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빈안씨신도비명(昌嬪安氏神道碑銘)
창빈안씨께서 서거하신지 백삼십여년이 지나도록 묘역(墓域)에 비석이 없다. 우리 전하께서는 연대가 오래되다 보면 이 어른의 훌륭한 덕행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고 말것을 깊이 염려하사, 신(臣) 정(晸)에게 비명(碑銘)을 짓도록 하명하시니 신(신)은 글을 담당하는 직책을 맡고 있어서 글솜씨가 없다하여 사양할수 없다 삼가 살펴보니 안씨는 계통이 안산(安山) 고을이시다 아버님의 휘(諱)는 탄대이시니 중묘(中廟)조의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하여 적순부위가 되셨고 후에 의정부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어머님 황씨는 정경부인에 증직된 분으로써 홍치 기미년(연산군 5년(1499)) 7월을 유(9일)에 빈을 낳으셨다. 빈께서는 천품이 단의하고 거동은 여측에 맞으셨으니 정묘년(중종 2년)에 뽑혀 궁중으로 들어가시니 이때 나이 겨우 9세이시다. 정현대비(성종계비)께서 특별히 돌보고 사랑하시어 서사를 가르치시어 무인년(중종13년)에는 중종의 후궁으로 세우셨다. 경진년(중종 15년)에 상궁이 되시고, 기축년(중종24년)에는 숙원에 오르셨다. 이때 곤위가 견관(누에치는 곳)에 일이 있었으니 빈께서 잘주선하사 예를따라 처리하시니 궁중의 칭송이 높이셨다. 경진년(중종 35년)에 숙용이 되셨으며 갑진년(중종 39년) 중종이 승하하시니 빈께서는 슬퍼하심이 법제(法制)보다 더하셨다. 중종의 복을 마치시고 구례를 따라 인수궁으로 물러가 거처하시기를 자청하셨으나 문정왕후께서 특명을 나리시어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시고는 온갖 은혜와 예수(禮數)를 베푸셨다. 기유년(명종 4년)에 우연히 사가(私家)에 나가 계시다가 갑자기 병 없이 서거하시니 시월갑인(13일)로서 향년 춘추가 51세이시다. 명종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조회(朝會)를 폐하시고 부의(賻儀)를 후히내리시며 각별한 분부로서 중관을 시켜 상사를 돌보게 하셨으며 삼궁도 이와같이 하였다. 이듬해 3월 임신(8일)에 양주군 서쪽 장흥리에 예장(禮葬)하셨으나 후에 자리가 좋지 않다하여 과천의 동작리(현 동작동 국립묘지내 중앙 위치) 곤좌 언덕으로 이장을 모셨다.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지 11년째되는 정축년(1577년)에 창빈으로 추봉되시고 선조께서 특명을 내려 대원군묘에 향사하도록 하셨으니 애영이 극진하시다 할 것이다. 창빈께서는 몸가짐을 엄숙하고도 조심스러히 하셨으며 부덕을 두루 갖추고 계셔서 중종의 사랑을 받으시기 30년에 이르시나 시종 음전한 태도용모에다 게으름이 없으셨고 궁중에서는 누구에게나 환심을 얻으셨다. 또한 빈께서는 감식을 지니셔서 사람의 길흉과 일의 성패를 예언하시면 모두 들어맞았다. 자녀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의방을 따라서 곡진(曲盡)하게 타일러 키우셨다. 또 능히 생사의 이치를 알고게시어 평소 신에게 빌어 의지하시는 일이 없으셨다. 일찍이 의금을 지어서 궤짝에 담으시고 뚜껑에다「염구」라 써 놓으시어 종신(죽엄) 후의 장례에 대비하셨으니 창빈의 식견이 이와 같으셨다. 신은 역대로 비빈들이 영귀한 신분에 있을 때의 사실을 살펴보니 겸손히 처신했을 때는 복을 받고 방자교만하게 처신했을 때에는 누구 하나 그 영광을 잃지 않은 자가 없었다. 빈께서는 연소한 나이로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가 마침내 임금의 총애를 받아 육궁(후비)의 지위에까지 오르셨다. 그 성실하고 깊은 덕과 온화한 몸가짐은 이미 후궁중에서 빛을 내셨고 또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받아 성손을 보아 아조의 영원한 왕업을 잇게 하셨으니 이러한 성사를 이룬 것이 어찌 까닭이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이로보면 주역(周易)에 「시이고상」이라한 것이 거짓이 아니다. 창빈께서는 2남 1녀를 두셨으니 장남은 영양군 (거)이시고, 차남은 덕흥대원군 (초)이시며, 시 따님은 정신옹주이시다. 영양군은 찬성에 증직된 안세형의 따님에게 장가들으셨는데 아드님을 두시지 못하여 흥령군 (수전)으로 후사(後嗣)를 삼으셨다. 대원군은 증영의정 판중추부사 정세호의 따님에게 장가들이시어 3남 1녀를 길르셨으니 아드님 중 선조대왕은 셋째이시고, 큰 아드님은 하원군 (정) 이시며, 둘째 아드님은 하릉군 (인) 이시다. 따님은 안황에게 출가하시고, 정신옹주는 청천위 한경우에게 하가하시어 1남 3녀를 두시니 아들은 진이요. 딸은 남궁식, 원준호, 이인호에게 각기 출가 하여 내외의 자손이 계속 번창하여 지금에는 천여명에 이르러 이루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큰 복을 받음이 옛 사람에도 견줄이가 드물다 할 것이니 아! 훌륭하시도다. 신(臣)은 삼가 서(序)의 뒤를 이어 명(銘)을 올립니다. 착한 정기 모아서 훌륭한 이 내시니 고운 덕 닦고 닦아 사덕을 갖추셨네. 임금 모시어 사랑 받으셨고, 음전한 몸가짐에 상서(祥瑞)를 열어줬네. 현사(賢嗣)가 성인 낳아 보답 받으시니 혁혁하게 중흥하여 삼령에 제사하네. 어진 임금이어 나와 복을 내리시니 적선(積善)의 끝 경사라는 그 이치 분명쿠나 울창한 저 높은 뫼에 비석 세우고 이 내용 명(銘)에 새겨 후세에 알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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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는 국립현충원 내에 장군제1묘역 윗쪽, 초대대통령 우암 리승만박사 묘소 옆에 위치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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