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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산길은 끝이 없다. 캄캄한 어둠속에 머리에 쓴 헤드랜턴을 밝히며 신경수 형 뒤에 바짝 붙어 걷는 길이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벌써 밤 9시가 넘었으니 오늘 13시간 이상 산행 중인 셈이다. 바로 뒤에선 호경필 형이 역시 힘들게 따라 온다. 저 앞에서 오늘 처음 만난 신홍식씨(신 교장)가 목적지에 차를 두고 우리를 찾아서 거꾸로 올라왔다가 우리를 만나더니 앞서서 안내하느라 앞에 섰는데 우리 걸음이 느리니 자주 서서 우리 쪽으로 불을 비추고 있다. 오른쪽으론 시커먼 바다를 배경으로 마을의 불빛이 저 아래서 깜박이고 있다. 득량만을 둘러싸고 있는 이 산줄기는 오른 쪽에서 2-300미터 높이의 절벽이 되어 바다를 향해 솟아있는 듯이 보인다. 낮이라면 경치가 좋겠지만 캄캄한 어둠 속에 경치가 숨어 버려 아쉽다. 사실은 아까부터 너무 오래 산행을 해서인지 머리까지 아파오니 경치를 감상할 여유도 없겠다.
오늘 새벽 1시에 반포 고속터미널을 떠나 4시에 광주터미널에 도착, 직행버스로 3인이 광주송정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전남 보성역 다음 역인 득량역에 도착하여 고흥 거주 신홍식씨의 승용차로 고리재로 가서, 7시 40분 경 정글을 헤치고 호남정맥에서 오봉단맥이 분기되는 지점까지 갔다가 다시 고리재로 돌아온 후, 산줄기와 나란히 뻗은 넓은 임도를 걸어서 산 밑에 도착하여 다시 정글을 뚫고 봉우리에 올랐다. 다시 내려가서 길없는 산길을 한참을 가다가 오봉산에 가까워져 길다운 길을 만나 겨우 안심을 하고 오봉산에 오르니 날이 어둑해져 헤드랜턴을 꺼내 쓰고 길을 갔다.(신홍식씨는 차를 회수하러 먼저 떠났다.) 어둠 속에 길을 찾아서 가다가 길을 잘 못 들어 길이 없어지고 말았다. 길은 없지만 무리해서 내려가면 저수지 옆 마을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500m 이상 내려갔는데 절벽이 나왔다. 할 수 없이 삼거리까지 되돌아 갈 수밖에 없어 힘들게 아까의 기억을 더듬어 언덕길을 올라갔다. 겨우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목적지인 득량남초등학교로 가는 중인데 먼저 내려갔던 신홍식씨가 마중 나왔다. 반갑게 해후하고 그 분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남도 산행이라 기온이 높아 춥지 않을 줄 알았는데 바닷바람인지 바람이 소리를 내며 옷깃을 파고드니 예상보다 더 춥다.
작은 고개를 두 개 넘고 길을 내려가 세 번째 쯤 고개를 넘어서 지겹게 걸으니 삼거리에서 앞서 가던 신홍식씨가 기다린다. 여기서 직행하여 득량남초로 가려면 봉우리 두 개를 더 넘어야 하니 좌로 틀어서 해평리로 가자고 하며 먼저 내려간다. 신 형이 걸음이 느려서 셋은 천천히 급한 경사길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니 경사가 완만해지며 길이 넓어지고 임도의 형태를 취하는데 풀에 덮여 있다. 길이 넓고 완만해지니 아까보다 걷기가 훨씬 편하다. 길옆으로 대나무가 빽빽한 곳을 만나고 구들장 채취 기념비도 지나서 마을의 불빛이 비치더니 신홍식씨의 차가 나타났다. 먼저 가서 차로 임도를 거슬러 올라온 것이었다. 반가웠고 고마운 일이다. 시간은 이미 밤 11시이다. 2024년 1월 10일(수) 하루의 긴 산행이 겨우 끝났다.
신경수 형이 전국의 산줄기 전부를 직접 밟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 줄 짐작으로만 알고 있던 차에 신 형이 전남 보성의 단맥 두 개를 이틀에 걸쳐 종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끼워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미 호경필 형이 동행을 신청하였기에 3인이 남도 산행에 오르게 되었다. 신 형의 전국 산줄기 밟기는 이미 시작한지 수십 년 되며 10여년 전에 대간-정맥-기맥-지맥까지는 답사를 모두 끝냈고 이제 1,000여개의 단맥을 끝내는 중으로 10여개만 남은 상태라고 한다. 그의 노고에 머리가 숙여진다. 우리 땅과 산줄기의 정확한 모습을 나타낸 큰 공적을 남긴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나 산경표의 여암 신경준 선생도 현지를 모두 답사한 것은 아닐진대 신 형의 노고가 가상하다고 하겠다. 그 현장에 내가 같이 있다고 생각하니 오늘의 산행이 더 큰 의미를 가져다주는 듯하다.
1월 10일(수), 고속터미널 호남선 대합실에서 모인 3인은 새벽 1시 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하였다. 새벽 4시가 조금 지나 광주터미널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려 하니 두 군데 밥집이 다 닫고 영업을 안하고 있다. 할 수없이 24시 편의점에 들러 라면과 햄버거를 사서 요기를 한 다음 5시 10분 첫 직행버스로 송정리역(광주송정)으로 향하였다. 광주송정역에서 5:52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다음 목적지인 보성군 득량역에 내렸다.(예정 시각 07:20) 역에 내렸는데 우리 산행을 미리 알고 역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던 고흥 거주 신홍식씨가 반겨준다.(신경수씨와 같은 고령신씨로 일가인데 홍식씨가 항렬이 둘 높아서 할아버지 벌이라고 한다.)
득량이란 이름은 고흥반도로 파고드는 만의 이름인데 조금은 특이하게들렸다. 得粮驛이 소재해 있는 득량면의 한자 중, 粮은 나로서는 잘 못 보았던 글짜였는데 옥편을 보니 양식이라 할 때의 糧과 같은 뜻을 지녔다고 한다.
고맙게도 신씨(신 교장)가 승용차를 가져와서 우리를 산들머리인 고리재로 안내했다. 7시 40분 경 가시덤불이 점철된 한국형 밀림을 헤치며 산행이 시작되었다. 신씨가 낫을 들고 앞장서고 나는 주문해서 가져온 전지가위를 들고 뒤를 따랐다. 앞장 선 사람과 거리를 두면 바로 나뭇가지와 넝쿨이 앞을 가로막으니 양손으로 헤쳐 나가다가 안 될 때는 전지가위를 써서 나뭇가지나 넝쿨의 줄기를 자르며 진행하였다. 그것이 생가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잘라야 될 줄기가 많을 뿐 아니라 언뜻 보아서는 손으로 헤치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위를들이댈지 아닐지 판단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줄기가 싹둑 시원하게 잘라지는 경우는 많지 않고 자르는 행위 다음에 앞으로 가위를 당겨야 잘라지는 게 현장이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안경이 벗어져 한참을 찾거나 모자가 나도 모르게 벗겨져서 알아채고는 다시 뒤로 가서 찾아와야 하는 등 갈 길을 더디게 하는 중에 내 키가 좀 더 작고 몸피가 가늘면 이 정글을 헤쳐 나가는데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여하튼 4인은 서로 떨어져서 각자 도생하며 전진하였다. 고흥 류씨 산소가 나오고 능선을 만나서 좌로 방향이 틀어지는데 희미한 길의 흔적이 나와 산행이 조금은 쉬워졌다. 일행은 나무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홀로 올라가니 호남정맥길이 나타났는데 신씨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 이 지점이 아마도 호남정맥에서 오봉단맥이 갈라지는 분기점이 될 것 같다. 신씨는 주변을 돌아본다고 자리를 뜨고 조금 기다리니 호 형과 신 형이 차례로 도착하여 호남정맥길을 따라서 조금 남쪽에 있는 송신탑으로 올라갔다.(09:11) 호남정맥 길은 뚜렷이 잘 나있어서 산길로 보면 국도나 고속도로 급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길도 없는 관목 숲을 헤치다가 편한 길을 걸으니 길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송신탑에서 호남정맥으로 1.4km 정도 올라가면 해발 475.9m의 봉화산이 있어 근처에서 볼만한 산이다. 송신탑 아래는 주변보다 높은데 지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긴 의자도 몇 개 설치하여 산객들이 쉴 수 있도록 꾸며 놓았다. 새참도 할 겸 봉화산 쪽으로 정찰나간 신씨를 불러들였다. 각자 가지고 온 안주를 풀고 술을 꺼내서 마시는데 나만 술이 없고 세 분모두 술을 가지고 왔다. 신 형의 가양주, 호 형의 위스키, 신 교장의 소주, 알고 보니 다들 술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술을 권커니 자커니 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신씨는 전남교육청관내에서 초교 교장까지 하다가 2년전 은퇴하여 활발하게 산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지역이 외진 곳이라서 설악산 등을 등산할 때 교통과 숫박이 번거롭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 사람은 의자에 앉아 시름 걱정을 다 내려놓고 할 일없는 사람들처럼 즐겁게 30분 이상을 떠들어대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제 왔던 길로 고리재까지 약 2km를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보다는 쉽지만 길이 불분명하여 애를 먹었고 각자 길을 개척하며 내려가다 보니 함께 같이 내려가지 못하고 흩어지게 되었다가 다시 합치곤 하였다. 고리재에 도착하니 11시 17분다. 호남정맥 분기점까지 다녀오는데 왕복 거리 3.93km에 3시간 37분 걸린 셈이다. 원래 추정대로 전체를 15km로 보면 앞으로 약 11km 남은 셈이다.(사후 측정해 보니 결국 예상보다 3.6km 더 걸었다.)
고리재에서는 845번 지방도를 건너서 남동쪽 산줄기를 따라가야 하는데 산줄기 아래로 평행해서 차도 다닐만한 콘크리트 임도가 나있어 그 길을 따라서 올라갔다. 길은 오래되어 풀로 덮여있고 한참을 가니 넓은 경사면에 과수원이 있는 옆으로 계속도;었다. 신형에 의하면 임도를 따르지 않고 능선을 따라서 봉우리를 넘으면 좋겠지만 임도를 걸으면서도 임도와 평행한 우측의 산줄기를 충분히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괜찮고, 본인이 지도를 보니 오늘 우리가 여기서 세 개의 봉우리를 넘는 작업이 절약되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좋은 소식인가? 조금 전 밀림을 헤치며 고투를 벌인 경험상 저 산줄기를 제대로 탔다면 길도 없어 험하려니와 시간은 또 얼마나 잡아먹겠는가? 신 형에게 감사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러나 결국 올 것은 오는 법. 이제 임도를 버리고 지도상 갈봉(300m, 카카오맵)으로 표기된 뾰족하게 셍긴 봉우리로 올라가야 한다. 전지가위를 들고 나뭇가지와 가시나무 줄기를 자르며 전진하니 속도가 붙지 않는다. 낫을 든 신교장께서 앞장선다. 은퇴자이지만 나보다 10년 이상 아래로 젊은 힘을 보여주며 가볍게 걸으니 부러울 뿐이다. 겨우 겨우 힘들게 올라가니 봉우리 위에 누군가 낮은 돌탑을 쌓아 놓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봉우리 아래 쪽으로 급한 경사를 한참 내려가고 있어 100여m는 내려갔었는데 뒤에서 돌아오라고 호 형이 큰소리로 부른다. 신 교장과 내가 앞장섰었는데 잘 못 갔으니 뒤로 돌아서야 했다.(길이 없는 곳에서의 진행은 뒤에 오는 신 형이 오룩스 지도를 보며 방향을 잡았다. 신 형은 지도를 보며 길을 찾고 자주 펜을 꺼내 종이에 운행상세를 기록하는지라 뒤로 쳐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신 교장은 어림짐작으로 앞장 서서 안내하다보니 길이 없는 곳에서는 잘 못 진행하는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언덕길을 다시 올라갔다가 정상 근처에서 90도 좌측으로 꺾어서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나는 내리막길에서 우물쭈물하다가 일행을 놓치고 제일 뒤에 처졌는데 머리 위 모자가 없어졌다. 부랴부랴 뒤로 돌아 GPS 궤적을 따라 뒤로 조금 가니 모자가 떨어져 있다. 다른 곳에선 안경이 나뭇가지에 걸려 날아가 한참을 찾기도 했다. 일행이 숲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아서 “야호”하고 외쳐서 일행을 찾았다. 외치는 소리를 들으면 앞서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서서 기다려 주었다. 길이 없는 길은 한참을 수직으로 8-90m 내려가더니 안부에 도착하였는데 앞으로 다시 위로 솟구쳐 수직으로 120m 가량 올라가야 하는 지점이 다음 봉우리이다.(13:20)
12시가 넘은지 오래인데 신 형은 아까 갈봉에 도착해서도(12:50) 식사할 생각을 안 하고 좀 더 가서 저 앞 봉우리 위에서 하자고 하였다. 호남정맥 위 송신탑 아래서 새참을 푸짐하게 들어서인지 크게 시장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앞 봉우리에 올라가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식사를 하자고 하며, 그 봉우리를 넘어서 조금만 더 가면 정상적인 길이 나올 거라고 신형이 예측을 한다. 여기는 길이 아니고 숲을 뚫고 헤치며 만들어 나가야 하는 길이다. 바위를 몇 번 우회하기도 하면서 겨우 봉우리를 넘어서서 식사자리를 찾았다. 라면, 빵, 밥, 안주도 푸짐하다 다시 남은 술을 다 비운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3시가 가까워졌다. 한 40분은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을 넉넉히 쓴 셈인데 신 형 말씀은 밤에도 걸으니 시간은 넉넉하다고 주장한다.(어둡기 전에 산행을 마치는 나의 산행 방식과 너무 달라서 해가 떨어져도 여유작작한 신 형을 보면서 말은 못 하지만 내 마음은 계속 불안해졌다.)
식사 후 4-50m를 작은 언덕들을 넘으며 내려가는데(15:20 경) 어느 새 좁은 오솔길이 형체를 갖추고 나타났다. 눈물겹도록 반가웠다. 앞으로 펼쳐질 오봉산도 이 지방의 명산이라서 여기서부터는 길이 나 있는 것이었다. 눈앞에 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는데 조타봉으로 정상은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수직으로 120m는 올라가야 한다. 돌로 이루어진 전망처에 도착했는데 저 앞에서 신교장이 무어라고 소릴 지른다. 거리가있어 잘 못 알아듣는데 우측 뒤쪽의 백바위를 손짓하며 무어라고 이야기한다. “먼저 내려가서 차를 수습할 터이니 천천히 오고 나중에 만나자”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백바위 쪽 숲으로 사라졌다. 내 조금 뒤에서 호 형이 따라오고 있어 조금 기다려서 같이 가려는데, 신 형은 뒤에 처져서 아직 보이지 않는다. 호 형 말씀이 신 형이 늦지만 꾸준히 따라오고 있다고 하여 둘이는 먼저 조타봉으로 힘겹게 올라갔다. 15:58, 해발 388m(GPS로 추정)의 조타봉에 도착하여 신 형을 기다렸다. 신 형이 수첩을 손에 들고 한참 후에 나타난다. 신 형이 도착하여 같이 내리막길을 가는데 길은 수직으로 50m 가량 내려갔다가 상승하여 조금 올라가니 이정목이 있는 백바위 삼거리이다. 여기서 오봉산 정상까지는 2.4km, 칼바위까지는 4.2km라고 쓰여 있다. 오봉산 뒤로도 한참을 더 가야 칼바위이고 거기서 목적지인 득량남초등학교까지 한참을 더 가야 한다.(사후에 알아보니 3km 이상 가야했다.)
백바위에서 조금 전진하니 삼거리가 나왔다. 호 형이 앞장 서고 내가 뒤따르는데 절벽 위 전망대에서길이 끝나 다시 돌아와 바위를 내려가니 다시 두 갈래길이 나오기에 오봉산 방향이 좌측인지라 좌측길로 한참 가는데 뒤에서 신 형이 잘 못 되었으니 우측길로 가야 한다고 해서 되돌아섰다. 그래서 우측길로 다시 가는데 신 형이 다시 부른다. 아까 길이 맞는 것 같다고 한다. 지도를 보아도 이렇게 틀리는 경우가 있다. 다시 되돌아서서 삼거리로 가서 좌측길로 들어서니 차차 길이 좋아지고 방향도 오봉산을 향하게 된다. 산속에 있으니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잇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내 걸음이 빨라져거 앞으로 빨리 걸었더니 혼자 숲속에 버려진 기분이 들며 잠깐 오싹해진다. 알지도 못 할 두려움이자 근거가 없는 불안이다. 한참 배낭을 내려놓고 물도 마시면서 기다리니 호 형이 도착했다. 지도로 보니 오봉산이 몇 백m 안 남았다고 이야기하며 경사길을 올라갔다. 신 형은 아직 안 보이나 지도를 보며 오니까 잘 찾아 오리라고 믿고 둘이서 전진했다. 길은 지그재그로 생겨서 좌우로 굽어지며 올라가는데 경사에 가려서 안 보이던 정상의 돌탑이 언덕을 올라가자 눈에 뜨였다. 정상 올라가는 계단 앞도 좋은 전망처이라 멈춰섰다. 서쪽을 보니 해가 넘어가는 중이었다. 호형은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한참 떨어진 거리애서 장엄한 산줄기가 좌우로 펼쳐져 있다. 한참 후 신형이 나타났다.
17:28, 해발 320m의 오봉산 정상에 도착했다. 용추폭포에서 올라왔다는 사람과 나, 둘이서 주변에 팽개쳐 있던 정상석을 굴려다가 제자리에 세워 놓았다.(정상에 가니 정상석이 제자리에서 5-6m 옆에 넘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봉산은 봉우리가 다섯이라서 오봉산이라 명명한 듯한데 다른 곳에도 있는 조금은 흔한 이름이다. 산줄기에 솟아있는 봉우리를 대충 세어 봐도 7개는 되는데 왜 5봉인지 궁금하고 지도표기의 오봉산이 가장 높은 봉우리도 아니다.(아까 지나온 조타봉이 제일봉으로 보인다.)
드디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배낭 속을 뒤져 헤드랜턴을 꺼내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신 형의 움직임은 점점 더 느려지는 것 같아 걱정인데 본인은 괜찮다고 한다. 오봉산을 넘어서면 다음의 난관(오르막길)은 칼바위이다. 우선 길은 수직으로 100m 가량 내려가게 되어 있다. 거기서 다시 오르막길인데 110m 가량 수직으로 올라가야 봉우리를 넘게 된다. 바람이 불고 춥다. 남도라서 따뜻할 줄로 생각했으나 예상 외로 쌀쌀한 바람이 부니 후드를 뒤집어 썼다. 칼바위로 가는 길은 험한 듯한데 9부 능선 정도로 우회로 표시가 있어 그 길을 따라서 올라갔다. 추위 때문에 카메라 배터리가 일찍 끝났다. 사진촬영은 접어야 한다.(이 후 휴대폰 사진 2매 촬영) 캄캄한 속에서 우측 아래로 검은 바다가 배경으로 깔리고 마을과 도시의 불빛이 어둠 위로 떠 있다. 문명세계와 떨어져서 있는 기묘한 감정을 느껴 본다. 바람 소리가 거세다. 18:45, 좌로 칼바위 0.3km, 직진하면 득량남초등학교 3.8km 라고 쓰여진 이정목에 도착하였다. 이제 수직으로 50m 가량 올라가서 봉우리를 넘으면 큰 난관은 없을 곳이다.
그런데 이 때(18:56) 이변이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하게 일생일대의 큰 알바(길 잃고 헤매기)를 하게 된 것이다. 정상을 수직 높이로 20m 가량 남겨 놓은 지점에서 좌측으로 꺾이는 길이 나타났다. 직진해야 하는데 좌측 길이 맞는 것 같아 의심하지 않고 따라가기 시작하였는데 누군가 흰 천을 길게 잘라서 곳곳의 나무에 매어놓아 이 길이 마치 맞는 길처럼 보였다. 먼저 내려간 신교장에게서 신 형에게 전화가 몇 번 걸려 와서 길을 안내받았는데 이 길이 안내받은 길인 것 같아 계속해서 200m 가량을 내려갔는데 흰 헝겊 매어놓은 것도 사라지고 갑자기 길이 없어져 버렸다. 전화로 상의하니 계속 내려가면 해평저수지가 나오니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직진하는 편이 나으리라는 조언이다. 그렇게 결정하고 밀림을 헤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이 만만치가 않다. 나무들이 얽혀있고 가시덤불도 가로막는다. 낮에 개척해 나가는 것보다 훨씬 힘이 들어 전진이 어려워 겨우 겨우 힘을 써서 100m 쯤 더 내려갔는데 갑자기 절벽이 나타났다. 위기이다. 여기론 하산이 불가능하다.
낮이라면 절벽의 험한 곳을 피해서 내려가는 곳을 찾을 수 있겠지만 캄캄한 밤에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시간은 이미 19시 37분이다. 눈물을 머금고 돌아가기로 한다. 위기에 처해 내 GPS(산길샘)를 이용하기 시작했다.(여태까지는 신 형의 지휘를 받고 편하게 따라 왔었다.) 아까 잘 못 왔던 경로를 그대로 따라서 삼거리로 원점회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만약 길을 못 찾으면 밤새 왔다 갔다 하며 헤맬 수도 있다고 신 형이 걱정을 한다.(그런 경험이 있다고 한다.) 다행히 내 GPS에 지금까지 밟은 경로가 기록되어 있어 이를 의지하여 어긋난 지점까지 올라가면 될 것 같았다. 앞을 가로막는 나무와 덤불을 피해가며 천천히 경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와 호 형은 그럭저럭 길을 찾아 가는데 신 형은 뒤에서 처지고 있어 조금 다른 길로 오는 듯했다. 몇 번을 멈춰 서서 기다렸다가 전진하곤 했다. 드디어 아까 보았던 흰 천이 매여 있는 마지막 나무에 도착했다. 둘이는 멈춰 서서 뒤쳐진 신 형을 계속 불렀다. 드디어 신형이 나타났는데, 30m 쯤 앞까지 오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돌아서 간다. 우리와 조금 다른 경로로 오느라 시간이 지체됐는데 스틱(한 짝만 사용)을 잃어버려서 찾아와야겠다고 한다. 다행히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흰 헝겊이 매어있는 곳 부터는 길이 있어 힘이 들지 않았다. 드디어 원래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돌아왔다.(20:44) 약 1시간 50분의 귀중한 시간이 날아간 셈이다. 그 동안 신 교장에게서 전화가 여러 번 와서 우리를 걱정해 주었는데, 아무래도 계획보다 우리 도착이 늦어지니 먼저 귀가하라고 얘기했는데, 본인은 듣지 않는 듯했다. 원래 길이 어긋났던 삼거리에 돌아와서 좌측으로 제대로 가는 길을 찾아서 진행했다. 삼거리에서 조금 올라가니 정상(GPS로 353m)이 나오고 길은 다시 아래로 향한다. 한참을 가다보니 다시 혼자다. 갑자기 캄캄한 주위에 으스스한 한기가 돌며 공포감이 느껴졌다. 멈춰 서서 일행을 기다렸다. 이제부터 작전을 바꾸었다. 속도가 느린 신 형을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가기로 한다. 먼저 내달릴 필요가 없으니 편하지만 빨리 못 가니 답답한 점도 있다. 그 대신 3인이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멀리서 불빛이 다가오더니 앞에 선다.(21시경) 신 교장이 우리가 걱정이 되어 손수 길을 거슬러서 올라온 것이다. 우리가 알바까지 하였다니 본인 홀로 그냥 댁으로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리라.(고마운 일이다.) 얼마 안 남았으니 힘을 내라고 하며 앞장을 서서 힘차게 걷는데 신 형은 계속 느리게 걷는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터이니 걱정 놓으라고 한다. 그렇다. 계속 걸으면 결국 끝나겠지. 신 교장은 멀리서 불빛을 달고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며 앞으로 나간다. 우리는 느리게 뒤를 따랐다. 2-300m 우측 아래에는 바다가 있는데 시커멓다. 대신 마을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다. 바람은 아직 소릴 내며 불어 오는데 제법 쌀쌀하다.
고개를 두어 개 넘고 경사진 길을 내려가서 다시 고개 하나를 넘으니 저 앞에서 안 보였던 신 교장이 기다리고 있다. 삼거리에 도착하였는데 직진하면 원래 우리의 목적지이자 오봉단맥의 끝인 득량남초교가 나오지만 산을 두 개 더 넘어야 하고 길도 몇 100m 멀다고 한다. 대신 좌측으로 꺾어져서 해평리로 내려가자고 한다. 그 길이 훨씬 쉽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분 말대로 따르기로 하고 뒤를 따라서 가파른 경사길을 내려가는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차를 임도까지 몰고 와서 대기하려고 먼저 내려갔다.) 호 형이 다리를 접질렀다고 한다. 다리를 달래면서 계속 내려가는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다.(결국 호 형과 나는 다음 날 산행을 포기하게 된다.)
급전직하로 내리쏟던 길은 완만하게 경사가 약해지더니 폭이 넓어지며 풀로 덮인 임도가 된다. 이제 편하게 걸을 수 있다. 시련이 끝나는 순간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길옆에 빽빽하게 들어차서 무성하게 자란 대나무숲을 감상할 여유까지 생길 정도이다.(신 형은 옛날에 그런 곳을 뚫고 산행한 적이 있다고 이야기해 준다.) 한참을 가니 옛날 이 근처에서 구들장을 채취했던 사실을 기념하는 돌비석도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불을 켠 차가 한 대 나타났다. 무언가 했더니 신교장이 먼저 내려가서 우릴 위해 몰고 온 차였다. 주차장까지 걷지 않도록 하는 배려인 셈인데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드디어 지루한 걷기가 끝났다. 머리도 아프고 허리 어깨 다리 모두 아프다. 시간은 이미 11시이다. 오늘 15시간 이상 산행을 했다. 신 형은 느긋하다. 원래 이렇게 산행을 한다고 한다. 나는 다시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존경심이 절로 솟았다. 우리는 승용차를 타고 보성읍으로 갔다.
모텔에 먼저 들러서 3인이 잘 방(60,000원)을 하나 정해 놓고 식사라도 할 곳을 찾는데 늦은 시각인데도 마침 문을 연 곳이 있다. 실내포차 맥주집이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불행히도 신 교장은 차를 운전해야 하니 못 마신다. 안주를 몇 개 시켜 놓고 세 사람은 물색없이 신나게 마셨다. 이런 저런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신 형이 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더 시킨 마지막 소주 한 병까지 다 나누어 마시고 정신을 차려보니 날이 넘어갔다. 신 교장 차로 모텔로 돌아와서 그와 작별했다. 신 교장이 산행에 앞장을 서서 길을 열고 차로 편리하게 이동시켜 주어서 하루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내일 산행이 문제다. 호 형은 다리를 다쳐 못 간다고 이미 선언했었다. 나도 지치고 다리가 아파 포기하기로 했다. 신 형에게 도와주지 못 해 미안하다고 하니 괜찮다고 한다. 늘 혼자 산행했는데 어제는 3인이나 도와주어서 오히려 고마웠다고 대인답게 말한다. 혹시 본인도 우리처럼 고생했기에 못 가고 상경하는 것 아닌가 짐작한 내가 바보였다. 신 형의 의지는 확고했다. 아침이 되면 계획대로 보성 차밭에서 시작하여 다음 단맥을 답사하겠단다. 그렇다. 그런 의지가 있으니 일천 개가 넘는 단맥을 누비고 다니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게 남도의 단맥을 답사하는 여행은 끝났다. 호 형과 나는 아침 8시 반 우등버스로 보성읍 터미널을 떠나 서울을 향했다. 오봉단맥 다녀온지도 이제 아흐레가 지났다. 힘들었던 추억들이 달콤한 추억으로 바뀌는 중이다. 기록을 해 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 겨우 불완전하게나마 끝을 맺게 되어 기쁘다.(2024.01.19.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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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두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가시 잡목 넝쿨 등이 어우러진 산줄기지만
특별히 우리를 위해 반은 산책로 같은 산줄기가 기다려주어
임도도 없고 전체가 다 그렇다면 3일은 가야 끝날것 같은 산줄기였는데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입니다
이제는 슬 슬 추억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입니다
좋은 추억입니다. 하루 빨리 산줄기 답사 마치시고 정리하심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