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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후보>
‘저는 여러분의 일꾼입니다.’ 후보로 나온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믿어주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요? 반대로 ‘국민 여러분은 저의 일꾼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후보를 뽑아줄 유권자들은 또 얼마나 될까요? 잘 아는 대로 선거철 잠깐 동안만 그들의 인사를 받아봅니다. 일단 선거가 끝나면 임기 끝날 때까지, 어쩌면 그 후에라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는 얻기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찾을 일도 없을 것이고 찾지도 않습니다. 물론 재선 3선 계속 출마한다면 바로 그 선거철에는 혹시 길에서라도 마주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만날 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뻥쟁이가 누구이겠습니까? 보다 정직하게 살려면 일단 정치인은 되지 말라고 조언할 것입니다. 정치가의 최고 목표는 정직한 실천이 아니라 바로 ‘당선’입니다. 수단 방법 가릴 것 없이 일단 당선이 되고 봐야 합니다. 낙선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정말 목숨 걸고 뛰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것도 혼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위해 뭉친 팀이 무너집니다. 재도전을 위해서는 몇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루하고도 힘든 시간입니다. 재선과 재도전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새로 얻는 것보다는 기득권을 유지하는 쪽이 유리합니다. 그만한 권세와 권리를 이미 쥐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기는 그만한 신뢰를 쌓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두드러진 비리가 드러나지 않는 한 재선이 유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새로 도전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재선 도전의 후보에게 비리가 있다든지 아니면 신참에게 대단한 공적이 있다든지 무슨 뚜렷한 차이가 있어야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워도 도전해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국민을 사랑해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해서? 물론 나라가 잘 되고 백성이 다 잘 사는 것이 꿈이고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공약으로 만들어서 내걸고 선거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 공약이 우선이냐 하는 것과 누가 자기 공약을 지킬 가능성이 높은가 저울질해야 합니다.
흔히 듣는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나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은 말 그대로 사탕발림일 뿐입니다. 물론 그렇게 믿어주는 국민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치가들이 가장 값싸게 우려먹는 용어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호칭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달리 쓸 만한 용어도 없으니까요. 자기 생각대로 ‘나의 머슴들아’ 하고 부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바로 그 점을 착안해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싶습니다. 혹시 이런 후보가 나온다면 어떨까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실제 마음은 그렇다 하더라도 발설할 수는 없는 말입니다. 그것을 꺼내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국민이 기대해봤던 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느 날부터 생각대로가 아니라 진심대로 말이 나오게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자기가 살아온 것과는 한참 다르지요. 본인도 놀라고 함께 일하는 보조원들도 놀라고, 아니 듣는 사람들 모두가 놀랍니다. 우리가 진실을 직면하면 대부분 놀랍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진실이 아니라 주로 거짓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도 놀라고 주변 사람들이 놀라고 상대편까지 놀랍니다. 우리는 진실에 너무 허약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합니다. 한번 드러나면 그 여파가 크고 오래갈 수 있습니다. 역시 유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아마도 그래서 자꾸 거짓 속에 숨기려하는 모양입니다.
만약 정치가들이 정말 모두 정직하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일단 한동안 혼란이 생기리라 짐작합니다. 후보자들은 자진 사퇴를 고려해야 할 것이고 국민은 택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해가 동쪽으로 기울어지는 일과도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이상의 혜택이 보장되기에 막대한 자금을 걸고 입후보하여 선거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가물에 콩 나듯 청렴한 정치인이 나타나 혜택 다 포기하고 정말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해주기를 국민은 꿈에서나 그려봅니다. 그런 기적이 오늘날에도 있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주상숙’ 후보가 어느 날 갑자기 바른 말을 하게 됩니다. 자기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입에서 진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거운동이 뒤죽박죽 되지요. 그 동안의 비리가 다 드러나니 결국 후보사퇴뿐만 아니라 옥살이까지 당합니다. 그러나 그 정직이 힘이 되어 몇 년 후에 다시 입후보합니다. 우리 모두 꿈꿔보는 정치현실입니다. 도무지 현실 속에서 그런 진짜의 말을 들어볼 수가 없으니 말이지요.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나 우리 모두 기대하는 일 아닌가요? 그래서 극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크게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감동은 미안하지만 한 톨도 없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연기자가 좋아서 보는 경우도 있답니다. 영화 ‘정직한 후보’를 보았습니다. 더불어 그 옆에 젊은 보좌관(김무열)도 괜찮더군요. 키 크고 잘생겼는데 연기도 그만하면 괜찮다 싶습니다.
<1917>
어렵게 구해주었더니 오히려 살해를 하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있어야 하는 일인가? 도무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 곳이 전장입니다. 위기에 처한 상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힘을 다해 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군입니다. 그냥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옳은 일인가요? 어차피 적군인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어떻습니까? 그러나 적일지라도 차마 죽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살려주었더니 적군이 상대방을 알아보고 자기가 먼저 해치운 겁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상대는 적군인데 비록 위기를 모면하게 해줄지라도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살려준 이들이 자기를 포로로 넘겨주리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니 처리해야 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보았지만 그 마지막이 너무 가슴 아파서 오래도록 또렷하게 기억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입니다. 여기서는 독일 병사가 주인공입니다. 죽이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았지만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살려줍니다. 앞에 간 동료들에게 이상 없이 수행하였음을 알리려 허공에 총을 쏘아대고 상대방은 살려줍니다. 그리고 돌아서 길을 걸으며 사랑하는 아내의 편지를 꺼내 읽습니다. 그 때 뒤에서 그를 향해 총을 쏩니다. 방금 살려주고 돌아선 바로 그 사람이 말이지요. 아내의 편지가 길 옆 개울로 떨어져 흘러갑니다. 그것을 주우려 팔을 휘저으며 끝납니다.
당사자들은 서로의 사정을 모릅니다. 그냥 적일뿐입니다. 그의 환경, 개인적인 성품이나 특별한 사정 같은 것을 알 수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는 일이지요. 어쩌면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단지 전쟁이라는 상황에 처해있을 뿐입니다. 적일뿐이지요.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죽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당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죽어야 끝날 전쟁이라 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또한 전쟁을 즐기며 참여하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때로는 전쟁의 참상을 자주 보아가며 서서히 사람의 모습을 지워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변해가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그 전쟁의 참상을 트라우마로 가지고 평생 아파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신망이 모두 망가지고 차단되었습니다. 그러니 정말 옛날만도 못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어떻게든 전해주어야 합니다. 시간 안에 전달되지 아니하면 아군의 대단위 병력이 참변을 당합니다. 그 지역에 친형이 참전하고 있는 병사가 있음을 확인한 상관이 호출합니다. 장군이 별것도 아닌 졸병을 부르다니 이게 뭔 사건인가 싶지요. 그렇게 해서 ‘블레이크’ 일병이 사명을 받습니다. 최전방에 들어가서 곧 공격에 들어갈 차비를 하고 있는데 그것을 중단하라는 명령서입니다.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치하고 있는 적진을 지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현장에 있는 형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러니 블레이크는 자기 형을 살리고 1,600 명의 아군을 살리는 일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가는 길이 불가능할지라도 가능한 길을 찾아서라도, 아니 만들어서라도 가야 합니다. 동료인 ‘스코필드’ 일병과 둘만 이 명을 받고 장군의 명령서를 가지고 적진으로 들어갑니다.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아군 진을 떠나 목적지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알 수 없는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 안에 전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지요. 아군은 이미 모두 시체로 변하여 있을 테니까요.
최전방 적진에 당도하니 진을 버리고 모두 후퇴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을 보고 아군이 더 앞으로 전진하였나봅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총공격을 꿈꾸고 있는 것이지요. 명령서를 전달할 때 반드시 모두 모인 곳에서 전달하여 보고하라고 보좌관이 당부하였습니다. 이유가 섬뜩합니다. 전쟁을 즐기는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명령서는 못 받은 척하고 자기 명예와 야망으로 전투를 일으킬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알아듣고는 달립니다. 쉽지 않은 그 길을 시간 안에 당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중도에서 사고를 당합니다. 따라나선 친구가 끝까지 달립니다. 죽인 적군의 주머니에서도 가족사진을 보았습니다. 누구인들 사랑하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왜들 이렇게 죽이고 죽고 야단들입니까?
사명을 마치고 아군을 몰살당할 죽음에서 건졌지만 생각은 이 전쟁이 아니라 저 멀리 집에서 기다릴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우리는 왜 서로 이 짓거리를 해야 하는지 생각이 정리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개인의 자유는 철저히 짓밟힐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들판을 배경으로 시작하여 다시 그 들판을 바라보며 끝이 납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만드는 이야기는 때로 그다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영화 ‘1917’을 보았습니다.
성경 히브리서 6 : 1 - 2 2020년 03월 01일
설교 : 완전한 데로 김종우 목사
성인이 될 때의 감격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때의 뿌듯함이 어디서 빛납니까? 요즘도 ‘청소년 관람불가’의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입간판으로 크게 써서 영화관 앞에 세워 두지는 않습니다. 매표소 프로그램 안내판에 조그맣게 표시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알아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극장 앞에 빨간 글씨로 써서 세워놓았습니다. 아주 위협적입니다. 대학 들어가고 나이 지나니 표지판을 보면서도 당당하게 입장하던 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극장 앞의 그 입간판을 보고 이제 나도 어른이다 싶었습니다. 그 동안 입구를 막았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활짝 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렇다고 어른이 되는 겁니까?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가장 홀가분하게 느껴진 것이 무엇입니까? 아, 이제 시험도 졸업이다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학창 시절 많은 시험을 거쳐 왔는데 그렇다고 시험이 다 끝난 것은 아니지요. 어른이 되고 나서도 여러 가지 시험을 치를 수 있습니다.
각종의 자격증 시험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쩌면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운전면허 시험은 그래서 더욱 스트레스를 주기도 합니다. 누구는 그다지 애쓴 것도 없는데 단번에 따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2종 보통을 취득하는데 다섯 번, 1종 보통을 얻는데 역시 다섯 번을 치렀습니다. 당시는 운전면허 시험장이 가까이 있지를 않았습니다. 부천에 살았는데 근처에 면허시험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2종을 따느라 인천 끄트머리 송도까지 가야 했고 1종을 따기 위해서는 의정부까지 가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교통이라도 편하지 30년 전 그 때는 한번 다녀오면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것을 다섯 번씩 다녀와야 했다는 것,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지요. 그러니 그 면허증을 땄을 때의 감격 또한 대단했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면허증 취득하였다고 끝나는 일입니까? 막상 차를 가지고 도로로 나가니 또 다른 스트레스가 몰려오지요. 운전 한번 하고 나면 온 몸이 굳어집니다. ‘초보운전’ 딱지를 붙이고 한 달을 다녔습니다.
‘초보운전’은 시간이 흐르면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실제로 운전을 해야 되겠지요. 흔히 말하는 장롱 속 면허증도 많습니다. 그 사람은 ‘초보운전’ 딱지조차 붙이지도 못한 사람입니다. 자격증 시대라고 하지만 수많은 자격증이 그렇게 사장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용하지 않는 자격증이나 면허증은 휴지만도 못하지요. 아무튼 시작을 하여 운행을 하면 언제고 초보운전은 끝나는 것입니다. 차츰 전문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만큼 지식과 경험이 늘어갑니다. 그럼에도 계속 초보를 달고 다닌다면 우습지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임을 말씀합니다. 히 6 : 1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말씀하지요. 역사적으로는 약 2천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다녀가시고 기독교가 출발하여 그만한 세월이 흘렀다면 이제 초보는 지나고도 한참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 믿고 5년, 10년 아니면 2,30년 그만한 세월이 지났다면 진작 초보는 떼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전히 초보에 매달려 있다면 우리 주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아멘!
그렇다면 그리스도 도의 초보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지요. 다시 한 번 읽습니다. 히 6 : 1 - 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찌니라” 그리스도 도의 초보 다시 말하면 기독교 교리의 초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무엇입니까? 죽은 행실의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들, 안수,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심판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출석하면서 익히 들어왔던 교훈의 말씀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 반복해서 가르치고 들어왔고 여전히 그 안에서 뱅뱅 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그 초보에서 벗어나 완전한 데로 나아가자는 말씀입니다. 바울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고전 13 : 9 - 11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러니 어린아이 일을 버리고 어른이 되자, 그 말입니다.
운전이 익숙해지면 ‘초보운전’이라는 딱지를 버려야 하듯이 장성하면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이 혹시 계속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는 말이지요. 나이를 먹고 몸이 자라감에도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 그리고 하는 짓이 어린아이라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속이 타겠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또한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계획에는 추수 때인데 계속 씨만 뿌리고 있다면 기막힐 일 아닙니까? 언제까지 씨만 뿌릴 것입니까? 물론 그 마지막 때, 추수 때는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6 :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지금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깨달으면 됩니다. 얼마 전 어느 목사님이 기고한 글을 보니 요즘 교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탄식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말씀이 없다는 뜻이지요. 하나님도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암 8 :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물론 교회는 때마다 설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을 전하고 있으니 말씀의 기갈이지요.
예수님은 시대를 분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도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지요. 때를 잘 타면 권세도 차지할 수 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바라는 일들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영생을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때를 분별해야 하고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이 오는 것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24 : 42 - 44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아멘!
그 날이 도적 같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다릅니다. 살전 5 :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즉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적을 맞듯이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깨닫고 시대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살전 5 : 5 - 6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그런데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고 자신합니까? 사실 육신의 나이는 먹었는지 모르지만 본인의 신앙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이라도 해봅니까? 교회 20년쯤 다녔으니 이제는 당연히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이 육체의 나이 먹듯 자연히 먹는 일입니까?
잠깐 성경 역사를 전체적으로 개관해 봅니다. 하나님은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있는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당신의 목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하셨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즉 도를 배반하였습니다. 배도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의 실패 다음으로 노아, 그리고 노아의 후손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택하사 그를 시점으로 이스라엘을 만드십니다. 애굽에 가서 번성시키고 모세를 보내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십니다. 그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그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배도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결국 세워주신 이스라엘 나라는 망하고 끝납니다. 그래서 아담부터 아브라함을 거쳐 혈통으로 이어졌던 육적 이스라엘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를 이루려 했던 제사제도도 여기서 끝나게 됩니다. 율법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이지요. 육적 이스라엘의 종말, 율법시대의 종말입니다. 사실 율법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롬 3 :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실제로 그랬습니다.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은 그린자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는 혈통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마 1 :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바로 영적 이스라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 1 : 12 - 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렇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12 지파에 속하여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는 끝났습니다. 롬 3 : 21 - 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아멘!
죄의 문제도 다르게 끝났습니다. 짐승의 피로 속죄를 이루려던 육적 이스라엘의 시대가 끝난 것이지요. 짐승의 피로는 우리의 죄가 완전히 씻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히 10 : 8 - 10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할!
옛날 야곱 즉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12지파가 생겨났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12 제자가 탄생하였고 그들을 통하여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도 그 은혜를 입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약 2천 년의 역사를 안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긴 세월 세상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미 뿌려진 씨는 진작 열매를 맺어 추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씨만 뿌리는 역사가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은 추수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지요. 추수가 없다면 씨를 뿌릴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이 씨를 뿌리게 하셨다면 추수할 때가 있다는 뜻이지요. 문제는 그 추수할 밭에 곡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주님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이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그곳에 같이 뿌렸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미리 다 뽑아버리면 좋겠지만 그러다가 곡식까지 뽑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3 : 29 - 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어떤 그리스도인은 질문합니다. 왜 하필 지금이 추수 때라고 이야기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 언제가 되어야 마음에 들겠습니까?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저 팔레스타인에 있는 이스라엘입니까?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까? 왜 하필 지금이냐고요? 그러면 언제라고 해야 맘에 들겠습니까? 다시 천 년 후쯤이면 좋겠습니까? 부흥회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천국에 대해서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합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 엄청 좋은 곳입니다 하고 열심히 설교합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당장 천국에 가고 싶은 분 있습니까? 하고 질문하면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습니다. 왜 그러죠? 죽기는 싫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아무리 기다린다고 해도 사실은 기다립니까, 안 기다립니까? 기다리기는 뭘 기다립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마음인데 주님 다시 오실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입으로는 오시옵소서 해도 마음은 딴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웬만큼 힘든 삶이 아니라면 속으로는 ‘주님 다시 안 오셔도 됩니다,’ 하고 사는 신자들 많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래서 시대를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를 분별하려면 초보신앙만 가지고는 힘들다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나간 역사와 교훈만 들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아야 하지요. 그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 예언의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언은 장래의 일을 미리 말씀하신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즉 실제로, 실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듭니다. 사 7 :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를 통해 주신 예언입니다. 그리고 마 1 :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이것이 역사 속에 나타난 실상입니다. 동거하기 전에 즉 처녀로써 잉태한 것입니다. 앞의 말씀은 예언이고 뒤의 말씀은 성취된 내용입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예언해주신 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으로 자부하고 신앙하던 이스라엘 백성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그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참 이상하지요? 그렇게 메시야를 기다리며 신앙했는데 왜 정작 오니까 안 믿습니까? 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행 13 : 26 - 27 “형제들 아브라함의 후예와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한 마디로 ‘몰라서’ 오신 메시야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오실 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 보신 적 있습니까? 기독교백화점에 걸려있는 예수님 초상화 생각하면서 기다리십니까? 그런 모습으로 오실까요? 참 어린아이처럼 순진하십니다. 아니 그것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다고 해야 맞습니다. 정말 무식한 거죠. 그 초상화 그린 화가는 예수님을 실제로 보고 그렸을까요? 미안하지만 자기 멋대로 상상해서 그린 것입니다. 자기 예수님이지 우리 예수님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도 그 때처럼 그 모습으로 오실까요? 또 육신을 입고 오실까요? 오셔서 또 한 번 죽으시려고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무식하게 신앙하고 있는지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오죽하면 우리 하나님이 당신 백성이 무식한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 지식이 세상 지식이겠습니까? 또 여기 한 가지 더 주의해둘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말씀)을 버리면 하나님은 우리 자식을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식하면 나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망하게 만드는 겁니다.
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언이 실상으로 나타날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밀이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집에 아무나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즘 아파트마다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자기 집 비밀번호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이 다 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아무나 들어와서 다 가져갈 것입니다. 그러면 안 되겠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마귀와 그 자식들이 들어가면 안 되겠지요. 그러므로 비밀로 감추어둔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그것을 봉한 책이라 표현합니다(사 29 : 11). 그러면 누군가 그것을 펼쳐서 가르쳐주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은 너도나도 아무나에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마귀도 알게 될 테니까요. 마 13 :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렇습니다. 허락된 자들에게만 알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천국 비밀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언이지요. 그렇다면 실상으로 나타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물론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장래 일어날 일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여기에 실상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역시 봉한 책이나 마찬가지지요. 그 사실을 알고서 당시 사도 요한도 울었습니다. 계 5 :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그랬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인을 하나하나 떼서 천사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그 열린 책을 사도 요한에게 주시지요. 계 10 :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즉 계 1 : 1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그 다음 천사에게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그러고 나서 그 종들에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사도 요한의 사명을 가진 목자를 찾아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예언하신 그 목자를 찾아 만나면 그로부터 우리는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되고 완전한데 이릅니다. 비로소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 : 12)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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