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미 5공단에 편입, 주민들 이산 - 칠곡 문학·천주교 성지 등 재조명 - 조선시대 여관 '독명원' 오리무중 - 도리사, 불교 신라 전래담 속삭여
대구 팔달교를 건너자 작원(鵲院· 까치원)마을이다. 경남 삼랑진의 작원마을과 이름이 똑 같다. 금호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강가의 갈대잎이 흔들릴 때 비파소리가 난다'(琴湖)는 강이다. 우리 선인들은 강 이름 하나라도 그냥 짓지 않았다. 넉살좋은 팔달진 뱃사공이 유기장수를 만나 불렀다는 장타령이 갈대잎 비파소리에 실려올 것만 같다. '결세 좋다 안성유기, 도듬질 좋다 김천방짜. 장맛 좋다 놋탕기, 살결 좋다 놋요강….' 요강에 살결을 갖다댄 건 뱃사공의 넉살일 테다.
■길로 흥한 칠곡
경북 의성군 단밀면 낙동강 낙단보 인근의 마애불.
대구 북구 팔거천을 지나자 칠곡 땅이다. 1981년 칠곡읍 일원이 대구시에 편입된 후 한동안 칠곡과 왜관이 헷갈렸지만, 요즘 칠곡군은 전국 지자체 중 드물게 인구가 느는 지역이다.
"오늘날 칠곡은 물류, 전쟁, 문학, 성지 4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어요. 사통팔달의 물류 요충지에다, 6·25때 나라를 구한 최후의 보루였고, 왜관의 구상문학관을 빼놓을 수 없죠. 게다가 천주교 유적지가 유난히 많아요. 신나무골성지, 한티순교성지, 왜관의 가실성당과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 등은 한국의 대표적 천주교 성지입니다."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만난 문화관광해설사 여환숙(63) 씨의 명쾌한 해설이다. 구상문학관 관장을 지낸 여 씨는 요즘 칠곡은 인문학의 도시로 변신 중이라고도 했다. 화가 이중섭, 서양미술의 개척자 이쾌대, 명창 박귀희 등 거장들이 칠곡과 인연이 깊고, 이들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는 것. 칠곡군은 옛 천주교인들이 피의 박해를 피해 수없이 오갔던 신나무골~한티성지 구간 21.5㎞를 성지순례길로 조성 중이다.
■다부원에서
영남대로는 칠곡군 동부의 동명면과 가산면을 경유해 다부원(多富院)으로 접어든다. 이 길은 국도 5호선과 거의 겹친다. 동명면 사무소 인근에 독명원(현 동명마을)이 있었다고 하나 자취가 오리무중이다. 조선시대 숙박시설이 있던 독명원(犢鳴院)은 일제 때 송아지(犢)를 '팔아먹고' 동명(東明)으로 고쳐졌다. 독명은 길손과 함께 짐을 싣고 한양을 오가던 소가 날이 저물어 밤이 되고 젖마저 붓자 집에 떼놓고 온 송아지(犢)를 생각해서 울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 소의 자식사랑이 짠한 향수를 자아낸다.
소야고개를 넘자 가산면 다부원이다. 다부원은 '부자되게 해 달라'는 뜻과 '많은 길손 덕에 부자들이 많이 생겨난 원마을'이란 뜻이 중첩돼 있다고 한다. 다부원이 유명해진 건 한국전쟁 때문이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신현종 과장은 "한국전쟁 당시 55일 간에 걸친 다부동 전투에서 피아 2만7500여 명의 사상자가 났지만, 희생을 통해 지켜냈기에 오늘의 한국이 존재한다"면서 "다른 곳에선 '호국'이란 말을 쓰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구국'이란 말을 쓴다"고 설명했다. 신 과장은 "기념관 방문자가 연간 70만여 명, 이중 외국인이 10만 명에 달한다"면서 "이 자리가 영남대로 상의 교통요충지란 사실도 중요하다"고 했다.
■사라진 서울나들 마을
다부원을 지난 길은 중앙고속도로 가산IC 입구로 난 굴다리를 지난 뒤 국도 25호선 밑을 통과해 조선시대 상림역이 있던 구미시 장천면으로 들어선다. 지금의 상림리 마을회관이 역터라고 하는데 실감이 안 난다.
구미 낙동강의 동쪽, 장천~산동~해평면 일원에는 서울 나드리길이 유명했다. 지난 2001년 구미문화원이 영남대로 옛길을 찾아 산동면 신동2리의 서울나들 마을 등 거리 곳곳에 유래비 2개, 표석 17개를 세웠다. 선산골프장 등으로 인해 옛길이 부분적으로 끊기긴 했지만, 산업도시 구미를 다르게 보게 만든 문화자산이었다.
그런데 지난 13일 찾아본 서울 나드리길은 온통 공사판이었다. 산동면 해평면 일대 292만 평에 구미 5공단 공사가 시작되면서 서울나들 마을과 옛길 대부분이 공단 부지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공사 현장에는 미처 '이주하지 못한' 유래비와 표석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묵상에 잠겨 있었다. 산동면 사무소의 한 직원은 "서울나들 마을의 35세대 주민 70여 명은 지난 연말께 보상을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전했다. 구미문화원 홍인수 사무국장은 "영남대로 재조명 차원에서 유래비와 표석을 세웠으나 그 후 보존조치가 안 됐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도리사와 모례마을
멍한 기분으로 전쟁터같은 서울나드리길을 빠져나와 옛 25번 국도를 따라 해평·상주 쪽으로 올라간다. 낙동강을 따라 별도의 4차선 자동차 도로가 뚫리는 바람에 옛 국도는 '버림받은' 신세지만, 차가 거의 없어 자전거를 타거나 걷기에는 한결 좋아졌다.
해평 송곡교 삼거리에서 도리사(桃李寺) 가는 길을 만난다. 도리사는 아도화상이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 아도화상도 아마 옛 영남대로를 따라 이곳으로 내려왔을 것이다. 길은 옛 국도 양쪽에 올망졸망 분포한 낙산고분군(사적 제336호)과 일선리 문화재단지를 거쳐 도개면 도개리(道開里) 모례(毛禮)마을로 이어진다.
도개리 모례마을은 최상급 불교 스토리텔링을 간직한 유적지다. 때는 5세기 중반 신라 제19대 눌지왕 대. 고구려에서 묵호자라는 스님이 신라에 잠입, 일선군의 모례의 집을 찾는다. 큰 부자였던 모례는 묵호자를 3년 동안 숨겨주면서 불교를 전하게 한다. 후에 아도화상이 왔을 때는 모례의 시주로 도리사가 세워진다.
구미시는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아도화상과 모례의 전설을 토대로 모례마을을 신라불교 초전마을로 정비했다. 이곳에 모례의 집터와 옛 우물인 '모례가정(毛禮家井)'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우물정(井)' 자 형태의 우물 속엔 여전히 물이 찰랑찰랑 했다. 순간 1500여년의 시공이 명멸한다.
도개리를 빠져나온 옛길은 경북 의성군 단밀면 낙정리에서 낙동나루를 만난다. 낙동강에 낙단교가 걸려 있고, 바로 위쪽에 거대한 낙단보가 들어서 있다. 낙단보 위쪽 50m 지점에는 상처를 감춘 마애불이 자애롭게 웃고 있다. 낙단보 부대시설 공사 중 난데없이 이마 부위가 천공돼 엄청난 논란을 야기한 마애불이다. 낙동나루의 옆의 관수루(觀水樓)가 강변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 구미 의우총·의구총의 사연
- 위험에 처한 주인 구하려 호랑이와 맞서 싸운 소 - 몸에 물 묻혀와 불 끈 개
구미시 해평면의 의구총.
지금부터 300여년 전 경북 선산군(현 구미시) 해평면 산양리에 우리(郵吏·집배원) 일을 하던 노성원이라는 사람이 황구 한마리를 길렀다. 하루는 주인이 이웃마을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귀가하던 중 월파정(지금의 해평면 일선리) 북쪽 길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때 길섶에서 불이 나 주인이 위험하게 되자, 이를 본 개가 300m쯤 떨어진 낙동강으로 달려가 온몸에 물을 묻혀와 주인의 주위를 뒹굴며 불을 끄고 자신은 탈진해 죽었다. 주인이 잠에서 깨어나 개가 자신을 구하고 죽은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해 관(棺)을 갖추어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이 무덤이 의구총(義狗塚)이다. 선산 의열도(義烈圖) 의구전(義狗傳)에 전해지는 내용이며, 경북도 민속자료 제105호다. 1962년 무덤이 도로 부지에 편입되고 마을 뒷산에 옮겨져 있던 것을 1994년 구미시가 '개띠 해'를 맞아 낙산리 철장마을 입구에 새로 단장했다. 한국애견협회는 2002년 봄부터 충견의 넋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이곳에서 '의구총 애견제전'을 열고 있다.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에는 의우총(義牛塚)도 있다. 이 마을에 사는 김기년이라는 농부가 암소와 함께 밭을 갈고 있던 중 호랑이가 덤벼들었다. 암소가 주인을 대신해 호랑이와 맞서 싸웠다. 다행히 주인은 목숨을 구했으나 상처가 덧나고 말았다. 죽기 전 그는 소를 팔지 말고 수명이 다해 죽으면 자기 무덤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주인이 죽자 그 소도 먹이를 먹지 않고 뒤따라 죽었다. 1685년 선산 부사가 화공에게 의우도(義牛圖)를 그리게 하고, 소를 고이 묻어 주었다.
짝을 이룬 듯한 의우총과 의구총은 구미 영남대로 구간의 빼놓을 수 없는 얘깃거리다. 비슷한 전설은 여러 지방에서 들을 수 있으나, 구미처럼 봉분이 있는 곳은 흔치 않다. 개와 소가 행한 의로운 일이 사람의 행동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