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이 상경해서 서울에서 생활한 것이 20년이 넘었으니 촌놈치고는 제법 서울물을 먹은 셈이네요. 제가 난생 처음 서울에 가 본 것이 1980년이었습니다. 개포동에 볼 일이 있어서였습니다. 초행길에 제대로 찾아 갔을 리 만무하지요. 도리 없이 택시를 탔는데 글쎄 택시기사가 개포동을 모르더란 말입니다. 요즘이야 집값이며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감히 우리 같은 사람은 곁눈질도 못할 곳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정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의 자연하천이었던 양재천 천변으로 논농사, 밭논사에 주변 구릉지는 괴수원 등으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는 깡촌이었습니다. 행정구역상으로만 서울에 편입되어 있을 뿐이어서 웬만한 서울사람도 서울에 개포동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던 때였으니 택시기사가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닌 셈이지요.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은마아파트. 허허벌판에 덩그라니 서있는 고층아파트를 보며 이런 동네에 굳이 아파트가 필요할까,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외딴 곳에서 살까라는 의구심을 가졌더랬습니다. 그 은마아파트가 지금은 34평형이 7억, 8억 심지어 9억을 호가하고 있답니다. 숙박할 여관 하나가 없어서 대중목욕탕에 들어가 일보시던 할머니에게 사정사정해서 물 빠진 목욕탕 타일바닥에서 하룻밤 신세진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강남대로나 테헤란로 모두 허허벌판이거나 밭뙤기 아니면 재래식 주택이 여기저기 군락을 이룬 그야말로 촌이었지요. 물 좀 얻어 마시려 들어간 집 마당에 지하수를 퍼 올리는 샘(일명 ‘작두우물’이라고하지요)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사실은 그 때부터가 강남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던 시기입니다. 촌놈이 ‘서울에 아직까지 이런 전원적인 풍경이 남아있구먼’하면서 감상에 젖고 있던 그때에 한편에서는 돈주머니 싸들고 부동산 투기에 열 올리며 떼돈을 거두어 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역시 돈은 아무나 버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개포동하고는 다소 거리는 있지만 훨씬 더 요지라고 할 수 있는 강남역(당시에는 2호선 개통도 되기 전입니다.) 인근의 서초동에 이미 진흥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위치가 구체적으로 어딘지 지/명/을 얘기하자면 바로 “서초동 진흥아파트......!!!”. 여기서 서초동진흥아파트는 아파트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냥 지명입니다. 워낙이 오래전부터 터주대감처럼 눌러 앉아 유명세를 타다보니 그냥 그 자리를 일컫는 이름이 “서초동 진흥아파트”가 된 셈입니다. 인근의 “뱅뱅사거리”나 “제일생명사거리”(지금은 교보타워사거리), 강남역 “뉴욕제과”처럼 특정 건물 또는 회사가 아예 지명이 되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테면 ‘서일중학교가 어디지요?’라고 물으면 ‘진흥아파트 뒤편이요’라고 대답하면 모범정답이 되는 셈이지요. 그 서초동 진흥아파트가 지금은 평형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억에서 10억원을 호가하고 있으니 역시 부자들 사는 동네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어쨌든 서울 사람이라면 “진흥기업”은 몰라도 서초동 진흥아파트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유명한 아파트입니다.
이번에 호성동 더블파크를 계약하게 되면서 새삼스럽게 진흥기업과 서초동 진흥아파트가 매치가 되었습니다.
“아!! 이 회사가 (서초동)진흥아파트를 지은 그 회사란 말이지...!!!”
서울에서 사는 동안에는 감히 내가 진흥아파트에서 살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꿈에서 조차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정녕 내가 계약한 아파트가 진흥아파트란 말이지!!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계약 당시에는 심히 감개무량하더이다.
이제 입주가 몇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입주하고 살다가 다시 20년쯤 지난 후 쯤에 택시를 타게되었을 때 “호성동 출입국관리소”를 가더라도 “호성동 진흥아파트!!!”를 외쳐야 기사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살기 좋은 그리고 비싼(속보이나요?) 아파트가 되어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오늘 같은 폭염에도 20년 후까지도 명성을 휘날릴 호성동 진흥아파트를 건축하시기 위해 수고하시는 진흥기업 임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살면서 말썽나지 않도록 대한민국 최고의 훌륭한 아파트로 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