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동료 작가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면 나는 주로 7080 노래를 부른다. 7080이란 20대를 70- 80년대에 보낸 사람들을 뜻한다. 그러니까 지금 40대 중반이거나 50대에 접어든 중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7080세대를 겨냥한 콘서트가 열려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70- 80년대에 히트곡을 냈던 가수들이 나와 당시 유행했던 노래를 부르는데 중년들의 환호가 대단했다. 지금은 일요일 새벽 1시에서 2시까지 KBS에서 쇼프로가 진행되는데 나도 새벽까지 눈을 밝히고 시청한다.
쇼 프로가 진행되는 동안,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25년이란 세월이 눈 한번 깜빡였더니 지나고 말았다. 우스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연령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말투도 생각도 그때를 못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소설을 쓸 때는 나이와 상관없이 세월과 사상을 뛰어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20대 수준을 못 면하고 있다. 하지만 몸은 다르다.
살면서 고난이 심했던 탓인지 심각한 질고를 나타내고 있다. 온몸에 뼈가 약해지고 중년의 우울증도 이따금씩 찾아온다. 2.0을 기록하던 시력도 돋보기를 써야 하지 않을까 염려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역시 나이는 못 속이나 보다고 말하면 친구들은 서로 웃는다.
TV에서 진행되는 7080에 나오는 가수들은 내가 대학 다닐 때 활동하던 사람들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70년대 말로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하던 때였다. 날마다 거리에 최류탄이 터지고 야당 지도자들은 툭하면 투옥되거나 연금당했다. 민주화의 항쟁은 봇물 터지듯 대학에서 거리에서 터져나왔다.
긴급조치니 계엄령이니 비상시국이니 하는 말을 매체를 통해 수시로 들어야 했다. 광화문과 동아일보 앞에는 탱크와 무장한 군인의 모습이 보일 때도 많았다. 대학생을 둔 부모들은 자녀가 데모에 가담할까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했다.
대학 다닐 때 겪은 10.26 사태는 얼마나 무섭던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 대통령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당장 북한에서 쳐내려올 것처럼 말했다. 한달 간 휴교령이 내려 학교도 가지 못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지냈다. 이듬해 민주화가 되려나 했는데 광주사태가 발발 극심한 혼돈상태에 들어갔다.
그때 본 서울 풍경은 완전 풍비박산 일보 직전이었다. 버스를 타고 서울역 앞을 지나는데 데모대가 차도를 점거한 채 맹렬한 기세로 출렁이고 있었다. 나라가 당장이라도 동강 날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과 현수막은 하나같이 전두환 안전기획부장의 임명 반대였다. 매캐한 최류탄 가스가 온 거리를 뒤덮고 전쟁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그후 안정이 회복되고 다시 군부통치로 들어섰다. 당시 명동과 종로에는 젊은이들이 자주 모이는 다방이 있었다.
명동에는 영지 다방과 PJ 레스토랑과 디스코텍, 여장 남자가 있는 엘파소 다방이 있었다. 그 여장남자는 주로 젊은 남자 대학생들을 좋아했는데 나중에 화장실 갈 때 보니까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무교동의 낙지골목도 유명했다.
국제 극장 뒤로 난 무교동 골목에 당시 유명한 ‘꽃네’란 경양식점이 있었는데 김정호라는 유명한 가수가 단골로 출연했다. 폐병을 앓느라 얼굴이 야윈 김정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했다. 가끔씩 하남석이 나와 ‘밤차로 떠난 여인’을 부른 적도 있었다.
낙지골목이 끝나는 곳에 쎄시봉이란 디스코텍이 있었다. 당시 입장료가 천 원이었는데 주로 고팅 장소로 유명했다. 처음에는 싼맛으로 갔지만 음악이 후지다고 안 가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가격은 (당시 13,000원) 좀 비싸지만 종로 3가에 있는 국일관 디스코텍은 음악도 생음악이고 출연진이 좋아 그곳을 애용하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종로 1가에는 음악 다방이 성업 중이었는데 그중 타임이 유명했다. 귀청을 찢을 듯이 음악을 틀어 대는데 무슨 재미로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화신 백화점 지하에 있는 웨이브도 유명했다. 홀안이 어찌나 넓은지 사람을 찾으려면 한참을 헤매야 했다. 종로 1가에 있는 무과수 제과점 뒤의 아라야 다방과 돌고래 다방도 유명했다.
약속장소를 정할 때 그곳을 대면 다 알 정도였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 앞에 있는 엘리뜨 다방도 유명했다. 주로 미팅 장소로 애용되던 장소였다. 축제 때만 되면 남녀 대학생들이 모여 서로 짝찾기에 바빴다.
당시 유명하던 팝송이 있었다. 댄스곡 ‘패션’이었다. 남영동에 패션이란 디스코텍이 생겨날 정도로 히트 쳤던 곡이다. 올리비안 뉴튼존의 노래도 유명했다. 야한 가사 내용과 함께 히트 쳤던 ‘피지칼’이었다. 내 중편소설 '핸드폰'에 등장하는 댄스곡이다. 비지스, 바카라, 캐니로저스의 노래가 다방과 디스코텍에 물결쳤었다.
또 대학가에는 대학 가요제와 해변 가요제가 유명했다. 가수 등용문으로도 통하는 가요제가 열리면 대학가는 온통 열풍에 흔들렸다. 가수 임백천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는데 온 캠퍼스가 꽝꽝 울릴 정도였다.
몸도 아프고 힘들지만 나는 참 많이 돌아다녔던 것 같다. 낭만이라고 떠들면서 밤에 하는 야팅에도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추억이라든가 떠오르는 즐거운 기억 한 토막 없다. 졸업 후에는 서슬 퍼런 군사 독재 하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다.
서정쇄신이라는 현판이 교무실 앞에 걸리고 날마다 군가를 듣다보니 어느덧 내 입에서도 군가가 흘러나왔다. 최전방 지대에서의 직장생활은 온통 외로움과 실수 투성이었다. 어린 아이 같은 심정으로 어영부영 지내다 보니 어느덧 20대가 흘러가 버렸다.
어쩌다 동료작가들과 노래방에 가면 세대차이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부분 나보다 연장자인 작가들은 흘러간 옛노래를 부른다. 나는 7080 세대답게 심수봉, 이용, 송골매, 하남석, 전영록, 나훈아의 노래를 부른다.
잠시 동안 20대로 돌아간 느낌이 들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중년이라는 나이에 어느덧 죽음도 준비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은 아닌지 순간적으로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 작가라는 몽상의 세월을 살아가면서 옛날보다는 자존감도 많이 회복되었고 보람된 일들도 많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감성도 쇠퇴하고 낭만 대신 앞날에 대한 걱정 근심만 늘었다.
토요일 밤이면 7080을 보면서 가난한 내 가슴을 본다. 그동안 창작의 그물 안에 갇혀 사느라 추억할 시간도 없었다. 얼마 전, 처지가 비슷한 자매와 함께 양수리 강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서로 20대의 기억을 이야기하는데 별 감흥이 없었다. 대신 앞날에 대한 무성한 이야기만 오갔다. 완벽한 미래에 대한 준비는 어떤 걸까. 요즘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다 천국과 십자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렇지, 나에게는 천국이라는 미래가 있지.
삶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면 미래는 천국을 바라보는 것이리라. 그 천국 갈 소망이 있으니 죽음도 겁나지 않는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천국 갈 소망 주셨으니 죽어도 안심이다. 천국만큼 확실한 미래의 소망도 없는 것 같다.
첫댓글 그래도 저 보다는 났습니다. 저는 60년도 노래밖에 모릅니다. 노래방에 가면 후배들이 60년도 노래를 예약해줍니다. 그것도 몇개 안되는 지정꼭이죠.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신외숙 작가님...
그 때 그 노래들에 향수를 느끼는 세대들. 함께 기운내시고 우리대로의 정서가 있다는 걸 자신있게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들어도 정감있는 그 노래들...!!!
저의 20대는 70년 대 초 인것 같습니다. 그 무렵 서울역 앞에 양지 다방이라고 있었죠. 전국 각지의 촌놈들이 다 모여 도라지 위티며 야간 열차를 타고 모닝 커피를 마시던...
양지 다방, 저도 알아요, 아! 정말 옛날 생각나는군요. 그 옆에 역마차 다방도 있었어요,
긴급조치만 나오면 가슴 조이던 그 때 그 시절, 마치 명동백작을 보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