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가 절정이다. 절정의 빛이 온 산에 가득하다. 계절은 아름답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실레노스의 상자’처럼 단풍 또한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겉은 화려하지만 이면에는 쇄락을 앞둔 계절의 음영이 짙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에만 현혹되다 보면 실상을 놓치기 쉽다. 화려한 것들이 고통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소가 덮고 있는 슬픔이 없었으면 좋겠다.
진관사 일주문에 들어선다. 도열한 노송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편안하게 맞아 준다. 아침햇살에 빛나는 단풍이 해든 한지의 창호처럼 밝다. 극락교 건너 해탈문을 지난다. 왼쪽 산언덕에 쭉쭉 뻗은 소나무 군락들이 시원하다. 찻집 연지원 지붕 너머로 응봉(鷹峰)이 날개를 펼쳤다. 문 위에 ‘송풍다명(松風煮茗)’ 현판이 걸렸다. 솔바람으로 차를 끓이니 찻잔 속에 솔숲이 없을 리 없다.
비우고 채우는 마음의 정원, 진관사
가람을 돌아보다 법해(法海) 스님과 조우한다. 점심공양을 마치고, 효림원에서 차담을 나눈다. 원융한 법의 성품이시다. 바다의 섬이 되어 말씀을 듣는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산봉우리가 들어오고 소나무 숲이 들어온다. 사방팔방 그 어느 곳으로도 시야가 열린 곳이 바다다. 그것이 마음이어야 함을 새삼 알겠다. ‘내가 어떤 것을 짓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터를 닦으라’는 귀한 말씀을 주신다.
진관사와 관련한 스님의 말씀을 개략해 본다. 전신은 신혈사(神穴寺)다. 12세의 대량원군이 3년 동안 거처했던 곳이다. 진관대사(津寬大師)가 수미단(須彌壇) 아래 굴을 파고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 후 대량원군은 고려 제8대 현종으로 왕위에 오른다. 자신을 지켜 준 진관대사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사찰을 크게 세우고 ‘진관사(津寬寺)’라 명했다.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 되었다. 불사의 건립이 1011년이었으니 나이로는 천 살이 넘은 고찰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이었다. 세종 때에는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다. 일종의 ‘한글비밀연구소’다. 근현대로 넘어오며 한국전쟁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새로운 모습으로 재건하여 옛 국찰(國刹)의 면모를 되찾기에 이르렀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진관사 태극기’다. 2009년 칠성각의 보수작업에서 독립신문을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태극기는 일장기 위에 그려진 것이다. 현재는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의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방문하여 우리의 전통과 사찰 문화에 큰 관심을 갖게 했다. 또한 관내의 많은 어르신들을 모시는 만개의 발우(만발공양), 템플스테이 등으로 누구나 편안하게 찾아갈 수 있는 가람이 되었다. 국내는 물론 세계로 나아가는 미래 사찰로서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음식과 건물, 말씀 등 어느 것 하나 지극 정성이 아닌 것이 없다. ‘비움’과 ‘채움’의 묘리가 작동하는 고요한 마음의 정원이다.
진관능선 아름다운 단풍의 숲길
산으로 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스님께서 잠시 앞장을 서신다. 늦은 일행을 위해 길을 안내해 주시는 깊은 배려다. 함월당(含月堂) 뒤편으로 진관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다. 신갈나무, 졸참나무, 팥배나무 등이 어울려 빚어내는 단풍든 숲길이 곱다. 길은 비교적 완만하지만 화강토가 많아 다소 미끄럽다.
한동안 비탈을 오르니 시야가 툭 트이는 조망 바위에 닿는다. 왼쪽으로는 응봉능선이 사모바위까지 나란히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기자능선이 진관봉으로 에둘러 가고 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의상능선 뒤에 숨었던 백운대와 만경대가 나타나고, 노적봉의 둥근 이마가 환히 드러난다. 반대쪽으로 눈을 돌리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어 보이는 빽빽한 도시의 집들과 밀밀한 아파트 숲은 북한산의 세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산 없으면 천만을 헤아리는 시민들이 어떻게 숨 쉬고 살까. 수도 서울을 환포(環抱)하며 흘러가는 저 한강이 없으면 또 어떻게 살아갈까. 서울은 북한산과 한강이 있어서 부모의 품처럼 넉넉하고 평화롭다. 부모가 있는 곳이 집이 아니던가. 누군가 필자처럼 북한산을 집으로 여기는 까닭이 있다면 그런 부성과 모성이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높으니 모두 부모의 은공이 아닐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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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관봉에서 향로봉 쪽으로 이동한다. 단아하게 잘 빚은 족두리봉이 반갑다. 지금은 없는 바위의 고수가 저기 붙어살다시피 했었다. 건너편으로 북악산, 인왕산이 지척이고, 멀리 관악산과 삼성산까지 시야가 맑다. 이윽고 관봉(冠峰)에 닿는다. 여기 앉아 보면 안다. 일명 이 봉우리를 왜 불암(佛巖)이라 부르는지. 바로 앞의 비봉이 그렇듯이 장엄한 북한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바위에 자리한 명품의 소나무들은 한결같이 북한산 성채를 바라보고 있다. 어떤 나무는 죽어서도 제 죽음조차 모른다. 그 마음이 부처가 아니면 무엇일까. 마음이 끊어진 자리, 앉으면 부처가 되는 자리, 관봉은 그런 자리다.
비봉을 지나 사모바위로 간다. 사모바위는 양쪽에 얼굴이 있다. 왼쪽 얼굴로는 원경의 북한산 총사령부를 보고, 오른쪽 얼굴로는 서울 도심을 바라본다. 자연으로의 동경과 합일성이요,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사랑이다. 사람을 품되 무위로서의 도를 지키고자 함이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도가 본받는 것이 자연이라 하였다. 사람이 자연에 가하는 인위를 경계함이다. 인위(人爲)는 작위(作爲)다. 거짓(僞)이 되기 쉽다. 사모바위가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쑥부쟁이도 꽃을 내려놓고, 억새도 흰 빛을 뿌리고 있다. 절정을 지난 가을이 가고 있는 것이다.
바다에 지며 나를 돌아보는 금빛 석양
응봉능선으로 걸음을 옮긴다. 첫 번째 바위봉우리에 선다. 이내 북한산의 전경에 압도되고 만다. 의상능선의 준험한 석벽과 웅장한 북한산의 주봉들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다. 진관사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늦은 만큼 오늘은 분명 하늘과 땅, 바다와 태양이 준비한 장엄한 노을을 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왼쪽 웨딩바위를 손잡고 내려오고 있는 한 쌍의 남녀가 보인다. 단 둘이서 무엇을 서약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름다워 보인다. ‘야생백리향(The wild mountain thyme)’, 설악에서 읊조리곤 하던 노래가 잠시 환청으로 들린다.
옅은 구름 아래로 빛 내림이 일어나고, 응봉에 닿기 전 한강물이 용광로의 쇳물 빛으로 물들고 있다. 세상에 고루 빛을 준 해가 하루를 마감하며 처소로 돌아가는 엄숙한 제의다. 금빛으로 물든 강물은 이미 강물이 아니다. 강물이 강물을 벗어난 끝에서 바다를 얻은 지혜다. 하늘과 땅이 축복을 내리고 있다. 새들도 그걸 알고 하늘을 선회하며 오늘의 마지막 비행을 마치고 있다. 이제 충분히 놀에 젖었다. 젖어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할지니 우리 모두의 복이 아닐 수 없다.
어두워진 산길 바라보는 도시의 야경이 따뜻하다. 측은하다. 사람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깊은 연민과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반짝이는 불빛들이 아름다운 것은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미(美)보다는 세상을 밀고 가며 어둠을 밝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행위이기 때문이리라. 환한 대낮에 익숙했던 발이 자꾸만 주춤거린다. 바다에 지던 석양이 왜 그리도 깊은 시선으로 나를 돌아다보았는지를 발이 알게 되는 시간이다.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고 겸손해진 시간 끝에서 세상의 길로 내려선다. 내가 세상에, 또 사람에게 한 걸음 가까이 내려서는 순간이다.
마음의 정원
그대 문득 고통의 언덕에서 눈물 구르려 하면 마실을 가듯이 삼각산 진관사 한번 가보시게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맞듯 노송이 반기는 그 절 일주문 지나 극락교 건너 해탈문 있네 이미 야트막한 언덕 위 연지원 지나기도 전에 마음 괴롭히던 것들 헐떡대며 따라 오지 못하네 삼백 살 가까이 살아온 느티나무가 등을 내주고 산에서 내려온 맑은 물은 어머니처럼 손 잡아주네 솔밭에 앉아 내려놓은 이 맘 저 맘 돌탑이 되고 잠자리가 날아와 날개 살포시 내려놓고 쉬네 그래도 뭔가 풀리지 않는 것 있으면 걸어보시게 세심교 몇 번 왔다갔다 하는 사이 달이 오르고 솔바람으로 끓인 찻잔 속에 산의 고요가 보이네 그렇게 평정을 찾기까지 한나절도 걸리지 않네 달을 머금은 가람이 천년 종소리로 어둠을 치고 고요히 번지는 미소는 둥근 향기로 퍼져 오르네 별들이 그대의 눈망울처럼 빛나는 저 하늘까지
첫댓글 北漢誌라는 책에보면
북한산 봉우리마다의
위치.높이......기록이
있읍니다
늘 함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산을 좋아하시나 봅니다.
즐겁고 소중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진관사의 내력과 북한산의 전경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한지의 수묵채색화를 보니 고향 찾아온 기분이다.
중요한 사료를 보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