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해 무왕에 대하여 [20회 고급 9번]
정답: ②
* 발해 무왕에 대하여
연호가 ‘인안’이고 흑수 말갈을 공격한 것을 통해 2대 무왕인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737년~793년)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무왕), 대흥.보력(문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5경 15부 62주).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2) 발해 무왕의 업적 [22회 고급 9번]
정답: ①
* 발해 무왕의 업적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연호: 천통)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연호 인안)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등주)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이 때 신라는 당의 사주를 받아 김사란을 시켜 발해 남부 국경을 공격하였으나 추위로 실패하였다(733). 이에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737년~793년)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용천부)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무왕), 대흥.보력(문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5경 15부 62주).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애왕(906~926) 때에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3) 발해 무왕 대의 역사적 사실 [30회 7번]
정답: ④
* 발해 무왕 대의 역사적 사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연호: 천통)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연호: 인안)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등주)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이 때 신라는 당의 사주를 받아 김사란을 시켜 발해 남부 국경을 공격하였으나 추위로 실패하였다(733). 이에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737~793)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용천부)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무왕), 대흥.보력(문왕)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5경 15부 62주).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애왕(906~926) 때에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① 고구려 장수왕(413~491)은 백제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 전 유역을 장악하였다(475).
② 백제는 성왕(523~554) 때에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는 등 중흥을 도모하였으나 신라 진흥왕에 의해 관산성에서 전사하며 물거품이 되었다.
③ 신라 법흥왕(514~540)은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고 관등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완성하였다.
(4) 발해 문왕 [21회 고급 7번]
정답: ④
* 발해 문왕
문왕(737년~793년): 무왕의 아들로서 발해 제 3대 왕. 연호는 대흥(정효공주묘비), 보력(정혜공주묘비)을 썼다. 후원 세력 확보를 위해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북으로는 불열말갈과 철리말갈을 포섭하였고, 또한 남쪽으로 용흥강 주변까지 발해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수도를 중경 현덕부에서 상경 용천부로 정했다가 다시 동경 용원부로 옮겼다. 문왕은 관직제도를 제정, 사적(史籍) 수입, 주자감(胄子監) 설립 등 정치·문화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그의 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비석에는 문왕을 가리켜 황상(皇上)이라 칭하고 있어 발해가 그의 대에 이르러 내부적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①, ③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719~737)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732). 이 때 신라는 발해의 남부 경계를 공격하였으나 악천후로 실패하며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에 발해는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②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5경 15부 62주).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5) 발해에 대하여 [26회 고급 11번]
정답: ⓹
* 발해에 대하여
발해의 수도인 상경은 당나라 수도 장안성을 모방한 구조(주작대로)가 특징이고, 문왕 말기 동경 시기(785~794) 외에는 멸망 때까지 발해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외성을 쌓고, 남북으로 넓은 주작 대로를 내고, 그 안에 궁궐과 사원을 세웠다. 궁궐 중에는 온돌 장치를 한 것도 발견되었다. 사찰은 높은 단 위에 금당을 짓고 그 좌우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하였다.
⓵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818~830)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5경 15부 62주).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⓷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 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727년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구려의 옛 땅을 수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았다.”라든지, 759년 문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스스로 ‘고(구)려 국왕’이라고 칭한 점이 나와 있다).
⓸ 발해의 중앙의 정치 조직은 3 성과 6 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 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 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⓹ 신라는 삼국 통일 후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는 상수리(上守吏)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6) 황제국을 표방한 발해 [23회 고급 7번]
정답: ③
* 황제국을 표방한 발해
발해는 전체 15명의 왕 중에서 무려 10명의 왕이 연호를 사용하였다. 천통(고왕), 인안(무왕), 대흥.보력(문왕)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의 묘비에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皇上罷朝興慟)"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발해에서는 문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 발해는 당과 해로와 육로를 이용하여 무역을 하였는데, 당은 산둥 반도의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였다. 이는 황제국 표방과는 관계가 없다.
㉣ 발해 문왕(737~793)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신라도)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신라도도 황제국 표방과는 관계가 없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