서원 매표소~숙수사지 당간지주~성생단~경렴정~강학당~지락재~학구재~일신재~장서각~문성공묘~전사청~영정각~사료관~고직사~충효교육관~탁청지~광풍정~소수박물관~(해우당 고택~강학당~승운정~우금촌 두암 고택~인동 장씨 종택~김문기 가옥~만죽재 고택~장휘덕 가옥~김뢰진 가옥~김세기 가옥~두암고택 가람집~대장간~김구영 가옥~강학당~해우당 고택)의 동선으로 선비촌을 탐방~소수박물관~취한대~징검다리~소수서원 매표소]
탐방일 : 2023년 12월 09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영주시 순흥면 최저기온 5도C, 최고기온 15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56분 소요)
15:37~15:53 소수서원 매표소에서 탐방 출발하여 [소나무 숲~숙수사지 당간지주~경렴정(景濂亭)~은행나무 고목~지도문(志道門)~강학당(講學堂)~일신재~직방재~지락재~학구재~장서각(藏書閣)~영정각~전사청~제향영역의 문성공묘(文成公廟)~사료관~고직사~충효 교육관]의 동선을 거쳐서 탁청지(濯淸池)로 이동
[영주 소수서원 강학당(榮州 紹修書院 講學堂)은 2004년 4월 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03호로 지정되었다.
강학당은 서원의 양대기능인 강학(講學)과 제향(祭享) 중 하나인 학문을 강론하던 장소이다.]
[재(齋)는 서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유숙하던 곳으로 오늘날의 기숙사로 보면 된다.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는 한 건물에 있으며,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는 별도의 건물로 되어 있다.]
[장서각(藏書閣)은 오늘날의 도서관으로 유학 경서나 문집 등의 서적, 목판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영주 소수서원 문성공묘(文成公廟)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소수서원 안에 있는 제향 기능의 사당으로, 안향을 비롯하여 안축, 안보, 주세붕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2004년 4월 6일 보물 제1402호로 지정되었고, 영주시청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탁청지(濯淸池)는 유생들이 공부하다 휴식을 취했다는 인공연못이다.]
15:53~15:55 광풍정(光風亭)을 지나서 소수박물관으로 이동
[이 날 소수박물관이 공사로 인해 휴관 중이라서, 국보 제111호인 안향 초상(安珦 肖像)은 관람할 수 없었다.]
[광풍정(光風亭)은 본래 '광풍대'라고 불리던 곳으로 퇴계 이황이 '제월광풍(霽月光風)'에서 따서 붙인 이름이다. 비가 갠 뒤 바람과 달처럼 마음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고 시원하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소수박물관(紹修博物館)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유교전문박물관.
설립일 : 2004년 9월22일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80(청구리 346번지)
관람시간 : 오전 9시~오후 6시
휴관일 : 없음
유교전문박물관으로 2004년 9월 22일 개관 하였다. 14,143㎡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건물로 5개의 전시실과 수장고, 시청각실, 야외전시실으로 이루어졌다. 3만 800여 점의 소장품이 소장, 전시되어 있고, 유교와 관련된 전통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았다.
국보 제111호인 안향 초상(安珦 肖像)이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획 전시실은 기증 받은 2만여 점의 유물을 연차적으로 순환 전시하고 있으며, 제 1전시실은 선사시대를 비롯한 삼국시대, 조선시대의 문화유적을 전시하고 있다. 제 2전시실은 ‘유교의 전래’라는 테마로 이황의 <성학십도>와 <사서삼경>, <학맥도>를 전시하며, 제 3전시실은 조선시대 사학기관인 서원과 지방교육기관인 향교에 대한 전시가 이루어진다. 제 4전시실에서는 소수서원 창건 이야기와 소수서원에 배향된 인물 등 소수서원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영주 선비촌, 소수서원, 소수 박물관을 모두 관람할 수 있는 통합 관람권을 판매하며 성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의 경우 1,000원이다.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다.]
[소수박물관에는 국보 제111호 안향 초상(安珦 肖像)이 소장되어 있다.]
[안향 초상(安珦 肖像)
요약 : 고려 후기의 명신 안향(安珦)의 영정.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소수박물관 (내죽1리)
크기 : 세로 37cm, 가로 29cm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비단에 채색하였으며, 1318년(충숙왕 5) 제작되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順興面) 내죽리(內竹里)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된 이제현 초상보다 1년 앞서 만들어졌으며 한국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충숙왕이 안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궁중에서 일하던 원나라 화가에게 그리게 한 것으로, 반신상(半身像)이며 30도 각도의 좌측상이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왼쪽을 바라보며 붉은 선으로 얼굴의 윤곽을 나타내었다. 옷주름은 선을 이용하여 명암 없이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본시 순흥향교(順興鄕校)에 안치해 오다가 1457년(세조 3)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역모사건을 일으킨 후 부(府)가 폐지되자 한양(漢陽)의 안씨종가(安氏宗家)에 옮겨졌다가 소수서원이 세워지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초상화는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안향(安珦)
개설
고려 후기 영주 출신인 안향(安珦)[1243~1306]은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도입한 문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제향되었다.
가계
안향의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안유(安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훗날 이름을 ‘안향’으로 고쳤지만, 조선의 5대 임금 문종과 휘가 같아 조선시대 저서에는 ‘안유’로 기록되어 있다. ‘회헌’이란 호는 송나라 주자를 흠모하여,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낸 안자미(安子美), 할아버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증직된 안영유(安永儒)[1201~?], 아버지는 주리(州吏)로 의업(醫業)에 종사하다가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오른 안부(安孚)[1220~?], 어머니는 예빈승(禮賓承)을 지낸 우성윤(禹成允)의 딸 강주우씨(剛州禹氏)이다.
안향의 첫 번째 부인은 우사간(右司諫) 김녹연(金祿延)의 딸 한남김씨(漢南金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염수장(廉守藏)의 딸 서원염씨(瑞原廉氏)이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낸 안우기(安于器)[1265~1329]가 아들이다. 사위는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를 지낸 문욱(文頊),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를 지낸 허수(許绥), 통문서록사(通文署錄事)를 지낸 박제(朴璾), 직사관(直史館)을 지낸 한수연(韓守延), 정경공(貞景公) 김사원(金士元)[?~1319]이다.
활동 사항
안향은 1243년(고종 30) 흥주(興州) 평리촌(坪里村)[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석교리]에서 출생하였다.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에 보임되었다가 직한림원으로 승진해 내시원에 소속되었다.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난 때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계책을 써서 탈출하니, 원종이 가상히 여겨 상을 내렸다. 1271년(원종 12) 서도(西道)에 파견되었는데, 청렴한 생활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후 내시원에 재직하면서 내시원의 오랜 폐단을 임금께 보고해 혁파하였으며, 1272년 감찰어사로 승진하였다.
안향은 1275년(충렬왕 1) 상주판관으로 부임했을 때 합주(陜州)[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백성들을 현혹하고 다니던 무당들이 오자, 무당들을 엄격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바로잡았다. 경상도안렴사가 고과 평정에서 안향을 표창하였고, 곧 판도좌랑으로 승진하였다. 1277년 판도좌랑, 1278년 전중시사를 거쳐 1279년 독로화(禿魯花)[뚤루게]에 선발되어 국자사업으로 승진하였다. 1279년 3월 대방공(帶方公) 징(瀓)을 따라 원나라에 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로 돌아온 안향은 우사의대부를 거쳐, 1288년(충렬왕 14) 좌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1288년 9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89년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정동행성원외랑에 임명되었고, 곧 낭중에 올랐다. 1289년 11월 원나라에 가는 충렬왕, 제국대장공주, 세자를 수종하였는데, 1290년 귀국할 때 주자서를 필사하고 공자, 주자의 초상화를 모사하여 돌아왔다. 1292년 충렬왕이 질환이 있자 안향의 집에 머물렀으며, 1293년에는 제국대장공주가 안향의 집에 머물렀다. 1293년 원나라 세조가 충렬왕에게 추충선력정원(推忠宣力定遠)의 공신호를 내렸는데, 안향이 시를 지어 하례하자 미(米) 50석을 하사하였다. 1294년(충렬왕 20) 부지밀직사사로 동남도병마사를 제수받아 합포에 출진하였으며, 합포에서 안향은 군사들을 위무하고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1294년 지공거로 동지공거 민지(閔漬)[1248~1326]와 함께 과거시험을 주관하였다. 1296년 삼사좌사, 1297년 첨의참리세자이보에 각각 임명되었다.
안향은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참지기무 행동경유수 집현적대학사 계림부윤(參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太學士鷄林府尹)으로 임명되었다. 8월 충선왕과 계국공주가 원나라에 들어갈 때 호종하였다. 1299년 충렬왕이 복위한 뒤 수국사로 승진하였다. 1300년(충렬왕 26) 도첨의찬성사에 임명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은 오기(吳祁)[1259~1336], 석천보(石天補) 등의 무고를 당하였다. 이때 첨의중찬으로 치사하였으나, 곧 찬성사로 복직하였다. 1301년 국자감이 수차례의 병화로 허물어지자, 안향은 자신의 저택을 국가에 바치고 서부 양온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토지와 남녀 노비 각 100명을 국자감에 귀속시켰다. 안향은 교육기관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근심하여 관료들에게 차등 있게 은과 포를 내게 하여,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섬학전(贍學錢)으로 삼자고 양부(兩部)에 건의하였다.
안향은 1303년(충렬왕 29) 국학박사 김문정(金文鼎)을 원나라에 파견하여 공자와 십철(十哲)의 초상, 문묘 제기, 악기, 6경 및 제자사서(諸子史書)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또 이산(李imagefont), 이진(李瑱)[1244~1321]을 천거하여 경사교수도감사로 삼았다. 이때 금내학관(禁內學館), 내시(內侍), 삼도감(三都監), 오고(五庫)의 관리, 그리고 7관(七管), 12도(十二徒)의 생도 중 경서 수업을 받은 자가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향은 1303년 12월 첨의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고, 1304년 판밀직사사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다.
학문과 저술
안향의 사적(事蹟)을 모은 『회헌실기(晦軒實記)』는 모두 네 차례 간행되었다. 첫 번째는 1763년(영조 39) 안향의 17대손 안극권(安克權)이 유집사실(遺什事實), 세계비지(世系碑誌), 제현기술(諸賢記述) 등을 편집하여, 1766년에 간행하였다. 이것을 ‘도동본실기(道東本實記)’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1816년(순조 16) 안재묵(安在默) 등이 증보한 것으로, 이때 안향의 연보도 완성되었다. 세 번째는 안명렬(安明烈) 등이 1883~1884년 사이에 간행한 것인데, 이를 ‘태학본실기(太學本實記)’라고 한다. 네 번째는 1909년 후손과 사림이 합의하여 간행한 것이다. 경상남도 진주 연산(硯山) 소장의 목판본으로 이를 ‘연산본실기’라고 부른다. 실기는 5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묘소
안향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눌목리 대덕산에 있는데, 안향 사후에 충렬왕이 내린 장지이다.
상훈과 추모
안향이 1306년(충렬왕 32)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이 ‘문성’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례를 치를 때 7관과 12도의 유생들이 소복을 하고 노제를 지냈다고 한다. 1318년(충숙왕 5) 왕명으로 원나라 화공에게 안향의 영정을 제작하게 하여, 문묘에 봉안하였다. 훗날 흥주의 수령 최림(崔琳)이 이 영정을 모사하여 흥주향교에 봉안하였는데 이것이 국보 제111호로 지정된 안향 초상이다. 1319년 조정에서 안향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안향의 문생 신천(辛蕆)[?~1339]이 힘껏 주청하여 종사가 이루어졌다.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지금의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안향을 제향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였다. 백운동서원은 1549년(명종 4)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 받게 된다. 1643년(인조 21)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의 임강서원(臨江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56년(효종 7)에는 14세손 안응창(安應昌)[1603~1680]이 안향의 출생지인 지금의 순흥면 석교리에 영주 안향 향려비(榮州安珦鄕閭碑)[문화재자료 제611호]를 세웠다. 1676년(숙종 2)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의 도동묘(道東廟)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1781년(정조 5) 경기도 개성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신위를 봉안한 안자묘(安子廟)는 원래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서울특별시 마포구 창천동으로 옮겨졌다가, 1975년 경기도 의왕시 월암동으로 다시 옮겼다.]
15:55~15:56 [선비, 꿈과 이상을 걸다 – 현판]이란 제목의 특별기획전을 전시 중인 소수박물관의 별관으로 이동
15:56~16:00 소수박물관의 별관에서 전시 중인 [선비, 꿈과 이상을 걸다 – 현판]이란 제목의 특별기획전을 관람
16:00~16:03 선비촌의 해우당 고택으로 이동
16:03~16:16 [해우당 고택~강학당~승운정~우금촌 두암 고택~인동 장씨 종택~김문기 가옥~만죽재 고택~장휘덕 가옥~김뢰진 가옥~김세기 가옥~두암고택 가람집~대장간~김구영 가옥~강학당~해우당 고택]의 동선으로 선비촌을 탐방
16:16~16:18 소수박물관으로 회귀
16:18~16:26 취한대(翠寒臺)로 이동
[취한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대(臺)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허물어졌다. 그 자리에 다시 터를 닦아 정자를 지었는데 "취한"이란 뜻은 "푸른 연화산의 산 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詩)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옛시 "송취한계"(松翠寒溪)에서 비취 "취"(翠)자와 차가울 "한'(寒)자를 따온 것이라 한다. 취한대는 주로 원생들이 휴식을 취하던 장소다.]
16:26~16:28 사진촬영
16:28~16:33 징검다리를 건너서 소수서원 매표소로 원점회귀하여 탐방 완료
16:33~16:37 “좋은사람들” 버스에 승차하여 출발 대기
16:37~19:02 “좋은사람들” 버스로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번지에 있는 소수서원 주차장을 출발하여 서울 양재역으로 이동 (187km) [2시간25분 소요]
국립 백두대간수목원 안내도
영주 부석사 안내도
영주 소수서원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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