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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란, 이렇게 지키는 것이다^
️ 44년 전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
️ 공동경비 구역내에서 시계 확보를 위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들에게 북괴가 시비를 걸어와 미군장교 두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었다.
️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철모와 군화를 준비시켰고,
️ 다음날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그 유명한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란 명연설을 하게 된다.
️ 미군도 자국의 장교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을 그냥 넘길 수 없게 되었다.
️ 그래서 준비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 그 미루나무를 공개리에 절단하는 폴버니언(미국 동화속 나무꾼 이름) 작전 이였다.
️ 세계 최강 미국의 전략 자산이 총동원된 응징작전이 고작 나무 한그루 자르는 거라니..
️ 박대통령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 이에 박대통령은 당시 스틸웰 미사령관에게 미루나무 절단작전의 경비는 우리 군이 담당하겠다고 제안했다.
️ 스틸웰은 비무장을 전제로 박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박대통령은 국방장관을 통해 50만원의 격려금을 제1공수여단 박희도 준장에게 하사하고 별도의 보복 작전을 준비시킨다.
🔹 ️ 엄선된 64명의 특전사 장병들이 분해된 M16과 수류탄을 숨기고,
️ 카투사 복장으로 미군의 미루나무 절단 작업의 경호 임무에 투입되었다
️ 나무 절단이 끝날 무렵 우리 특전사 장병들은 전광석화처럼 총을 조립한 후,
️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초소로 돌진하여 적 초소 4개를 초토화 시키고 유유히 복귀하였다.
️ 북한군은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을 제지하던 미군 장교를 총으로 위협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 미군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박희도 장군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박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오히려 박대통령은 일촉측발의 상황에 부하들을 비무장으로 보낼 수 없어서 그랬노라고 큰 소리쳤다.
️ 며칠 후 김일성은 6.25 휴전 이후 처음으로 미군 측에 유감과 재발방지의 반성문을 제출했다.
️ 평화란 이렇게 지키는 건데...
️ 저 쪽의 미친개는 40년 전보다 훨씬 더 미쳤고 위험한데..
️ 그 미친개를 몽둥이가 아닌 먹이로 달래야 한다는 미친 것들이 더 미쳐 날뛰는 이 미친 현실이 답답하다.
️ 이 땅의 퇴폐한 국민 도의 와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5000년 보리 고개 가난을 이 땅에 몰아 낸 박정희 대통령 오늘 따라, 그 분이 더욱 많이 그립습니다.
***STR이 뭔지 알고 갑시다.
난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ㅡ
💜💜가슴 아픈 사연!
며칠 전 신문에 90을 넘긴
당대 최고 인기여배우
최은희 씨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옛날 조용한 지적
여인상으로 최고의 미모와 연기력으로 한시대를 주름
잡았던 그녀의 인생은 파란 만장한속에..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생을 마감했다는소식을 접했을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입양해서 키워준 자식들도 최은희를 모시지 않구 양로원에 맡겨놓고 있는상황을 느껴볼때
친자식도 그런데 키워준
자식은 오죽하겠습니까? 자식들 모두다 소용없습니다.
우리 자신 들을 위해 열심히 삽시다.
자신의 장례식엔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를 장송곡으로 해달라고 했답니다.!~
참말허무하고 아쉬움에
마음이 휑합니다.
아! 김정일이 탐내어 납치까지
한 이런 미모의 배우도 늙음과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화려했던 삶에 무기력한채 빈손으로 저승길에 나서니 돈도 명예도.부도.
화려함도 ..
다~헛된 물거품 이란것을
새삼 느끼게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 이란 노래가 더욱 실감나는
한순간입니다.
인생길 황혼속에 즐겁게
살면서 남은인생 친구나 혹은, 연인과 함께 여행다니면서..
남은 여생을 재미있게
보내는게 제일 값진 인생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우리모두 힘냅시다!!!
자식위해 희생하고 고생 하지 맙시다 아이들의 남은세계는
더 좋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갈 시간도 많이 있습니다. 나이먹은 우리가 급하고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는 속일수 없습니다. 남은인생 즐겁게 재미있게 삽시다 화이팅!~!!!!
파티장에서 한 부인이 잠깐 넘어졌다.구급차를 부를까요?
라고 했지만 ..
그 부인은 괜찮다며 구두가 새것이라서 잠깐 휘청거렸을 뿐이라고 했다.
여럿이 그 부인 옷에서 흙을 털어주었고 음식도 새것으로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날 저녁 부인은 파티를
즐기고 귀가했다.
다음날 그 부인의 남편이
전화를 했는데, 오후 6시에
그 부인은 사망했다고 했다.
파티에서 부인은 뇌졸중을
당한 것이다.
만일 그때 누가 뇌졸중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기만 했어도 부인은 지금 살아 있을 것이다.
신경과 의사의 말입니다.
뇌졸중 환자를 3시간 이내에 치료하면 뇌졸중에서 오는 결과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답니다..
문제는 뇌졸중이 발병하면 즉시 증세를 인지하고 진단해서 3시간 이내에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지요.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뇌졸중을 영어로 STROKE 라 합니다. 처음 석자 STR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뇌졸중의 징후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걸 알지 못하면
비참한 재앙이 발생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 뇌졸중의 징후를 알지 못하면 환자는 영구적인 뇌 손상을 당하게 됩니다.
의사들의 말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함으로써 뇌졸중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1. S - Smile 웃어보세요
2. T - Talk 말을 해 보세요.
(제대로 완전한 문장으로 답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3. R - Raise 두 팔을 올려 보세요.
위의 3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하지 못하면 즉시 구급차를 부르세요.
그리고 구급요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세요.
뇌졸중의 새로운 징조 네 번 째,
혀를 내밀어 보세요.
혀를 내밀었는데 혀가 꼬부라졌다든가 이쪽 또는 저쪽으로 굽었다든가 하면 이것이 뇌졸중의 또 다른 징조입니다.
심장내과 의사가 말하기를
이 카톡을 받는 사람이 다시 10명에게 보내면 그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저는 제 몫을 했습니다. 💛
풍류 천일야화 황진이(黃眞伊) <제4話>
양곡은 젊은 시절에 여색에 빠진 자는 남자가 아니다. 명월이 시재(詩才)와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다. “내가 그 여자와 30일을 동숙(同宿)하고 이별을 못하고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약속을 했으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는데 사대부의 나라에서 친구들에게 한 약속을 선비가 지키지 않았다. 그것도 천재지변이나 연로한 부모의 갑작스런 병고나 몸담고 있는 벼슬길에서 왕명도 아닌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인 기생으로 사내대장부가 친구들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동네 청년들이 이웃집 예쁜 아가씨를 놓고 한 약속이 아니다. 당시 송도 명월의 소문이 한양에까지 퍼져 한량들의 마음이 온통 들떠 있을 때였다.
고려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 넣고 조선을 세운 신흥 사대부들은 체면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국교(國敎)로 대대로 이어오던 불교를 과감히 유교(儒敎)로 교체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과 삼종지덕(三從之德)등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인격체로 규정하여 사회적 제약을 법적(종모법 從母法)으로 또는 도덕적 올가미를 씌워 놓았다.
세계사적으로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나 조선은 그 정도가 특히 더 하였다. 그런 역사 속에서 잘 나가는 사대부 양곡이 일개 기생인 명월(本名 황진이 이하 진이)에게 빠져 ‘남아일언중천금’이란 세상에서 일탈하여 약속을 어겼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도 허리 밑엔 별수 없이 약했을 터다. 하지만 지체 높은 양곡이 진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허리 밑도 봄꽃처럼 피어나는 즐거움도 기쁨이지만 바다 같고 만리장성 같은 문화예술세계에 탄복했을 것이다.
이웃인 일본은 사무라이(武士)의 나라로서 허리 밑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선비의 나라 조선에선 일본과 달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던가!
사실 사내들이 여자를 찾는 것은 찰나적이나 마초(macho)의 본능에 충실하려 한다. 색향(色鄕)으로 소문이 난 송도에 가려함은 허리 밑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 강하다. 양곡도 진이와 30일이란 기간을 정하고 소위 계약 동숙(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이는 평소에 양곡이 생각하였던 노류장화가 아니었다. 계약결혼 마지막 날 시(詩) 한 수에 그의 영혼은 넋을 잃었다.
‘달빛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는데/
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 이요/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은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뻗치리라.’
양곡은 진이의 이 시를 듣고 한양의 친구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을 것이다.
진이를 알게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소문으로 떠도는 진이를 직접 만나 뜨거운 살을 섞고 보니 저잣거리에 나도는 풍문이 얼마나 잘못 알려졌음을 알수 있었다. 노류장화나 말하는 꽃이 아닌 지식인 진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 스스로 그녀 앞에 겸손하여 졌음일 게다. 아마도 진이가 한시, 시조에 능통한 자유인으로 남자로 태어났다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학자 위치에서 경륜(經綸)을 논하며 문화예술세계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양곡은 그 후 두 번 더 진이를 찾았다.
계약결혼이란 세기적 발상은 조선사회를 경천동지(驚天動地)케 했을게다. 낭만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여성해방운동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1929)보다 378년 앞섰으며 영화감독 문여송과 소설가 김이연과의 계약결혼보다는 무려 400여년이나 앞선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양곡은 진이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춤·노래·거문고 등으로 당시 조선이 상국(上國)관계로 있는 중국 문화에도 정통하였던 그녀에게 녹아든 것은 어쩌면 사내로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진이는 옥섬(진현금 의이동생)으로부터 잠자리 기술도 배웠다. “네가 싸늘하면 사내 역시 싸늘할 것이요. 네가 뜨거우면 사내도 뜨거워 질 것이고 네가 깊어지면 사내 또한 깊어질 것이다. 헛되이 움직이거나 소리를 질러서 힘을 빼지 말고 깊이 숨을 마시며 음기를 몸 전체에 고루 모아 낮은 소리로 한없이 속으로 빨아들이거라... 사내란 겉으론 천하를 움직일 듯 하지만 알고보면 연약하느니라...”라고 꽃잠(첫날밤)의 기술을 가르쳤다.
이토록 진이는 여자로서도 완벽하였으며 학자(지식인)로서까지 조선의 사대부 수준에 손색이 없었다.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 허엽과 동문수학했으나 오히려 그의 학문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지 않았나 싶다.
허엽의 딸 허난설헌이 역시 조선시대에 출생하여 남성사회에서 그녀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27년이란 짧은 삶을 마쳤다. 허난설헌은 사대부집 고명딸로 태어나 엄격한 사회적 제약으로 기를 펴지 못했으나 진이는 달랐다.
진이는 과감히 자유를 선택하였다. 양가집 딸에서 어느날 갑자기 얼녀(孼女)로 전략하여 소실의 길 정도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과감히 자유인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 억압의 비단길보다 자유의 자갈밭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녀생활 3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빠져 나와 자유인이 되어 지족선사(知足禪師)·소세양·벽계수(碧溪水)·이생(李生)등을 품어 진이의 세상을 만들었다.
진이의 경륜과 문화예술세계는 외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 진현금의 DNA로부터 이어 받은 천부적 예능의 자질은 외숙부가 원천(源泉)이다. 외숙부는 비록 하급 악사였으나 사대부 못지않게 학문이 높았으며 그의 서재엔 만여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런 가족사를 진이는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그 같은 진이의 세상에 대보름달이 휘영청 뜬 분위기에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의 사내들이 불을 본 부나비처럼 하나 둘 날아들었다
[ "어둠을 불평하기보다 등불 하나 켜는 게 낫다" ]
《 구상 시인의 '大義와 大我' 》
구상 시인은 생전에
“사사건건 잘못을 따지는 한국인의 시비(是非) 정신은
소의(小義)와 소아(小我), 소리(小利)에 치우쳐
대의(大義), 대아(大我), 대리(大利)를 놓치게 한다”라고 지적했다.
구상(具常·1919~2004) 시인은 시 외에 사회평론도 많이 썼다.
평생 ‘구도자 시인’이자 기자, 논설위원, 종군작가로
격동의 시대를 증언하면서 산문집을 10권 이상 남겼다.
그중 1960년에 펴낸 수상집 <침언부어(沈言浮語)>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가 국제펜대회에 참가하러 일본에 갔다가 교토에 들렀을 때 일이다.
마침 추석이어서 동포들과 좌담회 겸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한 중년 신사가 “우리 민족은 한 사람씩 놓고 보면 다 우수한데
합쳐 놓으며 싸움질만 하고 큰일을 못하니 어인 민족 특성이며 결함은 어디 있는지
문인으로서 솔직한 소견을 말해 달라”라고 했다.
◇왜 이리 남을 정죄하게 됐을까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답했다.
“얼마 전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인 크리슈나 메논이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 장군은
이튿날부터 일본인의 숭앙을 받았고 한국에 진주한 하지 중장은 그날부터 시비(是非)의 초점이 됐는데, 이것으로 보아 한국민은 일본 국민보다 민주주의적인 국민이요, 한국의 민주주의 토대는 일본보다 앞섰다’고 한 것처럼 우리 국민은 시비에 밝은 국민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다음 “이 시비 정신의 발동이 소의(小義)와 소아(小我)와 소리(小利)에 너무 치우쳐
대의(大義), 대아(大我), 대리(大利)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했다.
대의(大義)는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말한다. 이에 비해 소의(小義)는 사사로움을 앞세운다.
대아(大我)는 ‘참된 나’, 소아(小我)는 ‘자기중심적인 나’를 뜻한다.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는 눈을 가지려면 자기밖에 모르는 소아의 경계를 넘어 대아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대리(大利)는 그야말로 ‘큰 이익’이다. 대의를 위해 ‘작은 이익’을 버리면 손해 볼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이를 거꾸로 하는 게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니, 개인의 삶이나 정치·외교에서도 대리(大利)를 망각하고 소리(小利)에 집착하면 대패(大敗)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 탓 공방에 죽기 살기로 싸운다. 왜 이렇게 남을 정죄하는 사회가 됐을까. 많은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수 백 년 간 지속된 주자학적 명분 다툼이 가장 큰 듯하다. 이것이 이분법적 흑백논리와 내 편 아니면 네 편 식의 편 가르기, 좌우 이념의 진영논리까지 번졌으니 마치 소국(小局) 속에서 대국(大局)을 그르치는 것과 같다.
구상은 그래서 “우리의 예리한 양심은 항상 남을 저울질하는 데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특성을 살리는 길은 소의와 소아, 소리를 대의와 대아, 대리에 맞게 키우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우리 국민의 조급성과 감정 편중을 걱정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기자로 일하던 그가 결핵으로 휴양하다 8·15를 맞았을 때 트럭을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돌아다니다가 들판에서 본 두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 8·15 때의 中 사내와 日 아낙네
하나는 깡마른 중국 사내가 제 나라 승전 소식도 못 들은 듯 밭에다 거름을 주는 광경이었고, 또 하나는 꽃무늬 몸뻬(일바지) 차림의 일본 아낙이 제 나라 패망 소식도 모르는 듯 호미로 김을 매는 풍경이었다. 중국인으로서는 10년 항쟁의 승리자요, 일본인으로선 앞날이 캄캄한 패전 국민인데, 이들은 흥분의 도가니와 절망의 수렁에서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아직 해방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온통 흥분에 들떠 있는 우리 국민과 자신의 몰골이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며 “이런 충격적인 기억은
해가 갈수록 확대됐는데 이것은 우리 국민성의 조급함이나 감정 편중이 저들과 대비되어 나타나고 그 장래가 심히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에도 “전후 중국의 야심과 일본의 부흥을 바라볼 때마다 그때 산동성 호인(胡人)과 일본 여인네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떠올라 지워지질 않는다”며 씁쓸해했다.
이런 조급증과 감정 편중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지적, “현대인이 경계해야 할 것은 ‘성급’”이라는 말과 통한다. 삶의 성취나 원대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충분히 준비하고 숙성하는 과정을 무시하면서 성급히 거머쥐려고만 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요즘의 정치 대립이나 사회 갈등, 분규나 파업, 모리배들의 이권 싸움도 마찬가지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도 못하고 모든 걸 남 탓과 사회 탓으로 돌리며 분노하기만 해서는 대의도, 대아도, 대리도 얻지 못한다.
구상의 스승이자 문학 도반인 공초 오상순 시인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펄 벅에 얽힌 얘기도 되새길 만하다. 1960년 11월 초, 서울에 온 펄 벅은 명동 서라벌다방에서 철학적인 문답을 즐기던 공초에게 ‘사슴’ 담배 두 갑을 선물하며 한참 동안 선문답을 주고받았다.
그날 감명을 받은 펄 벅은 공초가 펼친 사인북에다 이렇게 썼다.
“It is better to light a single candle than to complain of the darkness.
(어둠을 불평하는 것보다 한 자루의 촛불이라도 켜는 게 낫다).”
6·25 전쟁 후 혼혈아동들을 돌보며 한국식 이름을 박진주(朴眞珠)로 지었던 펄 벅이 가장 좋아하고 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격언이었다.
◇ 말에도 言靈 있으니 참말만 해야
구상은 이 얘기를 전하며 “어느 사회나 모순과 부조리가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저 격언대로 어둡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한 촛불이라도 스스로 켜고 밝히기를 다짐하면서 우리가 지닌
능력의 최선을 발휘해 보자”라고 말했다.
이런 정신은 그의 문학적 유지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평생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하고, 글을 쓸 때도 교묘하게 꾸며 쓰는 기어(綺語)의 죄
범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60여 년 전의 <침언부어>를 펼쳐놓고 오늘 나의 말과 글, 소의와 대의, 어둠과 등불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 고 두 현 / 한국경제 논설위원 )
^평화란, 이렇게 지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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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년 전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났다.
️ 공동경비 구역내에서 시계 확보를 위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들에게 북괴가 시비를 걸어와 미군장교 두명을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었다.
️ 이 사건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즉시 철모와 군화를 준비시켰고,
️ 다음날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에서 그 유명한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란 명연설을 하게 된다.
️ 미군도 자국의 장교 두 명이 살해된 사건을 그냥 넘길 수 없게 되었다.
️ 그래서 준비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된 그 미루나무를 공개리에 절단하는 폴버니언(미국 동화속 나무꾼 이름) 작전 이였다.
️ 세계 최강 미국의 전략 자산이 총동원된 응징작전이 고작 나무 한그루 자르는 거라니..
️ 박대통령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 이에 박대통령은 당시 스틸웰 미사령관에게 미루나무 절단작전의 경비는 우리 군이 담당하겠다고 제안했다.
️ 스틸웰은 비무장을 전제로 박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박대통령은 국방장관을 통해 50만원의 격려금을 제1공수여단 박희도 준장에게 하사하고 별도의 보복 작전을 준비시킨다.
🔹 ️ 엄선된 64명의 특전사 장병들이 분해된 M16과 수류탄을 숨기고,
️ 카투사 복장으로 미군의 미루나무 절단 작업의 경호 임무에 투입되었다
️ 나무 절단이 끝날 무렵 우리 특전사 장병들은 전광석화처럼 총을 조립한 후,
️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초소로 돌진하여 적 초소 4개를 초토화 시키고 유유히 복귀하였다.
️ 북한군은 저항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을 제지하던 미군 장교를 총으로 위협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 미군은 이 사건을 문제 삼아 박희도 장군의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박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오히려 박대통령은 일촉측발의 상황에 부하들을 비무장으로 보낼 수 없어서 그랬노라고 큰 소리쳤다.
️ 며칠 후 김일성은 6.25 휴전 이후 처음으로 미군 측에 유감과 재발방지의 반성문을 제출했다.
️ 평화란 이렇게 지키는 건데...
️ 저 쪽의 미친개는 40년 전보다 훨씬 더 미쳤고 위험한데..
️ 그 미친개를 몽둥이가 아닌 먹이로 달래야 한다는 미친 것들이 더 미쳐 날뛰는 이 미친 현실이 답답하다.
️ 이 땅의 퇴폐한 국민 도의 와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5000년 보리 고개 가난을 이 땅에 몰아 낸 박정희 대통령 오늘 따라, 그 분이 더욱 많이 그립습니다.
***STR이 뭔지 알고 갑시다.
난 참 바보같이 살았군요.ㅡ
💜💜가슴 아픈 사연!
며칠 전 신문에 90을 넘긴
당대 최고 인기여배우
최은희 씨의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옛날 조용한 지적
여인상으로 최고의 미모와 연기력으로 한시대를 주름
잡았던 그녀의 인생은 파란 만장한속에..
경기도의 한 요양병원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생을 마감했다는소식을 접했을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습니다
입양해서 키워준 자식들도 최은희를 모시지 않구 양로원에 맡겨놓고 있는상황을 느껴볼때
친자식도 그런데 키워준
자식은 오죽하겠습니까? 자식들 모두다 소용없습니다.
우리 자신 들을 위해 열심히 삽시다.
자신의 장례식엔 김도향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를 장송곡으로 해달라고 했답니다.!~
참말허무하고 아쉬움에
마음이 휑합니다.
아! 김정일이 탐내어 납치까지
한 이런 미모의 배우도 늙음과 죽음 앞에서는..
자신의 화려했던 삶에 무기력한채 빈손으로 저승길에 나서니 돈도 명예도.부도.
화려함도 ..
다~헛된 물거품 이란것을
새삼 느끼게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 이란 노래가 더욱 실감나는
한순간입니다.
인생길 황혼속에 즐겁게
살면서 남은인생 친구나 혹은, 연인과 함께 여행다니면서..
남은 여생을 재미있게
보내는게 제일 값진 인생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우리모두 힘냅시다!!!
자식위해 희생하고 고생 하지 맙시다 아이들의 남은세계는
더 좋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갈 시간도 많이 있습니다. 나이먹은 우리가 급하고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는 속일수 없습니다. 남은인생 즐겁게 재미있게 삽시다 화이팅!~!!!!
파티장에서 한 부인이 잠깐 넘어졌다.구급차를 부를까요?
라고 했지만 ..
그 부인은 괜찮다며 구두가 새것이라서 잠깐 휘청거렸을 뿐이라고 했다.
여럿이 그 부인 옷에서 흙을 털어주었고 음식도 새것으로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날 저녁 부인은 파티를
즐기고 귀가했다.
다음날 그 부인의 남편이
전화를 했는데, 오후 6시에
그 부인은 사망했다고 했다.
파티에서 부인은 뇌졸중을
당한 것이다.
만일 그때 누가 뇌졸중을 확인하는 방법을 알기만 했어도 부인은 지금 살아 있을 것이다.
신경과 의사의 말입니다.
뇌졸중 환자를 3시간 이내에 치료하면 뇌졸중에서 오는 결과를 완전히 역전시킬 수 있답니다..
문제는 뇌졸중이 발병하면 즉시 증세를 인지하고 진단해서 3시간 이내에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지요.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
뇌졸중을 영어로 STROKE 라 합니다. 처음 석자 STR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뇌졸중의 징후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걸 알지 못하면
비참한 재앙이 발생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 뇌졸중의 징후를 알지 못하면 환자는 영구적인 뇌 손상을 당하게 됩니다.
의사들의 말로는
옆에 있는 사람이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함으로써 뇌졸중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1. S - Smile 웃어보세요
2. T - Talk 말을 해 보세요.
(제대로 완전한 문장으로 답하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3. R - Raise 두 팔을 올려 보세요.
위의 3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하지 못하면 즉시 구급차를 부르세요.
그리고 구급요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세요.
뇌졸중의 새로운 징조 네 번 째,
혀를 내밀어 보세요.
혀를 내밀었는데 혀가 꼬부라졌다든가 이쪽 또는 저쪽으로 굽었다든가 하면 이것이 뇌졸중의 또 다른 징조입니다.
심장내과 의사가 말하기를
이 카톡을 받는 사람이 다시 10명에게 보내면 그 중의 한 사람은 반드시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저는 제 몫을 했습니다. 💛
풍류 천일야화 황진이(黃眞伊) <제4話>
양곡은 젊은 시절에 여색에 빠진 자는 남자가 아니다. 명월이 시재(詩才)와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과 약속을 하였다. “내가 그 여자와 30일을 동숙(同宿)하고 이별을 못하고 하루라도 더 머물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약속을 했으나 그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는데 사대부의 나라에서 친구들에게 한 약속을 선비가 지키지 않았다. 그것도 천재지변이나 연로한 부모의 갑작스런 병고나 몸담고 있는 벼슬길에서 왕명도 아닌 한낱 노류장화(路柳墻花)인 기생으로 사내대장부가 친구들과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쳤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동네 청년들이 이웃집 예쁜 아가씨를 놓고 한 약속이 아니다. 당시 송도 명월의 소문이 한양에까지 퍼져 한량들의 마음이 온통 들떠 있을 때였다.
고려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 넣고 조선을 세운 신흥 사대부들은 체면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국교(國敎)로 대대로 이어오던 불교를 과감히 유교(儒敎)로 교체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과 삼종지덕(三從之德)등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인격체로 규정하여 사회적 제약을 법적(종모법 從母法)으로 또는 도덕적 올가미를 씌워 놓았다.
세계사적으로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상당히 제한적이었으나 조선은 그 정도가 특히 더 하였다. 그런 역사 속에서 잘 나가는 사대부 양곡이 일개 기생인 명월(本名 황진이 이하 진이)에게 빠져 ‘남아일언중천금’이란 세상에서 일탈하여 약속을 어겼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도 허리 밑엔 별수 없이 약했을 터다. 하지만 지체 높은 양곡이 진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허리 밑도 봄꽃처럼 피어나는 즐거움도 기쁨이지만 바다 같고 만리장성 같은 문화예술세계에 탄복했을 것이다.
이웃인 일본은 사무라이(武士)의 나라로서 허리 밑이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선비의 나라 조선에선 일본과 달리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던가!
사실 사내들이 여자를 찾는 것은 찰나적이나 마초(macho)의 본능에 충실하려 한다. 색향(色鄕)으로 소문이 난 송도에 가려함은 허리 밑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이 강하다. 양곡도 진이와 30일이란 기간을 정하고 소위 계약 동숙(결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진이는 평소에 양곡이 생각하였던 노류장화가 아니었다. 계약결혼 마지막 날 시(詩) 한 수에 그의 영혼은 넋을 잃었다.
‘달빛어린 뜨락에 오동잎 다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게 피었는데/
누각이 높아 하늘이 한 척 이요/
사람이 취해 술이 천 잔이라/
흐르는 물은 거문고 가락에 맞춰 서늘하고/
매화는 피리소리에 들어 향기롭구나/
내일 아침 서로 헤어지고 나면/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게 뻗치리라.’
양곡은 진이의 이 시를 듣고 한양의 친구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을 것이다.
진이를 알게 됨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소문으로 떠도는 진이를 직접 만나 뜨거운 살을 섞고 보니 저잣거리에 나도는 풍문이 얼마나 잘못 알려졌음을 알수 있었다. 노류장화나 말하는 꽃이 아닌 지식인 진이라는 것을 알게 됨에 스스로 그녀 앞에 겸손하여 졌음일 게다. 아마도 진이가 한시, 시조에 능통한 자유인으로 남자로 태어났다면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하서 김인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학자 위치에서 경륜(經綸)을 논하며 문화예술세계를 한층 더 풍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양곡은 그 후 두 번 더 진이를 찾았다.
계약결혼이란 세기적 발상은 조선사회를 경천동지(驚天動地)케 했을게다. 낭만과 문화의 나라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와 여성해방운동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1929)보다 378년 앞섰으며 영화감독 문여송과 소설가 김이연과의 계약결혼보다는 무려 400여년이나 앞선 선구적 페미니스트였다.
양곡은 진이의 시·서·화의 삼절(三絶)을 넘어 춤·노래·거문고 등으로 당시 조선이 상국(上國)관계로 있는 중국 문화에도 정통하였던 그녀에게 녹아든 것은 어쩌면 사내로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진이는 옥섬(진현금 의이동생)으로부터 잠자리 기술도 배웠다. “네가 싸늘하면 사내 역시 싸늘할 것이요. 네가 뜨거우면 사내도 뜨거워 질 것이고 네가 깊어지면 사내 또한 깊어질 것이다. 헛되이 움직이거나 소리를 질러서 힘을 빼지 말고 깊이 숨을 마시며 음기를 몸 전체에 고루 모아 낮은 소리로 한없이 속으로 빨아들이거라... 사내란 겉으론 천하를 움직일 듯 하지만 알고보면 연약하느니라...”라고 꽃잠(첫날밤)의 기술을 가르쳤다.
이토록 진이는 여자로서도 완벽하였으며 학자(지식인)로서까지 조선의 사대부 수준에 손색이 없었다.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 허엽과 동문수학했으나 오히려 그의 학문수준을 훌쩍 뛰어 넘었지 않았나 싶다.
허엽의 딸 허난설헌이 역시 조선시대에 출생하여 남성사회에서 그녀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고 27년이란 짧은 삶을 마쳤다. 허난설헌은 사대부집 고명딸로 태어나 엄격한 사회적 제약으로 기를 펴지 못했으나 진이는 달랐다.
진이는 과감히 자유를 선택하였다. 양가집 딸에서 어느날 갑자기 얼녀(孼女)로 전략하여 소실의 길 정도를 선택할 수 있었으나 그녀는 과감히 자유인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 억압의 비단길보다 자유의 자갈밭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기녀생활 3년 만에 기적(妓籍)에서 빠져 나와 자유인이 되어 지족선사(知足禪師)·소세양·벽계수(碧溪水)·이생(李生)등을 품어 진이의 세상을 만들었다.
진이의 경륜과 문화예술세계는 외숙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 진현금의 DNA로부터 이어 받은 천부적 예능의 자질은 외숙부가 원천(源泉)이다. 외숙부는 비록 하급 악사였으나 사대부 못지않게 학문이 높았으며 그의 서재엔 만여 권의 책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런 가족사를 진이는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그 같은 진이의 세상에 대보름달이 휘영청 뜬 분위기에 남녀칠세부동석과 삼종지덕의 사내들이 불을 본 부나비처럼 하나 둘 날아들었다
[ "어둠을 불평하기보다 등불 하나 켜는 게 낫다" ]
《 구상 시인의 '大義와 大我' 》
구상 시인은 생전에
“사사건건 잘못을 따지는 한국인의 시비(是非) 정신은
소의(小義)와 소아(小我), 소리(小利)에 치우쳐
대의(大義), 대아(大我), 대리(大利)를 놓치게 한다”라고 지적했다.
구상(具常·1919~2004) 시인은 시 외에 사회평론도 많이 썼다.
평생 ‘구도자 시인’이자 기자, 논설위원, 종군작가로
격동의 시대를 증언하면서 산문집을 10권 이상 남겼다.
그중 1960년에 펴낸 수상집 <침언부어(沈言浮語)>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가 국제펜대회에 참가하러 일본에 갔다가 교토에 들렀을 때 일이다.
마침 추석이어서 동포들과 좌담회 겸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한 중년 신사가 “우리 민족은 한 사람씩 놓고 보면 다 우수한데
합쳐 놓으며 싸움질만 하고 큰일을 못하니 어인 민족 특성이며 결함은 어디 있는지
문인으로서 솔직한 소견을 말해 달라”라고 했다.
◇왜 이리 남을 정죄하게 됐을까
그는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답했다.
“얼마 전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의장인 크리슈나 메논이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 장군은
이튿날부터 일본인의 숭앙을 받았고 한국에 진주한 하지 중장은 그날부터 시비(是非)의 초점이 됐는데, 이것으로 보아 한국민은 일본 국민보다 민주주의적인 국민이요, 한국의 민주주의 토대는 일본보다 앞섰다’고 한 것처럼 우리 국민은 시비에 밝은 국민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다음 “이 시비 정신의 발동이 소의(小義)와 소아(小我)와 소리(小利)에 너무 치우쳐
대의(大義), 대아(大我), 대리(大利)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했다.
대의(大義)는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말한다. 이에 비해 소의(小義)는 사사로움을 앞세운다.
대아(大我)는 ‘참된 나’, 소아(小我)는 ‘자기중심적인 나’를 뜻한다.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보는 눈을 가지려면 자기밖에 모르는 소아의 경계를 넘어 대아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대리(大利)는 그야말로 ‘큰 이익’이다. 대의를 위해 ‘작은 이익’을 버리면 손해 볼 것 같지만 오히려 더 큰 결실을 거둘 수 있다. 이를 거꾸로 하는 게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니, 개인의 삶이나 정치·외교에서도 대리(大利)를 망각하고 소리(小利)에 집착하면 대패(大敗)하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 탓 공방에 죽기 살기로 싸운다. 왜 이렇게 남을 정죄하는 사회가 됐을까. 많은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수 백 년 간 지속된 주자학적 명분 다툼이 가장 큰 듯하다. 이것이 이분법적 흑백논리와 내 편 아니면 네 편 식의 편 가르기, 좌우 이념의 진영논리까지 번졌으니 마치 소국(小局) 속에서 대국(大局)을 그르치는 것과 같다.
구상은 그래서 “우리의 예리한 양심은 항상 남을 저울질하는 데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면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특성을 살리는 길은 소의와 소아, 소리를 대의와 대아, 대리에 맞게 키우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또 우리 국민의 조급성과 감정 편중을 걱정했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기자로 일하던 그가 결핵으로 휴양하다 8·15를 맞았을 때 트럭을 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돌아다니다가 들판에서 본 두 장면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 8·15 때의 中 사내와 日 아낙네
하나는 깡마른 중국 사내가 제 나라 승전 소식도 못 들은 듯 밭에다 거름을 주는 광경이었고, 또 하나는 꽃무늬 몸뻬(일바지) 차림의 일본 아낙이 제 나라 패망 소식도 모르는 듯 호미로 김을 매는 풍경이었다. 중국인으로서는 10년 항쟁의 승리자요, 일본인으로선 앞날이 캄캄한 패전 국민인데, 이들은 흥분의 도가니와 절망의 수렁에서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아직 해방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온통 흥분에 들떠 있는 우리 국민과 자신의 몰골이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며 “이런 충격적인 기억은
해가 갈수록 확대됐는데 이것은 우리 국민성의 조급함이나 감정 편중이 저들과 대비되어 나타나고 그 장래가 심히 우려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후에도 “전후 중국의 야심과 일본의 부흥을 바라볼 때마다 그때 산동성 호인(胡人)과 일본 여인네의 모습이 복합적으로 떠올라 지워지질 않는다”며 씁쓸해했다.
이런 조급증과 감정 편중은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지적, “현대인이 경계해야 할 것은 ‘성급’”이라는 말과 통한다. 삶의 성취나 원대한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충분히 준비하고 숙성하는 과정을 무시하면서 성급히 거머쥐려고만 하면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
요즘의 정치 대립이나 사회 갈등, 분규나 파업, 모리배들의 이권 싸움도 마찬가지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도 못하고 모든 걸 남 탓과 사회 탓으로 돌리며 분노하기만 해서는 대의도, 대아도, 대리도 얻지 못한다.
구상의 스승이자 문학 도반인 공초 오상순 시인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펄 벅에 얽힌 얘기도 되새길 만하다. 1960년 11월 초, 서울에 온 펄 벅은 명동 서라벌다방에서 철학적인 문답을 즐기던 공초에게 ‘사슴’ 담배 두 갑을 선물하며 한참 동안 선문답을 주고받았다.
그날 감명을 받은 펄 벅은 공초가 펼친 사인북에다 이렇게 썼다.
“It is better to light a single candle than to complain of the darkness.
(어둠을 불평하는 것보다 한 자루의 촛불이라도 켜는 게 낫다).”
6·25 전쟁 후 혼혈아동들을 돌보며 한국식 이름을 박진주(朴眞珠)로 지었던 펄 벅이 가장 좋아하고 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격언이었다.
◇ 말에도 言靈 있으니 참말만 해야
구상은 이 얘기를 전하며 “어느 사회나 모순과 부조리가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저 격언대로 어둡다고 불평만 하지 말고 한 촛불이라도 스스로 켜고 밝히기를 다짐하면서 우리가 지닌
능력의 최선을 발휘해 보자”라고 말했다.
이런 정신은 그의 문학적 유지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평생 “말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언령(言靈)이 있으므로 참된 말만 해야 하고, 글을 쓸 때도 교묘하게 꾸며 쓰는 기어(綺語)의 죄
범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60여 년 전의 <침언부어>를 펼쳐놓고 오늘 나의 말과 글, 소의와 대의, 어둠과 등불의 의미를 다시 한번 돌아본다.
( 고 두 현 / 한국경제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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