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리뷰글을 남겨봅니다.
저는 몇년전에 조용필님 전집을 리뷰하려다가 5집까지만 쓰고 능력에 한계를 느껴서 손을 뗐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알고있는 것이 얕아서였고, 따라서 그때는 이것저것 주워들은 정보만 나열하다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그런 거창한 알맹이없는 글을 쓰고싶지 않고, 제 느낌만 평심하게 써보려 합니다.
아직도 저는 대중음악이나 조용필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있지 못합니다. 따라서 제가 오류를 범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이 리뷰글은 사실 어르신들이 많이 계신 커뮤니티(?)에 처음으로 썼던 글인데, 그런 까닭에 문체라든가 서술 스타일이 다소 이곳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도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리뷰는 비판의 비중보다 칭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따라서, 이 음반을 그리 긍정적으로 생각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는 읽으시기 좀 불편할 것 같습니다. 특히 서양적인 반주에 한국적인 가락이 융합되어 들어갔다는 점은 극명한 호불호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보입니다. 저는 그 점을 이질감보다는 주체성이라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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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중을 쫓아가 본 적이 없다. 항상 대중들이 내 음악을 따라오게 했다."
조용필 팬클럽 위대한탄생에서 펴낸 『The History』책자에 있던 조용필 어록 중 하나이다. 이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조용필 음악이 가진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실 조용필의 음악 행보는 언제나 한결같이 '파격'이었다. 이번 19집의 행보 역시 조용필이 늘 가지고 있던 행보를 또 걸은 것의 연장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기자들이 조용필의 변신 운운하며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기존의 그의 음악들과 비교하면 새로운 모습이라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기존의 자기모습보다 달라지기'라는 공통점을 매번 지켜왔다. 1집에서 19집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따라서 그가 걸어온 길을 통관하여 볼 때는 사실 이번 행보가 그닥 놀라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기자들이 조용필의 신보 그 자체만 이야기하는것이 아닌 "조용필의 음악 자체"를 얘기하려면, 최소한 19장에 이르는 정규음반과 8장에 이르는 정식베스트앨범 정도는 정주행해보고 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래야 "조용필이 안쓰던 영어도 쓴다"라는 식의 황당한 구라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조용필의 정규음반들을 다 들어본 사람이라면 조용필이 성인가요만 줄창 부르다가 갑자기 어린애들 음악을 들고나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중적 성공을 위해 이런 장르를 선보인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의 기존 틀을 깨려고 새로운 장르와 작법을 도입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조용필이 달라졌어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전부 싸잡아 욕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나를 오해하면 아니되옵니다. 나도 조용필의 음악적 시도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나는 지금 조용필에 대해 평소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분석글을 대충 휘갈겨 원고료 받는 이들에게만 국한해서 비판의 범위를 한정시키고 있다. 그들은 일반대중과는 달리 자신의 표현에 대한 책임까지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국한된 범위를 벗어나는 일반대중들은 어떤가? 사실 내가 기자들에게 조용필 음악을 전관해본 적 없이 조용필 자체를 논하지 말라고는 비판하지만, 일반대중들까지 그러라고 말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중들은 그럴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음악이 좋게 들리면 듣고 아니면 말면 된다. 따라서 일반대중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니다.
내가 지금 장황하게 서설을 들먹이는 이유는 바로 이 일반대중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조용필이 예전 전성기를 지난 이후 고독하게 자신의 음악외길을 걸어갈 때, 몇 번의 신보를 내놓긴 했지만 올해처럼 큰 이슈가 된 경우는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미디어매체를 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조용필 이야기로 가요계 전체가 떠들썩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조용필 측에서 전략적으로 홍보해서라기보다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음악에 열광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어떤 초등학생은 "조용필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노래 좋다"라는 내용의 트윗을 남기기도 했다. 음반판매에서 20대들이 고무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어린 혹은 젊은 가수들 전용 판인 가요프로그램에 조용필의 신곡이 1위후보로 나왔다. 즉 새로운 세대들에게까지 조용필의 음악이 대대적으로 침투(?)했다.
여기서 잠시, 본 글의 맨 첫머리에 인용된 문장을 다시 한번 언급해보자: "대중이 내 음악을 따라오게 했다." 사실 일반대중만큼 가요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지표도 없다. 대중은 그야말로 좋으면 듣고 안좋으면 안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조용필의 신보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비단 대중적 성공 뿐 아니라 전문가들의 극찬도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전성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할아버지 가수(?)가 이루어낸 결과다. 이는, 대중가수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다시 한 번 실현해내었다는 측면에서 대중음악사의 새로운 획을 그은 사건이다. 상상만 했던 이상적인 모습이 실제 현실에서 구현된 것이다.
이러한 조용필의 기록은, 많은 분석가들이 열심히 글을 쓰셨듯이 조용필의 유명세 때문일 수도 있고, 요즘 유행하는 장르를 활용했다는 이유도 있고, 나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젊은 장르가 돋보였다는 이유도 있고, 하여튼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모든 이유들은 겉만 맴맴 돌고 있을 뿐 실제적으로 그 숨겨진 핵을 찌르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는 평론가들의 분석이 약하다든가 나의 분석이 잘났다든가 하는 오만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핵심을 논할 능력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단지 한가지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조용필 19집 그 자체를. 즉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19집이 이렇게 대중성과 음악성을 전부 획득하고 인정받은 이유는 여러 가지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 핵심과 본질은 앨범 자체가 가진 작품성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음반의 완성도를 논할 때 뮤지션의 나이를 언급해서 "나이에 비해 비교적 잘했네요"와 같은 해석은 좀 무리가 있지 않은가 하는 주장을 소신껏 내어 보고 싶다. 물론 나이는 언급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적인 영향력을 분석할 때에 적용될 것이지, 적어도 음악 그 자체를 따질 경우 나이는 큰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리뷰에 앞서 내가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저 조용필 음악을 듣기 좋아하는 "길가던 일반인" 중 하나일 뿐이며, 따라서 본 리뷰는 무슨 전문적으로 음악용어를 들먹이면서 어렵게 쓰는 글이 아니라 글을 쓰고있는 나 개인이 이번 앨범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즉 '나의 느낌'이라는 창을 통해서 앨범을 함께 감상해보자는 취지의 글일 뿐이다. 따라서, 뭐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분석을 기대하는 독자들이 혹시라도 계신다면 더 이상 나의 글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본 리뷰글은 먼저 앨범 전체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적은 뒤 트랙별로 내가 어떻게 들었는지에 관한 소감이 해설된다.
『조용필 19집 - HELLO』
조용필 19집은 명반인가 아닌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는 대답하는 이의 숫자만큼 다양한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명반이라는 것은 절대적 기준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음반 자체의 완성도와 그 음반의 영향력이라는 큰 두줄기의 상호보완적인 기준들이 대체로 통용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영향력이라 함은 대중에게의 영향력도 있겠지만, 대중적 성공을 꼭 거두지 않더라도 연주자들이나 해당 장르의 전문적인 음악인들에게 끼치는 영향력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조용필 4집처럼 두 종류의 영향력을 모두 지닌 앨범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완성도'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여기엔 수많은 요소들이 있는데, 이때 평론가들에 따라서 해당 앨범이 '컨셉'으로 일관된 것인지 아니면 아무 곡이나 여러개 넣은 것인지를 기준의 한 요소로 보는 경우가 있다. 가령 조용필 13집은 노골적으로 "꿈(Dream)"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13집을 명반으로 꼽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다른 명반으로 손꼽히는 4집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앨범이 꼭 컨셉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누구든 명반으로 손꼽는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는 앨범의 일관된 주제 여부로써 음반의 완성도를 논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앨범이 하나의 주제를 가진다는 것은 그 앨범의 특징 중 하나라고 보아야지, 앨범 자체의 수준을 논하는 기준이라고 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물론 컨셉이 관통하고 있으면 앨범 듣는 재미야 있겠지만.
여러분들은 조용필 19집을 이러한 '일관된 컨셉'으로 짜여진 앨범이라고 생각하시는가? 사실 이에 대해 내가 지금껏 읽어본 평론글들은 한결같이 "아니오"라는 대답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읽어보지 못한 평론글도 있겠지만 최소한 내가 접해본 글들에 한정해서라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예"라는 대답을 제시하고 싶다. 조금 억지스러울 수도 있다. 사실 나도 19집을 처음 들을때는, 주의깊게 정주행하지 않고 끌리는 트랙만 골라서 들어보고 "컨셉앨범은 아니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며칠 뒤 집에서 앨범의 가사집을 펴놓고 모니터헤드폰으로 주의깊게 정주행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나는 일단 한가지를 밝혀두고 싶다. 내가 컨셉 운운하는 것은 순전히 내 개인적인 느낌에 머무를 뿐이다. 우리는 느낌과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 판단에는 옳고 그름이 있지만 느낌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그리고 뭐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뜻도 아니기 때문에 기대일랑 일찌감치 접어달라는 이야기를 먼저 꺼내두고자 한다.
최근들어 "팩션(faction)"이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고 한다. 팩션은 "팩트(fact. 사실)"와 "픽션(fiction. 허구)"이 결합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팩션은 대강 이런 것이다: 가령 어느 소설가가 자신의 실화를 바탕으로 적당히 문학적 탓치를 가미하면서 적당한 상상력을 가미했다면 그것은 완전한 작가 자신의 실화도 아니고 완전히 허구로 꾸며낸 소설도 아닌, 그저 팩션일 뿐이다.
갑자기 컨셉 얘기 하다가 왜 딴소리가 나왔는가? 나는 19집을 정주행하면서 이 앨범은 바로 조용필의 팩션 스토리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팩트에 해당하는 것은 조용필 자신의 개인사에서 '아내'에 해당한다. 조용필은 전성기 시절 박지숙씨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후일 안진현씨와 재혼했다가 사별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순이 넘도록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랑과 아픔을 몸소 겪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픽션에 해당하는 것은 어떠한 일반적인 한국사람을 설정해 놓는 것이다. 그 사람은 보통사람으로서 이팔청춘 시절 이성에게 설렘을 느끼고 사랑도 해보고 이별도 해보며 나이를 먹어가고 지나온 인생도 회고해보며 다시 남은 여생에 "파이팅"을 외쳐보는 그러한 사람이다. 나는 바로 이 19집은, 일단 "픽션"에 해당하는 사람의 전체적인 라이프 스토리를 전개해 놓고(대중음악 앨범이니까), 그 전개된 스토리에 조용필 자신의 체험을 살짝살짝 얹어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10개에 달하는 트랙이 예외없이 전부 한 인간의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일생의 흐름에 따라 유기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럼 사랑 내용만 있는 앨범은 다 컨셉앨범인가? 그렇게 보기는 곤란할 것이다. 물론 조용필만 해도 사랑 내용으로만 이루어진 앨범은 이미 있긴 있었다. 그것은 6집과 14집이다(16집의 「바람의 노래」에 나오는 "사랑"은 일종의 인류애 비슷한 것이므로 제외함). 그러나 6집은 사랑 관련 곡의 단순한 모음이었고 14집은 이별과 고독을 이겨낸다는 단 하나의 내용만으로 모든 트랙이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즉 '한 인간의 일생을 깔아놓고 유기적으로 스토리가 배치되어 있는 경우'는 조용필의 디스코그라피에서 여태껏 없었다. 6집과 14집을 제외한 나머지 앨범들은 사랑 이외의 주제가 한 곡 이상 반드시 들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사랑 스토리의 컨셉인가? 이는 조용필의 "한"에 관한 생각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김익두 선생님이 펴낸 『상아탑에서 본 국민가수 조용필의 음악세계』에 있는 조용필의 언급이 나는 기억난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나는 한을 아는 사람들과 함께 노래해 왔다. 지금 젊은이들은 한을 잘 모른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의 한이 있을 것이다."
뭣이여, 한? 한이 뭐예요? 분명 나같은 젊은이들은 어르신들 세대에서 이야기하는 한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러기에는 환경이 너무 변했으니까. 하지만 젊은세대 나름의 한이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최근의 "취업난"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좁은 주제이고, 대중가요에 걸맞는 젊은이의 한을 이야기하자면 역시 "사랑"일 것이다. 즉, 나는 조용필 19집을 관통하는 주제를 "사랑을 하는 사람의 일생 스토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컨셉이 잡힌 까닭을 조용필의 "한을 노래해 왔다"라는 언급에서 우선적으로 찾아본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라는 컨셉 즉 픽션을 이야기하면서, 이 픽션에 조용필 자신의 경험(팩트)을 살짝살짝 얹어놓았다는 것이 나의 가정이다. (물론 이상은 나의 추측일 뿐이다.)
그럼 이제, 내가 생각하는 컨셉의 전제 하에 19집을 트랙 순서대로 한번 스토리를 짜 보도록 하자. 조용필 19집에서 설정된 그 "사람"은, 「Bounce」에서 마음이 끌리는 한 이성을 발견하고 "썸을 타는" 시작지점에 서 있다. 썸을 탄다는 말은 요즘 대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남녀가 사귀기 전에 먼저 만나보며 교류를 시작해나가는 시기를 말한다. 그리고 썸을 타다가 급기야 밤새워 순애보를 준비하고 고백해도 될지 고민한다. 그리고 「Hello」에서 고백할 생각에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이성을 사귀어 보지 못해서(-_-) 잘 모르겠는데, 아마 고백하기 직전에는 상대방에게 빠져들어 정신 잃기 직전이 되는가보다. 그리고 둘은 이윽고 연인이 되고 「걷고 싶다」에서 서로의 감정을 더 깊게 알아간다. 고요함으로 사랑한다 말해주던 나의 사람아! 둘은 내밀한 내면을 서로 공유하며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었을 것이다. "난 널 안고 울었지만 넌 나를 품은 채로 웃었네." 즉, 나는 너에게 나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북받치는 감정이 울지만, 너는 그러한 나를 이해해주고 꼭 안아주며 미소를 지어 준다는 것이다. 아마 "소리 내 부르는 봄"은 서로 내밀하게 알아가며 갈수록 사랑이 깊어지는 상황을 표현한 것 같다. 봄이란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은 소통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소리내 부른다는 것은 상호간의 소통 즉 대화를 통해 봄(사랑)이 더욱 깊어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젊은 세대의 언어인지 모든 세대가 다 쓰는 언어인지는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 주변환경에서 쓰이는 언어에서 "봄"이란 "사랑"을 의미한다. 너한테도 봄날이 왔구나! 라는 말은 너도 애인 생겼구나! 라는 말과 같다.)
이렇게 서로 깊게 이해하고 서로가 서로를 더욱 필요로 하게 된다면, 각자의 하루 스케줄이 끝나자마자 둘은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이다. 하여 「충전이 필요해」에서 보이듯 나는 힘들 때마다 너를 만나서 "충전"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하루가 힘들어도 너를 만나기만 하면 어느새 뜨겁게 채워진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당기기"만 하면 연애가 재미가 없다(라고 들었다. 아아 사랑 못해본 내 삶이여 =_=;;). 그래서 "밀기"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뻔하게 모르는 척 빼는 척 하지 말고 우리 솔직해 보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연애 과정에서 "밀당(밀고 당기기)"을 구사하다가는 점차 모르는 사이에 오해가 쌓이게 마련이다. 「서툰 바람」에서 보이듯 첫사랑을 철없이 떠나보낸 주인공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원하던 바람(바램)이 그저 서툴렀을 뿐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말해볼까」에서 떠나간 첫사랑을 계속 그리워한다. 단지 "한 걸음 모자라 보낸 그대"! 하지만 원망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사랑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보다 덜 서툰 내공(?)을 갖추게 되고 「널 만나면」에서 보이듯 새로운 교제를 시작한다. 이때는 고백을 할까 말까 하는 서툰 모습은 보이지 않고 비교적 신속하고 능숙하게 사귀게 된 것 같다. 그래서 고민하는 과정 없이 곧바로 교제하는 장면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제 지난 상처는 잊고, 내 마음 받아준 어제의 기쁨이 온다! 주인공은 바로 어제 마음을 고백하고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과 같이 아프게 떠나보내기는 싫으니 "좋아한다 변치 말자"라는 약속을 원한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은 첫 상대와는 이별을 했지만 두번째 상대와는 사별을 한 것 같다. 첫번째 상대와는 사랑을 "다 했다"라고 할 수가 있다. 만나다가 헤어졌으니. 하지만 「어느 날 귀로에서」에 이르러서는 "못다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즉 사랑을 "다 하기"도 전에 "못다 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두번째 상대를 잃고 나서 그는 자신이 지금껏 걸어온 인생을 돌이켜 본다. 이제 가슴 뛰던 젊은 날도 과거일 뿐이다. 꿈 많던 청춘 시절은 이제 과거의 추억으로 기억할 뿐이다. "내 푸른 청춘의 골짜기에는 아직도 꿈이 가득하고 아쉬운"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귀로를 맴도는 못다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도 애절하게 남아 있다. 이 그리움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따라서 때로는 잊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추억이 고통만을 유발할 리는 없다. 때로는 나를 미소짓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설렘」에서 바로 주인공은 자신의 내면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잊었던 너만의 향기로 문득 취한다." 다시 말해 너의 향기를 잊으려 했지만, 그 향기를 완전히 지우지 못해 어느새 다시 취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볼 그에게 마음으로나마 달려가고 싶어한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그대로! 아마 주인공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영화같은 사랑"이며,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나에게로 올 수는 없겠지만 "너를 내게로 보내줬어"라는 희망사항을 외치기도 한다. 너를 보내주었다는 것은 너라는 '산 사람'이 아닌, 너라는 '관념'이다. 너를 내게로 보내준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대로 보내고 말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희망사항으로나마 너가 나에게로 오기를 오래도록 기다리던 주인공,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남은 여생을 열심히 살아갈 다짐을 다시 한번 한다. 「그리운 것은」에서 보이듯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가슴 한 켠에 두고" 떠나면 될 일이다. "참 소중했던 그 느낌 그대로 가져가면"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어찌 사별한 상대를 매정하게 두고 떠날 수 있을까. "거친 광야를 가로질러 찾을 테야 너가 있는 그 곳"이라는 독백은 끊임없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속삭이는 향기 찾아 매화꽃이 만발한" 그 곳을 그리며..
이상이 내가 바라본 19집의 컨셉이다. 이것은 물론 나의 '상상'일 뿐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재미삼아 "이렇게 보는 놈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보아주시면 될 것이다. 즉 이는 나의 주관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잠깐 객관적인 특성에도 주목해 보자. 무엇이 객관적이라는 것인가? 바로 간주(특히 기타솔로연주)의 비중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는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보컬에 비중이 더 실렸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왜 그랬을까? 일단은 조용필이 기존의 자기 틀을 깨려 했다는 의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조용필 곡은 대부분 1절-간주-2절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으니. 하지만 이것 외로도 내가 보기에는, "보컬"에 비중이 실렸다는 점은 "가사"에 비중을 실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위에서 써놓은 대로 곡들의 "가사"의 스토리에 뭔가 포커스를 두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앨범의 컨셉에 대해 내가 잘못 상상한 것이라면 나는 헛수고를 한 셈이겠다.)
이러한 앨범 전체의 흐름 외로도, 각 트랙들을 별개로 뜯어보면 역시 재미있는 점들이 여럿 보인다. 「걷고 싶다」에서는 마치 18집의 「오늘도」와 「꽃이여」의 장점만이 융합된 듯 클래시컬하면서도 대중가요 본연의 성질을 잃지 않는 감각을 보여주고, 「충전이 필요해」에서는 각 멜로디 덩어리 부분들이 지닌 감성을 달리하면서 독특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쿵쿵거리며 신나다가도 여유와 충전이 필요하듯 잠시 늘어졌다가 다시 더 쿵쿵거리는 기법으로 진행되는 점은, 3집 「여와 남」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드라마틱한 전개를 응용한 진행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준다. 물론 작곡자야 다르지만.. 그리고 「서툰 바람」에서는 기타리스트 타미킴의 깔끔하면서도 느낌있는 연주가 과하지 않게 정확히 감성을 표현해주며, 조용필의 보컬은 곡의 첫머리에서부터 클라이막스 부분을 미리 등장시켜주고 있는데 이 클라이막스 부분의 멜로디와 조용필의 보컬은 정말 기막히게 융합되면서 듣는이에게 시원함과 후련함, 그리고 가사가 지닌 안타까움과 애수의 감성까지 그대로 그려낸다.
「말해볼까」에서는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클라이막스 부분이 심플하게 곡의 군데군데에서 반복되어 짙은 호소력을 던져주며, 절제의 미학이 몸에 배인 조용필의 보컬은 이 반복을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주고 있다. 특히 후반부의 "그대에게 하고 싶은 그 말 전해본다"에서 그 능력은 여실히 확인된다. 그리고 「널 만나면」은 앨범의 중반부까지 오면서 다소 피로할 수 있는 청자의 귀를 다시 확 잡아끄는 초반부의 보컬이 포인트. "아침을 깨우는 커피 향"보다 더 향기롭고 맑디맑은 조용필의 목소리는 정말 들으면서도 믿기 힘든 보컬임이 틀림없다. 또한 이 맑디맑은 보컬은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단지 파워가 더 실릴 뿐이다. (이는 조용필의 최근 공연에서 「미지의 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조용필의 최근 공연을 본 사람은 누구든지 경악했을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서 깨끗하면서도 맑은 두성으로 "멈추지 말아요"를 짱짱하게 외치는 조용필의 가창력에..) 그리고 클라이막스 부분이 후반부에 나올 때는 살짝 양념처럼 백그라운드에 외국인의 목소리인 듯한 "예!"하는 소리가 드럼박자와 맞물려서 등장하여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귀를 다시 잡아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귀로에서」는 조용필의 '절제미가 극대화된 보컬'을 경험할 수 있는 트랙. 유심히 들어보면 조용필의 목소리에 저절로 귀가 끌리게 된다. 이 트랙에서 조용필의 보컬은 마치, 곡에서 필요한 감성이 5정도 된다면 몸속에서 끌어올리는 감성은 10정도 되고, 그것을 목에서 걸러서 5정도만 입 밖으로 내보낸다는 느낌을 준다. 5까지밖에 못 끌어올려서 5를 전부 내뱉는 것과, 10까지 끌어올려서 5만 내뱉는 것은 천지차이다. 별 사족을 달 것도 없이 한번 조용필의 목소리를 유심히 들어보라! 조용필이 목 안에서 "원하는 만큼만 거르고 나머지는 다시 절제해서 속으로 되돌려보내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만약 다른 가수들이 이 곡을 불렀으면 자기 감성을 주체하지 못해 내지르는 피로한 곡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필 작법의 특징인 "꽉 짜인 체계"가 묻어나는 이 트랙을 거쳐「설렘」에서는, 다시 「서툰 바람」의 감성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등장하며 특히 2절에서 "설레 설레 설레"하는 부분은 듣는 이로 하여금 다시 귀를 의심하게 만든다. 3번 반복하는 "설레"에서 마지막 즉 세번째 "설레"에서의 조용필의 목소리는 정말 그 목소리를 듣는 이를 설레게 만들 수밖에 없는 보컬인 것이다. A-B-C부분으로 이어지는 전개가 자연스러워 조용필의 스타일과도 잘 어울리며, 클라이막스 부분(C부분) 멜로디의 후련함과 시원함까지 모든 부분이 완벽한 완성도를 지닌 트랙이다. 그리고 마지막 「그리운 것은」에서는 마치 조용필 베스트앨범의 「사랑해요」를 연상시키는듯한 "쇼킹하면서도 예상못한 편곡스타일로 곡을 시작"하며, 특히 보컬 멜로디라인의 전개가 통상적인 가요와 달리 변화로우며 한국적인 감성도 놓치지 않고 있어서 끝까지 청자들의 집중을 유지시켜 주고 있다. 슬픈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보컬을 뒷받침하는 반주는 신나는 분위기를 지님으로써 언밸런스하면서도 독특한 마무리의 느낌까지 앨범청자에게 제공한다. 그리고 앨범 전체의 트랙들이 대체적으로 여러 장르의 장점들이 융합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상이 내가 바라보는 전체적인 19집의 모습이었다. 이제 '숲'을 보았으니 '나무'를 한번 훑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각 트랙별로 나의 생각을 따라오면서 곡을 감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든 나는 음악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개인적인 느낌과 견해만을 쓸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뭐 대단한 전문분석을 기대하는 분들에게는 실망을 안겨 드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언급해두고자 한다. (※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처음 계획과 달리 맨앞의 두 트랙만 분석하고 마침.)
01. 「Bounce」
가장 먼저 선공개된 트랙이다. 왜 이 트랙을 선공개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경쾌함 때문일 것 같다. 최근 서양의 팝음악에서나 들을법한 이 경쾌함은, 곡의 B부분을 통해 조용필스러운 멜로디 전개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아마 A부분의 서양스러움이 B부분에서도 변화가 없었다면 이 곡은 이례적인 히트를 기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A부분 B부분 운운하는 것은 뭐 어려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곡의 구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중가요는 대체적으로 클라이막스 부분이 존재하며, 그 부분으로 도달하기 위해 '밀어주는' 앞부분이 한두 부분 깔리게 된다. 그걸 차례대로 A, B 순의 알파벳으로써 명명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Bounce」의 곡 구조에서 A부분을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릴까 봐 겁나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밤새워 준비한 순애보 고백해도 될까"로, B부분을 "처음 본 순간부터 네 모습이 내 가슴 울렁이게 만들었어 Baby You're my trampoline You make me Bounce"로 보았다. 어쨌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보자: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릴까봐 겁나
⇒ 곡의 전주에서 건반과 기타가 연주되기 시작하고 곡의 전반에 걸쳐 깔린다. 주목할 점은 '연주자들의 손맛'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사운드이다. 보통 이렇게 파트 하나하나를 부각시키는 믹싱은 최소한 내가 겪어본 음반들의 경우 각 파트들이 너무 잘 들려서 오히려 '하나되는 밸런스'를 느끼기에는 방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조용필의 이번 앨범은 그렇지가 않다. 또한 악기들 외로 조용필의 목소리 또한 주목할 만하다. 조용한 공간에서 좋은 헤드폰으로 청취하면 마치 조용필의 몸속에서 올라오는 공기가 목을 거쳐나오는 과정까지 그대로 귀에 들리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18집 때보다 더 깨끗하고 선명하게 들린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소리의 완성에 있어 믹싱이 '가장' 결정적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믹싱도 훌륭한 믹싱이지만 무엇보다도 '녹음'이 퍼펙트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사실 깨끗한 최고급 마이크에 극상수준의 소스가 들어온다면 별다른 복잡한 믹싱을 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물론 좋은 소스가 들어오더라도 이를 최대한 완벽한 상태로 만드는 믹싱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밤새워 준비한 순애보 고백해도 될까
⇒ 내가 「Bounce」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밤새워 준비 한순애보" 때문이다. 우선 멜로디의 전개는 끊어보자면 "미레도/미미/미레도레"가 된다. 내가 지금 빗금기호로 끊은 것은 멜로디 리듬의 마디를 표시한 것인데, 보통 노래가사의 경우 띄어쓰기로 표현되는 의미의 소단위가 이 멜로디가 쉬는 부분과 일치하는 것이 청취자들에게 보다 편안한 느낌을 주게 된다. 이 부분들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라임(rhyme: 다음 트랙에서 버벌진트의 랩부분을 해설할 때 설명하겠음)을 맞추기 위한 힙합노래에서야 자주 볼 수 있지만 멜로디 위주로 흘러가는 일반적인 가요에서는 보기 힘들고, 또 가요에서는 별로 바람직하지는 못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멜로디의 전개 뿐 아니라 "순애보"라는 어휘 또한 시종일관 쉬운 언어로 되어있는 곡의 가사 분위기를 살짝 깨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네 모습이 내 가슴 울렁이게 만들었어
Baby You're my trampoline, You make me Bounce
⇒ B부분으로 넘어왔다. 나는 이 부분을 듣고서 "아 역시 조용필이다" 하는 기분이 들었다. A부분이 기존의 조용필 음악에서 찾기 힘든 진행이었다면, B부분은 가지고 있는 정서가 조용필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용필적이라 함은 현존하는 언어들 중 어디에도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글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조용필 음악을 죽 들어온 사람들이라면 내가 무슨 느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어쨌든, 다소 이질적일 수도 있었던 A부분의 정서를 고집하지 않고 B부분에서 풀어주었다. 즉 A부분과 B부분은 스며있는 정서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상 전혀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나간 탁월함 또한 돋보이는 면이다.
수많은 인연과 바꾼 너인 걸
사랑이 남긴 상처들도 감싸줄게
⇒ 1절의 진행이 반복되지만, "남긴 상처들도"에서 조용필의 목소리를 백그라운드 코러스처럼 화음으로 겹쳐주고 "감싸줄게"의 첫음에 약간의 변화(높은 음)를 가미하였다. 이로써 단조로움과 지루함을 차단한다. 또한 "감싸줄게"의 끝음이 오르락내리락 다이나믹한 것을 보면, 이는 2절이 1절의 A-a부분이 아닌 A-b부분으로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이후 간주를 지나 브릿지(쉽게 말하자면 A부분도 B부분도 아닌 중간에 잠깐 등장하는 보컬부분 한 곳)로 넘어가는 자연스러운 전개에의 초석이 된다.
어쩌면 우린 벌써 알고 있어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랑의 꿈
외롭게만 하는 걸 You make me Bounce
⇒ 첫부분의 "어쩌면"을 위에서처럼 코러스로 겹쳐줌으로써 살짝의 변화를 가미하였다. 그리고 "사랑의 꿈"부분과 달리 "bounce"하는 부분의 복잡한 음처리는 목소리의 톤이 오토튠을 가미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에도 정확한 음정들을 놓치지 않고 지켜낸다. 이후에 곧 빠른리듬으로 경쾌하게 긁어대는 기타 스트로크가 맞물려 등장하는데, 이는 간주가 나올 것임을 암시하며 동시에 곡의 달리는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다. 그리고 간주는 곡의 전체적인 흐름과 보컬의 전개에의 연장선상에서 제 역할에 요구되는 만큼만 등장하고 퇴장해 버린다. 이는 조용필 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조용필의 기존 노래는 대체적으로 노래에서의 기타 간주를 절과 절의 보컬라인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정도로만 활용하려 하는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렇게 곡이 원하는 만큼만 정확히 각 파트를 활용하는 것은 괜히 화려한 기타솔로를 마구 집어넣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자세히 들어보면 조용필의 보컬의 소리 위치가 정가운데인데 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살짝 왼쪽으로 기타 간주 소리를 위치시켰다는 점도 짚고 넘어가자. 이 기타간주 후 브릿지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기타 스트로크 중 나오는 you make me bounce는 오토튠이 조금 쓰인 것 같다. 그러나 오토튠을 썼다고 해서 조용필이 모자라는 음정을 보완하기 위해 썼다고 오해하면 안된다. 오히려 일종의 이펙터처럼 톤 효과를 위해 살짝 맛만 내는 용도로만 가끔 가미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짝만 쓰인 오토튠은 쓰인 지점과 쓰이지 않은 지점을 구분하기가 나로서는 힘들다. 이에 따른 부정확성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언급해 둔다.)
Bounce Bounce 망설여져 나 혼자만의 감정일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어떡하지 눈물이 나
⇒ 만약 보컬진행상 이 브릿지부분이 없이 그냥 간주후 곧바로 절이 반복되었다면 이 곡은 끝까지 듣기가 지루한 곡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지점에 정확히 브릿지역할을 하는 짧은 부분을 넣음으로써 곡을 끝까지 듣게 만든다. 그리고 미세하게 깔린 촉촉한 톤의 건반소리(도솔도솔 시솔시솔 하는 건반이 뒷쪽에 위치하고 있음)가 어느새 하나 추가되어 깔림으로써, 반복되는 절 부분들과는 다른 브릿지부분으로서의 기능에 은은한 보탬을 주고 있다.
별처럼 반짝이는 눈망울도 수줍어 달콤하던 네 입술도
내겐 꿈만 같은 걸 You make me, Bounce!
⇒ 브릿지 직후 모든 파트가 전부 잠깐 멈추었다가 뮤트기타 없이 컷팅스트로크 기타가 반주로 깔리면서 다시 절이 시작된다. 그러나 오직 기타한대만 쓰였다면 단조로웠을 것이다. 가끔씩 정체모를 깎깎 소리가 첨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반적으로 깔려있지 않고 가끔씩만 등장한다. 이는 사람들에게 거의 기타소리만 들리게 하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단조로움을 상쇄시키는 의도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반주에 기타 한대만 사용되었다는 점은 곧 조용필의 목소리에도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효과를 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후 "you make me bounce"에서는 3옥타브 도라는 놀라운 고음역을 아무 어려움 없이 당연한듯 소화해낸다. 갑자기 등장하는 고음은 역시 후반부까지 집중력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장치로 보인다.
어쩌면 우린 벌써 알고 있어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랑의 꿈
외롭게만 하는 걸 어쩌면 우린 벌써 You make me Oh You make me
⇒ "외롭게만 하는 걸"부분의 끝음을 부드럽게 가성으로 처리하여 그동안의 절과 다른 변화를 주고, 더 이상의 격한 변화 없이 안정적으로 곡이 마무리된다. 달리는 분위기를 곡 중간에 쉬었다가 마지막까지 계속 가지고 왔는데 이는 다음 트랙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 듣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마지막에 "you make me bounce"가 아닌 "you make me"에서 가사가 멈춘 것 또한 곡을 촌스럽지 않게 만든 숨은 공신이다.
02. 「Hello」
네 눈빛을 보면 꽤 낯 가려 보여
자존심도 좋지만 난 너 생각뿐야
⇒ 기타 반주만 깔려있어서 보컬이 잘 들린다. 자세히 들어보면 보컬이 중지될 때 짧은 메아리가 살짝 적용되어 있다. 공간감을 만들어 입체적으로 들리게 하는 "딜레이"효과를 짧게 살짝 가한 듯 싶은데, 기막히게 딱 적절한 만큼 쓰인 이펙팅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보컬 시작 타이밍을 알아채기가 상당히 힘든 도입부 기타 스트로크도 이 곡의 독특한 점이 아닐까 한다. (내가 리듬에 무지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Ah~ 손끝만 스쳐도 그댄 벌써 나를 알아보리
Ah~ 우린 운명이라고 나의 느낌이 말해주지
⇒ 여기 "아(Ah)~~"하는 부분은 환갑이 넘은 보컬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매력적인 섹시한 보이스다. (나는 이 "아~"부분에서, 2002년 비상 콘서트 DVD의 「어제 오늘 그리고」가 떠올랐다. 그때 조용필은 "방랑 속에서"부분에서 살짝 "하~"소리를 마이크에 대고 넣었는데 그 짧은 순간 덕분에 음악이 확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네게 빠져들어 정신 잃기 직전이야 좋아한다 말해 Hello
네 숨결에 Oh~ 네 흔적을 남겨줄래 타투처럼 새길게 Hello
⇒ 19집이 이 곡 외로도 가끔 드럼 소리가 기존의 음반에서 잘 쓰이지 않은 타입의 소리를 적용하는데, 이는 마치 일렉트로닉이나 힙합 디스코 계열에서 쓰이는 듯한 음색의 드럼소리를 연상시킨다. 조용필이 자기 틀을 벗어나려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아마 그 시도의 일환이라고 보인다. 하긴 자기 틀 여부를 떠나서, 이 곡은 스타일 자체가 록음악 드럼을 쓰면 상당히 어색해질 것이다. 한편, "네 숨결에"와 "네 흔적을" 사이에 넣은 "오(Oh)~" 삽입은 탁월한 선택이다. 그리고 "타투"의 발음이 마치 우리말 어휘를 쓴 것처럼 자연스럽다는 점도 나는 주목하고 싶다. 보통 외래어를 노래에서 발음할 때는 이질감이 있게 마련인데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돼있는 점이 돋보인다.
Hello Hello Hello Hello Hello 닫힌 너를 열어
I need to get to know 너란 사람을 알고 싶어 Hello~
⇒ "hello"를 3번 하고, 그뒤로 2번 더 한뒤 "닫힌 너를 열어"로 나가는데, 앞의 3번 "hello"의 보컬 처리가 주목할 만하다. 1번째는 가성으로 달콤하게, 2번째는 "hel"부분은 가성으로 하면서 어느새 "lo"에서는 진성으로 바뀌어 있고, 3번째 "hello"는 진성으로 부른다. 즉 가성->가성+진성->진성으로 마치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내려오듯 창법을 바꾸면서도 특별히 신경쓰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처리되어 있다. 조용필의 내공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까? 가장 좋은 번역은 번역한 티가 나지 않는 번역이듯, 가장 좋은 창법전환은 전환한 티가 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hello"가 반복되면서 친근하게 다가서는 이미지를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열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서로의 눈빛을 보며 뜨거운 맘을 느껴
오늘이 지나기 전에 Hey 널 알고 싶어
⇒ 1절에서는 윗줄과 아랫줄의 멜로디진행과 박자가 유사했으나 2절에서는 "hey"에서 음정 변화를 주고 반박자 앞으로 당김으로써 단조로움을 탈피하고 있다.
Hey 원했던 사랑 바로 너 오직 너만 가득해
Hey 고민할 필요 없잖아 내게로 와 단숨에
⇒ 나는 여기 "가득해" 부분에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조용필은 보컬의 절제를 중시한다. 그러나 그 절제는 커다란 감정표출의 가능성이 눌리어져 있는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절제이다. 이 부분 "가득해"를 유심히 들어보면, 주인공의 프로포즈를 받아줄 수밖에 없을 듯한 기분이 든다. 더구나 "득해~"의 직전까지 호소력을 능구렁이같이 안보이게 감추고 있다가 살짝 드러낸 터, 호소력을 꾹꾹 눌러 절제하면서 살짝 우러내보인 보컬의 음색과 톤은 저절로 귀를 붙든다.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감싸 안을 사람 바로 나야 Hello
기다릴게 Oh 다정스런 목소리로 내게 대답해줄래 Hello
⇒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여기에서 살짝 힙합적인 리듬 요소를 느낀 청취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조금 이야기를 곁가지로 잠깐 틀어 보겠다. 본시 드럼이라는 악기는 박자를 치는 악기다. 기본적으로 "쿵 딱 쿵 딱" 한번을 하면 그것이 1마디이다. 여기서 "쿵"을 킥이라고 하고 "딱"을 스네어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듣는 이 부분은 "딱", 즉 스네어에서부터 보컬이 시작되는데, 보컬의 시작을 또 하나의 새로운 "쿵"으로 본다면(즉 '드럼이 스네어일 때의 보컬을 킥으로 본다면' 이라는 뜻. 리듬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킥에서 시작하는데 곡에서는 드럼의 스네어 때에 보컬이 시작하므로 드럼이 스네어이면 보컬을 킥으로 임의 대응시켜 본것), 이 보컬의 스네어 자리는 "사랑하고 감싸 안을 사람 바로 나야"에서 파란색깔 넣은 자리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컬라인에서의 스네어 자리라는 점 외에도 다같이 "ㅏ"모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조용필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분들은 여기에서 뭔가 일정한 리듬감을 지나치듯이 받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 현상의 원인은 보컬라인의 스네어 자리에 같은 모음을 가진 음절들이 일정하게 배열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같은 모음을 가졌다는 것은 비슷한 발음으로 들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비슷한 발음들은 마디의 일정한 자리에 짝을 이루고 배치될 때 특유의 리듬감을 형성한다. 그 리듬감을 극대화하여 활용한 리듬중심의 보컬 방식을 바로 랩(rap)이라고 부른다. 힙합적인 리듬 요소라 함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랩에 대해서는 아래 버벌진트 부분에서 설명하겠다. 그리고 물론 지금 이 부분의 조용필 보컬은 랩이 아니다. (홍호표 선생님의 『조용필의 노래 맹자의 마음』에서 이와 관련된 오류가 있음을 조심스럽게 짚고 넘어간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나레이션 부분을 랩으로 설명한 부분이나, 소단원 제목을 "...랩까지 통합 챔피언.."이라고 쓰신 부분은 명백하게 오류로서 정정을 요하는 부분이다. 조용필은 최소한 정규음반에서는 단 한번도 자기가 랩을 한 적이 없다. 홍 선생님께서 허심하게 나의 지적을 받아주셨으면 한다.)
H, E, double L, O. 보자마자 난 얼어붙었어 그대로.
⇒ 간주 대신에 랩이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일단 버벌진트가 쓴 랩가사의 문장을 보자. 분명히 전혀 어색한 곳 없는 훌륭한 한국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다. 사실 여기가 두번째 트랙 리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19집에서 가장 새로운 점은 조용필이 '랩' 피쳐링을 가미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의 주인공으로 버벌진트가 선택되었다. 버벌진트는 예전부터 힙합계에서 실력과 필력으로 인정받는 랩퍼였으며 힙합계에서 버벌진트의 실력적 위상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확고한 위치이다. 사실 나는 조용필이 랩피쳐링을 쓴다는 소식을 들을 때 피타입을 예측하고 있었지만 버벌진트가 선택된 것을 보고 조금 의문이었다. 나도 암암리에 조용필의 기존 음악들만 생각하고 피쳐링을 상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곡을 들어보니 정말 적절한 랩퍼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피타입의 스타일은 이 곡에는 맞지 않는다. 어쨌든 버벌진트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실력파 뮤지션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분명히 언급해두고자 한다.
나는 지금부터 랩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께서는 랩을 잘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대부분이 랩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 「Hello」라는 노래에서 버벌진트의 랩이 빠져버린다면 이는 마치 간주까지 완전하게 계획되어 짜여진 노래에서 간주만 쏙 빼먹는 것과 같은 치명타를 안기게 된다. 즉 이 노래를 제대로 알려면 8마디의 짧지만 중요한 버벌진트의 피쳐링을 조금은 알아두어야 하고, 나는 그 이해를 돕기 위해 짧은 지식이나마 꺼내어 해설을 해보려는 것이다.
음악은 선율 중심의 음악과 리듬 중심의 음악이 있다. 전자의 경우 사람이 노래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고, 후자의 경우 타악기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사람의 노래를 후자 즉 리듬중심 음악에도 적용시키려는 것이 바로 랩이다. 랩의 기원을 정확하게 추적한다면 물론 그것이 아니지만 랩의 특성을 편의상 이해하기 위한 비유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어쨌든 랩의 특성은 리듬이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람의 발성은 그 특성이 우리가 발성하는 만큼 음이 길어진다는 점이다. 즉 타악기처럼 한번 음을 내면 저절로 딱딱 경쾌하게 끊어지기가 힘들다.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사람의 목소리에서 발성 대신 발음으로 초점을 돌리는 것이다. 일정한 순간마다 비슷한 발음의 음절을 넣으면 그 음절이 리듬의 주기를 형성하여 자연스럽게 리듬감을 형성해 주기 때문이다. 이때 리듬의 주기를 결정하는 마디점에는 비슷한 발음의 음절이 들어가야 한다. 드럼을 들을 때도 쿵딱쿵딱 해야 리듬감이 생기지 쿵쿵쿵쿵만 계속하면 음의 고저가 없어서 단조로워져 버리는 것이다.
이때, 이 마디점에 들어가는 비슷한 발음의 음절을 "라임(rhyme)"이라고 한다. 즉 랩에 있어서 "라임"이 빠지면 랩이 아니다. 라임은 랩의 구성요소라기보다는 랩 그 자체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성을 위하여 더 안전할 것이다. 그래서 랩퍼들의 경우 반드시 작곡과 작사가 일치할 수밖에 없게 된다(여기서 내가 말하는 작곡이란 일반적인 노래로 치면 '보컬 멜로디'를 말하는 것이다. 즉 반주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랩을 한다는 것은 입으로 리듬을 뱉는다는 것이고, 리듬을 살리기 위해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나 표현을 적재적소에 위치시켜야 하며, 그 단어나 표현은 당연히 가사의 영역에 해당하므로 결국 자기 랩은 자기가 가사를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위의 버벌진트의 랩 가사 역시 당연히 버벌진트가 직접 쓴 것이다.
이제, 버벌진트의 가사에서 라임에 해당하는 부분에 표시를 넣어 알기 쉽게 살펴보자:
에이치 이 더블 엘 오
보자마자 난 얼어붙었어 그대로
분위기나 장소 탓은 아니야
이대로 너를 보내고 나서 가슴앓이 하
기는 싫어 나
그대의 뒤로 난
날개를 봤다면 과장이려나
누구 때문에 닫힌 마음인진 몰라
그 상처까지 안아주고 치료할
사람은 나야 마음을 열어 Hello
표시 넣은 것을 철자에 상관하지 말고 입으로 그대로 발음해 보자. 대표적으로 하나만 예를 들면:
-싫어 나 [시러나]
-뒤로 난 [뒤러난]
여기에서는 [ㅣ+러+나]의 발음이 유사하다.
드럼으로 치면 쿵딱쿵딱에서 "딱"에 해당한다고 보면 대체로 큰 무리가 없다.
이러한 발음상의 유사함과, 그것을 고려했다는 점이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가사 전개, 이것이 버벌진트 랩의 우수한 점들 중 하나이다. 매우 유려한 솜씨로 랩을 짠 고심이 엿보인다. 특히 "~진 몰라"의 라임이 쓰인 부분을 들어보면 "닫힌"에서 "닫"에 발음 포인트를 두고 있는데 내 생각엔 의도적인 것 같다. 만약 "힌"에 발음 포인트를 두었다면 "닫힌"과 "마음인진"의 각 마지막 음절이 라이밍되어서 정작 "~진 몰라"가 라임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 좀 곤란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라임 배치를 위해 "가슴앓이하/기는"부분처럼 의미단위를 임의적으로 자른 부분도 보인다. 이것은 내가 「Bounce」에서 "준비/한순애보"부분을 이야기한 것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참고하면 좋다. 또한 여기서 버벌진트의 랩은 일종의 간주 역할을 하고 있으며, 주객전도가 되지 않기 위함인지 약간 볼륨이 낮게 믹싱되었다. 또한, 이 버벌진트의 랩을 일종의 간주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13집의 「추억이 잠든 거리」에서 갑자기 모든 악기들이 작아지면서 툭 튀어나오는 방식의 간주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음악과 영상은 매치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가사내용과 영상의 순간순간이 잘 매치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글쓴이(나)에 대하여
원래는 이후로 「걷고 싶다」의 리뷰가 이어져야 하겠지만 일단 대중에게 호응을 크게 얻은 이 두 트랙을 분석하는 것으로 본 리뷰글은 일단락지으려 한다. 사실 이 리뷰글은 트랙분석부터 하고 나서 전체적인 내 견해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대학생인 나의 나름 바쁜 스케줄(?) 때문에 도저히 시간적 여유를 낼 틈이 보이지 않아서, 글의 순서를 바꾸어 전체적 모습부터 해설하고 나서 기존에 써놓은 두 트랙의 분석을 끝자락에 붙여놓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다소 장황한 감이 있는 글이지만 누군가에게 조용필19집 감상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나는 글의 군데군데에서 본의 아니게 내가 젊은사람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중학생때부터 조용필 팬클럽에 가입하고 그쪽 생활을 하면서, 가끔 젊은 신규회원들이 "나는 30대", "나는 스물몇살"이라고 밝히는 것을 보고 조용히 미소지은 적이 많았다. 그만큼 젊은 팬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이다. 나는 내 젊음을 자랑할 생각은 없다. 아직 삶의 경험이나 지식의 깊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있다고 믿는다.
나는 초6때 우연히 「서울 서울 서울」악보를 보고, 그때까지 동요만 듣던 습관을 버리고 처음으로 가요라는 것을 찾아듣게 되었다. 당시 부모님은 내가 알아챌 수 없는 웃음을 띠면서 조용필 테이프를 사다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중1 때 인터넷으로 조용필 팬클럽을 알게 되고 가입 및 활동을 시작했다. 그것이 2002년이었다. 지금 24살이고 팬생활이 11년 되었으니 나로서는 삶의 절반 정도의 시간을 조용필 음악으로 보낸 셈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다소 오만해보일 수 있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일단은 지금 20대 중에서 나보다 조용필 음악에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는 오만한 생각, 그리고 그에 따라 '젊은세대'와 '조용필음악'을 모두 잘 아는 나에게는 그 둘을 "소통시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을 했다. 사실 한국대중음악에 관해서라면 나보다 훨씬 방대한 앎을 가진 20대가 많을 것이다. 당장 내가 아는 친구들만 해도 나보다 훨씬 음악을 많이 듣는 사람이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적어도 '조용필 음악'으로 한정시켜 본다면, 조용필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나 정규음반 전체를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20대는 아마 극소수일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음악 많이 듣는 친구들도 유독 조용필의 음악세계에 대해서는 일반인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인식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조용필 음악을 좀 들어보았다 하는 아이들도 조용필이 가지고 있는 음악철학이라든가 위대한탄생 밴드와 맞물려 이해해야 할 지식을 보유한 경우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조금만 지적을 하면 성질을 내는 것이었다. 아니 조용필이라고 해도 작사가한테 가사를 받아서 자기 식대로 고칠 수가 있느냐, 그게 무슨 음악적 철학이냐.. 그러면 나는 조용히 입을 닫을 뿐이다.
앞으로 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조용필, 그리고 위대한탄생 밴드에 관한 공부를 꾸준히 하고, 그 탐구가 진척됨에 따라 글을 몇번 더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글의 초점은 조용필을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 포괄하여 겨냥할 것이다. 나는 몇년 전에 조용필 음반 전체 리뷰를 시도했다가 무참히 실패한 적이 있었다. 당시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여기저기 주워들은 정보만 나열하기 바빴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글은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글이란 것은 이해되기 위해 쓰는 것이고, 이해되라고 쓰는 글은 먼저 그 글을 쓰는 나부터 완전히 소화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쉬다가, 이번에 신보도 발매되고 해서 오랜만에 리뷰글을 썼다. 나의 원칙은 단 하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내용만 다룬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21살 때에 쓰던 것처럼 거창한 글은 쓰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나의 느낌만을 리뷰에 담을 뿐이다. 그리고 젊은세대들이 조용필을 정확히 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가끔씩 정보 인용을 어딘가에서 할 뿐이다. 조용필의 음악은 반드시 젊은 대중에게도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 19집의 성공은 매우 중요하다. 젊은세대들에게 조용필의 음악세계를 온전히 알리는 시작점이 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 18집 때와는 다르다. 18집 때는 짜집기 음반 내놓는 이들이 훼방을 놓았지만 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대학가 식당을 돌아다니면 「Bounce」와 「Hello」가 울려퍼지고 학교앞 벤치에 앉아 있으면 「걷고 싶다」를 틀어놓고 지나가는 학생도 보인다. 이 열기가 식기 전에 조용필에 대한 관심이 또다른 방향으로 지속·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용필의 80년대 음악들만이 계속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을 것이고 조용필에 대한 온당한 평가는 물건너가게 되어 버린다. 나는 그러한 사태를 원하지 않는다. 언제까지 「돌부항」만 듣고 앉아있을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조용필의 90년대 이후 음악들이 집중적으로 조명되어야 한다. 나의 글이 그러한 걸음에 조금이나마 디딤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혼자만의 생각에 젖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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