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삼경 목사 / <교회와신앙> 상임이사 인터넷신문 <법과교회>(구, <로앤처치> <에클레시안>)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인 황규학 씨의 실체를 밝히는 글을 연재한다. 기독교언론의 정도를 벗어난 그의 기사들로부터 한국교회를 보호하는 공익적 차원에서의 대응이다. 황규학 씨의 반론은 물론 지상논쟁도 수용할 것임을 밝혀둔다. [ 편집자 주 ]
서론: 황규학 씨가 지금까지 나, 최삼경을 공격한 글의 양은 무려 800-1000여 쪽이나 된다.
황규학 씨를 목사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는 지금 목사가 아니다. 황 씨는 예장통합 목사직을 유지해 보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2013년 2월 23일 서남노회에서 목사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말았다. 형식은 스스로 내려놓은 꼴이지만, 실은 목사직을 유지할 수 없어서 포기했다고 해야 맞다. 황 씨는 예장통합 서남노회 소속 목사로 있다가 사역지가 없어서 무임목사 기간까지 넘겨 목사직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서울북노회 전도목사로 신청했다가 그것도 거절되었고, 다시 서남노회 전도목사로 신청을 하였다가 거절되자, 아예 스스로 목사직을 내려놓고 말았다. 비록 성추행범, 절도미수범으로 대법원에서 확정된 황 씨지만, 무슨 이유로든 그래도 목사직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쳤던 모양인데, 견디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목사직을 내려놓았다. 이 점에 대하여 나중에 자세히 밝히도록 하겠다. 이런 차제에 그를 ‘전도사’라고 부를 수 없고, 그렇다고 ‘목사’가 아닌데 다시 목사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어서, 대신 일반 존칭어인 ‘씨’ 또는 그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려고 한다. 그렇더라도 황규학 씨는 2년이나 자기에게 선교비를 보내준 목사를 다른 더 큰 이익을 좇느라 배신하고, 본인(최삼경)을 지금까지 비판하면서 황 씨 자신이 사용해온 저질스런 표현들을 돌아보고, 이 정도에 만족하고 감사하기 바란다. 1. 교계에는 본인과 이단연구가들을 비판하여 이익을 취하고, 결국 이단들을 이롭게 하고 돕는 사람들이 많다. 교계에는 특별히 사적인 원한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본인과 이단연구가들을 공격하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앞장서는 자들이 적지 않다. 대부분 순수를 가장하지만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이며, 그들 뒤에는 으레 이단옹호언론들이 있어 힘을 공급해주고 있다.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 본인이나 이단연구가들의 활동에서 파생되는 반대급부를 노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황규학 씨 역시 본인(최삼경)은 물론 이단연구가들을 공격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사는 한 사람이다. 그는 지난 2009년 8월 6일부터 2015년 5월 현재까지 본인을 줄기차게 비판해 왔다. 그중에서 2009년부터 2013년 7월까지 4년간 본인의 이름이 들어간 글들을 다 합하면, 무려 800여 쪽에 달한다. 물론 누가 정리해준 것을 본인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포인트를 좀 올려서 계산한 양이다. 원 기사의 사진 등이 빠진 점을 고려하면, 이것이 실제 분량과 거의 일치한다고 보며, 그 후부터 2015년 5월 현재까지 다 모으면 족히 1천여 쪽 되지 않을까 추정된다. 2. 그동안 본인(최삼경)은 황규학 씨의 비판에 대꾸하지 않았다. 본인은 지금까지 황 씨의 비판 기사들을 볼 때마다 상투적으로 유사한 모순과 거짓말을 발견하고도 대꾸하지 않고 무시했다. 물론 다른 비판자들에 대하여도 나의 태도는 같았다. 이런 태도에 대해 황 씨나 이단옹호언론들은 어떻게 이해할지 궁금하다. ‘내가 꼬리를 내렸다’고 생각할까? ‘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자기네 글이 완벽해서 내가 대꾸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까? 내 눈에는 황 씨만큼 두 개의 잣대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런 황 씨에게 내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음을 알기 바란다. 첫째는 바쁘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오랫동안 일인다역의 일을 해왔다. 목회하랴, <교회와신앙>을 이끌랴, 글을 쓰랴, 국내외에서 집회하랴, 고소와 소송에 대처하랴… 참으로 바빴다. 목회란 작든 크든 한 사람의 노력을 다 들여도 부족하다. 황 씨 같은 사람의 가치 없는 글에 구태여 답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이것이 형식적인 이유였다. 둘째, 의식 있는 사람이라면 황 씨의 글만 보고도 진실을 쉽게 판단할 것으로 믿고, 그냥 독자들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저들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노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려주기 위하여 유치하지만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 대한 이단자들과 이단옹호자들의 무차별한 공격이 나에게 고통은 주었지만, 사실 31년 동안 교회는 단 한 번도 후퇴한 일이 없었고, <교회와신앙> 또한 갈수록 후원이 늘고 있다. <교회와신앙>에 대한 후원처럼 순수한 후원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 부족한 나에 대한 한국 교회들의 신뢰와 사랑이며, 셋째는 원수들이 나에게 준 선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원수들의 목전에서 상(床)을 차려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교회는 이처럼 진실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모르는 자는 그들뿐이다! 아는 자는 모르는 것도 알지만, 모르는 자는 아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셋째, 악한 자들의 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믿어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황 씨의 글에 대처하지 않은 적극적인 이유이다. 나를 감히 다윗에 비견할 것은 아니라도, 다윗이 고난 중에 남긴 교훈 중에 최대의 교훈은 시편 37:7이라고 본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다윗은 이 마음으로 살았기에 사울의 목을 두 번이나 칠 기회를 가지고도 치지 않았다. 다윗처럼 나도 나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최대한 기도하고, 최소한의 반격을 하였다고 자평한다. 나도 다윗처럼 가능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려고 노력하였다. 하만이 자기 집 앞마당에 장대를 세우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만이 오늘이라도 그 장대를 치웠다면 내일 하만은 살았을 터인데, 오로지 그 장대에 모르드개의 목을 달 궁리만 하다가 결국 자기 목이 달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은 자기가 친 올무에 빠지게 하고, 스스로 판 웅덩이에 스스로 빠지게 하심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3. 이제 황 씨의 글들에 대하여 진실을 밝히고 한국교회를 위하는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비판하겠다. 내가 앞에서 서술한 마음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황 씨의 글 하나하나를 비판하려고 한다. 두려운 것은 결코 황규학 씨가 아니다. 이 일로 인하여 내 영이 흐려질까 하는 점이다. 이단과 싸우다 사랑을 잃은 에베소교회와 같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노력한다. 성도는 외부에 있는 천 만 원수들보다 내 속에 있는 하나의 죄가 더 두려워해야 한다. 악한 자는 온갖 악한 방법을 다 사용하는 반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악한 자에게조차 악한 방법을 사용할 수가 없다. 성경 말씀대로, 악으로 악을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에도 다른 이단들과 논쟁할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나는 황 씨를 위하여 더 기도하며 비판해 갈 것이다. 황 씨를 공격함으로써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앞에 진실을 밝히기 위한 반박이란 점을 황 씨도 독자도 알기 바란다. 어떤 글이든 글이란 글 자체의 우상성이 있다. 그래서 거짓되고 악한 글인데도 일단 글로 나타나면 영향을 끼친다. 특히 정보를 바르게 취하고 버릴 능력이 없는 순진한 사람들일수록 더 큰 혼돈을 일으킨다. 성숙한 사람이라도 정보의 진위를 구별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요하는 것이다. 또한 어디나 삼류급 잡지나 인터넷 자료를 통하여 정보를 취하고 사는 삼류급 인생들이 있다. 이단옹호자들과 이단에 속한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다. 그러니 황 씨의 글은 정통교회에 영향을 미치기보다 이단들을 이롭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음이 분명하다. 황 씨를 포함한 ‘이단옹호자’들의 글은 의식 있는 정통교회의 주류 멤버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잘 모르는 평신도들에 대한 미혹 우려가 없지 않고, 더 나아가 이단들에게 힘을 주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황 씨의 만행을 더 이상 묵과하는 것은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관망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나는 황규학 씨의 글에 대하여 가능하면 시리즈로 철저히, 내가 할 수 있는 비판을 다하려고 한다. 황 씨가 얼마나 악한 사람이고 거짓된 사람이며, 한국교회를 해롭게 하는 무익한 사람인가를 증명하여 한국교회 피해를 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비진실성, 비윤리성, 비논리성, 비학문성 등을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철저히 비판하겠다. 본론 : 황규학 씨의 성추행과 절도미수의 진실이 무엇인가?
황규학 씨의 전과기록은 너무 다양하다. 아니 찬란하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명예훼손은 기본이고, 모욕, 상해, 폭행, 건조물침입 등등이다. 게다가 목사로서는 물론 평신도로서도, 아니 세상 사람으로도 도저히 있을 수 없고 있어서 안 되는 전과기록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성추행, 하나는 절도미수다. 황 씨는 ‘개혁’이란 이름으로 한국교회의 문제가 있는 곳마다 수도 없이 가리지 않고 끼어들어 때로 금품을 수수하기도 하는 등 한국교회에 혼란을 주었다(이 점에 대하여도 더 자세히 밝힐 것을 약속해둔다). 그러나 황규학 씨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이 첫 번째 글에서, 우선 그의 성추행과 절도미수에 대하여 분석하고 밝히려 한다. 본인은 지금까지 남의 윤리 문제를 거의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 씨의 경우, 한 때는 그도 목사였는데, 그런 사람의 성추행이나 절도미수 따위의 죄를 밝히는 것은 마음 아픈 일로 결코 기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황 씨가 누군지 누구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됨을 한국교회도, 황 씨도, 특히 그의 가족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1. 황규학 씨의 성추행과 절도미수의 진상은 무엇인가?
사건의 시작은 2007년 4월경이었다. 황 씨는 서울 지하철에서 여자 승객을 성추행해,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위반죄’(공중밀집장소에서의 추행)로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300만원 벌금형을 받고 대법원에 상고까지 하였으나, 3년 여만인 2010년 7월 15일 오전 10시에 황 씨의 상고가 기각당하고, 300만원의 벌금이 확정되었다(대법원 2010도6003).
그 후 황 씨는 성추행도 부족하여 위 사건의 계류 중에 또 다시 지하철에서 절도를 하다가 미수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앞의 성추행에 대한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은 지 1주일만인 2010년 7월 22일 오후 3시쯤, 서울중앙지법 서관 513호 법정에서 열린 황규학 씨의 절도미수 최후진술에서 그는 “성추행 재판 이후에 목회자 신분을 감추고 잘못을 저질러 죄송하다.”고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하였다. 당시 검찰은 “성추행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 절도 범죄를 또 저질렀기 때문에, 벌을 더 주어야 마땅하지만, 이미 내린 약식명령의 벌금형 수준으로 300만원에 처해 달라.”고 구형을 했다고 한 언론이 기록하였다(2010년 7월 23일, 금, 09:06:30, <유니온뉴스>, 유은석 기자). 결국 황 씨는, 당시 목사로서, 성추행범죄 외에 절도죄의 화려한(?) 전력을 하나 더 추가하여, 대법원 판정을 받게 되었다(대법원 2011도737). 2010년 7월 22일, 물론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지만 황 씨는 인터넷신문을 접고, 목회자와 교수의 길로 가겠다고 선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위의 기사).
2. 그러나 황 씨는 이제 와서 자신이 성추행이나 절도를 하지 않았다고 부인한다.
우선, 황 씨 자신도 목사로서 성추행이나 절도를 했다면 부끄러운 죄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이 그것을 반증해 준다. 목사라는 사람이 실제로 성추행을 하고 절도를 했다면, 한국교회에서 사라져야 할 사람이라고 해도 동의할 것으로 믿어진다. 성추행이나 하고 절도를 하려는 사람이 목사라고 하는 것도 한심한데, 거기에다 ‘한국교회 개혁’까지 운운하며 여기저기 끼는 것은 매국노가 ‘애국자’ 연하는 것과 같고, 가룟 유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황 씨는 성추행도 절도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물론 회개할 이유도 뜻도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정작 회개는 황 씨가 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를 고소했던 피해자 여성과 특히 경찰과 검사와 판사들과 그리고 그를 공격 비판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제부터 황 씨의 두 가지 범죄 성추행과 절도미수가 사실인지 그의 변명은 사실인지 분석해보기로 한다.
3. 황 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뉴스앤조이> 기자(김은실)와 진용식 목사에게 변명하면서, 상당한 진실을 밝힐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그가 스스로 변호하고 그 증거까지 제시한 점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는 <뉴스앤조이> 2013년 5월 21일의 “금품 수수 왜곡 이단 옹호 <로앤처치> 황규학, 성추행 절도 전과 등 자질 의심받아 … 황규학 ‘누명이다’”라는 글이며, 하나는 진용식 목사와 나눈 문자들이다.
먼저 <뉴스앤조이>의 기사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보자. “성추행과 절도 미수는 경찰의 강압에 못 이겨 자백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황 씨가 성추행했다고 주장하는 시점에 자신은 이미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성추행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 근거로 성추행 피해자가 자신을 보지 못했다는 점을 들었다. 절도 미수 역시 가방이 열려 있었던 사람 곁에 서 있다가 오해를 받았는데 당시 핀란드로 갈 예정이어서 구속 수사만은 피하려 어쩔 수 없이 범행을 시인했다고 이야기했다.”(<뉴스앤조이>, ‘금품 수수 왜곡 이단 옹호 <로앤처치> 황규학, 성추행 절도 전과 등 자질 의심받아’ 김은실, 2013년 5월 21일)
이것은 황 씨 자신이 밝힌 성추행과 절도미수에 대한 유일한 공적 변명이요 자료다. 충분하지 않지만 황 씨의 변명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핵심적 요소가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런 일이다. 더 고마운 것은, 황 씨가 <뉴스앤조이> 기자에게 당시 법정에서 성추행을 당한 여성이 고소인으로서 증인으로 나와 판사의 질문에 답한 법정진술 일부 문건자료를 스스로 제시해 주었다는 점이다. 문건자료의 내용과 사진은 다음과 같으며, 여기서 질문자는 판사이고, 증인은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이다. 문: 증인이 조사받을 당시 상대방이 증인에게 변명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상대방과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문: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한 사실은 있는가요? 답: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문: 경찰관이 와서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말해주며 진술하겠느냐고 물었던 것인가요? 답: 경찰관이 휴대전화로 사진촬영을 하였다고 말하였고, 증인도 근절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소의사를 밝혔던 것입니다. 문: 증인은 경찰관이 촬영한 휴대전화 사진을 확인한 사실이 있는가요?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amennews.com%2Fnews%2Fphoto%2F201505%2F13683_18653_130.jpg) | | ▲ 황규학 씨가 무죄라는 증거로 제공한 성추행을 당한 여성의 ‘증인법정진술’ 일부 |
두 번째로, 황 씨가 자신은 성추행을 하지 않았다고 진용식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문자들이다. 이것 역시 위의 자료 못지않게 황 씨의 성추행과 절도의 진실이 무엇인지 밝힐 소중한 자료이다. 황 씨가 2015년 4월 5일에 진용식 목사에게 ‘최삼경이 있는 세이연을 떠나라. 최삼경 때문에 진용식을 공격하게 되었다.’는 취지의 회유 내지 협박(?)을 하면서 보낸 문자들이다. 위의 <뉴스앤조이> 기사와 비교만 해봐도, 황 씨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무엇이며 또 거짓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추정된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문자 중에 핵심인데, 그대로 소개한다.
진용식 목사: 성추행자가 언론을 할 수 있나요? 황규학 씨: 성추행 보았나요? 진용식 목사: 기사를 보았습니다. 황규학 씨: 여자도 저를 보지 못했답니다. 판사가 잘못 판단한 것이지요. 진용식 목사: 대법원 확정 되었다면서요? 황규학 씨: 대법원이고 고등법원이고 여자는 저를 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지하철 노선도 달랐지요.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amennews.com%2Fnews%2Fphoto%2F201505%2F13683_18654_151.jpg) | | ▲ 진용식 목사와 황규학 씨의 문자대화 |
이제 분석해보자. 한 마디로 황 씨의 진술에는 일관성이 없고, 백번 양보해도 이해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 특히 위의 법정 진술서를 가지고 황 씨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것부터가 그의 무지 아니면 교만이라고 본다. 나는 법을 전공한 일도 없고 ‘가방끈도 짧은 사람’이지만, 위 진술에 의하면 황 씨의 성추행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가방끈 짧은 사람’의 분석을 주의 깊게 보기 바란다.
4. ‘피해 여성이 황 씨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 성추행은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데 성추행을 당했겠느냐? ’는 것이 황 씨 변명의 핵심이다.
<뉴스앤조이>의 위 기사에서는 “성추행 피해자가 자신을 보지 못했다는 점을 들었다.”라고 되어 있고, 진용식 목사에게 보낸 문자에는 “여자도 저를 보지 못했답니다. 판사가 잘못 판단한 것이지요.”라고 하고 “대법원이고 고등법원이고 여자는 저를 본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지하철 노선도 달랐지요.”라고 하여, “지하철 노선도 달랐지요.”라는 새로운 주장과 함께 ‘피해 여성이 자신을 본 일이 없음’을 두 번이나 강조했던 것을 보면, 이것이 황 씨가 억울하다는 핵심 내용임이 분명하다. 얼핏 들으면 황 씨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5. 하지만 황 씨의 변명이 맞으려면 이런 말이 되어야 한다.
‘나는(증인 여성) 황 씨를 대면한 일도 없고, 얼굴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저 사람이 나를 성추행한 장본인 같으니 처벌해주세요.’라는 말을 했다면 황 씨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나는 상대방(황 씨)을 본 일도 없고 사실 나는 성추행을 당한 일도 없었습니다.’라고 하든지, 아니면 ‘나는 누군가에 의하여 성추행을 당했지만, 상대방(황 씨)을 본 일도 없고 나를 추행한 사람이 저 사람인지 아닌지 확신은 없습니다. 비슷하기만 해도 처벌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했다면, 경찰과 검사와 판사가 한 여자의 확실하지 못한 고소와 증언에 의하여 황 씨를 처벌하는 우스꽝스런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여성이 했던, “상대방과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보인다. “상대방과 대면하지 않았습니다.”는 말은 ‘대면하지 않겠다. 대면할 마음이 없다.’라는 말로 들린다. 사실 성추행을 당한 여성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몰라도, 나를 성추행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겠는가? 처벌해 달라고 고소까지 한 상황에서 말이다.
비록 성추행을 당했다고 하여도 고소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내야하고,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도 들 수 있고, 또 당한 성추행의 구체적 행동까지 언급해야 하고, 자기 이름이 알려지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수 있고, 또 보복을 당할까 두렵기도 한 점 등을 고려하면 고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고소하였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말은 성추행시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다는 말로 들린다. 그런데 핵심은 바로 그 여성이 밝히고 있는 그 다음의 말이다. “경찰관이 휴대전화로 사진촬영을 하였다고 말하였고, 증인도 근절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소의사를 밝혔던 것입니다.”라는 것이다.
볼 수 없었고, 보고 싶지 않아서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더러운 성추행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변명하는 황 씨의 이런 변명을 들으면 이 여성은 과연 무엇이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이 여성은 ‘경찰이 찍은 사진을 통하여 황 씨가 범인인 것을 알았고, 그래서 고소하였고, 황 씨는 유죄가 확정된 것이 분명하다. 이 여성이 “증인도 근절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소의사를 밝혔던 것입니다.”라는 말이 이를 못 박고 있다. 황 씨의 주장은, 마치 복면을 하고 저지른 성폭행은 상대방이 얼굴을 모르니 성폭행범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지하철에서 여자들을 성추행이나 하는 사람들의 행태를 상상해 보자. 여성 앞에 서서 얼굴을 직접 쳐다보면서 추행을 하는가? 아니다. 여성 뒤에서 숨어서 얼굴과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추행하는 것이 상례다. 오히려 딴청을 부리며 추행을 하고 상대가 소리를 지르거나 뭐라고 하면, 추행하던 손을 떼고 반대로 상대 여성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오히려 뒤집어씌우거나 하다가, 줄행랑쳐버리는 것이 상례이고, 혹 만에 하나 여성 쪽에서 거부나 저항의 기미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성추행범의 수법일 것이다.
이 피해 여성은 황 씨가 자신을 추행한 증거도 없이 어떻게 고소했겠으며, 또 법정은 그런 증거도 없이 세 번이나(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성추행범이라는 주홍글씨를 황 씨 이마에 새겨 넣을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법을 전공하신 황 씨가 대답해주기 바란다.
6. 황 씨의 성추행의 객관적이고도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경찰의 사진 촬영으로 보인다.
그 여성이 “상대방과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말이 황 씨의 무죄를 증명해 주는 게 아니라, ‘경찰관이 휴대전화로 (성추행자를) 사진촬영을 하였다고 말하였고, (경찰이 고마웠고 그래서 이런 성추행을) 증인도 근절해야겠다는 생각에 고소의사를 밝혔던 것입니다.’라는 취지의 말이 황 씨의 유죄를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필자는 경찰이 촬영했다는 사진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증거주의를 절대로 해야 할 법정에서, 객관적 증거도 없이 누구를 성추행범으로 몰아갔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대한민국에 법학을 전공하셨다는 황 씨와 그를 옹호하고 그를 의지하는 이단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뉴스앤조이> 기자에게 황 씨가 건네준 법정진술서 끝을 더 주목하면 진실이 보인다. 판사의 질문은 이렇다. “증인은 경찰관이 촬영한 휴대전화 사진을 확인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데 그 여성의 답은 잘라져서 볼 수 없다. 황 씨가 기자에게 그 부분을 주지 않았을까, 주었는데 기자가 빼고 기사를 썼을까? 처음부터 황 씨가 그 부분을 잘라내고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그것을 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혹 황 씨가 <뉴스앤조이> 기자에게 판사의 질문에 대한 증인 여성의 답변을 주었다면 다시 그 부분을 본인의 글에 대한 답변서에서 밝혀주는 것은 쉬울 일이라고 본다. 그 진술서 전부를 공개해주면 더욱 좋겠다.
그 여성이 “상대방과 대면하지 않았습니다.” “얼굴은 보지 못하였습니다.”고 한 그 말과 직선상에서 보면, 이 여성의 답이 무엇이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이 황 씨가 그것을 빼버리고 기자에게 주지 않은(주지 않았다면)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여성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했을까를 추정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앞에서 “경찰관이 휴대전화로 사진촬영을 하였다.”고 했던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다행히 그 경찰관이 촬영까지 했더군요. 지하철에서 나를 만지고 더듬고 해서 어떻게 할지 몰랐고, 참으로 황당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추행을 당하지 않았느냐고 묻기에 그랬다고 했고, 경찰이 직접 찍은 사진까지 보여주었는데 추행범의 옷 등을 볼 때 저 사람이란 점을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소하였습니다. 저런 사람은 엄벌에 처하여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해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사실 황규학 씨는 성추행에 따른 조사와 재판에서 자신이 목사라는 것을 숨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자신을 목사로 알린 것은 절도미수 혐의 후 진술한 때였던 것 같다. 그가 절도죄에 대하여 판결을 받던 2010년 7월 22일에 한 진술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성추행 재판 이후에 목회자 신분을 감추고 잘못을 저질러 죄송하다.”고 공소 사실을 모두 인정하였다(2010년 7월 23일, 금, 09:06:30, <유니온뉴스>, 유은석 기자)는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왜 황 씨는 목사라는 것을 숨겼을까? 짓지도 않은 죄로 인하여 지금 성추행범이 되고 절도미수자가 될 판인데, 목사인 것을 바로 드러내고 무죄를 증명하려고 했다면 도움이 되었을 것인데 왜 앞서 숨겼는가? 그렇게도 사역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목사직만은 유지하려고 애썼던 분으로서는 좀체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7. 황 씨는 ‘경찰의 강압이 있었다.’고 했고, 자신은 ‘이미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성추행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하고, 심지어 ‘피해 여성과 자신은 다른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황 씨의 주장에 의하면, 우선 이 나라 경찰은 무고한 사람을 성추행범으로 몰기 위하여 강압까지 했다는 말이 된다. 경찰의 ‘강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고문을 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구타를 했다는 말인지? 무슨 강압을 어떻게 받았는가? 더 구체적으로 밝혀주길 바란다.
그보다 진실과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할 사람인 목사가 무슨 강압에 못 이겨 허위진술까지 하여, 성추행범이란 주홍글씨를 이마에 붙이고 살아가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까지 세 번이나 재판을 받는 동안 황 씨는 과연 뭐라고 진술했단 말인지 그것도 궁금하다. 추정하기로 경찰의 강압이란 것은 ‘이렇게 증거가 충분한데 왜 부인하느냐’고 말로 하는 강압이었을 것이다. 황 씨는 법정에서 했다는 진술들이 형량을 줄이기 위한 진술이었는지, 아니면 무죄를 증명하려는 진술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그것도 밝혀 자신의 진실을 드러내기를 기대한다.
황 씨가 진짜 억울한 성추행범 누명을 썼다면, ‘나는 성추행범이 아닙니다. 그 여성을 성추행한 사람은 내가 아닙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세상에 목사가 성추행을 하겠습니까? 나는 죽어도 허위진술을 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목사로서 성추행범이란 이름을 가지고 사느니 차리라 나는 죽어야 합니다. 촬영을 다시 확인해 주십시오. 옷 색깔이 다르고 내가 그 때 입고 있는 하복 바지도 다르지 않습니까? 나는 그 때 나는 그 차를 타지도 않았습니다. 거기 설치된 CCTV들이 있을 것이니 확인해 주십시오. 내가 앞차에서 내린 사진이 있을 것입니다. 경찰이 촬영했다는 그곳에 내 얼굴이 나옵니까? 어떻게 이런 식으로 생사람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타고 온 기차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성추행을 합니까? 나는 몇 시 몇 분에 몇 호 열차를 탔고, 그 여성은 내가 탔던 열차와 다른, 몇 시 몇 분의 몇 호 열차에 타고 있었습니다.’라고 했더라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평소 교회 개혁을 운운하던 사람으로서 황 씨는 자신을 억울하게 만든 그 대상이 여성이든 경찰이든 검사든 판사든 목숨을 걸고 싸웠어야 걸맞다. 그리고 자신을 고소한 그 여성과 경찰을 고소했어야 하고, 그 경찰을 시민연대에 고발하고 기독교의 힘을 빌려 목사를 성추행범으로 몰아가는 검사와 판사들을 축출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늦지 않았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보다 그가 성추행을 한 진실을 스스로 자신의 <로앤처치>에 상세히 다 밝혀야 한다. 황 씨의 성추행 사실을 기사화한 언론들을(<유니온>, <교회와신앙>) 그가 고소했지만 모두 다 패소하고 말았다. 황 씨가 두 언론을 고소한 것은 자신의 무죄를 밝히려고 한 고소라기보다, 자신의 성추행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아보려는 고소였다고 보인다. 진실이라면 밝히지 못할 까닭이 뭐겠는가? 자신의 무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목사의 명예와, 법을 전공한 그로서의 ‘법 정의’를 위해서도 마땅히 그랬어야 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차제에 황 씨에게 요구한다. 위의 진술서 전부와, 그동안 자신이 법정에서 한 진술서, 그리고 문제의 판결문 두 개를 다 공개할 용의가 있는가 묻고 싶다. 그 중에 현장 사진을 촬영했다는 경찰도 공개해주기 바란다. 당시 상황을 더 자세히 취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8. 황 씨는 자신은 ‘이미 지하철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성추행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점은 <뉴스앤조이> 기자에게도, 진용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주장하였다. 황 씨의 말이 진실이라면, 경찰은 기차 안에서 황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성추행하는 것을 목격하고 증거를 위하여 핸드폰으로 촬영까지 해 놓고, 아무 상관없는 황 씨를 그것도 다른 기차를 타고 와 걸어가고 있는데 덮쳐 그를 체포하고 강압까지 하며 성추행범으로 몰았다는 말이 된다.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디에 있는가?! 대낮처럼 밝아야 할 이 나라가 그렇게 밤처럼 어둡다는 말인가?
“지하철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있었다.”는 말도 그것이 황 씨의 무죄를 증명하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런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찰이 황 씨의 신병을 확보한 장소가 성추행을 했던 그 지하철 객차 안이 아니라, 지하철 객차에서 내려서 걸어갈 때란 말이 아니겠는가?
경찰은 황 씨의 성추행을 목격하고 일단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핸드폰으로 촬영을 했을 것이고, 그 다음은 피해자 여성의 고소의사를 확보하려고 했을 것이다. 가까이에 추행범이 있는데 그곳에서 드러내어 피해 여성에게 이런 사실 설명이 여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 추행범이 낌새를 차리고 도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촬영과 피해자 의사를 확인한 후에 바로 그 추행범의 신병 확보했을 터이다. 황 씨 말이 맞는다면, 경찰관은 지하철 객차 안에서 황 씨를 체포한 것이 아니라 내려서 걸어가고 있을 때 체포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갖고, 이미 지하철에서 내려서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성추행을 할 수 없었다라고 황 씨가 말한 것은, ‘성추행범은 추행현장에서 일단 체포만 되지 않고 벗어나면 했던 추행이라도 하지 않은 것이 된다.’란 식의 말이 되고 만다. 이 점에서도 황 씨는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이미 경찰이 찍었다는 사진에는 그가 황 씨라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두운 곳, 그것도 밀집된 곳에서 찍은 사진이라서 흐렸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반대로 얼굴까지 찍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황 씨가 당시 입었던 옷 색깔, 옷의 종류 등만으로도 그 추행범이 황 씨임을 입증하는 데 충분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9. 황 씨는 또 다른 구체적 증언을 한 가지 더 했는데 지하철 노선 자체가 달랐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변명이다. 황 씨는 진용식 목사에게 “지하철 노선도 달랐지요.”라고 하는 문자를 보낸 것이다. 이것도 사실인가? 그렇다면 이 말을 <뉴스앤조이> 기자에게는 왜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법정에서도 나온 변명인지, 아니면 자신을 성추행범으로 공격하는 진 목사에게 임기응변적으로 한 변명인지 모르겠다.
그 여성이 탄 기차와 황 씨가 탄 기차가 분명히 달랐다면, 황 씨가 추행범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아무리 손이 길어도 이 열차에서 저 열차에 탄 여성을 더듬거나 만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법정에서 충분히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황 씨의 무혐의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라는 것이다. 역마다 기차가 시간차를 두고 연속으로 들어온다. 추정하건대, 이 경찰관이 피해 여성과 가해자의 신병을 다 확보하는 데 몇 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황 씨가 문제의 열차보다 앞선 열차일 가능성은 있어도 다음 차에서 내린 사람일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앞차 아니면 뒷차인데, 이미 그곳에 있는 CCTV를 통하여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더구나 노선이 달랐다면 이 보다 확실한 알리바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황 씨 말에 의하면, 이 나라 검경과 법정은 사라져야 마땅할 것이다. 고소자의 증거도 부족하고, 경찰의 촬영 사진의 증거도 부족하고, 거기에서 다른 열차를 타고 온 자신의 얼굴과 모습이 다 증명이 되는데도 강압까지 하면서 고소하고, 황 씨의 확실한 증거까지 무시하고 유죄판결을 내린 사법부란 말이 되기 때문이다.
10. 이제 절도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절도에 대한 황 씨의 변명은 성추행에 대한 변명보다 짧다. <뉴스앤조이> 기자에게 밝힌 아래 글이 전부다. “절도 미수 역시 가방이 열려 있었던 사람 곁에 서 있다가 오해를 받았는데, 당시 핀란드로 갈 예정이어서 구속 수사만은 피하려 어쩔 수 없이 범행을 시인했다고 이야기했다.”고 했다. 하도 성추행이 큰 죄처럼 보여 절도 정도는 하찮은 죄가 되고 만 기분이다. 그래서인지 변명도 짧다.
그러나 절도죄도 성추행 죄와 별 차이가 없다. 누구나 인간으로 죄 지을 가장 큰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돈의 문제요, 하나는 성의 문제이다. 그런데 황 씨의 경우, 목사로서 이 더러운 죄 두 가지가 다 지하철에서, 그것도 차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황 씨가 교회 일에 끼어서 금품이나 수수하는 사람으로 공격한 어느 목사를 황 씨가 고소하였는데, 법정에서 황 씨의 금품수수를 인정하고 상대방에겐 무죄를 내린 사건 기록을 보았는데, 이도 다음에 자세히 소개하겠다. 이로써 황 씨는 여성 문제도 돈 문제도 다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 점을 황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황 씨에 따르면, 그는 핀란드에 가기 위하여 법정 구속을 피해야 했고, 그래서 하지 않은 범죄를 시인했다는 말이 된다. 그는 결국 짓지도 않은 범죄로 인하여 전과기록을 하나 더하는 영광(?)을 얻었고, 거짓말까지 해서라도 가야하고 가고 싶어 하였던 그 핀란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지도 못한 점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핀란드에 가려고 했다는 그의 말의 신빙성도 떨어진다. 성추행은 물론 절도죄도 목사로서 지을 수 없고, 지어서는 안 되는 범죄라는 생각이 황 씨의 생각일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왜 황 씨는 고등법원에서 자신의 절도를 다 시인하고 그 후에 다시 대법원에 항고를 하였는지 모르겠다.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이 황 씨다. 법을 전공하였다. 이 때는 핀란드는 어떻게 되었는가? 다시 생각해 보니 억울하여 항고하였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고,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황 씨는 핀란드에 가기 위하여, 윤리를 생명처럼 여겨야 할 목사로서 그것도 남의 비리란 비리는 다 공격하는 사람으로 어쩔 수 없이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하여 허위 자백을 했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경찰이 잡으려고 하는 두 가지 흔한 범죄자 중 하나는 성추행범이고 하나는 절도범 소위 ‘소매치기’인 것으로 안다. 이상하게도 황 씨는 바로 그 지하철에서 이 두 가지 죄목에 다 걸렸다. 이 때 경찰이 범죄를 입증하는 최선의 길은 촬영이다. 성추행 때도 촬영을 하였던 것처럼 경찰은 절도 때도 촬영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증거가 없는 죄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황 씨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한 자백은 아니었는가? 이제 세계는 하나다. 한국에서 성추행을 하고, 절도를 하고, 핀란드에 가서 숨을 수 없다. 여기에서도 황 씨에게 다시 요구한다. 이 절도미수에 대하여도 판결문 자체를 공개해 주기 바란다. 잘하면 나에게 황 씨의 성추행 판결문과 절도미수 판결문이 입수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에 황 씨 스스로 공개하면 그래도 진실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것으로 자신의 무죄를 인정해 달라는 순수함(?)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황 씨는 왜 남에게는 그렇게 엄격하고 자신에는 그토록 너그러운가 하는 점이다. 너를 재는 자나 나를 재는 자나, 너를 다는 저울이나 나를 다는 저울이나 같아야 정직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한 번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쉽다. 그가 언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자신의 죄를 변명하듯 너그럽게 한 일이 있는가? 예를 들어 나 최삼경이나 이단 연구가들이 세상 법정에서 성추행범 또는 절도범으로 대법원에서까지 유죄가 인정되었다고 해 보자. 그가 어떻게 했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온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고 든 돌을 던지지 못하였지만, 아마 황 씨는 던지고도 남을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작은 근거 하나만으로, 세상 법정에서 최소한의 근거만 있어도 언론의 자유로 무죄가 되는 점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의 숱한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황 씨이다. 그들에게도 자신의 성추행죄와 절도죄에 대하여 스스로 변증하듯 변증의 기회를 준 일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 남에게 너그럽고 자신에 대하여 엄격한 삶을 살라는 미련한 충고를 황 씨에게 해둔다.
10. 황 씨가 내(최삼경)가 기관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패러디로 합성하여 사용한 것을 보고 본인은 이렇게 묻고 싶다.
너무 유치해서 거론하기도 유치하지만, 나도 좀 유치해지기로 했다. 누구라도 들어가서 이 사진을 보기 바란다. 상식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언론인이요 목사라면, 도대체가 이런 저질스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본인 최삼경이 황 씨에게 이렇게 해도 되겠는지 묻고 싶다. 비좁은 기차 안에서 옆의 여성을 보고 침을 질질 흘리며 욕정에 사로잡혀 사정없이 더듬고 있는 모습으로 황 씨의 사진을 만들어서 사용해도 될까요? 아니면 늘 성에 취해버린 황규학 씨의 모습을 상상하여 패러디를 해도 될까요? 여기저기에서 돈을 받고 그것도 모라자서 이제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나 하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소개해도 될까요?
자신의 죄에 대하여는 타당성조차 없는 몇 마디 말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도 더 너그럽고 관대하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전화 한 번의 확인 작업도 없이 인터넷에 떠 있는 정보만으로도 자기 입맛에 맞으면 기사를 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황 씨는 지방법원에서 서달석이 이겼던 재판 결과만으로 마치 내가 지고 손해배상을 하게 된 것처럼 기사를 썼다. 사실은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서달석이 진 것으로 끝났다. 결국 황 씨는 허위사실로 최삼경의 명예를 훼손해 이번에 또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었다. ( 관련 기사 보기 )
남에게 백을 요구하려면 나는 2백, 3백을 살려고 하고, 안 되면 적어도 101의 노력을 해야 하나님의 사람일 것이다. 그래야 윤리적 평형과 논리적 평형 있는 사람이라고 볼 때, 황 씨는 최소한의 윤리적 균형도, 법률적 균형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된다.
결론 : 인생의 선배, 신학의 선배, 한 때 선교비까지 준 그리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훈계하고 교훈했던 한 선배로서 황 씨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은 질문이 있다.
황규학 씨도 사람이다. 사람이란, 황규학이든 최삼경이든, 기본적으로 항상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산다. 하나는 돈 문제요, 하나는 성 문제이다. 그런데 황 씨는 황 씨 자녀도 외국에 유학을 보냈다고 들었고, 목사인 아내가 교회에 이력서를 내도 정작 황 씨 때문에 고용되지 못하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황 씨는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벌어서 사는가? 그것이 안쓰럽고 또 바르게 해 달라는 의미에서 본인은 황 씨에게 작지만 헌금을 했다. 지금은 본인이 시무하는 교회가 경제적 어려움을 다 벗어났지만, 당시는 그러지 못하였을 때였다. 그렇게 볼 때 당시 작은 헌금이었어도, 황 씨는 고마워했어야 한다. 그러나 황 씨는 구조적으로 바른 수입을 통하여 살 수 없는 구조가 아닌가 염려되어 묻는다. 황 씨 스스로 교회들이 자신에게 준 것은 헌금이라고 하지만(다음에 이 점도 밝힐 것이지만), 사실은 헌금형 뇌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구린 곳에서는 돈이 쉽게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구린 곳에서 헌금이란 이름으로 돈을 받는다면 쌓을 곳이 없을 것이나 그러나 그런 돈은 절대 받지 않았다.
황 씨는 어떻게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죄란 내가 찾아가지 않아도 죄가 나를 찾아온다. 그래서 바울도 가시가 필요했고, 그것이 은혜라고 했다. 나 최삼경은 죄인의 괴수이지만, 지금까지 사람에게 비난 받을 죄를 짓지 않았다. 그런데도 늘 죄가 내 마음에 있고, 죄와 처절하게 싸운다.
황규학 씨는 자신을 지킬 수 없어서 결국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비지고 나온 죄들이 바로 성적 죄요(성추행), 돈에 대한 죄가(절도미수) 아닌가 생각되는데, 어떻게 생각이 드는가? 미련한 충고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 때 잘 도와서 한국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선배로서 하는 미련한 충고이니 이해해 주기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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