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홍성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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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사를 전공하여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과학기술사철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의 전공교수를 맡고 있다.
저서로 《잡종, 새로운 문화 읽기》,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 기술》, 《네트워크 혁명, 그 열림과 닫힘》, 《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하이브리드 세상 일기》, 《과학은 얼마나》, 《홍성욱의 과학 에세이》등이 있다.
최근 들어 신문과 잡지의 지면이나 TV 같은 영상 매체를 통해 다채로운 뇌 영상을 접할 기회가 부쩍 늘었다. 이러한 뇌 영상에는 다른 부위에 비해 활성화된 뇌의 특정 부분이 붉은색이나 노란색으로 밝게 표시된 채로, 여기에 “인간 정신의 특정한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부위가 발견되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설득하는 데 백 마디의 말보다 한 장의 사진이 더 효과적이라는 경구가 있듯이, 이러한 뇌 영상은 실체가 없는 정신 작용이 두뇌의 특정 부분이 화학적으로 활성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확증하는 증거로 해석된다. 우리는 뇌 영상이 어떻게 얻어졌고 얼마나 신뢰할만한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로, 이를 마치 인간 정신에 해당하는 물리적 실재를 뇌에서 그대로 찍어낸 사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글은 뇌 영상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성찰적으로 분석해 보기 위해 씌어졌다.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뇌 영상이 얻어진 뒤에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지기까지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우선 과학자는 실험을 디자인하고 뇌 영상기기를 통해 원하는 영상을 얻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극과 반응의 유형을 비롯한 실험의 여러 변수를 결정해야 하고, 실험 과정과 데이터 처리에서 오류를 최소화해야 하며, 이미지 해독과 관련해서 표준화된 좌표와 프로그램을 채용해야 한다. 그리고 연구자는 자신이 얻은 영상 결과를 해석해서 이를 과학자 공동체에 의미 있는 형태로 이론화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평가를 거쳐서 학술지에 출판된 논문의 극히 일부는 미디어에 의해서 선택되어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실험 결과의 단순화나 과장 같은 변용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미디어를 통해서 접하는 뇌 영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이 전 과정에 대한 성찰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뇌 영상의 대부분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기기를 통해 얻어진 것들인데, 이 글의 1절은 이 기능성 자기공명영상기기에 대해서 간략히 다루고 있다. 2절에서는 세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전문 뇌과학 학술지에 출판된 뇌 영상이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어떤 변용을 거치는가를 다루고 있다. 3절은 최근 뇌과학계 내부에서 제기된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에 대한 비판을 소개하고, 4절에서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비판적인 신경윤리학(critical neuroethics)’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뇌 영상을 성찰적이고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해 주면서, 최근 그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는 신경윤리학의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연구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자기공명영상은 1937년 미국의 로터버(P.C. Lauterbur)와 영국의 맨스필드(Sir P. Mansfield)에 의해 발명되었다. MRI의 원리는 수소 원자의 핵인 양성자의 스핀 회전운동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양성자는 무작위적으로 회전하지만, 자기장에 노출될 경우에는 그 회전축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배열된다. 이때 특정 전자기파를 주입하면 전자기파의 주파수와 공명하는 특정 양성자들이 그 일정 배열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이 전자기파의 주입을 정지하면 배열에서 벗어났던 양성자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거꾸로 특정 주파수의 전자기파를 방출한다. MRI는 이렇게 방출된 전자기파 신호를 해독해서 물체 내부의 정보를 얻는 기기였다.
MRI를 인체에 적용했을 때, 인체 조직을 구성하는 특정 부분이 방출한 전자기파로부터 그 조직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컴퓨터와 같은 전자 장비를 이용하면 이러한 정보는 영상으로 변환될 수 있었다. 엑스선 같은 기존의 의료영상 장비와 비교해서 MRI에는 큰 장점이 있었다. 엑스선은 단단한 물체에 반사되기 때문에 주로 피부 조직 밑에 있는 뼈를 보여 주는 데에 사용되었지만, 동시에 이 광선을 투과하는 인체 조직이나 장기 같은 부분을 보는 데에는 무력했다. 반면에 MRI는 신체 조직이나 장기 등을 영상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MRI가 의료기기로 처음 응용된 곳도 정상적인 신체조직과 암에 걸린 신체조직의 차이를 감지하는 작업이었다. 또한 단단한 뼈로 둘러싸인 인간 두뇌의 경우 두개골을 통과할 수 없는 엑스선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지만, 양성자에서 나오는 전자파를 이용한 MRI는 두개골 속의 뇌를 ‘찍는’ 것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강력한 전자석과 용량과 속도가 커진 컴퓨터 같은 전자장비의 발달로 인해 MRI의 해상도는 과거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정도로 발전했다. 그렇지만 MRI는 양성자의 회전축의 재배치를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시간적인 한계를 가진다. 즉 기술적 진보에 따라서 사진의 공간적인 해상도는 증가해도, 영상을 실시간으로 만들거나 원하는 순간순간의 영상을 바로 보여 주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MRI의 공간적 해상도를 높이면, 영상을 처리하는 시간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MRI의 혁명적인 변화가 1990년에 찾아왔다. 미국 벨연구소의 세이기 오가와(Seigi Ogawa)그룹은 MRI가 혈중 헤모글로빈의 산화 수준에 따라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을 인간의 뇌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유도되었다. 만약 뇌에서 상대적으로 활성화된 뉴런이 더 많은 혈액을 소모한다고 하자. 그러면 더 많은 혈액 속에는 더 많은 산화 헤모글로빈이 들어있기 때문에, MRI가 이를 감지함으로써 활성화된 뉴런을 촬영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의 시작이었다.
MRI의 발명과는 달리 fMRI는 기계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론을 찾아낸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BOLD(Blood Oxygen Level Dependent) 방법이라 이름 붙여진 이 방법은 뇌 속에 혈액이 많이 흐르는 부위와 그렇지 않은 부위 각각을 활성화된 뇌 영역과 그렇지 않은 뇌 영역으로 등치시키는 것이었다.
fMRI는 두개골을 절개하지 않고도 뇌와 인지활동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렇게 비침입적인(non-interventionist) fMRI를 활용한 연구는 심리학의 ‘바이오 혁명’을 낳으면서 뇌에 대한 연구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다.
한 통계에 의하면 fMRI의 발명 이후 월간 약 800편의 관련 논문이 발표될 정도였다. fMRI는 정신 질환자의 뇌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분노, 동감, 사랑, 성적 흥분과 같은 감정을 느낄 때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이나, 자선, 납세, 상품과 정치에 대한 선호도와 같이 특정한 사회적 행위를 할 때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실험 등에도 널리 활용되었다. 인간의 감정, 행동, 관계 등 사회적 행동을 뇌의 메커니즘을 사용해서 설명할 수 있게 되면서 fMRI는 신경정치학(neuropolitics), 신경법(neurolaw), 신경마케팅과 같은 일련의 ‘사회 신경과학(social neuroscience)’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었던 가장 중요한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fMRI가 확산되면서 인간의 정신 작용과 관련된 온갖 종류의 실험들이 설계되고 수행되었다. 주제는 달라도 이러한 실험들은 동일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극을 주었을 때의 뇌 영상과 자극이 없었을 때의 뇌 영상의 차이를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남성 피실험자들이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보았을 때의 fMRI 뇌 영상과 보통의 여성 얼굴을 보았을 때의 fMRI 뇌 영상을 각각 얻어낸 뒤에 그 차이를 얻어내면, 이렇게 얻은 뇌의 부위가 바로 남성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온전히 반응할 때 활성화된 뇌의 부위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서 얻어진 영상만을 출판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자신의 해석을 덧붙인다. 전문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과학자들이 제시하는 뇌 영상에 대한 해석은 불확실한 일련의 요소들을 감안해서 나온 것이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숫자의 피실험자들이 실험에 참여했는가, 개별 실험들의 평균을 낸 방식에는 문제가 없는가, 자극과 반응의 변수들이 실험의 목적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하는가, 자극이 있을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의 차이를 얻어낸 과정이 타당한가 등에 대한 고려는 과학자들이 다뤄야 하는 불확실한 요소 중 일부이다.
그런데 뇌 영상을 이용한 연구 결과가 미디어에 보도되면서 이러한 불확실한 요소들은 감춰지고, 뇌 영상은 인간 정신의 특정한 기능과 작동에 대응하는 뇌 차원에서의 ‘실재’를 반영한 사진으로 대중에게 인식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뇌를 찍은 fMRI 뇌 영상은, 인간의 사랑이 뇌의 그 밝은 부위에 해당된다는 방식으로, 혹은 더 나아가서 사랑은 뇌의 특정 부위의 화학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방식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번 절에서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어떻게 뇌 영상이 실재를 그대로 ‘찍은’ 것으로 해석되어지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fMRI 기술이 이용된 주된 연구 분야 중 하나는 남녀 뇌의 차이에 대한 연구이다. 남녀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같은지 다른지는 과학적으로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일 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남성과 여성의 뇌가 감정처리, 기억의 작동, 청각정보 처리, 언어, 시각피질의 반응(visual cortex responsiveness), 듣고 이해하기, 시각반응 운동(visual-motor connection) 등에서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연구해 왔다.
일례로 셰이위츠(Bennett Shaywitz & Sally Shaywitz) 부부 등은 1995년 《네이처》에 언어사용과 관련하여 남녀의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들은 fMRI를 이용하여 남녀 피실험자들이 문자, 음운, 의미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찾아냈다. 연구자들은 이 중 두 번째 실험, 즉 음운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남녀의 뇌가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남성의 뇌는 음운 인지 과정에서 좌뇌만이 활성화되는 데 비해, 여성의 뇌는 양쪽 모두가 활성화되었던 것이다([그림 1]). 셰이위츠 등은 이러한 실험을 통해 남성과 여성은 언어와 관련된 뇌 구성이 서로 다르며, 이러한 차이는 음운을 인지하는 수준에서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림 1] 음운 인지 과정의 뇌 남성의 뇌(왼쪽)는 음운 인지 과정에서 좌뇌(L)만이 활성화되는 데 비해, 여성의 뇌(오른쪽)는 양쪽 모두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림의 흰색은 활성화된 부분을 나타낸다).
[그림 출처] Shaywitz, et al. 1995
그러나 대중 매체는 셰이위츠의 실험이 남녀가 사고를 할 때 다른 방식으로 뇌를 사용한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보도했다. 일례로 《뉴욕타임스》는 〈남성의 세계, 여성의 세계는 다르다―뇌 연구에 의한 차이점 발견〉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연구자들은 남성과 여성이 뇌를 다르게 사용한다는 결정적 증거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이것은 “남녀가 사고하는 동안 그들의 뇌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최초의 증거”라고 대서특필했다. 이 실험은 fMRI를 이용한 초기 연구였기 때문에, 특히 더 많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1)
《뉴욕타임스》의 기사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어떻게 음운과 관련된 차이를 보인 실험결과가 남녀의 ‘사고’의 차이라는 결론으로 확대될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이다. 이러한 확대는 더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과학기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과정에 연구자였던 샐리 셰이위츠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연구 이전에 독서가 단어를 음소(phoneme)로 나누어 파악하는 행위이고, 따라서 독서 장애[난독증(dyslexia)]가 시각적인 문제가 아니라 음운론적인 문제라는 가설을 제창했었다. 즉, 그녀에 의하면 독서는 본질적으로 음운을 인지하는 활동이었다.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가장 고난위도의 사고·인지 능력을 볼 수 있는 행위가 독서이고, 독서는 음운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음운의 인식에 대한 실험은 곧바로 인간의 사고 능력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에 따르면, 남녀가 음운의 인식에서 차이를 보인다면 남녀의 사고가 다르다고 결론짓는 것이 논리의 비약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학의 실험결과가 대중에게 전달될 때 변형되고 과장되는 과정은 과학에 ‘무지한’ 기자에게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선호에 맞추려 하는 미디어의 특성이 관여하는 것과 더불어 연구자들에 의한 정보의 입력과 선택이 개입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인식은 대중의 과학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 PUS)와 과학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최근 연구와도 일치한다. 예를 들어 힐가트너(Hilgartner)와 부치(Bucchi)는 과학자들이 과학 지식을 대중적 차원에서 유통시키기 위해 이미지와 정보를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보여 주었는데,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과학커뮤니케이션은 이미 만들어진 지식을 쉬운 언어로 대중에게 전파하는 과정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과학 지식 생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2)
셰이위츠 이후의 후속 연구들은 독서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남녀 차이가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밝혔다. 우선 이후 연구의 대부분은 문자 인식 능력이나 단어 사용 능력과 관련해서는 남녀의 뇌가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몇몇 연구자들은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는 데 있어서 여성은 좌뇌와 우뇌를 모두 사용하지만, 남성은 좌뇌만을 사용한다는 차이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 실험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과학자 중 한 명인 칸사쿠는 이러한 결과가 여성의 이해력이 남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는데, 그 이유는 남녀의 이야기 이해력을 다른 방식으로 테스트했을 때에는 그 차이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보듯이 남녀의 뇌 영상의 차이가 무엇의 차이를 의미하는지는 첫눈에 보는 것처럼 분명하지는 않은 것이다.
남녀의 뇌 차이에 대한 또 다른 연구를 하나 더 살펴보자. 2007년 고르벳(Gorbet)과 세르지오(Sergio)는 화면을 보고 조이스틱이나 마우스를 움직이는 것처럼 시각에 의해서 안내된 운동(visually guided movement or visuomotor response)에서 남녀의 뇌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연구했다. 연구결과 대부분의 실험에서 여성의 뇌는 남성의 뇌에 비해 좌측 일차 감각운동 피질(the left primary sensorimotor cortex), 우측 전운동 피질(the right dorsal premotor cortex), 우측 상두정소엽(right superior parietal lobule) 부위에서 더 높은 활동성을 보였다.
반면 남성의 뇌는 눈에 보이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조이스틱을 움직이는 실험 같이 복잡한 실험을 수행할 때 여성보다 더 높은 활동성을 보였다. 이러한 실험 결과에 대해 《사이언스 데일리》는 세르지오의 말을 인용하여 “여성의 뇌에서 주로 3개 부위가 시각 안내 운동에 관여하며, 대부분의 실험에서 뇌의 양쪽 모두가 활성화됨을 보였다. ······ 반면, 남성의 뇌는 복잡한 운동을 실행할 때만 활성화 되었다”고 보도했다. 많은 실험에서 여성의 뇌는 양쪽 뇌 모두가 활성화됨에 비해, 남성의 뇌는 한쪽만 활성화되었던 것이다.3)
언어에 대한 남녀 뇌 영상과 시각반응운동 뇌 영상을 비교해 보면 “뇌 영상에서 밝게 빛나는 부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 흥미로운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BOLD 방법에 의하면, 밝게 빛나는 뇌 부위는 그 부위가 다른 부위에 비해서 더 많은 산소를 소비함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그림 1]은 여성이 남성보다 독서의 능력에서 더 뛰어나다고 해석될 수 있는데, 남성의 뇌는 한쪽 뇌만이 밝게 활성화된 데 비해 여성의 뇌는 양쪽 모두가 밝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반면 두 번째 사진은 조이스틱을 움직이거나 손을 움직이는 것 같은 동일한 작업을 할 때 여성의 뇌가 남성에 비해 더 많은 부위가 사용되고 따라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므로, 여성의 뇌가 남성의 뇌보다 같은 작업을 더 힘겹게 수행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해석은 여성은 남성보다 상황을 이해하는 이해력이 뛰어나고 공간 지각력이 부족하다는 남녀 차이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일치하고, 미디어 보도를 접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는 해석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처럼 fMRI 영상에서 볼 수 있는 남녀 두뇌의 차이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치 않고, 이를 해독하는 일이 매우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남성보다 언어능력이나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며 평행주차와 같은 공간 지각력이 떨어지는 이유가 뇌의 차이에 기인한다는 생각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 신경정신과의사 루안 브리젠딘(Louann Brizedine)의 《여자의 뇌, 여자의 발견》은 모든 뇌는 처음에 여성의 뇌와 같은 형태이며, 수정 후 8주가 지나서야 남성의 뇌가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남성의 뇌가 만들어 질 때 과잉 분비된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은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부위를 줄어들게 하고, 청각 중추를 축소시키며, 섹스를 담당하는 뇌 부위를 두배로 확장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남성이 약 7,000단어를 사용하는 반면 여성은 약 2만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자신의 이론을 지지하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언어 사용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 결과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책은 과학자 사회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네이처》에 실린 서평은 이 책에 대해 “최소한의 과학적 정확성과 균형도 갖추지 못했으며, 과학적 오류와 뇌의 발달 과정에 대한 오해로 꽉 차있는 ······ 멜로 드라마”라고 혹평했다.
전문가들이 저술한 대중적 저서에 이러한 책만 있는 것은 아니며, 남녀의 뇌의 차이를 포함해서 성차에 대해 좀 더 균형 잡힌 접근을 시도한 책도 있다. 프랑스의 저명한 뇌과학자 카트린 비달(Catherine Vidal)은 《남자와 여자의 뇌는 같을까》에서 남성과 여성이 성적 재생산 부분과 뇌에 의해 조절되는 성적 행동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고 이러한 차이를 낳는 뇌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남성과 여성 뇌의 구조적 차이는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근거는 인간의 전체 뉴런 중 10퍼센트만이 태어날 때부터 연결되어 있고, 나머지 90퍼센트 이상은 가족이나 교육, 문화, 사회적 환경에 의해 나중에 연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녀 뇌의 차이를 보인 많은 연구들이 소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녀는 수백 명 이상의 사람을 대상으로 한 메타 분석은 남녀의 뇌에서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녀는 남녀평등에 우호적인 환경에서 공부하는 여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여학생들에 비해서 남학생들과 더 비슷한 수학점수를 받는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면서,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일반적 통념을 반박하고 있다.4)
브리젠딘과 비달의 연구는 모두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인터넷 서점의 판매량을 비교해 보면, 브리젠딘의 책의 판매량이 비달의 책에 비해 10배 이상 높다. 균형 잡힌 연구보다는 남녀의 사회문화적 불평등을 신경과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연구들이 대중적 차원에서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남녀 뇌의 차이를 강조한 연구는 기존의 통념적인 남녀 차이와도 잘 들어맞는 데다가, 여기에 뇌과학 연구자가 전문가의 이름으로 대중매체에 소개한 남녀의 성차를 강조한 이론이 덧붙여져서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게 된다.
기존의 남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소개된 이러한 연구들은 대중매체를 통해 더욱 확산되고 강화되면서 대중에게 받아들여지고, 이러한 대중적 이해가 다시 그러한 차이를 강조한 서적의 구매를 부추기며, 전문가들이 대중매체에 기고한 ‘과학 칼럼’ 류의 기사에서 이러한 차이가 확증되며, 이 모든 과정이 또 다른 연구 활동에 반영되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순환이 계속된다.
런던 대학교의 제키(S. Zeki)는 인간이 사랑을 느낄 때와 증오를 느낄 때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실험을 했다. 그는 피실험자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과 증오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 주고, 각각의 경우에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 되는지를 알아봤다. 그의 실험은 사랑과 증오라는 정반대의 감정에서 공통된 뇌 반응이 나타난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피실험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나 증오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 모두 뇌의 피각(putamen)과 섬엽(insula) 부분이 활성화되었다. 피각 부위는 육체적 행동을 취하는 데 관여하며 섬엽은 질투와 같은 고통의 감정에 관여하는 부위로 알려진 부분이었다.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사랑을 느낄 때와는 달리 증오를 느낄 때에는 이성적 능력이나 판단능력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뇌의 전두면 피질(frontal cortex)이 함께 활성화된다는 것이었다.
제키는 자신의 연구 논문에서 “피각과 섬엽이 정확히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사랑과 증오라는 감정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이 확실하다”라고 해석했다.5) 그러나 대중 매체들은 그와의 인터뷰에 의존해서 증오의 경우에만 전두면 피질의 활성화가 나타난다는 실험결과는 사랑에 빠지면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없어지고 반대로 증오가 깊을수록 이성적인 계산과 판단 능력이 강화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규명되었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UCL 뉴스는 “뇌의 증오회로(hatred circuit)가 규명되었다”라는 제목아래 다음과 같은 제키의 말을 인용하였다.
로맨틱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사랑을 받는 사람에 비해 비판력이나 판단력이 종종 떨어지며, 증오의 대상을 더 많이 증오할수록 그 사람을 괴롭히거나 복수하기 위한 계산적 판단을 하려고 한다 ······ 증오하는 사람을 볼 때 반응하는 뇌의 활동량은 증오의 정도와 비례하며, 증오의 감정은 객관적인 양적 측량이 가능하다. 이점은 앞으로 형법 재판에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6)
또한 《뉴사이언티스트》는 제키의 말을 인용하여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정신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며 상대에게 열광하지만, 증오에 사로잡힌 사람은 언제나 계산한 대로 행동한다. ······ 뇌 영상은 언젠가 법정에서 사용될 것이다”라고 보도했다.7)
과학자들은 전문 학술지에 출판된 연구 논문에서는 그의 연구가 보여 주는 보다 넓은 함의에 대해서 무척 조심스러운 평가를 내린다. 제키는 자신의 논문에서 “사랑과 증오라는 감정이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이 확실하다”는 선에서 자신의 연구의 함의를 제한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대중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는 대부분 사라진다. 제키의 경우를 봐도 대중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훨씬 더 직접적이고 심지어 노골적이었음을 볼 수 있다.
사랑에는 없는 전두면 피질의 반응이 증오에서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서 그는 전자가 무계산적임에 반해 후자는 철저하게 계산적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러한 계산이 객관화 되어 객관적 데이터가 법정에 응용될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렇게 자신의 연구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것 또한 연구의 대중화에서 종종 드러나는 특성이다.
또 다른 사례를 하나 더 들어 보자. 크리스토프(K. Christoff)는 사람들이 한 가지 생각에 얽매이지 않고 몽상(mind wandering)에 빠져있을 때 뇌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탐구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있을 때 뇌에서는 디폴트 네트워크(default network)가 활성화 되며, 반면 어떠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실행 네트워크(executive network)가 활성화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크리스토프의 연구가 밝힌 흥미로운 사실은 잡념에 빠져있을 때 우리의 뇌에서는 디폴트 네트워크와 함께 실행 네트워크도 활성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크리스토프는 몽상이 창조적 사고나 정신적 자극을 위해서 디폴트 네트워크의 잠재적 기여를 줄이지 않고도 실행 네트워크의 활성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여러 정신 현상의 하나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매우 창의적인 연구에 몰두하는 것 같은 활동이 해당된다는 것이 알려졌었는데, 몽상이 이와 비슷한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몽상을 할 때 뇌의 활성화되는 패턴이 창의적인 연구를 할 때의 패턴과 흡사하다는 것이 크리스토프의 결론이었다. 그런데 이 연구를 보도한 사이언스 데일리는 “우리가 몽상을 할 때 뇌의 문제풀이 기능이 활성화 된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당신의 공상은 책을 읽거나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등의 당장의 할 일을 못하게 하겠지만, (이때)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경력이나 인간관계와 같이 인생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크리스토프의 말을 인용했다. MSNBC는 아예 “힘든 문제를 풀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몽상을 하라”고 보도했다.
몽상과 창의적 연구가 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미디어에 의해서 바로 ‘몽상=창의적 연구’라는 등식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등식 역시 연구자 본인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었다. 미디어의 보도는 학술 논문에서는 없는 뇌 영상 연구의 사회적, 문화적, 실제적 의미를 보도하는데, 이 대부분은 연구를 한 과학자 본인에게서 나온 얘기들이었던 것이다.8)
인간이 특정한 행동을 할 때 뇌의 어떤 부위가 활성화되는가와 관련된 실험도 많이 이루어졌다. 윌리엄 하버(William Harbaugh)와 데니얼 부가트(Daniel Burghart), 울리히 메이어(Ulrich Mayr)는 실험을 통해 의무적으로 세금을 낼 때와 자발적으로 자선을 할 때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비교했다. 이들의 실험은 세금납부와 자선에 대한 뇌의 반응 모두에서 보상과 기쁨을 담당하는 뇌의 배쪽선조(ventral striatum)부위의 미상핵(caudate nucleus)과 측좌핵(nucleus accumbens)이 활성화 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강제로 납부하는 세금과 자발적으로 내는 기부금이 같은 부위를 활성화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9)
이들의 연구는 곧바로 여러 대중 매체에 의해서 대서특필되었다. 《사이언스 데일리》는 세금을 낼 때에도 “보상 센터(reward center)”가 자극된다는 울리히 메이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연구 결과가 “세금이 언제나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며,” 덧붙여서 “납세는 시민을 행복하게 한다”고 보도했다.
또한 버킹엄 대학교의 부총장 킬리(T. Kealey)는 《런던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 연구가 “첫째, 오직 국가만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것이라는 좌익의 믿음이 틀렸음을 입증했고, 둘째, 대중들이 세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우익의 믿음이 틀렸음을 입증했으며, 셋째, 신학자들의 원죄의 교리를 확인해 주었다. ······ 이 연구는 신경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사회정책을 얼마나 순식간에 바꾸는지를 보여 준다”라고 역설했다. 한편 국내 언론은 이 연구에 대해 보도하면서 여기에 “세금 납부가 섹스 못지않은 쾌감을 유발한다”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10)
이러한 미디어의 보도들은 학술지에 실렸던 논문의 결론을 훨씬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논문이 보여 주는 것은 세금을 납부할 때와 자발적으로 기부를 할 때 뇌의 같은 부위가 활성화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세금이 언제나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 준 것도 아니고, 대중이 세금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틀렸음을 입증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러한 확장이 연구자 자신에 의해서 제시되었고, 미디어에 의해서 채택되어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다.
킬리는 “신경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사회정책을 얼마나 순식간에 바꾸는지를 보여 준다”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이 연구가 인용된 사례들은 신경경제학의 연구 성과가 정치인들이나 정치적으로 편향된 학자들에 의해서 채택되어 자신들의 사회정책을 정당화하는 데에 즉각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뇌 영상 연구에 대한 과학 커뮤니케이션 사례들은 몇 가지 공통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결정론(determinism)이다. 뇌의 기능과 관련된 연구 결과에 대해 언론은 ‘증오 회로’ ‘보상 센터’라는 표현을 써가며 증오나 기부에 대한 반응이 뇌에 각인된(hard-wired) 것처럼 보도했다. 이는 인간의 다양한 행동이 이미 뇌에 존재하는 회로의 작동 때문이며, 뇌의 그 부위가 자극될 때에는 인간의 특정 행동을 낳는다는 뇌결정론(neuro-determinism)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결정론을 상식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지만 다름 절의 논의에서 보듯이, fMRI 뇌 영상을 토대로 해서 인간 정신이나 행동이 뇌의 특정부위의 자극에 의해서 유발된다고 결론짓는 것은 숱한 문제를 안고 있다.
두 번째 문제점은 언론 보도가 “공상이 창조성을 높인다”든지 “세금이 모두 나쁜 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단순한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시키는 생물학적 환원론(biological reductionism)의 특성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원주의는 사회적 신경과학이 인간 정신의 신경학적 근거를 밝힘으로써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해 주리라는 기대를 낳는다.
근대 서양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여러 차례 등장했다. 18세기에 등장한 골상학,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과 미국의 우생학, 20세기 독일의 인종주의, 20세기 후반의 사회생물학 등이 이러한 환원주의의 사례이다. 생물학적 환원주의는 복잡한 사회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을 심어 주지만, 실제 역사가 보여 주는 것은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사회적 강제와 개인 자유의 억압을 수반하기 때문에 성공하기 힘든 프로그램이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로 성공한 경우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언론이 연구결과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장하여 추론한다는 문제가 있다. 사랑과 증오에 대해 반응한 뇌 영상에서 증오는 사랑의 감정에 판단력과 계산 능력이 더해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까? 몽상에 대한 뇌 영상 실험이 몽상이 창조적인 일에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또는 자선과 납세에 대한 뇌의 반응 결과를 놓고 납세가 시민을 행복하게 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fMRI 뇌 영상은 뇌의 기능을 직접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몇 단계의 가정을 거쳐서 매우 간접적인 방식으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엄밀하게 과학적인 의미에서는 이러한 인과적 추론을 쉽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문제는 미디어에서 이러한 인과적 추론이 너무 직접적으로 보도된다는 데에 있다. fMRI의 근본적인 한계는 다음 절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뇌 영상에서 밝게 표시된 두뇌의 특정 영역이 인간 정신의 기능과 1:1 대응한다고 보는 것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뇌 영상 이미지를 실재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멕케이브(David McCabe)가 자신의 연구에서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는 TV시청을 할 때와 수학 문제를 풀 때 활성화 되는 뇌의 부위가 동일하다는 허위 기사를 만들어 일부 학생에게는 이 기사를 뇌 영상 이미지와 함께 보여 주고, 나머지 학생에게는 뇌 영상 없이 기사만을 보여 주는 실험을 했다. 이때 뇌 영상과 기사를 함께 접한 학생들은 이미지가 없는 기사만을 접한 학생들에 비해서 기사의 내용을 믿는 성향을 훨씬 강하게 드러냈다. 그에 의하면 뇌 영상은 추상적인 뇌의 작용에 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지 과정에 대한 환원론적인 선호 경향과 부합하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라신(E. Racine) 등은 사람들이 뇌 영상 이미지를 과다하게 신뢰하는 성향을 뇌 실재론(neuro-realism) 혹은 뇌 근본주의(neuro-essentialism)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러한 성향은 fMRI를 이용해서 인간의 뇌 속에서 감정이나 행동의 원천을 찾으려는 연구자들과 이를 과대 포장해서 보도하는 미디어의 상호 피드백에 의해서 강화되고 있다. 미디어의 보도는 ‘두뇌의 증오회로’와 같은 확고한 톤을 사용하고, 뇌 영상 연구결과가 수량화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임을 강조하한다. 또한 이것이 인간 사회와 정책에 큰 영향을 줄 수 있고, 가까운 미래에 치료나 법정에서 응용 가능하다고 보도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과장된 보도는 기술적인 혁신과 사회적 파장을 가져올 수 있는 과학적 발견을 기대하는 대중의 심리에 맞고, 자신의 논문에서는 연구의 보다 넓은 의미를 언급하지 못했던 과학자들의 구미에도 들어맞는다. 특히 과학자들은 뇌과학 연구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미디어의 보도가 이후 지속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미디어의 과장된 보도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 이 과정에서 뇌 실재론 혹은 뇌 근본주의는 더 강화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fMRI 뇌 영상 실험결과가 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면서 발생하는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fMRI 영상이 안고 있는 문제들은 과학 커뮤니케이션만의 문제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앞서 언급한 문제들이 자동적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fMRI에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한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fMRI에 대한 많은 비판이 존재해 왔다. 일례로 히거(D. Heeger)와 레스(D. Ress)는 이미 2000년대 초반에 fMRI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 다른 결과를 내며, 수 초 동안 뇌의 국소 영역에서 일어나는 신경 활동을 평균화한 신호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추정에만 유용할 뿐이고, 연구자들이 어떤 프로토콜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문제를 지적했다.11) 우탈에 따르면 과학자들이 실험의 대상으로 삼는 많은 인지과정이 (예를 들어 ‘의사결정(decision-making)’이라고 부르는 인지과정 등이) 심리생물학적인 실재가 아니라 실험을 위해 고안된 프로토콜이기에, 이에 해당하는 뇌의 영역을 fMRI로 발견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fMRI 영상 대분이 인지심리 과정이 뇌의 특정 부위에 국소화(localized)된 것 같은 이미지를 보여 주는데, 이는 실제로 뇌의 작용이 국소화되었다기 보다는 fMRI 영상을 얻는 과정에서 자극을 준 경우와 보통의 경우를 비교해서 전자에서 후자를 빼는 방식을 취하는 과정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즉, 이렇게 영상을 ‘빼는’ 과정에서 뇌 전반에 걸친 활성 영역이 사라지고 마치 활성화된 부분이 국소적인 영역에 국한된다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었다.12)
한편 돕스(David Dobbs)는 “사실인가 골상학인가”라는 논쟁적인 제목의 논문에서 fMRI의 한계들을 열거하면서 fMRI 실험을 통한 신경과학 연구를 18세기 골상학과 비교했다. 그는 뇌신경세포인 뉴런의 반응 속도가 1,000분의 1초 단위이지만 fMRI는 수초 간에 걸친 반응을 평균해서 보기 때문에 fMRI가 보여 주는 것이 실제 뉴론의 활동과는 무관하며, fMRI를 통해서는 그 강도가 약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뉴론의 반응을 검출하지 못하고, 활성 순서를 고려하지 못한 채 수 초에 걸친 이미지들의 중첩을 만든다고 비판했다.
돕스는 또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 ‘중앙집행기(central executive)’의 위치를 찾으려는 연구들을 예로 들었다. 많은 뇌과학 연구자들은 뇌의 활동을 감독하고 우선순위를 조절하며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중앙집행기라는 부위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이것의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돕스는 이러한 연구 38개를 메타적으로 분석한 리더린코프의 연구를 예로 들면서, 연구자들이 찾은 중앙집행기의 위치가 너무도 상이해서 과연 중앙집행기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고 비판했다. 돕스의 논문은 이러한 fMRI연구가 18세기 골상학과 같은 의사과학(pseudo-science)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암시를 주기에 충분했다.13)
최근 들어 fMRI 연구의 방법론적인 문제들도 지적되고 있다. fMRI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독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로고테티스(N. Logothetis)는 영향력 있는 리뷰 논문을 통해 fMRI가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지만 연구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주목하지 않고 fMRI 영상을 과도하게 해석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fMRI를 통해 보여지는 활성화된 뇌의 영역이 그 부분에서 더 많은 신호를 보냄으로써 활성화된 경우도 있지만, 신호를 적게 보내려고 하거나, 균형을 유지하려 함으로써 활성화된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뇌의 활성화된 부위를 알아냈다고 하다라도, 이 영상만을 가지고는 왜 그 부위가 활성화되는지 또는 뇌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는 뇌 작용의 많은 부분이 뉴런의 직접적인 작용보다 뉴런의 네트워크에 일종의 조정을 하는 뇌변조(neuromodulation) 작용이라고 강조했다.14) 또 불(E. Vul)은 “사회적 신경과학의 부두 상관(Voodoo Correlations in Social Neuroscience)”이라는 논쟁적인 논문에서 fMRI 뇌 영상 기법을 사용한 사회적 신경과학 논문 54편을 분석하여 이 중 31편이 방법론적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15)
fMRI에 대한 비판의 정점은 크레이크 베넷(Craig Bennett)이 2009년 인간 두뇌 매핑 학회에서 발표한 죽은 연어의 뇌 영상 포스터였다. 그는 인간에게 fMRI를 실험하는 것과 비슷하게 죽은 연어에게 특정한 그림을 보여 주는 자극을 주면서 연어의 두뇌를 fMRI로 찍었더니 뇌의 특정부분이 활성화된 것이 발견되었다고 주장했다(http://prefrontal.org/files/posters/Bennett-Salmon-2009.jpg). 이 결과는 몇 군데에서 거절당한 뒤에 인간 두뇌 매핑 학회에서 포스터 발표의 기회를 얻었는데, 그의 포스터 발표는 즉각 미디어의 관심을 끌면서 인터넷상에서 널리 유포되었다.16)
물론 베넷의 결과가 지금까지의 fMRI 연구를 모두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이 연구가 fMRI 영상을 얻는 과정에서 거짓 데이터나 오류가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크며, 연구자들이 이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2007년 11월, 《뉴욕타임스》에는 〈이것이 정치 두뇌이다 (This is Your Brain on Politics)〉라는 기사가 실렸다.17) 여기에서는 일군의 연구자들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뇌, 힐러리 클린턴을 선호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의 뇌, 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등을 실험했는데, 이들은 피실험자들의 뇌를 fMRI로 스캔한 뒤에, 이렇게 나온 영상들이 다양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과 함께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분석해서 이를 ‘오피니언’ 기사로 게재했다. 이 분석에서 각 정당의 지지자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당의 후보의 사진을 봤을 때 정서적 연대감과 긍정적 기분을 느끼는 안쪽 안와 전두피질(medial orbirtal prefrontal cortex)이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담은 기사와 사진들이 게재된 뒤에 인지 신경 과학자들 일각에서도 이러한 무분별한 이미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17명의 뇌과학자들은 이러한 기사가 신중한 실험 디자인과 해석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한 연서를 《뉴욕타임스》에 기고했다. 이들 중 한 명은 이러한 기사가 과학이라기보다는 점성술에 가깝다고 강경하게 비난했다. 이 무렵부터 fMRI를 사용해서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들 중에서도 최근 진행되는 여러 연구 방향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인문학과 신경과학을 연결 짓는 신경윤리학은 지난 몇 년 동안에 뇌과학의 급속한 발전이 낳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철학적·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다. 이러한 문제 중에는 누군가가 타인의 뇌를 촬영하여 생각을 읽거나 그 사고를 통제할 경우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fMRI가 법정에서 거짓말 탐지기로 사용될 경우의 법적인 함의는 무엇인가, 뇌 이미지가 차별의 도구로 활용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뇌지도가 완전히 완성되면 자아 개념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와 같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한 우려는, 인간 마음이 뇌의 완벽한 매핑이고, 이 매핑 지도가 조만간 완벽하게 완성되며, 여기에 사용되는 기법이 상당히 믿을만하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사실 비슷한 윤리적 논의가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가 막 출범할 때 유전학에 대한 윤리적 논의에서 이루어졌었다. 당시 철학자들은 게놈 프로젝트가 인간을 정보로 환원함으로써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붕괴시킬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이에 미리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끝난 지금, 우리는 인간이 단순히 DNA유전자 서열들의 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처음의 예상과는 거꾸로 인간이 유전자 정보의 총합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방향의 뇌 연구들의 결과가 가리키는 방향을 종합해 보면, 인간의 마음 또한 두뇌 활동 그 이상의 무엇으로 판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경윤리학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 한 가지 방향이 ‘비판적 신경과학’ 프로그램에서 찾아진다. 2008년에 뇌 과학과 사회와의 건전한 관계의 정립을 위해 신경과학자들과 사회학자들 사이의 대화와 연결을 목적으로 하는 ‘비판적 신경과학(critical neuroscience)’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비판적 신경과학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뇌과학과 사회과학의 성찰적인 상호작용과 건전한 비판을 지향한다.18) 여기에는 기존의 신경윤리학이 실질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차원의 문제들을 경시했다는 비판이 깔려 있었다.
지금까지 신경윤리학에서 나온 여러 가지 논의들 중에는 뇌 결정론이나 환원론 프로그램에 경도된 것이 없지 않다. 이러한 논의들 중에는 fMRI 연구가 함의하는 바를 비판적으로 해석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들이 많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신경윤리학에서 이뤄 왔던 성과들을 모두 비판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우리가 더 발전시켜야 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누는 성찰적인 작업을 우선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비판적 신경윤리학(critical neuroethics) 연구를 제안한다. 비판적 신경윤리학은 기존의 신경윤리학과 과학기술학(STS)의 시각과 방법론의 결합을 시도하며, 신경과학자와 신경윤리학자, STS를 연구하는 과학기술학자들의 성찰적인 상호작용과 대화를 지향한다.
지금까지 fMRI 이미지의 대중화와 그것이 본질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에 대한 논의에서 보았듯이, 1980년대 이후에 축적된 STS 분야의 성과는 비판적 신경윤리학에 중요한 몇 가지 원칙을 제공한다.19)
첫째, 과학에서 실험은 언제나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실험은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해석해 내는 과학자의 실천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논쟁적인 fMRI와 같은 영상기기를 사용한 실험에서는 훨씬 더 철저하고 엄격하게 통제된 방법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과학 커뮤니케이션이나 PUS와 관련해서, 과학적 발견을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단방향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극복하고 과학과 대중의 상호 소통 모델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뇌과학 연구에 대한 건전하고도 상식적인 철학이 필요하다. 이러한 철학을 가질 경우에, fMRI 실험결과가 특정한 인지기능과 특정 뇌 부위의 연관성을 보여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1대 1로 대응할 개연성은 적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넷째, 뇌 연구 기술과 결과를 상업적으로 응용하는 일에 주의해야 한다. 아직 밝혀진 것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뇌에 대한 여러 가지 응용과 상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에 뇌과학 연구자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동원되는 일이 잦은데, 이러한 상업화는 연구에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지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이슈와 관련해서 신경 환원주의나 신경 결정론에 빠지는 일에 주의해야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러한 환원적인 프로그램이 근현대 역사를 통해 성공한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섯 가지 원칙은 지난 20여 년간의 STS 연구가 신경윤리학에 제공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칙이다. 물론 이러한 원칙들은 뇌과학이 가지는 특수성에 비추어 수정되고 개선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대중적으로는 뇌 결정론과 환원론이 점점 더 상식처럼 고착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과학계 내부에서는 fMRI 연구의 타당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비판받는 지금, 신경윤리학은 STS가 제공하는 이러한 원칙을 수용해서 더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학문분야로 거듭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하겠다.
첫댓글 ㅎ ㅎ 고맙습니다 ()^^
ㅎㅎㅎ 우리 사랑방은 휴게실 수준이 요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