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
수년 전에 어느 대통령이 ‘역사 바로 세우기’를 제창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이가 비판하기를, 역사란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사실들을 말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다르게 세울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다. 역사란 단순한 과거의 사실이나 그것을 기록, 나열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그의 역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항상 다시 쓰여진다는 점을 밝히고,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계속적인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즉 역사란 과거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에 바탕하여 새로운 해석과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과거의 사실에 현재의 생각을 접목시킨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를 기록하는 목적은 사실에 대한 직서(直書)와 포폄(褒貶)이다. 즉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 그에 대해 역사가가 옳고 그름이나 선하고 악함을 평가하는 것이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이나 동호직필(董狐直筆)이란 말도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자는 과거를 거울삼아 기강이 무너진 천하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취지로 춘추를 집필하였다. 칭찬과 비난을 엄격히 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을 세워, 여기에 어긋나는 것은 철저히 배격했으며,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집필하였던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기록하면서, 중간 중간에 ‘태사공왈(太史公曰)’이란 말을 앞세우고 자신의 생각으로 인물을 포폄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다. 태사공(太史公)은 사마천이 태사 벼슬을 한 데서 유래하는데 사마천을 자칭한 말이다. 그러니 ‘태사공왈(太史公曰)’ 이하의 부분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사마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 내용이다. 사족을 덧붙이면, 본래 사기는 ‘태사공서’ 또는 ‘태사공기(太史公記)’라고 일컬어졌다. 이 ‘태사공기’의 약칭이 바로 사기(史記)다. ‘사기’라는 말은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지 약 300년 뒤의 일이다.
어떻든 사마천은 여기서 포폄의 사관을 피력하였다. 그 일예를 항우의 사적에서 읽어 보자.
사마천은 제왕이 되지 못하고 고조 유방에게 패한 항우의 이야기를 열전이 아닌 본기에 실어 ‘고조 본기’ 앞에 배치하였다. 이는 항우가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공적이 있고 또 실질적인 통치 지위를 확보하고 있음에 유의한 것이다. 즉 진나라를 멸망시킨 항우가 초패왕이 되어 왕이라 지칭되는 제후를 임명하는 등 사실상의 권력을 확보한 것에 주목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일반 세인들과는 다른 사가의 안목을 읽을 수가 있다.
이러한 포폄의 정신은 우리의 삼국사기도 마찬가지다. 이는 김부식이 올린 진삼국사(進三國史表)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포폄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고기(古記)라는 것은 글이 거칠고 졸렬하며 사적이 누락되어 있어서, 임금 된 이의 선함과 악함, 신하된 이의 충성과 사특함, 나라의 평안과 위기, 백성들의 다스려짐과 혼란스러움 등을 모두 드러내어 경계로 삼도록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서가 지녀야 할 중요한 근간이 포폄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즉 역사서는 좋은 포(褒)만 기록하여 후세에 가르칠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폄(貶)도 반드시 기록하여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포(褒)와 폄(貶)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포(褒)도 중요하지만 폄(貶)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진(晉)나라의 역사서 이름이 승(乘)이고, 초(楚)나라의 역사서 이름이 도올(檮杌)임에서 우리는 그것을 또 한 번 확인한다. ‘승(乘)’이란 좋은 것 나쁜 것을 함께 싣는다는 뜻이고, ‘도올(檮杌)’은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전설상의 동물로 네 가지 흉물 중의 하나이다. 호랑이를 닮은 몸에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있고 멧돼지의 송곳니와 긴 꼬리를 달고 있다. 거만하고 완고한 성격으로 매우 난폭하고 마구 설치며 싸울 때는 죽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으며, 평화를 어지럽히는 간악한 동물이다. 또 도올은 좋지 않은 악목(惡木)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 거기에다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의 행적을 적어서 후세에 경계로 삼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춘추를 편찬하여 그 속에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수없이 기록하였고, 춘추를 해설한 좌구명의 춘추좌전에도 멋지고 본받을 만한 인물이 아닌 추악함과 삿된 인간상들을 한정 없이 기록한 것도 다 그러한 연유다. 그로써 후세의 경계로 삼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편찬하니 난신적자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역사서에는 좋은 나무와 악목을 함께 실어 후세에 경계를 삼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 역사에 나타난 좋은 나무와 악목 몇 가지를 살펴보자. 먼저 좋은 나무인 민영환과 나쁜 나무인 송병준을 보기로 하자.
민영환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분임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선생은 을사늑약이 이루어지자 의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조약 체결에 찬성한 매국 대신들을 성토하고 조약을 파기하도록 상소하였다. 어전에 나아가 늑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5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통렬히 읍소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헌병을 출동시켜 백관들을 해산시키고, 선생과 조병세를 잡아 가두고 말았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안 선생은, 통곡한 끝에 45세의 한창 나이로 2천만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 2통을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다. 선생이 동포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 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이 같은 선생의 죽음과 유서는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어, 전 좌의정 조병세, 전 대사헌 송병선, 전 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등도 자결, 순국함으로써 일제 침략에 대한 강력한 의열투쟁이 자리 잡게 되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송병준은 이완용과 함께 고종을 퇴위시켰다.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송병준은 이완용과 같은 급의 반민족매국노이지만 이완용과는 또 다른 궤적을 걸으며 살아온 인물이다. 고종을 퇴위시킬 당시도 이완용은 교언영색으로 고종을 설득하려하지만, 송병준은 어전에 무엄하게 칼까지 차고 들어가 고종을 이렇게 협박하였다.
“일본에 들어가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하든가 통감 이토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해야 하는데, 이토에게 사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만일 그렇게 할 경우에는 폐하를 죽이고 자살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 다 불가할 경우에는 황태자에게 양위하십시오.”
민영환의 유서를 읽는 이라면 누구든지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질 것이며 치오르는 한 가닥 분노를 금치 못할 것이다. 또 지금 송병준의 말을 글로나마 읽는 이라면, 누구라도 땅을 치고 통탄할 것이며 그 간악함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교과서에는 좋은 나무 이야기를 심어 후세인에게 본받게 하고, 악한 나무 이야기도 함께 실어 후세인들로 하여금 경계를 삼도로 해야 한다. 어쩌면 나쁜 나무 이야기는 좋은 나무 이야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나쁜 나무 몇 가지를 떠올려 볼까 한다.
병자호란 때 오랑캐보다 더 나쁜 짓을 한 놈이 정명수(鄭命壽)라는 조선 사람이다. 명나라가 요동을 침범한 후금[淸]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강홍립으로 하여금 1만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했는데, 이때 정명수도 강홍립을 따라 출정하였다. 강홍립의 군대는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거짓으로 패배해 후금에 항복했는데 이때 정명수도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듬 해 조선 포로들은 석방되었으나, 그는 청나라에 살면서 청국어를 배우고 청나라에 우리 나라 사정을 자세히 밀고해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그 후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통역으로 일하면서, 청나라의 조선 침략에 길을 안내하면서 청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그 뒤 청나라의 세력을 믿고 조정에 압력을 가해 영중추부사까지 올랐다. 그는 걸핏하면 조선 사정을 청나라에 밀고해 충신을 죽였고 간신과 결탁해 국정을 농락했다. 조정이 국방에 힘쓰려 하면 달려가 일러바치는 통에 다들 벌벌 떨었다. 조선에도 충신이 없지 않았지만, 여우 같이 간악한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웃 강대국을 등에 업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를 두려워해 뇌물을 주고, 친척들에게도 벼슬을 주어 비위를 맞추었다. 그는 인척을 벼슬에 오르도록 강제로 요구하고, 관리들을 구타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리며 조정을 좌우하다가 청나라로 건너가 살았다. 그 곳에서도 왕을 모독하고 갖은 행패를 부렸으며 청나라로 보내는 세폐(歲幣)까지 노략질하는 몹쓸 짓을 저질렀다. 결국 심양에서 이사용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조선 시대에서 이완용이 나오기 전까지 간신의 대명사로 일컬어져 온 사람이 인조 때의 김자점이다.
김자점은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동지를 배반하고 세조에게 고해바친 김질의 후손이다. 음서(蔭敍)로 벼슬길에 나아가 광해군 때에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인목대비 폐모론이 발생한 이후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귀, 최명길 등과 함께 반정을 기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는데, 사실 그는 공적보다 실세였던 김상궁에게 뇌물을 안긴 때문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간관들의 비난 속에 강화도에 위리안치 유배에 처해졌으나, 운 좋게 1년 만에 풀려났다. 그 후 인조의 신임 아래 정권을 담당하면서 청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혀갔다.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사림(士林)의 세력이었던 송시열, 송준길 등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어, 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친청파인 그는 위협을 느끼고, 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 이형장을 통해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을 추진한다고 청에 밀고했다. 더러운 매국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북벌론은 실제 북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국내적으로 청에 대한 복수 의식을 고취하면서 자강을 모색하는 슬로건이라 할 수 있다. 북벌론을 둘러싼 싸움은 조선 땅에서 조선인끼리 해야 할 것이었다. 북벌론이 또 다른 호란을 불러오지 않을까 진심으로 걱정했다면 최소한 청에 고자질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에서 권세를 누릴 대로 누린 김자점 부자가 자기 살겠다고 한 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 후 김자점은 당시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인조가 죽은 지 6일 만에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뒤에 아들 김익(金釴)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처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치가 떨리는 사건이라면 명성왕후 참살 사건이 아닌가 싶다. 한 나라의 궁궐을 마구 짓밟으며 국모인 왕후를 무참히 살해한 것은 고금의 역사에 볼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명성왕후 참살 하면 일본의 무도한 낭인 무리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쁜 놈이 있는바, 그가 곧 조선인 우범선이다.
그는 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1881년 고종의 별기군에 자원하여 참령이 되고 김옥균이 주도하는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그 후 군국기무처 의원이 되고 갑오개혁에 가담했는데, 일본이 주도한 훈련대가 창설되자 제2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895년 10월 8일 훈련대가 해산되자, 다음날 우범선은 이두황과 함께 휘하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 명성황후를 참살하는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 우범선은 왕실을 지키는 훈련대 대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궁궐 문을 열어주고 살육 현장을 호위했다. 전날 일본 공사에게 만행을 재촉한 것도, 칼을 맞고 헐떡거리는 왕후를 불태우는데 앞장선 것도 우범선이다. 그는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부어 태우는 마지막 처리 과정까지 가담한 것이다. 고종황제의 아관파천 뒤 일본으로 망명, 도쿄에 거주하였는데, 일본정부의 보호와 후원을 받았고, 일본 여성 사카이와 결혼하여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농학자 우장춘이다.
결국은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고영근, 노원명에게 암살당하였다
이상에서 우리 역사에 나타났던 나쁜 나무 몇 그루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우리 역사의 고금에서 수많은 ‘좋은 나무’의 인물을 갖고 있다. 광개토대왕, 양만춘, 을지문덕, 문무왕, 김유신, 원효, 의상, 설총, 강감찬, 윤관, 이규보, 안향, 세종대왕, 사육신, 이순신, 이황, 이이, 안창호, 김구,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이봉창 ……. 이루 한량없이 많다. 우리 후손들은 이와 같은 빼어난 조상들의 지혜와 업적을 이어받고 그분들의 공로를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버금하여 몇 안 되는 ‘나쁜 나무’의 잘못된 행동거지도 하나의 거울로 삼아 깊이 경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2차 대전 후, 나치스가 저지른 갖가지 흔적들을 보존하여 뒷날의 교훈으로 삼고자 보존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유대인 학살이 벌어진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도 일제가 저지른 악행의 자국들을 보존하여 후세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 적지 않다. 부끄러운 과거라고 숨기고 없애기보다는 부정적 유산 즉 네그티브 헤리티지(negtive heritage)도 보존해 다시는 오욕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으로 삼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기 때문이다.
근자에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 시비로 큰 물의를 일으킨 일이 있었다. 역사를 배우는 목적은 뒤를 보고 깨우쳐, 앞의 길을 현명하게 가자는 것에 있다. 지나온 길의 ‘좋은 나무’만 보고 즐기는 것도 좋지만, 길가의 ‘나쁜 나무’를 보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깨우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나는 역사 교과서에 그러한 관점이 반영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한 눈으로 지금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자세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눈앞에 제2의 정명수, 제2의 김자점, 제2의 우범선 그리고 제2의 송병준은 없는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내리는 준엄한 명령이다. 실수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도 우리가 배워야 할 귀감이기 때문이다.
한때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다. 이에 어떤 당은 당론을 정하지 않고 어정쩡한 태도를 유지하였고, 어떤 당은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또 외교 문제를 들어 그 득실을 내세우기도 했다. 민주 국가에서 각기 다른 의견을 표방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그 주장의 밑동이 되는 것은 역사 속의 ‘나쁜 나무’가 되지 않도록, 역사의 가르침에서 보고 배워야 함이 바른 길이라 생각한다.
첫댓글
이렇듯 배울것이 많은 역사 이야기
포(褒)기릴.포 펌(貶)낮출.폄. 도올(檮杌)
한자를 찿을 수 없음.
짚어주신 나쁜 나무. 좋은 나무. 의인화로 본
대한제국 국난기를 상기해 보면서 깊이 있는 글
새롭게 공부 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포와 펌 도올 을 분별 하고 의로운 좋은 나무가
많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위정자들이 많아지는
살기 좋은 나라에 대한 기대는 현실은 여전히
쉽지 않은 바램 같습니다.
장진호님 글에는 언제나 배우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함을 알면서도 자주 기회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오랫만에 안부 인사 올림니다.
혜원 님, 늘 바쁘신대도 이렇게 긴 격려의 글을 보내주신 데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