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산 전경
문수암(박창원 촬영)
계조암터, 명월대, 학소대, 월영대(비하대), 삼용추
선열대
삼용추 바위 각자 '유숙(柳潚)'
취흘 유숙 초상(1613, 형난공신 책록 뒤에 그림)
취흘 유숙 초상 초본(1613년 형난공신 책록 후 그린 진영의 초본)
취흘 유숙 필적
내연산 덕경, 설희 스님들께 드리는 시축(詩軸) 서문
취흘 유숙 지음 ․ 김희준 옮김
군자가 벗을 취함에 무엇이 떳떳함인가? 발자취가 다르나 마음이 같으면 벗으로 삼고, 도가 다르나 뜻이 합해지면 벗으로 취하여 그 믿음과 의리를 취할 뿐이다. 어찌 제도권의 안이냐 밖이냐를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
이러한 까닭에 한유(韓愈, 768-824)1) 가 조주(潮州)2) 에 귀양 가서3) 태전(太顚, 732-824)4) 스님과 교유하였다. 그가 말하길, “먼 곳에 와서 더불어 대화할 사람이 없었기에 스님이 산에서 부름을 받고 고을에 이르러 열 몇 날을 머물렀지만 실로 겉모습을 넘어서 이치로서 스스로를 드러내었으니 바깥의 사물이 침투하고 어지럽히지 못하였다. 그와 더불어 대화하는데 비록 이해를 다 할 수는 없어도 요컨대, 가슴 속의 체증과 응어리가 없어졌으니 얻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 서로 더불어 내왕을 하였다.”5) 고 하였다.
유종원(柳宗元, 773-819)6) 이 유주(柳州)7) 에 귀양을 가서는 호초(浩初)8) 스님과 더불어 사귀었다. 그가 말하길, “무릇 그 도를 추구하는 사람은 관직에 애착을 가지지 않고 능력을 다투지 않거니와 산수를 좋아하며 한가롭고 편안한 것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세상에서 내쫓기는 것을 병으로 여기고 오직 관직 살이(印組)를 힘써하여 서로 알력이 있었다. 지금 호초 스님이 그 성품을 한가로이 하고 그 감정을 편안히 하여 책을 읽어서《주역》과《논어》에 통하고, 오직 산수의 즐거움을 오로지 하여 글을 위하여 글을 쓴다.9) ”고 하였다.
슬프다! 한유와 유종원 두 분의 어짊으로도 도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능은 펴지 못하여 먼 야만의 고을로 유배 갔다. 평일의 이른바 금석(金石)의 사귐이라고 한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모르는 것처럼 백안시하였으니 또한 슬프지 않은가. 마침 두 분의 스님들과 더불어 기개가 서로 친해지고 마음 깊이 서로 통하여 상대와 나의 겉모양을 잊고서 산수에 흥이 일어나면 문자로 우의를 다지고 정이 서로 스며들어서 걸림 없이 노닐었다. 그 몸이 멀리 유배와 있으나 그 덕이 외로움을 스스로 알지 못하였으니 또한 즐거웠지 않았던가. 천 년 세월이 지나서 그 탁월하고 빛나는 문장과 풍류와 기상을 그리워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내가 가문의 화를 만났지만 다행히도 관대한 조치를 입어 귀양 가는 죄를 기다리고 미미한 목숨을 겨우 보전할 수 있게 된 것이 모두가 임금의 은혜이다. 한 번 남쪽으로 오고 보니 서울이 천리이고 발자국 소리는 사방으로 끊어져 벗의 편지 한 통 없고 도깨비만 기뻐 지나간다. 흙덩이에 매여 나이만 들어가는데 답답하여도 그 누구와 말하랴. 더구나 백성들의 말은 새소리, 얼굴은 오랑캐 같아서 모두가 사납고 어리석다. 그 가운데 비록 시와 글을 조금 아는 사람이 몇 사람 있다하여도 또한 농사일에 분주하여 술을 마시며 시를 문답할 겨를은 없다. 듣자니, 내연산(內延山)에 두 분의 스님이 있는데 덕경(德瓊)과 설희(雪煕)라 한다. 한 분은 경전과 역사에 통하고, 한 분은 신선술을 닦으니 모두가 더불어 벗이 될 만하였다.
올봄에 내가 젊은 아이들과 산에 노닐며 고문수암(古文殊庵)을 방문하였다. 그곳은 설희 스님이 머무는 곳이었다. 암자는 높고 시원하고 훤하고 트여서 일천 봉우리를 마주하고 큰 바다가 수평 되게 붙어 있었다. 월성(月城 경주), 오천(烏川 영일), 곡강(曲江 흥해), 덕성(德城 청하) 고을들이 눈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암자 터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기상이 호방한 사람(恢廓之人)’ 같아서 장애를 제거하여 해탈의 세계로 초월하여 올라간 자였다.
다음날 아침에 또 계조암에 발걸음이 닿았다. 덕경 스님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청정하고 그윽하고 고요하며 골짜기를 굽어보고 옆으로 해 뜨는 동해 바다를 조망할 수 있었다. 향로봉(香爐峯)10) , 학소두(鶴巢竇)11) , 대비암(大悲菴)12) , 선열암(禪悅菴)13) 을 명월대(明月臺)14) 의 앞뒤로 소매처럼 끼고 있었다. 그 터를 인품에 비유하자면, ‘옥같이 맑고 눈같이 깨끗한 사람(玉雪之人)’과 같아서, 아득히 날아올라 신선과 마주서서 인사를 나누고 세상의 티끌에 물들지 않은 자였다.
내가 고문수암(古文殊庵)15) 에서 설희 스님과 《황정경(黃庭經)》16) 을 강론하였다. 그 단전(丹田)의 비법, 황동(黃童)의 묘음(妙音)17) , 금은(金銀)18) 과 용호(龍虎)19) 의 기운, 니환(泥丸)20) , 동방(洞房)21) , 역궁(繹宮)22) , 자극(紫極)23) 의 문24) , 일월을 호흡함25) , 구름과 노을26) 을 씹는 것27) , 적송(赤松)과 홍애(洪崖)를 벗함28) , 난새를 몰고 학을 타는 것29) ,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술법30) 등 황정경 내경(內景), 외경(外景)을 두루 천착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계조암에서는 덕경 스님과《남화경(南華經)》31) 을 토론하였다. 붕새와 메추리의 크고 작음32) , 손가락과 말(馬)이라는 언어의 편견33) , 소 잡는 백정의 몰입과 양생의 요점34) , 도의 모습을 본 관상쟁이35) , 강물의 신이 바다의 신을 만남36) , 도척이 공자를 만남37) , 고금을 희롱함38) , 천지의 감옥과 새장39) , 장자의 터무니없는 의견들, 무모한 말들, 도를 지나친 표현40) 등《남화경》 내외의 편들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두 스님의 강론과 토론은 내가 대강 아는 것들이었다.
설희 스님의 거주지는 높고 시원하고 걸림 없고 훤하여 깊이 갈무리하고 겹으로 싸서 보고 들음을 거두고 혼백을 길러서 충허(沖虛)의 기운을 성장시키는데 알맞으니《황정경》을 읽은 것이다.
덕경 스님의 주거지는 가장 청정하고 그윽하고 고요하여 인격을 호방하게 하기에 알맞아서 천 길 낭떠러지에 옷깃을 날리고 눈은 만 리를 치달리게 하니 높고 밝은 도에 알맞아서《남화경》을 공부한 것이다.
아! 두 스님이 모두가 겉모습을 벗어나 이치로 스스로를 드러내니 이미 그 책을 읽고 겸하여《논어》와《맹자》와《주역》을 읽었다. 또《황정경》과《남화경》두 경전을 공부하니 영남에 그 이름이 드러남이 마땅하다.
내가 그들을 보니 편안함과 한가로움을 성품으로 삼고, 산수를 즐거움으로 삼으며, 담박하여 즐기는 바가 없고 담담하여 사모하는 바가 없다. 혜계(醯鷄)41) , 헌면(軒冕)42) 의 사람은 썩은 이름과 이익과 세력을 추구하고 평생토록 일찍이 도성에 들어가 벼슬아치들을 추종하다가 죄인이 되어 슬프게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어 뭇 사람의 버림을 받은 뒤에도 허물없는 벗으로 받아주었다. 나는 저 호계(虎溪)의 노닒43) 과 향산(香山)의 결사(結社)44) 에 의탁할 뿐이다. 저 태전과 호초가 비록 그 사람과 그 배움이 어떠하였는지를 모르겠지만 두 스님은 그들과 비교하여도 뒤지지 않는다.
한유와 유종원의 문장이 그 명성이 한 때에 빛나고 백대에 전하여 초목과 함께 썩지 않는다. 나와 같은 자는 말단의 기교와 천박한 배움 밖에 없어서 ‘고기 어(魚)자’와 ‘나라 노(魯)자’도 구분하지 못하고 벙어리 소경과 같아서, 비록 지금의 말단 관리와도 비슷하여 오히려 그들과도 감히 다투지 못하는데, 하물며 한유와 유종원의 꽁무니에 붙어 문장의 고체(古體)를 본받음에랴.
그러나 청하(淸河)가 동떨어지고 멀리 있음은 조주에 밑지지 않고, 용성(龍城)45) 의 빼어난 경치가 내연산에 높지 않다. 한유와 태전 스님, 유종원과 호초 스님 당시의 방외(方外)의 사귐과 산수에 노닒과 암자에서 등불을 켜고 대화 나누던 일처럼 혹은 꽃과 달로 서로 기약하고 혹은 시편(詩篇)으로 서로 화답하는 호사(好事)를 두 스님은 나에게 과분 되게 베풀었다. 늙은 나이에 우아하게 노닐게 하여 나로 하여금 거친 곳에 즐겁게 머물게 하고, 그 귀양살이를 편안하게 하며, 그 근심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실로 이 두 분의 도움이니 남들이 비록 벗이 아니라고 하여도 나는 반드시 벗이라고 이를 것이다.
아! 사귀는 도가 전하지 않음이 오래되었다. 세상살이의 험난함은 태항산(太行山)46) 보다 더하고 인심의 험악함은 염여(灎澦)47) 보다 심하구나. 구름과 비가 뒤바뀜이 손바닥 뒤집듯 하고 얼굴을 맞대고 아홉 번을 의심하며 우물에 빠뜨림이 돌을 던지는 것과 같구나. 구덩이에 떨어져도 끌어올려 건져줄 새끼줄이 없으니 어찌 그 벗을 취하는 바른 도리가 있겠는가. 옛날의 군자가 그래서 발자취에 얽매이지 않고, 길바닥 진흙탕에 빠지지 않으며 오직 신의를 서로 숭상하였으니, 어찌 헛된 것이었겠는가.
때는 천계(天啓) 갑자년(1624) 3월이다.
贈內延山人德瓊雪煕詩序
君子之取友也何常。跡異而心同則取之。道殊而志合則取之。取其信與義而已。奚擇乎方之內外哉。是以韓愈之謫潮州也。與僧太顚遊。其言曰。遠地無可與語者。故自山召至州郭。留十數日。實能外形骸。以理自勝。不爲事物所侵亂。與之語。雖不盡解。要自胸中無滯礙。以爲難得。因與來往。柳宗元之謫柳州也。與浩初交。其言曰。凡爲其道者。不愛官不爭能。樂山水而嗜閒安者爲多。吾病世之逐逐然惟印組爲務。以相軋也。今浩初。閑其性安其情讀其書。通易論語。惟山水之樂。爲文而文之。噫。以二子之賢。道不客才不售。遠謫蠻夷之鄕。平日所謂石交者。皆反眼若不相識。不亦悲乎。適與二釋者。氣槩相親。肝膽相照。忘形於物我。寓興於山水。以文字磨礱浸灌。逍遙馳騁。自不知其身之遠而其德之孤。不亦樂乎。千載下。想望其卓犖文章風流氣像。未嘗不令人見慕也。余遭遇門禍。幸蒙寬貸。俟罪長沙。曲全微命。秋毫皆聖恩也。一自南來。故國千里。跫音四絶。親朋無字。魑魅喜過。塊縶窮年。鬱鬱其誰語。加以海曲遐氓。鳥言夷面。率皆生獰愚蠢。其中雖有稍知詩書者數三。亦奔走於農圃徭役之間。無暇載酒問字。聞內延山有兩僧。曰德瓊曰雪煕。一則通經史。一則治神仙。皆可與友者。今年春。余與年少輩約遊山。訪古文殊庵。乃雪煕所居也。高爽曠闊。坐朝千峯。平臨大海。月城,烏川,曲江,德城。羅列於眼下。比諸人物。如恢廓之人。除去障礙。解脫世界。超出上乘者也。翌朝又抵繼祖菴。卽德瓊所住也。淸淨幽閑。俯瞰洞天。橫眺扶桑。香爐峯,鶴巢竇,大悲,禪悅之菴。襟帶於明月臺之前後。方諸人品。如玉雪之人。翶翔縹緲。揖讓神仙。不染世塵者也。余於古文殊。與煕師講黃庭經。其丹田之祕法。黃童之妙音。金銀龍虎之氣。泥丸洞房繹宮紫極之門戶。呼吸日月。咀嚼雲霞。侶赤松而拍洪崖。驂鸞馭鶴。白日飛昇之術。無不貫穿於內外之景。又於繼祖菴。與瓊師討南華經。其鵬鷃之大小。指馬之是非。全牛養生之要。鯢桓息機之審。河伯之於海若。盜跖之於仲尼。謔浪今古。牢籠天地。謬悠之說。荒唐之言。無端崖之辭。無不涉獵於內外之篇。蓋兩僧之所講討我知之矣。煕之所居。旣已高爽曠闊。則宜深藏重抱。收斂視聽。攝養魂魄。以長沖虛之氣。故黃庭是讀。瓊之所住。最是淸淨幽閑。則宜恢拓度量。振衣千仞。騁目萬里。以適高明之道。故南華爲業。噫。二師皆能外形骸。以理自勝。旣讀其書。兼讀論孟周易。又以黃庭南華二經。絃之韋之。其得名於嶺表也宜矣。吾觀其以安閑爲性。以山水爲樂。泊然無所嗜。淡然無所慕。醯鷄軒冕之人。腐鼠名利之勢。平生未嘗逐逐然入城府而謁官長。惟於被罪人。哀矜於幾死之濱。收拾於衆棄之後。許以莫逆之交。不啻若發笑於虎溪之遊。托契於香山之社。則彼太顚,浩初。雖不知其人其學之如何。而以今二師較之。亦不多讓。當此時。如有韓,柳之文章。則使其名聲。焜耀一時。流傳百代。不與草木同腐必矣。至於若余者。末技淺學。不辨魚魯。有同聾瞽。雖比諸今之刀筆吏。猶不敢爭衡。況望附蠅於韓柳之驥尾。效顰於文章之古體哉。然淸河之絶遠。不下於潮州。龍城之勝槪。不高於內延。時與方外之交。蠟屐水石。縣燈方丈。或以花月相期。或以詩篇相和。褒張好事。優游暮歲。使我樂居荒裔。安其囚而舒其愁者。實二師之所助。則人雖曰非友。我必謂之友也。嗚呼。交道之不傳也久矣。世途之難。劇於太行。人心之險。甚於灎澦。翻雲雨於覆手。對九疑於當面。落井有下石之擠。墜坑無引繩之救。烏在其取友之義乎。古之君子。所以不膠於跡。不泥於道。惟以信義相尙。豈虛也哉。時天啓甲子暮春也。
-醉吃集 卷之五
취흘(醉吃) 유숙(柳潚, 1564-1636)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연숙(淵叔), 호는 취흘(醉吃). 아버지는 사섬시 부정(司贍寺副正) 유몽표(柳夢彪)이며, 어머니 고성 이씨(固城李氏)로 예조 참판 이택(李澤)의 딸이다. 동계 정온(鄭蘊)과 교유했다.
1588년(선조 21)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7년(선조 30)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1599년(선조 32) 예문관 검열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설서·세자시강원 사서를 거쳤다. 1600년(선조 33) 이경전(李慶全), 윤계선(尹繼善) 등과 함께 어사(御史)로서 각도에 분송(分送)되었다가, 장흥 판관(長興判官)이 되었다. 이후 좌천되어 해미 현감(海美縣監)이 되었고, 해미에서 3년을 지내다가 관직을 버리고 여산(礪山)으로 돌아갔다.
광해군 즉위 후 승정원 좌승지·사간원 대사간·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나, 이이첨(李爾瞻)의 횡포를 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두문불출하며 독서에만 전념하였다.(네이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취흘은《어우야담(於于野談)》을 쓴 유몽인의 조카이다. 유몽인은 1617년 인목대비 폐비론에 동조하지 않아 관직에서 파출되었는데 금강산 유점사, 표훈사에서 반정 소식을 들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1623년 7월에 광해군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다는 무고로 사형 당하였고 그 아들 약은 국문 중에 숨졌다. 서인이 중북파(中北派)라 부르며 유몽인 부자를 반대 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었다.
취흘은 계부(季父)인 유몽인의 이 일에 연루되어 포항시 청하면에서 1623년 60세에 유배살이를 하여 1634년(인조 13) 특명으로 방면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고,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오랜 귀양살이 중에 그에게 위안을 준 공간은 소금강산이라고 할 정도로 경관이 빼어난 내연산이었고, 벗이 되어 준 사람은 보경사 고문수암의 설희 스님, 계조암의 덕경 스님이었다.
내연산 삼용추 암벽 각자에 유숙의 이름이 남아 있다. 유숙은 연산폭을 적선담(謫仙潭), 그 남쪽 비하대 암벽의 움푹 들어간 공간을 피우석(避雨石), 삼용추 계곡을 구기동(枸杞洞)이라고 명명하였다.
취흘이 환갑이던 해에 지은 이 글은 불교, 도교, 유교 문화의 교류와 융합을 보여주기도 한다.
1) 당송8대가의 한 사람.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고문(古文) 운동으로 당대(唐代)의 불교문명을 비판하고 유교문명의 회복을 주창하였다.
2) 광동성 동부의 항구도시.
3) 원화 14년(819년) 정월, 당나라 헌종이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를 장안의 궁중으로 들여 예배하고자 하였다. 배불주의자인 한유는「불사리를 궁중으로 맞이하여 예배하는 것을 비판하는 글(諫迎佛骨表)」을 올려 조주자사로 좌천당했다. 이듬해, 목종이 즉위하자 중앙으로 소환되어 국자좨주(國子祭酒)에 임명되었다.
4) 대전(大顚)이라고도 한다. 당대(唐代)의 고승, 속명은 진보통(陳寶通), 일설에는 성(姓)이 양(楊)씨라고 한다. 혜조(惠照) 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영산선원(靈山禪院)을 창건하여 선풍을 널리 폈고 제자가 1,000여 인이 되었다. 한유가 조주로 좌천되어 대전선사가 불교학, 문학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서 편지를 보내어 그를 관아로 초청하여 열흘 남짓 대화를 하였다. 그 뒤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영산사에는 한유가 대전 선사에게 보낸 편지의 친필을 돌에 새겨두고 있다.
5) 《한창려집(韓昌黎集)》권18 「맹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孟尙書書)」.
6) 자는 자후(子厚),하동(河東) 출신,당송팔대가의 한 사람. 세칭, 유하동(柳河東)、 하동선생(河東先生), 유류주(柳柳州)라고 한다.《하동선생집(河東先生集)》이 있다. 한림학사 왕숙문(王叔文) 일파의 영정혁신(永貞革新)에 가담했다가 실패하고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거의 10년 만에 서울로 돌아오던 중 다시 유주자사(柳州刺史)로 보내져 그곳에서 47세에 객사하였다.
7) 지금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유주시(柳州市).
8) 담주(潭州, 湖南長沙) 사람,용안해(龍安海) 선사의 제자, 임하(臨賀)에서 유주로 왔을 때 유종원을 만났다. 유종원의 시에 「호초 스님과 산을 보다가 서울의 친구에게 부치다(與浩初上人同看山寄京華親故)」라는 시를 지었다. 유우석(劉禹錫)의 시에 「해양호에서 호초 스님과 작별하다(海陽湖别浩初師)」가 있다.
9) 《유종원집(柳宗元集)》권25 「호초스님과 송별하며 지은 시의 서문(送僧浩初序)」.
10) 내연산 최고봉(해발 929.9미터).
11) 내연산 연산폭의 북쪽 암벽에 학의 둥지(鶴巢, 靑鶴巢)라고 불리는 구멍이 있는데, 학소두이다. 학소두가 있기에 이 암대를 학소대, 학소암(鶴巢巖)이라고 한다(김희준 외, 《인문학의 공간, 내연산과 보경사》 참조).
12) 비하대(飛下臺)의 서쪽 약 50미터 지점에 대비암터가 있다(위의 책 참조).
13) 선열대 20미터 서쪽 솟은 곳에 장방형의 백운암(白雲庵)터가 있고 그 서남쪽 아래에 운주암(雲住庵)터가 있는데, 이 두 암자를 합하여 선열암이라고 하였다(위의 책 참조).
14) 계조암의 서쪽 암대(위의 책 참조).
15) 현재의 문수암이다. 내연산에는 문수암이 2곳이 있었다. 7세기에 창건된 하문수암(下文殊庵)은 보현암 동쪽 바로 아래에 있었지만 16세기말경에 폐사가 되었다(위의 책 참조).
16) 위·진 시대에 구성된 초기 도교의 경전(經典).「황정내경옥경(黃庭內景玉經)」,「황정외경옥경(黃庭外景玉經)」,「황정중경옥경(黃庭中景玉經)」 등으로 나뉘지만, 후대에 출현한 「황정중경옥경(黃庭中景玉經)」은 일반적으로《황정경》에 포함하지 않는다. 도가 상청파(上清派)의 핵심 경전이고, 인체 곳곳에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존사(存思)와 존신(存神) 사상을 특징으로 한다. 인체를 상ㆍ중ㆍ하 세 부분으로 구분하고, 사람 몸의 모든 기관에 있는 정(精)ㆍ기(氣)ㆍ신(神)을 잘 닦아 황정(黃庭, 비장(脾臟))에 응집시켜야 한다는 양생의 원리를 담고 있다. 3황정(三黃庭) 원리는 의가(醫家)의 삼초(三焦) 학설과 같은 맥락이다. 당대(唐代) 이후에는 「도덕경(道德經)」,「주역참동계」의 연단(煉丹) 사상과 결합하여 내단(内丹)을 중시하는 도교 양생 방술(方術)의 주류를 이루며 ‘장생(長生)의 묘전(妙典)’으로 평가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17) 황동은 황정진인(黄庭眞人), 적성동자(赤城童子)라고도 한다. 묘음은 황정의 진기(眞機-참된 마음, 참된 기운)를 표현하는 말이다(《黄庭經》「仙人章」제28 ‘黄童妙音難可聞’).
18) 도교 외단술(丹方鑑源 金銀篇第一).
19) 도교 내단술(《入藥鏡》曰∶腎中生氣,氣中暗藏眞一之水,名曰陽虎。心中生液,液中暗藏正陽之氣,名曰陽龍。龍虎非肝肺也,乃玄之又玄,知之修煉而爲聖).
20) 미간(眉間)의 내부 3촌 부위를 상단전궁(上丹田宮) 또는 니환궁(泥丸宮)이라 한다.
21) 미간의 내부 2촌 부위를 동방이라 한다.
22) 미간과 중단전(中丹田)을 역궁이라 한다.
23) 미간의 가장 깊은 부위 또는 천상의 신선이 사는 곳.
24) 동방, 니환, 역궁, 자극은 기운이 머물고 드나드는 신령한 문이다.
25) 해와 달이라는 우주의 음양의 기운을 호흡으로 축적하여 신선이 되는 수련법(《黄庭經》 内景經 若得章第十九 日月飛行六合間间; 呼吸章第二十 呼吸元氣以求仙).
26) 구름과 노을은 인체 외부의 자연의 기운(《龜山錄經》云:取在天中地中、雲霞之上,内取於胸中、心、肝、脾之間。爲道者,莫不煉存形神,克成羽化,以致長生,超出圓夢之表,故曰黄庭者也。).
27) 음식의 맛에 들어있는 기를 섭취하는 수련법(《黄老黄庭經》長教五味入口咀嚼吞咽).
28) 자연의 기운을 축적하는 신선술(《金丹大要》拟向孤峰絶頂,把茅盖頭,侶洪崖,友赤松).
29) 신선이 된 것을 말한다.
30) 신선이 되어 신선계로 올라간다는 의미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의미한다.
31) 《장자(莊子)》.
32)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
33) 《장자(莊子)》「제물론(齊物論)」.
34) 《장자(莊子)》「양생주(養生主)」.
35) 《장자(莊子)》「응제주(應帝王)」;《능엄경(楞嚴經)》권6:“息機歸寂然,諸幻成無性”.
36) 《장자(莊子)》「추수(秋水)」.
37) 《장자(莊子)》「도척(盜跖)」.
38) 안동림, 「장자 사상의 현대적 이해」 《장자》(현암사, 1993), “당대의 성현이 그 앞에서는 멋대로 주물려지고 고금의 역사도 그 앞에서는 희화화되며 (...) 통쾌한 해학가이다.”.
39) 《장자(莊子)》「천지(天地)」.
40) 《장자(莊子)》「천하(天下)」.
41) 술 단지에 생기는 초파리 종류의 하루살이 벌레로, 주색(酒色) 등 향락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자들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
42) 수레와 면류관이라는 말로, 관작과 봉록 등 높은 벼슬을 뜻하는데,《장자》〈선성(善性)〉에 “헌면이 몸에 있는 것은 본래 성명처럼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외물(外物)이 뜻밖에 우연히 와서 잠시 붙어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43) 중국, 동진의 승려 혜원(慧遠, 334-416)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 살고 있었는데, 손님을 배웅할 때는 절 입구의 시내를 넘지 않았다. 어느 날 유자(儒者) 도연명, 도사 육수정(陸修靜) 두 사람의 방문을 받고 청담에 열중한 나머지 두 사람을 보낼 때 무심코 시내를 넘었는데 범이 울고서야 시내를 넘은 것을 알고 세 사람이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 고사가 있다. 이 고사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유불도 3교가 어울리는 일을 표현한다.
44) 백거이(白居易, 772-846)가 관직에서 물러나 불광여만(佛光如滿) 선사에게 재계(齋戒)를 받고 향화결사(香火結社)를 하고 향산거사(香山居士)라고 자칭하였다. 그는 3만 궤미(貫)의 돈을 희사하여 극락세계도(極樂世界圖)를 그리고 게송을 지었다. 「살생을 재계하는 시(戒殺詩)」에서 “뭇 생명 미물이라 말하지 말라, 골육과 피부는 사람과 같네, 가지에 앉은 새를 치지 말기를 권하노니, 둥지에 있는 새끼들 어미 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네.”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염불수행을 하였고 75세에 생애를 마쳤다.
45) 소현(蕭縣)의 별칭, 옛 소국의 도성, 안휘성 최북부에 있음.
46) 중국 산시성과 허베이성의 경계를 이루는 남북길이 약 600km, 동서길이 250km의 험준한 산맥.
47) 염여퇴(灩澦堆)의 준말로, 배를 타고 무사히 건너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험하다는 장강(長江) 구당협(瞿塘峽)의 여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