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 면, 목화 ... 면소재들입니다.
왜 현시대는 면까지 비쌀까 ?
무명
1. 광목 : 날실과 시실을 무명실로 하여 짠 무명천으로, 한국 재래 무명보다 면을 넓게 하여 방직기계로 짠 면직물로 광폭이 넓은 면직물이라는뚯
2. 소창 : 면방적사가 평직으로 짠 면직물인데 표백하여 흰색으로 사용한다.
3. 무명 : 원래 수직기인 재래식 베틀로 제직 된 면 평 직물이라는뚯으로 쓰되
면이란 말 대신 무명이라고 쓴다
서민들이 주로 입은 것들이고 현시대도 면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진아영 할머니는 제주4·3 당시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군경 토벌대 총격에 아래턱을 잃었다.
그는 2004년 아흔 살에 모진 인생이 다할 때까지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살아왔다.
다시 4월입니다.
아름답지만 너무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곳, 제주.
지금쯤 제주는 붉은 동백꽃 떨어지고 노란 유채꽃 만발하겠지요.
아직 제대로 된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그 일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두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무명천 할머니/ 정란희 글, 양상용 그림>/는 총탄에 턱을 잃고 평생 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살아야 했던
진아영 할머니를 통해 비극적인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르는 아이/ 장성자 글>는 뭉클한 감동이 있습니다.
그 잔인하고 참혹한 현장에서도 공동체가 살아있음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에게 총을 겨눴던 자들이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쓰러지고 죽어가면서도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결국은 누구의 명령인가 ? 지금의 전시장소를 쫓아다니면서 밤업소타령하는 것들이 대통령이고 노래불러 떠들과 다니는것들이 대통령부인이고 사치허영을 일삼는것도 그들인데 말입니다.
제주 4.3사태 정부새끼들 ... 이시대 이러다 이러한것들 나올라 ???? 하는짓들이....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5] 무려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여순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이런 여러 사건 중에 제주 4·3 사건은 사망자 숫자 자체를 비교하면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당시 미군정과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이를 상대한 남조선로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기 때문이었다.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다.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165p)으로 판단하고 있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6],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하였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고,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시켰다.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였다.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동시에 해안 마을에서도 ‘북촌사건’과 같은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다. 무장대 역시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 대한 살해를 저질렀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다.[7]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위원회에 심의·결정된 민간인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다. 특히 초토화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다
제주 4.3 사건 - 나무위키 (namu.wiki)
목화
내용
면직물은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에 면포(綿布) · 목(木)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색 · 품질 · 용도에 따라서 백면포 · 구승백면포 · 목홍면포 · 오색목 · 백목 · 극세목 · 백세목 · 관목 · 생상목 · 홍세목 · 황세목 · 초록목 · 남목 · 자목 · 홍목 · 흑목 · 아청목 등 각양각색으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서는 재래식 베틀로 제직된 면평 직물이 무명으로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명은 광목(廣木) · 옥양목(玉洋木) · 서양목과 같은 면직물과 구별되어 명명된 우리나라의 토속 직물로서, 실용적인 춘하추동의 의복 재료 및 침구, 기타 생활용품 자료로 가장 많이 이용된 직물이다.
무명의 품질은 승 수(升數)로서 가름하는데(승 수를 샛 수라고도 한다.), 보통 일곱 새 정도가 튼튼하고 실용적이어서 실용적인 생활복에 많이 이용되었다. 열두 새, 보름 새는 섬세직에 들고 오늘날에는 열두 새가 극상이다. 조선시대의 『고사통(故事通)』에는 21승 면포가 기록되어 있다.
면화는 재래종과 육지면이 사용되었는데 무명은 주로 고지피움헤바시움(Gossypiumherbaceum)인 재래종 면화에서 실을 뽑아 짰다. 너비는 32∼36㎝(7寸) 내외였고, 한 필의 길이는 20m(40尺) 내외였다.
무명은 소색(素色)으로 짜서 표백해 사용하거나, 염색해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소색으로 짜지는 않았다. 평안도 지역에서는 염색된 면사로 배색해 호직물(縞織物)로 짠 다양한 무명이 생산되었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도 번우(番愚) 지역에는 본래 푸르고, 붉고, 흰 세 종류의 무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중 흰 것만이 전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무명의 색이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무명은 조선 태종 때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면 종자와 제직 기술도 전파시켰다. 그리하여 일본인들도 면직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부터는 오히려 일본 면포와 공장제 제직 기술이 역전파되어 우리나라의 무명 생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명은 질박하고 무기교하며 소백하고, 또 물레로 실을 자으므로 불규칙한 굵기 때문에 표면에 변화가 있어, 그 질감과 색감, 미적 특성이 우리 민족의 감각에 합당해 오랫동안 자동직기로 제직된 값싼 면포를 압도해 많이 사용되었던 옷감이다.
무명으로 옷을 지으려면 먼저 물에 담가서 날실 날기 때 먹인 풀을 깨끗이 뽑고 잘 세탁해 삶아서 널어 말린다. 그 뒤 다시 쌀풀을 먹여 양지에서 말린 다음,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아서 다리거나 다듬이질해 사용한다. 색무명으로 사용할 경우는 풀을 빼고 세탁해 양지에서 말린 다음 염색하고 풀 먹여서 다리거나 다듬이질을 한다.
무명으로 옷을 지을 때 겨울옷은 솜을 두어 겹으로 지었으며, 봄 · 가을 것은 그냥 겹으로 지었고, 여름옷은 홑으로 지었다.
무명은 자동직기로 제직된 면직물인 광목 · 옥양목 등이 범람한 때도 농가에서 부녀자들에 의해 제직되어 자급자족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무형유산으로, 또한 일부 지역에서만 전승되고 있다.
국가유산 사적지인 목면시배유지는 고려시대 학자이자 문신인 삼우당 문익점(1329~1398) 선생이 1363년(공민왕 12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때 가지고 온 목화 씨앗 10톨을 장인 정천익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재배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문익점 선생이 심은 5알은 모두 죽었고 정천익이 심은 5알 가운데 유일하게 한 알이 살아 목화가 전국으로 퍼진 것으로 전해진다.
산청지역 사림과 후손 등은 문익점 선생의 고향인 단성면 사월리 목화를 처음 재배한 터에 1965년 사적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도 시배유지를 국가사적 제108호로 지정한데 이어 1997년 목화시배지 전시관 등을 건립했다.
산청군 관계자는 “목화축제는 산청출신 문익점 선생의 애민정신을 기리고 사라져 가는 무명베짜기를 계승하는 의미 있는 행사이다”고 말했다.
개요
목화(木花)는 쌍떡잎식물 아욱목 아욱과 한해살이풀의 총칭이다.
이것이 씨앗을 맺을 때 생기는 털을 이용해 솜과 무명천을 만든다. 씨앗으로는 기름을 짜는데, 면실유라고 한다. 시중에 파는 식용유 중에 있으며 한때 참치캔을 채우고 있는 기름이었으나 유채꽃씨유(카놀라유)로 대체되었다.
덜 익은 열매는 먹을 수 있는데, 달큰한 맛이 다래와 비슷하다 하여 목화다래, 실다래라고 한다. 이 외에도 노인들은 '면화다래'나 '청면'(덜익은 면)이라고 하기도 했다. 다만 풋내가 나고 특유의 섬유질이 입 속에 많이 남기 때문에 식감은 좋지 않은 편. 그래도 단 걸 찾기 힘들던 1950~70년대생들은 이런 걸로 군것질을 하고는 했다.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 목화를 키우는 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국내
고려 시절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이것을 가지고 온 것으로 유명했지만, 2010년 백제 시대의 면직물이 출토되면서 목화 도입의 원조를 내놓아야 할 판이다.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목화는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인 인도의 고원지대가 원산지인 만큼 장마와 사계절이 뚜렷한 한반도의 기후와는 잘 맞지 않아 극소수만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런 희소성으로 인해 그 용도 또한 높으신 분들의 사치품이나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당장 면직물 유물이 출토된 곳을 보면 절터란 걸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이나 귀족의 원찰이었다면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 그리고 백제 이후로도 삼국사기 색복지를 보면 통일신라 중기 사람들의 복식으로 견직물, 삼베, 소가죽 등이 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문익점 이전에 면직물이 존재했다 쳐도 그다지 대중적이진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동북아시아 기후에 맞게 개량된 퍼진 중국제 종자를 들여와 서민 계층에 대중화한 것은 여전히 문익점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로 덕분인지 조선 시대에는 공신으로 꼽혔다.[5]
다만 위인전에 나오는 것처럼 붓두껍에 숨겨서 목숨 걸고 가져온 것은 아니다. 문익점의 목화와 관련해서 3대 거짓 정보가 있는데, '중국의 강남으로 3년간 유배', '붓두껍', 그리고 '목화는 수출 금지 품목'이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서 후손들이 점점 부풀린 케이스. 세종, 세조실록에서도 이 이야기는 많이 인용되고 있으니 전형적으로 성공한 사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서 강남 드립이라거나,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라서 폄하당했다거나 하는 것이 왜 의미없는 이야기인지는 문익점 문서를 참고.
여담으로 비단을 중국이 독점하기 위해 누에의 밀반출을 금한 적이 있는데, 동로마 제국의 사신이 위의 일화처럼 지팡이 같은 곳에 누에 알을 숨겨서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누에 재배에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목화 씨 밀반입 일화의 모티브가 되었을 거라 추측할 수 있다. 둘 다 직물 원료이기도 하고...
목화의 전래가 기존의 삼베옷보다 백성을 따뜻하게 해준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화로 만드는 무명천은 비쌌고, 조선시대에는 이 무명천으로 화폐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평통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조선의 기축통화나 다름 없었다.[6] 그러니 일반 평민들은 겨울나기 옷 몇벌을 가지는 정도가 일반적이었고 설빔이라 해서 새해 첫날에 옷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던것도 옷을 짜내는것이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옷을 시장에서 사입는것도 부담되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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