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략(魏略)』에 따르면,
동우(董遇)는 자가 계직(季直)이다. 성품이 순박하고 말수가 없었으며 배우기를 좋아했다.
흥평(興平) 연간(194~195년), 관중에서 난이 일어났을 때, 형 계중(季中)과 함께 장군(將軍) 단외(段煨)에게 몸을 맡겼다. 돌벼를 캐어 먹기도 하고 등짐을 지고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면서도 늘 경서를 끼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되풀이해서 읽었다. 형이 그를 비웃었으나 끝내 [책 읽는 습관을] 고치지 않았다.
건안(建安) 초, 황제의 기강이 잠시 베풀어졌을 때, 군에서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며, 조금씩 승진하여 황문시랑(黃門侍郞)이 되었다. 이 무렵 한나라 황제는 정치를 조조에게 맡겼다. 동우는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경전을 강의하니 천자의 사랑과 믿음을 받았다.
건안 22년(217년)에 이르렀을 때, 허도(許都)의 모든 관리들이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일을 행했는데[矯制], 동우는 함께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체포되어 업성(鄴城)에 끌려갔다가 시시한 자리[冗散]로 벼슬을 옮겼다. 조조를 따라 서쪽으로 정벌을 떠났을 때, 길이 맹진현(孟津縣)을 통해 홍농왕(弘農王)의 무덤을 지나게 되었다. 조조가 무덤에 가서 아뢰어야 하는지에 의심을 품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동우가 품계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이에 조조가 그대로 지나쳤다.
황초(黃初) 연간(220~226년), 나가서 군수(郡守)가 되었다. 명제 조예가 즉위했을 때, 조정으로 들어와서 시중(侍中)을 거쳐 대사농(大司農)이 되었다. 몇 년 후에 병으로 죽었다.
동우는 『노자』에 통달하여 그 주를 지었다. 『춘추좌씨전』 역시 통달하여 다시 묶고는 붉은 빛깔의 먹[朱墨]으로 주해를 달았다. 사람들 중에서 좇아서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을 때 동우는 선뜻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먼저 백 번을 읽어야 한다. 책을 백 번 읽으면 뜻은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讀書百徧而義自見)”
그러자 좇아서 배우려고 하는 자가 말했다.
“힘들고 괴로워 책 읽을 겨를이 없습니다.”
동우가 말했다.
“세 가지 여가가 있으면 충분하다.”
어떤 사람이 세 가지 여가의 뜻을 물어보자, 동우가 말했다.
“겨울은 한 해의 여가이고, 밤은 하루의 여가이며, 오랫동안 내리는 비는 한 때의 여가이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학생들 중에서 동우를 좇아서 배우는 이가 극히 적었으므로 그가 붉은 빛깔의 먹으로 주해한 것은 전하지 않는다.
『세어(世語)』에 따르면, 동우의 아들 동수(董綏)는 벼슬이 비서감(秘書監)에 이르렀는데, 역시 학문에 재주가 있었다.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의 공신 중에 동애(董艾)가 있었는데, 곧 동수의 아들이다.
『위략』에 동우를 비롯하여 가홍(賈洪), 한단순(邯鄲淳), 설하(薛夏), 외희(隗禧), 소림(蘇林), 악상(樂詳) 등 일곱 사람을 유종(儒宗)으로 삼고 그 「서(序)」에 말했다.
“초평(初平) 원년(190년)에서 건안(建安)의 끝에 이를 때까지 천하가 여러 갈래로 쪼개져 사람 마음이 구차해지니 법과 풍속이 이미 쇠했는데 유학의 도는 특히 심했다. 황초(黃初) 원년(220년) 이후에 이르러 새로운 군주가 다시 나와서 태학(太學)의 더러움을 씻어 내고 옛 석비의 무너진 부분들을 보수하고 박사(博士)의 원록(員錄)을 구비할 때 한나라 때처럼 갑과 을로써 고과했다. 주(州)와 군(郡)에 널리 고하여 배우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태학으로 보내게 했다. 그러고 나서 태학을 처음 여니 제자(弟子)가 수백 명이었다.
태화(太和, 227~233년)에서 청룡(靑龍, 233~237년)에 이르는 기간에 안팎으로 많은 일이 벌어지자 사람들이 힘든 것을 피하고 쉬운 것만 골라 하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비록 성품이 학문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일지라도 많은 이들이 태학에 들어가려고 했다.
태학에 학생들이 천여 명이 넘었으나 박사들이 모두 학문이 깊지 못했으므로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없었다. 제자들 역시 본래 힘든 일을 피하려고 들어왔으므로 끝내 학문을 익힐 수가 없었으므로 겨울이 오고 봄이 가면서 해마다 이렇게 지낼 뿐이었다. 또 학문이 깊은 자가 있어서 대각(臺閣, 상서대의 별칭)에서 격이 가장 높다고 천거했을지라도 더하여 그 큰 뜻을 통괄하려고 생각지 않고 다만 검게 점을 찍어 주해한 곳 사이에 놓인 글자에만 집착할 뿐이니 백 명이 함께 시험을 보아도 합격자는 열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에 배움에 뜻이 있는 선비들은 끝내 다시 사라지고 말단에 치우친 허황한 자들만 다투어 각축하게 되었다.
정시(正始) 연간(240~249년)에 조서를 내려 환구(圜丘)에서 의를 열고, 널리 배움 깊은 선비들을 불러들였다. 이때 낭관(郞官) 및 사도(司徒)의 아전이 이만여 명이었는데, 천하에 널리 퍼져 있었지만 서울 낙양에 있는 자만 해도 만 명에 가까웠다. 그런데 조서에 응하여 의에 참석한 자가 몇 사람인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또 이 당시 조정에 공경(公卿) 이하 관리가 사백여 명이나 있었는데, 붓을 들어 글을 쓸 수 있는 자가 열 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많은 이들이 모두 서로 쫓아다니면서 배불리 먹은 후 퇴청하곤 했다. 슬프다! 학업이 침체한 것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이처럼 사사로운 마음으로 늘 구차하게 사는 자가 귀하여 수없이 공으로 있으니, 각처에 황란(荒亂, 기근)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뜻을 지켜 두루 인정을 두텁게 베풀 수 있단 말인가.”
가홍(賈洪)의 자는 숙업(叔業)으로 경조(京兆) 신풍(新豐) 사람이다. 어려서 공부를 좋아하고 재능이 있었다. 특히 춘추좌씨전에 대해서 해박했다. 건안(196-220)초기에 공무를 시작하여, 계연(計掾)에 추천되었으며, 주(州)로부터 부름을 받아 응했다. 이때 주 안에는 참군사(參軍事)등의 공무원들이 약 백명정도 있었지만, 재능과 학식 면에서 최고 수준인 것은 가홍과 풍익(馮翊) 사람인 엄포(嚴苞) 뿐이었다. 가홍은 나중에 3개 현령을 했고, 어느 임지에서나 학교를 열어 학생들을 받아 들였다.
나중에 마초(馬超)가 반란을 일으켜 가홍을 체포한 다음에, 그를 화음(華陰)으로 데려가서는 포고문을 만들게 했는데, 가홍은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례(司隷) 종요(鍾繇)는 이때 동방에 있었는데, 그 포고문을 보자, "이것은 가홍이 만든 것이다"라고 했다. 나중에 마초는 패배하여 달아난 이후, 조조가 그를 군모연(軍謀掾)으로 삼았는데, 이전에 마초를 위해서글을 썼다는 것 때문에 즉시 임명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야 간신히 음천장(陰泉長)이 되었다.
연강(延康)(220)연간에 백마국(白馬国)의 상(相)으로 전임되었고. 그는 언변이 뛰어났으며 말장난을 잘했다. 백마왕(白馬王)인 조표(曹彪)도 또한 문학을 좋아했으므로,항상 스승으로써 가홍을 모셨고, 삼경(三卿)을 뛰어넘은 대우를 받았다. 수년후에 병들어서 50 나이에 죽었고,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관직이 2천석이 넘지않았던 것을 안타까와 했다.
설하(薛夏)는 자가 선성(宣聲)으로 천수(天水) 사람으로, 박학하고 재능이 뛰어났다. 천수군에서는 옛부터 강(姜), 염(閻), 임(任) 조(趙)씨 이렇게 4개의 성씨가 군의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는데, 하씨는 궁핍한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아서 [降屈], 4개의 성씨들은 모두 그를 체포해 손좀 봐줄려고 했는데, 도망가서 경사(수도)에 이르렀다. 조조가 예전부터 설하의 명성을 들어 왔으므로 그를 크게 대우했다. 후에 4개의 성씨 사람들이 또다시 사람을 파견해서 설하를 유인해 잡아올려고 했고, 영천(潁川)에 문서를 보내어 설하는 결국에 체포되어 옥에 갖히게 되었다.
태조가 이때 기주(兾州)에 있었는데, 설하가 구속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설하는 조가 없다. 다만 한양(漢陽) 불량 아이들이 그를 잡아 죽이려는 것일 뿐이다"하고 말하고는 이내 영천 관리들에게 말해서 설하를 석방시키라고 하고는, 그를 군모연(軍謀掾)으로 삼았다.
조비도 또한 그의 재능에 반해, 황초년간(220-227)때에 비서승(祕書丞)으로 삼았고, 황제는 항상 설하와 함께 서전(書傳)을 논의하여, 해가 저무는 지도 모를 때가 많았다. 그를 부를때도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설군(薛君) 이라고 불렀다. 설하는 대단히 궁핍하여 황제는 그의 옷이 소매가 헤어져 있는 것을 보고, 몸에 대고 있던 윗도리를 벗어 그에게 주었다. 그후 정동장군(征東將軍) 조휴(曹休)가 황제를 찾아왔는데, 미침 황제가 설하와 함께 토론하고 있었더 때라서,조휴가 왔다는 보고를 받자, 그를 끌여들어 같이 않게 했다. 조비는 설하에게 눈을 돌리면서 조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분이 비서승인 천수 사람인 설선성(薛宣聲)입니다. 같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 괜찮을 것입니다" 설하를 받는 대우가 이와 같았다. 설하를 좀더 등용할 생각이었지만, 문제가 죽고 말았다.
태화 연간(226-233)에 공무를 위해 난대(蘭臺,어사대)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난대라는 것은 비서(祕書)가 서(署)인데 반하여, 난대는 그 자체로 대(臺)이므로, 설하의 난대 방문은 받아들일 수 없다, 만약에 고집부린다면 체포할 것이라고 하였다. 설하는 이에 대하여 "난대를 외대( 外臺)라고 한다면 비서(祕書)는 내각(內閣)으로 대(臺)와 각(閣)은 원래 같은 것이다. 왜 서로 왕래를 할 수 없다는 말인가?"하였고, 난대는 할말이 없었다. 이때부터 이것아 상례화되었다. 설하는 수면후 병들어 죽었고, 시체를 천수에 돌려보재 말도록 유언하였다.
외희(隗禧)의 자는 자아(子牙)로 경조(京兆)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