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좀머 씨 이야기
참 잘 쓴 독후감 한 편을 읽었다.
내 나이 또래의 독일 작가인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uskind)가 지은 ‘좀머씨 이야기’(The Story of Mr. Sommer)라는 소설의 독후감이었다.
새롭고 독창적인 뉴스를 제공하는 강소언론사이기를 자부한다는 ‘NEXTNews’의 ‘책읽자 코너에 실린 것으로, 2020년 3월 30일에 김승직 기자가 ‘<좀머 씨 이야기> 미지의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라는 제목으로 쓴 리뷰였다.
기자는 그 리뷰의 초입에서 ‘좀머씨 이야기’에 대한 독후감을 쓰게 된 그 이유를 간략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이랬다.
기자는 죽음이 인간을 가장 창의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계속해서 회자되는 명작은 죽음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고 죽음을 주제로 하지 않더라도 서사를 구성할 때 필수적인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죽음은 해결할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인 공포이고 미지의 영역이며, 이는 기술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기자는 인간은 미지의 영역으로 인한 공백을 상상력으로 메꾸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증거로 어린 시절의 상상력이 어른이 되면서 점점 사라지는 것은 세상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며 미지의 영역이 줄어들기 때문이 아닌가?
즉 상상력이 미지의 영역을 현실로 끌어오는 힘이라면 죽음이야말로 상상력을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존재인 것이다. (죽음은 삶의 마감기한이나 다름없으니 시험전날 벼락치기를 하듯 엄청난 효율을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오늘은 죽음만큼이나 베일에 둘러싸여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남자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다.//
독후감은 그 뒤를 잇고 있었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주인공인 소년이 사는 호숫가 마을엔 '좀머'라는 독특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페인트공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일은 하지 않고 하루 종일 가방과 지팡이만 가지고 마을이나 산 어귀를 쏘다닌다.
덕분에 그의 아내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마을 사람 누구도 그의 이상행동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극심한 밀폐공포증 환자이며 집에 있는 것을 참지 못해 하루 종일 걸어 다닌다고 추측할 뿐이다.
주인공은 아버지와 경마장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좀머 씨를 처음 만나게 되는데, 당시 악천후가 계속되고 있어 그의 아버지는 “이러다 죽는다”며 좀머 씨에게 차에 탈것을 권유하지만 그는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라고 말하며 떠나버린다.
주인공이 두 번째로 좀머 씨를 보게 된 것은 자살을 결심했을 때다.
그는 짝사랑하는 소녀와의 약속이 무산되고 피아노 선생님에게 심하게 혼나는 등의 일이 반복되자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나무에서 뛰어내려 죽을 결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나무에 매달린 주인공이 손을 놓으려는 찰나, 어디론가 걸어가는 좀머 씨를 발견한 그는 잠시 행동을 멈춘다.
좀머 씨는 주인공이 매달려 있는 나무 아래서 신음하듯 한숨을 내뱉고 빵과 물을 순식간에 먹어 치운 뒤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주인공이 세 번째로 좀머 씨를 만나게 된 것은 그가 16살이 되던 해다.
그 즈음엔 좀머 씨의 아내가 죽어 그가 어떻게 생계를 꾸릴지 걱정되는 상황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자전거가 고장 나 멈추는데 그때 호숫가에 서있는 좀머 씨를 보게 된다.
이윽고 그는 망설임 없이 호수로 걸어 들어가고, 주인공은 그 모습에 충격 받아 비명을 지르거나 구조요청을 하지도 못하고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좀머씨가 사라진 이후 마을 사람들은 그가 미쳐서 사라졌거나 폐쇄공포증으로 이민을 떠났을 거라 추측할 뿐 죽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가만히 내벼려 두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고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 소설에서 좀머 씨는 주인공과 마을 사람들에게는 물론 독자에게도 미지의 존재기 때문에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왜 그는 하루 종일 걸어야만 했는가?”라는 질문 때문에 이 소설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곤 한다.
앞서 작가인 파트리크 쥐스킨트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그는 독일의 작가로 소설 ‘향수’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좀머 씨’처럼 자신이 외부에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인물로 인터뷰를 청하는 기자들에게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라고 소리친 일화가 있을 정도다.
또 그는 자신의 소설을 독자가 해석하려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밝힌 바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작가가 본인을 좀머 씨에 투영한 자서전격 소설이란 해석도 있다.
또 간단하게 ‘동네 바보 아저씨를 보는 아이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 좀머가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죽음에 대한 남다른 태도를 가진 심오한 인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자는 이 소설에서 ‘미지의 대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얻었다.
사람은 본디 미지의 대상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것에 이질감을 느낀다. 때문에 그 대상을 자신의 인지범위 안에 두기 위해 무시하거나 혐오하거나 숭배하는 등의 방어기재를 펼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마을사람들은 좀머 씨를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관심을 두지 않는 복합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결국 그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바는 미지에 대상을 이해하려 하는 것도 좋지만 있는 그대로 지켜볼 줄도 알아야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때론 침묵이 곤란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이 소설을 읽었다.
도서출판 ‘열린 책들’에서 2000년 3월 15일에 신판 2쇄로 펴낸, 프랑스 삽화가 장자끄 상뻬(Jean Jacques Sempe) 그림에 유혜자 옮김의 소설책이었다.
그동안 책장 속에서 먼지만 덮어쓰면서 박혀 있던 책이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입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내 기억이 없다.
다만, 책이 출판되던 때인 2000년 그 해는, 내가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공안과장과 총무과장을 겸직하게 된 때로, 내 생애 처음으로 작은 조직의 리더로서의 보직을 맡게 되었었다.
많은 직원들과 함께 하다 보니 그들에게 업무 이외의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깨우침을 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러려면 그 소양이 있어야 했고, 그 소양은 책을 읽어서 쌓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스펜서 존슨의 ‘선물’이라든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든가 ‘모리 교수와 함께한 화요일’이라든가 하는 책도 읽게 됐고, 미치 앨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이라는 책도 읽게 됐고, 켄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라는 책도 읽게 됐고, 앤디 앤드루스의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라는 책도 읽게 됐고,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도 읽게 됐고, 그 책들에서 깨우친 것들을 직원들에게 전해주고는 했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참 쪽팔리게 했던 책이 있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이었는데, 내가 그 책을 현실로 읽기 전만 하더라도 ‘고도’를 비행기가 나는 그 높이를 뜻하는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 혼자 얼굴 붉어지는 쪽팔림이었다.
‘좀머 씨 이야기’라는 이 소설책도 아마 그즈음에 읽으려고 사놓았다가, 그대로 책장 속에서 먼지만 쌓이게 된 것 아닌가싶다.
그랬던 이 책을 2020년 5월 26일 화요일인 어제 하루에 다 읽었다.
‘slim life’라고 해서 최근 들어 내 삶을 좀 더 얄팍하게 정리해가는 과정에서 책장 정리도 하게 됐었는데, 그 책장을 정리하다보니 안 읽은 책들이 여러 권 있음을 알게 됐고, 그 책들을 읽지도 않고 그냥 정리하기는 아까워서 일단은 읽어보고 난 뒤에, 누구를 줄까 아니면 버려버릴까, 또 아니면 책장에 다시 꽂아두고 두고두고 읽을까, 그 선택을 할 요량에서, 이 책을 끄집어내서 읽게 된 것이었다.
역시 읽기를 잘했다.
꼭 내 이야기를 풀어간 것 같아서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꿈 많은 소년과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좀머’라는 남자 그 둘이었다.
소년의 부모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소년의 또래 친구들 몇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 등장은 소년과 좀머와의 관계를 보충해주는 정도의 역할로 그칠 뿐이고, 소설의 핵심은 소년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익어가는 그 생각의 세계와, 텅 빈 배낭을 짊어지고 남루한 옷차림에 기다랗고 이상한 호두나무 지팡이를 쥔 채 끊임없이 길을 걷는 좀머의 이해할 수 없는 처신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생각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책의 독후감을 쓸까 말까 하는 그 꿈틀거림이었다.
한 편으로는 공연히 글 쓰는 수고를 왜 하느냐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 소설에서 느낀 바를 주위에 두루 알려서 공감을 얻어내는 것도 괜찮겠다하는 생각도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그 소년 같기도 하고 좀머 같기도 해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도 다 나 같고 우리들 같았다.
호숫가 숲길을 같이 걷자고 했다가 약속한 그 당일에 와서, 그동안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기다렸던 소년의 마음은 하나 아랑곳 하지 않고, 아주 쉽게 그 약속을 깨뜨려서 소년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마는 또래의 무심한 소녀 같기도 하고,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기를 싫어하면서 늘 혼자만 걸어 다니는 좀머를 두고 이 말 저 말 지어내는 못된 마을 사람들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주위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결론을 냈고, 결국은 독후감을 쓰기로 작정을 했다.
그런데 막상 쓰려니 글이 쉽게 나오지를 않았다.
그래서 좀 더 쉽게 쓸 생각에서 인터넷 Daum사이트 검색을 했다.
검색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었고, 또 독후감을 남겼다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이 책의 가치가 가볍지 않음을 또 알게 된 것이다.
독후감을 쓰기로 작정한 것이 참 잘했다 싶었다.
이왕이면 좀 더 알찬 독후감을 주위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인터넷 Daum사이트에 게시되어 있는 그 많은 독후감을 다 읽어봤다.
그 중에서 딱 하나 고른 것이, 이 글 초입에서 소개한 ‘NEXTNews’의 ‘책읽자 코너에 실린 김승직 기자의 리뷰였다.
추천사들도 있었다.
다음은 그 중에서 고른 네 편이다.
쥐스킨트는 ‘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 이후 유럽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모든 관례를 깰 정도로 전 세계 독서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작가이다. - 코리에레 델라 세라
쥐스킨트의 작품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문학 작품과도 다른, 유례가 없는 동시대의 문학에서 한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 르 피가로
쥐스킨트의 책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듣도 보도 못한 특이한 사건들 때문에 도저히 중간에 그만둘 수가 없다. -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장자크 상페는 위대한 예술가다. 일상의 부조리함을 섬세한 선과 세련된 프랑스식 유머로 묘사하는 우리 시대의 거장이다. - 뉘른베르크 차이퉁
소설의 시작은 이랬다.
오래 전, 수년, 수십 년 전의 아주 오랜 옛날, 아직 나무타기를 좋아하던 시절에 내 키는 겨우 1미터를 빠듯이 넘겼고, 내 신발은 28호였으며, 나는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몸이 가벼웠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무렵 정말로 날 수 있었다. 적어도 거의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아니 좀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당시 내가 진짜로 그럴 각오를 하고 제대로 실행에만 옮겼었더라면 실제로 몸을 날릴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꿈 많은 소년의 등장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내 고향땅 문경 점촌의 뒷산인 돈달산을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올랐다가 달려 내려오곤 했었다.
그때 두 팔을 쫙 벌리면서 달리면 혹 날지 않을까 하는 좀 엉뚱한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뿐만이 아니라, 20대 30대 청년 시절에도 그런 생각을 간혹 했었는데, 똥배가 된 지금은 아예 그런 생각을 접고 말았다.
나를 침묵하게 만들었던 또 다른 기억은 좀머 아저씨가 물 속에 가라앉던 모습이었다.//
소설의 맨 끝대목이 그랬다.
간섭을 그리도 싫어하던 좀머가 스스로 호수에 빠져 자살을 하고 있음에도 소년은 침묵하고 만 것이다.
소년으로 하여금 그렇게 침묵하게 한 것은, 지난 날 빗길에서 좀머가 외치듯 말했던 그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곧 이 말이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다음은 좀머가 그 말을 하게 된 대목이다.
「어서 타시라니까요. 글쎄! 몸이 흠뻑 젖으셨잖아요! 그러다가 죽겠어요!」
그런데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표현은 우리 아버지의 언어 습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진심으로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말은 틀에 박히 빈말이다〉라고, 이버지는 우연히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말을 듣거나 읽을 때면 우리에게 그렇게 설명하고 했다.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어중이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그런 말을 우리에게 할 때 아버지는 대개 좀 흥분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그런 것들은 〈차 한 잔 마시세요. 그러는 게 몸에 좋을 거예요〉라든가 〈의사 선생님, 환자의 상태가 어떤가요? 환자가 이겨낼 수 있을까요?〉등의 말들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쓸데없는 말들이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
그래서 〈그러다가 죽겠어요〉라는 따위의 말들을 아버지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박이 떨어진 도로에 이슬비가 내리던 날, 좀머 아저씨 옆으로 차를 몰면서 그런 틀에 박힌 빈말을 아버지가 열린 창문을 통해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그러다가 죽겠어요!」
그 말에 아저씨가 우뚝 섰다. 내가 보기에 그는 바로 〈죽겠어요〉라는 말에서 빳빳하게 굳어지면 멈춰 서는 것 같았다. 그것도 너무 갑작스럽게 그렇게 해서 아버지는 그의 옆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급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아저씨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호두나무 지팡이를 왼손으로 바꿔지고는 우리 쪽을 쳐다보고 아주 고집스러우면서도 절망적인 몸짓으로 지팡이를 여러 번 땅에 내려치면서 크고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이 대목에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겨야 했다.
나를 그냥 놔두지 않았던 세월을 생각했고, 그 세월과 함께 한 주위 사람들을 생각했다.
곧 생각 정리가 됐다.
좀머가 그랬듯, 내 쪼대로 세상을 사는 것이 내 자존이라는 생각으로의 정리였다.
그 정리된 생각으로, 내 이번 주말에 해발 1,915m의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