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다에 관한 시모음 2)
봄바다에서 느끼다 /박재삼
한마지기도 없는 논밭이어서
하늘은 시방 울아배를
병신이라 부르다가
다시 太平태평이라 고쳐 부르면서
수천 마지기 논밭을 열심히 주고 있다.
이렇게 햇빛이 밝고
바람도 맑은 날을 택하여
무턱대고 주고 있다.
모처럼 주는 이것들을
五臟六腑오장육부의 힘으로나 갈아 낼까보아,
아, 눈물 힘으로나 갈아 낼까보아,
하늘아, 어쩔래,
울아배는 멍청한 살만
잔뜩 갖고 있을 뿐이니.
봄바다에서 /황동규
노량서 시작한 술 끝내니 통영,
한려수도를 마음속에 넣고 놀았구나.
갑판에 소주병들 멋대로 누워 있고
소리없이 봄저녁이 와 있다.
사방 파도들 석양(夕陽) 물에 젖어
우리 마음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듯
손바닥을 밖으로 밖으로 젖히며 천천히 너울댄다.
(나도 내 마음에서 너울대며 빠져나갔으면!)
여기서 그대 그만 내리게.
바다 위에 큰대자(大字)로 누워 나는
알맞게 어두워 '내'가 안 보일 장승포로 가겠네.
봄바다 /유재영
첫 알을 낳은 물오리가 갈대숲을 차고 날아오르자 펄 속에서 기어 나와 느긋이 해바라기를 즐기던 달랑게 가족들이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때 가장 느린 속도로 전력을 다해 달려가는 어린 게가 있었다.
조금 전 어미 등에 업혔던 한 쪽 다리가 잘린 녀석이었다.
급한 나머지 온 힘을 다해 갯고랑으로 몸을 던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보드라운 물살들이 다가와 가만히
품어 주었다.
한순간 바다가 기우뚱했다.
봄바다 /복효근
삼월 가까운 해토머리
바다는 동백꽃 초경
금족령 풀린 가시내처럼
머리 풀어헤친 바람
내리는 비에
그깟 꽃 몇 개 떨어졌을 뿐인데
어쩌자고 가슴은
스무 살로 뛰는지
어부횟집
좋은데이 두어 병
절벽을 처대는 해조음에
잠은 오지 않고
바닷가 숙소
때 아닌 자지가 선다
봄 바다 /기영석
흐릿한 우중충한 날씨가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 날이다
산수유 개나리가 샛노랗게 물들고
벚꽃 터지는 소리가 봄바람에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데
아름다운 꽃을 시샘하는
봄 날씨가 햇빛을 가리고
밀려오는 파도는 슬프게 울어댄다
아마도 계절의 몸부림을
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길도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모래 위에 지나온 흔적을 지우며.
봄 바다의 통곡 /김정희
봄 소풍 바닷길에 부푼 설렘 안고 떠난
아들들아! 딸들아!
느린 걸음 어디까지 돌아왔느냐?
고운 꽃이 진다고 서러워하였더니
꽃보다 고운 영혼 바다에 스러져 갔구나.
이를 어이 할꼬?
각혈하는 오열로 왜냐고 물어도
혼탁한 세상을 꾸짖으려 하려는가?
성난 바다는 거센 너울로 일렁거릴 뿐
오늘도 아무런 대답이 없구나.
해 맑은 얼굴로 길 떠나던 아이야 어디에 있느냐?
이제 어서 돌아오라.
봄 바다에 가서 물었다 /이기철
봄 바다에 가서 물었다
근심 없이 사는 삶도
이 세상에 있느냐고
봄 바다가 언덕에
패랭이꽃을 내밀며 대답했다
담을 수 없는 곳에
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근심이 된다고
봄 바다 /최정례
그놈은 모래 구멍을 기어 나와
집게발로 수줍게 몸을 가리고
눈은 안테나처럼 세우고
아득한 모래톱 너머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발자국 소리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여자 아이가 숨어서 한 남자를 보고 있었다
살구나무 그림자가 벽을 일렁이는 저녁 무렵
남자가 피어내는 담배 연기가 꼬리를 끌다
무성한 나무 그림자에 묻히고
대청마루에서 아버지와 큰소리가 오가더니
남자는 일어나 조용히 떠났다
수산 시장
무성한 칼자국으로 움푹 패인 통나무 도마 옆
그놈은 열린 톱밥 상자 안에서
발랑 뒤집혀 열 개 스무 개 서른 개의 발로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부인네가 된 여자 아이는 장바구니를 들고
커다란 생선을 내리치는 칼과 함께
번득이는 한 남자의 눈빛을 보고 움찔했다
잠시 살구나무 그림자가 칼 아래 일렁였다
그놈은 접시 위에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간장에 오래 묵혀 잘 삭은 빛깔이었으나
집게발은 쩍 벌어져 누군가를 물어뜯을 듯했고
두 눈은 튀어나와 바다를 바라보던 모습이었다
여자는 두 손으로 그 놈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농익어 노리끼리한 알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여자는 멈칫했다
잠깐 잠깐의 어지럼증처럼 밀려오는 봄 바다
먼 거기를 바라보던 어느 봄인가도
여자는 어지럼증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한 적이 있었다
봄 바다 /황금찬
포구에
봄비가 내린다.
바다는
돌아오지 않는 소년을 생각하고
새벽까지 울고 있었다.
봄 바다 /홍금자
이른 봄비
흐르듯 젖고
산마다 터지는
연분홍 살빛
봄물은 고이고
가슴은 열리는데
온통
바다는 손짓이었네.
봄 바다 여정 /문경기
봄 향기 가득한 햇살 좋은 날
푸른 봄 바다 그리워
서해 만리포 여행길에 나섰네
여정은 안제나 기대로 가득차
들뜬 마음속 심연에
살며시 설레임의 그물을 던지면
해변의 동백은 붉은 꽃망울 부풀려
긴 겨울 두꺼운 외투를 벗기우고
바다를 봄의 환희로 물들인다
밀려오는 파도의 이랑에 갈매기떼 춤추고
수평선 위로 하얀 돛단배 하나 둘 실려가면
봄 바다는 하늘을 향해 가슴을 여는데
포구 멀리 작은 섬들은
등대의 불빛이 그리워 고독한 사색을 하고
연락선 뱃고동 소리에 외로움을 달랜다
매화향기 가득한 햇살 좋은 날
해당화 피어나는 바다가 그리워
서해 만리포 여행길에 나섰네
그날 만난 봄 바다 /최삼용
통통배가 겨드랑이 간질이자
파도로 넘겨지는 바다의 책장에
바람이 서술하고 물결이 필사하는
히브리어 같은 굴절 문장들
무엇을 쓰시는지 지금도 필사적이다
바람까지 바다를 빌려 파문 만들며
고인 울음통 비우려
해변에다 몸 뒤집어 파도로 우는데
바람과 바다는 같은 돌림자 쓰는 형제인지
바람 불면 바다가 일고
바람 자면 바다도 따라 잠들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랑도 받침 하나 차이라
떼지 못할 관계를 맺는지 모르지만
입춘 넘긴 꽃 절기라 눈부신 햇살은
바다 위에 온통 빛꽃을 피워 문 채
부드러운 파도로 갯돌을 연신 쓰다듬고 있었다
봄 바다 /전영금
봄바람에
유채꽃 흐드러진
제주도의 올레길
추억을 더듬으며
봄 바다를 굽어본다
저 멀리
밀려오는 하얀 물거품
금세 차오르는
이 가슴에-
두팔벌려
달려드는 반가운 얼굴
소리 내어 불러본다
파도야-
사랑한다...
봄바다 /나태주
모락모락 입덧이 났나베.
별로 이쁘진 않았어도
내게는 참 이쁘기만 했던 그녀가
감쪽같이 딴 사내에게 시집 가
기맥힌 솜씨로 첫애기를 배어,
보름달만해진 배를 쓸어안고
입덧이 났나베.
잡초 같은 식욕에 군침이 돌아
돌아앉아 자꾸만 신것이 먹고 싶나베.
깊이 모를 어둠에서 등돌려 돌아오는
빛살을 바라보다가
희디흰 비다의 속살에 눈이 멀어서
그만 눈이 멀어서
자꾸만 헛던지는 헛낚시에
헛걸려 나오는 헛구역질, 헛구역질아.
첫애기를 밴 내 그녀가
항缸만해진 아랫배를 쓸어안고
맨살이 드러난 부끄럼도 잊은 채
어지럼병이 났나베.
착하디착한 황소눈에
번지르르 눈물만 갓돌아서
울컥울컥 드디어 신것이 먹고 싶나베,
훕살이 간 내 그녀가.
봄 바다 /정심 김덕성
봄 바다
가슴을 활짝 펴 꿈이 서려 있고
은빛 햇살과 함께
봄이 밀려온다
기약 없는 사랑의 기다림
그리움으로 달려오다 그만 지쳐
되돌아가야 하는 네 모습
내 마음에 서리고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사랑에 도전하는 파도의 기백
요즘 쉽게 좌절하는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구나
하늘 맞닿은 수평선
아침 태양이 떠오르는 넓고 환한 가슴
콩알만 한 내 가슴이 넓어지는
봄 바다여
봄바다 /박재삼
누이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질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 닮아야 하리.
天下에 많은 할 말이 天下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 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은 섬이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드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