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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개발이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군 이래의 최대 사업’이라고 하면서 크게 각광받은 때가 있었다.
이에 발맞춰 재개발을 위한 뉴타운을 건설하기에 앞서
그동안 이곳의 풍물을 기억하고자 2007년에 정리된
민속지 <보광동 사람들> 1․ 2 (서울생활문화 조서)라는 제법 두툼한 책이 있다.
또한 지난해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간행된 <이태원 – 공간과 삶> 이라는 책 등에서
우리 모교 주변과 관련된 내용들을 발췌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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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은 19세기 말 이후 일본군 주둔지라는 점과 관련하여 변화해 왔다.
1894년 5월 청일전쟁 발발 직전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침공한 일본군의 주력부대인 대도(大島) 혼성여단이
지금 효창운동장 남단의 솔밭에 주둔함으로부터 그 좋은 경관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보병영(현재 국방부 위치), 공병영(서빙고동 군인 아파트), 기병창(용산가족공원)이 자리 잡았다.
1924년 일제 때 간행된 경성도(=조선교통지도)를 보면 보광동과 한남동 경계능선은 공동묘지였다.
오늘날 보광초등학교에서 이슬람 사원으로 이어지는 지역인데,
그러다 보니 우리들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해골이 발견되었다는 소문들이 심심치 않게 돌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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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만 아니라 땅에도 나름대로의 운명이 있는지,
일본군이 주둔했던 용산지역에는 광복 이후 바로 그 자리에 미군 부대가 머무르게 되었다.
보광동과 한남동 등의 이태원 판자촌은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1958년 보광동의 상이 용사촌이 처음 들어 설 때만 해도 주변에는 집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서울로 몰려 든 지방민들이 서울 중심지에서 거주하기 힘들었고,
그나마 청계천 등지에 판자집을 짓고 살아도 철거되기 십상인 상황에서
도심지와 가깝고 미군부대와 기지촌과 서울로 상경한 지방민들은
이태원 지역의 국유지에 판자촌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보광동 한남동 경계능선에 판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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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7월 12일자 경향신문에서 인용한 사진에는
보광초등학교와 이태원 소방서 중간쯤에 있던 Seven Club도 있었고,
Hall House라고 불리던 양공주들이 조직한 자조단체인 백합회(百合會)의 활동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아리랑 택시, 미군 기지에서 나온 PX물품, 이태원 시장의 신풍 슈퍼, 정우 슈퍼,
이태원 판자집(1953), 양공주(1962), 이태원 유흥가의 청소년 금지 표시 사진과 더불어
에머럴드, 맨하탄 클럽, 핑크 레이디, 빠삐용, 실버벨, 황금연못, 007 디스코, 세븐 클럽,
록 월드, ABC디스코, 카지노, 스타위프 위치도 표기하였다.
그러다 보니 3부제 수업을 기다리면서 공 차던 천주교 성당,
만화 그려주던 피노키오 아저씨와 우리 문방구의 마음씨 좋은 아줌마, 혼혈친구들과 태평극장,
원국이가 운영하던 재즈 스테이션도 떠오른다.
이즈음 들어서는
이슬람사원의 금요합동예배, 이슬람 거리의 무슬림 정육점, 아프리카 음식점, 흑인 전용 이발소,
게이 힐(트랜스젠더, 성적 소수자), 후커힐(기지촌) 등의 풍경과 더불어
다문화가정 시범학교로 주목받는 게 바로 보광초등학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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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우리가 다녔던 초등학교 주변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천지이고 준(準)우범지대가 틀림없을진대,
그래도 비행(非行) 중․장년 없이 다들 원만한 가정 꾸리고 자식들도 잘 키워 내면서 사는 걸 보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오.
4.19혁명 거사 53주년을 맞아 보광 5회 모임에서
남산에서 모교까지 이어지는 산책을 계획한다기에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일부를 정리해 보았다.
첫댓글 수고 만삼
역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역사는 오회장께서 ![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6.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