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도(生死島) 2-24
실수했다는 것을 곧 뉘우쳤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청향
은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차라리 이자리에서 죽으면 죽었지, 적
음상을 따라 평생을 산 속에 갇혀 지내기는 싫었다.
『육초량.. 육가가는 나의 정혼자예요. 이미 선대로부터 약속된
일이고, 그는 나를 깊이 사랑하며 나 또한 그를 원해요. 그런데
내가 어찌 당신을 따라 영원히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살 수 있겠어
요?』
『흐흐흐.... 육초량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지. 요즈음 한창 입
에 오르내리더군. 사자검(獅子劍)이라던가?』
『사자검(獅子劍)...?』
어느새 그에게 그런 별호가 붙여졌던가, 청향은 그에게 잘 어
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자 더욱 그가 그리워졌다. 그런 청향의
얼굴을 보던 적음상이 더욱 짙어진 적의를 드러냈다.
『흐흐.... 그 애송이가 낭자의 정인이란 말이지? 좋아 놈을 찾
아 그대가 보는 앞에서 일검에 베어 주지. 그러면 놈에 대한 미
련도 사라지겠지?』
청향은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육초량이 과연 이 흉악한 자를
이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괜한 말을 해 가지고 육가가에게 화를 불러다 준 것은 아닌
지...)
청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적음상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좋아, 놈을 찾는다. 찾아서 죽인다. 자, 어서 갑시다!』
그가 거칠게 청향을 이끌었다. 청향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마음 속에 육초량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지만, 이 자를 끌고 그
에게 갈 수는 없었다.
『싫어요, 놔요!』
몸부림치며 뿌리쳤지만 적음상의 굳센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가
없었다. 그가 더욱 흉흉한 살기를 드러내며 발작하려 할 때였다.
『적음상! 드디어 네놈을 찾았다!』
원한에 사무친 외침과 함께 송림을 뚫고 비조처럼 날아오는 사
람이 있었다.
『헛, 독고월!』
적음상의 눈에 당혹감이 어렸다.
순식간에 다가온 독고월의 무서운 눈이 잡아먹을 듯 적음상을
노려보았다. 광인처럼 어지럽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이글
거리는 그 눈을 보며 적음상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이 며
칠 동안 많은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초췌하게 야윈 얼굴이 그를
더욱 냉혹해 보이게 했다.
『으음... 정말 찰거머리 같은 놈이로구나...』
입술을 악문 적음상이 청향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좋다, 이 지겨운 놈. 내가 네놈이 무서워서 피하기만 한 줄
알았다면 큰 오해다. 마음 속에 있는 한 가닥 미안함 때문이었지
만, 이제는 더 이상 도망 다니는 일도 지겹다. 여기서 네놈이 죽
든 내가 죽든 결판을 내고 말자.』
적음상이 이를 악물고 나섰다. 그의 손이 허리의 검을 잡고 있
었다. 독고월도 품에 손을 넣은 채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
다. 그에게는 지금 오직 적음상만이 보일 뿐, 세상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듯했다.
옥청향은 그들의 모습에서 숨막히는 긴장을 느끼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적음상에게 있어서 독고월은 그야말로 천적(天敵)이었
다. 자신의 쾌검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빠르게 날아드는 독고월
의 마비(魔匕)에 대해서는 왠지 한풀 꺾이는 적음상이었던 것이
다.
『흐흐흐... 드디어 아내와 딸의 원수를 갚는구나.』
독고월이 한 발을 미끄러뜨리듯 부드럽게 뒤로 물렸다. 그의
몸놀림에서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며 적음상이 긴장으로 어깨
를 떨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끝나 버릴 싸움이었다. 오직 한 번
의 기회만이 서로에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적음상도 독고월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팽팽한 긴장이 곧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누구도 이 승부를 예
측할수 없을 것이었다. 적음상도, 독고월도, 불타는 적의와 살기
가 있을지언정 서로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것이 지금 그들
을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면으로 부딪치기는 처음인 그들이었다. 한 쪽은 늘
서둘러 쫓고, 한 쪽은 그에 대해 늘 바삐 달아나며 급하게 치고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정면으로 마주서서 서로의 기세를
읽고 나자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독고월에게 있어서 적음상이 과연 얼마나 빠르게 검을 뽑아 칠
것인가가 최대의 관심이었다면, 적음상은 품에 넣고 있는 독고월
의 손안에 몇 개의 비도가 잡혀 있는지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두
개나 세개,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한
그는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제기랄, 너무 거리를 두었다.)
적음상은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다른 자와의 겨룸이라면 한
발의 차이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상대가 독고월이라면 문제
가 틀렸다. 몸을 날려 일검을 쳐내기에는 찰라의 시간이 더 필요
하고, 그 시간이면 독고월의 비도가 더 빨리 날아들지도 모르는
것이다.
적음상의 눈빛이 흔들린 순간, 독고월의 어깨가 경련하듯 움찔
떨렸다.
팟-!
헛것을 본듯 가볍게 번쩍이고는 사라져 버리는 섬광이 있었다.
흔적도 소리도 없었다.
(네 개!)
그 일수유(一須臾)의 순간에 적음상은 독고월의 손끝을 떠난
비도의 수를 정확히 읽었다.
쉭-!
검이 순간적으로 뽑혀 나가자 검집에서 가볍게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적음상의 허리에서 한 줄기 섬광이
뿜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따당!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
졌다.
(막았다!)
동시에 네 개의 비수를 쳐낸 것이다. 내심 이겼다는 기쁨으로
부르짖으며 도약하려던 적음상이 급히 목을 들이밀고 허리를 숙
였다.
씨이이-
소리 없이 날아든 다섯 번째의 비도가 그의 머리카락 몇 올을
절단 내며 스쳐갔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쭉, 흘렀다.
(무서운 놈!)
적음상이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그는 쾌검의 달인이었다. 쾌검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 눈이 빠르고, 순간적인 순발력과 판단력이 뛰어나야 했다. 그
리고 그 방면에 있어서 적음상은 가히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어
있었다. 그런데도 독고월이 그의 눈과 귀를 속이고 비도를 날려
온 것이다. 적음상은 처음으로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청향의 손을 잡고,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을 막 바꾼 적음상이
었다. 그것을 포기하고 여기서 독고월과 목숨을 건 싸움을 계속
할 의미가 없었다.
『앗!』
독고월이 놀람의 외침을 터뜨렸다. 곧장 달려들 듯하던 적음상
이 몸을 뒤집어 물러서며 청향을 낚아채서는 번개처럼 달아났던
것이다.
경공 조예에 있어서만은 적음상이 한 수 위인 게 분명했다. 청
향을 옆구리에 끼고 있으면서도 그의 질풍처럼 내달리는 속도는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 교활한 놈!』
부르짖으며 맹렬히 뒤쫓아갔으나 그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지기
만 했다.
* * * *
『비켜라!』
적음상이 사납게 소리쳤다. 멀찍이 독고월을 따돌리고 한숨을
돌리려고 할 때였다. 커다란 바위 뒤에서 성큼 걸어나온 죽립의
사내가 앞을 가로막고 섰던 것이다. 죽립 아래로 깎은 듯 아름다
운 턱이 드러나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청향으로 하여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곳에서 형을 다시 보게 되다니... 하하, 이것도 운명인
가 보오.』
사내가 가볍게 웃으며 죽립을 들어 올렸다. 옥청향은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아, 하고 탄성을 발했다.
(어쩜 사내가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우수에 젖은 눈과, 귀인의 우아함을 지니고 있는 사내였다. 흰
얼굴에 붉은 입술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청향이 놀람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적음상은 몹시 당황한 듯 주춤거리
며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너, 너... 초유성!』
떨리는 음성으로 그가 부르짖었다.
(아, 저 사내가 우객 초유성?)
청향이 의외라는 듯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움과 짙은 허무의 기운이 가슴에 뭉클한 감
동으로 와 닿았다.
『형, 오래간만이요.』
그가 우울하게 젖은 음성으로 인사를 했다. 적음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네놈이 어떻게..?』
『하하, 실은 주루에서부터 형의 뒤를 밟아 왔었다오.』
『주루...』
적음상은 자신의 부주의했음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음산여검이
라는 애송이와 음산삼로라는 늙은 폐물들을 베어 넘기던 그곳에
초유성도 와 있었을 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어쩔 셈이냐!』
마음이 급해졌다. 곧 독고월이 쫓아올 것이었다. 그의 초조함
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유성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청향을 돌아보
았다.
『아름다운 아가씨, 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으시오?』
청향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이 때 뿐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저 아름다운 사내가 유수검문의 계승자이고 적
음상을 패배시킨 사람이라는 것을 적음상 본인의 입으로 들어 알
고 있는 청향이었다. 그가 이렇게 앞을 가로막고 나선 것이야말
로 하늘이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 탓이라고 믿었다.
마구 고개를 끄덕이는 청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유성이 그
녀를 가리키며 가볍게 웃었다.
『하하, 형. 아가씨의 의사가 저러한데 억지로 잡아두어 무엇하
겠소? 소제의 낯을 보아서라도 그만 놓아주시구려.』
적음상이 여전히 주혜의 손목을 꽉 틀어쥔 채 다시 한 걸음 물
러서며 이를 갈았다.
『놈, 그것 때문이라면 더 말할 것 없다. 비켜라!』
그러나 초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아예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다가서며 앞을 가로막았다.
『비키지 않으면 벤다!』
말로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적음상이 비로소 청향
을 놓고 어깨를 틀며 사납게 외쳤다. 초유성이 다시 가볍게 웃었
다.
『하하, 얼마든지.... 오래 만나지 못한 동안 형의 경지가 얼마
나 더 높아졌는지 그러잖아도 궁금하던 참이었소이다.』
초유성의 여유 있는 태도 앞에서 적음상은 마음이 급해 미칠
지경이 되었다.
『후회해도 늦다!』
외친 순간 그는 이미 섬전처럼 덮쳐들며 사검(四劍)을 후려대
고 있었다. 번갯불이 번쩍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헛, 좋은 수법!』
놀람의 외침을 터뜨린 초유성이 바람처럼 물러서며 부드러운
검호(劍弧)를 뿌렸다. 극쾌한 단선(單線)의 검과, 일견 부드러워
보이는 유수검이 한데 엉키며 새파란 불똥을 날렸다.
카카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청을 따갑게 했다.
물러섰던 적음상이 이를 악물고 더욱 흉맹하게 부딪쳐 들어갔
다. 그를 가로막고 선 초유성의 검은 그저 한 줄기 시냇물이 흐
르는 듯했다. 거칠것이 없었고, 날카롭거나 강한 기세도 없었다.
부딪쳐 오는 상대의 기세를 흩치거나 타 넘으며 가볍게 일렁일
뿐이었다.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자유자재로 꺾이며 베어가고 휘도는 검
봉의 화려함이 눈부셨다. 햇빛에 반짝이며 만변(萬變)의 일집(一
集)을 찰나에 보여주는 현란함은 천수일하(千水一河) 백하귀해
(百河歸海)의 뜻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수천 개의 개울물을 아우른 강은 다시 바다에 모여든다. 그 모
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바다는 그 자체로서 허무이며 충만이다.
그것은 벨 수도 없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는 무한인 것
이다.
적음상은 초유성의 검이 만들어 가고 있는 부드러운 원호 속에
서 자신의 사나움이 깊은 무기력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래서는 결코 놈을 이길 수 없다고 느낀 적음상이 검세
를 바꾸었다.
『좋다, 놈!』
이 사이로 스산하게 외친 그가 일검 일검을 신중하고 무겁게
치기 시작했다. 가볍고 표흘하기만 하던 이제까지의 검세와는 완
연히 다른 검격이었다.
가장 강하고 가장 빠른 하늘의 무한력(無限力)은 뇌전(雷電)의
발체(發體)이다. 일검 일검을 쳐낼 때마다 적음상의 검은 빠름
위에 더욱 강해지는 뇌전의 힘을 싣고 초유성의 검호 속으로 꽂
히듯 떨어져 내렸다.
다만 한 줄기의 빛만이 소리 없이 뻗어나가고 있을 뿐, 형체마
저 보이지 않는 무변극쾌(無變極快)의 신기(神技)였다.
그것을 받는 초유성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다시 사흘
밤낮을 새며 겨루기라도 하려는 듯, 두 사람의 검은 한치의 양보
도 없이 치열하게 얽혔다. 일각의 격돌이 억겁 같이 무겁게 흐르
는 순간이었다. 그 집중을 깨뜨리며 멀리서 야수의 부르짖음 같
은 소리가 다가왔다.
『적음상-!』
소리의 여운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독고월의 그림자가 머
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파라라랏-!
그의 손이 현란하게 뿌려졌다. 다시 네 개의 비도가 찰라간에
공간을 가르고 쏘아져 나갔다. 적음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초
유성을 버리고 급히 몸을 튼 그가 신랄하게 검을 뿌렸다.
카카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을 사정없이 뒤흔들며 부딪치고
흩어져 나간 백옥비가 빨려들 듯 독고월의 손안으로 돌아가고,
다시 한 무더기의 은빛이 되어 더욱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그의 백옥비는 가히 마비(魔匕)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사
납고 무서웠다. 그것을 다루는 독고월의 솜씨 또한 마기(魔技)라
고 해야 할 만큼 놀랍기 짝이 없었다. 그것들을 가닥가닥 쳐내던
적음상이 독고월의 살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훌쩍 몸을 날려 허공
을 하얗게 그으며 오가는 비수의 그물 속에서 다시 가볍게 벗어
났다.
『기다려라. 곧 돌아온다!』
힐끗 초유성과 청향을 노려보고 그대로 송림 속으로 질주해 눈
깜박할 사이에 사라져 가는 적음상이었다.
『이놈, 달아나지 못한다!』
커다랗게 외친 독고월이 땅을 박차고 적음상의 궤적을 따라 질
풍처럼 달려갔다.
그들 신기를 지닌 삼 인의 절정 고수들이 연출해 보인 한바탕
의 거센 격랑을 지켜보고 난 옥청향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
었다. 인간의 능력에 과연 한계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적음상이 독고월을 꼬리에 달고 사라져간 송림을 멍하니 바라
보는데 초유성이 그녀의 어깨를 쳤다.
『낭자, 혹시 적사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은 아니
오?』
『아!』
초유성의 깨우침에 옥청향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깜짝 놀
랐다.
『가, 가요, 어서!』
비로소 허둥대는 그녀를 보며 초유성이 따뜻하게 웃었다.
<4>
『무엇이, 그게 사실이요!』
육초량이 크게 놀라 냉여옥의 팔을 꽉 붙잡았다.
『아, 아파요. 이 손 좀 놓고 얘기하세요.』
냉여옥이 얼굴을 찌푸리며 괴로워했지만 육초량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가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며 외쳤다.
『강사옥이 죽다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요? 어디서 그
런 말을 들었소?』
『밖에 나가 보세요. 어디서나 그 얘기뿐인걸요. 며칠 전에 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북평원에서 죽었대요.』
육초량은 믿어지지 않았다. 밖에 나갔다 돌아온 냉여옥이 큰
일이라는 듯 호들갑을 떨며 전해준 그 말이 커다란 충격으로 그
의 가슴을 눌렀다. 대의협(大義俠)이면서 명실공히 이 시대 최고
의 고수인 철협(鐵俠) 강사옥(姜獅玉)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의 우상이었으며, 그로 하여금 이 험한 검로(劍路)에 선뜻 뛰어
들게 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때 자신의 소망은 온통 강사옥 그
위대한 초인을 꺾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니...
한단부(邯鄲府)는 하북성 남쪽에 있는 한단 지역의 행정구역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한단(邯鄲)은 전국시대부터 화려한 문화와
풍성한 문물을 자랑했던 곳이다. 중원 대륙에 퍼지는 모든 유풍
(流風)은 바로 그 한단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또한 그곳은 남쪽에서부터 상경해 오는 사람들이 북경성에 이
르기 위하여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 냉여
옥은 한단에 이르자 그곳의 세련된 풍물을 구경하고 가자며 벌서
사흘째나 육초량을 붙들어 앉혀놓고 있었다.
『누가, 도대체 누가 있어 그를 죽일 수 있었단 말이요?』
『후..., 육가가. 외부의 적은 막기 쉬워도 내부의 적은 방비하
기 어렵다는 말도 모르나요?』
냉여옥이 한숨을 쉬고 아픈 듯 팔을 주무르며 샐쭉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육초량은 아무 말 없이 철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로 가시려고...』
『그대가 말해주지 않으니 내가 직접 가서 알아볼 참이요.』
『아, 가가. 서두를 것 없어요. 이리 앉으세요.』
냉여옥이 방긋 웃으며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당신이 나가본다고 이미 죽은 강사옥이 다시 살아날 리도 없
고, 다른 사람을 붙들고 물어봐야 결국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과
똑같을 텐데 쓸데없는 일이에요.』
『......』
그녀와 말싸움을 해서 이겨본 적이 없었다. 냉여옥의 청산유수
같이 흘러나오는 말을 들으며 육초량은 할 수 없이 다시 주저앉
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바싹 다가앉았다.
『놀라지 마세요. 강사옥을 죽인 자는 바로 강북 무림맹의 태상
이자 신검문의 후계자인 옥풍규였대요.』
『무엇!』
육초량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세상에 그럴 수가...?)
경악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검문이 망할 때 하늘
을 찌르고 치솟는 화염과 흑룡보의 무자비한 창검 속에서 그는
옥풍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져 혈로를 뚫지 않았던가. 그리
고도 몇 년 동안을 어린 옥풍규를 등에 업고 흑룡보의 추적을 뿌
리치며 세상을 주유한 강사옥이었다.
자칫 생명을 잃을 경각지간의 위기 속에서도 그를 보호하기 위
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우기를 몇 번이던가. 강사옥이 없었더라면
옥풍규는 벌써 죽어도 수십 번은 더 죽었을 것이었다. 그 은혜가
오히려 부모의 은혜보다 크면 컸지, 못하지 않을 텐데 그가 강사
옥을 죽였다니...
육초량이 다시 철검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말리는 그녀를 뿌
리치고 거칠게 나서는 그의 어깨 위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던 냉여옥이 남몰래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 * *
한낮의 이글거리는 폭양 속에 하북평원이 괴괴한 적막으로 가
라앉아 있었다. 그 평원의 한 지점에 육초량이 묵묵히 서있었다.
그는 아직도 선연하게 남아 있는 발 아래의 핏자국을 보았다. 여
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는 발자국들이 그 날의 격전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것이 강사옥이 흘린 피다.)
육초량이 무릎을 꿇고 앉아 피에 물들어 있는 한 줌의 흙을 움
켜 들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
움켜쥔 흙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살기가 무섭게 이글거렸다.
『옥풍규 그 자는 고질적인 악한이에요.』
『......』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며 육초량은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
었다. 좀처럼 술을 입에 대지 않던 그였으나, 하북평원으로부터
돌아온 뒤 방문을 닫아걸고 무시무시하게 폭주를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냉여옥은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 자는 지난해 가을 종남산 아래에서 강사옥을 위협하여 유
마검보(幽魔劍譜)를 탈취했어요.』
『......』
『그 때 강사옥은 대협답게 그것을 두고 군웅들이 서로 상쟁하
는 일이 없도록 검보를 찢어 없애려고 했대요. 아, 참으로 대장
부다운 의기였지요.』
힐끗 육초량을 돌아본 그녀가 몹시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그 자리에 옥풍규가 나타나 자기의 직위로써 강사옥을
협박하여 그 비급을 빼앗았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것을 연마하여
무림의 고수가 될 생각을 가졌대요.』
『......』
『그 일로 인해 강사옥과 그 나쁜 자 사이에는 틈이 생겼고, 서
로 반목하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결국 그 자가 암수를
써서 강사옥을 함정에 빠뜨리고 비겁하게 살해한 것이죠.』
탁-!
육초량이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무릎 위에서 그의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냉여옥이 살짝 외면하고 그녀만
의 차가운 미소를 언뜻 피워 올렸다. 육초량이 이를 악물고 어눌
하게 말했다.
『그 놈의 용렬함은 얼렸을 적 용화산에서 마주쳤을 때 내 이미
알았던 바다. 한데 설마 그 놈이 오늘날 그토록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을 줄이야...』
냉여옥이 긴장한 눈으로 육초량의 입을 주시했다. 육초량이 부
드득 이를 갈았다.
『놈, 반드시 죽여 강대협의 복수를 하고야 만다!』
냉여옥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입
가에 엷은 득의의 웃음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육초량은 볼 수 없
었다.
* * * *
냉여옥이 산책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주루 뒤편의 뜰을 한가롭
게 거닐고 있었다. 노을마저 스러진 하늘이 짙은 재색의 땅거미
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뜰을 마주하고 양옆으로 늘어선 객사의 끝에 이른 냉여옥이 자
연스럽게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순간 그녀의 손
가락들이 교묘하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몇 개의 수결(手訣)을 짚
어 보였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다시 태연하게 걸음을 옮겨 되돌
아갔다.
그녀의 신형이 객사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검은 그림자 하나
가 객사 끝의 용마루를 타고 기척 없이 사라져갔다.
『여상루의 서쪽 객사라고 하였소?』
『그렇습니다. 세 번째 방에서 옥공자를 기다리신다고 급히 오
시라 하였습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는 흑의 죽립인 앞에서 눈빛을 반짝이던
옥풍규가 낮게 웃었다. 그의 눈 깊은 곳에서 정염의 불길이 서서
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하, 곧 가고말고. 그녀가 부르는데 내 지옥인들 마다하겠
소?』
옥풍규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무림맹 하북 분타 안 은밀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그의 거처였다. 창문을 열고 잠시 밖의 동정
을 살피던 그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서슴없이 몸을 날
렸다. 일 년 전의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르고 가벼운 몸놀림
이었다.
『육가가, 이제는 그만 주무셔야지요.』
침상에 자리를 편 냉여옥이 여전히 탁자 앞에 앉아 술을 마시
고 있는 육초량을 억지로 일으켰다.
『여옥, 나를 놓아두고 그대의 방으로 돌아가 먼저 자도록 하시
오.』
육초량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냉여옥은 한사코 그를
붙잡아 일으키려고 애썼다.
『싫어요. 당신이 잠드는걸 보고 나서 나도 자겠어요.』
도리질을 하며 그녀는 기어이 육초량을 침상 위에 눕히고 말겠
다는 듯 그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일으키기 위해 힘을 쓰는 것
이었다.
『가가, 이제 술은 그만 하고 어서...』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그녀의 고집에 짜증이 벌컥 났다. 놔, 하
고 소리치며 팔을 떨쳤다. 뾰족한 비명을 터뜨리고 비틀거리던
냉여옥이 그대로 침상 위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
로 얼굴을 가린 채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흑, 뭐예요, 이게. 나는 당신이 밤새 그러고 앉아 술만 마실
까봐 걱정되어서 그러는 건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오히려 때리
다니..... 이게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건가요? 당신은 너무
심해요!』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며 육초량은 취중에도 자신이 좀 심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일어나 냉여옥에게 다가간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여옥, 미안하오. 내가 잘못했소. 그대 말대로 자도록 할 테니
그만 그치시오.』
『육가가는 나쁜 사람이에요!』
그녀가 냉큼 팔을 뻗어 육초량의 목을 안고 끌어당겼다.
『어?』
당황 중에도 육초량은 그녀의 상체 위로 쓰러지고 말았다.
『으윽, 저, 저런!』
불빛에 비쳐 창문 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경악하는 야
행인이 있었다. 냉여옥을 찾아 막 담을 넘어 들어온 옥풍규였다.
방안에서 그녀가 육초량의 목을 끌어당기는 순간, 옥풍규의 눈에
비친 그림자의 움직임은 마치 한 사나이가 냉여옥을 침상 위에
쓰러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놈이 감히!)
앞뒤 가릴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눈에서 으스스한 한광을
뿜어내며 그는 힘껏 땅을 박찼다.
와장창-!
창문이 박살나 흩뿌려졌다. 위험을 느낀 육초량이 급히 몸을
뒤집어 한바퀴 굴렀다. 차가운 검인이 그의 왼쪽 어깨를 아슬아
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웬 놈...』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치던 육초량이 크게 놀라 눈을 부릅떴
다.
『헉, 네놈은 육초량!』
옥풍규도 경악하여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아!』
퉁겨지듯 침대에서 일어난 냉여옥이 한 구석으로 물러나 흐트
러진 옷자락을 여미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갑자기 뛰어든 괴한
에게 크게 놀란 듯한 그녀였으나, 육초량의 등뒤에서 눈만은 애
절한 빛을 가득 담고 옥풍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며 옥풍규가 무어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흐흑....』
울음을 터뜨린 냉여옥이 서럽고 원망스런 눈으로 육초량을 가
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저 자의 손에서 빨리 자신을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려있는 것을 본
옥풍규의 눈이 뒤집혔다. 그가 증오와 한이 가득 담긴 눈으로 무
섭게 육초량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흐흐흐... 육가야, 네놈이 이곳에서 겁도 없이 아녀자를 희롱
하고 있으리라고는 뜻밖이구나.』
육초량의 이글이글 불타는 눈도 옥풍규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
었다. 그는 냉여옥이 등뒤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알
지 못했다. 다만 불시에 뛰어든 자가 의외로 옥풍규인 것을 알고
나자 머리 속이 온통 그에 대한 증오로 꽉 차 버렸다.
『그러잖아도 천하를 다 뒤져서라도 네놈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제 발로 찾아와 주었구나!』
육초량의 눈에 서서히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떠오르고 있었
다. 그러나 옥풍규에게는 그러한 것이 하나도 마음에 잡히지 않
았다. 그는 오직 육초량이 냉여옥에게 암수를 써서 그녀를 겁탈
하려 했다고 믿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분노로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육초량의 비열한 암수에 걸리지 않았다면 절정의 고수인
냉여옥이 저렇게 맥없는 모습으로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고
단단히 여기는 옥풍규였다.
『천하에 흉악한 색마.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그가 검 끝으로 육초량의 가슴을 가리키며 으르렁거렸다. 육초
량이 이를 사려 물고 옥풍규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라앉은 음성으
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놈, 칠 년 전, 용화산에서 분명히 말했었다. 다시 만날 때 적
으로 마주서게 된다면 가차없이 베겠다고!』
그가 천천히 철검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흥, 그 때 육가 네놈을 죽였어야 하는 것인데 후회가 막심하
구나.』
입으로는 빈정거리며 눈으로는 세밀하게 육초량의 빈틈을 엿보
는 옥풍규였다. 그에게는 자신이 있었다. 육초량의 검이 강하다
는 소문은 들었으나,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였다.
(제까짓, 산 속에서 홀로 수련했다는 놈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
겠나.)
이런 배짱으로 당당히 겨누어가고 있는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연마한 유마검보상의 절학에 대한 믿음이
었다. 아직 팔 성을 연마하고 있는 데 불과했으나 그 정도라면
충분히 육초량을 꺾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냉여옥이 한 구석에 물러서서 두렵고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옥
풍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경멸과 조소가 어려 있었다. 육초량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제압
당하여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옥풍규에게는 오히려 다행한 일
인지도 몰랐다.
(치잇, 놈의 시선 따위에 겁을 먹다니...)
옥풍규가 육초량의 시선을 무시하고자 애쓰며 불끈 용기를 북
돋우었다. 그 만용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지 그는 깨닫지 못했
다. 대적의 경험이 전무한 그는 상대를 읽을만한 여유도 갖지 못
했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야 할 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낀 옥풍규가 불끈 발목에 힘을 주어
쳐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너 같이 보잘것없는 놈을 베야 한다는 것은 내 검의 수치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아니라 강사옥의 혼이 하는 것. 그분의 일검
이라고 알고 받아라!』
육초량이 절묘하게 옥풍규의 호흡을 끊어왔다. 잔뜩 기력을 끌
어 모아 한껏 응집시켰던 옥풍규가 주춤했다. 터뜨려야 할 때를
빼앗기자 솟구쳐 오른 기력이 오히려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눌렀
다. 막 기를 분출하려던 순간에 절묘하게 던져와 그의 심중을 흔
들어 놓은 육초량의 말 때문이었다.
육초량은 상대의 기를 읽고 그것을 끊어야 할 순간을 잡을 수
있을만큼 무섭게 발전해 있었다. 검력을 떠나서, 그것을 알고 느
낀다는 것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옥풍규와 육초량의 커다
란 차이였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먼 거리였다.
『이야압-!』
옥풍규가 사납게 외치며 일검을 뿌렸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
신도 느끼지 못한 사이에 반 호흡 늦어진 것이었다.
피잉-!
눈앞에 흰 빛 한 줄기가 번쩍였다고 느꼈다. 그리고 정수리 위
에 떨어지는 최초의 충격과 함께 옥풍규는 머리 속이 하얗게 비
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끝이었다.
파아아-
뜨거운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 천장을 적셨다. 잘 익은 수
박이 쩍 벌어지듯 두 쪽으로 갈라진 머리를 건들거리며 그가 천
천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몸이 완전히 바닥에 쓰러지자 두 개의
머리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곧 뭉클거리는 선혈이 바닥
을 흥건하게 적셨다.
『아악-!』
그 잔인한 광경에 냉여옥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한 번의 눈짓이 가져온 옥풍규의 처참한 죽음이
었다. 그녀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죽은 자도, 죽인 자
도 전혀 알지 못했다.
<5>
『아아, 한 분 신검문의 유일한 계승자를 태상으로 모시고 있었
기에 본회의 형제들 모두가 떳떳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무림맹의
기치를 내세울 수 있었건만...』
진필생의 눈이 분노와 비통함으로 충혈되어 갔다. 그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절규하듯 부르짖었다.
『이제 구심점을 잃었으니 우리들은 애비 없는 자식이나 다름없
게 되었다. 무슨 낯을 들고 강호의 동지들을 보고, 선대의 영령
들을 대한단 말이냐!』
비통하게 말하고 난 진필생이 무서운 눈으로 육초량을 노려보
았다.
『이 흉악한 놈! 네놈이 이처럼 잔인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오늘 네놈을 죽여 태상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내 성을 갈겠
다!』
사납게 외친 그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요란한 소리와 함
께 사방의 벽과 창문이 박살나 주저앉았다. 그리로 뛰어드는 무
림맹의 고수들이 성난 황소들 같았다.
육초량은 피묻은 검을 털며 눈살을 찌푸렸다. 옥풍규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 뛰어든 진필생이었다. 그가 만만치않은 고수인데,
이제 방안에 들어와 살기를 풀풀 뿌리고 있는 다섯 명도 결코 호
락호락한 자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해야 할 자들은 눈앞에서 병장기를 겨누고 있는 자
들만이 아니었다. 오십여명은 되어 보이는 자들이 밖에서 두 겹,
세 겹으로 포위한 채 성난 외침을 터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모두를 일일이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자신은 냉여
옥을 안전하게 보호해야 할 의무까지 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
다.
(우선 빠져나간다.)
난감한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던 육초량은 그렇게 작정했다.
힐끗 냉여옥을 바라본 진필생이 섭선을 들어 육초량을 가리켰
다. 기이하게도 그는 냉여옥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삼
년 전 항산에서 그녀와의 일전을 치르기까지 했던 그가 오늘 그
녀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육초량은 다만 눈앞에 닥친 위기에서
벗어날 생각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놈은 태상을 살해한 흉수이고, 우리의 불공대천지 원수다.
잡아라! 잡을 수 없으면 죽여도 좋다!』
그의 외침에 육초량을 노리고 있던 무림맹의 하북 분타 소속
고수들이 긴장과 살기를 풀지 않고 조금씩 조여들기 시작했다.
선수(先手)의 득(得). 육초량은 머리 속에 그것을 떠올렸다.
의외의 기습은 열에 아홉 승리를 가져다 주는 비결이었다.
씨이이-
움직이는 기척도 없이, 어둠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인 듯, 육
초량의 일검이 정면을 쪼개갔다. 그의 손이 검자루를 쥐었다고
본 순간 이미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는 무시무시한 쾌검이었다.
『앗!』
정면에서 겨누어오던 자가 놀람의 비명을 터뜨리고 주저앉았
다. 그의 어깨가 가슴까지 쩍 벌어지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 일
격이었는지 벌건 속살이 내비칠 뿐,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
다. 그것이 더 끔찍한 모습으로 모두의 눈 속에 박혀들었다.
『교활한 놈!』
『저 놈이!』
남은 사 인의 고수들이 저마다 분함의 외침을 터뜨리며 팔방풍
우의 기세로 짓쳐들었다. 비좁은 방안에서 냉여옥까지 등뒤에 감
추고 있는 육초량으로서는 운신이 극히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을
노리고 쳐들어오는 자들의 검이 더욱 신랄했다.
『좋아!』
이를 악물고 부르짖은 육초량이 왼손의 다섯 손가락에 기력을
모아 맹렬하게 떨쳐냈다. 부채살처럼 좍 퍼져서 쏘아져 나가는
다섯 줄기의 강맹한 지력이 쉬익, 하는 휘파람 소리를 냈다.
검이 곧 닿을 듯 가까이 접근해 있던 자들이었다. 눈앞에서 갑
작스럽게 날아드는 지력의 날카로움이 그들을 두렵게 했다. 저마
다 비명을 터뜨리며 다급히 신형을 틀거나 검을 꺾어 받아내느라
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진 순간이었다.
『차합!』
짧고 강한 기합성과 함께 육초량의 일검이 비스듬히 횡으로 그
어 나갔다. 답답한 비명성이 울렸다. 각기 허리와 가슴을 깊이
베인 자들이 몸을 꺾고 엎어졌다.
피이잉-
그들을 훑고 지나간 육초량의 검봉이 허공에서 가볍게 비틀렸
다. 마치 늘어난 고무줄이 탄력에 의해 다시 돌아오듯 사납게 되
쳐오는 검격이 뒤따랐다.
『흐앗!』
『어헉!』
육초량의 바람의 검은 이미 신기에 접어든 모습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일소천운(一掃天雲)의 일격에 남은 두 명이 허
공에 혈화를 뿌리며 쿵쿵거리고 물러섰다. 그 순간 냉여옥의 허
리를 낚아챈 육초량이 비조처럼 신형을 뽑아 올리며 머리 위를
향해 맹렬한 일장을 쳐냈다.
꽝-!
장심을 타고 뻗어 나간 그의 거대한 진력이 객사의 지붕을 단
번에 뚫어 버렸다. 눈앞을 자욱히 가리며 쏟아지는 먼지 속에서
육초량의 신형은 질풍과도 같은 기세로 지붕을 뚫고 날아올라 어
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합니다!
즐독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즐감합니다
도망치느데는 선수로다...
즐감합니다.
즐독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육초량이 어디갔지~~~
즐감,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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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정혼녀는 찾지않고 뭘하고 있는건지,,,,,,,??????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