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부르시면 따라 가리이다
이홍규•김현숙 가정
1. 내 고향 경남고성읍 율대리 2. 출생 및 가족 배경 3. 경남 제1회 수련회 참여 및 입교 4. 공기총 판매 5. 봉사 활동 6. 기동대 활동 및 교회 개척 7. 구국세계대회 참여 8. 군대 생활 9. 축복의 은사와 동원 10. 일본여성 지도자교육 11.7년간 특별정성 12. 천마산 산상기도회 13. 원전참배 14. 사업실패와 가정의 수난 15. 80일 수련 16. 아내 김현숙의 통일교회 입교 가정교회 활동 보고서 17.가족 4가정 천보가정 입적완료
주요 내용 : 원고 작성자 이홍규, 고성의 역사와 지리 특성, 불심이 깊은 부모님, 남편 뜻에 따랐던 어머니, 어린 시절 불교 환경에서 성장, 중학교 시절 감리교회 추억, 참아버님 처음 뵙기, 산탄총 판매, 교사로부터 박해를 받음, 기동대 활동, 연탄가스 중독, 고성 상리교회개척, 학교에서 협박을 당함, 군대 핍박 및 모범, 영호남 부부, 부모님이 축복받게 인도, 7년간 철야기도 및 초능력 체험, 원전참배 및 사고 위험, 사업 실패 고통, 화재 사건, 아내의 입교 상황, 천보가정 활동 계획
이상세계를 이땅에 실현하는 그날까지
1 ,내고향 경남 고성읍 율대리
1)
경남고성은 서기42년부터 461년간을 소가야 (小伽耶)도읍지였던 곳이기도하다. 신라(新羅)제35대 경덕왕 16년에 주(州), 군 (郡) 현,(懸) 을 한식(漢式)으로계정할때 고자군(古自 郡), 을 고성군(固成郡) 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3월1일자로 면(面),의 명칭및 구역을 정할때 동읍면(東邑面), 과 서읍면(西邑面)을 병합하면서 가동면의 유동 일부를 병합하여 철성면(鐵城面)라 개칭하고 교사,
덕선, 기월, 서외, 대평, 무량, 우산,송학,죽계, 동외, 성내, 수남,신월,월평, 율대의 15개 리로 개편 하였다. 서기 1918년에 이르러 철성면은 고성면이라 개정하고 서기 1918년에 이르러 철성면은 고성면이라 개칭되고 고성면은 서기 1938년10월1일 자로 고성읍(固城邑)으로 승격되었다.
2)
고성군 하일면에는 공룡이 있었는데 2억3천만년 전 중생대초기에 지구상에 처음으로 나타내었다가 그로부터 1억 6500만년간 지구를 지배하였고 백악기가 끝남과 동시에 멸종되었
다.그래도 고성에 5천여점의 다양한 공룡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수억년 전에는 공룡의
천국 이었을 산 아래로 펼쳐진 저 넓은 벌판과 해안이 묵묵히 세월의 자취를 안고 자리하고있다.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하면,마치 공룡의 울음소리를 들려오는 듯하다.오래 전 의 세월에 공룡들이 두개의 산을 뛰어다니며 활동했을 것이다.
3)
거류산(巨流山 571.7m)은 한국의 마터호른(알프스 산맥,4,478m)로 불리기도 한다.옛날 할머니가 저녁밥을 짓다가 밖에 나가보니 산이 하나 걸어가고 있어서 ''게 섯거라. '' 하고 소
리치자 지금의 자리에 멈췄다는 산이라 한다.그리고 가뭄이들어 비가 안 올때는 거류산 무지게 터 주변에 묘를 파면 비가 내렸던곳 이기도 했다.
4)
고성은 무기정 기생 월이 가 있었다.
일본이 15세기 후반조선을 침략할 뜻을 품고 밀사를 보냈는데 당황포의 해변에서 당동,통영만을 둘러 고성읍 수남동 해변을 삼천포를 가려고 하니 해는 이미서산으로 기울고 땅거미
가 내리고 참자리를 찿아 무학동 무기정곱사(술집 주인이 곱사였다) 집에서 하룻밤 투숙하게 되었는데 기생월이가 일본 밀사라는것으로 눈치채고 술을 먹이며 끌어안고 짖궂은 아양을 다
떨며 술을 건한후 술에 취해 잠들어을때 밀사의 품속을 뒤져 무명비단보에 다섯겹으로 싼 보자기를 발견하고 열어 보았다. 놀랐게도 그 속에는 보물이 아니라 먼장래 우리나라를 침략할
하로의 공격 요지를 발견 육로로 도망갈 지도가그려져 있었다.그것을본 월이는 붓으로 꽉 막힌 부분을 바다 로 연결되는 것처럼 지도를그려넣어 다시 품속으로 넣어 임진왜란 때 도망갈 길을 찿지 못하고 전면할 일화가 있기도 하다.
고성 읍에서 2km쯤 통영 방향으로 말티고개를 넘어서면 우리동리 율대리가 보인다.
나는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효령대군17세 16대손이갑룡(본명 이경의) 19대손 처사가 돌탑을 쌓아 탑사절을 세우심, 소 백산맥 노령산맥의 펼쳐있는 해발300m위치에 세운 이 탑사 절은 진안군 북쪽으로 금강을 경계로 충남 금산군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은 섬진강 북쪽은 금강을 경계로 충남 금산군과 연결 되어 있다. 진안 지방 여덥가지 뛰어난 경지를묶어 월랑팔경 이라 부르고 있다. 이갑룡 처사는 1860년대에 출생하시어 1954년 임종하 시기까지 그가운데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전봉준이 처형되는등 어둡고 혼탁한 때에 세상에 태어나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시어 백성을 구하고자 구국이념으로 기도와 정성으로 수행 하시다 수도의 길을 걸으신 도인 이셨다. 16세때 부친을 여의고 3년 시묘살이를 하다 산에 염엄한 가운데 감명받아 백두에서 하나까지 전국명산을 찿아 다니며 3.7 기도회도 갖기도 하셨답니다.처사는 나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러 온 사람이다 라고 하시면서 굳게 믿고 기도정성에 정진하시다.하루는 강원도 원주 치악산에 입산하여 기도드릴때 혼몽중에 두산새가 꿈에보여 그이후 마이산을 찿아가보니 그 기이한 산세가 꿈에 보았던 그곳과 맞아 떨어져 그곳에 자리잡아 수행을 시작 정성을 쌓았더니 그때나이 25세 였다고 했다.
진안에서 임실쪽으로4km가면 독특한 2봉우리가 있는데 두개가 말의 귀처럼 쫑끗하게 마주솟아있기 때문 마이산이라 이름지어 불렀다고 했다. 매일 탑사 이절에서 스님들이 불가의 108 번뇌를 상징하는 108개 정한수 그릇에 매일밤 물을채워 넣는데 신기하게도 그 정한수 그릇이 얼때 몇몇개의 역 고드름 이 피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30년동안 쌓아올린 수백개의 돌탑이 있는데 이돌탑은 신기하게도 강한 비바람이 나 태풍이 불어도 100년이 지나도 쓰러지지 않는다고 했다. 돌은 순수 돌이고 접착졔도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 쓰러지지 않느냐고 했더니 도 에가까운 정성과 혼이 들어있었기에 그렇다고 했었다.
고성교회는 1960년 초에 개척교회가 생긴후 많은 지도자가 거쳐 가셨고 특히 조우억만 (전 유광열 협회 문화부장 장인)께서 고성 복귀에 많은 협조를 해 주셨다. 특히 저가 상리교회를
개척할 당시 일본에서 목수까지 동원 하시어 토지를 매입 성전을 건축해 주시기도 하셨다.
2, 출생및 가족 배경
나는 1954년 고성 율대리 524번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3녀 중 누나 둘을 두고서 장남 으로 태어 났다. 아버님께서는 건축일을 하셨고 어머니께서는 몸이 안 좋으셔서 건
강을 위해 ' 대한고성 천리교를 나가시며 정성을 많이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신앙심이 깊으셔서 무보수로 천리교 신축건축때 2년가까이 다른 인꾼들과 함께 노동 봉사를 하셨다.
큰 대목으로써 주요한 목수 일을 담당하셨다. 그리고 인근에 사찰 건립의 일이 있는 경우에도 2~3년, 혹은 그 이상을 무보수로 일해 주셨다. 집에 오실 때는 나무 한 구러마 정도 얻어 오시면 끝이었다. 더 많은 수고비를 청구하셔도 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냥 절에서 인건비를 대신하여 나무를 주는 대로 묵묵히 받아오셨다. 그만큼 불심이 깊은 아버지이셨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말씀이면 절대로 따르셨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절간에 가서 놀기도 좋아 하였으며, 방학이 되면 사찰 근방에서 도라지를 비롯하여 각종 약초를 캤다. 산 짐승도 쫓아다니고 굉장히 활동력이 많은 소년이었다. 자연인 청소년이었다. 등교 때 태풍이 불고 소나기가 몰아치면, 들판 길을 지나가야 하는 등교 길은 물이 넘쳐 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럴 때면 아버지께서는 학교까지 오셔서 허리춤까지 물이 차서 올라온 길을 나를 비롯하여 어린이들을 몇 명씩 안고 물을 건너게 해 주셨다.
초등학교는 부모님의 보호아래 잘 졸업하게 되었고, 중학교도 시골길을 2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등교했다. 중학시절 친구 권유에 따라 대한예수교감리교회에 출석했다. 부활절 날에는 달걀에 그림도 그려 넣고 햇님 얼굴도 그려 넣으면서 재미있게 즐겼다. 친구들과 함께 희희낙락하면서도 가슴에는 십자가의 의미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흘리신 십자가 피의 상흔이 내게도 스며들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식과 정보를 왕성하게 흡수하는 청소년기에는 특별한 경험 그 자체가 교육효과를 거두게 된다. 중 2학년 때인 1968년도 큰 누나가 시집을 갔다. 고성읍 남산 도서관 바로 밑에 시집을 갔다. 그곳은 넓은 텃밭이 있는 공간인데, 바로 대문 맞은편에 양옥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이 고성통일교회 건물이었다. 누나는 시집가서 1주일에 만에 전도가 되었고(당시 지역장 윤덕명777가정) 나에게도 통일교회 입교를 권유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절에 나가시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나갈 수 없다고 거부했다. 나 때문에 누나는 정성을 많이 들여야 했고, 얼마나 속상하였을까? 철이 들고 난 뒤에야 누나에게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누나가 777가정 축복을 받을당시 축복비가 모자라서 집에 기러던 큰 암소를 팔게 되었는데 내가 소 여물을 주고 소마구칸에 청소를 했는데 소가 팔려 갈 것을 미리 알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벌써 우리식구들의 말을 듣고 알아 차린모양 이었다.어린송아지부터 키운 소 인데 누나 결혼비가 부족해서 팔게 되었는데 가기도 전에 어떻게 알았는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소도 영물이구나 하는 느김 마져 들었다.
경남 제1회 수련회 참여 밑 입교
1969,여름 방학때 누나가 꼭 한번만 수련회에 참석 하라는 부탁을 받고 마산에서 진행되는 경남 제 1회 수련회에 참석 하게 되어었다. 고성에서 마산까지 거리는 44K 인데 심재후 학생
회장을 중심으로 걸어서 5명이 수련회에 참석 하게 되었다.찬바람이 씽씽 불기는 하였으나 아랑코 없이 고성에서 재를 넘고 넘어 마산 월남동에 도착하니 모두 기진맥진 하였다.
그래도 배가 고파서 먼저 배를 채우고 강당에 입실했다. 많은 락생들이 몰려 들었다.첫날 세 번째 강의 시간이었는데 난 권우삼 강사님의 메시아 강림과 그 재림의 목적 강의를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기독교 신앙 하면서 배워왔던 신앙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예수님의 강림에 대한 새로운 내용을 접할 수가 있었다.내가 지금까지 의문점으로 생각해 왔던 내용들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그리고 웅변 대회가 있었고 원리 강의 대회도 있었다,난 참여는 못했지만 젊은 학생들의 살아 있는 눈빛을 보면서 희망이 보였다.겨울 방학때도 수련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땐 문선명 선생님을 처음 으로 접하는 시간까지 만들어져서 넘 기뻤고 행복했다.
수련회를 무사히 끝내고 고성으로 돌아 와서 원리 공부를 해 나가면서 김종옥씨가 누나로부터 전도 되었는데 예화 산탄 공기총을 한정 샀는데 시간 나는되로 산이나 들을 다니면서 새나
비둘기를 잡았는데 난 비둘기는 먹지 않고 참새는 탕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구워 먹기도 했엇다.그러던 중고 1학년때 여름방학때 7일 금식을 했는데 그 맛나는 새 꾸워먹는 냄새를 맡을 때 꿀침이 나오기도 했었다. 성화학생 회장이 된 이후 사업활동도 도참하게 되었고 성미 사업을 해 전투경찰 위문도 가게 되었는데 봉사 활동이 더해지면서 관내 경찰서에서 표창장도 보내 오곤 했었는데 그 당시 학교 윤리선생의 극심한 반대로 나는 늘 마음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전 73년 9월 경남 기동대에 합류했다.가는 곳곳마다 반겨 주는자 없었지만 그 당시 납북한 대치상황이 점점 고조 되면서 무엇보다 국민 사상교육이 필요한 때라 학업도 중단하고 나선 것이다.동리를 지나다 보면 북한 선전물 삐라가 눈에 보일 정도로 많이 널려 있었고 국민들의 마음도 공황 상태 였던 것이었다.그러나 저희 기동대는 영하의 추위도 무릅쓰고 주민 한분 한분을 교육 시키며 개몽 운동에 나섰다.
43명의 대원들을 광야를 달리는 사나이 사나이 오늘은 북한동 내일은 몽고 흐르고 또 흐르는 ~“ 경상도 굳쎈바람 가슴에 안고 여기가 남 아의 싸움 터라고 외치며 또 외면서 경남 전역을 누볐다.그러던 중 지리산 정상에 올라 참 부모님 만세를 부르며 외치고 또 외쳤다.모두가 산 증인이 되자고 김관해 대장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오르고 내리는 길 순탄 하지는 않았다 칤 능굴이 많아 길을 잘못 들어 갔다가 한참동안 헤메다 오는 대원도 있었다.그 광경을 보시고 기동 대장님께서는 이 많은 세상길이 있는데 진리의 길을 찿지 못하면 중심을 잃게 되고 파별 할 수밖에 없다고 하시면 꼭 중심과 하나되어 나가자고 말씀 하시기도 하셨다.
다행 스러운 것은 43명 모두가 한명의 나고자 없이 수료 할수 있었던 것이 다행 이었다.
74년6월 기동대를 수료하고 밀양군 단장면의 개척 교회로 향했다. 가는 곳곳마다 기도정성은 이어졌다. 밀량 단장면 단장리 동리 제일 꼭대기에 단칸방 월세를 얻어 놓고 핏눈물 나는 정성과 기도로 이어가며 주민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쌀이 없을때는 굼기도 했었고 그것도 힘들때는 버스를 3시간 이상타고 고성 집에와 부모 몰래 쌀을 담아 가기도 했었다. 가가호호를 방문하기 시작한지 1년 만에 믿음의 자녀인 딸(조영순)을 찾았다. 지난후에 어떻게 뜻길을 따라 왔나 이야기 했더니 아빠가 (그러니까 나) 그때 하신 말씀이 기차를 타려면 줄을 서지 않으면 탈수 없다고 아빠가 몇 번이고 강조 했다고 했다.
75년도에 입회원서를 쓰고 마음의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 이후 믿음의 달 (영순) 딸집에 매일같이 방문했었고 직장을 옮겨 언양면 삼성전관에 근무할땐 일주일 한번씩 찿아가서 말씀을 전했고 불의의 사고로 영순씨가 얼굴에 화상을 당했을땐 나도 기절하여 온 종일 밥을 먹지 못하고 방 안에서 뒹굴었다. 몸은 차쯤 차쯤 회복세를 보이고 할때 때 나는 김해 교회로 이동했다. 그 이후 영순씨는 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시간을 만들어 1년에 부산 교구에 가서 7일수련을 3차례 받았으며 82년 6천쌍 일한가정 축복을 받고 일본 구마모토 소속으로 헌신 생활을 했으며 약15년간 지구 한국부인회 회장직을 역임 했다고 전했다. 지금은 평화연합 UPF 차장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으며 한일 가정에 무슨일이 생기면 달려 간다고 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할수 있었던 것은 믿음 아빠의 기도와 정성에 감동되어 여기까지 남아지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문선명 선생 강연선집 20만부 지방 각 교구 배부
80년 4월 강연 선집 20만부를 직접 배부 하게 되었다.그당시 성화사에 근무 하던때라 성남 대한교과서에서 강연선집 20만권을 인쇄 하게 되었는데 1주일 정도 대한교과서에가서 박스로 포장을 해서 각 교회로 발송 하게 되었고 나머지는 2.5톤 화물 터럭에 싣어 부산 광주등 각 교구를 돌면서 배송을 완료했다.비록 피곤하고 힘은 들었지만 아버님 강연집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나는 자부한다.내려 가다가 운전기사가 약간 졸기라도 하면 휴게소를 들려 커피를 먼저 뽑아와서 전해주고 안전 운전을 해 달라 하며 부탁을 몇 번이고 강조 하기도 했었다.이틀동안 모두 배부하고 서울에 올라오니 내 몸 자체가 넘 피곤해서 10시간 이상 잠자며 휴식을 취하기도 했었다.
면사포 쌤플을 구하기 위해 일본 동경 매지로 출장
그당시 화협에 근무 할 때 였다.화협에 특수 영업부에 근무 하면서 용산 세계일보사내 국제수련원매장에 관리자로 근무했었다.그때 6천가정 축복을 준비 하면서 신부 면사포를 준비하는 과정에 그 쌤플을 일본 메지로에 있는 마자프랜드를 찿아가 쌤플을 갖어 왔어야만 했었다. 그때 나는 출장으로 일본 동경 소규모도시 메지로에가서 샘플을 받고 숙소를 정해 찿았는데 그곳은 적은 도시라 호텔은 보이지 않고 해서 여관으로 찿아 들어 갔다. 객실은 다담이 방 그리고 불은 호롱 불이었다.요금은 1박하는데 6,000엔 오랬만에 다담이 방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잠도 오지 않아 세벽 일찍 4시쯤 일어나 시내로 나가 봤다.청소하는 분도 만 나게 되었고 일찍 출근 하는 분들도 접하게 되었는데 거리는 생각 이상으로 깨끗했다.거리에는 낙엽정도 휘날리지 휴지나 다른 담배 꽁초등은 찿아보기 힘들 정도로 깨끗했다. 이것이 일본의 생활 습관인 것을 보고 나 스스로 감동 받았다.
낮에는 그동안 사진만 보고 기도해 주던 식구들을 시부야 본부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 되어 있었다.10시쯤 되니 30여분 찿아 왔었다.그 동안 사진만 보고 기도 해 줬는데도 사업이 잘 안되는분 남 녀 간의 고민이 있었던분 성적으로 참치 못해 고통 받던 식구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이 좋아 졌다고 했었다.교회에 1시간 정도 기도 하고 간다고 했었는데 2시간이 넘도록 함께 기도 정성을 끝내고 1차 2차 때는 일본 띰 기도실에서 잤는데 이번에 나 업무와 연결 되면서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만날수 있었다. 무엇보다 고생 하는 일본 식구들을 보면서 모든 식구님들이 질병없이 마음의 상처없이 잘 되어지기 만을 기도 하고 돌아 왔다.
1979년부터부터 본부 교회에서 김재산 권사님과 함께 정성을 드려오다 82년 10월 14일 6천쌍 축복을 받았다.그리고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김재산 권사님과 응답을 받아 산기도를 향했다. 아버님 댄버리 수감 일정이 발표되고 댄버리로 향하시던 그날 정성을 모아 나갈 때 신용일 본부교회 목사님을 모시고 권사님 몇분들과 함께 우이동 산기도를 향했다.산 기도를 가서도 그날 밤은 꼬박 새우고 아침에야 내려오게 되었다.
육친의 부모도 열심히 효도 하면서 6500상 기성축복을 받게 했다.처음에는 동의 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부부가 열심히 사는 것을 보시고 축복에 동참해 주셨다.그 이후부터 전도에도 중요하지만 우리 가족들도 모두 축복을 바치겠다는 마음으로 한분씩 축복에 동참 시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