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조선을 사로잡다
도서출판 어문학사 출간(292페이지, 올칼라)
http://blog.daum.net/amhbook/8280850
'기생'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본 한국 근대사
근대와 전통사회를 무자르듯 딱 가를 수는 없지만, 개항기 이후에서부터 해방 직전까지를 한국 근대사로 본다. 근대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한국의 근대와 서구의 근대는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날까. 여러 가지 논쟁거리가 있지만 『기생, 조선을 사로잡다』는 '기생'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국 근대사를 조망한다. 기생은 원래 조선사회에서도 존재했다. 그러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기생의 속성이 완전 탈바꿈된다.
원래 기생은 조선 사회의 전통 기예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과업을 맡았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이러한 기생의 역할은 없어지고 대신 연예인으로서의 임무가 부과된다. 즉, 전통 기예만을 담당하던 기생이 분화되어 음악, 연극, 화초 등 다방면에서 활약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당시에 존재한 다양한 기생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일제시대 왜곡된 근대화 안에서 탄생한 최초의 연예인, 기생
대한민국의 근대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일제로부터 가혹한 침탈을 당하던 시대부터 시작하였다. 일제는 조선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조선의 정치, 문화, 예술, 사회 각 방면에 걸쳐 일본식 근대화를 이식시켰다. 그들의 근대화는 오직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자신들의 제국주의 침략을 수행하기 위해 대량의 군비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군수 공장을 조선에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경제, 문화, 예술 등 사회 각계에 근대화 추진에 걸맞은 기반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조선의 전통 기예의 육성과 계승을 담당하던 ‘기생’은 일제 시대의 근대화를 거치며 그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그들은 기생이란 이름 대신 조선 최초의 ‘연예인’이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연예인이란 말은 당대에는 쓰이지 않았던 단어이지만, 연예인의 행태를 띤 기생들이 등장하였다. 전근대의 기생들은 근대화 과정의 모순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갔다. 조선시대의 전통무용이나 음악, 노래만 담당하던 기생이 음악기생, 무용기생, 극단 여배우, 대중가요 가수, 화초기생, 항일기생 등으로 분화되어 사회의 각 분야에서 신여성으로서의 놀라운 활약상을 펼친다.
오늘날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이끌어가고 육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연예인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면서 체계화된 비즈니스 산업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스포츠, 외교, 정치, 경제 등 사회 각 방면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러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원형이 일제시대에도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조선 문화 홍보대사 역할을 한 명월관 기생, 사진엽서와 전람회의 모델로 활약한 기생, 영화 ․ 연극 부문에서 여주인공으로 유명세를 탄 4인의 기생들, 대중가요 가수와 광고모델로 국민적 인기를 얻은 기생 등 당대 기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살펴보면 오늘날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한 연예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근대의 빛을 받아 화려한 인생을 살면서도, 왜곡된 근대의 그늘로 인해 고통 받는 인생을 살았던 일제시대 기생들의 삶을 21세기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것이다.
근대 대중문화계를 뒤흔든 샛별 조선 문화 홍보대사, 명월관 기생
궁중에서 일할 수 없게 된 관기들은 대다수 요릿집으로 모여들었다. 요릿집 중에서도 잘 알려진 명월관은 전국 각지는 물론 국외 프랜차이즈까지 내면서 크게 번창한다. 당시 경성은 조선의 수도로 내외인의 교류가 빈번했는데 마땅히 음식을 대접할 만한 요리점이 없었다. 그때 생긴 명월관은 청결하면서도 신식의 요리점으로서 조선식의 궁중요리를 선보였다. 또한 큰 규모의 환영식을 거행하는 데 있어서도 으뜸으로 인식되어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은 거의 명월관에서 회합을 가질 정도였다. 이러한 명월관 안에서 활동하는 명월관 기생 역시 유명세를 누리며 조선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전통 문화나 관습 등을 알리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단순히 여흥을 즐기기 위한 보조자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스포츠 선수나 요직의 인사들과 가까이 교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리는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신문 광고 문안 <동아일보> 1932년 1월 10일자 -
일본 제일의 조선요리
동경東京 명월관明月館
동경 시 고지마치 구麴町區 나가타 초永田町(山王下)
전화 긴자銀座 57-0057번, 57-3009번
최고의 역사를 두고 찬란한 광채를 가젓든 우리 문화가 세월의 추이됨을 따라 부지중 소멸 되어감은 누구나 다 통탄하는 바이외다. 그 잔해(殘骸)의 일부나마 외인(外人)에게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존재를 인식케 하는 것이 해외에 있는 우리들로서 마땅히 할 의무의 한 가지가 아닌가. 확신하여 통속적으로 고국을 선전하는 기관으로 명월관을 경영하던 바 사회의 동정과 원조를 받아 소기(所期) 이상의 성과를 얻었음으로 그의 일단을 보고함도 무익한 일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저자는 1922년 12월 9일 미국의 메이저리그 올스타 팀이 야구 시범 경기를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사례를 들어, 명월관 기생과 미국 야구 선수단의 이색적인 만남을 소개하고 있다. 명월관 기생들의 본분이 유명한 노래를 부르고, 아름다운 춤을 추어 귀빈들의 심신을 즐겁게 하는 데 있다 하지만, 기생들이 미국직업야구선수단에게 조선 춤의 대표인 검무, 승무 외에도 사고무, 춘앵전 등의 춤사위를 선보여 미국선수단을 매혹시켰다고 하니, 조선의 전통 춤과 음악을 알리는 문화 홍보대사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제 강점기 최고 히트상품, 기생 사진엽서
일제시대 조선왕조와 함께 ‘관기’는 스러져 갔다. 관기는 국가에 소속된 일종의 공인 예술가였다. 하지만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 시행령’이 제정되면서 관기 제도가 폐지되었다. 일제는 기생에 대해 철저한 통제와 감시를 하여 공연 예술가로서의 기생을 몰살한 것이다. 이윽고 일본의 제국주의는 기생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은 관기의 모습을 사진엽서에 담아 팔았는데,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연예인 브로마이드로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사진 속 기생의 이미지는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싶어 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되어 소비된 것이었다. 가장 최초의 근대 관광 산업의 부산물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전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치욕의 상징이었다.
모던걸, 신여성의 심벌이 되다
당대 기생들이 하나 같이 유흥을 즐기기 위한 문화 예술 활동을 펼쳤던 것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근대사회에서 여성들이 봉건사회의 폐쇄된 활동영역을 벗어나 다양한 사회활동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때 사회진출에 눈 뜨기 시작한 신여성으로서 앞장섰던 인물이 바로 기생이었다. 기생들은 조선의 독립운동이라든가 수재민 구호작업, 조선물산장려운동, 파업노동운동, 모금운동, 기부 등 사회운동에도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 독립운동 물결에 선봉으로 나서다
술과 웃음을 팔아 모은 90전의 돈을 모아 독립협회에 보낸 인천 상봉루의 9명의 기생, 검진을 받기 위해 자혜병원에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만세를 부른 수원기생조합 소속의 기생 일동,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쓴 빙허 현진건(玄鎭健, 1900~1943)의 형인, 남편 현정건을 따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몸 바쳐 희생한 현계옥(玄桂玉) 등 수많은 기생들이 조선의 독립투사로 활동하였다.
⇒ 사회·노동운동가로서 투쟁한 기생
이뿐만 아니라 1925년 한강이 범람하였던 을축년 대홍수 때 수천의 가옥이 유실되고 사상 최대의 수재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 최초의 여기자 추계 최은희 지도로 명월관 기생들이 동원되어 수재민 구호작업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1920년대 기생들은 사회봉사활동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재주를 자선행사와 모금운동 등에 활용하기도 하였다. 공연 수입으로 수해의연금 또는 유치원 기금 등에 내어놓은 것이다. 1936년에 안악권번의 기생 최금홍崔錦紅은 안악에 고등 보통학교를 설립하는 데 적은 돈이나마 써달라고 하면서 현금 100원을 희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기생들은 사회의 모순된 구조가 그들에게 덧씌운 유녀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깨뜨리고 사회의 공익을 위해 일하는 당당한 일원으로서 비춰지길 원했다.
⇒ 기생의 자유연애론, 기생 강명화의 죽음의 연애
한편 당대 기생들을 신여성, 모던걸이라 부르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자유연애자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자유연애는 일반 여염집 여성들보다는 기생들에게 훨씬 더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자유연애의 시초로 잘 알려진 인물로는 이미 여러 매스컴에서도 잘 알려진 강명화가 있다. 당시 강명화의 이야기는 일제가 구국운동의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의 자살을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보도한 면도 없지 않으나, 기생이라는 꼬리표가 그녀의 삶에 평생토록 따라다녔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가 음반으로 나오고, 그녀에 대한 책도 출판되는 등 큰 이슈를 불러왔다.
또 강명화는 당시 여자의 몸으로 단발을 하고 손가락을 잘랐다 하여 세간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단발과 단지(斷指) 같은 독한 행위를 감행한 동기도 역시 연인 장병천을 위한 것이었다. 장병천이 기생의 몸인 자기의 신용을 믿지 않을까 의심하여 삼단 같은 머리채도 아낌없이 잘라버리고, 병천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손가락 하나쯤 잘라내도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기생 강명화의 일화는 오늘날까지도 회자되어 당시 자유연애의 한 단면을 짐작하게 한다.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비운의 여배우 4人
한편 영화, 연극 부문으로 진출한 기생들도 눈여겨 볼만하다. 당시 영화 여배우로 트로이카를 이루었던 기생 이월화, 석금성, 복혜숙 등과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에 출연한 기생 신일선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로 등극하여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화려한 전성기와는 달리 기구한 운명 탓에 외로운 말년을 보내게 되었다.
⇒ 여자로서 최초로 카메라 앞에 선 배우인 기생 이월화
이월화는 여배우가 등장할 수 없었던 인습을 깨고 최초로 카메라 앞에 등장하였다.
그녀는 조선 키네마 최초의 영화 <해海의 비곡悲曲>(1924년)에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영화의 초창기에 여배우를 쓰는 일조차 획기적이었다. 남자를 유혹하는 타락한 여성이나 남자들의 싸움에 희생되는 청순가련형이 등장하는 영화가 대부분이었던 때, 연극배우로 연기력을 인정받아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영화배우로 성공했던 것이다.
⇒ “웃음 속에 피어나는 눈물”의 배우, 기생 석금성
석금성은 신극 초창기 여배우의 한 사람으로 타계할 때까지 인기를 누린 최장수 여배우였다. 무성영화와 흑백·컬러 영화 시대 및 텔레비전 시대를 섭렵한 한국 영화계의 증인이었다. 그녀는 1925년 광무대(光武臺) 공연의 <추풍감별곡>의 주역인 추향(秋香)을 맡아 데뷔 공연을 가진 뒤 <간난이의 설움>, <스잔나>, <카추샤>, <희생하든 날 밤>, <춘향전>, <산 송장>, <쟌발쟌>, <혈육> 등에 출연하여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녀는 첫 무대부터 개성파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연극 무대의 신데렐라로 선배 복혜숙과 쌍벽을 이루면서 세간의 이목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과 재혼했는데, 그는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로 ‘한국 최초의 PD’로 불린다. 최승일이 동생 최승희를 뒷바라지하며 8·15 해방 후에도 월남하지 않자, 1948년 4남매를 모두 아버지가 있는 북으로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 영화 <아리랑>이 만들어낸 스타, 기생 신일선
신일선을 대형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는 바로 처음 출연한, 무성영화 시대의 최고 명작인 <아리랑>이었다. 4개월 만에 만들어진 <아리랑>이 개봉되자 장안의 화제는 모두 이 영화에 집중됐다. 그 후에도 계속 인기를 끌어 전국 방방곡곡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다. <아리랑>이 만들어진 1926년 한 해, 신일선은 나운규가 만든 <풍운아>와 이경손이 만든 <봉황의 면류관>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다. 1927년에는 <괴인의 정체>, <들쥐>, <금붕어>, <먼동이 틀 때>에 출연했다. 1926년과 1927년, 두 해 동안 제작된 한국영화가 총 16편이었는데, 신일선이 총 7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 팜므파탈의 인텔리 배우, 기생 복혜숙
복혜숙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3년까지 마치고, 일본 요코하마의 ‘고등여자기예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토월회>에서 10년간 신극운동을 하다가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는 재원이었다. 아버지가 세운 강원도 금성학교 교원으로 잠시 근무하기도 하는데, 연극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가출한 뒤 서울의 단성사를 찾아간다.
여배우가 귀하던 당시, 복혜숙은 거의 같은 무렵 연기 생활을 시작한 이월화(李月華)와 더불어 한국 최초의 여배우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토월회, 조선극우회, 조선영화사의 단원으로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라디오 방송 성우로도 활약하였다.
특히 복혜숙이 1928년 인사동 입구에 개업한 비너스라는 다방은 영화인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연극인, 문인, 신문기자들도 단골로 출입했다.
그녀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품으로는 1973년 최하원 감독의 <서울의 연인>이며 TV드라마는 주인공 안인숙의 할머니 역으로 나왔던 동양방송 TBC TV의 <사슴 아가씨>였다.
일제 강점기 여성들의 워너비 모델
오늘날에는 TV광고가 가장 대중적이고 효율적인 광고이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신문광고가 가장 대표적인 광고매체였다. 이 신문광고에 등장하는 광고모델은 A급 모델로서 유명 스타나 다름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기생이 등장하는 신문광고는 거의 대부분이 미용 제품에 관련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샴푸, 비누, 화장품(분) 등의 광고에는 대부분 기생이 등장한다. 기생들의 삶의 이야기와 기생이 등장하는 샴푸 광고와 화장품 광고는 곧바로 대중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광고모델인 기생은 일반 여성들에 비해 미용과 패션, 화장 등 미적인 면에서 월등히 시대를 앞서나가며 유행을 선도해 나갔다.
1920~30년대의 김태희인 얼짱 기생 장연홍은 당대 최고의 화초기생(얼굴이 매우 아름다운기생)답게 아름답고 복스런 웃음을 가져, 깨끗하고 맑은 이미지를 강조해야 하는 비누나 신제품 화장수에 잘 들어맞았다. 서울권번의 기생 김화중선(金花中仙)의 비누 광고도 뛰어났다. 노은홍을 모델로 등장시킨 ‘화왕샴푸’ 광고는 그녀의 미발의 비결을 화왕샴푸라고 소개한다(일주일 화왕샴푸로 세발하면 기분을 명랑케 하고 발륜을 빛나게 합니다). 기생의 활약은 단지 미용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김월홍, 이금도와 같은 기생은 각각 치약이나 옷을 보관할 때 쓰는 좀약과 같이 생활과 밀접한 용품의 광고에도 등장하였다.
‘타고난 방송 체질’ 대중가요 가수로 변신하다
기생들은 그들의 기예를 TV방송, 연극, 영화, 라디오를 통해 발산하기 시작했다. 라디오나 TV방송을 통해 그들의 타고난 노래 실력이나 입담을 전하여 대중들에게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였다. 기생들은 방송국이 들어서고, 음악방송이 시작되고, 음반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함과 동시에 대중가요 가수로 변신하였다.
레코드 산업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판소리와 민요 등을 일본에 가서 취입한 사람들은 당대의 명기·명창들이었다. 1925년 11월에 발매한 ‘조선소리판’이라는 레코드에, 당시의 일본 유행가를 처음 우리말로 부른 노래인 <시들은 방초>를 취입한 사람이 기생 도월색(都月色)이었다. 또 하나의 대중가요 <장한몽>은 김산월(金山月)이 불렀는데, 그녀 역시 기생이었다. 나아가 1930년대 이후 레코드 산업이 본격화되자, 당대 명기·명창들은 서둘러 레코드 업계로 진출한다.
대중가요 가수로 변신한 대표적인 여가수로는 왕수복이 있다. 레코드 판매 매수도 조선 레코드계에 있어서 최고를 기록했다. 이외에도 선우일선, 최연연, 김연월, 한정옥, 김복희, 최명주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왕수복은 일제 강점기 권번 출신의 인기 가수로, 신민요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유행가나 신가요와 같은 새 노래들을 부른다. 1930년대 후반 비권번 출신의 신진 남녀 가수의 등장 이전까지 작사자와 작곡가에 의해서 창작된 유행가와 신가요의 가수로 활약함으로써, 일제 강점기 가요사의 전환기적 임무를 수행한 주인공이다. 뒤를 이어 등장한 비권번 출신의 신진 남녀 가수들이 주로 유행가와 유행소곡 또는 신가요의 가수로 데뷔했다. 기생은 조선의 근대음악사를 새로 쓴 대중가수이기도 한 것이다.
공연예술가로서의 기생과 레뷰 댄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전통 공연 예술의 춤사위 계승자는 권번 기생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중의 관기들이 민간으로 나오면서 요릿집 무대에서 궁중 무용 공연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이쇼 시대(1912~1925년)에 재즈(jazz)와 서양 댄스가 수입된다. 이때 유학생들은 고풍스러운 기생의 요릿집이 아니라 댄스홀, 카페, 다방으로 몰려간다. 이 때문에 기생들의 춤도 변한다. 손님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공연 춤사위도 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뷰 춤이란 레뷰(Revue)에서 추는 춤을 말한다. 레뷰는 ‘드라마, 희극, 오페라, 발레, 재즈 등의 여러 가지 요소를 취하고, 음악과 춤을 뒤섞어 호화찬란한 연출을 하는 무대예술’을 말한다. 레뷰 춤은 전문적인 발레나 모던 댄스가 아니고 쇼에서 추는 흥미 위주의 춤이었다. 무거운 주제나 소재를 다루기보다는 관객의 관심을 끌만한 가벼운 테마를 화려하고 재미있게 다룬 춤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레뷰 춤은 1913년 덴까스에 의해 처음 소개된 이후, 1920년을 전후해서 사교춤, 외국 민속춤 등의 서양 춤이 다양하게 수입되기 시작하면서 대개는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 따라서 덴까스 곡예단이 추었던 춤들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레뷰 춤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대 초반까지 덴까스 곡예단에 의해 추어진 <서양춤>, <우의무> 혹은 <호접무>, <바다의 마녀>, <청춘댄스>, <역광선을 이용한 댄스> 등은 우리나라에서 추어진 레뷰 춤들이다. 1930년대에 악극이 등장하면서 재즈나 탭댄스가 추어져 기생들이 레뷰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레뷰 춤은 대중화되었다.
일제 강점기 1920년대 후반까지 레뷰 춤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에 기생들이 레뷰 춤을 추기 시작하면서 대중화된 것이다. 레뷰 춤은 일제 시대가 끝남과 동시에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 명맥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졌다.
그러면 그 레뷰 춤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흔적을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1964년 12월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1인 MC로 50분 동안 진행한 ‘쇼쇼쇼’ 프로그램이다. 동양방송(TBC)의 개국과 함께 시작되어 1983년 8월까지 방영한 장수 프로그램이었다. 동양방송은 다른 방송국보다 압도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그때 당시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바로 ‘쇼쇼쇼’였다.
기생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전통악기의 선율
오늘날 국악에서 여성 음악가의 전성시대를 맞게 된 배경을 논함에 있어 일제 강점기 기생의 활약상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여류 명창 중에는 기생 출신자가 많았는데, 그들이 진정 예술가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회적 차별의 한 단면이었다. 창악계에 떨친 기생들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재검토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이처럼 권번 기생들은 각종 공연을 통하여 전통예능교육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 공연의 명목은 ‘음악무도대회’, ‘기생조합연구회’, ‘고아원 및 학원후원연주회’, ‘이재민구조연주회’ 등 다양한 타이틀로 공연되었다. 음악무도대회는 대중적인 연예물과 민속 예능 중심의 공연이었다. 기생들의 공연에서 가장 비중 있는 연주회가 바로 기생조합연주회였다.
전통공연예술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
권번에서는 성악으로 여창가곡, 가사, 시조, 남도소리, 서도소리, 경기십이잡가, 잡가 등을, 악기로는 가야금, 거문고, 양금, 장구 등을 가르쳤다. 또 춤은 궁중 무용과 민속 무용을 망라했고, 그 밖에 서양 댄스와 서화를 가르쳤다.
권번에서 기생들이 갖춘 것은 분명 남자들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기교가 아니라 예술 활동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권번은 곧 기생들의 학교인 동시에 오늘날로 말할 것 같으면 소위 연예기획사 연습실이라 할 수 있다. 전통예능 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권번은 곧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삶의 체취를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레코드, 축음기의 보급은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그 레코드 가요를 소비하는 팬의 주축은 기생들이었다. 기생들은 레코드에서 배운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에 도움을 주었으므로, 레코드 회사에서 보면 큰 고객이었다.
이처럼 ‘쇼쇼쇼’는 당시에 춤과 노래, 코미디를 결합한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이었다. 1930년대 악극의 만담, 노래, 막간 노래, 춤 등의 모습과 유랑 극단, 레코드 가수의 지방 순회공연 등에서의 레뷰 춤이 ‘쇼쇼쇼’로 이어졌다. 동양방송이 KBS에 인수된 후에도 ‘쇼쇼쇼’는 계속되어 총 19년간 913회가 방송되었다. 후에 ‘쇼 일요특급’이 후속 프로그램으로 제작되었다.
이렇듯 조선 문화 홍보대사 역할을 한 명월관 기생, 사진엽서와 전람회의 모델로 활약한 기생, 영화·연극 부문에서 여주인공으로 유명세를 탄 4인의 기생들, 대중가요 가수와 광고모델로 국민적 인기를 얻은 기생 등 여러 가지의 모습을 한 기생이 책을 통해 다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