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한국방송대충북지역문화교양학과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5기동문게시판 스크랩 문정희시인의 시모음
전국경(081) 추천 0 조회 803 11.08.20 23:4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혹 / 문정희


자궁 혹 떼어낸 게 엊그제인데
이번엔 유방을 째자고 한다
누구는 이 나이 되면 권위도 생긴다는데
내겐 웬 혹만 생기는 것일까
혹시 젊은 날 옆집 소년에게
몰래 품은 연정이 자라 혹이 된 것일까
가끔 아내 있는 남자를 훔쳐봤던 일
남편의 등뒤에서 숨죽여 칼을 갈며 울었던 일
집만 나서면 어김없이
머리칼 바람에 풀어 헤쳤던 일
그것들이 위험한 혹으로 자란 것일까
하지만 떼내어야 할 것이 혹뿐이라면
나는 얼마나 가벼운가
끼니마다 칭얼대는 저 귀여운 혹들
내가 만든 여우와 토끼들
내친김에 혹 떼듯 떼어버리고
새로 슬며시 시집이나 가볼까
밤새 마음으로 마을을 판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앞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 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우렁이 이야기 / 문정희

새로 수염자리 돋아 난 아들과 함께
오랜만에 TV를 끄고
마루에 누워서 별을 바라본다.
별보다는 아무래도 자동차의 불빛이
더 빛나 보이는 아들은 그만 지루해서
두 번이나 하품을 한다.
나는 우렁이 얘기를 한다.
<옛날에 옛날에 새끼 우렁이가
야곰야곰 어미 우렁이를 다 파먹어서
마침내 어미 우렁이는 껍데기만 남았더래. 그래서
텅 빈 어미 우렁이가 냇물에 동동 떠내려 가자
그것을 본 새끼 우렁이가
<야, 우리 엄마 보트 놀이 한다>고 깔깔 웃더래>
아이는 재미나서 와락 달려들며
<야, 어미 우렁이 파먹자>하고 간지럼을 먹이는데
문득 온몸을 비틀며
내가 파먹어 멀리 떠내려 가 버린
내 어미 우렁이가 그리워
천길 낭떠러지로 별이 떨어진다.


겨울 사랑 /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파꽃길 / 문정희

 

흰 파꽃이 피는 여름이 되면
바닷가 명교리(明敎里)*에 가보리라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냄새를 따라가면
이 세상 끝에 닿는다는 명교리에 가서
내 이름 부르는 바다를 만나리라
어린시절 오줌을 싸서
소금을 받으러 가다 넘어진 바위
내 수치와 슬픔위에
은빛소금을 뿌리던 외가 식구들
이제는 모두 돌아가고 없지만
서걱이는 모래톱 속에 손을 넣으면
차가운 눈물샘은 여전히 솟으리니
조금만 스치어도
슬픔처럼 코끝을 건드리는
파꽃냄새를 따라가서
그리운 키를 쓰고 소금을 받으리라
넘실대는 여름바다에
푸른 추억의 날개를 달아주리라
*명교리(明敎里) : 이곳은 전남 보성에 있는 마을 입니다.

 


소리 / 문정희

 

끓는 쇳물 속에 어린 딸을 바치고도
해와 달이 예순 번을 바뀐 후에야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는 에밀레종도
처음엔 소리가 없었다네
종신 속에 기포가 많아
헛구멍들이 소리를 다 잡아먹은 거지
그래서 허공에 매달리기
십년 이십년 백년......그렇게 바래지기
또 오백년......헛것들이 다 사라지고
자연히 구멍이 메워져서, 어느날
지잉, 징
하늘 땅을 울렸다네
오, 허공에 매달리기 올해 겨우 마흔해
내 몸속을 흐느는 바람길 수천리

 


풀잎 / 문정희

 

돌틈새에서 파릇한 햇살들이
놀라 깨어나면
나는 조그맣고 서러운
사랑으로 눈뜨리
누가 이런 날
발자국 소리를 숨길 수 있으랴
온세상에 눈부신 소문이
가뭇없이 퍼진다 한들

 


순간 / 문정희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노래 / 문정희

 

나와 가장 가까운 그대 슬픔이
저 강물의 흐름이라 한들
내 하얀 기도가 햇빛 타고 와
그대 귓전 맴도는 바람ㅇㅣ라 한들
나 그대 꿈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대 또한 내 꿈을 열 수 없으니
우리 힘껏 서로가 사랑한다 한들

 


성에꽃 / 문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 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비망록 / 문정희

 

남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시인의 집 / 문정희

 

폼페이, 네 상처를 보러 왔다
목욕하다 죽은 네 둘째딸의 젖꼭지를 보러 왔다
네 아내의 가슴에서 터져 버린 화산을 보러 왔다
가열한 절망 위에 홀로 천 년을 꿈틀거리는
아름다운 폐허, 그곳에서
아침 새떼처럼 서식하는 시를 만나러 왔다
너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지구 끝에서 몰려든 호기심 앞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재앙들
주점과 도서관과 검투사들의 욕망이
인기 관광상품으로 널려 있는 이 거리에서
나는 자꾸 길을 잃는다
오래 쓰다듬고 나면 상처도
이리 환한 눈을 뜨더냐
그렇다면 시간은 무엇이고 비애는 무엇이냐
드디어 '시인의 집'앞에서 발을 멈춘다
대문에 상징으로 개 한 마리 그려 놓고
시인은 영원히 외출중
술에 취해 귀가하는 그를 위해
골목에는 아직도 야광석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는 어디선가 상처를 팔고 있나 보다
서울에서도 그의 초라한 옷자락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발이 부르트도록 파멸과 절망을 뒤적인다
싱싱한 비극 위에 살아나는 언어의 혈육을 찾는다
폼페이 시인의 집 앞에서
시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젊은날 / 문정희

 

새벽별처럼 아름다웠던 젊은날에도
내 어깨 위엔
언제나 조그만 황혼이 걸려 있었다
향기로운 독버섯 냄새를 풍기며
속으로 나를 흔드는 바람이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무수히 빠져나가는
은비늘 같은 시간들
모든 이름이 덧없음을
그때 벌써 알고 있었다
아! 젊음은
그 지느러미 속을 헤엄치는
짧은 감탄사였다
온몸에 감탄사가 붙어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른 잎사귀였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광풍의 거리
꿈과 멸망이 함께 출렁이는
젊음은 한 장의 프래카아드였다
그리하여
나는 어서 너와 함께
낡은 어둠이 되고 싶었다
촛불 밖에 스러지는
하얀 적막이 되고 싶었다

 


고독 / 문정희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키 큰 남자를 보면 / 문정희

 

키 큰 남자를 보면
가만히 팔 걸고 싶다
어린 날 오빠 팔에 매달리듯
그렇게 매달리고 싶다
나팔꽃이 되어도 좋을까
아니, 바람에 나부끼는
은사시나무에 올라가서
그의 눈썹을 만져 보고 싶다
아름다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에
한 개의 잎으로 매달려
푸른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싶다
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
키 큰 남자를 보면

 


목숨의 노래 / 문정희

 

너 처음 만났을 때
사랑한다
이 말은 너무 작았다
같이 살자
이 말은 너무 흔했다
그래서 너를 두곤
목숨을 내걸었다
목숨의 처음과 끝
천국에서 지옥까지 가고 싶었다
맨발로 너와 함께 타오르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유리창을 닦으며 / 문정희

 

누군가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는다
창에는 하늘 아래
가장 눈부신 유리가 끼워 있어
천 도의 불로 꿈을 태우고
만 도의 뜨거움으로 영혼을 살라 만든
유리가 끼워 있어
솔바람보다도 창창하고
종소리보다도 은은한
노래가 떠오른다
온몸으로 받아들이되
자신은 그림자조차 드러내지 않는
오래도록 못 잊을 사랑 하나 살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은
창을 닦아서
맑고 투명한 햇살에
그리움을 말린다.

 


러브호텔 / 문정희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돌아가는 길 / 문정희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사람의 가을 / 문정희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
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
내가 나의 신입니다
별과 별 사이
너와 나 사이 가을이 왔습니다
맨 처음 신이 가지고 온 검으로
자르고 잘라서
모든 것은 홀로 빛납니다
저 낱낱이 하나인 잎들
저 자유로이 홀로인 새들
저 잎과 저 새를
언어로 옮기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 이 가을
산을 옮기는 일만큼 힘이 듭니다
저 하나로 완성입니다
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섬
그리고 너, 나
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의 신입니다. 이 가을날

 

 

이별 이후 / 문정희

너 떠나간 지
세상의 달력으론 열흘 되었고
내 피의 달력으론 십년 되었다
나 슬픈 것은
네가 없는데도
밤 오면 잠들어야 하고
끼니 오면
입 안 가득 밥알 떠넣는 일이다
옛날 옛날적
그 사람 되어가며
그냥 그렇게 너를 잊는 일이다
이 아픔 그대로 있으면
그래서 숨막혀 나 죽으면
원도 없으리라
그러나 진실로 슬픈 것은
언젠가 너와 내가
이 뜨거움 까맣게
잊는다는 일이다.

 

 

가을 비 / 문정희

어제 우리가 함께하던 사랑의 자리에
오늘 가을 비가 내립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던 동안 함께 서서 바라보던 가을 숲에
잎들이 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사랑하고
납엽지는 자리에 남아 그리워하다가
내일 이 자리를 뜨고 나면 바람만이 불겠지요
바람이 부는 동안 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헤어져 그리워하며
한 세상을 살다 가겠지요.

 

 

촛 불 한 개 / 문정희

여자들은 서른 살 때부터
자신의 나이를 감추기 시작한다
사실은 스물아홉 살 때부터
서서히 부끄러워한다
돌 틈새에 끼인
엉겅키처럼 미안하게 서른을 산다
마흔이 되는 날, 촛불 한 개를 켜놓고
여성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인간이 되는
첫번째 생일을 맞으리라는
친구여
촛불을 불기 전에 생각해 보아라
그대 그날이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재는 심지어 여자조차 아닌
아무짝에 쓸모없는
아줌마가 되는 것뿐이로다
여자 나이 마흔 그리고 쉰
저 푸르고 넉넉한 모초지를
벌써 페허로 내던져놓고
가죽장화 신은 도적떼들이 지나가고 있다

 

 

가을 노트 / 문정희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몸을 떨었다.
못다한 말
못다한 노래
까아만 씨앗으로 가슴에 담고
우리의 사랑이 지고 있었으므로
머잖아
한잎 두잎 아픔은 사라지고
기억만 남아
벼 베고 난 빈 들녘
고즈넉한
볏단처럼 놓이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물이 드는 것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홀로 찬바람에 흔들리는 것이지
그리고 이 세상 끝날 때
가장 깊은 살속에
담아가는 것이지
그대 떠나간 후
나의 가을은
조금만 건드려도
우수수 옷을 벗었다
슬프고 앙상한 뼈만 남았다.

 

 

고향을 찾아서 1 /문정희

십수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민대머리처럼 흙이 벗겨진
아버지 무덤 앞에 섰다.
부끄럽구나
저 널부러진 검불 하나에도
나됩구는 사금파리 하나에도
나는 몸둘 바를 모르겠구나.
내가 때묻은 티티새처럼
이름도 없는 항구로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저 산맥 저 무덤은 비바람에
이마를 적시며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
언젠가 돌아올
내 속살을 보고 있었구나.

 

 

고향을 찾아서 2 /문정희

가을도 아닌데 고향 사람들은
모두 낙엽되어 흩어져 있었다.
다리에 구렁이 같은 힘줄이 솟아
쌀 두 가마 등짐지던 사출이 아저씨도
이빨로 소주병을 까던 기훈이 오빠도
엉댕이가 맷돌 같던 쌀장수 화순댁도
모두 어김없이 낙엽이 되었다.
키다리 선출이 칠푼이 알밤이조차도
모두 낙엽이 되었다.
수북한 낙엽 속에서 용케
송장 메뚜기처 럼
살아남은 이복언니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날 보고 그 자리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
마른 갈비뼈 사이로
쉬잇쉬잇 해수병이 드나드는
목쉰 울음 속에
그녀는 내 이름 부르지 않고
30년 전에 죽은
울아버지 부르며 통곡했다.
내 슬픔 당당하게 뺏어들고
땅을 치며 먼저 울어버렸다.
나는 슬픔조차 빼앗겨
타관 사람처럼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꿈 / 문정희

내 친구 연이는 꿈 많던 계집애
그녀는 시집갈 때 이불보따리 속에
김찬삼의 세계여행기 한 질 넣고 갔었다.
남편은 실업자 문학 청년
그래서 쌀독은 늘 허공으로 가득했다.
밤에만 나가는 재주 좋은 시동생이
가끔 쌀을 들고 와 먹고 지냈다.
연이는 밤마다
세계일주 떠났다.
아테네 항구에서 바다가제를 먹고
그 다음엔 로마의 카타꼼베로!
검은 신부가 흔드는
촛불을 따라 들어가서
천년 전에 묻힌 뼈를 보고
으스스 떨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또 떠나리.
아! 피사, 아시시, 니스, 깔레 ......
구석구석 돌아다니느라
그녀는 혀가 꼬부라지고
발이 부르텄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그만
뉴욕의 할렘 부근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밤에만 눈을 뜨는
재주끈 시동생이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를 몽땅 들고 나가
라면 한 상자와 바꿔온 날이었다.
그녀는 비로소 울었다.
결혼반지를 팔던 날도 울지 않던
내 친구 연이는
그날 뉴욕의 할렘 부근에 쓰러져서 꺽꺽 울었다

 

 

찔래 / 문정희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그리운 가슴 가만히 열어
한 그루
찔레로 서 있고 싶다.
사랑하던 그 사람
조금만 더 다가서면
서로 꽃이 되었을 이름
오늘은
송이송이 횐 찔레꽃으로 피워놓고
먼 여행에서 돌아와
이슬을 털듯 추억을 털며
초록 속에 가득히 서 있고 싶다.
그대 사랑하는 동안
내겐 우는 날이 많았었다.
아픔이 출렁 거려
늘 말을 잃어갔다.
오늘은 그 아픔조차
예쁘고 뽀족한 가시로
꽃 속에 매달고
슬퍼 하지 말고
꿈결처럼
초록이 흐르는 이 계절에
무성한 사랑으로 서 있고 싶다.

 


성공시대 / 문정희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제비를 기다리며 / 문정희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집 가풍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씨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에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다리를 구워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밤 (栗) 이야기 / 문정희

내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먼 분이셨다
어릴 적 운동회 날, 실에 매단 밤 따먹기에 나가
알밤은 키 큰 아이들이 모두 따가고
쭉정이 밤 한 톨 겨우 주워온 나를
이것 봐라, 알밤 주워왔다! 고 외치던 어머니는
분명 한쪽 눈이 깊숙이 먼 분이셨다
어머니의 노래는 그 이후에도
30년도 더 넘게 계속되었다
마지막 숨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쭉정이 밤 한 톨
남의 발밑에서 겨우 주워오는
내 손목 치켜세우며
이것 봐라, 내 새끼 알밤 주워왔다! 고
사방에 대고 자랑하셨다

  


나의 장미 / 문정희

시인은 아름다운가
시간 위에 장미를 피우려고
피를 돌리는 존재
그는 생명인가, 언어인가
그의 감옥에는
홀로 앉아 시를 쓰는 손만 보일 뿐
그는 소경인지도 모른다
시 속에서만 부엉이처럼 눈을 뜨고 사니
현실은 늘 저주
사랑은 언제나 이별
그의 독방에는
그가 풀어놓은 말들이 저희끼리
서로 연애를 하여
결국 까만 알을 낳는다
시는 언어의 딸이 아니라
침묵의 딸인지도 모른다
그는 사랑을 말한 적도 없다
시 쓰다 보면 거기 사랑이 있을 뿐
숨 쉬는 장미 같은.......

 


순간 / 문정희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내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처다보면 숨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 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 문정희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나는 등 뒤에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왔다
남편의 사진은 옷장 속에 깊이 숨겨두었고
이제는 바다처럼 넓어져서
바람소리 숭숭 들려오는 넉넉한 나이도
기꺼이 주민등록증 속에 끼워두고 왔다
그래서 나는 큰 가방을 들었지만
날을 듯이 가벼웠었다
내가 가진 거라곤 출렁이는 자유,
소금처럼 짭짤한 외로움
이거면 시인의 식사로는 풍족하다
그런데 웬 일일까
십수 년 전에 벌써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할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감쪽같이 나를 따라와
내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앉아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간섭하고 있다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조심조심 길조심” 성가시게 한다

 

 

율포의 기억 / 문정희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소금기 많은 푸른 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다가 뿌리 뽑혀 밀려 나간 후
꿈틀거리는 검은 뻘 밭 때문이었다
뻘 밭에 위험을 무릅쓰고 퍼덕거리는 것들
숨 쉬고 사는 것들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먹이를 건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왜 무릎을 꺾는 것일까
깊게 허리를 굽혀야만 할까
생명이 사는 곳은 왜 저토록 쓸쓸한 맨살일까
일찍이 어머니가 나를 바다에 데려간 것은
저 무위(無爲)한 해조음을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물 위에 집을 짓는 새들과
각혈하듯 노을을 내뿜는 포구를 배경으로
성자처럼 뻘 밭에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건지는
슬프고 경건한 손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출세한 시인에게 / 문정희

너는 생각보다 더 빨리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물고기처럼 싱싱한 상상력과 지느러미 대신
갈퀴처럼 날카로운 손이라는 도구를 쓸 줄 알았다
너에게 속도와 질주를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복권에 당첨된 표정 같은 득의만면이 아니라
안개 속에 두려움을 커튼처럼 젖히고 나가
비로소 저 산정에 서서 땀을 씻으라는 것이었다
서서히 네 자신에 도달하라는 것이었다
지난밤의 외로움을 바다 끝까지 밀고나가
심연에 살며
불온한 천재로 자꾸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네가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위험한 방식으로
남을 밀어뜨리는 일이었다
관습과 지배의 얼굴을 빠른 속도로 익히고
그 아래 꽃을 바치는 일이었다
시인아, 너는 힘 있는 구두와 빠른 골목을
너무 쉽게 알아버렸다
조금 더 헤매어도 좋았을 것을……
배회와 방황을 속으로 비웃으며
유명한 이름아, 네가 읊조리는 시는
겨우 의미의 시중을 들기 바쁘구나
그래, 매소부(賣笑婦)처럼
예쁘게 부드럽게 손을 흔들어라
이제 물심양면의 하수인들이
책을 사들고 상패를 싸 들고
네 앞에 장강(長江)을 이룰 시간이 되었다

 

 

찬밥 / 문정희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1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우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머리 감는 여자 / 문정희

가을이 오기 전
뽀뽈라로 갈까
돌마다 태양의 얼굴을 새겨놓고
햇살에도 피가 도는 마야의 여자가 되어
검은 머리 길게 땋아 내리고
생긴 대로 끝없이 아이를 낳아볼까
풍성한 다산의 여자들이
초록의 밀림 속에서 죄 없이 천 년의 대지가 되는
뽀뽈라에 가서
야자 잎에 돌을 얹어 둥지 하나 틀고
나도 밤마다 쑥쑥 아이를 배고
해마다 쑥쑥 아이를 낳아야지
검은 하수구를 타고
콘돔과 감별당한 태아들과
들어내 버린 자궁들이 떼지어 떠내려가는
뒤숭숭한 도시
저마다 불길한 무기를 숨기고 흔들리는
이 거대한 노예선을 떠나
가을이 오기 전
뽀뽈라로 갈까
맨 먼저 말구유에 빗물을 받아
오래오래 머리를 감고
젖은 머리 그대로
천 년 푸르른 자연이 될까


사랑은 불이 아님을 /문정희 시

사랑은 불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잎새에 머무는 계절처럼
잠시 일렁이면
나무는 자라고
나무는 옷을 벗는
사랑은 그런 수긍 같은 것임을
그러나 불도 아닌
사랑이 화상을 남기었다
날 저물고
비 내리지 않아도
저 혼자 흘러가는
외롭고 깊은
강물 하나를

 

 

가을산 / 문정희

가을산은 한 척의 보물선이다
어제의 그가 아니다
풀들마저 돌연히 황금으로 둔갑한
가을산 어딘가에
애꾸눈 선장이 숨어 있으리라
열매들은 깜깜한 씨앗 속에다
가장 소중한 것을 숨기었다
흔히 아름다운 산일수록 가파르다고 충고하지만
알맞게 드러누운 시간의 벼랑
황금으로 불타는 난파선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야호! 외친다
키 큰 나무와 기운찬 바위들이 내뿜는
거친 숨결을 따라 산정에 오르며
영롱한 구슬땀을 사리처럼 쏟아낸다
황금을 발로 밟는 가을 산행의
오오, 이런 기막힌 은유라니
한 척의 보물선, 가을산에서
나는 서늘하게 서늘하게 해탈한다

 

 

가을 상처 / 문정희

빙초산을 뿌리며 가을이 달려들었다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며 저 아래
강이 흐른다고 하지만
흘러서 어디로 갔을까
다리 아랜 언제나 강이 있었다
너를 사랑해! 한여름 폭양 아래 핀
붉은 꽃들처럼 서로 피눈물 흘렸는데
그사랑 흘러서 어디로 갔을까
사랑은 내 심장속에 있다가
슬며시 사라졌다
너와 나 사이에 놓인 다리에는
지금 아무것도 없다
상처가 쑤시어 약을 발라주려고 했지만
내 상처에 맞는 약 또한 세상에는 없었다
나의 몸은 가을날 범종처럼 무르익어
바람이 조금만 두드려도 은은한 슬픔이 울었다

 

 

그리움 속으로 / 문정희

저 산맥들은
무슨 커다란 그리움 있어
이렇듯 푸르름을 사방에다 풀어 놓았을까
바람 속에 쑥부쟁이 냄새 나는
그리운 고향에 가서
오늘은 토란잎처럼 싱신한 호미를 들고
진종일 흙을 파고 싶다
힘줄 서린 두 다리로 땅을 밟으며
착하고 따스한 눈매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겨드랑이에 정직한 땀냄새가 풍겨
수줍음 타는 처녀가 되고 싶다
그 처녀를 사랑하는
말 못 하는 그대를 만난다면
반가움에 떨며 속으로 조금 울먹이리라
아, 바람이 푸르른 공후를 켜는 날
나는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리고
솔 향내 나는 그리움 속으로 떠나고 싶다
오랜만에 옥양목 저고리 풀먹여 입고
그리운 얼굴들을 만난다면
내 신발은 얼마나 가벼울까
오늘은 빠르고 번쩍이는 것들 죄다 치워 놓고
온갖 슬픔을 접어 두고
푸루른 그리움 속으로 떠나고 싶다
두고 온 고향의 옷깃을 부여잡고 싶다.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 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나에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 준 남자

 

 

분수 / 문정희

시청 앞을 지나다가
떨어지는 분수를 본다
힘찬 새들의 깃털
추락하는 별들이 긋는 눈부신 한 획
아, 나도 저런 시를 쓰고 싶다
언제나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가
가령 바다라든가 바위 같은
지혜로운 것들이 조금만 말을 걸어와도
몸을 떨며 감격했는데
오늘 시청 앞을 지나다가 허공으로
떨어지는 분수를 본다
자연도 아닌 것이
사람이 만든 것이
무엇을 세우려고 고통하지 않고
맘껏 무너져내리며
나를 장엄하게 일으켜세운다

 

 

평화로운 풍경 / 문정희

대낮에 밖에서 돌아온 한 남자가
넥타이를 반만 푼 채
거실 소파에서 졸고 있다.
침을 조금 흘리며 가랑이를 벌리고
나와 같은 주걱으로 밥을 퍼서 먹은 지
20년이 넘은 남자
가끔 더운 체온을 나누기도 하지만
여전히 끌려온 맹수처럼
내가 만든 우리 주위를 빙빙 도는 남자
비가 오는 날엔 때로
야성의 습성을 제 새끼들을 향해
으헝으헝 내지를 때도 있지만
어차피 나는 다소 위선으로 살기로 했다.
증류수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적당히 불순한 것도 좋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나는 숱한 모반으로 저녁밥을 지었다.
그 남자가 조금 후 오후 1시가 되면
어떤 젊은이의 결혼식 주례를 설 것이다.
결혼은 두 남녀가 한 개의 별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상징을 써서
축복할 것이고
일심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점잖게 훈계할 것이다.
한 남자가 대낮에 들어와 넥타이를 반만 푼 채
침을 조금 흘리며 소파에서 졸고 있다

 

 

어머니에게 / 문정희

하나만 사랑하시고
모두 버리셔요.
그 하나
그것은 生이 아니라
약속이예요.
모두가 혼자 가지만
한곳으로 갑니다.
그것은 즐거운 약속입니다. 어머니
조금 먼저 오신 어머니는
조금 먼저 그곳에 가시고
조금 나중 온 우리들은
조금 나중 그곳에 갑니다.
약속도 없이 태어난 우리
약속 하나 지키며 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외롭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니 울지 마셔요.
어머니는 좋은 낙엽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 문정희

사랑하는 것은
창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
오래오래 홀로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슬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합니다."
풀꽃처럼 작은 이 한마디에
녹슬고 사나운 철문도 삐걱 열리고
길고 긴 장벽도 눈 녹듯 스러지고
온 대지에 따스한 봄이 옵니다.
사랑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것입니다.


알몸 노래 / 시. 문정희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 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 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와 살과 뼈와 만나서
지지지 온 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딸아! 연애를 해라 / 문정희

딸아!
연애를 해라!
호랑이 눈썹을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네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두드리거나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흐뭇하면서도 한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단다.
그동안 너에게 수없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마는,
또한 음악이 주는 그 고양된 영혼의 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마는, 그러나 책보다 음악보다 컴퓨터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역시 사람이 사람을 심혈을 기울여
사랑하는 연애가 아니겠느냐.
네가 허덕이는 엄마를 돕겠다는 갸륵한 마음으로
기꺼이 설거지를 하거나 분리된 쓰레기 봉지를 들고 나갈 때면
나는 속으로 울컥 화를 내곤 한단다.
딸아!
제발 그 따위 착한 딸을 집어치워라.
그리고 정숙한 학생도 집어치워라.
너는 네 여학교 교실에 붙어 있던 신사임당의 그 우아한 팔자를
행여라도 부러워하거나 이상형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닐 테지.
혹은 장차 결혼을 생각하며 행여라도 어떤 조건을 염두에 두어
계산을 한다거나 뭔가를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은
아닐 테지.
딸아!
너는 결코 그 누구도 아닌 너로서 살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당당하게 필생의 연애에 빠지기 바란다.
연애를 한다고해서 누구를 카페에서 만나고 함께 극장에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종류를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알리라. 그런 것은 연애가 아니란다.
사람을 진실로 사귀는 것도 아니란다.
많은 경우의 결혼이 지루하고 불행한 것은
바로 그런 건성 연애를 사랑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딸아!
진실로 자기의 일을 누구에게도 기대거나 응석 떨지 않는
그 어른의 전 존재로서 먼저 연애를 하기를 바란다.
연애란 사람의 생명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푸른 불꽃이 튀어나오는 강렬한 에너지를 말한다.
그 에너지의 힘을 만나보지 못하고 체험해보지 못하고 어떻게
학문에 심취할 것이며 어떻게 자기의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나 세상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깊고 뜨겁고 순수한
숨결을 내뿜는 야성의 생명성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솔직하게 말못할 것도 없다.
나는 아직도 제일의 소원의 하나로 연애를 꿈꾸고 있단다.
오랫동안 시를 써왔지만 그보다 더 오랫동안 수많은 덫과
타성에 걸려서 거짓 정숙성에 사로잡혀 무사하게 살아왔다.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그런 범주였다는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으리라.
딸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제발 이제부턴 다이어트를 멈추어라.
자본주의 상인의 줄자나 저울에나 맞는 그 나약한 몸으로 21세기를
어떻게 살아내려고 몸무게를 줄이느냐. 날씬한 허리,
균형 잡힌 몸매를 원할 때가 있다면 그것은 건강을 생각을
할 때 딱 한 가지뿐이다.
땀 흘려 일하고 입을 쩍 벌려서 상추쌈을 먹고 늑대 같은
야성의 힘으로 아이를 낳고 또 사랑을 하는 그런 넘치는 에너지를
가진 여성이 되거라.
탐스럽고 비옥한 대지와 무한한 생산성이야말로
여성의 진정한 힘이요, 미의 원천이란다.
다가오는 세기의 진정 아름다운 여성은 그렇듯 넘치는 야성과
넓고 순수한 힘을 지닌 여성일 것이다.
20세기의 업적의 하나로 남녀 차별과 고정관념이 무너진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이제 말라깽이가 아름답다는 고정관념도
과감히 버려야 한다.
얼굴이 검은 여자도 아름답고 뚱뚱한 여자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보아라. 얼마나 시원하고 편하고 멋있느냐.
몸이란 원래 그 자체의 음악을 가지고 있다지 않니?
자신의 몸을 자본주의 상인들이 만든 유치한 옷걸이로
전락시키거나 짧은 수명의 유행 상품으로 변장시킨
줄도 모르고 끝없이 몰려다니는 가련한 미인군이나 막무가내의
소비의 인질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딸아!
지금 막 코앞에 다가오는 세기는 틀림없이
여성의 세기가 될 거라고 한다.
어서 네 가슴 속 깊이 숨쉬고 있는 야성의 불인 늑대(archetype)를
깨워라. 그리고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포효하며 열정을 다해
연애를 하거라.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 문정희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겨울 日記 / 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고독 / 문정희

그대는 아는가 모르겠다

혼자 흘러와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처럼

온 몸이 깨어져도
흔적조차 없는 이 대낮을
울 수도 없는 물결처럼
그 깊이를 살며
혼자 걷는 이 황야를

비가 안 와도
늘 비를 맞아 뼈가 얼어붙는
얼음번개

그대 참으로 아는가 모르겠다

 

 

첼로처럼 / 문정희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매캐한 담배 연기 같은 목소리로
허공을 긁고 싶다
기껏해야 줄 몇 개로
풍만한 여자의 허리 같은 몸통 하나로
무수한 별을 떨어뜨리고 싶다
지분 냄새 풍기는 은빛 샌들의 드레스들을
넥타이 맨 신사들을
신사의 허세와 속물들을
일제히 기립시켜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치게 하고 싶다
죽은 귀를 잘라 버리고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게 하고 싶다
슬픈 사람들의 가슴을
박박 긁어
신록이 돋게 하고 싶다
하룻밤쯤
첼로처럼 살고 싶다

 

 

흐름에 대하여 /문정희님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고 싶다.
참으로 흐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흐름의 숨결로 키워낸 진주는
왜 슬픔처럼 영롱한 것인지
알고 싶다.
하늘은 왜 우리에게
햇살과 함께
자유를 주었는가.
우리들은 왜 흐르는가.
바다에 가서
바다가 되지 못하고
날개가 되지 못하고
왜 약속처럼 산으로 가는가.
산으로 가는가.
한 벌 죽음으로 자유와 햇살 빼앗기고
다만 혼자 제 목숨 갖고 가는가.

문정희 시인
1947 전남 보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서울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문학박사)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꽃숨} 자가본 1965
{문정희시집(文貞姬詩集)} 월간문학사 1973
{새떼} 민학사 1975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문학예술사 1984
{아우내의 새} 일월서각 1986
{그리운 나의 집} 예전사 1987
{찔레} 전예원 1987
{우리는 왜 흐르는가} 문학사상사 1987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나남 1988
{꿈꾸는 눈썹} 신원문화사 1990
{어린 사랑에게} 미래사 1991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미학사 1992
{남자를 위하여} 민음사 1996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중앙M&B 2003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민음사 2004
수필집
{사색의 그리운 풀밭} 자유문학사 1986
{사랑과 우수의 사이} 심지 1986
{사랑이 열리는 나무} 여학생사 1987
{우리 영혼의 암호문 하나} 문학사상사 1987
{젊은 고뇌와 사랑} 문음사 1987
{우리 영혼의 고뇌와 사랑} 문학사상사 1988
{우리를 홀로 있게 하는 것들} 문학세계사 1988
{날개를 자르고 날아가라 한다} 도서출판답게 1993
현대문학상(1975), 소월시 문학상(1997),
제16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