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8:16-29
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오늘 본문에는 바로 앞 단락까지 성경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진두지휘하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열왕기하 3장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해 북왕국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나라 중심인 왕실이 아닌 주변인들에도 깊이 관심 두고 계신다는 걸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기자는 이제 독자의 시선을 다시 왕국 중심부로 옮깁니다. 그동안 그저 ‘왕’ 또는 ‘이스라엘 왕’으로 부르며 이야기 주변 인물 정도로 각하시켰던 이들 본명을 오랜만에 언급해 독자의 주의를 환기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어제 살핀 본문 속 사건이 조만간 북왕국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 인접국이자 정적인 아람에서 벌어진 왕권 찬탈 사건으로 생긴 바람이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닿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마주한 이들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유다 왕 여호람의 등극과 평가(16-19절)
(16)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엘리사는 아합의 아들 요람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 주로 활동했습니다. 이때 요람은 앞선 열왕기하 3장 1절에서는 ‘여호람’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됩니다. 하지만 지금 본문 16절은 그를 ‘요람’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의 통치 제오년에 남왕국 유다 왕위에 오르는 자의 이름도 여호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성경 기자는 분열한 두 나라 왕들 이름을 교차로 마주할 때 독자가 느낄 혼란을 줄이려고 북이스라엘의 여호람을 ‘요람’으로 명명한 것 같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호람이기도 한 요람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오년 째 된 해에 남왕국 유다에서 여호람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때 성경은 남유다에 여호람과 함께 여호사밧도 왕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즉, 여호람은 왕이 되고 얼마간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의 섭정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되어 여호람이 이제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기 통치를 시작합니다.
(17)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여호람은 그의 나이 32세가 되었을 때부터 8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성경 기록들을 가지고 추정하면 여호람은 8년의 단독 통치 전 그의 아버지 여호사밧과 함께 5년 정도 공동통치를 했습니다. 아마 이때 여호람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를 가까이서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사밧만큼 보고 따를 좋은 모델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여호사밧을 이렇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역대하 17:3-4)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사밧은 그의 조상 다윗의 길을 따랐습니다. 그는 가나안의 우상 바알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 율법을 지켜왔던 왕입니다. 이처럼 여호사밧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왕일 수 있었던 건 아마 그의 아버지인 아사왕도 하나님 앞에서 선과 정의를 행한 왕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대하 14:2). 그런데 아사, 여호사밧 그리고 그다음을 잇는 왕 여호람은 이들과 달랐습니다.
(18)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성경은 여호람이 다윗의 길이 아닌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부터 시작된 북왕국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게다가 여호람은 이스라엘 왕 중 ‘아합의 집’과 같이 행했습니다. 아합이 누구입니까, 북이스라엘의 많은 왕 중 가장 악한 왕이 아닙니까. 엘리야를 통해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경험했음에도 바알과 아세라를 쫓았던 그 왕 아닙니까. 여호람은 바로 이 왕을 좇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 가까이에 좋은 신앙인이 있어도 그게 나의 믿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호람은 아버지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뜻을 따라 살며 백성을 다스리는 걸 가까이서 봤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길까지는 아니어도 여호사밧의 길을 좇는 것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합의 길을 따랐습니다.
아무리 내가 좋은 교회를 다니고, 아무리 우리 목사님이 말씀을 바르게 전해도, 그것들이 나의 믿음을 책임져주지 않습니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 선물로 받습니다. 다만 믿음은 내가 내 삶으로 살아내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때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내 믿음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더불어 혹 내가 속한 공동체가 악하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간직하고 꽃으로 피워낼 수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다니엘 아닙니까. 그는 우상의 나라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만을 목적 삼았습니다. 이는 그가 마음을 정하고, 습관을 따라 항상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교우님들의 믿음 생활은 어떠하십니까. 다른 사람의 창문이 열렸는지, 열렸으면 얼마나 열렸는지에 관심을 두기보다 오늘 내 마음의 창문을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여시기를 축원합니다.
한편, 여호람이 남유다 왕 중 처음으로 악한 왕으로 평가받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아합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기자는 여호람이 악한 왕이 된 여러 이유 중 이것 하나만큼은 콕 집어 밝힙니다. 여기서 아합의 딸의 이름은 27절에 나오는데. ‘아달랴’입니다.
아달랴의 아버지는 아합입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누구이겠습니까. 이세벨이지 않습니까. 북왕국에 바알 숭배가 만연하게 한 장본인으로 천하의 엘리야조차도 두려워 떨게 했던 그 인물 말입니다. 아달랴는 이런 이세벨의 딸로서 여호람의 아내가 되어 그를 통해 남왕국에 바울 숭배가 퍼지게 했습니다. 여호람 이후 벌어진 국가 개혁에 바알 신당을 허물고, 제단과 우상을 깨드리는 등의 일이 포함된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왕하 11:18).
물론 여호람은 본래 선한데 아달랴 한 사람이 그를 망쳤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기자가 그녀를 콕 집어 제시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을 배우자로 얻는지는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전 15:33)’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가장 가까운 벗인 배우자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앞서 언급했듯 배우자 또는 내가 속한 환경에 나의 형편없는 믿음의 책임을 돌려선 안 됩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거울 앞에 나 자신을 세우고 내 모습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나 내 마음속 행동의 동기들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호람이 아달랴와 결혼한 건 부친의 영향도 있겠지만, 요동하는 국제 정세 속 북왕국의 힘을 빌려 이익을 보려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그는 의로움보다 눈앞에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나의 믿음이 하나님께 어떤 평가를 받을지 잠잠히 헤아려 보는 은혜 있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내 삶의 정황 속 은밀히 감춘 내 마음의 동기들까지도 톺아보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은총 누리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창문을 여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이런 여호람을 바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이렇습니다.
(19)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여호람은 분명 아합의 집과 같이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참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호람의 조상인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무리 그의 후손이 범죄해도 징계는 하지만 나라와 왕위는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었습니다(삼하 7:14-15).
더욱이 본문에서 등불은 생명, 번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다윗과 한 약속을 기억해 이 나라를 당장에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에 따라 죽어 마땅한 이들을 참으셨습니다. 도리어 종국엔 이 언약에 근거해 온 인류를 다스릴 왕이자, 우리가 바라볼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때 이 모든 일이 결코 왕들의 순종 때문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때문임을 잊지 마십시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러한 언약적 신실하심과 우리에게 수여하시는 언약의 은혜가 우리의 책임을 면제하는 게 아님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성경은 여호람을 통해 이렇게 보여줍니다.
유다 왕 여호람의 행적과 죽음(20-21절)
(20-21) 여호람 때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운 고로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들의 장막들로 돌아갔더라
여호람이 통치할 때 에돔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에돔은 오래전 다윗이 정복했고 그곳에 수비대를 두었던 나라입니다(삼하 8:13-14). 그런 에돔이 이스라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들의 왕을 세운 것입니다. 이에 여호람이 이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도리어 그는 에돔 사람들에게 포위당했다가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회군하고 맙니다.
이 일로 유다는 국제 정치적 위세가 약해졌을 것입니다. 동시에, 에돔 지역에 있는 무역로에서 징수하던 통행세도 거두지 못해 경제적 타격도 입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22절은 립나도 유다를 배반했다고 알려줍니다. 립나는 다윗이 에돔을 정복한 것보다 훨씬 전인 여호수아 때 정복한 도시입니다(수 10:29-30). 바로 그 지역이 여호람 때에 유다를 배반했고, 유다는 이후 다시 그곳을 수복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기간 유다의 다스림을 받았던 에돔과 립나가 여호람 때에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혹자는 이 일들이 흔히 있는 고대 전쟁사 중 한 부분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들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을 벌하신 것으로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다만 은혜를 받은 우리는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책임이 있습니다. 이때 모든 어려움이 하나님이 책임을 다하지 않는 우리를 치시는 채찍이라곤 할 수 없지만, 작은 어려움에도 말씀에 비춰 나를 돌아보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책임 있는 성도로 살때 필요한 지혜로운 자세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살 때 분명 우리 이름은 하나님의 책 안 적힌 여호람의 이름 반대편에 기록될 것입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의 등극과 평가와 행적(25-29절)
(25-27)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이더라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그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여호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해 국력을 약화하는 결과를 만들곤 성경 무대에서 퇴장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이 된 건 아하시야입니다. 성경 기자는 지금까지 사용해온 양식을 따라 가장 먼저 남왕국의 왕 아하시야가 북왕국의 왕 요람 제 12년에 왕위에 올랐음과 그 재위기간이 1년이라고 밝힙니다. 그 뒤 곧바로 붙이는 그에 관한 설명은 그가 ‘아달랴’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하시야는 아달랴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처럼 아합 가문을 따라 살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27절에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다는 말은, 아하시야도 아합의 딸과 결혼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위로 번역된 히브리어 ‘하탄’에는 아들이라는 뜻도 있는데, 아하시야의 악행이 그의 외조부인 아합과 같아 그 집안의 아들과 다름없었다는 걸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아하시야는 북왕국과의 긴밀한 교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28-29) 그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과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에게 부상을 입힌지라 요람 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당한 부상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유다의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아합의 아들 요람을 보기 위하여 내려갔으니 이는 그에게 병이 생겼음이더라
어느 날 아하시야는 북왕국의 왕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 아람과의 전투를 치렀습니다. 이는 북왕국의 성읍이자 정치·군사·경제적 요충지인 길르앗 라못을 아람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아하시야가 요람을 도운 건 친척 관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뜩이나 에돔과 립나의 이탈로 경제 상황이 나빠진 남유다에도 길르앗 라못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북왕국의 요람이 부상을 입고 맙니다. 이때 그가 부상 치료를 위해 회군한 곳은 수도 사마리아가 아닌 이스르엘입니다. 이는 그의 부상정도가 꽤 심했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르엘에도 왕의 겨울 궁이 있긴 하지만, 사마리아만큼의 시설과 환경을 갖추진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아하시야는 이스르엘에 머무는 요람을 병문안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은 끝이 납니다. 다만, 여기서 독자들은 묘한 긴장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자들은 앞선 기록들을 통해 아하시야는 요람 제 십이년에 왕위에 올라 1년을 통치했고, 동시에 요람은 열두 해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는 걸(열왕기하 3:1)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끝이 임박한 두 왕이 한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9장 1절엔 하나님의 사람이자 집행관인 엘리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종착점이 점점 또렷하게 보이는 듯합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나의 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다. 혹 내 걸음이 내게 유익이 될 것 만 같은 이스르엘로 향하고 있다면 거기서 돌이키십시다. 그렇게 조금 더디더라도, 조금 삐뚤빼뚤 갈지자를 걷더라도 꾸준히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십시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은혜의 합당한 삶입니다. 오늘 하루 그 한 걸음을 떼신다면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분명 세상 풍파에도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 하나를 맡겨 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남왕국 두 왕의 마음속 동기와 그들의 걸음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이들의 마음엔 하나님보다 자기 이익이 앞서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이 속한 환경에 그 마음속 동기를 은밀히 숨긴 채 살다 그만 파멸을 향해 걸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걸음을 돌아보는 은혜 누리게 하옵소서. 그리고 주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조금 더디더라도 조금씩 꾸준히 사는 지혜와 용기를 주옵소서. 그렇게 하나님이 주실 작은 등불 맡은 자로 자라가는 오늘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여호람이 아합의 집을 따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여호람의 모습에 비춰 오늘 나의 믿음은 어떠한지 돌아보십시다.
2. 남왕국 유다에 아합의 집을 따른 왕이 등장했지만 하나님은 다윗과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들을 참아주셨습니다. 오늘 내가 신실하신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무엇인가요?
3. 하나님께 은혜 받은 자의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오늘 내가 감당할 책임은 무엇인가요?
4. 하나님을 떠난 이들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지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모습을 통해 살피고, 오늘 나의 걸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돌아보십시다.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