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16(일요일) 속리산 묘봉
청주→ 미원→ 보은→ 속리→ 여적암→ 묘봉
오늘 아침 인숙에게서 전화
어제 친정어머니 칠순을 교원대 부근 식당에서 가족끼리 만찬으로 즐기고
그러다보니 늦은 잠을 자게 되어 점심을 싸 갈 수 없단다.
그래서 콩과 은행을 넣어 지은 밥을
3인분 넉넉하게 싸고
김치류 3개, 애고추 볶음, 마늘쫑 무침을 반찬으로 준비
사과 2개, 단감 2개, 물 2병을 배낭에 담고
8시 50분 집에서 출발
인숙이를 먼저 태우고 용자네 집에 도착.
모처럼 약속 시간을 지켜 9시 전에 밖에 나가 기다리다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는
용자의 생색이 오늘따라 활기차다.
산행 장소는 인숙이가 10여 년 전 다녀왔다는 코스, 속리산 묘봉.
속리산을 향해 달렸다.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예나 지금이나 정겹다.
주차 문제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예외였다.
어느 전원주택(?)의 넓은 주차장에 양해를 구하고 주차를 할 수 있어 순조로운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속리산 자락을 앞에 두고 가을 햇살 아래 밭과 논,
또 그곳에서 일을 하는 농부들의 평화로운 모습.
기분이 상쾌하여 발걸음도 가볍다.
자연으로 들어오기만 해도 덩달아 신나는 가슴을 가진 우리
초입부터 마음에 드는 주변 경관을 만나 들뜬 모습이 역력하다.
어쩔 줄 몰라 좋아서 하는 말은 처음도 끝도 짤막한 감탄사와 함께
‘좋다!’는 말 뿐이다.
앞에 산을 놓고도 씩씩하게 나아간 이 길이 등산로로 이어지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예전과 다르다는 인숙이의 기억만으로는 우리의 목적지를 찾는 데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좀 떨어져 일을 하는 농부들의 도움을 얻긴 했지만 거리상 전달이 확실하지 않았다. 어림으로 방향을 ‘여적암’ 쪽으로 잡았다.
암자가 보일락말락할 즈음 ‘등산로 없음’이란 코팅지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무시하고 더 올라가니 또 하나가 있다.
인숙이는 둘이서 올라갔다 오라며 아래에 있겠단다. 용자는 먼저 오르다 나와 만나 함께 암자까지 올라갔다.
조용한 암자에는 문이 있는 곳마다 신발이 한두 켤레씩 놓여 있을 뿐 사람의 그림자가 없다. ‘汝寂庵’의 고요하다라는 ‘寂’자가 그럴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전에도 절에 있는 장독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장독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오래 된 간장처럼 보이는 간장독과 된장독을 유리뚜껑을 통해 들여다보며 암자의 식단을 생각했다.
암자의 가장 위쪽에 있는 삼성각 가까이 가 보았다. 숟가락 하나가 고리 사이를 가로질러 문을 닫고 있었다. 그 옆쪽으로 전에는 등산로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는 길이 보이고 약간 앞쪽으로 큰 바위가 하나 있다.
기를 받자고 그 바위에 올라 암자 쪽을 바라보니 어느 새 아래서 기다리겠다는 인숙이가 보인다. 인숙의 맞은편에는 어떤 스님(?) 아니면 관리인(?) 같은 분이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다.
그분의 말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등산로 없다’는 한글도 못 읽었냐는 나무라는 말투다.
인숙의 표정이 미소는 미소인데 황당한 미소? 아니면 민망한 미소?
멍하니 서서 올려보는 모습이 초등학생을 닮아 있다.
잠시 후 그분은 사라지고 인숙이만 남았다.
다시 암자는 고요하고 우리 셋은 암자의 뜰 앞에서 만났다.
암자를 뒤로 하고 내려오면서 우리의 화두는 '우리가 한글을 읽을 줄 아는가?‘ 였다.
등산로를 찾아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고요한 산 속에는 세 여자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산이 아닌 도시의 일상에서 빚어진 일이라도 오늘처럼 웃음보를 터트렸을까?
사건은 이랬다.
배낭을 암자 아래 벗어놓은 채, 뒤늦게 올라온 인숙은 암자에 들어서자마자 그분(관리인? 스님?)을 만났단다. 등산로를 물어야하는 입장이니 예의를 갖추긴 해야 하고 습관적으로 나온 인사말이 ‘안녕하세요?’ 였다는 것, 그리고 이어서 묘봉 가는 길을 물었다는 것
그러자 대뜸, ‘한글도 못 읽느냐’는 핀잔을 주고 나서야 등산로를 일러주더라는 것이다.
아하, 바로 그거였구나.
짧은 동안이었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인숙의 표정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그 때 나는 기를 받겠다는 바위에서 그분과 마주하고 있는 인숙의 얼굴을 보았다. 인숙의 표정은 무언가 황당하고 미안한 표정이긴 했지만 노여운 표정은 아니었다. 무언가 잘못을 하고 마주하고 있는 것은 같은데, 그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마치 어린 아이가 영문을 모른 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그렇게 야단할 일은 아닌 걸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니 좀 민망하다고나 할까
하여튼,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인숙의 생생한 모습은 가을 햇살에 그런 저런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순간에 일어난 이 이야기는 긴 시간 동안 우리의 이야깃거리, 웃음거리가 되었다.
말솜씨가 푸진 용자는 그 상황을 잘 넘기지 못한 인숙에게 할 말이 많은 모양이다.
앞서 간 국어 선생도 못 읽은 한글을 내 어찌 읽겠느냐고 받아치든지,
한 술 더 떠, 앞서 간 국어교사도, 초등학교 선생도 못 읽는 한글을 내 어찌 읽겠느냐는 말대답을 하지 그랬냐면서
진짜 문제는 인사말에 있다는 지적까지 했다.
암자에서 무슨 ‘안녕하세요’란 인사가 통하겠냐며
이렇게 합장을 했어야 했다고 흉내를 내서 한바탕 웃었다.
당사자인 인숙은 그 당시엔 할 말을 잊었다가 이런저런 말대꾸거리가 생각났던지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그리고는 초등샘답게 요즘 아이들에게 이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면 아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를 이야기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글을 못 읽어서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그 글에 의미를 달리 받아들이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글에 담긴 의미가 그 상황에서 중요할 수도 그냥 지나칠 정도로 가벼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 말의 핵심은 암자에서 달아 놓은 그 글 자체였다. 아니, 어쩌면 글을 써 붙여 놓은 자신들의 성의 때문이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불제자들의 수행을 위해서 글을 핑계 삼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암자를 찾은 우리들에게 글의 내용은 그리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글이라는 게, 모든 이에게 똑같은 의미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적어도 목적이 그 암자를 찾는 경우라면 ‘등산로 없음’이란 글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등산객에게는 꼭 의미가 있느냐 하면 또 그렇지만도 않다. 암자를 찾는 사람과는 좀 다르긴 해도 산을 오르다 등산로를 잃은 등산객이 암자에서 쉬어갈 요량으로 찾을 수도 있고, 유유자적 경치를 즐기는 등산객이라면 그 곳에 암자가 있으니 암자를 구경하기 위해 등산로를 잠시 이탈할 수도 있고, 우리 같이 등산로를 찾아야 하는 등산객이라면 등산로를 묻기 위해 암자를 들어갈 수도 있다.
그 날의 우리 셋도 ‘등산로 없음’이란 글을 읽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셋의 행동은 제각기 달랐다. 하나는 제자리에서 기다리겠으니 올라가 묻고 오라 했고, 하나는 암자의 위치가 좋다며 올라갔고, 하나는 여기까지 왔으니 암자 구경이나 하고 가야한다며 올라갔다. 어쩌면 우리에게 그 글은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각각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정작 암자의 그분은 글도 남겼는데 왜 여기까지 올라와 등산로를 묻느냐는 핀잔을 주었다. 그럴 바에는 등산로 없음이란 글 대신에 ‘수행자 외는 들어오지 마시오.’ 라든가 ‘수행 중이니 외부인은 조용히 돌아가시오.’ 라고 써 붙였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우리는 암자의 그 분 수행에 의문을 가졌다. 물론 그분의 상황도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는 등산로 없음에 대한 의미를 크게 두지 않고 한 행동들이었기에 암자의 그분과 그 사건은 우리의 긴 입담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아이러니에 빠진다. 그분이야말로 수행의 달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요즘 들어 그리 웃을 일이 없던 내게 그분은 웃음을 선사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인간들이 꾸리는 삶이란 게 따져 봐야 크게 노할 것도, 분할 것도 없다는 것을 몇 마디의 말로 가르쳐 준 분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보면 그분이 우릴 나무랄 일도, 우리 또한 그분의 인격이 이러쿵저러쿵 할 일도 아니다. 그분도 옳고 우리도 옳고. 그분이 옳지 않다면 우리도 그럴 것이다.
묘봉에 오르는 동안 우리는 두 번을 쉬었다. 우연히 두 번째 쉬는 곳에서 두 남자를 만났는데 모두 송이버섯을 따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은 한 송이도 못 딴 사람이고 한 사람은 바랑으로 가득 땄다. 못 딴 사람은 궁시렁궁시렁 이유가 많았다. 그러나 많은 수확을 한 다른 남자는 담배까지 피우며 버섯 보여주는 데도 값을 받아야 한다고 의기양양하다. 정말 두 사람의 모습은 달랐지만 두 경우 모두 이해할 만하다. 우리는 구경값을 내지는 않았지만 그분의 능력을 치하해 주었다. 그렇게 소담하고 많은 송이버섯을 구경하기는 처음이었다.
대신 우리는 송이는 아니지만 가지버섯을 땄다.
처음 용자의 말이 이렇게 참나무 아래에 있는 버섯은 모르면 몰라도 먹는 버섯일 거란다. 마침 송이버섯 못 딴 남자가 가지버섯이란 확인을 해 주어 버섯 따는 재미를 보았다.
나는 바로 전에 암자를 내려오면서 한 데 붙어 난 가다발(?)이란 버섯을 한 옴큼 따긴 했지만 앉았던 주변에서 이렇게 한 줄로 주욱 올라와 나뭇잎에 숨은 가지버섯 따는 재미는 정말 쏠쏠했다. 좀 전에 꺾여 누운 나뭇가지에 머리를 부딪쳐 아프던 생각쯤은 잊을 만큼^^
묘봉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가 올라온 길은 한적했지만 각자의 등산로를 택해 묘봉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그 넓은 봉우리를 차고도 남았다. 정상에서 펼쳐놓고 먹는 점심은 밥과 반찬 맛이라기보다는 기분만으로도 철철 넘치는 자연의 별미였다. 그 기분은 등산화를 벗어 놓고 서울 스마일 산악회의 카메라 속에 담길 때까지 뿌듯하고 만족했다.
아마 속리산 단풍축제로 법주사 쪽으로 문장대를 오르는 행렬이 저 앞에 보이는 단풍들의 무리만큼이나 울긋불긋하리라.
여기 묘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문장대가 보인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곳에선 둘러싸인 철망에 매달려 이 곳 묘봉 쪽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망만 볼 수 있는 그 곳 문장대보다야 봉우리로서는 이곳 묘봉이 전망도 좋지만 자리 펴고 점심까지 먹으며 눌러 앉아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으니 사람들은 묘봉에 매력을 더 두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 산 아래쪽으로는 붉은 물이 덜 올랐지만 묘봉에서 바라보는 주변 산들은 제법 단풍빛으로 예쁘게 단장을 했다. 첩첩이 멀리 보이는 산일수록 단풍빛은 옅어져 수묵화를 연상케 한다. 그 동안 육체적 정신적으로 차곡차곡 쌓인 스트레스가 눈앞의 저 빛깔처럼, 저 자연의 선들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는 것 같다. 몸과 정신이 가볍고 맑아지는 느낌이다. 모든 걸 나이 탓으로 돌리거나 남들에 비교해 시원찮은 부분들에 대해 의기소침하고 때로는 짜증이 났던 일을 생각하니 평소에 자연을 좋아하면서도 전혀 자연을 닮지 않았던 나를 보게 된다.
자연의 사계절은 때가 되면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뿐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말없이 그 아름다움을 나누어 준다. 그런 자연에 비해 나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엄살을 떨며 야단스런 모습들로 가까운 사람들을 불안하게 했던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산에는 폼으로 다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는 체력단련도 좋겠지만 좀더 여유를 가지고 겸손한 자연을 배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