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선생의 '내 사랑은'
내 사랑은
한 빛 黃士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萬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박재삼 선생의 '내 사랑은'
조동화(시인)
박재삼 선생은 1933년 아버지 박찬홍과 어머니 김어지의 차남으로 일본 동경에서 출생했고, 4세때 고향 삼천포로 이사하여 거기서 유년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선생은 어린시절 집이 가난하여 모교인 삼천포중학교에서 낮에는 급사노릇을 하고, 밤에는 야간부 학생으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 에서도 성적은 늘 주야간을 통틀어 수석을 놓치지 않았었다 한다. 그 무렵 초정 김상옥 선생이 그 학교의 국어 선생님으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시골 중학교 선생님의 글이 어떻게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는가 하는 점이 놀라워 더할수 없는 존경과 선망의 눈길을 보내면서 미래의 시인으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1949년 제 1회 개천 예술제 한글시백일장에 이형기와 더불어 참가, 시조 <촉석루>로 차상에 입상했고, 1950년에는 진주농림에 다니던 김재섭, 김동일과 함께 동인지 <군상>을 펴내기도 했다.
1953년 시조 <강물에서>가 모육순에 의해 <文藝> 11월호에 추천되고, 1955년 <현대문학>에 <攝理>가 유치환 추천으로, <靜寂>이 서정주 추천으로 발표되어 마침내 문단에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 무렵 고려대 국문과에 입학 하였으나, 현대문학사에 입사하는 등 호구지책을 동시에 강구해야 했던 형편이라 졸업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끝내 2년을 수료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1957년 시 <春香의 마음>으로 <현대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1961년 구자운, 박성룡, 박희진, 성찬경 등과 <六十年代詞華集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62년 처녀시집 <春香의 마음>을 출간했다.
1964년 현대문학사를 퇴사하고 <文學春秋>창관과 함께 입사햇으나 이듬 해 다시 월간 <바둑>지 편집장으로 옮겼고, 그러나 여의치 않아 같은해 대한일보 문화부기자로 들어갔으며, 1969년에는 다시 삼성출판사에 입사했지만 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평소 술을 좋아했던 탓인지 대한일보기자 시절에 1차 고혈압으로 쓰러진 병력이 있을 만큼 건강이 따라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직장 생활을 아주 접고 요석자란 이름으로 신문에 바둑 관전기를 TM기 시작하여 얼마간 고정수입을 얻는 한편, 사보나 잡지의 청탁을 받아 쓰는 글의 원고료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말하자면 선생은 소설가도 아니면서 이 땅의 몇 안되는 전업작가이기라도 한 듯이 글쓰는 일 하나로 여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언제던가, 서울 목동에 있는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여 밤 깊도록 나눈 이야기 가운데, 웬만한 사람이라면 고료가 적다고 거절해야 할 청탁도 그거라도 안쓰면 답답하니 써 줄 수 밖에 없다고 푸념처럼 말씀하던 일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내가 선생의 이름을 처음 듣고 오묘하고도 불가사의한 몇 개의 시구를 아울러 접한 것은 고교시절 백수 선생을 통해서였다. 그후 대학에 입학하여 도서관에서 비로소 <春香의 마음>이라는 선생의 처녀시집을 대하고 감격해 하던일이 어제 일만 같다. 그날로 시집을 빌려와 노트에 옮겨 손때가 까맣게 앉도록 읽고 도 읽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 하늘도무심치 않았던지 내가 선생을 얼굴과 얼굴로 처음 대한 것은 1978년 1월 어느날,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장에서였다. 바로 그 해 신년 벽두에 선생과 내가 한쪽은 심사위원, 또한 쪽은 kdtjs자라는 그렇게 고맙고도 기쁜 인연으로 맺어졌기 때문이다.
나의 눈에 비친 선생의 첫인상은 소탈, 그 자체였다.
객지를 떠돌던 막내아우가 한 이십 년만에돌아와 고향의 큰 형님을 뵙듯 그렇게 턱하니 마음이 놓이는 대면이었다. 서울 사람, 하면 흔히 세련되고 매사에 계산적이며 웃음뒤에도 차가움이 내비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선생은 서울 사람이 된지 이십년이 지났어도 때묻지 않은 삼천포 사람을 고스란히 지니고 계셨던 것이다. 거기도 또 선생은 눌변이었다. 수더분한 인상에 수더분한 말씨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을 그대로 느끼게 했다. 만약 이나라에서 논어에 나오는 교언영색이란 말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을 한 사람만 고르라면나는 지금도 서슴지 않고 선생을 먼저 꼽겠다.
선생이 문단에 나올 때 시조 두 편, 자유시 한 편으로, 그것도 각각 다른 세 분을 통해서 추천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있다. 그러나 등단 이후에는 시조보다 자유시에 더 정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음도 또한 아는 이는 다 아는 사실이다.
양이 많다고 질이 꼭 우수하리란 법은 없지만, 처녀시집 이후 <햇빛 속에서>,<千年의 바람>,<어린것들 옆에서>,<비 듣는 가을나무>,<追憶에서>,<아득하면 되리라>,<대관령 근처>,<찬란한 未知數>,<해와 달의 궤적>,<꽃은 푸른빛을 피하고>,<울음이 타는 가을江> 등 무려 열권이 훨씬 넘는 시집을 냈던 데 비해 시조집은 <내 사랑은> 단 한권뿐임을 보아서도 자유시에서의 성공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비록 단 한 권의 시조집이지만 현대시조사상 선생만큼 독보적인 시 세계를 열어 보인 시인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선생이 시조에서 거둔 성공이 일찍이 자유시에서 거둔 그것에 결코 손색이 없음도 또한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외에도 선생은 <슬퍼서 아름다운 이야기>,<빛과 소리와 풀밭>,<노래는 참말입니다> 등 열권에 육박하는 수필집을 냈고, 상복도적지 않아 문교부 문예상, 한국 시협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중앙시조대상, 동아일보 제정 인촌상 등 큰상을 두루 수상했다.
한 빛 黃士재 바라
종일 그대 기다리다,
타는 내 얼굴
여울 아래 가라앉는,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
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
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 갈래 萬 갈래.
여울 바닥에는
잠 안 자는 조약돌을
날새면 하나 건져
햇볕에 비쳐 주리라.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내 사랑은>전문
박재삼 선생의 시조에는 3수로 된 연시조가 유달리 많다. 간단히 시조집을 일별해 보아도 <그대 목소리>,<가을에>,<가는 기러기>,<별>,<낚시 생각>,<垂楊散調>,<강물에서> 등 명작의 반열에 드는 시조들이 모두 3수로 된 연시조이며, <내 사랑은> 역시 그것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은 자못 흥미롭다. 하나의 가정이지만 이들 3수로 된 연시조의 경우, 각 수가 초,중,종 3장의 형식을 이미밟고 있지만, 어쩌면 시인의의도와 관계없이 은연중에 의미상으로 초,중,종 3장의 역할로 다시 귀결된 것은 아니었을까? 논리학에 3단논법이라는 것이 있고, 설명문도 처음,중간,끝으로 씌여지며, 논설문 역시 서론, 본론, 결론으로 전개되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3장 6구의 시조에서 다시 3수로 된 연시조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재미있는 연구과제라 할 것이다.
먼저 작품의 내용을 훑어 보면, 첫째 수에서 붉은 황토재를 바로 보며 종일 오지 않는 그대를 기다리다가 여울가를 따라 돌아오는 길, 물속을 보니 안타까운 기다림 끝에 검게 타버린 내 얼굴이 비치는데, 애처롭게 잦아 드는 가야금의 마지막 가락처럼 물결 아래어른어른 흔들리고 있음을 말하고, 둘째 수에서는, 사내 대장부이기에 차마 입으로 소리내어 울지는 못하고 몸으로 소리없이 밤을 새워 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마치 부연 들기름 불이 지지지 지지지 하고앓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듯하고, 상실감에 휩싸인 마음은 싸릿대로 엮은 사립문에 비친 달빛처럼 천 갈래 만갈래로 갈기 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다고 하소연한 뒤, 셋째 수에 이르러, 이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면 잠 못 잔 조약돌을 하나 건져 밝은 햇빛을 쬐어 줄 뿐만 아니라, 나의 볼에도 대어 거기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도 적셔 주겠노라고마무리를 짓고 있다.
언제였는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으나 선생이 내가 손수 화선지에 쓴 붓글씨 한 폭을 선물로준 적이 있다. 바로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잇고나.’ 라는 열 다섯자에 ‘壬戌 晩秋 朴在森’이라고 좌측 하단에 서명이 되어 있는 그런 것으로 나는 당시 이것을 족자로 만들어 지금껏 소중히 간직해 오고 있다. 그런데 내 방 벽에다 걸어 두고 거의 날마다 쳐다 보았지만 웬일인지그 의미가 좀처럼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장의 시각적 영상을 종장에서 청각적 영상으로 환치시킨 공감각적 표현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로부터 여러해가 흐른 뒤였다. 부끄럽기 짝이 없는 고백이거니와, 종장의 ‘가야금 저무는 가락, 그도 떨고 있고나.‘ 라는 실로엉뚱한 내디딤, 곧 높디높은 영감의 현현 앞에서 나의 둔중한 사고는 도무지 속수무책으로 헤맬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작 이 시조의 클라이맥스는 둘째 수라고 할 수 있다.
지지지 지지지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희미한 들기름불과 싸릿대 사이사이로 달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바지는 사립문의정경이 너무나도 기막힌 토속적 표현의 극치를 이루면서 몸으로 우는 사내장부의 내면적 정황을 떨어지게 보여주고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장 토속적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인 백석의 <흰밤>에 나오는 구절, 곧 ‘옛 城에 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 또 하나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나 정지용의 <향수>의 말미에 나오는 구절 ‘하늘에는 성근 별 /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이라는 표현들이 토속적 미감의 극치를 이루되 사실에 근거한 그대로의정경인데 반해, <내 사랑은>의 둘째 수의 경우는 중장과 종장의 토속적 표현이 초장의 ‘몸으로, 사내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이라는 원관념에 은유의 구조로연결되면서 빛을발하되 어디까지나 보조관념의 역할에 머물고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석이나 정지용의 시가 1차원적 사고의 산물이라면 박재삼 선생의 이 경우는 2차원 내지 3차원적 사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시적 장치가 꼭 복잡하다고 해서 명시가 되리란 법은 없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가 전자의 경우에 비해 한결 천재성을 필요로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셋째 수는 동병상련의 깨달음이다. 지난 날 무심히 보아 넘겼던 사물들이 어떤 고비를 넘기고 난 뒤 자아와 동일시 된다는 것은 참으로당연한 수순이다. 지독한 상실의 밤을 맞이하기 전까지 조약돌은 그냥 무심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긴 밤을 꼬박 밝히면서 여울 바닥 조약 돌들 가운데는 자 안 자는조약돌이 있었음을 때닫는다. 비로소 시적 자아는 그 조약돌을 건져 햇빛에 비쳐 주리라 한다. 가다간 볼에도 대어 눈물 적셔 주리라 한다. 이것은 분명히 개안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침내 한 시인이 물아일체의 좁은문에 들어섰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흔히 평론가들은 박재삼 선생의 시적 정서를 ‘한’이란 한 마디로 요약하곤 한다. 그러니까 50년대 전반기의 시들이 그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30년대 시인들의 그것으로부터 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을때 선생의 시는 한국어의 언어감각에 충실하면서 재래적인 한의 정서를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한국어의 언어감각에 충실‘ 했다는 대목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체 선생이 쓴 시의 어떤 면이 이러한 평가를 내리게 하는가 하는 점이 되겠는데, 나는 이것을 선생의 탁월한 언어 표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꽃잎 속에 새 꽃잎/겹쳐 피듯이//눈물 속에 새로 또
/눈물 나던 것이네.‘ 라던가, ’한 노래의 자지러진 가락에서 풀리어
/물이 듣는 완곡한 대목에 이르듯/가을 바다는 있고나.‘
라는 표현같은 것이 그것에 값하는 것이라고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주로 선생이 쓴 자유시들을 두고 내린 것이지만, 선생이 쓴 시조에서도별 어려움 없이 통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우선 한의 정서에 닿아있는 시조들을 골라보면, <내 사랑은>을 비롯하여 <별>,<떠나는 기러기>,<구름결에>,<그대 목소리>,<가을에>,<蘆雁>등 명작의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선생의 탁월한 언어감각도 이들 시편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는 점은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라 할 것이다.
예컨대
‘차마 끊을 수 없어/반짝이는 인연인가/손가락 사이사이/빠져나간 별의 거리,/채울수 없는 無力을/이미 울지 않는다.’ <별>, ‘밀물로 산그늘이 /밀려오는 해질녘을, / 사람은 언제부터 / 돌에 恨을 새겼던가,/ 九萬里 끝없는 하늘 / 날개짓이 아롱져,’ <떠나는 기러기>, ‘어린 예닐곱 살의/맑은 시냇물에/ 손발 담그던 /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뒷덜미 가려운 곁에 / 하도 희게 느껴라.’<구름결에>, ‘설움이 바닥나면/오히려 잃을 것이 없고/ 이런 날 스스로이 / 내 가슴에 울어지는 / 그 속에 그대 목소리 / 눈 내리듯 잠겼네.’ <그대 목소리>. ‘가다간 밤송이 지는 / 소리가 한참을 남아/ 절로는 희뜩희뜩/ 눈이 가는 하늘은 / 그 물론 짧은 한낮을/ 좋이 淸明하더니라.’ <가을에>, ‘그 많은 기러기 중에/ 서릿발 깃에 짙은/ 애비도 에미도 / 그 위에 누이도 없는 / 그러한 기러기 놈이/ 길을 내는 하늘을!’ <蘆雁>등의 구절들이 바로 그렇다 하겠는데, 선생이 펼쳐 보인 한국어의 광채는 그 어느것을 보더라도 실로 눈부시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