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부임 학교, 추억도 새로워
<사천 서포 초등학교 : 03.03.01-04.02.29>
◎ 같은 학교 세 번째 부임길
2003년 3월 1일자로 양산 천성초등학교에서 사천 서포초등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사람은 언제나 알고 있는 환경은 두려움이 적은 법이다. 부임길은 참 멀었다. 그러나, 비록 차량으로 달리는 길이지만 그렇게 기껍고 가벼운 마음일 수 없었다. 손수 운전을 하면서도 마음속에는 그야말로 만감들이 교차하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이홍식 교장선생님과 신성철 운영위원장 등 일행이 탄 차 두 대는 양산에서 다소 늦게 출발 했고, 나는 좀 일찍 출발하여 사천교육청에 들러서 사령장을 받고 사천휴게소에서 합류하였다.
서포 임지에 닿으니 이한승 교장선생님과 홍성배 교무부장 등 몇 분의 선생님들이 학년 말 휴가 중임에도 학교에 나와 근무를 하고 있었다.
먼 여행에서 막 돌아온 느낌이 그런 것일까? 교사 시절에 두 번에 걸쳐 10년이나 근무를 했던 학교라서 그런지 꼭 친정 나들이 온 새색시의 심정이 이럴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이한승 교장선생님은 처음 뵙는 분이었다. 과거에 사천 근무를 하신 적이 있다고 하셨지만 연령차가 있어서인지 생소했다. 교육철학이 분명하고, 딱 부러지는 학교경영에 명확한 카리스마를 수반한 분이라는 지인의 사전 설명을 떠올리며 많은 것을 배운다는 자세로 임할 것을 혼자 다짐했다.
사전 정보는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딴에는 2월말의 학급배정을 비롯한 교감 업무들을 교장선생님이 해 주시면 워드 작업이라도 도울 요량으로 학교에 나오겠다고 했더니, 아직은 서포 식구가 아니라며 극구 나오지 못하도록 못을 박으시는 것이었다.
이홍식 교장선생님을 비롯하여 천성에서 함께 온 소위 부임 수행 인사들을 선창에 있는, 전부터 잘 알던 사랑골 횟집으로 모셔 회와 점심을 대접하였다.
생각하면 내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하셨고 초임교감의 애로사항을 제로화 해 주신 교장선생님이 너무 고마워 남아 있는 내 교직생활동안 배운 것들을 꼭 활용하리라고 혼자 다짐도 했다.
점심을 먹고는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휴게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제의를 했더니, 교장선생님께서는 이제 여기서 헤어지고 다음에는 서로 오가면서 만날 날 있을 거라고 하시는 바람에 아쉽지만 훗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어차피 헤어져야할 사람들이니 아쉬움 붙잡고 미적거리는 것은 되려 시간 낭비일 것도 같은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할 수 없이 헤어지고 혼자 서포를 통과하다 아는 제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참시 차를 세웠다.
김미애, 6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한 정석환군과 부부가 되어 고향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모범적인 사람들이다. 미애 뿐만 아니라 두 번째 근무 시에 어머니회장을 지내셨던 김민영씨, 김민순씨 자매도 함께였다.
나만 반가운 것이 아니라, 그들도 실제로 반가운 모양이었다.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서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애는 내가 교감이 되어 다시 부임한 사실이 그렇게 반갑고 좋은 모양이었다.
김민영씨는 아이들이 그간 모두 졸업하여 중학생이었고, 동생 민순씨는 막내아들이 한참 재롱을 부려 웃음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많은 얘기들을 나누느라고 해가 거진 지고난 후에야 우리는 다방에서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날 만난 사람들은 서포에 사는 사람들 중 반가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대단히 고마운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 날 나눈 이야기들로 나는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자기반성을 할 기회도 가질 수가 있었다.
부임 한 달 안에 몇 몇 사람들을 초청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존경해 마지않았던 남상배 교장선생님, 당시 함께 했던 선생님들 몇 분, 당시의 어머니 회장 등 함께 선창에 있는 사랑골 횟집에서 회포를 풀었던 기억이 새롭다.
◎ 옛을 생각케 하는 카풀
출퇴근은 교대 동기인 홍성배 교무부장과 함께 하기로 했다. 마침 둘의 집이 같은 지역에 있어서 편리했다. 물론 차량은 번갈아가며 운전하기로 하고 내가 안압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관계로 직원체육 회식 등 술을 마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은 내가 운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날은 번갈아 운전을 하기로 했는데 친구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여 아무래도 성배 그 친구가 운전하는 횟수가 훨씬 많았었다.
가끔씩 휴게소에 들렀다. 그럴 때마다 의견을 묻는 것은 거의 형식에 지나지 않았고, 기사가 일방적으로 휴게소로 들어가면 한담을 신나게 나누고 그냥 좀 쉬었다가 가게 되어 있었다. 실은 진주에서 서포가 승용차로 30분밖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쉬어가야 할 만큼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쉬게 되는 것은 여유를 즐기는 그런 차원이었다.
교무부장과 교감, 우리는 오가면서 직책에 대한 것은 애당초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교대 동기 친구로서, 한솥밥 먹는 동료로서 학교 일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그러다 보면 일의 처리가 가닥이 잡히고 최선의 방향이 어떤 것인지가 뚜렷해지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성배 친구랑 출퇴근 시에는 전에 서포에 근무할 때 하께 했던 카풀 멤버들 생각이 가끔씩 나곤 했다.
넉넉한 성품에 언제라도 스스로 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대부분이었던 성배 그 친구 열망하던 승진의 꿈을 나랑 함께 하는 동안은 아니지만 이루게 되었다.
그게 기쁜 나머지 축하 전화를 했을 때 밝은 가운데에도 겸손을 잃지 않았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제 2009년 3월 1일자로 초빙교장이 된 그에게 전화 축하를 했을 때 예의 그 겸손한 말투는 변함없는 가운데,
“다 주위에서 도와준 덕분”이라며 웃던 그 소리 더욱 정겹게 느껴졌었다.
◎ 스쿨버스를 동승하며
서포초등학교에는 당시 스쿨버스가 세 대나 있어서 자나 깨나 관리자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다. 오늘날처럼 통학 도우미가 고용되어서 아동들의 등하교를 자상하게 돕는 것은 아니었다.
교직원들이 윤번제로 당번을 정하여 스쿨버스를 타야 했고, 상부 관청인 지역 교육청에서는 예산 한 푼 배부해주지 않은 상황에서 일선학교의 스쿨버스 동승 실태를 감독하고 어떤 때는 지시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교감으로서 선생님들의 일 부담을 덜어준다는 차원에서 아침마다 번갈아가며 동승을 했다. 딴에는 그게 출근도 안한 남의 교실에 가서 학급경영의 일부를 살피는 교감의 업무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시대 감각에도 맞는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당시 1호 차 기사는 강점성씨로 서포면 조도리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코스는 학교를 출발하면 남구를 거쳐 옛 금진초등학교 학구인 금진, 신흥, 굴포를 다녀오는 것이었다.
전에 학부형이기도 했던 강주사와는 늘 많은 얘기 나누면서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포초등학교 출신답게 아동들이나 학교를 끔찍하게 아끼는 강점성씨를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2호차는 이정규 기사가 운행하는 차였는데 코스는 옛 자혜분교 학구 전체였다. 학교를 출발하여 서포 시가지를 지나 자혜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중촌 마을의 바닷가 횟집촌까지 갔다가 돌아와서는 옛 자혜분교를 지나 구포까지 다녀오는 코스였다.
그 코스에는 특히 1979년도에 1년간 근무했던 자혜분교의 폐교건물을 볼 수 있어 옛 일들을 생각하게 하는 탓으로 더 인상 깊었던 기억이다.
이정규 주사는 곤양 맥사가 고향이고 지금도 그 곳에 거주하는데 성품이 몹시 서글서글하고 나이가 나랑 비슷한 관계로 역시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였다.
3호차는 정연학 기사가 운행하는 차였는데 코스는 옛 비토분교 학구 전체였다. 학교를 출발하여 선창을 지나 비토섬을 거진 한바퀴 돌아오는 코스라 상당히 먼 편이었다. 정연학 기사는 젊은이였는데 고향이 거창이라 집에 다녀오는 거리가 너무 멀어 애를 많이 태우다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당시 거의 모든 직원이 거창까지 축하차 갔었는데 지금은 거창으로 전출이 되어서 스쿨버스 운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이사 스쿨버스가 있는 학교는 동승보조요원의 급료를 교육청에서 예산으로 배부해 주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당시는 말도 아니 되는 소리인데도 교직원들을 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공식적으로 공문서는 없지만 학교장 또는 교감회의 때 공공연히 이야기 되었고, 사고가 났을 경우 동승자가 없었다면 꼭 학교장의 책임사항으로 곤욕을 겪도록 되어 있었다.
◎ 어이없는 스쿨버스 사건
2003년 9월 초에 있었던 일이다.
이한승 교장선생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근 곤명초등학교로 전출하시고 그 후임으로 거제서 천명진 교장선생님이 오셨다. 90년대 중반에 통영에서 인근에 근무를 하셨던 분이라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따라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었고, 학교 또한 큰 변화가 없는 가운데 평온한 나날이 흘러가는 듯 했다.
9월 들어 두 번째 직원체육이 있는 수요일이었던가? 교장실에서의 아침 일과 협의 중에 직원체육 실시를 의논하던 중 교장선생님께서 이번 주에는 안하는 방향으로 하자고 의견을 제시하셨다.
때마침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온 나라가 복구 작업에 한창인데 실내 체육관도 없어 운동장에서 배구를 해야 하니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지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그리고, 교장선생님께서는 문턱걸이(부임 기념으로 내는 음식)를 오늘 하겠다고 하셨다.
일과를 마치고 다섯 시 경에 선창 마을에 있는 횟집으로 전 직원이 이동하여 행사를 조촐하게 진행하여 여섯 시 경에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가 각자 귀가를 했다. 때가 때인지라 조용한 가운데 아무런 문제없이 행사 하나를 잘 마쳤다는 안도감으로 집에 와 있는데 사천교육청 학무과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선창에 전 직원이 갔었느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머물렀었느냐? 무슨 목적이었느냐? 등을 마치 죄인 심문하듯이 물어왔다. 잘 아는 선배이기도 하고 상관이기도 하여 사실대로 대답을 했다.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가?”
로 시작하여 시종일관 죄인 심문이나 나무라는 투로 쏟아내는 이야기를 종합하면 횟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스쿨버스를 촬영하여 진주에 있는 모 신문사에 보낸 사람이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사천교육청과 경상남도교육청에 전화까지 함으로써 사태가 확산 일로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한꺼번에 조용히 이동한다는 생각으로 스쿨버스를 이용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하기에 따라 태풍 매미의 여파로 복구에 온 정성 기울이는 시기에 한가롭게 회식이나 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이들 등하교 시키라고 있는 스쿨버스를 술 먹으러 가는데 이용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교장선생님과 나는 신문사의 전화도 몇 통 받았다. 기자가 학교 방문을 하고 싶은데 가도 되겠느냐고 질문을 해 오기도 했고 내일 저녁에는 신문에 기사가 나올 거라는 얘기도 해왔다. 이제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의논 끝에 오라고 했고, 저지른 잘못이 있으면 당연히 벌을 받자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고 다음날을 맞았다.
아침 일찍 출근 하여 교장선생님과 일상 얘기를 나눈 뒤 학교일지를 보고 있는데 도교육청 임장학사가 전화를 했다.
“서포 유지가 걱정이 많지요? 허허허.”
“---이일을 어찌 처리해야 되는지 모르겠소.”
“(전략) 별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만 만약 나중에 일이 확대되면 학교장 주의...(하략).”
솔직히 임장학사와 통화하고 난 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즉시 교장선생님께 통화 내용을 보고하니 교장선생님도 표정이 많이 밝아지셨다. 그리고는,
“우리가 지은 죄가 있다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기다려 봅시다.”
라고 하시고 교장실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유난히 요란스레 울렸다. 사천교육청 학무과장이었다.
그렇게 퉁명스러울 수가 없는 어조로,
“우찌 되 가고 있내? 그라고, 와 경과보고도 안하고 있내?”
“과장님, 별 걱정 안 해도 되겠습니다. 방금 도 임장학사와 통화를 했는데....(하략)”
“머어? 걱정 안 해도 데는 거 좋아 하네. 도 교육청애 전화가 간 것마 해도...(하략)”
도교육청과 지역 교육청의 입장차인가? 아니면?
하부기관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준다면 좀 더 자상하게 해결 방안을 안내해 주고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사람이 다르니 사고하는 방식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도교육청과 지역교육청의 입장 차이도 이해가 가지만 ‘엎어진 놈 뒤통수 찬다.’는 말처럼 가뜩이나 어려워서 전전긍긍하는 하부기관 사람들에게 엄포나 놓고 겁이나 주고------.아무튼 나는 이 일로 많은 가슴앓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은 퇴근도 못하고 교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지만 밤 11시가 넘어도 신문사에서는 학교방문을 하지 않았고, 전화 한 통화도 더 없었고 신문기사도 단 한 줄 나오지 않고 사태는 조용히 마무리가 되었다.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우리지역 교육청 때문에 지레 난리를 피운 셈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나는 처음부터 난리를 생각도 해 보지 않았었다. 도 임장학사 전화를 받고 나서는 더 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학무과장의 전화를 받은 후 시키는 대로 경과 보고서를 써서 보내면서도 고소를 금치 못했음을 밝혀 둔다.
물론 남모르게 걱정을 해 주고 혹여 무슨 일 날까봐 애써준 초등계장 신현권 친구, 서포의 시의원 김석관씨 같은 고마운 분들도 있었음을 밝혀 둔다.
그리고, 교장선생님과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다 그만두고 교장선생님이 내게 하신 말씀 한부분만 옮겨 보면,
“교감선생님! 1년 되거든 내신 내서 다른 학교로 가소. 여기는 교육자로서 소신 펼 곳이 못 되요.”
신문기자까지 전화를 걸어 학교방문을 이야기하기까지 했는데 결국은 아무 일 없이 조용히 넘어간 것은 지금도 의아하기만 한 일이다. 교장선생님과 나는 밤 12시가 다 되어 퇴근을 하면서 아마도 별로 이슈가 될만한 기삿거리가 아니었던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도 어느 누가 밀고(?)를 했는지는 안개속이다. 다만 이런 일로 많은 가르침을 선사함은 물론 주위를 잘 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 그런 것까지를 바르게 일깨워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스쿨버스는 아동 통학과 현장학습 이외에는 활용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들 있는데 일단 학교장의 판단사항이고 권한사항이니 사용 범위도 그렇게 칼로 두부 자르듯 하는 것이 아님도 알게 되었었다.
◎ 귀신이 곡할 노릇 - 화장실 화재 사건
2004년 1월 어느 날 겨울방학중의 일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함께 근무하던 직원들과 함께 2층 중앙부에 있는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 때의 시간이 아마 오후 세시쯤이었는데 밖에서 일을 하고 있던 강점성 주사가 난데없이,
“불이야! 동쪽 화장실에 불이 났다.”
하고 외쳐대는 것이 아닌가? 복도로 나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찌된 일인지 우리가 얘기하고 있던 2층 동쪽 끝 화장실에서 짙은 연기가 피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화장실 안에서는 불이 붙어 화재의 초동 상태가 진행이 되고 있었다.
함께 있던 이정규 주사가 황급히 소화기를 챙겨 들고 화재를 초동 진압할 수 있었다. 화재 상황은 화장실 안의 일부가 플라스틱 연기에 의해 보기 흉하게 그슬려 있을 뿐 큰 화재는 아니었다. 내부 천정이 하얀색이어서 검은 그을음은 더 선명히 나타남으로써 흉함의 도가 좀 높았을 뿐이었다.
교장선생님은 그 때 진주의 어느 병원에 입원중이셨기에 모든 것이 내 판단으로 결정도 하고 처리도 해야 했다. 물론 나중에 교장선생님께 경과보고는 하겠지만 우선 자체적으로 수리가 가능하겠다는 판단으로 안도하며 수습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가 빤히 바라보이는 염전 마을에 있는 소방대에서 출동을 한 것이다. 출동과 함께 상부 소방관련 관공서에 신고도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뿐만 아니라 서무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다른 학교 서무를 통해 논의하던 중 교육청에서 알게 되고 급기야는 교육장님에게까지 보고가 됨으로써 교육장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죄송스럽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씀을 드렸다.
“교육장님, 지금은 화재 원인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경미한 화재고 조기진압도 했기 때문에 내일까지 복구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작업을 진행했다. 천정의 그을린 타일은 본교 출신이라 늘 학교를 아끼는 마음이 깊은 강점성 주사가 공사를 진행할 때 업주 모르게 다섯 박스나 숨겨놓았던 것이 있었고 그걸 처리하는데 필요한 나사못까지 따로 확보해 놓았던 것이 있어서 자재비용은 한 푼도 들지 않았다. 다만 전구 나간 것, 스위치, 전선 등속과 바닥 타일 틘 것 일부 등으로 아주 소액의 예산이 들었을 뿐이었다.
화재 진압 당시 들렀던 인근 주민 한 사람이 사흘 후쯤 학교를 방문하여 예산이 얼마나 들었느냐고 물어왔다. 얼마 안 되는 예산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고 했더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갸우뚱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교감선생님, 그날 봉깨내 타일 하고...적어도 칠팔십 만원은 들었실낀대요.”
“쓸 데 없는 말씀 하지 마소. 왜 내 말을 못 믿소?”
서포라는 지역은 옛날부터 고발정신이 강한 지역이었다. 자그마한 꼬투리만 있으면 들추어서 키우려는 심리들을 갖고 있음을 알기에 못을 박은 것이다. 다행히 전에 10년을 근무했던 학교라서 그 사람과는 친분이 두터웠기에 그 사람도 더 이상은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이제 서포는 미련 두지 말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건이었고 부추김이었다.
그 당시도 많은 궁리를 하였으나 정확한 화재의 원인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답은 없다. 다만 방학 중이라서 중 고등학생들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레를 보관하는 플라스틱 물통에다가 꽁초를 버렸고, 걸레들이 방학 중이라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것들이라 바짝 마른 상태여서 서서히 불이 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 연이어 터지는 엉뚱한 사건
KDC라는 소위 문제아가 하나 있었다. 아이 아버지가 심각한 시각 장애인으로서 노동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여서 여러 가지로 힘든 가운데 자녀교육도 의도한 바대로 진행하지 못했음인지 아이에게는 좀 문제가 많았다.
흔히 말하는 단순한 도벽이라든가 가벼운 문제를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 KDC는 매사 심각하게 엉뚱함을 보이고 어린 마음에도 가질 수 있음직한 상황 판단력은 아예 상실한 아이로밖에 볼 수가 없었다. 더 솔직히 얘기하면 문제 행동들을 수도 없이 일으키고 다니는 그런 아이였다.
10월경에 좀은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화장실 청소용으로 지급된 크레졸을 불특정 다수의 아동도 아닌 불특정의 어느 아이의 얼굴 정면에서 확 뿌려버린 것이다. 담임이 보관하고 있다가 청소시간에만 내어놓는 것을 청소당번도 아닌 녀석이 지나가다가 순식간에 저지를 일이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레졸 액은 상대방 어린이의 눈에 일부 들어갔고, 곁에서 본 아이들이 달려들어 KDC의 행동을 제어하는 한 편 수돗가에 데리고 가서 눈을 씻겨 주는 등 어쩌면 어른스런 행동으로 위기를 천만다행의 순간으로 돌려놓은 것이었다.
순식간에 당한 아이는 동네 병원을 거쳐 진주 경상대학교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고, 구급차를 동원하여 서울에 있는 병원까지 옮긴 것이다. 아이의 상태에 대한 염려스러움에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분히 배타적인 성향의 학부모회에서는 학교 측에다가 아이를 정신병원에 보내지 않고 소극적으로 대처하여 제2의, 제3의 사건을 만들려고 방치한다고 몰아붙이고, 학교의 입장은 아이 하나라도 더 바르게 인도하자는 그야말로 교육적인 입장이 맞섬으로써 상당기간 줄다리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밀고 당기는 대치 끝에 일은 잘 마무리 되었지만 결국은 지역민들의 자가당착(自家撞着)적 생각들과 배려를 모르는 언사나 행동들 때문에 학교로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의 마음고생은 짧디 짧은 사건 일지로 결코 대변이 될 수 없었음을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진행의 과정에서 치료비 등도 많이 부풀림으로써 그게 들통이 나 어른들의 얄팍한 욕심에 동심이 더 멍드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도 있었고, 문제성이 있는 아동이 저지르는 금전적인 피해를 보상해 주는 보험이 있다는 사실도 실은 그 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보험회사가 개입이 됨으로써 조사 과정에서 치료비 등을 부풀린 것도 알 수 있게 되었던 일이다.
<함께 했던 직원들>
2003.03.01/이한승(교장선생님), 류민화, 변남수, 정은숙, 박용길, 노환순, 이도인, 조미숙, 홍성배, 김숙정, 손순자, 강미경, 김동영, 이종숙(서무), 조선자(유치원), 박명은(영양사), 김정숙(조리사), 강점성(기능), 이정규(기능), 정연학(기능), 김강호(기능), 문석수(운영위원장), 오갑수(부위원장), 이미영(위원), 김혜숙(위원), 정자일(위원), 하명희(위원), 안문웅(위원), 조현득(위원) 2003.09.01/천명진(교장선생님)
2004.01.10/진지영(서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