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정부 교구 천주교 성지를 찾아서
1. 성 남종삼 요한 가족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율대리 산 22-2
* 천주교 길음동성당 묘원 윗쪽
2. 백서의 주인공 황사영 알렉시오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산 35-1
☞ 부인 정난주 마리아 성지 / 제주도
☞ 아들 황경한 성지 / 제주 추자도
★ 성 남종삼 요한 (1817∼1866) 순교 성인의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 / 의령 남씨 가족묘소 / 의정부교구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 성인 가족 묘]
* 천주교 길음동성당 묘원 윗쪽에 위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에 있는 서울대교구 길음동 본당 공원묘지 내에 자리한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병인년) 서소문 밖에서 치명한 성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의 묘소가 있다.
☞ 병인박해 때 남종삼 성인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고, 부친 남상교는 공주에서, 큰아들인 남명희는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부인 이씨(李召史)는 유배지 창녕현에서 순교하였다.
☞ 성인 남종삼은 충청도 충주에서 태어나 남상교(南尙敎, 호 雨村, 1783~1866, 아우구스티노)의 양자가 되었다. 1843년 문과에 급제하고 1846년 경상도 영해 도호부사가 된 남종삼은 청백리로서 의덕과 겸손의 청빈한 생활을 하여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동료 관리들에게는 시기와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남종삼 성인 묘소 가는 길
* 길음동 성당묘역에서 바라보이는 남쪽 앞산의 능선( 좌측 도봉산, 우측 북한산)이 수려한 명산이다.
☞ 성인은 관직에 따르는 미신 행위로 인해 한때 천주교회를 떠난 적도 있었으나 다시 천주교회로 돌아온 후에는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프랑스인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1863년 대원군의 명으로 정3품 승지가 되어 왕족 자제의 교육을 맡기도 했었다.
☞ 1866년 러시아인들이 국경을 넘어와 통상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문젯거리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 1814~1866, 토마스), 이유일(李惟一, 1819~1868, 안토니오) 등과 논의하여 영국,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자는 소위 방아책(防俄策, 聯佛防俄論)을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대원군과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몬) 주교와의 면담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척신들의 압력, 베르뇌 주교와의 연락 지연, 중국에서의 천주교 박해 소문 등으로 실패했을 뿐더러 태도가 돌변한 대원군에 의해 병인 대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 1866년 2월 고향인 제천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던 남종삼은 중도에서 체포되어 국청에서 6차의 국문을 받고 3월 7일 50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홍봉주와 함께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국청에서 남종삼은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안정과 새 역사의 추진을 위해 러시아 남침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 남종삼의 처형 후 가족을 노륙지전(孥戮之典)에 처하라는 상소가 거듭되었으나 왕명으로 각하되었다. 그러나 결국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인 남명희(南明熙)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 가서 마침내 공주와 전주에서 순교하였고, 부인 이조이(李召吏)와 나머지 자식들은 각처로 유배되어 노비 생활을 하게 되었다.
☞ 그 중에서 부인 이조이는 유배지 경상도 창녕에서 훗날 순교하니 남종삼 가문은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하였다. 남종삼은 그 후 1885년에 이르러 조정의 조치로 모반부도의 죄를 벗게 되었다.
☞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한 남종삼 성인 가족 묘소
* 가운데 부친의 묘소, 오른편이 남종삼 성인의 묘소
☞ 우측에 있는 성 남종삼 묘소
* 가족묘소 가운데 있는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의 묘소 / 공주진영에서 순교
* 묘소 윗쪽의 성모상
* 남종삼 성인 묘소 남쪽 정면에 좌측으로 도봉산과 우측으로 북한산의 능선들이 보인다. 산 너머 서울(한양)이다.
* 남종삼 순교성인 묘소의 순례자 도장
* 천주교길음동성당 묘원 / 대개가 부부합장 묘소이다.
★ 백서의 주인공 하느님의 종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소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가마골로 270
* 순교자 묘소 간판이 엄청나게 퇴색되었다. 묘소 앞의 여관건물을 성지에서 구입했는가 보다. 순교자의 집으로 내부 수리 중이다.
☞ 하느님의 종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알렉시오)의 묘소는 선산이 있던 가마골에서 1980년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황사영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써서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다가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 호 仁甫, 1757~1801, 토마스)이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혀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으로 처참한 육시형을 당하였다.
☞ 순교 후 친척들이 황사영의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던 가마골(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안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 무덤은 1980년 현지에서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연 조선 시대에 국가 모반죄로 육시(戮屍)되어 전국을 떠돌아다닌 시신을 수습하여 정식 무덤에 안장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고,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황사영의 무덤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 순교 이후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숙부 석필(錫弼)은 경흥으로, 모친 이윤혜(李允惠)는 거제로, 부인 정명련(丁命連, 일명 蘭珠, 1773~1838, 마리아)은 제주도 대정현의 관비(官婢)로, 두 살짜리 아들 경한(景漢, 일명 敬憲)은 어린 탓에 교수형을 면하고 추자도의 노비로 유배가게 되었다.
☞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 한 명으로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수많은 교우들이 희생되었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金漢彬, 1764~1801, 베드로),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해 8월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어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명주에 적었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이다. 그는 ‘순교자의 피는 천주교의 씨앗’임을 굳게 믿었고, ‘주님을 위해 진실로 남은 힘을 다하고자 한다.’는 소명 의식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신앙심으로 교회 재건을 위한 방책을 「백서」에 담았던 것이다. 그러나 「백서」는 내용상 국가에 해를 끼치려는 방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고, 위정자들에게는 천주교 신자들의 양박청래운동(洋舶請來運動 ; 서양 선박을 청해 와서 외교적 교섭을 통해 선교하려는 운동)과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더욱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 문서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쓰인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 황사영 백서와 백서를 적었던 장소 / 충북 제천 배론성지의 토굴
☞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 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 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 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현했다. 그리고 청나라 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청(淸)나라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
☞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되어 한림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황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토마스)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한은 추자도로 노비의 삶으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 제주도에 있는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소
☞ 제주 추자도 황사영의 아들 유배지 /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의 한이 어린 곳
■ 주변의 문화 체험 장소들
★ 벽초지 문화 수목원 /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부흥로 242
■ 마장호수 출렁다리와 둘레길 / 경기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 481-1
♡ 감사합니다.
첫댓글 황사영 묘소 벌초후 부침개 구워 먹었던 옛날 생각 나네요. 고맙습니다 ❤❤
연령회 책임봉사로 고생이 정말 많으십니다. 고맙습니다. 옛추억의 부침개 힘으로 올해도 더욱 건강하시며 평화로우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